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다가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르 1,16-20 참조)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눈으로 봤고 그분의 가르침을 귀로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반자이자 목격자이며, 동시에 특권을 가진 청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전해주는 ‘예수 이야기’에서 그들은 아직 ‘조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심으로써, 그들은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보내다’ 혹은 ‘파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아포스톨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르 6,7 참조)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제자들은 ‘따르는 이’ 혹은 ‘배우는 이’에서 ‘파견 받은 이’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부여한 ‘권한’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권한’ 혹은 ‘권위’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엑수시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와 함께 머무른 이들이 ‘권한’을 받음으로써 ‘사도’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르 3,14-15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마르 1,15) 그들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의 병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권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다른 이(예를 들면, 군중 혹은 여인들)와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사도, 곧 파견받은 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마르 6,8-9 참조), 먼저 사도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벌의 옷은 선교활동을 위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림으로써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도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옆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두 번째로 파견받은 사도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환대나 거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마르 6,10-11 참조)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미덕이었습니다(창세 18,1-8; 19,1-3; 욥 31,32 참조). 그러나 사도들이 환대를 받을 때에도, 그들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혹시 거절을 당한다면 거절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다녀왔을 때 옷이나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곤 했는데(2열왕 5,17; 이사 52,2 참조), 이 행동은 정결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절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1독서에서 ‘파견 받은 이’의 또 다른 모델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예언자였습니다(아모 7,15 참조). 그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들어 올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적 불균형 현상으로 이어졌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화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법적 부조리 또한 만행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찬 이스라엘로 아모스 예언자는 파견됐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 거룩한 미사성제에 참여한 우리는 사제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미사가 끝나면서 파견을 받는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듣고 몸과 피를 모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은 파견의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제 또는 사제는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그들을 파견한다.” 미사의 은총을 가득 받고 파견된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미사 안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을 힘차게 고백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7-14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거부’와 ‘배척’이라는 주제와도 매끈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일은 여타 지방에서도 늘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을 들은 청중의 반응은 성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보인 실감적, 입체적 반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나올까?’(마르 6,2 참조) 하는 말들에 그들이 느낀 심리적 파장이 속속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지니신 ‘치유의 능력’입니다. 곧 가르침과 이적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익명화된 이들의 말들은 그러나 아직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극의 물꼬를 바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고 하는 대목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로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가 줄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졌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다소 거친 배척이 더없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시종일관 예수를 ‘저 사람’이라 부르는 것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무시, 경멸,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의 근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을 가진 ‘아웃사이더’일 뿐입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커다란 반감이 너무도 선명하여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6,3)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말이 낙인처럼 찍힙니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이고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점’을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묘한 심리적 장벽입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노골적인 거부와 배척은 불편한 압박의 틀이 되어 예수님께 먹먹한 경험을 안깁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는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처지를 예언자의 삶에 빗대어 길고도 쓸쓸한 여운을 남기십니다. 배척과 미움의 대명사인 예언자들의 삶에서 당신의 삶을 읽어내고 계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배척은 예수님의 이후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6,5)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6)라는 마지막 구절이 강력한 여진을 남깁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향에서의 ‘거부’와 ‘배척’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믿음과 연관 지으며 그들의 불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듣고 고향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에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바람과 파도, 더러운 영과 질병도 예수님의 권능에 복종했는데,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적수’인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불신이 마치 예수님의 손발을 묶어 버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압도당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믿음의 부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믿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를 편견의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이 타자에게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의 감옥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이 유독 눈에 밟히는 오늘, 생각의 탄력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7-07

