[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생명의 망으로 연결된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라는 부르심을 기억하라는 초대의 날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해 이 시대의 예언자적 행동을 하도록 요구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으로 그 가운데 특별히 ‘부정과 정결’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대의 풍경이 선명하게 담긴 이 논쟁의 발단은,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다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전통을 깨뜨린 제자들의 행동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날을 세우며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자신들이 삶에서 철저하게 견제해 온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비위생적이어서가 아니라 비전통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본뜻이 상실되고 맹목적으로 허상의 성채를 쌓는 모양새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숨겨진 위선과 오류를 가감 없이 드러내십니다. 먼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시어 ‘입술’의 섬김과 ‘마음’의 섬김을 대조하시며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지적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일 뿐이라고 하시며 전통의 권위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 전통의 근원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7,8)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의 전통’에 따라 ‘코르반’이라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대신 하느님께 드렸다’라고 외치지만, 정작 십계명의 ‘부모공경’을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며 주객전도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람이 정해 놓은 것에 집착하여 더 중요한 율법은 오히려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질책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의 전통’을 율법보다 앞세우는 그들의 위선이 밑바닥까지 들추어지는 것 같아 속 시원함을 느낍니다. 논쟁의 구체적 쟁점은 음식을 먹기 전 ‘손 씻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는 단순히 손을 씻는 것보다는 훨씬 원천적이고 광범위합니다. 도덕적 정결함의 근본을 말씀하시며 더 광범위한 주제로 이야기를 전환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7,15) 예수님의 이 논리에 따르면 손을 깨끗이 씻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정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 부정하게 만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간단명료한 답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아가 ‘음식이 모두 깨끗하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손을 씻지 않은 행위가 음식에 그 어떤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아울러 음식이 모두 깨끗하기에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나뉜 오래된 구분이 사라지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 속에서 나오는’ 죄의 요소를 나열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이 비록 날카롭게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성경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단수형,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복수형으로 표현합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많고 악함을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열두 개의 ‘악함’은 앞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악의는 자주 반복될 수 있는 행위를 나타내기에 복수형을 쓰고, 뒤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은 사람의 기질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단수형으로 표현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겉’이나 형식이 아니라 모든 악행의 근원이 사람의 내면임을 명토 박아 말씀하시며,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면이 그렇지 못할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외적 행위에 집착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들춰내시며 그들의 헛된 자부심을 벗겨냄으로써 분리와 배척의 상징이었던 ‘정결’과 ‘거룩’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 재정립하십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돌보라’는 주님의 당부를 우리 삶의 공간에 옮겨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은 어떠한가요? 이 성찰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경건함’을 한 겹 한 겹 아프게 벗겨내는 과정은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9-01

[말씀묵상] 연중 제21주일

요한복음 6장의 말미를 마주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합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 모두가 이 이야기를 전한다고 해서, 그 태도까지 같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특히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 복음서는 빵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매조짓습니다만,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 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고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관점은 다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 긴 ‘생명의 빵’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반응부터 전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긴 이야기에 대한 ‘한줄평’ 혹은 ‘댓글’ 정도가 되겠지요. 새 번역 성경이 ‘거북함’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스클레로스’(σκληρός)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담은 그 단어를 조금씩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공동번역) “이 말씀은 모질구나. 누가 차마 그것을 귀담아들을 수 있겠는가?”(200주년 신약성서) 세 가지 번역은 어떤 부정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닮아있습니다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거북하다’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어렵다’는 말에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강하고, ‘모질다’는 낱말에서는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듣고 있다’, ‘알아듣다’, ‘귀담아듣다’라는 표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번역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먼저는 제 그리스어 실력이 짧은 탓입니다만, 무엇보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의 생각을 한 문장에 담아내기는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스클레로스’라는 낱말을 저마다 조금씩 달랐을 부정적 감정의 그릇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 낱말을 그렇게 사용하면, 저 번역들은 읽는 사람들의 여러 마음도 담아낼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빵’ 이야기를 돌아다보면, 솔직히 불편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는 예수님의 뜻과 사람들의 욕구가 끝없이 어긋나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기어코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굳이 들추고 헤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그래도 사람들은 묻기도 하고 청하기도 하는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33.35.51절)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칙 안에서 의문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날 그곳의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 문장에 기대어 대화에 뛰어든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질문을 할테니까요. 사람들은 떠나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물끄러미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새 번역, 공동번역) 그런데 누군가는 이 말을 다르게 옮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까?”(200주년 신약성서) ‘귀에 거슬리다’와 ‘걸려 넘어지다’는 번역의 원문은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랍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대개 ‘죄를 짓다’(짓게 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스칸달론’입니다. 이 낱말에는 ‘장애물’(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같은)의 의미가 있습니다. 추문을 뜻하는 ‘스캔들’이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용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걸음이 멈추듯이, 말씀을 듣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에 마음이 멈추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교양인들과 어떤 교부는 그런 순간을 ‘스칸달론’이라고 표현했다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클레로스’에 표현한 사람들의 마음은 ‘스칸달리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빵을 먹은 사람은 오천 명이 넘었는데, 이제 남은 사람은 열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열두 제자들은 남았습니다. 베드로는 질문을 멈추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시작하여 생명의 빵 이야기를 따라 듣는 동안, 어느 땐가 우리의 발걸음은 멈추고, 때로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계속 따라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걸음은 다시 멈추고, 그만큼 자주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질 겁니다. 하지만 이 걸음을 포기한다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며 어떤 힘을 낼지 영영 알 수 없겠지요. 열두 제자를 향하던 질문이 우리에게도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8-25

