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악습의 극복으로 행복을 가져오는 참사랑의 질서

현대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연결망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영적, 윤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소셜 미디어에서 타인의 행복을 보며 느끼는 극심한 박탈감과 질투, 익명성 뒤에 숨어 특정 대상을 향해 쏟아내는 무차별적인 증오와 비난, 그리고 모든 가치 있는 일에 대해 느끼는 무기력증과 우울은 현대인의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타인의 불행을 나의 기쁨으로 삼고, 영적인 가치보다 감각적 쾌락에 침잠하며, 나와 의견이 다른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과연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가? 만약 가능하다면,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과 악습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우리는 이에 대한 답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참사랑의 질서(ordo caritatis)’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무분별한 이기주의와 맹목적인 자기희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정교한 지혜의 체계다. 미움·나태·질투·불화·스캔들 등 악습… 참행복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질서’ 세우고 참사랑 실천해야 일치 이룰 수 있어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는 질서 토마스는 하느님 사랑, 자기 사랑, 이웃 사랑, 이 세 가지 사랑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덕이 아니라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하면서도 본질적으로 하나의 덕임을 강조한다.(II-II,23,5; 25,1) 참사랑은 하느님을 참행복의 원리로 사랑하고, 이웃은 그 행복에 함께 참여하는 동료로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사랑은 흔히 비난받는 이기심이 아니라, 하느님과 결합된 자신의 영혼을 긍정하고 보존하려는 우정의 성격도 지닌다. 토마스는 자신과 하나임이 타인과 하나가 됨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보았기에, 올바른 자기 긍정이 곧 이웃 사랑의 원초적인 본보기가 된다고 설명한다. 이웃 사랑 역시 상대의 매력이나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참행복을 나눌 동료이자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근거 위에서 성립한다.(II-II,25,12) 그런데 참사랑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부모나 가족같이 더 가까운 이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며, 점차 모든 이웃으로 사랑의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 이런 유기적인 질서를 바탕으로 인간은 비로소 사랑의 가장 어려운 단계인 원수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나를 해치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는 인간적 감정을 거스르는 불가능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토마스에게 이는 참사랑이 지닌 신적 탁월함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는 원수를 ‘원수로서’ 사랑하는 것, 즉 그가 지닌 악의와 적대감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악한 일이라고 엄격히 선을 긋는다. 그러나 원수가 비록 나에게 해를 끼치는 자일지라도, 그가 여전히 인간이며 하느님의 참행복으로 부름받은 존재라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논증한다.(II-II,25,8) 감정적으로 친밀한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성에 부합하는 선한 일이지만, 오직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훨씬 더 강인한 참사랑의 능력을 요구한다. 따라서 원수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결단의 산물이며, 이러한 측면에서 더 강한 참사랑의 힘을 증명하기에 더 뛰어난 탁월함을 지닌다.(II-II,27,7) 그러나 이러한 참사랑의 고결한 운동은 우리 내면에 도사린 다양한 악습들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참사랑을 거스르는 악습들 참사랑의 내적·외적 효과를 거스르는 악습들은 인간의 참행복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장애물이다. 토마스는 미움, 나태, 질투, 불화, 걸림돌과 같은 다양한 악습을 통해 사랑의 결핍이 가져오는 실존적 비극을 분석한다. ‘미움(odium)’은 최고선인 하느님과 이웃의 존재 자체를 의지적으로 거부하는 무질서이며, 이는 다른 어떤 죄보다도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거부하기에 가장 중대한 죄가 된다.(II-II,34,2) ‘나태(acedia)’는 신적인 선에 대해 슬픔이나 권태를 느끼는 행위를 말한다.(II-II,35,3) 이는 현대인의 번아웃이나 영적 무기력과 맞닿아 있는데, 하느님이 주시는 기쁨을 거부하며 오히려 그 선함을 짐으로 여겨 슬퍼하는 치명적인 게으름이다. ‘질투(invidia)’는 타인의 선을 자신의 열등함이나 손해로 여겨 슬퍼하는 이기적 성향으로, 토마스는 질투가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고 성공을 괴로워하게 만듦으로써 인간관계를 파괴한다고 경고한다.(II-II,36,1) 이는 SNS 등 현대적 공간에서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불화(discordia)’는 마땅히 동의해야 할 하느님과 이웃의 선에 의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지의 분열이다.(II-II,37,1) 선을 온전하게 식별하지 못하는 인간들 사이에는 의견의 차이로 인한 불화가 있게 되지만, 동일한 목표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하다. ‘스캔들(scandalum)’은 타인을 죄와 영적 몰락으로 이끄는 부적절한 말과 행동을 의미한다. 특히 토마스는 스캔들을 올바르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써 타인이 영적으로 넘어지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로 규정한다.(II-II,43,1) 이는 오늘날 영향력을 지닌 자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통찰이 된다. 현대 사회의 병폐로 지적된 다양한 악습들은 결국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세속적인 선에 집착할 때 발생한다. 토마스는 이러한 악습들이 단순히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완성인 참행복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장애물임을 밝혀냈다. 단적으로 말해,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질투와 증오의 시대에도 참행복은 가능하다. 다만 그것은 한편으로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절대적 선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회복할 때만 얻을 수 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자만이 타인에 대한 시기와 미움을 멈추고 영적인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내면의 뒤틀린 욕망은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음으로써 다스려질 수 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자신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올바로 사랑하며, 그 사랑의 넘침으로 이웃과 원수까지도 품는 것이 그 길이다. 하느님이라는 최종 목적을 향해 우리의 의지를 정렬할 때, 인간의 내면은 비로소 질서 잡힌 평온함에 도달하며 타인과의 진정한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글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9-06 제3506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모든 덕의 어머니인 참사랑을 통해 이르는 행복

성령 통해 전달되는 ‘참사랑’, 하느님과 인간의 영적 우정 기쁨·평화·자비 불러일으키며 선행·자선 실천하도록 이끌어 상호 혐오 가득한 현대사회… 형재애적 유대 위한 버팀목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흔히 개인적인 감정이나 일시적인 열정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참사랑(caritas)을 단순한 정념(passio)이나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인간의 영혼 안에 주입되는 초자연적인 덕이자 습성(habitus)으로 정의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적인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며, 하느님이 당신의 참행복을 인간에게 전달해 주심으로써 맺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인 우정(amicitia)이다.(II-II,23,1) 토마스는 참사랑이 본성적인 욕구인 에로스(eros)와 구별됨을 명확히 하며, “참사랑은 우정이지만,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소중한 분인 하느님을 향한 우정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진 것”이라고 역설한다.(「명제집주해」III,27,2,1,ad7) 결국 참사랑은 인간의 노력을 넘어선 신적 본질에 대한 참여이며, 하느님과 인간이 생명을 공유하는 통교(communicatio)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토마스는 ‘참사랑이 모든 덕의 어머니’이며 “모든 덕의 형상”(forma virtutum, II-II,23,8)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도덕적 행위라도 참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최종 목적인 하느님과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덕의 거짓된 유사품(falsa similitudo virtutis)’에 불과하며, 엄밀히 말해 악습으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한다.