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입니다. 매년 지내는 평신도 주일이 동료 평신도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1980년에 세례를 받은 저는 한동안은 평신도 주일이 뭔지 모르고 그냥 지내다가 언젠가부터 ‘매년 한 번씩 본당 사목회장이 강론 시간에 본당의 현황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좀 더 알게 되고 교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이날의 중요성에 비해 평신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생겼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특별히 평신도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바라보시고 과부의 헌금이 갖는 의미를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저는 율법학자의 태도와 과부의 봉헌을 통해 예수님이 말하시고자 하는 신앙인의 삶, 특히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일지 질문해 보았습니다. 복음에서 보이는 율법학자들은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단죄합니다. 또한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옳음을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자신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동일시하나 봅니다. 그러다 보니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 윗자리에 앉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들이 무시하는 가난한 과부들의 가산마저 등쳐 먹으면서도 기도는 길게 합니다. 예수님이 보기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이 진정 어떤 분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이런 율법학자의 모습은 종교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옳다는 것과 자신들의 가르침을 믿고 숭배합니다. 이런 율법학자들에게 분노하신 예수님의 눈에 가난한 과부가 보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과부는 저주받은 삶을 산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였을 것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도움받을 사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해야 할 험한 일들, 다른 사람들의 멸시하는 듯한 시선이 존재하는 슬픔이 배어 있는 삶입니다. 왜 이런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원망이 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헌금을 합니다. 그것도 생활비 전부를 다 넣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이런 봉헌은 어떤 마음에서 가능한 것인가요? 과부로서의 가난한 삶이 절망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그녀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하느님이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깊게 믿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의 삶이 비참하더라도 그 너머에 희망이 있음을 보는 듯합니다. 그녀에게 세상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삶을 바라보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는 생활비 모두를 봉헌하지 않았을까요? 평신도 주일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인해 생긴 날입니다.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에 대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를 하면서 복음을 증거 해야 하고, 그렇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평신도들이 현대세계의 복음 선포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합니다.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정신에 맞게 살아감으로써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과 사회적 활동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맞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간혹 하느님께 삶을 봉헌하는 것을 교회 봉사만 하면서 살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거나 기도와 성사 생활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으라는 이야기로 이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삶은 평신도의 삶이 아니라 사제와 수도자로서 봉헌하는 길입니다.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부르심을 듣고 일상을 통해 삶을 봉헌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살고 있는 그 자리가 봉헌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가 보여주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삶이 녹록지 않더라도, 내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비록 실패와 좌절을 겪더라도,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에게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것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은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신앙의 여정은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여정을 동반하는 공동체는 서로 기도해 주고, 넘어졌을 때 일으켜 세우며 함께 성장하는 힘이 됩니다. 또다시 맞이한 평신도 주일입니다. 이날을 계기로 모든 신자가 하느님께 받은 사명을 의식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들의 삶 안에서 드러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를 희망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평신도 주일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삶의 터전에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살아온 신자들이 1년 동안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와 애씀에 대해 나누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한편으로는 성찰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평신도들이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선교 사명을 살아가는 교회의 전망을 활발하게 나누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그럴 때 많은 이가 평신도로 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 우리 모두가 교회임을 공감하며 우리가 받은 사명과 새로운 전망 안에서 일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평신도 주일을 지속적으로 지내며 살아가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진정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1-10

