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고목처럼 살리라

큰 늙은 나무처럼 살고 싶다. 가장 깊은 뿌리 끝부터 가장 높은 꼭대기 가지까지 수많은 생물이 평화롭게 함께 사는 고목처럼. 나무 뿌리 깊고 넓게 자리 잡은 땅 속엔 갖가지 벌레들이 개미, 땅강아지, 풍뎅이 오손도손 모여 살고, 사방으로 뿌리내린 땅 속엔 보금자리 파서 토끼와 여우 무리 이웃하며 살고, 하늘 향해 팔방으로 팔 벌린 나뭇가지엔 뭇 새들이 아늑한 둥지 짓고 옹기종기 사이좋게 살고, 향긋한 아름다운 꽃 찾아 이름 모를 뭇 나비 벌들이 분주히 나래 짓 하며 일용할 양식 서로 나누며 살고, 낮엔 푸르게 우거진 나무 숲 속에서 온갖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놀고, 간간이 딱따구리 찾아와 숨 가쁜 장단 맞추며 보금자리 만들고, 나무 그늘에선 사슴, 노루, 뭇 짐승들 한가롭게 휴식 즐기고, 나무 둥치엔 멧돼지 곰 찾아와 가려운 등 문지르고, 밤이면 부엉이, 박쥐들 활기차게 날갯짓하는 쉼터가 되고, 그늘진 이끼 자란 나무 아랫목엔 뭇 버섯들이 정답게 몸 맞대고 살아가는 넉넉하고 포근한 늙은 나무처럼 살고 싶다. 신선한 대기 청량한 바람 담은 수 많은 푸른 잎새와 가지로 합장하며 수시로 기도하고, 갖가지 형상으로 하아얀 뭉게구름 한가로이 떠 노니는 파아란 하늘 지붕 삼아 우러러보며 천상 행복 기원하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땅에 깊고 넓게 뿌리 내려 모든 것 품고 나누며 공생하는 고목처럼 살리라. 글 _ 이정규 마카리오(교육학자, 시인) / 캐나다 캘거리교구 성루카본당

2024-09-01

[내 눈의 들보] 외국어 성지해설사를 기다리며

9월 순교자 성월이 가까워지면서 우리 교회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천주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조선왕조 치하에서 평신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직접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지키다가 목숨까지 바친 큰 특징이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250년 가까운 역사 속에 수많은 역경이 있었음에도 꿋꿋이 신앙을 지키며 꾸준히 성장해 왔다. 그리하여 1984년에는 순교자 103위가 시성되고, 2014년에는 순교자 124위가 시복되는 영광의 시간을 맞이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신앙선조들이 있다. 우리는 그분들의 신앙 여정을 살펴 찾아내고, 그분들과 연관된 장소를 찾아내어 성역화하고, 성지들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그 성지를 찾아가려는 열심한 신자들이 많아지면서, 순례에 신앙적 의미를 담은 신심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교회 성지를 모은 책자가 나오고, 성지를 안내할 해설봉사자들이 양성되고, 전국을 쉬 다닐 수 있게 교통편이 발달하면서 순례행렬이 순조롭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순례에는 한국교회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외국인들도 점점 많이 참여하고 있다. 2024년 봄, 방한한 여행입국자 수가 2020년 이후 최대치로 올라, 코로나19 이전 대비 90% 가까이 회복됐다고 한다. 월평균 100만 명의 외국인이 관광차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서울 명동을 예로 보면 각국에서 많은 외국인들이 명동대성당을 들러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양인뿐 아니라 중국인, 동남아인 등 여러 나라, 여러 인종들이 다녀간다. 일부 외국인은 외국어 미사 시간에 맞춰 미사를 드리기도 하지만, 그외 대부분은 성당 입구에서 사진 찍고 잠깐 둘러보다가 되돌아 나간다. 그런데 이들을 위한 안내 수단은 안내판 이외에는 미미한 것 같다. ‘한국천주교 성지’에 대한 적극적인 해설의 필요성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한국교회는 복음화의 일환으로 입교자를 증가시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21세기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문화를 복음적 가치와 합치시켜 보편적 인류 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간단히 말해서 ‘문화선교의 장’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려면, 교회는 이러한 사명에 부응할 수 있는 유능한 봉사자를 양성해야 하겠다. 특히, 한류 등으로 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찾는 시대에 실용외국어 구사자, 특히 외국어 구사능력이 있고 신앙적으로도 성숙한 평신도들을 교회 내에서 찾아 모아야 하겠다. 찾아보면 얼마든지 많이 있다. 문화선교자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게 하려면, 그들이 쌓은 능력과 인격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공동체와 활동영역을 만들어 주고, 그들이 활동할 구체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 환경을 예측해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고언을 하고 싶다. 신자들 사이에서 교회 조직의 책임 있고 높은 자리에 앉는 사람이란 높이 올라 멀리 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거나 경험이 좀 있다거나, 친목을 잘하는 것만으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기존 구성원들과 새로 들어온 이들에게 훈화할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글 _ 김기혁 요한 레오나르도(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 시복분과)

