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이야기] 고통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예레미야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같이 하느님과 한 개인의 씨름을 다룬 고백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기록된 예례미야의 다섯 개 고백은 아주 오래되었으면서도 하느님께 따지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치욕과 비웃음을 당하지만, 자신의 기쁨이자 즐거움인 그분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기에 침묵할 수도 없습니다.(예레 15,15-16) 그는 자신의 사명 때문에 자신이 처하게 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화를 내고 따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을 계속 신뢰합니다. 그의 마음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습니다. … 그럴지라도 당신께 공정성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배신자들은 모두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합니까?”(예레 11,20;12,1) 큰 고난을 겪는 예레미야는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닥치게 하시고 그들을 부수시되 갑절로 부수어 주소서.”(예레 17,18)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마시고 … 그들을 당신 앞에서 거꾸러지게 하시고 당신 분노의 때에 그들을 마구 다루소서.”(예레 18,23) 나아가 자기의 운명을 욕하며 신세 한탄을 합니다.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예레 20,14.18). 그는 급기야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하느님께 실망을 느끼고 하느님을 나쁘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이 되었습니다.”(예레 15,1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 하지만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원망에도 화를 내시지 않습니다. 다만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면’(예레 15,19)이라고 따끔한 주의를 주시면서 그를 당신의 대변인으로 만드시고 그에게 여러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예레 15,19;20-21) 하느님은 예레미야가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앞으로의 사명에 걸맞게 성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사람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먼저 지쳤다면 어찌 말들과 겨루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만 의지한다면 요르단의 울창한 숲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예레 12,5) 너무나 힘들어 타인과 하느님과 자신 등 누구에 대해서도 고운 말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마음을 토로할 수 있으며 하느님은 그것을 귀여겨들으시고 설령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해 주십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디인지를 내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계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마태 1,23)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요한 14,6)이십니다. 첫 번째 고백과 두 번째 고백이 예레미야의 기도(11,18-20; 12,1-4; 15,10; 15,15-18)와 하느님의 응답(11,21-23; 12,5-6)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세 번째 네 번째 고백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상대방을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자세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 그분의 위안을 얻도록 이끕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08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백성 전체를 위한 기도,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1열왕 8장)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과 같이(2사무 22장) 주님께 긴 기도를 바칩니다.(1열왕 8장) 8장 전체는 겹겹으로 앞뒤 대칭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임(1-4), 제사(5-13), 축복(14-21), 기도(22-53), 축복(55-61), 제사(62-64), 모임(65-66) 등 장 전체가 그러하고, 둘째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23), 찬양과 기억(23-28), ‘눈을 뜨시고’(29), 일곱 청원(31-51), ‘눈을 뜨시고’(52), 찬양과 기억(53),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53) 등 기도 부분(22-53)도 그러합니다. 성전 봉헌에서 기도가 중심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신 분이고 예수님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교회 건물이 기도에 꼭 필요한 것일까요? 솔로몬은 기도의 시작에서 이미,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턱없이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27) 하느님은 ‘짙은 구름 속에’ 계시지만(12) 성전을 향해 올려지는 기도와 간청과 부르짖음을 ‘눈으로’ 보시고 들어 주십니다.(28-30) 성전은 ‘하느님께서 굽어보시고 들으시는 특별한 자리’이고 사람이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성경을 통해 하느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래된 성당에 앉아 있으면 고요함 속에 갑자기 지난 세월 동안 거기에서 근심 보따리를 하느님 앞에 풀어 놓았던, 기쁨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한 수많은 신앙의 선인들이 되살아나고 시간을 초월해 인간을 살피시는 하느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성전에서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모든 성인의 통공을 특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마치 사제처럼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황님은 매주 수요일 일반 알현 때와 주일 삼종기도에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을 언급하시고 그 일을 겪은 이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하십니다. 