[말씀묵상]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언젠가 열두 해 동안 하혈해 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봤습니다. 많은 작품이 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이 그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구도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누구의 얼굴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 옷자락 끄트머리에 닿은 여성의 손가락을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예수님께 나아온 여성의 눈길에서 그려낸 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그림을 마음에 간직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음속에서 그 그림을 꺼내어서, 여러분과 함께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림을 닮은 시선으로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시고, 열두 해나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요. 저는 그런 질문이 부족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성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겠지요. 꽤 많은 학자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예수님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를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쓰인 수많은 기록을 발굴했고, 사료를 바탕으로 예수님 시대를 재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시대인 기원후 1세기, 갈릴래아에 수많은 기적 행위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게자 베르메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참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적 신앙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지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행한 수많은 치유 기적 이야기는 그때의 갈릴래아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역시, 그런 기적 행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기적은 진짜였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치유 기적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의 문장을 더듬어 읽습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다급히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 다급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리, 제자들의 모습은 차갑습니다. 제자들의 차가움 가운데 고립된 예수님의 다급함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 여성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여성은 다시 한번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 왜 이 여성은 예수님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있을까요. 율법은 월경 중의 여성을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레위 15,9-27 참조) 월경 중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열두 해나 하혈했다면 그 의미는 좀 달라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성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해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았을까요. 많은 의사를 만나는 동안 모든 재산을 썼을 것이고요. ‘숱한 고생’이라는 표현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담겨 있나요. 바로 그런 여성이 군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정한 여성은 사람들을 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여성은 군중 속의 사람들을, 마침내 예수님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성을 찾아서 그 마음의 짐을 벗겨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죄인이나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랑받는 딸이라고 말이지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와 건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정리될 무렵,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수고스럽게 오실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회당장과 함께 집으로 향하십니다. 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며 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어’ 버립니다. 울음 속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니, 그제야 회당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으로 향하는 회당장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요. 아이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 집에는 사람들이 울고 있고, 이제 저 문 너머에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 사람들의 비웃음을 마주한 절박한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어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의 무심한 말과 표정도 화살처럼 날아드니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물리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러 오시면서, 회당장의 슬픔을 돌보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긴 여성을 찾아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회당장의 모든 걸음에 함께해 주셨고, 계속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열두 해나 하혈했던 여인을 낫게 하시고, 어린아이의 숨결을 돌려주신 사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유 기적’의 사실 여부에만 주목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에는 가득합니다. 복음이 정말 전해주려던 것은, 그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찾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찾고 계시고,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겠지요. 옛날의 기적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어 있는 글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6-30

