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주님의 날, 표징을 알려준 요엘 예언자

‘메뚜기도 유월이 한철이다’라는 속담의 유래는 메뚜기는 여름에 한창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나왔다. 누구나 어느 한 시기에만 번성할 뿐, 영원하지는 않으니 겸손하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때로는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마구 날뛰는 모습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는 벼의 잎을 먹으려고 몰려오는데 벼잎이 성장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메뚜기의 서식처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열대우림의 저지대, 초원지대에 가장 많이 산다. 최근에도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인도, 브라질 등에서 메뚜기떼가 농작물에 큰 피해를 줬다. 2004년 가을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엄청난 메뚜기 떼가 농작물의 3분의 1을 먹어 치우는 막대한 피해를 줬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 조선 시대에 메뚜기(풀무치)의 습격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 무리가 1000억 마리라면 상상이나 될까. 흥미로운 것은 메뚜기는 고단백 음식으로 레위기에는 메뚜기는 먹을 수 있는 벌레로 등장한다.(레위 11,22 참조) 메뚜기떼가 앞에 등장하는 장면 때문인지 메뚜기 하면 요엘서가 떠오른다. 요엘은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이다. 정작 요엘서에는 오직 “프투엘의 아들”(요엘 1,1) 외에는 그에 대한 단서가 될 내용은 전혀 없다. 요엘 예언서를 읽어보면 그가 경신례에도 밝았던 예언자이며, 뛰어난 시인이었음이 추측할 수 있다. 요엘은 옛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심판과 구원을 힘차게 선포했다. 주님의 날에 이루어질 주님의 응답과 축복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결국 요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기원전 5세기경,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도 재건하고 성벽도 쌓고 유다교도 형성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사람의 성향이 그렇듯 안정기에 들어가면 안주하려는 경향이 많아진다. 이러한 때에 요엘은 메뚜기 재앙과 가뭄을 언급하며, 먼저 사제들에게 단식하고 기도할 것을 요청했다. 주님의 날이 가까웠고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과 멸망이 순식간에 들이닥치듯 다가온다는 것이었다.(요엘 1,15 참조) 성경에서 재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표징으로 나타난다, 요엘은 당시 상황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 차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도록 촉구한 것것이다. 요엘은 하느님께서 심판도 하시지만, 만민에게 영을 불어넣으시고 그 심판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꿔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전하며 희망을 전해준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가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 안에 머물 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에도 많은 표징, 즉 사인(sign)을 본다. 야구 게임에서 보면 사인을 못보고 잘못 이해해서 아웃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우리 인생도 똑같다. 사업이나 인간관계 등 교훈이 되는 표징을 지나쳐 인생에 큰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24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아버지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죽은 압살롬 왕자

‘삼일천하’로 불리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과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젊은 개화당(開化黨)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守舊黨)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시도한 일종의 쿠데타이다. 우정국(郵政局) 낙성식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켜 당시 문제를 일으키던 민 씨 친인척들과 부패 관리들을 처형하고 축출하였다. 12월 6일에 개화당은 중국 내정간섭 배제, 문벌과 신분제 타파,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국민들의 평등권 확립, 조세 제도변화 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당시 갑신정변이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는 혁명에 대한 민중들의 이해가 적었고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많이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의 중흥을 위해 구습의 봉건체제를 변화를 시도했던 혁명이라는 점에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긍정적 가치를 두고 있다. 주동자 김옥균은 외국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머리는 종로거리에 걸렸다. 한 영화의 대사 생각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쿠데타 아닙니까!” 다윗의 아들인 압살롬은 위로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장남 암논이었고, 둘째는 어릴 적에 죽었다. 압살롬의 왕위 계승 서열은 암논 다음이었다. 그런 둘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암논은 압살롬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타마르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다. 하루는 꾀병을 부려서 병간호를 위해 찾은 타마르를 자기 침실에 끌어들여 몹쓸 짓을 했다. 한참 후 사랑이 식은 암논은 타마르를 쫒아냈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압살롬은 암논을 처치할 복수를 계획했다. 다윗 왕도 암논이 타마르에게 한 사건의 전모를 듣고 노발대발했으나 정작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는 않았다. 다윗 자신도 부하의 처인 밧 세바를 빼앗아 아들을 징계할 도덕적인 명분이 없었다고 생각했을까? 