[말씀묵상] 연중 제20주일

3주 동안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빵’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빵’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의미인지,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지를 묵상하게 이끕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지난 주 복음은 이 말씀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이 이번 주 복음의 첫 문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걸까요? ‘살아 있는’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봅니다. 2019년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가 발표되었습니다. 청년을 주제로 한 제15차 세계주교시노드의 후속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표한 사목적 권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 전에 사셨지만, 교회는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스스로를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하신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즉, 예수님이 생물체로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살다 가신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죽어야만 만날 수 있는 미래의 분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인생 여정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전기 혹은 역사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가 만나는 현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묵상합니다. 다음으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는 문장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특히 ‘살과 피’라는 단어가 다가옵니다. 아마 대부분 신자는 ‘살과 피’를 통해 성찬례를 떠올릴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성변화(聖變化)’된 ‘살과 피’를 모십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모신다는 것이 내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충만하게 주어지는 은총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관습적으로 혹은 별 의식 없이 전례에 참여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살)은 예수님이 살아온 인생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몸을 갖고 사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유한하듯 몸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그 유한한 인생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에 맞게 살아가신 인생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이렇듯 유한한 인생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 삶을 따라가는 사람은 유한한 인생을 통해 영원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당신의 피를 나누신다고 만찬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동료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삶이 죄에 빠진 삶입니다. 그런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삶이 예수님의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사랑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그런 당신의 몸(살)과 피를 나누신다는 것은 우리를 예수께서 걸으신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나만을 위한 인생, 하느님 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세상 속에서 동료들과 사랑을 나누는 인생으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를 다시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며 살아보려고 애쓰고,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그분이 믿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내 안에 머무르고 내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느님도 ‘살아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내 삶과는 무관하게 저 멀리 높은 곳에서 관찰하는 분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사랑을 나누시는 분이시기에 내 삶과 늘 함께하십니다. 그런 분이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내 삶의 근본적인 힘으로 삼는 것을 ‘말미암아’ 산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에 그런 예수님의 인생을 내 삶의 근본적인 힘으로 삼는 것도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오늘 1·2독서는 모두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세상의 논리에 따라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은 사라질 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먹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인생과 그분이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만을 능력이자 지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늘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우리의 욕망과 기대와는 동떨어진 대답만을 하실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믿을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먹고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은 묻고 있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8-18

