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 하나] 사회교리, 왜 필요한가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이 잘못된 메시아사상을 가졌다면, 오늘의 신앙인들도 비슷한 잘못된 예수 사상을 갖지 않았나 싶다. 최근 신자들의 사회 사건들을 대하는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교회가 왜 세상일에 관여하나’, ‘하느님 은총만 받으면 되지’, ‘정교분리’ 등 신앙은 성전 안에서만 유효하다고 보고 교회 안과 밖을 완전히 격리시킨다. 이를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또는 세속화라고 할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의 예언적 역할은 물 건너간 느낌이다. 가톨릭 신앙은 믿을 교리와 지킬 계명으로 이뤄져 있다. 믿을 교리가 신앙인들의 신앙고백이라면 사회교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지침이다. 믿을 교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라면 사회교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사회교리를 ‘제2의 교리’라고 말하지만, ‘살아있는 교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사회교리는 믿을 교리에 대한 구체적 실천 방법이며, 모두가 실천해야 할 하느님의 계명이고, 우리 삶과 직접 연결된 가장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만일 교회가 세상의 문제에 대해 예언적 역할을 거부하거나 소홀히 여긴다면 교회가 세상에 존립할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 되며,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꼴이 된다. 사회적 불의가 만연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고통이 늘어가도 그저 남의 일로 보는 것은 건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러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외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앞선다. 세상의 부조리는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 세상에서 인권과 정의 평화는 마치 공기와 같아서 평소에는 모르지만 결핍 시엔 중대 재해를 발생시킨다.(이용훈 주교 「삶에 대한 이야기」) 신앙이 살아있으려면, 성경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려면 무엇보다 사회교리를 알고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살았던 공생활 대부분이 대사회 차원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몸소 연대하신 예수님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셨다.(루카 14,21과 마태 12,29 참조) 그 이유는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차별 없는 평등사회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셨다.(마태 9,35-36;25,40 참조)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이웃 되어주셨고, 기득권의 부당함에 분연히 저항하셨다.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설법이나 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사회교리야말로 교회의 활로이자 현대 신앙인의 선결 조건이고 미래 한국교회의 지속 가능성의 잣대라고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고, 올바른 신심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성경에 쓰인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싶은가? 신앙을 찰지게 살고 싶은가? 그러면 사회교리를 접해 보기 바란다. 글 _ 유희석 안드레아 신부(수원교구 제1대리구 구성본당 주임)

2024-09-08

[신앙에세이] Shema(들어라!!)

성당에서의 미사 반주가 아닌 전국을 돌아다니며 성가를 부르는 찬양사도로 활동을 시작한지 어느덧 10년이 됐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달에 두 번씩은 주말마다 찬양하러 다녔고 평일에도 섭외가 오면 회사를 쉬기도 했습니다. TV나 라디오에 출연하는 것도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었으며 하느님께 바치는 찬양이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활동했습니다. 신자분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성가로 전하러 갔지만 그분들과 함께 찬양하며 마음이 뭉클해지고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은 힘과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불러주시는 곳만 찬양하러 다니다보니 매번 같은 성가만 부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진심을 다하여 찬양했지만 어느 순간 ‘너무 나태해진 건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던 차에, 이형진(가브리엘) 선배님께서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 은혜의 뜰 음악피정을 정기적으로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음악피정이 궁금하여 첫째 아이를 데리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친분이 있던 몇 분의 찬양사도와 함께 피정을 하고 계셨는데 찬양으로 피정을 한다는 것이 너무나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음 달에 초대손님으로 출연해 줄 수 있겠냐고 하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한 달 동안 찬양 준비를 했습니다. 많이 부르던 성가로 선곡했지만 그 전과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랐습니다. 피정을 오신 분들에게 저의 묵상을 나누며 그 곡을 만들던 때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매달 은혜의 뜰 음악피정에 함께하게 됐습니다. 다음 달의 주제가 정해지면 각자 1곡씩 선곡해서 묵상을 나누고 찬양하는 형식이었는데 저는 랩으로 찬양하다 보니 기존 성가를 선곡하기에 많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내가 찬양할 수 있는 형식으로 새로운 성가를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이 들어 예전처럼 다시 성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집을 발표한 이후로 성가를 만드는 것에 소홀했었지만 매달 주제가 있다 보니 묵상하기에 좋았습니다. ’평화를 주노라‘라는 주제에는 세상의 것과는 또 다른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성가정을 묵상하며 <아이와 함께 바치는 기도>라는 성가를 만들어 첫째 아이 제리아(안나)와 함께 찬양하였고, <Shema>라는 주제일 때는 신명기와 민수기의 성경 본문을 최대한 그대로 가져와 랩으로 만들어 찬양했습니다. 묵상을 길게 하고 만들다 보니 가사 하나하나에 신중하게 되고 내가 쓴 가사대로 계속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하게 됐습니다. 점점 더 찬양에 마음을 다하게 되는 제가 느껴졌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글 _ 제치원 암브로시오(찬양사도)