시간이 지나도 암논에 대한 징계는커녕 오히려 다윗의 마음이 암논에게 기우는 것을 눈치챈 압살롬은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했다. 그 사건으로 압살롬은 국외로 나가 3년간 타향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이스라엘로 압살롬이 돌아왔지만 다윗은 문전박대했다. 시간이 자꾸 흐르자 초조해진 압살롬은 자기의 세력을 늘리기 시작했다. 다윗에게 불만을 품던 상황에서 압살롬이 반란을 드디어 일으켰다, 압살롬은 큰 피해 없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압살롬의 책사였던 후사이라는 인물은 사실 다윗의 첩자였는데 그의 말을 듣고 추격을 멈추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결국 전투 경험이 많은 다윗의 정예병들은 압살롬의 군대를 완패시켰다. 출정하는 부하 요압에게 다윗은 압살롬이 반란자지만 죽이지는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후환이 있을 거라 판단한 요압은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죽였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통곡했다. 압살롬의 다윗에 대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 세력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1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책임이 있는 르하브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폭력성으로 혁명가의 길을 가게 됐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13세에 가출을 했고 평생 애정 결핍에 목말랐다고 한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마오는 교육은 최소한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생각으로 유교 경전의 기초지식을 배우다 중단하고 집안의 농장에서 하루종일 일해야 했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마오는 잦은 구타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당시 중국에는 노동력이 부족한 프랑스로 가서 일하면서 외화도 벌고 동시에 외국어와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마오쩌둥도 프랑스에 가고 싶었지만 수중에 여비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 북경대 도서관에서 일했는데 이 기간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학구열이 높은 마오는 도서관에 산처럼 쌓인 책더미 안에서 지식을 쌓았다. 특히 역사 서적을 즐겨 읽었는데 고대의 제왕들은 유학을 가지 않고 정무를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결국 프랑스 유학을 포기하고, 중국의 역사서를 독파하며 혁명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지만 친한 친구에게도 함구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게 없지만 르하브암도 겉으로 자신의 뜻을 이야기 하지 않고 안으로 품고 후일을 도모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스라엘 왕국 제4대 국왕인 르하브암(기원전 931~913년) 때 남북 이스라엘이 분열된다. 그는 다윗의 손자이자 솔로몬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을 물려받았다. 솔로몬으로부터 왕위는 물려받았지만 솔로몬의 과도한 부역과 세금징수 등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다윗 왕가에 대한 반감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로보암을 앞세워 부당한 부역과 높은 세금을 낮춰 달라고 요구했다. 르하브암은 사흘 뒤 답변하겠다고 하며 솔로몬을 보좌하던 관료들과 논의했다. 관료들은 솔로몬왕 때 세금이 너무 과했다며 예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견에 긍정적 답변을 줄 것을 권고했다. 르하브암은 자신과 함께했던 소장파 신하들과도 회의를 했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은 백성들을 너무 풀어주면 새로운 왕을 우습게 보며 권위가 실추된다고 더 가혹하게 통치하라고 조언했다. 르하브암은 약속한 사흘이 지나 신하들을 만났는데 인생의 최고 악수(惡手)를 두었다. 이 한 마디가 바로 남북 이스라엘 분열의 도화선이 됐다. 지도자는 쉽게 속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1열왕 12,14) 불이 타고 있는데 휘발유를 부은 셈이다. 이미 실망으로 다윗 가문에 등을 돌린 10지파는 분노하며 ‘우리와 다윗과 무슨 연관이 있나. 이제부터 너나 잘 하세요’하며 떠났다. 르하브암의 통치 영역 안에는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만이 남았다. 르하브암은 부역 감독으로 아도람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돌로 죽여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르하브암 왕도 위기를 느껴 예루살렘으로 급히 도망하였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10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율법 준수 통해 개혁 외친 에즈라 예언자

가톨릭교회는 공의회 등을 통해 개혁을 계속해 왔다. 물론 개혁은 중요한 교리나 교회의 전승을 간직한 채 교회가 그 시대에 맞갖게 살도록 하는 변화였다. 1914년 8월 20일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는 사도 바오로를 주보로 모시는 수도회를 만들어 사회홍보 수단을 통해 선교에 종사하려고 시도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 현대문명의 이기는 세속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심지어 죄악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오히려 홍보 수단을 이용해서 선교에 선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의 시도를 위험하다고 악평하는 교회 내 의견도 적지 않았다. 개혁은 자고로 공격과 비판에 직면하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현대의 최고 영성 지도자로 존경받는 안셀름 그륀 신부님에게 코로나가 성행할 당시 나는 ‘코로나 종식 후 교회에 변화가 올까요?’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때 그륀 신부는 단호하게 코로나가 끝나도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힘들다고 하셨다. 교회는 많은 이탈자(특히 젊은층)가 생길 것이며 교회는 다각도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셨다. 실제로 최근 주임 신부님들은 젊은이들의 이탈이 심각하다고 우려한다. 그륀 신부님은 그동안의 사목 패러다임이 변화되지 않으면 신자의 감소는 계속될 것이라 염려했다. 