[말씀묵상] 연중 제19주일

요한복음 6장이 전하는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담화는 지난 주일에 이어서 이번 주일에도 소개됩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면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힘쓰는 군중을 상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만나를 받아먹은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만나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요한 6,31-33 참조) 이번 주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이 등장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소개하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는데(요한 6,41),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유다인들의 불만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 곧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아 행동하고 말하는 ‘파견받은 자’에 대해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불만을 늘어놓는 모습에서 우리는 구약성경 속 사건들, 특별히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실 수 없어서 불평하였고(탈출 15,24),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때를 그리워하며 현재 처한 상황에 불만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탈출 16,2-3)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가르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이 의심을 버리고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요한 6,47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표현 양식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 말씀은 앞서 6장 35절에서 언급되었는데, 여기에서 다시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다”(그리스어: ‘에고 에이미’)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신원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 양식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빵’ 외에도 ‘세상의 빛’(요한 8,12; 9,5), ‘문’(요한 10,7), ‘착한 목자’(요한 10,11.14), ‘부활과 생명’(요한 11,25), ‘길’(요한 14,6), ‘참 포도나무’(요한 15,1)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나는 ∽이다”라는 표현 양식으로 예수님의 본질 자체를 규명하기보다 예수님과 인간 사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빵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지며,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믿음’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다인들의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아주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요한 6,48)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와 ‘생명의 빵’을 대조시킴으로써 ‘참된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환기하고, 더불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을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이 빵을 먹을 때 영원히 살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주실 빵은 예수님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의 살”(요한 6,51)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맞이할 죽음을 암시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누군가의 살을 먹는다”라는 양식이 적대적 행위를 표현하려고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면(시편 27,2; 즈카 11,9 참조), 요한복음에서는 부정적 의미를 지닌 표현 양식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 지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빵을 주시는 분, 곧 생명의 주관자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제1독서에서 확인됩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왕국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로서(BC 875-853) 아합 임금에 맞서 이교신 숭배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1열왕 17-19장, 2열왕 1장 참조) 그는 카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이고 승리의 결과로 그들을 모두 죽였습니다.(1열왕 18,20-40 참조). 아합 임금의 아내 이제벨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격노하였고, 이에 엘리야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제벨의 칼을 피해 시나이 광야(유다의 브에르세바)로 피합니다. 죽음의 위험에 처한 엘리야는 너무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나머지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 19,4)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목숨을 거두시는 대신에 천사를 보내어 빵과 물로 그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으로 소개하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계시의 반복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오해 혹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시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보여준 불평과 불만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반면교사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으며, 이 친교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8-11

[말씀묵상]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안일해지는 어느 날이면, 일찍 일어나 장터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새벽 어스름을 깨고 전을 펴는 가운데, 끓어오르는 솥은 하얀 김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장터의 일상을 마음에 담다 보면 발걸음은 어물전에 이르고, 짠내가 덮쳐와 안일한 정신의 따귀를 칩니다. 제가 맡았던 어물전의 짠내는 생명이 넘치는 바다 냄새인가요, 죽음을 맞아 살이 썩어가는 고린내인가요. 물속을 춤추던 물고기들은 이제 나란히 누워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대답합니다. 생선이 죽어야 산 사람이 밥을 먹지 않느냐고,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고. 어느 서생이 말했습니다. 삶이란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 것이라고.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고요한 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렇게 밥을 먹고 살고 있을 겁니다.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장터에 다녀옵니다. 돌아온 자리에서 성서를 폅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마주합니다. 먹고 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요한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다른 세 복음서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네 복음서는 저마다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겠지만, 복음서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5000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읽는 이들에게, 이야기의 쟁점은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1절)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다.”(12절) 두 구절은 막 바로 이어집니다. 복음사가는 그 과정에 대해 조금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빵을 나누고 남은 것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만 이야기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행간을 줄여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합니다. 고대에는 지금처럼 숙박시설이나 요식업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여정을 떠날 때 간단한 식량을 챙기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을 겁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서면서, 긴 여정을 대비해서 먹을 것을 몰래 챙겨두고 있었겠지요. 그것은 생존과 직결된 사안이므로, 얼마만큼 식량을 챙겼는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을 것이고요. 그러니까 군중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아이 하나가 자기 먹을 것을 꺼냈습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요. 지금도 보리는 환영받지 못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보리빵은 가난한 이들의 음식이었습니다.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옵살리온’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는 상품 가치가 없어서, 어부들이 내다 버린 작은 물고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 가난한 아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가진 전부를 예수님께 내어놓았던 거지요.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가난한 아이 하나가 자기 가진 것을 내어놓으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부끄러운 마음에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사람들이 내놓은 음식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이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살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단시간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은, 빵이 많아졌다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이런 따뜻한 해석을 세차게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표적인 기적을 인간적인 문제로 끌어내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일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것은 하느님 아들의 절대적인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그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두 구절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할 뿐, 행간의 진실은 여전히 멀고 아득합니다. “빵이 어떻게 많아지는가?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혹은 “남은 빵 열두 광주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던진 이런 질문으로는 답을 찾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복음서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빵의 늘어남이나, 그 숫자가 아닐 겁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책입니다. 복음사가가 애써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유는 이 이야기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내고자 함이었겠지요. 다시 복음서를 마주합니다. 나누어 먹은 빵과 남은 빵을 살피다가, 잊어먹은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예수님은 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건네셨을까요. 한 끼 굶는다고 사람들이 죽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하셨던 분이 아니시던가요. 빵과 물고기를 통해, 예수님이 건네주시고자 한 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요. ‘먹고 살기 위해 지옥을 헤매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전해주고자 하셨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밥을 버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밥을 벌기 위해 땀을 흘리고, 그 땀 내음은 바다 냄새와 고린내 사이 어딘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성당을 찾은 분들에게,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풀이 많은 호숫가에 자리 잡게 하시고, 보잘것없은 음식이지만 저마다 원하는 대로 먹게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에게 가만히 앉아 쉬시라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 풍요로움을 누리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글 _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7-28