[말씀묵상] 연중 제11주일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중심 주제입니다.(마르 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자연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표상들을 ‘비유’로 들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마르 4,33 참조)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 비유를 만나는데, 그중 하나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관한 비유(마르 4,26-29)이고,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마르 4,30-32)입니다. ‘비유’는 그리스어 ‘파라볼레’의 번역으로,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파라볼레’는 하느님의 통치 혹은 행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등장하는 ‘파라볼레’는 히브리어 ‘마샬’에서 어원적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마샬’은 ‘다스리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의 형식을 사용한 이유는 ‘파라볼레’에 대한 히브리어의 어원적 기원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먼저 첫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26-29) 어떤 한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사람은 이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지만, 씨앗은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이삭을 맺게 됩니다. 특별히 첫 번째 비유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가 되어 곡식에 낫을 내는 농부를 언급하며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주님의 날’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이어서 두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30-32) 씨앗이 땅에 뿌려지고 그 위에서 싹이 자라나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직경 2밀리미터보다 작은 씨앗이지만,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성장 과정 자체보다는 아주 작은 씨앗과 거대한 나무를 비교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알의 작은 겨자씨처럼 당장에는 눈으로 보기 어려울지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하는 과정은 하나의 기적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고 확신하셨고,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자연 속 작은 것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비유(마르 4,32)는 구약성경의 전통,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비유적 예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제 17,22-24)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심으신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에서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온갖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향백나무는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의 종류에 속하는데, 목질이 견고하고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다윗의 후손, 곧 바빌론 1차 유배 당시 끌려간 여호야킨 임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향백나무에 관한 짧은 비유를 통해 다윗 왕조의 회복과 번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향백나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에제키엘 17장 23절의 말씀은 의구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향백나무는 본래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저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는 과실수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는 기적을 보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합니다.(에제 36,3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을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로 소개합니다. 하느님 없이 세상 만물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그 안에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약해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거대하고 강한 것이 되면서, 이러한 신비롭고 놀라운 변화에서 우리는 경이로운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 속에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활동하시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인간의 통찰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 나라는 늘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도우심, 곧 신적 계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올 변화를 수용하려는 자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자에게 하느님 나라는 비유로 남아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참조) 비유는 믿지 않는 이에게는 허구일 수 있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물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힘찬 어조로 고백한 그 믿음을 우리도 각자의 삶 안에서 고백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ㄴ-7)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6-16

[말씀묵상] 연중 제10주일

오늘 복음은 율법교사들과 예수님 가족들의 오해와 억측이 빚어낸 사건을 들려줍니다. 긴장감이 역력한 이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그곳으로 몰려든 많은 군중 때문에 요기할 시간마저 없었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3,20)라는 표현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의 어느 집에 머물고 계실 때 두 집단의 사람들이 이 집으로 접근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한 부류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예수 조사단 율법교사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두 부류는 서로 다른 용건을 가지고 왔지만, 목적은 예수님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들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의 힘으로 사탄을 쫓아낸다며 비방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이라는 엄청난 모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모략과 예수님의 치유 활동에 대한 적대적 모욕이 오히려 그분 치유 기적의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긴장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 친척들의 행동으로 확대됩니다. 친척들의 반응은 그분이 “미쳤다”(3,21)는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을 직역하면 ‘정신이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나갔다’라는 뜻으로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 곧 귀신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합니다. 급기야 친척들은 “그분을 붙잡으러”(3,21) 나섰습니다. ‘붙든다’는 표현이 마르코복음에서 ‘체포하다’라는 부정적 의미로 여러 번 등장함을 볼 때 가족과의 날 선 긴장상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이 ‘미쳤다’고 오해하고 율법교사들은 그분이 ‘귀신들렸다’고 음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척들에게 그 어떤 대응도 없이 ‘무시’하는 반응을 보이시지만, 율법교사들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시며 다른 듯 같은 반응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들의 모함에 세 가지 반증으로 답변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3,23),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3,24),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3,25)라고 말씀하시며 그들 논리의 허구성을 폭로하십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성령의 활동마저 바알의 도움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그들에게, 노골적이며 의도적인 거부는 용서될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 또한 퍽 흥미롭습니다. ‘집’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집 안에 있고 어떤 이들은 집 밖에 머물고 있습니다. 집을 두고 ‘안’과 ‘밖’을 나누는 분리가 인상적입니다. 왜냐하면 집 안팎의 공간적 구분은 ‘내부인’과 ‘외부인’에 대한 날카로운 구분으로, 사건 전개의 유용한 계단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척과 율법교사들이 예수님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으로 대변된다면,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분 “주위에 앉은 사람들”(3,34)은 ‘내부인’으로 대표됩니다. 