2024-08-25

[독자마당] ‘분노는 나의 힘’ 용기 있는 고백에 박수를 보내며

연일 파리 올림픽으로 지구촌이 뜨겁다. 선수들의 피땀 눈물이 스민 훈련 과정은 들으면 들을수록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특히 부상을 딛고 메달을 딴 선수들의 눈물과 포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금 어떤 생각이 스치면서 기뻐하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28년만에 배드민턴 금메달을 선사한 안세영 선수의 ‘작심 발언’이 뜨거운 감자다. 목표를 이루기까지의 원동력은 분노였으며 금메달을 통해 목소리를 높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요 종합일간지들은 ‘안세영의 셔틀콕… ‘낡은 엘리트체육’ 강타하다’(한겨레 신문), ‘메달보다 과정이 더 중요한 MZ…안세영 ‘낡은 시스템’에 분노했다’(중앙일보), ‘낡은 시스템에 날린 MZ세대의 스매싱’(국민일보)으로 분석하며 한국 배드민턴협회의 구조적 변화를 촉구하는 사설을 내놓기도 했다. 안세영 선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우리 교회의 청년들을 떠올려보았다. 우선 성당에 스스로 찾아오는 청년들은 대부분은 교회 친화적이다. 사제와 본당 사목회에서 요청하는 부분에 귀 기울이고, 본당에서 정해진 규칙은 서로 독려하며 함께 지키려고 한다. 한 번에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대부분 받아들이고 교회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까지 협조적인 것이 놀라울 정도로 요즘 성당의 청년들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교회의 일에 친화적이다. 개인적으로 안세영 선수의 발언이 반가웠던 건 변화를 향한 '나비의 날갯짓'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협회와 상의를 하지 않았고, 동료 선수들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등 여러 이유로 잡음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변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한 명이 ‘바뀌어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청년들이 목소리를 내고, 교회는 목소리를 듣고 있을까? 분명 ‘바뀌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청년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청년을 주체적인 교회 구성원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교회가 청년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변화해야 한다. 모든 사목이 그렇지만 특히 청년에게는 시혜를 베푸는 듯한 지원은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당한 교회 구성원으로 존중받으며 함께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청년 신자 수를 늘리는 것이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청년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 기쁜 발걸음으로, 교회로 찾아오도록 ‘섬김의 리더십’으로 그들을 품어야 한다. 2027년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교회다. 기록적 폭염에 휴가를 떠나는 것도 버거운 요즘, 세계청년대회 발대식에 참석한 청년들이 명동대성당을 가득 메운 모습을 보니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청년과 교회, 변화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청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그 마음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3년 후 전 세계 청년들을 한국 땅에 맞을 때는 청년이 주인공인 신앙 축제가 되어 청년들의 목소리가 더 힘있게 울려 퍼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글 _ 박 체칠리아(수원교구 능평본당)