[말씀묵상] 연중 제18주일

오늘 복음은 ‘빵’이라는 주제로 대화가 펼쳐집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식이나 한 끼 대용으로서의 빵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이해되었습니다. 성경에 500회 이상이나 등장하는 빵은 ‘음식’, ‘양식’, ‘끼니’를 두루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도 빵은 ‘일용할 양식’으로 치환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빵이 생명 충족을 위한 주요한 공급원임을 생각할 때 오늘 복음 말씀은 ‘양식’에 대한 이야기이자 동시에 ‘생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애타게 찾는 군중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군중이 서둘러 배를 타고 이곳저곳 그분이 계시리라 짐작되는 곳으로 다급히 찾아가는 모습과 발 빠른 대응에서 그들의 초조함을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애타게 찾는 행위와 동기를 부정적으로 인지하셨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찾음이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며 빵에 마음이 팔린 불순한 동기를 들추시기 때문입니다. 5000명을 먹이신 기적 속에 깃든 표징을 깨닫지 못했기에 예수님의 참된 신원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그분이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찾음은 단지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며 육체적 만족에 빠진 이들에게 일침을 날리신 것입니다. 군중이 ‘빵의 기적’에서 드러난 표징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생명의 빵’이 아니라 ‘죽음의 빵’을 원하고 있음을 꼬집는 말씀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6,26-27). 주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반복하시며 시작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중요한 가르침이 뒤따릅니다. 이 말씀에서 군중들의 태도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했던 행위임을 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원의가 생명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들이 만족할 수 없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언제든 돌아설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준엄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빵이 없는데도 그래도 나를 믿고 따를 것이냐?”하고요.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을 구하려 애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군중은 묻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6,28) 그들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적인 업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대가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성취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6,29) 예수님의 이 말씀에 군중은 믿음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눈도장으로 확인할 표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기적처럼, 그와 같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표징을 보여서 믿게 하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생명의 빵과 만나를 비교하여 깨우쳐 주십니다. 만나와 생명의 빵 모두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늘의 빵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고 하시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빵’에 대하여 알려주십니다. 참된 빵은 하느님의 빵으로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빵과는 달리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십니다. 군중들이 그 빵을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존재를 밝히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에고 에이미’(ἐγὼ εἰμί)는 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설명되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이며 너희는 가지다’, 또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등의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에고 에이미’의 선언 후에는 언제나 관계성과 응답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는 주님의 이 말씀으로 하느님의 빵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임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빵은 양식이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빵은 희생의 상징입니다. 희생으로 빚어졌기에 이 빵은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믿음의 대상과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신을 식탁에 올려놓을 수 있는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유일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제대라는 식탁에 올리는 것을 허락하셨고 생명의 빵이 되어 우리를 살게 하는 양식이 되십니다. 생명의 빵과 죽음의 빵,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려보면 ‘생명의 빵’과 ‘썩어 없어질 빵’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전체는 여물을 되새김질하는 황소처럼 느릿느릿한 호흡으로 엇박자를 타며 ‘생명의 빵’과 ‘죽음의 빵’을 대조하는 특유한 전개로 흥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언제나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의 빵을 영적 양식으로 삼는 우리이기에 우리가 머무는 자리에서도 생명의 기적이 계속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7-28