(II-II,23,7) 그런데 토마스는 이러한 원론적인 체계화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참사랑이라는 덕이 인간의 내면과 외적 행위에 미치는 구체적인 효과들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어떻게 진정한 평안과 공동체적 유대를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소중한 지침을 발견할 수 있다. 참사랑의 내적 효과: 기쁨, 평화 그리고 자비 토마스는 참사랑이 인간 영혼 내부에 일으키는 첫 번째 효과로 즐거움(gaudium) 또는 기쁨을 꼽는다. 이 즐거움은 자신이 사랑하는 선(善)이 현존할 때 발생하는 결과이다.(II-II,28,1) 현대 사회에서 많은 이가 물질적 성취나 타인의 인정과 같은 가변적인 선에 행복의 근거를 두기에 끊임없는 불안과 우울을 겪는다. 그러나 토마스는 참사랑의 대상인 하느님의 선하심은 결코 변하지 않기에, 이를 통해 얻는 영적인 즐거움은 어떤 외부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쁨이 된다고 설명한다. 둘째 효과인 평화(pax)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바와 같이 “질서잡힌 평온함(tranquillitas ordinis)”이다.(II-II,29,1) 토마스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들이 하나의 참된 선인 하느님을 향해 올바르게 질서잡힐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본다. 현대 사회의 극심한 양극화와 무한 경쟁 속에서 발생하는 내적 불화는 욕망의 무질서에서 기인한다. 참사랑은 인간의 의지를 최고선에 결합시킴으로써, 내면에 상충하는 갈망을 조화롭게 통합한다. 참사랑의 또 다른 내적 효과인 자비(misericordia)는 타인의 ‘비참함(miseria)’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동정심이며, 이를 돕고자 하는 의지적 움직임이다. 토마스는 자비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낮지만, 타인을 향한 덕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덕이라고 평가한다.(II-II,30,1) 참사랑의 외적 효과: 구체적 실천으로서의 선행과 자선 참사랑은 내면의 변화에 머물지 않고 반드시 외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 그 첫째는 선행(beneficentia)이다. 토마스는 선행이 다른 사람의 선을 원하는 사랑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결과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선행은 기회가 닿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는 자발적인 자세에서 기인한다.(II-II,31,1) 둘째는 구체적인 자선(eleemosyna)이다. 토마스는 이를 육적인 자선과 영적인 자선으로 세분화한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등의 육적인 자선뿐만 아니라, 무지한 이를 가르치고 슬퍼하는 이를 위로하며 죄짓는 이를 훈계하는 영적인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II-II,32,1) 인공지능 시대에 정보의 비대칭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지식을 공유하거나, 극심한 외로움과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정서적 지지를 제공하는 행위는 현대적 의미의 탁월한 자선이다. 특히 토마스는 영이 육체보다 고귀하므로 영적인 자선이 우선이지만,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는 육적인 자선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지침을 제시한다.(II-II,32,3) 형제적 교정: 혐오의 시대에 필요한 사랑의 훈계 외적 효과의 마지막인 형제적 교정(correctio fraterna)은 형제가 죄를 짓지 않도록 막는 영적인 자선의 일종이다. 이는 물질적인 도움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의 행위로 간주된다. 토마스는 형제적 교정이 공동선을 위한 정의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상대방이 잘못을 바로잡아 참된 행복에 이르기를 바라는 참사랑의 실천이라고 본다.(II-II,33,1) 안타깝게도 현대 사회에 만연한 온라인상의 무분별한 비난은 타인의 잘못을 배척과 혐오의 수단으로 삼는다. 반면 토마스가 제안하는 형제적 교정은 상대방의 품위를 존중하며, 그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 은밀하고 자애로운 권고이다. 만약 교정이 상대방을 더 악화시킬 것이 예상된다면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낫다는 토마스의 조언은(II-II,33,6), 진정한 사랑 없는 비판이 오히려 공동체에 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토마스에게 참사랑은 일시적인 쾌락의 허무를 뚫고 영원한 평온과 진정한 행복을 성취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이정표다. 지식이나 예언과 같은 다른 모든 능력은 현세의 종말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참사랑만은 내세에서도 영원히 지속된다. 더욱이 참사랑의 내적, 외적 효과들은 파편화된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는 실질적인 약방문이 된다. 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비는 단순한 감상적 동정을 넘어선 윤리적 태도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난민 문제나 소외 계층의 빈곤 문제를 대할 때 참사랑을 지닌 이는 그들의 비참함을 자신의 결함으로 인식하고 이를 치유하려 노력한다. 이는 자선이 시혜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형제애적 유대라는 영적 기초 위에서 수행되어야 함을 알려준다. 글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8-23 제350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절망의 시대 극복하는 희망을 통한 행복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따르면, 지옥의 입구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여’라는 서늘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선언은 지옥을 단순히 육체적 고통이 가해지는 장소가 아니라, 기회와 용서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이 완전히 박탈된 ‘폐쇄된 공간’으로 규정한다. 한국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 ‘헬조선’이란 표현은 이러한 지옥의 속성을 함축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신을 잠식하고, 개인의 노력이 구조적 벽에 부딪혀 냉소와 비관으로 치환되는 현실은 현대인이 처한 ‘희망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상태는 단순히 심리적 위축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파괴로 이어진다. 희망이 거세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궁극적 목적으로 정렬시킬 동력을 잃고, 현재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희망론을 고찰함은 세속적 욕망과 참된 기대를 구별하여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지침이 된다. 토마스는 희망을 막연한 낙관주의나 정서적 위안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희망을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궁극적 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실천적 힘으로 해석한다. 사회 구조적 한계라는 벽 속에 갇혀 존엄성과 미래 동력마저 잃은 현대인 절망·자만의 악습 떨쳐내고 ‘선’ 지향해야 희망 찾고 행복 수호할 수 있어 희망이라는 덕의 필수 요건 토마스는 ‘희망(spes)’의 본질을 규명함에 있어 이를 단순한 감정적 상태인 정념과 탁월한 습성인 덕으로 엄격히 구분한다. 정념으로서의 희망은 미래의 선에 대한 본능적 기대에 불과하여 도덕적 가치에서 중립적이지만, ‘대신덕’(신학적 덕)으로서의 희망은 인간의 행위를 신적 기준에 순응시킴으로써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고차원적 원리이다.(II-II,17,1) 토마스에 따르면 희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상이 선(bonum)이어야 하고, 미래의 것(futurum)이며, 획득하기 어려운 것(arduum)임과 동시에, 가능한 것(possibile)이어야 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요소는 ‘어려운 것’이다. 토마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선은 단순한 갈망의 대상일 뿐이지만, 난관을 극복해야 얻을 수 있는 선만이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켜 덕의 차원으로 이끈다고 보았다. 이러한 어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게 만들고 희망을 통해 그것을 넘어서려는 투쟁적 용기를 북돋운다. 또한 대신덕으로서의 희망은 그 가능성의 근거를 인간의 계산이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도움’에 둔다는 점에서 세속적 낙관주의와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희망의 궁극적 대상은 하느님 자신이며, 그분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행복(beatitudo)이다. 이는 지상에서의 일시적 안락을 넘어선 완전한 선에 대한 확신을 제공한다. ‘나그네’로서의 삶에 필요한 하느님의 도우심 인간은 본래 미완성의 존재로서 본향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나그네(viator)’의 지위에 있다. 이러한 나그네로서의 처지는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지만, 역설적으로 무한한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최고선에 이르기 위해 하느님의 권능에 전적으로 의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동력이 바로 ‘하느님의 도움(auxilium divinum)’이다. 토마스는 희망이 하느님의 전능과 자비에 유착함으로써 덕의 지위를 획득한다고 논증한다. 인간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존하는 방식은 비굴함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활동에 적합한 척도를 확립하는 영적 완전성을 의미한다.(II-II,17,1) 이러한 의존은 희망의 확실성으로 이어진다. 