이제 교회는 안에서 신자들을 기다리지 말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야말로 개혁이 절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사제들과 레위인들, 바빌론에서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은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전 공사를 시작하였다. 집 짓는 이들이 주님의 성전 기초를 놓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고 찬송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눈앞에서 성전이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목 놓아 울었다.(에즈라 3,8-13참조) 그리고 성전은 방해하는 세력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완공되었다. 예언자 에즈라(기원전 480-440년)는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해이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 준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그를 제2의 모세로 부른다. 그는 유배 기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빠졌던 우상숭배를 강력히 규탄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즈라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옷을 찢고, 하느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며, 동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공동체를 정화하려고 노력했다.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벽 공사를 완성하자, 에즈라는 모세 율법을 모은 책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다. 유배된 많은 유다인들이 이방인 여성들과의 결혼으로 더욱더 이스라엘의 신앙에 위기가 닥쳤다고 생각했다, 백성과 제사장은 율법을 지키고 모든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않겠다는 언약을 맺었다. 에즈라의 개혁은 모세오경의 준수 등, 이스라엘의 기본에 충실한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1-03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우정과 의리의 사나이, 킹메이커 요나탄

미국 최초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힐러리 클린턴은 선거유세 내내 유리천장(glass ceiling)을 깨뜨릴 것이라 주장했다. 유리천장이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직장 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 등의 이유로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다는 비유적인 경제학 용어이다. 유리천장은 직장에서 대다수 여성들,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들이 영향력 있고 수입이 많은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다. 우리나라의 예능계에서 유리천장을 깬 사람 중 한 명은 서혜진(레지나) PD라 생각한다. 그동안 이류음악 취급을 받던 트로트를 일시에 주류 음악으로 판도를 바꾸어놓았고 임영웅과 송가인 등 트로트 가수들을 대스타로 발굴해 냈다. 서 PD는 보수적인 조직의 방송국, 예능분야 안에서 적어도 유리천장을 깨뜨린 독보적인 인물이다. 누구도 예상 못한 일본가수들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만들어 크게 흥행시켰다. 그는 흥행은 기대했지만 문화교류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서 PD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는 문자투표를 할 때 시청자들이 100원씩을 내고 참여하는데, 매해 이 돈을 모아 좋은 일에 사용하려고 한다. 올해에는 5000만 원을 적십자에 기부하고 1000만 원 정도를 우간다에서 봉사하시는 수녀님들께 드리게 됐다. 팔순이 넘으신 수녀님은 “마침 보건소 봉사자들을 위한 쉼터를 지으려고 주님께 기도했는데 이틀 만에 응답이 오네요”라고 하셨다고 한다. 서 PD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려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꿈을 세상에 활짝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님이 주신 탈렌트라고 생각한다. 다윗이 살기 등등한 사울왕을 피해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시기가 있다. 그런데 몰래 찾아와 그의 힘이 되어준 사람은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었다. 요나탄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표지로 자신의 겉옷과 무기를 다윗에게 주었다. 요나탄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지만 전투에서는 용맹스런 전사로 많은 공을 세웠고 생의 마지막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장군이다. 요나탄이 사울의 아들로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당시에 반대할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요나탄은 일찍부터 다윗의 인품에 마음이 끌려 다윗과 의형제를 맺고 평생 의리를 지켰다. 사울이 다윗을 질투하여 처단하겠다는 속내를 전한 것도 바로 요나탄이었다. 그리고 사울에게 충성한 죄밖에 없는 다윗을 왜 죽이려 하느냐며 직언을 한 것도 요나탄이었다. 요나탄은 다윗에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요나탄의 다윗에 대한 우정과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요나탄은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는데도 다윗의 큰 능력을 보고 왕위마저 양보한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사실 요나탄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했고 이스라엘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권력의 탐닉은 부자간에도 양보가 없는데 요나탄은 개인보다는 국가, 우정을 지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권력 앞에서는 양보나 의리와 정의도 메마른 요즘 요나탄과 같은 인물이 더욱 그리워진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2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에스테르