주교님들과 신부님들도 각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개인은 각자의 기도를 바치지만, 그것이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의 전부일 수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전체를 대표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사회는 시멘트와 모래로 만든 튼튼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바람에 끊임없이 흩날리는 사막의 모래알과 같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사회에서 생긴 갈등을 의롭게 판결해 주시기를(31-32), 적과의 싸움에서 도와주시기를(33-34.44-45), 가뭄 때 비를 내려주시기를(35-36), 온갖 환난과 질병에서 개인이나 전체를 도와주시기를(37-40), 이방인을 도와주시기를(41-43), 장차 바빌론의 포로가 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시기를(46-51) 청합니다. 이 집을 향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내용은(48)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 실제와(다니6,11)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관습을 연상시킵니다. 솔로몬은 거듭해서 “용서해 주십시오”(30.34.36.39.50)라고 청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늘 새로이 용서해 주심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과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 뒤에는 상대방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증오가 자리합니다. 용서는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샬롬)의 길이자 기도의 목적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0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이 다 아시는데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 다윗의 감사 기도 (2사무 7,18-29)

한나와 사무엘 또 다윗과 솔로몬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물려 줄 수 있음을, 기도는 부모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다윗은 공도 많고 흠도 많은 사람이지만 하느님과 매우 가깝게 지냅니다. 그는 여러 번 하느님께 여쭙고, 그분으로부터 답을 받으며(1사무 23,10-12; 30,8; 2사무 2,1; 5,19.) 하느님을 찬미하며(1사무 25,32.39) 그분 앞에서 흥겹게 춤을 춥니다.(2사무 6,5.14.21) 이러한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다윗은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기를 원합니다.(2사무 7,2.5) 하지만 하느님은 이를 거절하시면서 오히려 그에게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과 하느님은 똑같이 집을 말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집은 하느님의 거처할 성전이고 하느님이 지어주실 집은 다윗의 가문입니다.(2사무 7,11) 다윗은 하느님으로부터 큰 약속을 받고 긴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2사무 7,18-29) 다윗은 하느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앉아(18절) 기도합니다. 다윗은 11번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르고(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하느님’, ‘주’, ‘주님’ 등으로 문맥에 따라 번역하는데, 모두 굵은 글씨로 표기합니다) 그중에서 7번은 그 앞에 ‘주님’을 덧붙입니다.(우리말 성경은 이 부분을 ‘주 하느님’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열 번이나 자신을 ‘당신의 종’으로 칭합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다윗이 하느님과 얼마나 친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겸손함을 보이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제가 누구이기에”(18절)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 선 자신의 부당함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다윗이 당신께 무슨 말씀을 더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알고 계십니다”(20절)라는 구절은 ‘하느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다면 그분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청하는 다윗은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더라도 인간의 기도는 새로운 것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25.28.29절)라는 말과 함께 다윗은 하느님께 자기 집안에 복을 내려주시길 청원하는데, “당신이 하신 말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25절),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28절),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29절) 등은 다윗의 청원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함을 잘 보여줍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하느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다룹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당신께서는 당신 종의 귀를 열어 주시며, ‘내가 너에게서 한 집안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종은 이런 기도를 당신께 드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27절)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셨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께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찾는 것은 하느님을 성가시게 하는 쓸데없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돈독하고 생생한 관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귀한 것을 선물하시는데도 인간이 그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면 예의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다윗이 하느님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원의는 좋은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십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거절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거절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허락하시는 바를 수행할 때 필요한 믿음만큼 큰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다윗은 하느님과 친하게 지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8-2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삶의 무게에 허덕일 때 드리는 기도(민수 11,11-16)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모세는 백성 및 자신을 시기하는 동기, 아론과 미르얌을 위해서(민수 11,2; 14,13-19; 21,7; 12,1-2.13) 주님께 탄원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민수21,7; 12,11-12)라고 모세에게 청합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 멈추도록 중재 역할을 충실히 합니다. 