2024-08-18

[독자마당] ‘코로나19 극복과 종식을 위한 1000일 미사’를 종료하며

2021년 10월, 묵주 기도 성월 첫날에 ‘코로나19 극복과 종식을 위한 1000일 미사’를 시작했다. 부산교구 김해본당은 김해 지역의 모태 성당으로 연로하신 분들이 대부분인 공동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로 서로 위로하며 시작한 첫 미사가 올해 7월 1일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전국에서 유례없는 시작이라고 뿌듯해하며 모두가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일부는 유난을 떤다고 부담스러워했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제대 옆 전광판에 하루가 더해질 때마다 조금씩 들뜬 기분도 들었다. 해가 바뀌고 2022년 1월 8일, 어느덧 백일이 되었다. 시작했으니 두려움 없이 전진이다. 백일 떡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교우들과 이야기하며 1000일 미사가 끝날 때는 언제쯤인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약 2년 뒤 6월쯤이라고 짐작하며 당연히 그때는 완전하게 종식되리라고 희망했다. 2023년 부산교구 사목지침인 ‘친교와 말씀의 해’를 지내면서 우리의 삶 안에서 말씀을 통해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한 해로 살기 위해 일상의 삶을 실천하는 가운데 변함없이 ‘코로나19 극복과 종식을 위한 1000일 미사’는 꾸준히 지속되었다. 꼬미시움에 김해성당 꾸리아 사업 보고를 할 때도 1000일 미사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여러 본당의 부러움도 있었다. 김해본당 교우가 아니어도 관심을 보이는 분들도 계셨다.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초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코로나19로 인해 조마조마한 많은 날을 보내야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외로운 뒷모습을 보고 울컥했던 교우들도 많았는데, 145일째 미사 후에는 신부님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황님의 영육 간의 건강을 위하여 ‘주모경 한 번 바치기’ 숙제를 내주시기도 했다. 계획했던 사업이 무산되는가 하면 회의도 비대면으로 진행하면서 왠지 모를 슬픔이 확 밀려왔던 때의 느낌을 기억한다. 일상의 삶이 일상이 되지 못했고 온라인 개학이라는 초유의 상황에 가슴이 서늘해지는가 하면 생명의 위협까지…. 많은 상실을 경험하며 아픈 시간을 힘겹게 버텨내는데 1000일의 미사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미사를 처음으로 재개하던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프다. 미사 내내 가슴으로 울며 아픈 가슴을 달랬다. 아픈 만큼 기도가 절실했다. 어느 날 텅 빈 성당에 앉아 십자고상을 바라보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서 한참을 울고 온 날도 있었다. 물리적 거리 두기는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했지만, 인간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는 시간도 어쩌면 또 다른 성장의 기회라고 지금은 자위한다. 아기 엄마인 대녀와 통화를 하며 외출할 때 마스크를 습관처럼 들고나온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이 나면서도 눈물을 훔쳐낸 경험도 있다. 이젠 이렇게 가슴 시린 얘기로 남겨도 되는 것일까? 2024년 ‘청소년, 청년의 해’를 맞이해 환대와 경청의 해를 지내며 우리 교회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 젊은이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어울리기 위해선 우선 그들을 성당으로 모아야 한다. 여전히 팬데믹 이전만큼의 미사 참례자 수는 회복되지 않았다. 청소년과 청년은 특히 더 관심으로 다가가야 하고 이해와 존중으로 함께해야 한다. 팬데믹이 남긴 상처를 딛고 일어서야만 한다. ‘코로나19 극복과 종식을 위한 1000일 미사’의 종료 미사 중, 나는 이렇게 자신을 다지고 있었다. 2024년 7월의 첫 주일, 드디어 ‘코로나19 극복과 종식을 위한 1000일 미사’ 종료로 감사 미사를 봉헌했다. 제대 뒤의 벽엔 기다란 현수막이 걸리고 제대 앞에도 묵주로 1000일을 표시하고 양쪽으로 기둥처럼 멋지게 세운 꽃꽂이를 보니 송이송이 마다 정성이 가득 앉아 있다. 현수막과 묵주로 꾸민 ‘1000일’이라는 숫자가 마음을 설레게 했다. 기도하고 마음을 모으며 함께한 시간에 대한 감사와 서로에게 힘이 되어 나누는 자축의 미사에 마음을 더했다. 1000일 동안 미사에 다 참례하지는 못했지만, 퇴근 후 성당으로 향한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 아니라 시작했으니 마침이 있었고, 뿌듯함과 대견함이 자리했다. 행복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글 _ 신순재(루치아·부산교구 김해본당)