6·25전쟁이 시작됐을 때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에게 밀렸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1950년 7월 5일에는 미군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였는데, 세계 최강인 미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북한군에게는 소련제 전차가 있었는데 국군에게는 전차를 파괴할 만한 화력이 없었다. 그래서 국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북한군 전차에 직접 올라가 해치를 열고 준비한 수류탄, 화염병을 안으로 던져 제압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차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국군들은 결사대를 자원으로 뽑았다. 6·25전쟁 하면 남성들만 주로 언급되는데, 사실은 1950년 8월에 해병대 4기 모병에 1300여 명 중 여성에 126명이나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50년 9월 6일 서울수복 후 여군 500명 모집에 수천 명이 몰렸다고 하니 당시 여성들의 애국심도 대단했다. 최근 한 모임에서 요즘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우리나라도 걱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한 전문직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면 바로 입대해야죠”라고 담담하게 말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성경에서 용감한 여성을 꼽을 때 에스테르가 빠지지 않는다. 베냐민 지파 모르도카이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잡아 온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모르도카이는 왕궁에서 일을 했는데 용모가 빼어난 에스테르를 양녀로 삼았다. 나중에 에스테르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왕비가 되어 목숨을 걸고 유다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애국 여성이 되었다. 모르도카이는 우연히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두 내시의 반역 모의를 듣게 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을 고발하였고 두 내시는 처형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로 왕의 신임을 더 얻게 된다. 한편 이 두 내시와 이해관계가 있었는지 재상 하만은 이 일로 모르도카이와 그의 민족 유다인들을 말살하려고 작정한다. 에스테르가 왕후가 된 후 모르도카이도 궁궐 대문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모든 신하들은 재상 하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지만 모르도카이는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하만은 왕에게 유독 유다인들만이 다른 민족과 화합하지 않아서 앞으로 위협이 되기에 처단해야 한다고 고발하고 왕에게 허락까지 받았다. 이 사실을 모두 알게 된 모르도카이는 옷을 찢고 자루 옷을 입은 다음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통곡을 하며 에스테르에게 소식을 전했다. 에스테르는 유다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흘 동안 자신을 위해 단식기도를 올려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왕궁에서 단식기도를 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 뒤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만나 유다인들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음모를 폭로했다. 에스테르의 지혜로 하만이 되치기를 당해 오히려 죽게 되었다. 에스테르가 모르도카이에게 보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다인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긴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20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에돔의 멸망을 전한 예언자 오바디야

1943년 이전에는 구약성경이 가톨릭 신학생들도 읽지 못하는 금서(禁書)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에 가톨릭교회는 구약성경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신자들을 구약성경에 접근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례 개혁 이전에는 주일 미사 때 구약성경의 독서가 없었으나 지금은 제1독서에서 구약성경을 꼭 읽게 되어 있다. 이단 교회는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생겨난다. 특히 구약 부분은 인간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어 있어 아예 전문가들 이외에는 접근을 금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 오직 하느님,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의 사상이나 성향을 극단적으로 거슬러 행동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구약성경를 읽는 것 자체를 소홀히 하게 되었고 구약성경을 읽는 대신 준주성범을 오랜 세월 동안 읽었다. 사실 구약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을 때 잘못 이해할 위험성도 많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은 1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 점차로 가톨릭 내에서도 활발히 성서학 연구를 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1943년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을 통해 정식으로 성경 문헌을 개방하고 성경 연구의 문을 공식적으로 열어주었다. 유다가 멸망할 때 하느님을 배신하고 갖은 나쁜 짓을 한 에돔의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가 오바디야이다. 오바디야 예언자의 정보는 아주 부족하여 작성 시기는 물론 많은 논란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오바디야 예언자는 에돔에 관해 분명하게 기록했다. 책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초기 시대에는 오바디야가 선지자 엘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앗시리아가 침공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 유배시켰다. 바빌론 유배의 전후로 해서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굳이 나누자면 바빌론 유배 전후로 구분한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 예언자들은 정착 생활을 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배반하지 말고 오직 자신들을 구원한 유일한 하느님만을 섬기고, 계약으로 맺은 율법을 지켜 신실하게 살라고 권고했다. 