하지만 백성은 이미 이집트를 탈출하기도 전에(탈출 5,21), 탈출하면서(탈출 14,11-12), 또 탈출하자마자(탈출 15,24;16,2;17,3) 불평을 늘어놓았고,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뒤에도 백성의 불평은 그치지 않습니다.(민수 11,1-6.10) 급기야 백성들의 성화에 탈진한 모세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 하십니까?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민수 11,11-15) 지칠 대로 지친 모세는 왜곡과 과장을 섞어 말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하느님의 눈에 들었음에도(탈출 33,12-13) 자신이 그분의 ‘눈 밖에 났다’(11,11)고 하고, 하느님이 자신에게 백성을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품에 안고 가라’신다고(11,12) 넋두리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기까지(11,21-22)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곧바로 해결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일단 하느님은 이스라엘 원로 72명에게 영을 내리시어 모세의 짐을 나눠서 지게 하시고(11,16-17.24-30) 고기를 내려 주십니다.(11,18-20.31-33) 적게 거둔 사람이 열 호메르(대략 2000~3000리터)의 메추라기 고기를 모았을 정도로 하느님은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십니다. 백성은 하느님을 무시하면서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의 삶을 그리워했습니다.(민수 11,4-6.10) 민수기 11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음식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자유를 누릴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삶을 택할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벌하시는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하느님 상에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람이 하느님 없이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소진한 삶, 번아웃 증후군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모세의 기도는 그러한 상황에서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것이 효용이 있음을, 아니 꼭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하느님께 넋두리하면 당장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거운 짐과 걱정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은 나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는 이를 보내 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해해 주시고 무거운 짐을 덜어 주시는 분입니다. 화가 치밀고 미움이 끓어오를 때 우리는 그에 걸려 넘어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가져가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비록 그것이 내 눈에 가려져 있더라도 내가 갈 길을 알고 계시고,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욕심과 불평이 아니라 생명, 건강, 소중한 사람들과 같이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선물이 우리 마음을 채울 때 우리는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8-18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아이를 낳지 못해 서러움을 당하다가 아이를 얻은 한나의 기도 (1사무 1~2장)

사무엘은 반복적으로 이민족의 괴롭힘을 당하던 판관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민족을 인도한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인물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으로서(1,2.5-8) 아들을 주십사 애절히 기원하고(1,10-13), 어렵게 얻은 사무엘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한나는 자기 민족 역사의 전환기 중심에서 기도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한나는 아이를 못 낳는 데다가 남편의 다른 부인이 그를 괴롭히고 화를 몹시 돋우었기에(1,5-6)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합니다. 먼저는 남편 앞에서 울고(1,7) 이제는 주님 앞에서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1,15) “주님의 면전에서 네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아라”(애가 2,19)는 말씀처럼 기도는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께 그대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쓰라린 마음과 무거운 마음과, 괴롭고 분함을 그대로 털어놓습니다. 한나가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는 동안 사제 엘리가 그의 입을 지켜보면서 한나를 술에 취한 여자로 오해했다는(1,12-13) 사실은 당시에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소리를 내어 기도했음을 추측게 합니다. 한나는 마음속으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하느님께 기도함으로써 침묵 속의 기도도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한나에게서 두 가지 자세가 눈에 띕니다. 첫째는 하느님 선물을 자신이 독차지하지 않고 아낌없이 다시 내놓겠다는 봉헌의 자세이고 둘째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자신을 꾸짖는 사제 엘리 앞에서 자신을 ‘당신 여종’으로 여기는 겸손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로 한나에게서 이미 변화가 감지됩니다. 울기만 하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한나는 기도 후에 음식을 들며 얼굴색이 밝아집니다. 또 기도의 구체적인 결과를 얻기도 전에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남편과 함께 주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후에 아이를 바치면서도 다시 두 사람은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이 사실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이는 현실의 어려움에 휩쓸리지 않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무엘을 바친 한나는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이루시는 일의 근본적인 모습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1사무 2,1-10 참조) 한나는 넘치는 기쁨에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는 “누구도 주님과 같지 않습니다”(2,2)는 고백은 “온 세상에 나와 같은 신은 없다”(탈출 9,14)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인간의 교만함과 거만함에 대한 경고입니다.