비록 인간의 노력은 실패할 수 있으나, 약속하신 하느님의 성실함은 변치 않기에 희망은 신앙에서 유래하는 확실성을 지니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II-II,18,4) 따라서 희망은 나그네가 겪는 시련 속에서도 그를 지탱하는 ‘영혼의 닻’이 된다. 그러나 이 완전한 신뢰의 여정은 양극단의 왜곡, 즉 절망과 자만이라는 암초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절망과 자만에 의한 희망의 왜곡 토마스는 희망의 덕에 반대되는 두 가지 악습으로 ‘절망(desperatio)’과 ‘자만(praesumptio)’을 지목하며, 이를 인간 행복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장애로 분석한다. 절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의지적 거부이며,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상태이다. 토마스는 절망을 가장 위험한 죄 중의 하나로 규정하는데, 이는 희망을 버린 인간이 선을 추구할 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필연적으로 악습에 추락하기 때문이다.(II-II,20,3) 이는 하느님의 전능을 자신의 나약함 아래에 두는 인식적 왜곡의 결과이다. 반면 자만은 하느님의 정의와 지혜를 도외시한 과잉된 신뢰이다. 이는 회개 없는 구원을 바라거나 자신의 자력만으로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방자한 태도이다.(II-II,21,1) 현대 사회의 냉소적 비관주의가 절망의 변종이라면, 기술적 진보나 물질적 풍요가 모든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자만의 한 형태이다. 토마스의 관점에서 이 두 극단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한 영적 파멸의 징후들이다. 이 악습들을 극복할 때 비로소 희망은 인간을 진정한 인내로 이끄는 동력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를 통해 확인한 희망은 단순한 심리적 낙관이 아니라, 신적 도움에 의탁하여 최고선을 향해 나아가는 ‘확실한 덕’이다. 지옥문 위의 경구가 희망의 단절을 선포하고 세속적 희망이 인간의 계산에 머문다면, 신학적 희망은 인간의 시선을 영원한 행복과 연결하여 현재의 결핍을 완성의 과정으로 정화한다. 토마스의 희망론은 어떤 시련 속에서도 인간이 신적 은총을 통해 최고선에 연결되어 있음을 증언한다. 현대인이 처한 ‘헬조선’의 폐쇄성은 토마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아직 본향에 도달하지 못한 ‘나그네’임을 망각한 데서 기인한다. 희망의 덕을 지닌 이는 타인과 연대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에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절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희망의 덕을 함양하는 것은 인간 본질을 회복하고 진정한 행복의 가능성을 수호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자신의 무력함에 침잠하는 절망과 역량을 과신하는 자만을 경계하며, 신적 은총에 의탁하여 영원한 선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나그네의 자세를 회복해야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글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8-02 제350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신앙’을 통해 참된 행복을 ‘미리 맛봄’

현대 한국 사회는 전례 없는 성과 중심주의와 무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매몰되어 있다.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의 자살률과 극도로 낮은 행복 지수는 가변적인 외부 조건인 물질적 성취, 사회적 지위, 타인과의 비교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현대인의 위기를 여실히 증명한다.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세속적 가치에 전적으로 투신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내면의 빈곤과 실존적 불안을 야기하며, 이는 곧 인간다운 삶의 근간을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신앙론은 단순한 종교적 위안의 차원을 넘어, 흔들리지 않는 내적 토대를 구축하고 참된 행복을 회복하기 위한 최고의 전략이 된다. 물질적 가치에 매몰된 현대인 맹목적 정신·우둔한 감각 속에 영적인 선 추구하는 능력 상실 정신의 맹목과 감각의 우둔함이 만연한 현실 토마스는 인간이 신앙의 덕을 잃어버려 영적인 선을 보지 못하는 원인으로 ‘정신의 맹목(caecitas mentis)’과 ‘감각의 우둔함(hebetudo sensus)’을 제시한다.(II-II,15,1-3) 그의 정교한 분석에 따르면, 육욕(luxuria)에서 비롯된 정신의 맹목은 지성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영적인 원리에 대해 반감을 갖거나 낮은 가치에 과도하게 집착할 때 발생한다. 또한 탐식(gula)에서 비롯된 감각의 우둔함은 정신을 무디게 하여 영적인 선들을 고찰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SNS를 통한 끊임없는 비교, 보편화된 성형수술과 같은 외모 지상주의,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에 집착하는 과도한 소비 열풍은 지성의 렌즈를 좁히는 현대판 ‘정신의 맹목’이다. 감각적인 자극과 즉각적인 만족에만 매몰될 때, 인간의 내면은 무수한 ‘감각적 표상’으로 가득 차게 되어 더 높은 진리에 머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절제(temperantia)’와 ‘정결(castitas)’의 덕은 지성적 작용의 완전성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정화 장치’다. 절제는 인간의 욕망을 맹렬하게 끌어당기는 감각적 장애물들을 제거함으로써 지성이 신적 빛을 수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II-II,15,3) 그렇다면 토마스가 이를 통해 지키고자 하는 ‘신앙의 덕’이란 무엇인가? 불확실한 가변성을 넘어서는 신앙의 확실성 토마스는 ‘신앙(fides)’을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도록 만드는 정신의 습성이며, 명료하지 않은 것에 지성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것”(II-II,4,1)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한 감정적 동요가 아니라 엄밀한 ‘지성의 행위’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신앙은 ‘지식(scientia)’과 ‘이해(intellectus)’ 같은 명백한 직관이 결여되어 있지만, 한쪽 편을 확고하게 고수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의견(opinio)’과도 구별된다.(II-II,2,1) 현대인이 겪는 불안의 근원은 가변적인 인간적 지식과 불확실한 세속 가치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거는 데 있다. 반면, 신앙의 확실성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결코 속일 수 없는 ‘제1진리’(Veritas Prima)라는 견고한 원천에 근거한다.(II-II,4,8) 신앙의 역동적 구조에서 주목할 점은 그것이 ‘의지의 명령’에 의해 완성되는 지성적 동의라는 사실이다. 지성은 대상을 명확히 직관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적 권위를 신뢰하는 의지는 지성을 결정적인 동의로 움직이게 한다. 이는 가변적인 인간 이성의 한계를 자각한 주체가 자신을 오류 없는 신적 진리에 고정시키려는 실존적 선택이자 투신이다. 현대 사회의 불신앙은 대개 진리를 능동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의 판단만을 고집하는 ‘의지의 완고함(pertinacia)’에서 기인한다. 절제·정결 통해 지성 정화하고 진리 거부하는 ‘불신앙’ 버려야 진정한 행복 경험할 수 있어 형상화된 신앙: 사랑으로 완성되는 실천적 행복의 전략 토마스에게 신앙은 미래에 완성될 완벽한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체험하게 하는 ‘미리 맛봄(prelibatio)’을 가능하게 해 주며, 우리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도록 만드는 정신의 습성’이다.(II-II,4,1)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토마스는 지성적 동의에만 머무는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fides informis)’과 참사랑(caritas)을 통해 완성되는 ‘형상화된 신앙(fides formata)’을 엄격히 구분한다.(II-II,4,5) 신앙이 참된 덕이 되기 위해서는 의지가 사랑을 통해 궁극적인 선인 하느님을 향해 오류 없이 지향되어야 한다. 사랑이 결여된 신앙은 ‘죽은 신앙’과 같으며, 오직 사랑으로 형상화될 때만 신앙은 인간을 최종 목적인 행복으로 인도하는 살아있는 힘이 된다. ‘미리 맛봄’의 개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미래에 완성될 참행복은 “일종의 시작의 형태로 우리 안에 현존”(「신학요강」 1, 2)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고단한 일상의 염려 속에서도 천상의 기쁨을 현재의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나약해진 의지를 회복시키는 구체적인 기제이다. 개인주의와 고독사 문제가 심각한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신앙의 형상화는 매우 시급한 과제이다. 특히 토마스는 인간의 행위 안에서 ‘말보다 강력한 실례(實例)의 힘’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신앙인이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생활의 모범을 보일 때, 이는 단순한 논쟁이나 강요보다 더 강력하게 사회적 연대를 회복하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수단이 된다. 참사랑에 의해 형상화된 신앙은 자신의 가치를 사회적 성취가 아닌 신적 토대 위에서 발견하게 하며, 이러한 발견은 필연적으로 이웃을 향한 나눔과 헌신으로 이어진다. 이는 현대인이 처한 고립과 소외를 극복하고 공동체적 행복을 창출하는 최고의 실천적 전략이다. 토마스의 신앙론이 보여주는 정신의 정화, 신앙의 확실성 그리고 사랑을 통한 완성은 무한 경쟁의 굴레에서 소진된 현대인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항구를 제공한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투신이지만, 그것은 주체의 내면에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된다. 현대인이 외부적 성취나 타인의 시선이라는 가변적 토대를 버리고, 내면의 신적 토대 위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때, 비로소 무한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와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토마스가 강조한 것처럼, 신앙을 통해 미래의 행복을 오늘 여기에서 미리 맛보며 사랑의 실례를 남기는 삶이야말로 성과 중심주의의 그늘을 벗어나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글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7-19 제3500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행복을 실천하기 위한 나침반: 올바른 양심