이러한 절묘한 대구는 저자가 어디에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외부인은 그야말로 집 밖에 있는 이들로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고 거리두기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그러합니다. 혈육적으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내부인’이지만,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부인’이 되어버립니다. 율법교사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에서 왔으니 종교적 역할 수행의 중심인으로서 ‘내부인’이라 자부할 수 있지만, 실상은 예수님을 음해하며 공격하는 이들로서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 ‘외부인’이라 지칭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22)고 주장하며 하느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심리적 장벽뿐만이 아니라 율법교사들과 친척들은 외적으로도 집 안에 들어오지 않은 채, 집 밖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밖에 서 있는’ 율법교사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3,23)하셨고, 예수님의 친척들은 “밖에 서서”(3,31) 예수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설전이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둘러앉은 ‘내부인’들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십니다. 이른바 새로운 하느님 가족(Nova Familia Dei)으로서의 ‘새로운 범주’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혈연도, 율법 중심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의 모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부인’이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고, ‘새로운 하느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것은 마르코에게 있어서 ‘죽기까지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복음이 던지는 질문이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힙니다. “당신은 외부인인가요? 내부인인가요? 아니면 내부인 같은 외부인입니까?” ‘내부인’이지만 ‘외부인’이 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기에 깨어있는 노력이 절실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6-09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목요일 아침, 학생들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미사를 기다립니다. 경당에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아이들이 몰려오곤 하는데요. 미사에 참례한 학생들에게 핫도그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생명의 빵’ 보다는 ‘간식’을 찾아서 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곧잘 두 손을 모으고 성가를 함께 부르며 기도 소리에 목소리를 보태곤 합니다만, 미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단지 간식을 먹고 싶어서 온 아이들이다보니 가끔은 애를 먹기도 합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아이도 있고 계속해서 잡담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런 모습을 보신 분들은 여쭈어보시곤 합니다. “신부님, 아이들이 이 미사의 의미를 알까요?” 아이들이 미사에 몰입하는 것 같지도 않고, 신부님 이야기도 잘 듣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간식비도 많이 드는데 굳이 이렇게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고 말이지요. 그럴 때면, 오늘 마주하는 복음 이야기를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날 마지막 만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날은 예루살렘에 들어온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고, 1주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습니다. 파스카(페사흐)와 무교절 축제인데요. 이 무렵이면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묵을 방을 찾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예수님 일행은 ‘큰 이층 방’을 마련합니다.(학자들은 이 방의 주인이 마르코 복음사가라 보았습니다만, 근래에는 사도 요한이 속한 사제가문의 별장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르던 사람 중에는 그 정도 되는 실력자가 있었음을 생각할 만한 대목이지요. 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신다는 파스카 축제, 환영받으면서 들어온 예루살렘, 부러울 것 없이 큼직한 방에 모인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베드로의 장담에서 유다의 배신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은 각자 저마다의 생각이 있었겠지요. 그 모두를 세세히 헤아릴 길은 없지만, 분명하게 짐작해 볼 만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예수님 마음과 같은 이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에게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당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사건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습니다. 함께 나누어 먹은 그 빵은 예수님의 부서진 마음 조각이었다는 것을. 함께 나누어 마신 그 잔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제자들은 그 만찬을 행하고, 만찬 때의 일을 입으로 말하고 글로 써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그분을 기념하고 기억해 왔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말씀을 듣고 빵을 떼어 나누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성찬례에 참례하고 있나요.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성체분배자는 성체를 전해드리면서 “그리스도의 몸”하고 초대하며, 성체를 배령받는 교우는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그 “아멘”이라는 대답은 할 수 없고, 여러분 각자가 나름대로 대답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 “아멘” 외에 다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으시는가요. 다시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성체를 받으면서 “아멘”하고 응답하실 때 과연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우리는 그 말그릇에 어떤 마음을 담고 있습니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 그 한마디는 선언이자 질문입니다. 이 동그란 밀떡의 모양으로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받아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을 받아먹은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아멘”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을 아우릅니다. “아멘”은 믿음입니다. 이 작은 빵조각이 주님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아멘”은 동의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기억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음식이 되셨다는 것, 우리가 주님을 음식으로 먹었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성찰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이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스로 묻습니다. “아멘”은 다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실천하기로 합니다. 적어도 그의 삶과 방식을 흉내내보기로 합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그렇습니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도 하나같지는 않겠지요. 때로는 질문과 의심, 때로는 무심하고 냉담한 마음, 때로는 한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도 “아멘” 말마디에 담아내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말로는 다할 수 없어, 우리 마음을 “아멘” 한마디에 담아내는 것이겠지요. 미사를 마치고 핫도그 배달을 기다리고 있는 어느 날에 누군가가 다시 물어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제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핫도그에 담은 제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아이들이 무심히 핫도그를 먹다가, 불현듯 우리의 눈길과 사랑을 기억하기를 바란다고요. 그때라도 아이들과 우리의 마음이 만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요. 지금은 어긋난 그 마음도 언젠가 결국 하나가 된다고 믿습니다. 제자들은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사랑을 기억하며 행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모신 조각난 빵에는,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부서진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오늘도 그 빵을 모시며, 그 사랑을 조금 더 닮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6-02