2024-09-08

[신앙에세이] 야훼이레

초등학교 5학년 때 집 옆에 있던 학원에서 1년간 배운 피아노를 제외하고는 기타, 베이스, 드럼, 작곡과 미디 프로그램을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그렇게 배운 지식들을 고향 성당 중고등부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밴드를 만들어 반주를 하게끔 도왔습니다. 기존 성가들을 밴드음악으로 신나게 편곡하여 공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대중음악이 아닌 교회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군대 제대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잠시 냉담의 시기를 가졌지만, 고향 성당에서 만나 긴 시간 연애를 한 지금의 아내와 혼배성사를 하고 직장을 옮기며 서정동성당으로 오게 됐습니다. 본당에서 청년회 활동을 했는데 1년 만에 청년회장을 맡게 됐습니다. 미사의 전례를 이끌어가야 하고 각종 봉사와 청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해야 하는 청년회장이라는 직책은 제게는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도, 여러 사람들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행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럴수록 평일미사에도 나가서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했습니다. 청년회 밴드부에서는 드럼을 치면서 미사반주를 했습니다. 이 때, 신부님의 제안으로 새로운 미사곡을 만들게 됐고 현재도 본당 청년미사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구절에 멜로디를 붙여 만든 곡으로 제6회 수원교구 창작성가제 본선에도 출전했는데 이 때의 경험은 제가 앞으로 교회 안에서 어떤 봉사를 하면서 살아갈지 결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은 성가로 기도한다기보다 예전에 못다 한 음악활동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다가 신앙인으로 한 단계 성숙했다고 느낀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 때 항상 반주로 참여하다가 외부 찬양행사가 있던 어느 날, 이 날은 신자석에서 온전히 미사만 드렸습니다. 성체성가로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를 부르며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자리로 돌아오는데 이상한 감정이 울컥 올라오면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구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서 찬양 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묵상하면서 가사를 쓰고 새로운 성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작업해 성가 14곡과 미사곡 10곡, 총 24곡이 실린 1집 음반 <Jesus Style>을 2014년에 발매하고 찬양사도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 “주님께서 마련하신다.”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들이 당신을 위한 도구로 쓰이길 바라셔서 부족한 저를 위해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시는 것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글 _ 제치원 암브로시오(찬양사도)

2024-09-01

[밀알 하나] 올바른 신앙에 대해

올바른 신앙에 대해서 말하려니 갑자기 꼰대가 된 느낌이다. 내 나이도 그렇고 어차피 그런 소리를 들을 거라면 구구절절이 할 말이 없지 않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 입각해서 말하기로 하거니와, 실은 여기에 많은 기준들이 제시돼 있다고 믿고 있다. 신앙에 있어서 올바르다는 말은 건강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보고 네 가지만 짧게 짚어보고자 한다. 하나, 미신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신앙이라야 한다. 일이 잘 되려면 차에 묵주를 걸어야 한다든지, 영적 스카풀라를 달아야 일이 잘 풀린다든지 하는 말들이 있는 것 같다. 그게 다 미신이다. 이미 말했듯이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신을 ‘영적 타락’이라고 했다.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렸을 때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기도하지 않는 신앙인은, 하느님을 찾지 않는 신앙인은 미신에 빠질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둘,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신앙이라야 한다. 누가 교만하거나 엘리트 의식(자아도취적이거나 권위적)에 빠져 있다면 올바른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에서 교만과 엘리트 의식은 독초와 같아서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앞세우고,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교황은 ‘하느님도 육신도 없는 지성, 신비가 없는 교리, 겸손이 없는 의지만을 앞세우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35~62항) 그런가 하면 “모든 물음에 척척 대답하는 사람”(41항)도 실은 교만한 사람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주도권은 인간이 아닌 언제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52항) 셋, 조급하지 않은 여유로운 신앙이라야 한다. 한국사회는 불안을 부추기는 사회 같다. 무엇이건 ‘빨리 빨리’가 대세다 보니 현재의 삶이 한없이 불안하고 고독해지기 쉽다. 교황도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 없는 우리 삶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때, 고독의 불안은 사라질 것”(51항; 시편 139)이라고 했다. 삶이 팍팍할수록 스스로 웃는 여유, 유머러스한 표현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교황이 회칙 제목부터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고 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현대인들이 자주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넷, 언행일치의 신앙이라야 한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며, 신앙인들이 종종 비난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없지만, 적어도 노력해야 한다. 특히 행동보다 말에 더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라도 남에 대한 비난, 험담, 조롱과 같은 독설은 피해야 한다. 자칫 자신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말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한 부인이 장을 보러 시장에 갔다가 이웃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데, 남을 흉보는 얘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부인은 마음속으로 다짐합니다. ‘아니야, 난 그 누구에 대해서도 나쁘게 말하지 않을 거야.’ 이것이 성덕으로 나아가는 한 걸음입니다.”(16항) 글 _ 유희석 안드레아 신부(수원교구 제1대리구 구성본당 주임)