현대 사회에서 이기주의가 확산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는 ‘이익 중심주의’가 팽배해짐에 따라, 인간 내면의 도덕적 지침인 양심의 목소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무엇이 옳은가”라는 근본적 질문보다 “무엇이 나에게 이득인가”라는 도구적 합리성에 매몰되어 있으며, 이는 공동체의 윤리적 기반을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양심론을 검토하는 것은 현대인의 도덕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선을 지향하고 악을 피하기 위해 내면의 주관적 확신과 객관적인 자연법적 이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정교하게 분석했다. ‘양지’와 ‘양심’의 구분과 역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 구조를 보편적 원리인 ‘양지(良知, synderesis)’와 구체적 행위의 적용인 ‘양심(conscientia)’의 역학 관계로 설명한다. 양지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와 같은 자연법의 제일 원리들을 파악하는 자연적 습성(habitus)이다.(I,79,12) 이 원리들은 인간 영혼에 각인된 ‘영혼의 불꽃’과 같아서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 수 있는 빛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진리론」 17,2) 반면, 양심은 이러한 보편 원리를 구체적인 개별 사안에 적용하는 지성적 ‘행위(actus)’를 의미한다. 토마스는 양심을 ‘다른 것과 함께 알려진 지식(cum alio scientia)’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의 적용(applicatio scientiae ad aliquid)’이라 정의한다.(I,79,13) 여기서 중요한 학술적 통찰은 양심이 ‘실천적 삼단논법’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양지는 ‘모든 악은 피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제공하고, 이성은 ‘학교폭력은 악이다’라는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소전제를 도출하며, 양심은 ‘이 학교폭력을 피해야 한다’는 최종적인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양심이 오류를 범하는 지점은 무류한 원리인 양지가 아니라, 소전제를 설정하거나 대전제를 개별 상황에 대입하는 추론의 과정이다. 즉, 보편 원리는 확고하나 구체적 적용 과정에서 이성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양심이 보편 원리를 개별 행위에 적용하는 이성적 활동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왜 양심이 왜곡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을 분석할 수 있다. 드라마 <참교육>을 통해 본 이완된 양심과 완고한 양심 양심은 형성 과정과 환경에 따라 왜곡될 수 있으며, 이는 후대 학자들이 정립한 ‘이완된 양심(conscientia laxa)’과 ‘완고한 양심(conscientia stricta)’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왜곡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넘어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책임 있는 실천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심각한 교육 현실에 대해 주목하게 만든 드라마 <참교육>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이러한 왜곡된 양심의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드라마 속 가해자들은 동료 학생이나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받는 벌에 분노한다. 이는 도덕적 규칙을 무시하거나 마비된 상태인 이완된 양심의 전형이다. 반면,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타인의 불행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이들은 완고한 양심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교권보호국 사무관의 역할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오류를 바로잡는 외부적 원조로 해석된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이 불행은 당신의 행동 때문이 아니다’라는 올바른 소전제를 제공함으로써, 피해자의 잘못된 추론을 교정하고 그들을 불필요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즉, 양심의 교정은 인간을 법의 맹목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도덕적 자유로 이끄는 과정이다. 양심의 왜곡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주체로서의 책임과 직결되기에, 우리는 올바른 양심을 형성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선악 가려내는 본성인 ‘양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양심’ 이성적 활동이지만 왜곡 쉬워 도덕 규칙 무시하는 태도 버리고 올바른 양심 따라야 진정한 자유·행복 누릴 수 있어 올바르게 살아있는 양심의 형성과 도덕적 책임 토마스에 따르면, 양심은 그것이 올바르든 그릇되든 언제나 인간을 구속한다. 만약 자신의 양심이 어떤 행위를 악이라고 판단했는데도 이를 행한다면, 비록 그 행위가 객관적으로 선일지라도 주관적으로는 악을 선택한 것이 되어 죄를 범하게 된다.(「진리론」 17,4) 그렇다면 드라마의 가해자들처럼 이완된 양심에 따라 악행을 저지르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죄가 없는 것인가? 토마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양심에 따랐더라도, 그 행동이 태만이나 고의에 의한 ‘극복할 수 있는 무지(ignorantia vincibilis)’(I-II,19,6)에 근거하고 있다면, 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 반대로 완고한 양심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불가피한 무지’나 상황적 한계를 이성적으로 식별함으로써 지나친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잘못된 양심을 고수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양심을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하여 올바른 양심으로 형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양심,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을 향한 지성소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자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지성소이다.(사목헌장 16항) 양심은 주관적 자아가 멋대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장소가 아니라, 이미 영혼 안에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와 법을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권고했듯,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외침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에 침잠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면에 이미 현존하는 보편적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올바른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인간은 비로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 존재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도덕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결국 올바른 양심을 형성하고 그 판단에 충실히 따르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완성하고 지복에 이르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드라마 <참교육>이 보여주는 왜곡된 양심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왜 양심의 빛을 밝히고 그것을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닦아나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올바른 양심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유일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7-05 제3498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은총과 공로의 균형을 통해 추구하는 참행복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흔히 자신의 한계를 망각한 채 모든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근대적 자아의 환상에 빠져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위력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능한 주체’로 착각하게 만들었으며, 행복 또한 개인의 노력과 성취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전유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율성 신화는 역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완벽을 향한 무기력한 질주와 실존적 허망함을 낳을 뿐이다. 신앙인은 현대의 흐름 안에서 인간의 노력을 긍정하면서도, 그 모든 활동의 근원이자 완성인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자신의 공로와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인간 본성의 능력과 은총의 필연성, 그리고 그 안에서 작용하는 공로의 의미를 정교하게 분석함으로써 우리에게 중용의 길을 제시한다. 