[말씀묵상] 성령 강림 대축일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부활 제7주간이 끝나고 맞이하는 주일, 곧 주님 부활 대축일 후 49일이 되는 날에 교회는 성령께서 한자리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내려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오순절에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현상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성령께서 내려오심은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사도 2,2) 또한 성령 강림은 눈으로도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사도 2,3) 여기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바람’과 ‘불꽃’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6항 참조) 히브리인들에게 이날은 ‘오순절’ 축제입니다. 그들은 과월절 첫날에서 일곱 주간이 지난 시반 달(5월) 6일에 축제를 지냈는데. 이 오순절 축제는 농경민족이었던 가나안인들이 첫 번째 보릿단을 수확할 때 지냈던 맥추절에서 비롯됐습니다(신명 16,9-13; 레위 23,15-16). 히브리인들은 이날 함께 모여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을 되새기고, 또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주신 사건을 기념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오순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날이 됐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이 완성됐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31항 참조). 사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파견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날은 노아와의 계약 또는 시나이산의 계약을 기념하는 오순절 축제일이 아니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써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위업이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는 모든 민족들에게 기쁜 소식이 됐습니다.(「강론지침」 56항 참조) 유학시절, 제가 거주하던 교구에서는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을 거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사제서품식이 거행되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보내면서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제대 앞에 엎드려 서품을 받은 이들이 성령을 받고 파견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께 맡기신 구원의 사명, 곧 사도들에게,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후임자들에게 위임된 하느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특별한 은총을 청하는 바람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전례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과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 점은 흥미롭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여러 사건 중 하나를 전해주는데, 이미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됐던 복음 말씀으로 오늘 복음은 그 전반부에 해당합니다.(요한 20,19-31) 요한복음서 저자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저녁에 유다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숨을 내쉬어 ‘성령’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여기에서는 ‘숨을 내쉬다’ 혹은 ‘숨을 불어넣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 동사 ‘엠퓌사오’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도 발견됩니다.(칠십인역)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 2,7)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첫 번째로 사람을 만드시면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지혜 15,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부활, 곧 새로운 창조를 통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복음’으로 선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주간 첫날 저녁”에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에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의 손에 넘겨지시기 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보호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 14,15-31 참조), 이 약속은 주간 첫날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며 성취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약속이 성취됐음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세상으로 파견을 받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믿는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요한 6,39-40.57 참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았기에, 누군가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또한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가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으로 배정된 두 번째 이유는 성령 강림 사건이 부활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기 위함입니다. 부활 제2주일에 선포된 복음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다시 한번 선포됨으로써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완성하는 사건임이 증명됩니다. 50일 전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알렐루야’를 다함께 노래 부르며 시작된 부활축제가 어느덧 끝나갑니다. 그러나 부활의 축제는 성령 강림 대축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은 축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축제는 주님께서 당신의 충만함에서 풍성하게 부어주신 성령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축제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증거가 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총을 청하며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환호송)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5-19