[말씀묵상] 연중 제31주일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부활에 관한 논쟁(마르 12,18-27)을 벌이신 이후에 율법학자 한 사람과 ‘첫 번째’ 계명에 관한 대화를 나누십니다. 어느 한 율법학자는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논쟁을 옆에서 듣고 있었고, 잠시 틈을 이용하여 예수님께 다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이 물음에는 토라의 요약, 곧 모든 율법 조항이 도출되는 하나의 원리를 찾고자 했던 랍비들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학자는 모든 계명 중에서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쉐마’(‘너희는 들어라’라는 뜻: 신명 6,4-9)를 시작하는 구절, 곧 신명기 6장 4-5절을 인용하여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30) 이 조문은 신명기에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가장 잘 요약한 구절로서 모든 율법의 근원이자 믿음의 대상인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포함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계명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본 교리와 규범을 알려주면서, 하느님을 헌신적으로 전인적 차원에서 사랑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쉐마를 머리 속에 암기해야 하고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바쳐야 합니다. 집 안과 집 밖, 쉴 때나 일할 때 거듭하여 계명을 암기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쉐마를 암기하여 바침으로써 선택된 민족, 곧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거듭하여 확인합니다. 마르코 복음 12장 29-30절에 따르면, ‘하느님 사랑’이라는 요구는 ‘하느님의 유일성’이라는 신학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비교: 마태 22,37; 루카 10,27)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답변으로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이 계명은 이른바 성결 법전(레위 17-26장)에 속하는 규범으로서 한 분이신 하느님처럼 이웃, 곧 동료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을, ‘둘째’ 계명으로 이웃 사랑을 열거하고 계시지만, 이웃 사랑에 대한 언급 후에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는 표현을 덧붙이시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을 연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 못지않게 중요한 계명이며, 이 두 계명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유학 시절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한 적이 있습니다. 순례 여정의 후반부에 예루살렘 순례가 포함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통곡의 벽을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모습은 특이한 장신구를 두르고 기도하는 남자들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장신구는 ‘성구갑’이라고 부르는데, 조그만 말씀 상자와 두 개의 끈으로 구성된 기도 용품입니다. 유다인 남자들은 상자 하나를 이마에, 다른 하나를 왼팔 심장 가까운 곳에 끈으로 매달고 기도를 바칩니다. 이들은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문 중 하나인 ‘쉐마’를 종이에 적어 작은 상자에 넣은 다음 이마에 묶었고, 심장에 닿는 왼쪽 팔뚝에도 끈으로 매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신명기 6장 8절(“이 말을 너희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여라”)의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성구갑을 넓게 만들며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걸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신구는 유다인들이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신명 6,5-6)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견뎌야 했을 시련과 고통의 세월에도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성구갑’도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유다인들의 전통은 누군가에게는 유별나고 유난스러운 행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이러한 장신구를 두르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위선자’라고 부르며 그들을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구에게는 그들의 모습이 신앙의 모범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보시고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유일신 신앙을 지켜낸 민족입니다. 유다인들이 강대국 사이에서 오랜 질곡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종교 혼합주의의 유혹에서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한 분이신 주님을 하느님으로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 일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내어드리는 유다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 각자의 마음과 자세, 그리고 우리의 실천은 어떠했는지 되돌아보는 하루를 보냅시다. 한 분이신 주님께 우리 각자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의 신앙을 삶 속에서 실천합시다. 하느님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사랑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두어라.”(신명 6,4-6)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 교수)

2024-11-03

[말씀묵상] 연중 제30주일

연중 제30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바르티매오의 치유를 들려줍니다. 이는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마지막 치유 기적이자 치유된 사람의 이름을 유일하게 밝히는 기적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한 모든 제자들의 이름이 소개됩니다. 다른 두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치유된 사람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건 바르티매오의 이야기가 단순한 치유 기적이라기보다는 제자로의 부르심에 더 큰 비중을 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당신 제자로 부르실 때 사용하셨던 ‘부르다’(φωνέω·포네오)라는 동사가 이 이야기 속에 세 번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 배와 아버지, 그물을 버렸습니다. 바르티매오 또한 부르심을 듣자마자 자신의 겉옷을 버립니다. 당대의 겉옷은 단지 외투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이불’을 지칭할 때도 있었고, 입는 옷이라기보다 덮는 옷에 가까웠습니다. 때로는 신분을 드러내는 도구가, 때로는 담보 잡힐 수 있는 재산이, 또 때로는 보호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겉옷’을 던져 버리는 행위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바르티매오의 응답과 결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진행 과정의 상세한 서술에서 저자가 이야기에 공들인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티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티매오는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력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그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불렀으나 바르티매오만은 그분을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일컬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하느님 약속의 메시아, 구원자라는 의미로 일종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호칭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 그 어떤 인물도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의 고백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며 핀잔을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외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길’이라는 공간 역시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은 당신이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며 묻히시는 장소로 여행의 종착지임과 동시에 생의 마침표입니다. 