2024-08-11

[독자마당] 나가사키의 새벽미사

코로나19가 퍼지기 전에 일본 나가사키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성지순례를 간 일행 한 분이 일본 성당에서 새벽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신자 수가 적은 일본인데 평일에 새벽미사가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물어물어 숙소 근처에 성당을 찾아봤는데, 마침 가려는 날에 그 성당에 새벽미사가 있었습니다. 일본어로 봉헌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미사를 마치고 기도하는 일본 신자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기도를 하는데 어떤 분들은 기도서도 보지 않고 그 긴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일본천주교회의 아침기도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아침기도는 분명 1장정도 분량의 길지 않은 기도문인데, 일본의 아침기도는 장장 20쪽이나 되는 긴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긴 기도보다 더 놀랐던 것은 나가사키대교구의 성당들은 매일 새벽미사를 봉헌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침 새벽미사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나가사키대교구는 일본 안에서도 신자비율이 높은 곳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나라보다는 신자비율이 높지는 않다고 합니다. 게다가 신부님들의 수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가사키에서 선교하시는 한국 신부님들도 계실 정도지요. 나가사키는 대대로 신앙을 물려받은 신자들이 많은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교 집안이 많은 것이지요. 그 신자들이 매일 새벽에 미사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해 왔기 때문에 이 신앙생활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매일 새벽미사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적더라도 새벽미사는 매일 봉헌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나가사키의 성당에 새벽미사가 있는지 찾아보면서 ‘우리나라보다 신자수가 적은 일본인데 평일에 새벽미사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신자의 많고 적음으로 신앙의 깊이를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억도 희미해지고 있었는데, 최근 다시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새벽미사를 없앤 우리나라 본당들의 모습을 보면서입니다. 코로나19로 미사 참례자 수가 줄어들고, 특히 새벽미사 참례자가 많이 줄어들자 본당에서 평일 새벽미사를 없앤 것이었습니다. 주변 신자분들께도 들어보니 생각보다 평일 새벽미사를 줄인 본당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 신자분을 통해 들은 것이지만, 어떤 신부님은 평일 새벽미사를 줄인 것에 대해서 “신자들이 적어서 미사 할 맛도 안 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겠지만, 적잖이 충격이었습니다. 신부님들께서 미사를 주례하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이해는 됩니다. 주님의 제사를 정성껏 봉헌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지요. 그것도 새벽미사를 매일 집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나가사키에서 드렸던 새벽미사가 자꾸 떠오르고 맙니다. 한국 성당들에서 봉헌하는 새벽미사는 분명 일본 나가사키의 성당에서 봉헌했던 그 새벽미사 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참례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지요. 글 _ 이 요셉

2024-07-28

[독자마당] 성 베드로 대성당의 김대건 성상

가톨릭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한진섭(요셉) 조각가의 성 김대건 신부님 성상 제작 과정을 잘 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목에 이끌려 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성상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되기까지의 긴 과정이 너무 힘들고 어려웠음에 마음이 쓰여 더 관심을 갖고 읽게 됐습니다. 이 역사적 거사가 확정되기까지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 유흥식(라자로) 추기경님과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님의 노력이 결정적이었다고 한진섭 작가는 말했습니다. 성상이 완성돼 성 베드로 대성당에 우뚝 서기까지 많은 분의 노고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글에서는 직접 성상 작업을 한 한진섭 작가에 대한 느낌만 쓰겠습니다. 우리나라 가톨릭 신자라면 최초의 사제가 김대건 신부님임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증조부에 이어 아버지께서도 순교하신 가톨릭의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셨으니 이미 하느님께서 예비해 두신 하느님의 준비된 사제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모국을 떠나 낯선 땅 마카오로 유학길에 오르고 10년 뒤 사제가 돼 모국에 돌아와 25세의 나이에 순교하실 때까지의 10년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이 길을 걸어 우리나라 첫 사제가 되셨고 이제는 동양인 최초로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우뚝 서게 됐으니 그 감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오늘 우리에게도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고 묻습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는 어떠한 범법 행위도 서슴지 않는 오늘의 상황에서 김대건 신부님처럼 오롯이 신앙(하느님)을 위해 온몸을 바치고 살라고 한다면 시대착오적인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한진섭 작가가 겪은 그간의 어려웠던 일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중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2023년 섭씨 40도가 넘는 이탈리아의 여름에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불볕 더위의 환경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작업에 임한 이야기, 체력 유지를 위해 숙소에서 아침 식사로 달걀을 삶아 2개로 버티었다는 일, 작업장에서 4m나 되는 높이의 사다리에서 떨어졌는데도 뼈도 다치지 않고 신기하게도 벌떡 일어나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한진섭 작가는 그 순간 옆 사람들은 기적이라고들 했지만, ‘김대건 신부님이 항상 지켜주고 있구나’하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했습니다. 저도 진심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다 하느님께서 늘 지켜주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한진섭 작가의 긴 연재를 감동으로 읽으며, 그의 글은 보통 신자인 저의 느슨한 신앙의 태도에 큰 채찍이 되었습니다. 한진섭 작가의 뜨거운 열정으로 험난한 난관을 거쳐 성 베드로 대성당 그곳에 우리의 전통의상 두루마기에 갓을 쓰시고 당당히 우뚝 서신 김대건 신부님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600년 가까이 비어있던 이 자리는 하느님께서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한진섭 작가의 이 한마디에 모든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진섭 작가님 참으로 애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진섭 작가의 열정이 배인 김대건 신부님의 성상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세계인과 함께 영원히 영원히 빛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글 _ 손준자(안젤라·부산 수영본당) 원고량: 7.9매 사진 없음.