2024-09-01

[밀알 하나] 미신과 미신적 행위

사람을 미혹시키는 신앙을 ‘미신’(迷信)이라고 한다. 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점에선 ‘맹신’(盲信)이기도 하고, ‘현세기복’이란 말과도 통한다. 올바른 신앙을 저해한다는 점에선 ‘사이비 신앙’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미신에 집착할까? 자신의 행동에 뭔가 불안감을 덜고 통제력을 갖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미신은 일종의 마음 속임수다. 다만 미신을 말할 때, 자신의 종교 입장에서 다른 종교들을 다 미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이유는 “(다른 종교들 안에서) 제거되어야 할 요소들도 있지만, 올바로 쓰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신비에… 매우 보탬이 되는 다른 요소들도 많다”(요한 바오로 2세 「현대의 교리교육」 54항)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무속’을 예로 든다면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거기엔) 확실히 일정한 한계가 있다. 종교로서 기형적이며 미신으로 향하기도 한다”고 위험시하면서도, “(적절히 선도된다면)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볼 수 있다”고 했다.(「현대의 복음선교」 48항) 분별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미신적인 행위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미신행위를 하는 이유는 일방적으로 삶의 여유를 추구하거나(예레 44,16 이하), 마술적인 것에 매혹을 느끼기 때문(사도 8,9 이하) 이라고 말한다. 또한 미신, 곧 미혹시키는 신앙에 대하여 “너희는 점을 쳐서도 안 되고”(레위 19,26), “우상숭배해서는 안 된다”(신명 4,19), “점쟁이들과 해몽가들과 요술사들과 마술사들의 말을 듣지 말라”(예레 27,9 또는 신명 18,11)고 거듭 말한다. 미신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이단’이 되고 ‘사이비’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서 신약은 ‘그리스도의 적’(1요한 2,18;4,3, 2요한 8장) 혹은 ‘거짓 예언자’(1요한 4,1, 2베드 2,1)라고 부르면서 주의를 요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제1계명에 어긋나기 때문에 미신을 죄악으로 본다.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점, 마술, 부적, 대체요법(악용된 경우) 등’이 그것이다. 미신 자체도 문제지만 미신적인 행위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귀가 너무 얇거나,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릴 때 미신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이다. 미신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마음이 불안할 땐 성당을 찾아가 하느님께 차분히 기도를 드리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인간의 말보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 더 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세상에 믿을만한 존재가 하느님 말고 누가 있는가. 여기서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을 새겨듣자. “정화수를 끼얹어 …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에제 36,25-26) 글 _ 유희석 안드레아 신부(수원교구 제1대리구 구성본당 주임)

2024-08-25

[신앙에세이] 음악은 내가 하느님을 만나게 된 계기

묵직한 일렉기타 소리와 우당탕거리는 드럼 소리를 따라 들어간 지하실 안. 덥고 습해서 퀴퀴한 냄새가 자욱한 그곳에서는 주말마다 인디밴드들의 공연이 열렸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고 팀 이름도 제멋대로 지었지만 그들은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과 목소리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었다. 20살의 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평생을 음악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었다. 대중음악 중에서도 마니아들만 좋아하는 인디 메탈 음악에 푹 빠졌었다. 밴드를 결성해서 내가 만든 곡을 부르고 함께 연주하며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가사에 담아 외쳐대고 우리들의 음악에 자아도취 돼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평생 이런 음악을 하고 살아가리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밴드생활을 하면서 지내다가 군입대를 위해 한동안 고향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성인이 되고 알게 된 친구가 기타 반주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코드가 적힌 악보를 보고 기타를 치는 일은 수도 없이 했던 일이기에 흔쾌히 집을 나섰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성당이란 곳이었다. 우리 집안은 때마다 조상들의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 대한민국의 아주 평범한 문화를 가진 집안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종교라는 단어가 생소했다. 어릴 때 친구와 한 번 가봤던 교회나 부모님을 따라 절에 갔을 때도 느꼈지만 종교인들의 그곳은 묵직한 긴장감 때문에 들어가기가 겁이 났던 기억이 있었다. 용기를 내서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창문을 통해 은은한 햇빛이 비치는 중앙의 긴 통로가 보였고 커다란 십자가에 누군가 매달려 있었다. 좌우로 놓여 있는 길쭉한 의자에 앉아 성가책을 펼치고 친구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기타를 튕겼다. 사실 내가 해왔던 음악보다 어렵지 않았고 멜로디와 코드가 쉬워 금방 익숙해졌다. 내 인생에 처음 성당에 갔던 그날, 나는 저녁미사에서 반주를 하게 됐다. 전례를 전혀 몰랐으니 친구가 옆에서 신호를 주면 연주를 시작했다가 멈추라고 하면 멈췄다. 그렇게 나는 매주 토요일 저녁미사 때 기타 반주를 하게 됐다. 미사가 끝나면 친구들과 교사분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 사람들이 좋아지면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성당은 어떤 곳이며 하느님은 대체 어떤 분이실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예쁘게 봐주신 수녀님 덕분에 예비신자가 되어 교리를 받고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됐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하느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을까? 글 _ 제치원 암브로시오(찬양사도)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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