은총의 본질과 인간 본성의 한계에 대한 고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은총(gratia)’이란 일차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능력 위에 더해진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인간의 지성은 본래 ‘자연적 빛(lumen naturale)’을 지니고 있어 감각적 사물을 통해 자연 질서의 진리를 인식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신앙의 영역이나 영원한 생명과 같은 고상한 목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빛, 즉 ‘신앙의 빛(lumen fidei)’ 또는 ‘은총의 빛(lumen gratiae)’이 필요하다.(I-II,109,1) 특히 범죄 이후의 인간 본성은 마치 병자와 같아서 초자연적 선뿐만 아니라 자연적 선조차도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온전히 성취할 수 없는 나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I-II,109,2) 토마스는 인간이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계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부패한 본성을 고치는 ‘치유하는 은총(gratia sanans)’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I-II,109,3-4) 치유하는 은총 없이는 십계명과 같은 명령조차 인간에게 폭력적인 억압으로 느껴질 뿐이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늪에서 일어설 수 없다.(I-II,109,7) 따라서 현대인이 믿는 ‘무한한 자아’의 환상을 깨뜨리고,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넘어서는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조력이 필요하다. 기술의 시대 살아가는 현대인 스스로 운영 결정한다고 착각 본성 넘어 행복에 도달하려면 외부의 초자연적인 조력 필수 하느님 주신 은총에 순명하고 ‘사랑의 공로’ 쌓는 책임 다해야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은총의 체계적 구분 토마스는 은총이 작용하는 방식과 목적에 따라 이를 정밀하게 구분하여 신앙인의 삶 속에서 은총의 위치를 설명한다. 먼저 은총은 인간을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만드는 ‘성화 은총(gratum faciens)’과 타인의 구원을 돕기 위해 거저 주어지는 ‘무상 은총(gratis data)’으로 나뉜다.(I-II,111,1) 또한 인간의 의지가 선으로 향하도록 먼저 움직이는 ‘작용 은총(gratia operans)’과 이미 선으로 움직인 의지가 그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협력 은총(gratia cooperans)’의 구분은 인간 행위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어떻게 협력하는지를 잘 보여준다.(I-II,111,2) 토마스는 은총의 결과를 다섯 단계, 즉 ‘치유하고, 작용하고, 협력하고, 인내심을 주고,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요약한다.(I-II,111,3) 이러한 세밀한 구분은 은총이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부터 일어나 성화의 길을 걷고 궁극적으로 지복직관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실재임을 드러낸다. 인간의 의화와 자유 의지의 역할 현대인의 주체성 강조와 달리, 토마스는 인간이 하느님께 돌아서는 ‘의화(義化, justificatio)’의 과정 자체가 하느님의 움직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I-II,109,6)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이시기에, 인간의 의화 역시 자유 선택의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신다.(I-II,113,3) 의화는 죄의 용서와 은총의 주입을 포함하며, 이는 인간 영혼을 새로운 상태로 변화시키는 ‘성화 은총’의 효과다.(I-II,110,1) 토마스는 의화가 ‘무로부터의 창조’보다 더 위대한 초자연적 선을 종착점으로 삼는다고 보았다.(I-II,113,9) 신앙인은 자신의 결단력이 구원을 만들었다는 자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로운 응답조차 하느님의 은총이 선행하여 가능해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공로(功勞)와 은총 사이의 정교한 균형 공로(meritum)에 대한 논의는 은총과 인간 노력의 관계를 정립하는 핵심이다. 엄격한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무한한 하느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는 대등한 거래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공로는 존재하지 않는다.(I-II,114,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의 도움을 받아 선행을 쌓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도록 질서를 정해 놓으셨다. 따라서 공로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귀속되며, 그다음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에 귀속된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넘는 것이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이를 얻을 자격이 없지만, 성령의 작용인 ‘성화 은총’을 통해 하느님과 우정의 관계에 놓일 때 비로소 영생에 합당한 공로를 세울 수 있게 된다.(I-II,114,2-3) 공로란 인간의 자력적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열매를 하느님의 안배 안에서 다시 그분께 돌려드리는 거룩한 질서의 회복이다. 토마스는 공로가 이기적인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행해질 경우에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I-II,114,4) 은총의 시대적 증언과 신앙인의 태도 오늘날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는 ‘위장된 자기 구원론’에 맞서, 토마스는 ‘인간은 최초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으며, 오직 무상의 선물로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I-II,114,5)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신앙인은 자신의 노력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유효함을 인정하는 겸손함과, 동시에 주어지는 은총에 성실히 협력하여 사랑의 공로를 쌓아야 하는 책임감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궁극적 인내(perseverantia finalis)’의 은총 또한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이끄심에 달려 있음을 고백할 때(I-II,114,9), 인간은 비로소 현대의 오만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인 지복직관의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6-21 제3496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 행복을 보장하는 정당한 법의 기초: 자연법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이 인간이 지닌 이성적 본성을 실현하고 공동체 안에서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소크라테스의 말로 오해되어 널리 퍼져나갔던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악법이란 “법이 아니라 법의 타락”(I-II,95,2)이나 “폭력”(96,4)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어떤 법이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고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권력자의 욕망을 위해 작동한다면, 그것은 법의 본성을 잃은 것이다. 이런 경우 법치주의의 위기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된다. 그래서 법의 정당성은 형식이나 절차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 내용이 정의와 선에 부합하는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많은 규칙이 법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인종차별을 제도화한 법, 특정 종교나 민족 집단의 권리를 박탈한 법, 정치적 반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제정된 긴급조치 등은 모두 외형상 법일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들은 공동선을 지향하는 이성의 질서가 아니라 권력의 왜곡된 의지를 제도화한 것에 가깝다. 나치 독일의 인종차별법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법제는 이런 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현대 사회가 직면한 실증주의의 위기 속에서, 도덕적 기초가 결여된 법은 인간의 양심을 따르기는 커녕 사회적 혼란만을 야기할 뿐이다. 법의 보호적 기능과 타락 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법’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과연 무엇이 정당한 법을 정당한 법이게 하는가? 토마스의 대답은 자연법과 영원법의 관계 속에서 제시된다. 자연법의 제1원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 토마스는 우선 사변적 학문의 영역에서 이성의 제일원리인 모순율이 있는 것처럼, 도덕의 영역에는 ‘선을 행하고 추구하며, 악을 피해야 한다’(I-II,94,2)는 윤리의 제1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극히 단순해 보이는 이 원리에서 제시된 객관적인 선이 무엇인지를 토마스는 ‘자연법(lex naturalis)’의 사상 안에서 찾는다. 이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그리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적인 윤리 법칙’이라는 사상과 용어를 사용했다. 