[말씀묵상] 연중 16주일

오늘 복음은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이야기는 우리에게 고유한 묵상 주제를 제공합니다. 복음의 앞부분은 지난 주일 들었던 복음(마르 6,7~13)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고 파견되었던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여러 고장을 돌며 회개하라고 선포했으며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의 병을 고쳐주고 돌아왔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늘 함께했던 선생님 없이 제자끼리 둘씩 다니면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때로는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제자들 간에 갈등이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해서 회개를 외치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떨 때는 마귀들의 저항이 강해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가는 곳마다 복음을 선포하며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병자들을 최선을 다해 고쳐준 제자들이 긴 여정을 끝내고 돌아왔고, 그들은 예수님과 동료들에게 자신들이 겪은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과 너무도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세상의 현실 때문에 아픔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 무엇인지 묵상하게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상에 파견한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도’라는 단어는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파견되어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 백성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복음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한 모든 활동을 평신도 사도직이라고 천명합니다. 물질과 돈이 주인이 되어 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나눔과 섬김의 복음적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회개를 권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과 함께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세상을 치유하는 사도직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겪었듯이 세상의 냉소와 동료들과의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런 삶은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피할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공동체는 파견되고 사명을 다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서로의 체험에 대해 나눔을 하고 하느님 안에서 쉬고 서로를 격려하는 터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미사 전례에 참여하여 세상 속에서 각자 살아간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고 위로를 얻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치를 이루고 다시 파견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는 또 다른 묵상을 하게 합니다. 복음을 보면 이렇게 최선을 다해 애쓴 이들을 좀 쉬게 놔두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도움을 절박하게 원하는 많은 사람이 제자들이 쉬어야 할 곳에 먼저 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명을 갖고 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숨 돌릴 틈도 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면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도 쉬어야 하는데 자신들 생각만 하고 우리를 배려하지 않는구나 하는 매정함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이 사람들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있나 하는 의문도 일어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제자들의 상황, 능력과는 별개로 수많은 고통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가 도움을 바라며 그토록 매달리듯 찾아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비롯하여 선의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세상의 아픔과 고통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어떨 때는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보입니다. 불가능, 좌절, 절망, 포기, 이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렇게 밀려오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밀려오는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요동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그들을 보면서 일어난 ‘가엾은 마음’입니다. 복음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가엾은 마음’은 절박하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예수님 안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그리스어로는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인데 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Compassion입니다. 흔히 ‘연민’이라고 번역되지만, ‘함께’(Com)와 ‘고통’(Passio)이 결합한 단어로, ’함께 고통을 겪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야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좀 불쌍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겪는 고통을 창자가 끊어지듯이 함께 아파하시며 마주합니다. 이런 마음이야말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죄와 고통 중에 있는 인간들과 함께 아파하기 위해 하느님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은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 절망 가운데 도움을 바라는 이,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함께 아파했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셨습니다. 하느님은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도 당신과 같은 사랑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마음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의무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제자로 살아가는 삶은 그분의 삶을 보고 배울 뿐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느끼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에 파견된 우리들이 어떤 마음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엾은 마음’이 어디서 오는 마음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7-21

