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장벽이 없는 형제애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이 말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남기신 말씀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이듬해,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님은 124위 시복미사가 열린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로 딸을 잃은 김영오 씨를 만나 따뜻하게 안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김영오 씨가 건넨 세월호의 상징인 노란 리본을 직접 가슴에 달았습니다. 한 기자가 “교황님이 너무 정치적인 거 아닙니까?”라고 묻자, 교황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이 만남 이후 김영오 씨는 세례를 받고 가톨릭신자가 됐습니다. 이처럼 교황님이 보여주신 경계 없는 위로와 같이, 교구 사별가족 돌봄 모임 ‘치유의 샘’에도 장벽은 없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천주교 신자이든 아니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실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또한 그 고통 속에서 일상을 다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5월에 마친 ‘치유의 샘 1기’에는 종교가 없는 분도, 열심한 개신교 신앙인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했고, 남겨진 우리가 서로를 지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의 다름을 뛰어넘는 일치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사제도, 레위인도 초주검이 된 동족을 보고도 못 본 척 길을 돌아갔지만, 유다인들에게 이민족처럼 취급받던 사마리아인은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내놓습니다. 자비를 베풀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데 다른 아무것도 장애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자녀를 잃고 슬픔에 빠진 아버지를 위로하며 따뜻하게 안아준 교황님처럼,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이를 살리고자 끝까지 동행했던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서로의 다름을 뛰어넘는 형제애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어 살아가도록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누구에게나 비를 내려주시고 해가 떠오르게 하시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길이 아니겠습니까?(마태 5,43-48 참조) 글 _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복음화3국장)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3면

[신앙에세이] 비주류의 삶과 신앙

미술을 전공하고 성미술에 입문했을 때, 나는 유명한 가톨릭 미술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상 수리 분야에 눈을 뜨게 되었고,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작품을 수리하는 일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오래된 성상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시간이 지워버린 색채를 되살리며, 누군가의 믿음이 깃든 작품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에 매료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조각가라는 정체성을, 유망한 성미술 조각가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에게서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주류에서 벗어나 뒤안길로 접어든 건 아닐까? 그런 고민 중 '네 번째 동방 박사'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주인공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늘 한 발짝씩 늦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며 주요 장면들을 만들어갈 때, 그는 길 위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아픈 이들을 치료하느라 계속 뒤처진다. 결국 끝까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절망하며 슬퍼할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내가 아플 때 네가 나를 치료해 주었고, 내가 배고플 때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네가 그들에게 한 모든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비주류의 신앙도 아름다운 신앙이라는 것을, 비주류의 미술도 충분히 가치 있는 미술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하는 성상 복원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내 손을 통해 되살아나는 성상들은 다시 수많은 사람에게 위안을 주고 있었다. 시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잊혀가는 신앙의 흔적들을 되살리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성 미술가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깨달음 이후로 나는 더 성숙한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 내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비주류라는 자리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본질적인 섬김의 자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류에서 벗어난 곳에서도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제 나는 안다. 진정한 신앙과 예술은 세상의 주목을 받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이나마 전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주류의 삶이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는 신앙의 깊이와 예술의 진정성이야말로 내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글 _ 고승용 루카(성미술 작가)