바르티매오는 그런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분을 따라나섰다는 것은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분의 사명을 수용한 사람, 곧 제자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길가에 ‘주저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따라나섰다는 것은 사실적 묘사이기도 하겠으나 그보다는 바르티매오의 삶이 변화하였음을 의미하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이 치유 기적보다는 제자 됨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납니다. ‘따르다’와 ‘길’은 제자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는 바로 앞서 부르심을 받았던 부자 청년(마르 10,17-22)을 소환시킵니다. 사회적으로 부유한 사람인 청년과 사회적으로 가장 가난한 사람인 바르티매오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지만 재산을 포기하지 못해 떠나갑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마르코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은 부자 청년의 이름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르티매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과도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마르 10,35-40) 둘은 직책을 요구하였던 반면 그는 오직 자비만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동일하게 던지시는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라는 질문이 야고보와 요한, 바르티매오의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합니다. 이야기의 바로 앞 단락에는 열두 제자들 간의 자리다툼과 서열 싸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있자마자 제자들 사이에는 서열 다툼이 발생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세 번이나 당신 수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르티매오의 행동과 완전히 대조됩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는 열두 제자가 아닌 바르티매오를 통해 삶의 본보기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떠한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천명합니다. 바르티매오의 행동과 외침이 오래도록 잔상과 이명을 남깁니다. 눈먼 이가 오히려 제대로 보는 사람이고, 멀쩡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눈먼 이와 같은 묘한 역설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코에게 있어 제자란 예수님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분의 소명을 수용한 사람이자 수난의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새로운 눈 뜨임을 청해야겠습니다. 움켜쥔 채 놓지 못하고 있는 겉옷도 이제는 내려놓아야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10-27

[말씀묵상] 연중 제29주일·전교 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태오복음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마주하며, 이란의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놓습니다. “관객에게 답을 알려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아스가르 파르하디,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감독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그 감독은 좋은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맺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말이 복음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부제 시절, 서울 어귀에 있는 정교회 성당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지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길이가 같은 네 팔을 십자 모양으로 뻗고 앉아 푸른 돔을 쓰고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을 오롯이 담아내려는 듯, 네 기둥은 네 아치를 만들고 있었고, 성당의 천장과 벽면은 온통 이콘과 성화로 가득 차, 주님의 행적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품어내고 있었지요. 그 수많은 성화와 이콘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정문 어귀의 내벽을 보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벽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옆에는 사도들과 여러 민족들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다양한 복색을 한 여러 인종이 있고, 그들 가운데는 치마저고리를 하고 쪽진 여성도 있습니다. 성당을 떠나려던 저는 그 벽 앞에서 조용히 말씀을 읊조렸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사람들이 그 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기다리며, 그 광경을 눈에 담아 마음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동방 형제들의 성당, 그 한쪽 벽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는 이유는, 그 쓸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나가는 길에, 정문 내벽에 눈길을 주겠지요. 오늘날 로마 교회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Ite missa est!) 하고 외치며 ‘파견’하듯, 동방 형제들은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이들을 벽면에 초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콘 신학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동방 형제들은 이콘을, ‘그림의 형태로 써 내려간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방 형제들의 그 성당은 하나의 복음서이고, 정문 내벽은 그 복음서의 마지막 장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성당을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간직했을까요. 그 부제님들은 이제 사제품을 받으셨겠지요. 그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시며,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실까요. 저는 복음서의 마지막을 마주할 때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의 벽면을 떠올려 왔습니다. 저는 이제야 복음서의 마지막 이야기가 다소 엉성하게 끝나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라는 선물은 신앙의 해답을 주는 책일까요. 분명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만,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선명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신앙은 선명한 해답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니까요. 오히려, 복음서는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숙제를 주는 책입니다. 여전히 흔들리는 이들에게 사명을 주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했던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요. 