토마스는 이를 받아들여, 이성적인 피조물은 “영원한 이성 자체를 분유하게 되어, 그것을 통하여 마땅한 행동과 목적으로의 자연적 경향성을 갖는다”(I-II,91,2)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도덕률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자연법은 인간 안에 새겨진 선(善)의 기준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생명을 보존하려 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며, 타인과 함께 사회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 이러한 성향들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선한 방향을 드러낸다. 따라서 법은 이런 기본 성향들을 보호하고 질서 있게 실현하도록 도와야 한다. 예를 들어서, 생명 보존의 성향은 살인 금지와 안전 보호의 기초가 되고, 진리 추구의 성향은 교육과 양심의 자유를 뒷받침하며, 사회적 삶의 성향은 정의와 약속의 준수라는 원리로 이어진다. 자연법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인정법’은 이러한 자연법에 어긋나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성에 의해서 반포된 자연법은 어떠한 초월적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토마스는 자연법을 ‘이성적 피조물의 영원법에 대한 참여(participatio)’(I-II,91,2)라고 정의한다. 즉, 모든 인간이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연법도 그 뿌리를 신적인 영원법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영원법’이란 무엇인가? 법에 도덕적 기초가 결여되면 인간 존엄성 해치고 혼란 야기 영원법에 근거한 자연법으로 실증법의 자의적 횡포에 맞서야 인간 본성 속의 선을 실현하고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어 법의 형이상학적 토대: 영원법 ‘영원법(lex aeterna)’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적 지혜 그 자체로서, 모든 피조물을 각자에게 적합한 행위와 목적으로 인도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I-II,93,1) 토마스는 자연법이나 영원법이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이라는 주장을 피하기 위해, 영원법이 본래 신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범형적인 이데아를 생각하는 신의 지성에 근거함을 밝혔다. 우주의 질서와 만물의 운동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영원법에 의해 규정된 목적론적 체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정당한 인간 법체계는 영원법이라는 거대한 질서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간의 법은 영원법이 가리키는 객관적 진리를 반영할 때만 진정한 법으로서의 권위를 갖는다.(I-II,93,3) 영원법은 법이 권력자의 자의적인 의지로 변질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인간은 이 영원법 전체를 직접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에 참여할 수 있다. 자연법을 통한 인간 존엄과 행복의 수호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초한 자연법과 영원법의 체계는 인간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가장 견고한 형이상학적 울타리다. 인간이 추구하는 영원한 행복(지복직관)이 그의 자연적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의 힘으로 주어진 영원법에 의해서 인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토마스의 통찰은 현대 법치주의가 망각하기 쉬운 도덕적 좌표를 제시한다. 법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실재를 수호하기 위한 이성적 기획이어야 한다. 이 점은 현대 인권 개념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평등권, 신체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은 국가가 임의로 부여한 혜택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엄을 지키기 위한 조건들이다. 토마스의 사상은 ‘인간 존엄성’이 법적 관습이나 합의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법에 참여하는 이성적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형이상학적 실체임을 일깨운다. 자연법은 실증법이 저지를 수 있는 자의적인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절대적인 비판 기준을 제공한다. 결국 자연법을 따르는 ‘정당한 법’만이 인간을 억압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성적 선을 온전히 실현하고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6-07 제349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법은 자유의 굴레인가, 행복을 지키는 안전한 울타리인가?

현대 사회에서 법(法)은 더 이상 시민을 보호하는 ‘안전한 울타리’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법적 정서는 신뢰보다는 불신과 냉소에 가깝다. 특히 사법농단 사태와 검찰권의 자의적 오용 사례를 목격하며 국민이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선 ‘원초적 공포’다. 법이 권력을 쥔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로 전락하거나, 특정 대상을 압박하는 서슬 퍼런 칼날이 될 때, 법치주의의 근간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법의 수중에서 가급적 멀리 벗어나는 것이 최선이라는 부정적 태도는 바로 이러한 법적 안정성의 파괴에서 기인한다. 법은 본래 인간의 자유를 보호하고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다. 그러나 현실의 법은 종종 그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억압의 사슬’로 변질된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 앞에서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고전적 지혜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는 법의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도, 법이 인간의 완성을 위해 왜 필수적인지를 ‘이성의 질서’라는 관점에서 논증한다. 법의 정의(定義): 공동선을 향한 이성의 명령 토마스는 법을 단순히 권력자의 변덕이나 힘의 산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법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법은 공동선을 위해 공동체를 책임지는 자에 의해 공포된 이성의 명령이다.”(I-II,90,4) 이 정의는 법이 법답기 위해 갖추어야 할 네 가지 필수 요소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첫째, 법은 ‘이성의 명령(rationis ordinatio)’이어야 한다. 법은 인간 행위의 ‘규칙과 척도(regula et mensura)’이며, 인간을 목적지로 이끄는 것은 이성의 고유한 임무다. 둘째, 법의 목적은 ‘공동선(bonum commune)’에 있다. 법은 특정 개인의 사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행복과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협력과 연대가 없이는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고 문화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할 수도 없다. 셋째, 법은 ‘공동체를 책임지는 권위’에 의해 제정되어야 한다. 사적 개인이 타인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법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공동체의 안녕을 책임지는 합법적 권위자만이 법을 세울 수 있다. 마지막으로 법은 반드시 ‘공표(promulgatio)’되어야 한다. 법이 구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 그 내용이 명확히 전달되는 절차가 필수적이다. 밀실에서 만들어진 법이나 불투명한 법 집행은 결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왜 인간은 법이 필요한가? 토마스는 보편적인 ‘자연법(lex naturalis)’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데, 왜 인간이 직접 제정하는 ‘인정법(人定法, lex humana)’이 필요할까? 여기에는 자연법의 ‘실천적 결핍’이라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자연법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매우 추상적인 제1원리를 제공할 뿐, 구체적인 현실의 갈등을 해결하는 세부 지침을 모두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덕을 향한 성향을 지니고 있으나, 그 완성은 오직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아니기에, 특히 악습으로 기울기 쉬운 이들에게는 ‘형벌의 두려움’을 동반한 법적 규율이 필요하다. 그러나 법의 궁극적 목적은 처벌 그 자체가 아니다. 토마스에 따르면, 반항하고 악습으로 기울며 말로는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 이들을, 힘과 공포로라도 악에서 끌어내야 한다. 그들이 악을 중단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삶을 평온하게 하고 또한 그들 자신이 이에 습관을 들여, 처음에는 두려움에서 행하던 것을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행하는 데에 이르고 덕을 지닌 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I-II,95,1) 즉, 인정법은 인간을 타율적 복종에서 자율적 자유로 인도하는 훈련장이다. ‘법’은 자유·존엄 지키는 안전망이자 권력의 자의성 방지하는 장치 ‘처벌’의 수단이 아니라 자유 누릴 수 있게 하는 ‘보호막’ 역할 해야 특히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모든 것을 재판관의 결정에 맡기기보다 법으로 명문화하는 것이 더 낫다’(I-II,95,1,ad2)고 주장했다. 이는 현대 ‘법치주의’의 핵심과 닿아 있다. 사실 수많은 개별 사건을 올바르게 판단할 만큼 현명한 재판관을 매번 찾기보다, 지혜로운 소수가 숙고하여 보편적인 법을 만드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 또한 법을 만드는 입법자는 시간적 여유를 두고 미래의 일들을 추상적·냉철하게 숙고하지만, 재판관은 눈앞의 사건을 다루며 급박하게 판단해야 한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재판관은 순간의 정념(사랑이나 미움)에 휘둘리기 쉽다. 즉, 법은 개인의 변덕이 아닌 ‘축적된 이성’의 산물로서 사법 권력의 자의성을 방지하는 유일한 보루이다. 