발행일 2025-07-13 제3450호 3면

[밀알 하나]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명절에 부모님께 잘 인사드리고 기쁜 시간 보내. 나는 이제 부모님이 안 계신 고아야.” 부모님 두 분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선배 신부님이 명절을 앞둔 후배 신부들에게 건넨 말입니다. 웃으며 하신 말씀이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라는 당부입니다. 사실 저 역시 부모님의 연로하신 모습을 떠올려보면, 선배 신부님의 이 말이 더 이상 가볍게 들리지 않습니다. 짧은 표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부모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애틋함,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당장 수녀원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의 ‘모현상실수업’에서 함께 강의를 들었던 수녀님의 고백입니다. 수녀님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장 달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종신서원식을 바로 앞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수녀님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프신데 곁에서 돌보지 못하는 이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결국, 고민 끝에 수도회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그날 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그 순간이 마치 아버지께서 “고민하지 말고 너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느껴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책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성직자와 수도자에게도 상실의 고통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교회공동체를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라도, 상실의 고통을 당연한 듯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억과 감정은 누구에게나 마음 깊은 곳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도의 시간과 작업이 필요합니다. 곧, 사랑하는 이와 함께했던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기억과 감정을 잘 정리해야만 합니다. 단순히 외면하거나 잊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마음의 깊은 서랍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어 바라볼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다시 달아두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기억이 다시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은 여전히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함께 나누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함께 흘리는 눈물은 우리를 절망 속에 주저앉게 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상실의 고통 앞에서, 누구나 눈물 흘리고 또 희망할 수 있는 ‘치유의샘’의 문을 용기 내어 두드려보시지 않겠습니까? 글 _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복음화3국장)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3면

[신앙에세이] 작은 성모상에서 찾은 신앙의 큰 가치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성상 복원작업에 매진하던 어느 날, 인천 송도에서 한 통의 전화가 결려왔다. 할머니가 30여 년 동안 애지중지해 온 낡은 성모상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새 성모상을 사드리려고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할머니 마음에 드는 성모상을 찾지 못했다. 결국 실망과 슬픔 속에 복원이 가능할지 물어왔다. 새로 만든 어떤 성모상도 30여 년간 울고 웃고 기도하던 신앙생활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낡은 성모상을 대체 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단순한 성상이 아닌 30여 년의 추억을 잃어버리는 상실감을 못 견뎌 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손바닥보다 조금 큰, 손 한 뼘 반쯤 되는 작은 성모상을 복원해 본 경험이 없기에 망설여졌다. 성상은 두 동강으로 부러져 있었고, 오래된 석고상이어서 부식도 심했다. 채색이 제대로 될지조차 의문이었다. 최소한 보름 이상 작업해야 하는데… 고민하다가 정상적인 비용을 숨기고 몇만 원이면 된다고 하며 복원을 맡기로 했다. 두 동강 난 몸부터 조립을 하자니 단순히 접착제로 붙인다고 되는 게 아니라, 발밑에서 구멍을 뚫고 금이 간 부위까지 심봉을 삽입해 구조를 보강했다. 채색도 쉽지 않았다. 숙련자가 단숨에 휘갈기듯 그려낸 눈매는 아무리 능숙하게 그려도, 매일 그 성상을 바라보며 기도해 온 할머니에게는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사진을 확대해 출력하고, 그 위에 여러 번 그려보며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려 애썼다. 아크릴 물감을 붓으로 직접 바르려니 채색 작업만 일주일이 걸렸다. 완성해서 보내드리자, 할머니는 좋아하시며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하셨다. 작은 작업을 마치고 난 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대단한 작업도 아니고 절실한 부탁에 마지못해 한 작업인데, 지금까지 한 모든 작업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가슴이 꽉 차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비로소 알게 된 것 같다. 복원이란 일은 단순히 성상의 가치를 보존하는 게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과 삶의 작은 역사를 지켜주는 일이라는 것을. 신앙생활이란, 내 자신의 신앙의 삶 뿐만 아닌 나의 역사를 자손에게 물려주고 전달하는 것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큰 작업도 미뤄놓고 이 작은 작업을 맡아 소비한 시간과 노력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이제 길을 걷다 성모상을 발견하면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다. 저 성모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신앙의 역사가 깃들어 있을까 하고 말이다. 글 _ 고승용 (루카) 성미술 작가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3면