그들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한 걸음을 어떻게 걸었고, 또 어떻게 멈추었을까요. 베드로는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를 거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박혔습니다. 안드레아는 러시아까지 선교를 가서 X형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큰 야고보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선교하다 예루살렘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필립보는 소아시아에서 선교하다 십자가에 달려 돌에 맞아 숨집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를 선교하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졌습니다. 토마스는 인도로, 마태오는 에티오피아로 갔다가 순교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이집트에서 방망이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시몬은 이집트를 거쳐 페르시아로 건너갔다가 톱에 잘려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순교하지 못했습니다만, 살아남은 유일한 사도로서 홀로 오랫동안 교회를 보살피며, 주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머나먼 곳으로 선교를 떠났다가 순교로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들은 전승으로 전해질 뿐, 복음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복음서는 사도들의 부끄러운 자기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사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끌어안고 나아가시는 동안,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갔다고 고백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골라서 복음서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끄러운 자기 고백을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어제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복음서의 마침점 너머에서, 그들은 그런 삶을 살다가 자신의 신앙을 완성시켜 왔습니다. 복음서가 마침점을 찍어도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일상에서 신앙의 이야기는 완성되겠지요. 신앙은 성당 안에서 시작되어, 일상에서 완성될 겁니다. 복음서를 덮으며 의심이 남아있어도 괜찮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남은 숙제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때 끝없이 함께 해주실 주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복음서의 마침점 너머에 우리의 일상도 이어질 겁니다. 우리도 열한 제자처럼 우리의 신앙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0-20

[말씀묵상] 연중 제28주일

교회에 젊은이들이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받고 줄곧 주일학교를 다니고, 청년부 활동을 하면서 성장하면서 인생에서 제일 친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사춘기에 많은 고민을 그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교회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은 한 젊은이가 주인공입니다. 이 젊은이는 남달라 보입니다. 세상의 성공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이 젊은이는 어릴 적부터 중요한 계명을 다 지키며 살아온 훌륭한 젊은이입니다. 저라면 이 젊은이와 함께 식사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쉬운 일부터 하면서 공동체를 잘 따라오게 권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과격해 보입니다. 이런 젊은이에게 모든 것을 팔고 따르라니요! 너무 급격한 변화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이 성경을 묵상하면서 많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젊은이는 무엇을 진심으로 원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왜 돌아갔고 무엇이 그에게 어려웠을까? 예수님이 말한 ‘가진 것을 팔고 따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부자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많은 것을 가진 부자의 삶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넉넉함이 주는 여유와 그 여유가 가져오는 관대함,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으려고 하는 능력은 부자가 갖고 있는 ‘빛’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진 것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느끼는 우월감, 그것을 잃었을 때 받아들이기 힘든 절망, 소유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충동, 그리고 부의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은 부자의 ‘어둠’입니다. 복음 속 부자 청년은 부자가 가진 ‘빛’을 보여 줍니다. 어릴 적부터 계명을 지켜온 신실함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는 관대함, 진리를 찾으려는 열망 등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부자의 ‘어둠’이 드러납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을 동일시 하기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슬픔이 크게 일어납니다. 이런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크게 놀랍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왜일까? 부자가 그렇게 잘못인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나를 비우고 동료들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온 길이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내 삶을 전적으로 의탁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삶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내 삶을 맡기려는 절박함이 부족합니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통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가진 것들이 많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인정도 받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내가 가진 것은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이처럼,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어려움으로 다가오기에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에서 실마리가 보입니다. 이 말씀은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 말의 진의는 내가 삶의 관점을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바꿀 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가능한 것이 된다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을 통해서 보게 되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많은 것을 갖고 살아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에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중요하게 여기면서 꼭 있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 내게 있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 뜻을 따라 사는데 도움이 되도록 일시적으로 허락된 것으로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내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에 그것들을 팔고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그것 말고 내게 더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실 것도 믿게 됩니다.