엄밀히 따지면 하느님을 믿고 있는 채 우상도 함께 주인으로 모신 죄였다. 종교혼합주의라 할까.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곳의 잡신을 섬기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이스라엘은 벗어나지 못했다. 예언자 오바디야는 지속해서 에돔의 멸망을 외쳤지만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고 멸망한다. 유다인들은 비참하게 바빌론으로 끌려가 50여 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오바디야는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언했다. 이제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들이나 이스라엘의 남겨진 이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후세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말씀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13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다윗에게 직언한 예언자 나탄

자고로 권력자는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독재자들이 국민을 돌보는 갖은 연출을 하는 것은 민심을 얻기 위해서이다. 마음을 얻는 것은 비단 정치뿐 아니라 직장이나 사회, 가정 등 모든 인간관계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옛날의 왕이 가진 권력은 절대적이라 왕에게 직언하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 실제로 권력자에게 직언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것은 예전의 일만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직언을 피하고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고 고집이 세지는 경향을 자주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세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 중 하나이고 뇌의 신경세포와 접촉하여 정보가 오고 가는 부분이 줄어들어 뇌가 굳어지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경우 새롭게 생각하지 않고 원래 하던 사고경로만 따른다. 반면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 계속해서 사고방식이 발전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나탄 예언자는 위세가 당당한 다윗 왕의 통치 시기와 이스라엘이 최고의 발전을 누리던 솔로몬왕 시대에 활약했던 예언자이다. 다윗 왕은 성전을 건축하려는 계획을 나탄에게 상의한다. 다윗이 나탄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잘 나타난다. 나탄은 처음에는 다윗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느님께서 나탄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이 아닌 그의 후손을 통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탄이 성경에서 관심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윗 왕에게 직언하여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탄은 다윗에게 우화를 들려준다. (사무엘기 하 12장 참조) 한 부자가 한 마리의 양을 가진 가난한 사람에게 빼앗아 자기 손님에게 대접한 이야기를 나탄에게 들은 다윗은 매우 분노하며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탄은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아내를 데려다 임금님의 아내로 삼았다’며 다윗에게 직언했다. 나탄의 갑작스런 책망에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 여기서 다윗이 어떤 아량을 가진 사람인지 잘 드러난다. 나탄의 직언에 다윗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잘 드러낸다. 하느님은 죄인이 죽기보다는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나탄이 다윗 왕의 죄와 잘못을 용기있게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일은 예언자의 모델로 여겨진다. 나탄은 참된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있어 왕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된 예언자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06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겸손하고 인성이 좋은 아람 장군, 나아만

오늘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성이 좋아야 한다. 6·25전쟁 중공군 공세 때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 장군은 아주 특별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 패튼 사령관이 최고로 칭찬한 지휘관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장기적인 국군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장교 인력 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재를 털고 주변의 돈을 모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유명한 일화는 6·25전쟁 중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 공군 대위가 북한 순천지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된 사건이었다. 이틀에 걸친 수색이 효과가 없자 불필요한 희생을 걱정해 직접 수색을 중지시킬 정도로 공과 사가 엄격했다. 그는 전쟁 후 교류가 없던 다른 미군 장군들과 달리 한국의 발전을 위해 자주 방문하며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전쟁영웅인 그는 정치권의 부름을 거절하고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였다. 그는 죽기 전까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여러모로 한국을 도왔다. 자신의 집무실 이름을 '한국의 방'이라고 했고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이야기하며 아들의 혼이 묻혀있는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오늘날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있는 까닭이다. 