그러나 인정법이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본질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토마스는 성 이시도로(St. Isidorus)의 기준을 빌려, 인정법이 ‘명예롭고 정의로우며 본성에 따라 가능하고 국가의 관습과도 맞으며 때와 장소에 잘 맞고 필연적이며, 유익하고 명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I-II,95,3) 그러나 그는 법이 모든 악습을 금지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살인이나 절도처럼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중대한 악습에 집중하는 ‘절제의 원리’를 지킬 때, 법은 비로소 시민의 자발적인 덕행을 돕는 가이드가 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법은 인간의 자유를 옥죄는 굴레가 아니라 우리가 목적지인 행복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법적 냉소와 불신은 법이 그 본연의 목적인 공동선과 이성적 질서를 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다. 토마스의 가르침은 법이 단순한 ‘처벌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덕으로 이끄는 길잡이’여야 함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법은 사람을 가두는 창살이 아니라, 인간이 목적지인 행복을 향해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보호막이 되어야 한다. 물론 법은 우리 모두를 단숨에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장치가 아니다. 다만 타인의 평화를 방해하지 않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함으로써, 각자가 성숙한 삶과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신뢰의 토대이다. 정당한 법은 자유의 적이 아니라, 인간이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뿌리내리고 꽃피워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튼튼한 울타리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24 제349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는 인간도 행복해질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원죄(原罪, peccatum originale) 교리는 현대 지성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비판과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과거의 비합리적 관행이었던 ‘연좌제(連坐制)’가 폐지된 현대적 법 감정에서, 원조의 죄가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논리는 시대착오적인 신화로 치부되기 쉽다.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이를 ‘인간을 교회의 권력 아래 종속시키기 위한 불순한 통제 도구’라고 비판하며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적 낙관론을 앞세웠다. 그러나 현대 사회가 목도하고 있는 보편적 악, 즉 구조적 불평등과 환경 파괴, 그리고 집단적 광기는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론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반증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재구성한 원죄론 원죄론이 가톨릭의 정통 교리로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어떤 사람들의 죄를 통해서 죽음이 들어왔고”(로마 5,12 참조)라는 말씀을 근거로 ‘유아 세례’라는 초대교회의 관습을 원죄의 실재를 증명하는 신학적 토대로 삼았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가 세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인격적 죄는 없을지라도 원초적 죄성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논증하며 당시 유행하던 펠라지우스의 낙관론에 맞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에는 육체적 욕망과의 투쟁에서 좌절했던 그의 개인적 체험이 투영되어 있다. 그에게 원죄란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려는’ 헛된 의지로 창조주께 반항한 결과 발생한 무질서한 상태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의 실재를 선언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더욱 정교한 형이상학적 틀 안에서 재구성한다. 토마스는 원죄를 단순한 행위가 아닌 ‘본성적 습성(habitus naturalis)’으로 규정한다. 그는 이를 ‘본성의 질병’에 비유하여 설명하며, 원죄를 분석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가 누리고 있던 ‘본래의 의로움(iustitia originalis)’이라는 조화 구조를 상정한다.(I-II,82,1) 본래의 의로움은 세 단계의 위계적 질서를 갖는다. 첫째, 이성이 하느님께 복종하고, 둘째, 하위 능력인 욕구가 이성에 복종하며, 셋째, 육체가 영혼에 복종하는 상태이다. 원죄는 이 질서의 정점인 이성이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전체 조화가 붕괴된 상태이다. 즉, 하느님을 향한 질서가 사라짐으로써 내면의 욕망이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된 것이 원죄의 본질이다. 원죄의 구조적 분석에 이어, 이 부패가 어떻게 인류 전체에 전수되는지에 대한 전이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토마스는 인류 전체를, 아담을 머리로 하는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 파악한다. 그는 “인류는 한 몸의 많은 지체들”과 같다고 비유한다.(I-II,81,1) 그에 따르면, 원죄는 개별 인격의 죄가 아니라 ‘본성의 죄(peccatum naturae)’이기에, 자연적 출산이라는 통로를 통해 전이된다. 그는 원죄가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 타락’임을 강조한다.(I-II,82,4) 아담이 인류 본성의 첫 기원이기에, 그가 훼손한 본성은 그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후손에게 결핍된 채로 전달된다. “우리 모두가 곧 아담이다”라는 명제는 인류가 맺고 있는 존재론적 유대를 의미하며, 각 개인이 자신의 근원적 죄성에 대해 책임을 공유함을 뜻한다. 원죄는 인류의 원초적 타락…비록 본성이 훼손됐다 해도 완전하게 소멸된 것은 아냐 ‘선’을 인식하고 실천한다면…하느님과의 관계 회복하고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있어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인간 행복의 가능성 토마스는 인간 본성이 원죄로 인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라 위축된 것이라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한다.(I-II,85,2) 이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보는 개신교적 ‘전적 타락론’에 대한 반론이 된다. 토마스에 따르면, 원죄로 인해 인간 본성에는 악의, 무지, 나약함, 탐욕이라는 ‘네 가지 상처’가 남았다. 이 상처들은 인간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겪는 내적 마찰과 저항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선한 본성에서는 자연적으로 덕에 끌리는 힘이 감소하였고, 그 힘은 “죄 때문에 지속해서 감소한다.”(I-II,85,3)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덕으로 향하는 본성적 이끌림’과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지위가 남아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특별한 은총 없이도 ‘집을 짓거나 포도나무를 심는’ 등의 자연적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본다.(I-II,109,2) 원죄로 인해 본성은 상처 입었으나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여전히 선을 인식하고 부분적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 본성의 회복 가능성을 열어둔 토마스의 견해는 현대의 사회 구조적 악에 대한 담론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원죄와 구조적 악 현대 신학은 원죄를 개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회적 조건’으로 재해석한다. 칸트의 ‘근본악’ 개념과 현대 신학자들의 관점은 원죄를 ‘사회악이 널리 퍼진 조건’ 속에서의 실존적 상황으로 설명한다. 아기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뒤틀린 세계의 선택들에 의해 방향 지어져 있다는 ‘인생 출발의 훼손’은 원죄의 현대적 형태이다. 이러한 “세상의 죄”(요한 1,29)의 관점은 구조적 악이 개인의 무지와 탐욕을 어떻게 증폭시키는지를 분석한다. 원죄 교리는 인간의 ‘자력 구원’이라는 오만을 경계하고, 개인이 구조 내부에서 발현하는 악의 보편성을 인정하게 한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결국 인간의 힘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며, 초자연적인 회복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원죄 교리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 본성에 대한 폄하와 혐오가 아니라, 원초적 죄성과 상처의 정체를 직시함으로써 시작되는 ‘치유의 여정’을 제시하는 데 있다. 토마스가 논증하듯 인간 본성에는 여전히 선함이 존재하지만, ‘병자’와 같은 상태에 처한 인간은 치유하는 은총 없이는 초자연적 선은 물론 자연적 선조차 완벽히 수행할 수 없다. 결국 원죄는 그리스도의 육화와 은총의 필연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 인간은 원죄로 인해 사멸의 길에 놓였으나, 부활찬송에 나오는 “오, 복된 탓이여(O felix culpa)”라는 역설처럼 이 결핍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을 향한 첫걸음이다. 원죄 교리는 인간 실존의 어둠을 밝힘으로써, 그 너머에 있는 빛과 은총의 신비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참행복에 도달하게 하는 이정표이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5-10 제3490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죄와 벌은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데 장애물인가?