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제 이야기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찾고 살고 싶었으나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제가 갖고자 하는 것들이 인생에서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가장 의미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조금씩 더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슬퍼하며 돌아갔던 부자 청년도 아마 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일시적으로 허락한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서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깨닫고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더 갖고자’ 하는 삶을 떠나 ‘머리 둘 곳조차 없다’하셨던 예수님의 길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0-13

[말씀묵상] 연중 제27주일

최근 ‘혼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됐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비혼주의자도 많이 늘어났고, 혼인보다는 동거를 원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혼인은 원하지만 아이 없이 부부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혼인 후에 이혼을 선택하는 비율도 높아졌습니다. 최근 어느 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이혼율이 제일 높은 국가였습니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 세상은 급변하지만, 거센 풍랑을 만난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혼인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혼인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는 ‘단일성’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해소성’입니다.(교회법 제1056조) ‘단일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전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해소성은 하느님께서 부부로 맺어주신 남자와 여자를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혼인 서약을 한 부부는 죽음 외에 결코 갈라질 수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혼인예식을 거행하면서 공동체가 보는 앞에서 본인의 결심을 말하고, 주례사제는 신랑과 신부의 합의를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분이 교회 앞에서 밝힌 이 합의를 당신 은혜로 확고하게 하시고 두 분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합니다.” 혼인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기본 가르침을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허락해 주어도 되는지 여부를 묻는 바리사이들을 반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8-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테오스’)과 ‘사람’(‘안트로포스’)을 서로 맞대어 비교하시는데(마르 7,7-23; 8,33 참조), 이 대조를 통해 이혼이 불가능한 이유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무효화하려는 시도는 인간적 행위에 속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이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후대에 제정된) 이혼장과 관련한 율법 조항(신명 24장, 특별히 1절과 3절)을 반대하시면서 여기에 담긴 하느님의 의도와 목적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혼장과 관련하여 모세가 알려준 법적 조문은 혼인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을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 목적이 거부될 때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모세가 관련 법조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이들의 ‘완고함’, 곧 하느님의 창조적 질서를 벗어나 이혼을 하는 상황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앞에서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7절을 인용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6-7)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해 보여주신 ‘첫 번째 원리’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후대의 법적 조항보다 우선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혼인 윤리는 인간의 실패를 용인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느님의 창조에서 시작된 원형에 근거합니다. 오늘 주일 제1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창조, 특별히 여자를 창조하시면서 남자와 여자를 결합하여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창조 원리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상호 종속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협력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는 ‘돕는 이’ 또는 ‘지원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보시어, 사람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원리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도우며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여자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마주 바라볼 수 있는 “그[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지으신 여자를 보고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고 외치는데, 이 말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누구인지(정체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혼인의 고귀함을 일깨워줍니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대한 보도가 성경의 시작, 곧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 곧 혼인이 결코 인간적 선택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 없는,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거룩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협력자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은 사람과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기초 삼아 당신의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혼인의 가치가 세속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힘을 잃어가는 작금의 시대에 혼인의 거룩함과 고귀함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서 되새김질하면서 이 세상에서 창조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원리와 방법을 전파할 수 있는 증인이 되어 봅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10-06