[말씀묵상]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이며, 대중매체를 통한 효과적인 교회 사도직 수행을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홍보 주일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이 홍보 주일로 제정된 이유를 조심스럽게 짐작해보자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특별사명을 제자들에게 내리신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복음 홍보대사’로 부름받았습니다. 가톨릭신문사로부터 ‘말씀묵상’ 원고청탁을 받고 망설일 무렵, 친구 수녀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녀님 모친 고 분다(베네딕타) 어르신은 시골 작은 동네에 사시는 여건상 주일미사를 대체로 공소예절로 하셔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 때문에 매주 가톨릭신문을 꼭 읽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 홍보 매체에 대한 지평이 넓어진 순간인 것은 물론, 가톨릭신문이 수행하는 ‘집 안으로 찾아가는 교회’ 역할이 강렬하게 다가왔었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은 주님께서 강복하시며 하늘로 오르신 사건으로, 언제나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 영원한 축복의 복음입니다. 아울러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주님의 승천은 부활 사건의 완결입니다. 그런데 주님 승천과 같은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복음서가 매주 적은 지면만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마르코복음의 승천 이야기는 단 한 구절에 불과하고 마태오와 요한복음은 승천 이야기를 아예 생략했으며, 루카복음 역시 후속책인 사도행전에 유보한 탓인지 매우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간결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들려주는 주님 승천 이야기를 요약하면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승천은 주님의 지상 사명의 완성으로 사도들 앞에서 일어난 공개적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주님 승천은 주님 재림의 약속과 더불어 성령의 약속까지도 주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듣게 되는 마르코복음은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사도들과 우리 모두를 복음선포 홍보대사로 위촉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기 위함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명은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을 선포(16,15)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마르코복음에 나타나는 부활 메시지 전체는 다른 이를 향한 기쁜 소식의 선포에 있습니다. 무덤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여인들에게 선포되고,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전해야 하는 책임을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부활 체험과 주님 부활 소식은 선교라는 사명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르코복음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 후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사실은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와 사도신경이 선포하지만, 복음서에서는 마르코만이 전하는 사건입니다. 시편(2편과 110편)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이 구절을 마르코가 전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심을 확증하고, 그분이 우주의 통치자가 되심을 보여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승천하심으로 주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과 함께하시며 다섯 표징으로 보증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쫓겨나고,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손으로 뱀을 잡고 독을 마셔도 무해하며, 병자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이적들이 그 보증입니다.(16,17-18)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위임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당신이 하셨던 귀한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부재하면서도 존재하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거리를 극복하고 계십니다. 마르코복음은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이 표징과 더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기 때문입니다.(16,20) 주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크고 대담한 배포를 선물한 듯 보입니다. 기적의 첫째 목적은 기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도움을 주는 데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교회의 탁월한 본보기로,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선교 사명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라는 근원에 닿아있습니다.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선교지가 ‘온 세상’임을 확인합니다. 지역과 대상의 제한 없이 온 세상이 우리의 일터인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말씀의 첫 번째 선포 대상은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복음의 증거자입니까? 방관자입니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사명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우리의 존재가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 속에 있는지 되짚어 보아야겠습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에 우리 삶의 지표를 재정립하는 은총을 빕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5-12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생명 주일

최후의 만찬에서 남겨주셨던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새로운 계명,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예쁘고 따뜻한 말씀조차도, 어떤 일상 앞에서는 서운하게 들리는 날이 있습니다. 교무실 자리 건너편에는 안전생활부장 선생님이 계십니다. 학생들의 갈등이나 일탈을 담당하는 분이시지요. 예전에는 학생주임이라고 불리던 그런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건너편 자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갈등과 일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의 간절한 마음과 아이들의 마음이 어긋나는 그런 순간들이지요. 선생님의 한숨은 실패한 사랑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저조차도 속이 상합니다. 본당 사목자로 살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끔은 좋은 마음으로 봉사하겠다고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마음을 할퀴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달라는 이야기 앞에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정은 누군가에게는 공정과 정의이겠으나, 반대편에서는 배제이고 편애로 비치겠지요. 이 사람도 제 신자고 저 사람도 제 신자인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럴 때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채찍처럼 느껴졌습니다. 과연 이 말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저 ‘사랑하라’ 하셨다면 될 일을, 굳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아름다운 말씀이 서운한 날에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랑의 계명에다 묵상이랍시고 말을 덧대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침묵을 지키고 싶습니다. 도리 없이 말해야 한다면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물음이 가능할까요. 그러나 어떻게 물어보든 그 질문은 예수님이나 요한 복음사가를 만났던 사람들이 던졌던 질문과 닮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요한을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와 함께하며 배웠습니다. 요한은 묻고 예수님은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 요한은 노년을 맞았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순교했고, 그는 홀로 세상에 남아 주님에 대해 말해야 했습니다. 스승과 함께한 시간보다 한참을 더 살아낸 요한에게, 사람들이 묻습니다. 무언가 가르쳐주기를 청했습니다. 질문을 하던 청년 요한은, 이제 유일한 사도로서 답해야 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요한은 그렇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겨우 몸을 일으킨 뒤에 아주 짧게 말했다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십자가로 나아가던 스승의 가르침을, 죽음을 앞둔 요한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받았던 제자 요한이 이제 스승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라”는 요한의 대답에 많은 사람들은 ‘또 사랑이냐?’하고 푸념했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 가르침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요한에게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나 봅니다. 