2024-07-07

[독자마당] 천재를 기억하며

조선 후기 개혁군주 정조는 1790년 9월 12일 특별히 과거 시험장에 나와 합격자들을 친견하고 70세 이상의 고령 합격자와 20세 이하 소년 합격자를 따로 불러 한차례 시험을 더 치렀다. 16세 최연소 합격자였던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은 임금이 직접 점수를 매긴 시험에서 1등의 영예를 안았다. 그 뒤로 황사영은 임금이 잡았던 손목에 평생 띠를 두르고 다녔다. 견직물인 명주로 만든 토시로, 이 토시로 인하여 이백 년 가까이 잠들어 있던 고령토 속에서 덩어리진 검은 천 조각이 나왔고 비로소 그의 묘가 확인되었다니 기적이었다. 황사영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 송추계곡 가마 산 35번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천재는 정조의 총애로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려 있었지만, 출세의 길을 마다하고 고난과 박해만이 기다리는 신앙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신앙에 대한 열정과 패기로 배론성지 토굴에서 조선교회에 대한 박해 상황과 외국의 도움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를 썼다. 이 백서로 그는 대역부도죄를 선고받고 서울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으로 순교하였다. 황사영이 썼던 ‘백서’는 조선왕조를 부정한다거나 국가를 전복하려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조선의 정치적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데 있었기에 역적으로서의 모습만 부각된 역사가 바로잡히고 진실이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황사영 백서에 대한 후대의 격렬한 반응은 전체 백서가 아닌 가백서 만을 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서 원문에는 황사영이 청나라에 조선을 편입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 없었다. 사람들은 편집된 가백서만 보고서 황사영의 이름에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오직 신앙의 자유, 하나뿐이었다. 백서 원본은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의금부와 포도청에 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를 소각, 정리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왔다. 전국 188곳의 성지순례 중 한 곳으로 의무적으로 순례해야 하는 성지 완주의 차원이었지만, 황사영 묘소를 순례하며 참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지금이라도 가족들을 합장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약용(1762~1836)의 큰형인 정약현의 장녀이자 정약용에게는 조카였던 부인 정명련과 아들 황경헌,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던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 생가에서 모여 잠들게 하여주길 기도했다, 물론 하늘나라에서는 가족이 모여 있지 않겠는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밀알이 된 교회사에 불편한 역사적 진실이 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박해가 끝난 시점에서 제일 먼저 순교자들의 자손들을 살펴 주었다면, 황사영의 아들 황경헌이 추자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또 부인 정명련의 삶이 어떠했는지, 기록이라도 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현재 천주교인은 6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양적 성장을 거듭했지만, 질적으로는 반성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천재 황사영의 진심을 이해하고 백서를 통해 천재가 고백한 신앙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신앙은 곧 세상을 구하는 좋은 약이라고 생각되어 신앙을 지켰다”는 그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 진심을 새삼 되돌아보면서, 세상 사람들, 특히 신앙인들은 그 고백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글 _ 노정남 아가다(서울 한강본당)

2024-06-30

[독자마당] 이기헌 베드로 주교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지 않고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손을 누구에게나 내밀어 그 손을 잡는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하고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고 당신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형제자매들과 정다운 악수를 하고 서로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깨닫고 친밀한 사랑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다정한 악수는 오랫동안 그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관심의 표현이 악수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이처럼 손은 우리의 신체 가운데 가장 많은 역할을 하는 지체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전달하는 소중한 지혜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내 손과 이웃의 손이 서로 다정하게 잡을 때 성당은 더 기쁨이 넘치고 아름다워지며 이 사회 이 세상도 더 아름답게 된다고 봅니다. 본인은 의정부교구 신앙교육원 선교사 양성 7기생입니다. 졸업식 날 세 번이나 오고 가면서 이기헌 베드로 주교님을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시는 이기헌 주교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의정부교구의 안전과 부흥, 번영을 위해 노력하신 주교님 이젠 휴식을 즐기며 편안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선배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 잘 있어요, 후배님과 정든 교육원, 신부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교회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울먹이며 부른 졸업식 노래가 귓가에 계속 맴돕니다. 글 _ 한문석 요셉(의정부교구 중산본당)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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