[말씀묵상]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자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이주민과 난민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더욱더 넓은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촉구하는 날입니다. 이는 나와 다른 신앙, 사상, 행동방식을 가진 사람을 용인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평화적 공존을 이루는 기본 원리는 관용과 배려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관용을 베푸는 주체임과 동시에 관용의 대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더 넓은 우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제자 요한은 예수님께 ‘우리 편이 아닌 한 사람이 스승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금지시켰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을 ‘포용’하고 ‘용인’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제자 공동체라는 범위를 한정 짓고 장벽을 쌓으려는 제자의 거부감을 중화시키며 넓은 마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타인에 대한 포용에 이어 ‘죄를 가볍게 다루지 말라’라는 경고를 주시며 죄를 짓게 하는 손과 발 그리고 눈에 대한 무거운 말씀 가운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손으로 짓는 죄, 발로 짓는 죄, 눈으로 짓는 죄에 대해 단호하고도 강렬한 세 가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마르코에게 있어 제자 됨은 취사선택적 태도가 아닌 급진적이고 철저한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에서 재확인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를 거부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말씀과 더불어 지옥에 대한 말씀 또한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만 하여도 ‘지옥’이라는 단어가 네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루카 16,19-24), 마태오의 산상수훈의 말씀들(5,22; 5,29-30), 이외의 여러 곳(마태 10,28; 24,41.46; 마르 8,36-38)에서도 지옥에 관한 언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지옥은 불이 타오르고 깊은 구렁텅이로 가로막혀 있으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받는 장소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은 뜨거운 불로 형벌을 받는 곳이며, 동시에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은 차디찬 얼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단테의 표현처럼 지옥은 가장 뜨거운 곳인 동시에 가장 차가운 곳인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뜨거운 불길로 이해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점에서는 차디찬 곳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부류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타인을 죄짓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스스로 짓는 죄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는 잘못에 대해서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라고 무거운 말씀을 하십니다. 목에 맷돌을 달아 수장시키는 처형은 실제로 로마나 그리스 몇몇 도시에서 부모를 죽이거나 사회 도덕을 어지럽힌 사람에 대하여 시행되던 형벌입니다. 나귀나 짐승의 힘으로 돌려 곡식을 찧는 큰 맷돌인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면 살아날 희망은 거의 없습니다. 바다에 수장될 경우 장례를 지낼 수 없어서 영혼이 영원히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고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잔인한 사법적 형벌인 셈입니다. 죄악의 특성은 ‘공범 만들기’와 ‘확장성’에 있습니다. 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타인까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곱빼기 죄’라고 하겠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는 그 대상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인이거나 혹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타인을 넘어지게 한 죄 다음에, 자기 스스로 죄를 짓는 경우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면 그것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 던져 버리라는 다소 극단적인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신체를 절단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현실감과 생동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셈족 특유의 과장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싹을 자르라는 경고로써 손, 발, 눈이라는 우리의 소중한 지체를 포기할 만큼 생명에 들어가려고 힘쓰라는 교훈을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죄를 멀리하는 것뿐 아니라 행동과 말, 표양으로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역시 피하라는 교훈이 신체 절단이라는 강렬하고 단호한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당부가 그만큼 간곡함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다소 거칠거칠하게 다가오는 강렬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걸림돌에 넘어지거나 스스로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애정 어린 눈빛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결단만이 남았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9-29

[말씀묵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신부님, 교목실 창문 너머에는 목련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목련은 신학교 성당 곁에도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몇 해의 봄을 지나면서도 그 나무를 피해 다녔습니다. 꽃이 만개했을 때도, 애써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날아오를 듯, 포롱포롱 가지마다 핀 하얀 꽃잎들이, 질 때만큼은 너무나도 서글펐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올해 봄에는 무언가 홀린 듯이, 목련 지는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하얀 꽃잎이 녹슬어 떨어지는 모습은, 목이 잘리어 피를 흘리는 것 같았고, 저는 문득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목련이 피를 흘리며 지고 나니, 봄이 왔습니다. 봄을 알리는 그 꽃은, 봄이 만개할 때는 자취를 감추더군요. 학교 앞뜰에 벚꽃이 만개할 무렵 존재를 감춘 목련은, 여름 뙤약볕 아래 잎을 돋우어 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은 그 앞을 뛰어다니며 웃음 지을 것이고, 그 앞을 지나 성당에서 두 손을 모을 겁니다. 신부님, 당신이 목을 떨군 그 땅에, 교회는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꽃피우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도 찾지 않는 여름 목련 아래서, 당신을 기억합니다. 신부님과 동료 순교자를 기억하는 오늘, 교회 공동체는 루카 복음의 말씀을 되새깁니다. 말씀은 송연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목련꽃을 애써 피하고 다닐 무렵,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도 서운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바른 정신을 가진 맑은 청년이 내몰린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바른 소리가 싫어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그 억울한 죽음을 마주했다면, 다시는 누구도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목도한 사람들은, 다시 그 십자가를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고통의 의미를,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신앙이 그런 방식으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때마다, 사람들은 스러져갔습니다. 