아람 군대의 장수인 나아만은 임금이 소중하게 여기는 큰 인물이었지만 불행하게 나병 환자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병 환자를 사회에서 추방했지만 아람에서는 왕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나아만의 집에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데려온 어린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이 소녀는 주인의 병을 고칠 이스라엘 지역의 유명한 예언자를 소개했다. 몸종이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면 주인의 심성이 좋고 잘 대해주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를 통해 엘리사의 명성이 이방인 땅에도 전파되는 순간이었다. 나아만은 임금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아람 임금은 친서를 써주었다. 나아만은 많은 재물과 함께 이스라엘 임금에게 향했다. 편지는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전쟁의 빌미를 찾고 있다면서 옷을 찢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엘리사는 왕실에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 한다. 나아만은 대규모 군대와 함께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나와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예언자의 말만 전한다. 나아만은 긴 여행 끝에 도착했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엘리사에게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려 했다. 부하들이 막아서며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번 해보라는 권유에 가르침대로 하니 나아만은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나아만이 나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교만과 자존심을 버렸고 부하들이 충고를 들을 줄 아는 넓은 아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만은 치유 후에도 겸손하고 인성이 좋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더더욱 어떤 분야든지 겸손하고 인성이 좋아야 한다. 교만과 이기심은 자신과 주변까지 추락시킨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29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최후의 날 예언한 스바니야 예언자

예로부터 사람들은 개를 가축과 애완용으로 길들여 옆에 데리고 살았다, 그 역사가 약 2만 년에서 4만 년 전부터라니 유구하다. 얼마 전 동영상에서 큰 곰이 우리를 넘어 강아지를 공격하자 어미 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0배나 큰 곰을 맹렬하게 공격해 곰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것을 보고 그 용맹성에 놀랐다. 개는 훈련을 받으면 구조견이나 마약탐지견, 시각장애인인도견이 되는 아주 이로운 동물이다. 그런데 비슷한 줄 알았던 들개와 이리는 서로 다른 종(種)이다. 이리는 개와 달리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사납고 잔인한 동물이다. 성경에서 이리는 안 좋은 것에 비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대표적으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 이리의 습성을 비유했다.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그 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스바 3,3) 성경 저자들은 이리에 비유되는 악인들이나 악한 제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끔찍함과 잔인함을 비유하고 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 부정직한 대신들과(스바 3,3)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도 싸잡아 이리의 습성을 닮았다고 매섭게 공격했다. 스바니야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숨기셨다’ 또는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를 의미하는데 활동 현장은 예루살렘 성이었다. 기원전 7세기 중엽 이집트를 점령한 아시리아에게 근동의 패권이 넘어왔다. 아시리아는 주변 민족들을 파멸시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르며 세력을 키웠다. 이스라엘은 왕국의 주권과 하느님 신앙을 포기하고 아시리아의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렸다.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는 아시리아의 우상을 세워졌고, 매음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요시야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고작 8살이라 직접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어 상당 기간 섭정이 이뤄졌고, 이 시기에 스바니야가 열심히 활동했다. 요시야 왕 때 섭정을 한 권세가들은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 사회를 도탄에 빠뜨렸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스바니야 예언자는 우상 숭배자들과 불의한 지도층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1,2-13), ‘아시리아의 몰락’(2,13-15)을 예언한다. 스바니야는 ‘교만’이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가르친다. 교만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반항, 우상 숭배,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며 마침내 사회 부정과 불의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심판’ 곧 ‘주님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다른 예언자와 달리 무섭게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의 예언은 50년 후 예루살렘 멸망으로 현실이 된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께만 기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이 희망이 된다고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를 희망할 근거는 존재한다는 스바니야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한 줄기 빛이 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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