[밀알 하나]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남편을 떠나보낸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장례를 치른 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사별로 인한 슬픔과 그리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고, 사람들 앞에서 조차 감정을 숨기지 못해 종종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사람들이 드문 평일 오후 성당에 갔습니다. 그렇게 고요한 성당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바로 주임신부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건넨 한마디는 자매님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제 그만 울 때도 되지 않았어요?” 자매님은 그 말에 북받친 슬픔과 서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서둘러 성당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신부님은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했던 것일 테지만, 여전히 애도의 한가운데 있는 자매님에게 그 말은 위로가 아닌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작년, 사별가족 동반자를 양성하는 ‘모현상실수업’에 함께 참여한 한 수녀님이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수도회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던 한 자매님이 형제님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수녀님은 자매님을 마주하고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형제님은 하느님 곁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과부들을 특별히 보살피신다고 하셨잖아요. 앞으로 하느님께서 자매님을 잘 돌보아 주실 거예요.” 수녀님은 시간이 지나 그 말을 돌이켜보며 고백했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상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을 내뱉었어요. 그게 자매님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던 것 같아요.” 이야기만 들으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하고 안타까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한 이들을 보면 당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위로의 마음은 가득하지만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종종 준비되지 않은 말과 행동들로 상대방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코린 13,4) 상실의 고통을 겪는 이가 충분히 울고, 사랑하는 이와의 기억과 감정을 천천히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랑, 그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그 사람이 회복될 때까지 함께 머물며 침묵과 기도 그리고 동행으로 곁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인 것입니다. 죽음은 신비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마주한 이들에게, 명쾌한 설명이나 조언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그 신비 앞에 머무르고 상실이 불러오는 시간과 감정의 깊이를 공감하고 나누는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상실의 아픔을 겪는 이에게 어떤 사람으로 다가가고 있습니까? 성급한 조언자입니까? 아니면 조용히 함께 머물러 주는 동반자입니까? 글 _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복음화3국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3면

[신앙에세이] 주님께서 한계를 뛰어넘을 영감을 주신 순간

6년 전, 전주 전동성당의 십자가의 길 14처 복원 작업을 맡게 되었다. 성당 자체가 문화재급의 역사를 지닌 건물이고, 14처 역시 100년이 넘은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중 두 점은 6·25전쟁 당시 파손된 후 여러 차례 비전문가에 의해 수리됐으나 본래의 모습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이렇게 막막한 조건의 복원은 처음이었다. 국내 최고의 성당 미술 복원 전문가라는 자부심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과연 이 작업을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깊은 고민 끝에 계약을 보류하고 한 달을 보냈다. 모든 고증 자료를 모으며 원본을 유추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뒤, 본당 측으로부터 성당 안에 1년간 아틀리에를 꾸밀 수 있는 공간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복원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단계는 14처를 아틀리에로 옮긴 뒤, 기존 물감을 벗겨내는 작업이었다. 적합하지 않은 물감 위에 새로 작업을 해 봤자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5개월 이상에 걸친 정밀한 다행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90%가량 진행된 시점에서 갑작스러운 자괴감이 밀려왔다. 붓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완성에 가까운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가볍고 지루한 분위기였고, 십자가 위 주님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 달 넘게 작업을 중단한 채, 서울로 돌아와 ‘잠수 아닌 잠수’를 탔다. 도무지 이 작업을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실 한쪽에 놓인 예수님 조각상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아무 말 없이 조각상에 손을 얹은 채,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 기도하듯 손끝으로 조각상을 어루만지던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이 손끝에서 전해졌다. ‘손끝… 손끝….’ 이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무릎을 ‘탁’ 치고 바로 전주로 내려가 다시 작업에 돌입했다. 붓이 아닌 두 가지 색의 물감을 손가락에 묻혀 직접 문지르면서 바르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보름이 지나니 14처 각 처마다 색채의 깊이와 역동성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작업 중인 14처를 지켜보던 주위의 수녀님들도 변화된 작품에 감탄을 연발하셨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가 지닌 능력의 한계를 주님께서 채워주셨다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닫는 순간이었다. 글 _ 고승용 (루카) 성미술 작가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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