우리 신앙은 왜 이리도 사람들의 고통에 관대한가. 신앙은 왜 고통을 예방하려 하지 않는가. 피로 새겨진 저 말씀을 눈물로 닦으며, 저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럴수록, 저 문장은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여름 목련 나무 앞에서, 다시 성경을 폅니다. 말씀 구절을 찾아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십자가를 ‘지다’를 표현하기 위해 ‘아이로’(αἴρω)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이 단어는 ‘짐을 짊어지다’는 뜻입니다. 이 낱말에는 무게를 견디어 내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복음 어귀에, 다시 한번 십자가 이야기를 꺼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오늘날 성경이 ‘짊어지다’로 번역하는 이 낱말은 ‘바스타조’(βαστάζω)입니다. 이 단어도 ‘옮기다’, ‘참다’, ‘짐을 지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 어감은 조금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안고 간다는 뜻에 가깝지요. 아기 엄마가 젖먹이를 품에 안고 갈 때, ‘아이로’보다는 ‘바스타조’에 가깝습니다. 역설적입니다. 아마도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놀랐을 겁니다. 십자가라는 형벌도구를, 아이를 품듯 하라니요. 그런데, 이 ‘바스타조’라는 낱말은 로마서에 다시 등장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주어야 합니다.”(로마 15,1) 바오로 사도는 나약한 이들을 보듬는 일을 표현하고자 ‘바스타조’란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십자가를 지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의 어려움과 고통을 돌본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십자가를 대하는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두 단어를 오가는 이유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또렷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견디어 낸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 소중히 끌어안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면, 저는 끌어안는 쪽을 택하려 합니다. 신부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들립니다. 교실 창가로 아이들이 보입니다. 교실에 걸린 십자가 아래로, 아이들은 따뜻한 햇볕을 책상 위에 펴고, 책을 읽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이곳의 오늘은 안온합니다. 당신이 꿈꾸었을 일상을 저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더 이상 숨어서 신앙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함께 기도할 수 있고, 우리 손에는 한글로 된 성경이 들려있어서, 마음껏 성경을 소리 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꾸벅꾸벅 졸 수 있습니다. 그런 일상을 살아가는 저희로서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리셨나요. 어떤 힘을 내는 말이었나요. 저는 신부님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안온함은 어제의 절박함과 너무 멀고, 저는 그 소슬한 거리를 좁히지 못해, 격절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제야 저는 어제의 서운함이 부끄럽습니다. 신부님, 어느 날 무심한 눈길이 목련에 가닿는다면, 저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 오늘 말씀을 포개어 두고, 삶과 꿈을 다시 성찰하겠습니다. 당신이 이른 봄의 목련꽃처럼 행하신 사제직을, 저는 여름 목련처럼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십자가를 품에 꼬옥 안고, 자박자박 걸으며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9-15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생명의 망으로 연결된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라는 부르심을 기억하라는 초대의 날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해 이 시대의 예언자적 행동을 하도록 요구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으로 그 가운데 특별히 ‘부정과 정결’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대의 풍경이 선명하게 담긴 이 논쟁의 발단은,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다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전통을 깨뜨린 제자들의 행동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날을 세우며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자신들이 삶에서 철저하게 견제해 온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비위생적이어서가 아니라 비전통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본뜻이 상실되고 맹목적으로 허상의 성채를 쌓는 모양새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숨겨진 위선과 오류를 가감 없이 드러내십니다. 먼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시어 ‘입술’의 섬김과 ‘마음’의 섬김을 대조하시며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지적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일 뿐이라고 하시며 전통의 권위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 전통의 근원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7,8)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의 전통’에 따라 ‘코르반’이라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대신 하느님께 드렸다’라고 외치지만, 정작 십계명의 ‘부모공경’을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며 주객전도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람이 정해 놓은 것에 집착하여 더 중요한 율법은 오히려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질책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의 전통’을 율법보다 앞세우는 그들의 위선이 밑바닥까지 들추어지는 것 같아 속 시원함을 느낍니다. 논쟁의 구체적 쟁점은 음식을 먹기 전 ‘손 씻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는 단순히 손을 씻는 것보다는 훨씬 원천적이고 광범위합니다. 