어쩌면 요한조차도 실패했는지 모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던 그 순간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엇갈려나갔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랬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도, 몸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모든 것을 쏟아 내시며 사랑하실 때도, 그야말로 당신이 친구라고 부르시는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바로 그 저녁에도 그랬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도망갔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그날에도, 예수님의 한결같은 마음과는 달리, 제자들의 마음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결같았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참 쉽지 않습니다. 내가 마주한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늘 고민해야 하지요. 그렇게 매 순간 사랑을 고민하는 것도 버거울 때가 많은데,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주님과 제자들, 사랑의 사도 요한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려웠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도 아득히 멀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말씀에 따라 사랑을 시도하겠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서로 사랑하는 데 실패할 겁니다. 그러나 실패할 일이라 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는 가르침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덧붙여 놓으셨지요. 사랑의 계명 안에, 이미 주님의 사랑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 사랑에 대한 응답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을 닮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5-05

[말씀묵상]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오늘 부활 제4주일에 교회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복음’으로 선포합니다. 부활 제2주일과 제3주일의 복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 곧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사건이었다면, 부활 제4주일에는 목자에 관한 비유를 복음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미사독서 목록지침」 100항 참조) 전례력에 따라 매년 선포되는 복음 내용이 달라지는데, 올해의 복음은 요한 10,11-18입니다(가해: 요한 10,1-10; 다해: 요한 10,27-30)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착한 목자’로 소개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예수님의 ‘착함’은 윤리적 혹은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착한 목자’입니다. 그분의 희생적 죽음으로 구원, 곧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내놓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테미’는 오늘 복음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한 10,11.15.17.18), 이 단어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요한 13,37; 15,13; 1요한 3.16) 목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자신이 관리하는 양들을 사자나 곰과 같은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목자(1사무 17,34-35; 이사 31,4)는 자기 목숨을 내놓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삯꾼과는 다릅니다. 삯꾼은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양들이 이리의 거센 공격을 받더라도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알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기노스코’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안다.”라고 할 때, 목자는 양들에 대한 정보를 지식적 차원에서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소통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양들과 인격적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알 때, 이러한 ‘앎’이 바탕이 되어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희생적 죽음은 목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사랑의 표현이며, 이를 통해 목자의 존재 이유와 사명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자신을 따르는 이들, 곧 제자들을 목자와 양에 비유하는 방법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경 민족은 어느 한 장소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유목민으로서 한 곳에 오랜 시간 동안 머물지 않고 양들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유목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해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나라를 잃고 바빌론으로 끌려가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백성의 목자’로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아들이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 그들을 지켜주시리라.”(예레 31,10. 참조: 예레 23,3; 이사 40,11) 에제키엘 예언자 역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는 하느님의 모습을 양 떼를 돌보는 목자에 비유하여 묘사하였습니다.(에제 34,11-16 참조) 요한 10장에서 사용된 목자와 양의 비유는 구약성경,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착한 목자’의 이미지로 예수님을 백성을 위한 메시아로서의 목자의 모습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의 죽음과 사랑을 소개하는 목자와 양의 비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는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부활 시기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인데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포함함으로써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의 목자 비유는 십자가의 그림자를 비추는 부활의 빛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10장 17절의 말씀이 이러한 묵상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내놓지만, 착한 목자를 사랑하시는, 곧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와 원로들 앞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 곧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힘주어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곧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여러분 앞에 온전한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사도 4,10) 착한 목자의 비유가 우리를 위한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는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인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60년 전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성소 주일을 제정하셨던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의 권고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울려 퍼져야 합니다. 성소자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는 지금,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자신을 희생하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성소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두 손 모아 기도합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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