사이비 종교 집단이 과도하게 ‘죄의식’을 이용해 인간의 행복을 빼앗아 간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현대 사회에서는 죄 자체나 죄의식을 경감하려는 경향도 널리 퍼져 있다. 현대의 지나친 낙관주의는 죄를 실재하지 않는 심리적 위축으로 치부하거나, 오히려 죄를 ‘매력적인 벗’으로 여기며 그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현대인들은 대개 ‘안락’과 즉각적인 ‘욕구 충족’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에서 행복을 찾으며 고통과 불편을 악(惡)으로 간주하여 회피한다. 이런 경향에 따라 많은 이가 죄란 실재하지 않거나, 설령 실재하더라도 그 결과가 별것 아니라고 안이하게 생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에서 강조하는 ‘죄(Peccatum)’와 ‘벌(Poena)’이라는 개념은 현대인에게 자율성을 침해하는 비이성적 권위의 압제로 비춰지곤 한다. 그렇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죄와 벌에 대한 이론을 상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판단과 이에 따른 거부감이 상당 부분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심리적 욕구 충족에 따른 자아 긍정과 ‘무질서한 자기 사랑’의 대비 내면의 평안과 욕구의 충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현대 심리학과는 대조적으로, 토마스는 ‘무질서한 자기 사랑(inordinatus amor sui)’을 모든 죄의 뿌리로 규정한다.(I-II,77,4) 이는 자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사랑의 서열이 뒤바뀐 상태에 대한 지적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올바른 자기 사랑’이란 자신의 이성적 본성을 보존하고 최고선인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지만, ‘무질서한 자기 사랑’은 세상의 선에 집착함으로써 불변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어리석음(愚)에 빠지고 만다. 현대인은 죄를 개인적 실수나 트라우마의 산물로 보며 자기 용서에 집중하는 반면, 토마스는 이를 이성의 규칙과 영원법에 대한 무질서로 규정한다. 무질서한 자기 사랑이 결국 본래적 자아를 포기하고 가변적 욕망의 노예가 되는 과정임을 깨달을 때, 토마스의 엄격함은 인간 본성을 지키기 위한 경고로 재해석될 수 있다. 이성적 본성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된 죄 토마스에게 죄는 외부 권력의 명령을 어긴 행위이기 이전에, 인간의 행복을 스스로 침해하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배신’이다. 그는 죄를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인 동시에 ‘가변적인 선으로의 무질서한 전향’으로 정의한 바 있다.(I-II,84,1) 죄를 짓는 자는 이성이 사려 깊게 정한 목표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파괴하고 내면의 무질서(chaos)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분석은 죄가 인간다움의 실현을 방해하는 비본성적 행위임을 입증한다. 죄를 경계하는 이유는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인간다움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현대의 상대주의 윤리는 “실수하는 것이 인간”이라며 책임을 외부 환경이나 운명으로 전가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죄의 원인을 무지, 정념, 혹은 악의(malitia)라는 내적 요인으로 세밀히 분석함으로써(I-II, qq.76-78), 인간이 자기 행위의 주인이라는 ‘주체성’을 역설한다. 즉, 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외부의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다. 죄가 본성의 왜곡임을 이해할 때, 그에 따른 ‘벌’의 의미 또한 단순한 보복에서 질서의 회복으로 전환된다. 죄는 인간 자신의 본성에 대한 ‘배신’…스스로의 존엄 지키기 위해 경계해야 벌은 파괴된 질서 다시 세우는 ‘환원’…하느님 은총으로 인간 본성 회복해야 이성적 성찰로 자신의 결여 직시할 때 진정한 행복과 평온함 되찾을 수 있어 응보를 넘어선 죄악의 치료와 질서 회복을 위한 벌 토마스에 따르면, 벌은 일차적으로 권력자의 복수가 아니라, 파괴된 질서를 다시 세우는 ‘정의의 환원’이자 ‘죄악의 치료제(medicina culpae)’이다. 죄는 세 가지 질서 즉 개인의 이성, 사회적 관계 그리고 하느님의 통치 질서를 동시에 파괴한다. 죄의 결과로 수반되는 양심의 가책, 사회적 불명예, 신적 진노는 현대인에게 심리적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지만, 이는 사실 파괴된 질서에 대한 본성적 경고이다.(I-II,87,1) 따라서 벌은 이 세 영역에서 정의를 재정립하는 필수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보다는 엄격한 응보와 처벌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자유와 욕망을 존중하는 인간들을 죄책감의 노예로 만드는 체계처럼 느껴진다. 특히 정의를 일종의 공평함이나 비례로 보는 현대인들은 시간 안에서 저질러진 일시적인 죄에 대해 영원한 벌(poena aeterna, 영벌)이 부과된다는 점에 대해 심한 저항감을 느낀다. 토마스는, 하느님이 그런 벌을 내리시는 것은 멸망을 즐거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 정의의 질서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영벌이 하느님의 강요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완고함’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I-II,87,3) 인간이 궁극 목적인 하느님으로부터 영구히 돌아서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머물기를 고집했기에 영원한 벌이 성립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벌을 ‘영원한 처벌의 벌(poena damni)’과 ‘유한한 감각의 벌(poena sensus)’로 정교하게 구분한다.(I-II,87,4) 또한 그는 죄의 경중을 생명 현상에 비유한다. 사죄(死罪, peccatum mortale)는 최종 목적으로부터의 회복 불가능한 전복(顚覆)으로서 ‘죽음’과 같으며, 경죄(輕罪, peccatum veniale)는 질서의 방향은 유지하되 수단에 혼란이 생긴 ‘질병’과 같다. 벌은 이 질병을 치유하고 죽음의 질서를 정의로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I-II,89,2) 이렇게 벌의 치유적 성격을 이해하면, 인간은 은총을 통한 본성의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죄와 벌 담론은 현대인의 행복을 억압하는 굴레가 아니라, 왜곡된 본성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심리적 해부도’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본성의 손상’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치유된 본성의 상태’로 나아가는 관계적 회복이 필수적이다.(I-II,87,7) 이는 자기만의 힘으로 자아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현대적 환상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타인 그리고 자신과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다. 참된 행복은 죄를 부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메커니즘을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 있으며, 벌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치유의 과정으로 수용함으로써 완성된다. 이성적 성찰을 통해 자신의 결여를 직시하고 책임질 때, 비로소 인간은 주관적 만족을 넘어선 진정한 평온함에 도달하게 된다. 글 _ 박승찬 엘리야(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발행일 2026-04-26 제3488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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