도덕적 정결함의 근본을 말씀하시며 더 광범위한 주제로 이야기를 전환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7,15) 예수님의 이 논리에 따르면 손을 깨끗이 씻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정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 부정하게 만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간단명료한 답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아가 ‘음식이 모두 깨끗하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손을 씻지 않은 행위가 음식에 그 어떤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아울러 음식이 모두 깨끗하기에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나뉜 오래된 구분이 사라지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 속에서 나오는’ 죄의 요소를 나열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이 비록 날카롭게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성경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단수형,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복수형으로 표현합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많고 악함을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열두 개의 ‘악함’은 앞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악의는 자주 반복될 수 있는 행위를 나타내기에 복수형을 쓰고, 뒤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은 사람의 기질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단수형으로 표현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겉’이나 형식이 아니라 모든 악행의 근원이 사람의 내면임을 명토 박아 말씀하시며,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면이 그렇지 못할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외적 행위에 집착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들춰내시며 그들의 헛된 자부심을 벗겨냄으로써 분리와 배척의 상징이었던 ‘정결’과 ‘거룩’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 재정립하십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돌보라’는 주님의 당부를 우리 삶의 공간에 옮겨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은 어떠한가요? 이 성찰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경건함’을 한 겹 한 겹 아프게 벗겨내는 과정은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9-01

[말씀묵상] 연중 제21주일

요한복음 6장의 말미를 마주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합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 모두가 이 이야기를 전한다고 해서, 그 태도까지 같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특히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 복음서는 빵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매조짓습니다만,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 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고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관점은 다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 긴 ‘생명의 빵’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반응부터 전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긴 이야기에 대한 ‘한줄평’ 혹은 ‘댓글’ 정도가 되겠지요. 새 번역 성경이 ‘거북함’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스클레로스’(σκληρός)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담은 그 단어를 조금씩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공동번역) “이 말씀은 모질구나. 누가 차마 그것을 귀담아들을 수 있겠는가?”(200주년 신약성서) 세 가지 번역은 어떤 부정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닮아있습니다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거북하다’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어렵다’는 말에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강하고, ‘모질다’는 낱말에서는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듣고 있다’, ‘알아듣다’, ‘귀담아듣다’라는 표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번역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먼저는 제 그리스어 실력이 짧은 탓입니다만, 무엇보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의 생각을 한 문장에 담아내기는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스클레로스’라는 낱말을 저마다 조금씩 달랐을 부정적 감정의 그릇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 낱말을 그렇게 사용하면, 저 번역들은 읽는 사람들의 여러 마음도 담아낼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빵’ 이야기를 돌아다보면, 솔직히 불편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는 예수님의 뜻과 사람들의 욕구가 끝없이 어긋나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기어코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굳이 들추고 헤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그래도 사람들은 묻기도 하고 청하기도 하는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33.35.51절)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칙 안에서 의문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날 그곳의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 문장에 기대어 대화에 뛰어든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질문을 할테니까요. 사람들은 떠나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물끄러미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새 번역, 공동번역) 그런데 누군가는 이 말을 다르게 옮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까?”(200주년 신약성서) ‘귀에 거슬리다’와 ‘걸려 넘어지다’는 번역의 원문은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랍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대개 ‘죄를 짓다’(짓게 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스칸달론’입니다. 이 낱말에는 ‘장애물’(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같은)의 의미가 있습니다. 추문을 뜻하는 ‘스캔들’이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용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걸음이 멈추듯이, 말씀을 듣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에 마음이 멈추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교양인들과 어떤 교부는 그런 순간을 ‘스칸달론’이라고 표현했다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클레로스’에 표현한 사람들의 마음은 ‘스칸달리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빵을 먹은 사람은 오천 명이 넘었는데, 이제 남은 사람은 열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열두 제자들은 남았습니다. 베드로는 질문을 멈추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시작하여 생명의 빵 이야기를 따라 듣는 동안, 어느 땐가 우리의 발걸음은 멈추고, 때로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계속 따라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걸음은 다시 멈추고, 그만큼 자주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질 겁니다. 하지만 이 걸음을 포기한다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며 어떤 힘을 낼지 영영 알 수 없겠지요. 열두 제자를 향하던 질문이 우리에게도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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