[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다가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르 1,16-20 참조)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눈으로 봤고 그분의 가르침을 귀로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반자이자 목격자이며, 동시에 특권을 가진 청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전해주는 ‘예수 이야기’에서 그들은 아직 ‘조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심으로써, 그들은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보내다’ 혹은 ‘파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아포스톨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르 6,7 참조)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제자들은 ‘따르는 이’ 혹은 ‘배우는 이’에서 ‘파견 받은 이’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부여한 ‘권한’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권한’ 혹은 ‘권위’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엑수시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와 함께 머무른 이들이 ‘권한’을 받음으로써 ‘사도’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르 3,14-15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마르 1,15) 그들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의 병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권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다른 이(예를 들면, 군중 혹은 여인들)와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사도, 곧 파견받은 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마르 6,8-9 참조), 먼저 사도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벌의 옷은 선교활동을 위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림으로써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도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옆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두 번째로 파견받은 사도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환대나 거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마르 6,10-11 참조)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미덕이었습니다(창세 18,1-8; 19,1-3; 욥 31,32 참조). 그러나 사도들이 환대를 받을 때에도, 그들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혹시 거절을 당한다면 거절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다녀왔을 때 옷이나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곤 했는데(2열왕 5,17; 이사 52,2 참조), 이 행동은 정결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절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1독서에서 ‘파견 받은 이’의 또 다른 모델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예언자였습니다(아모 7,15 참조). 그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들어 올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적 불균형 현상으로 이어졌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화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법적 부조리 또한 만행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찬 이스라엘로 아모스 예언자는 파견됐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 거룩한 미사성제에 참여한 우리는 사제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미사가 끝나면서 파견을 받는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듣고 몸과 피를 모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은 파견의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제 또는 사제는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그들을 파견한다.” 미사의 은총을 가득 받고 파견된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미사 안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을 힘차게 고백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7-14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거부’와 ‘배척’이라는 주제와도 매끈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일은 여타 지방에서도 늘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을 들은 청중의 반응은 성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보인 실감적, 입체적 반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나올까?’(마르 6,2 참조) 하는 말들에 그들이 느낀 심리적 파장이 속속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지니신 ‘치유의 능력’입니다. 곧 가르침과 이적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익명화된 이들의 말들은 그러나 아직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극의 물꼬를 바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고 하는 대목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로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가 줄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졌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다소 거친 배척이 더없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시종일관 예수를 ‘저 사람’이라 부르는 것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무시, 경멸,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의 근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을 가진 ‘아웃사이더’일 뿐입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커다란 반감이 너무도 선명하여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6,3)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말이 낙인처럼 찍힙니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이고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점’을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묘한 심리적 장벽입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노골적인 거부와 배척은 불편한 압박의 틀이 되어 예수님께 먹먹한 경험을 안깁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는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처지를 예언자의 삶에 빗대어 길고도 쓸쓸한 여운을 남기십니다. 배척과 미움의 대명사인 예언자들의 삶에서 당신의 삶을 읽어내고 계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배척은 예수님의 이후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6,5)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6)라는 마지막 구절이 강력한 여진을 남깁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향에서의 ‘거부’와 ‘배척’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믿음과 연관 지으며 그들의 불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듣고 고향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에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바람과 파도, 더러운 영과 질병도 예수님의 권능에 복종했는데,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적수’인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불신이 마치 예수님의 손발을 묶어 버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압도당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믿음의 부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믿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를 편견의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이 타자에게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의 감옥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이 유독 눈에 밟히는 오늘, 생각의 탄력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7-07

[말씀묵상]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언젠가 열두 해 동안 하혈해 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봤습니다. 많은 작품이 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이 그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구도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누구의 얼굴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 옷자락 끄트머리에 닿은 여성의 손가락을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예수님께 나아온 여성의 눈길에서 그려낸 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그림을 마음에 간직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음속에서 그 그림을 꺼내어서, 여러분과 함께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림을 닮은 시선으로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시고, 열두 해나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요. 저는 그런 질문이 부족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성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겠지요. 꽤 많은 학자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예수님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를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쓰인 수많은 기록을 발굴했고, 사료를 바탕으로 예수님 시대를 재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시대인 기원후 1세기, 갈릴래아에 수많은 기적 행위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게자 베르메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참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적 신앙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지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행한 수많은 치유 기적 이야기는 그때의 갈릴래아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역시, 그런 기적 행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기적은 진짜였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치유 기적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의 문장을 더듬어 읽습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다급히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 다급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리, 제자들의 모습은 차갑습니다. 제자들의 차가움 가운데 고립된 예수님의 다급함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 여성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여성은 다시 한번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 왜 이 여성은 예수님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있을까요. 율법은 월경 중의 여성을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레위 15,9-27 참조) 월경 중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열두 해나 하혈했다면 그 의미는 좀 달라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성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해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았을까요. 많은 의사를 만나는 동안 모든 재산을 썼을 것이고요. ‘숱한 고생’이라는 표현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담겨 있나요. 바로 그런 여성이 군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정한 여성은 사람들을 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여성은 군중 속의 사람들을, 마침내 예수님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성을 찾아서 그 마음의 짐을 벗겨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죄인이나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랑받는 딸이라고 말이지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와 건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정리될 무렵,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수고스럽게 오실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회당장과 함께 집으로 향하십니다. 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며 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어’ 버립니다. 울음 속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니, 그제야 회당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으로 향하는 회당장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요. 아이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 집에는 사람들이 울고 있고, 이제 저 문 너머에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 사람들의 비웃음을 마주한 절박한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어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의 무심한 말과 표정도 화살처럼 날아드니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물리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러 오시면서, 회당장의 슬픔을 돌보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긴 여성을 찾아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회당장의 모든 걸음에 함께해 주셨고, 계속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열두 해나 하혈했던 여인을 낫게 하시고, 어린아이의 숨결을 돌려주신 사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유 기적’의 사실 여부에만 주목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에는 가득합니다. 복음이 정말 전해주려던 것은, 그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찾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찾고 계시고,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겠지요. 옛날의 기적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어 있는 글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6-30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