(2,3) 뒤집어짐을 표현하는 열네 개의 반대말(2,4-7)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음과 더불어 어떠한 인간적인 대단함도 그분 앞에서는 보잘것없으며 그것에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힘 있는 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이를 먼지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이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시어 …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 하느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역사를 이끄십니다. 이민족의 억압을 받던 이스라엘이 다윗 왕을 통해 ‘평온’(2사무 7,1)을 얻고, 엘리의 사제 가문이 몰락(1사무 2-4)한 뒤 사무엘의 등장하고, 사울이 선택되었지만 몰락하며(1사무 9-31), 한나가 사무엘을 바친 뒤 다섯 자녀를 더 얻었다는(1사무 2,19-21) 사실은 뒤집어짐을 노래하는 한나의 기도가 힘없는 이들의 하릴없는 독백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는 이들의 참된 고백임을 입증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8-1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세의 기도 (탈출 32~34)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한 후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에 불안함을 느끼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탈출 32,1-6) 하느님은 이에 진노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32,10) 여기서 늘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우리가 믿는 것과 완전히 다른, 화가 가득하고 복수하시려는 하느님 모습이 우리를 당황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분을 참지 못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화를 내십니다. 레위인들이 이 일로 자기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3000명이나 죽였다는 이야기(32,25-29)는 우리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지 않고 우리 입맛에 따라 하느님 상을 조작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식구를 잃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모세의 중재 기도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가시도록 하느님을 여러 번 설득합니다.(32,11-14,31-34; 33,12-17; 34,8-9) 모세가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라고(32,33) 말씀드리지만, 주님은 “나는 나에게 죄지은 자만 내 책에서 지운다.(32,34)는 말로 분명히 거부하십니다. 다시 모세가 하느님을 달래기 시도합니다.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저에게 ‘이 백성을 데리고 올라가거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누구를 보내실지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께서는 ‘나는 너를 이름까지도 잘 알뿐더러, 너는 내 눈에 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제가 당신 눈에 든다면, 저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신을 알고, 더욱 당신 눈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민족이 당신 백성이라는 것도 생각해 주십시오.”(33,12-13) 모세는 주님께 애교를 부립니다. 자신이 더욱 주님 눈에 들게 해 달라는 청은 모세가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려는 밑밥입니다. 그의 본래 관심사는 그가 말미에 살짝 언급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번에도 “내가 몸소 함께 가면서 너에게 안식을 베풀겠다”(33,14)고, 즉 모세만을 언급하십니다. 다급해진 모세가 자신의 의중을 단도직입으로 말합니다. “당신께서 몸소 함께 가시지 않으려거든, 저희도 이곳을 떠나 올라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제 저와 당신 백성이 당신 눈에 들었는지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와 함께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33,15-16) 모세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늘 함께 이야기하지만 하느님은 계속 모세만을 언급하십니다.(33,17) 모세가 주님을 뵌 뒤(33,18-23) 재삼 간청합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34,8-9) 그제야 주님은 ‘너의 온 백성’, ‘너를 둘러싼 온 백성’, ‘너희’라는 말로 이스라엘을 다시 받아들이시고 모세와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십니다.(34,10-28) 우리는 아픈 이들이나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모세는 입술과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기도합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34,8) 겸허한 자세로 하느님께 애원합니다.(32,11)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하면서 타인을 단죄하는 모습에서가 아니라 타인의 잘못까지 품어 안는 우리의 자세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실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7-28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노래하며 춤추며 온 백성이 함께 바치는 기도(탈출 15)

“나의 힘, 나의 노래이신 주님!” 가수 고(故) 김광석씨는 ‘나의 노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겨운 리듬과 희망찬 가사를 담고 있는 이 노래에서 “나의 노래는 나의 힘, 나의 노래는 나의 삶”이라는 후렴이 반복되는데, 이는 가수가 가지고 있는 삶의 정수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아기가 엄마 뱃속을 나오면 울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갈대 바다를 빠져나오면서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자유를 얻은 백성은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는 성경에 나오는 첫 노래이자 함께 바치는 기도입니다. 바빌론의 패망에(묵시 18장 참조) 대한 하늘에 있는 무리의 환호와(묵시 19장 참조) 같이, 이 노래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이라는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 앞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백성은 주님과 그분의 종인 모세를 마음으로 믿는(탈출 14,31 참조) 데에 그치지 않고 마음과 입을 열어 찬양 노래를 부릅니다. “나의 힘, 나의 노래(성경 번역은 ‘굳셈’)이신 야(훼)!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다”(2절; 이사 12,2: 시편 118,14 참조)는 대목이 노래 전체를 요약합니다. 여기서 힘과 노래라는 조합은 주님의 권능뿐만 아니라 그분의 멋짐을 드러냅니다.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 사건을 전하는 기도문의 수준 높은 시상이 ‘노래’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전쟁의 용사’와 ‘오른손’ 및 그분께 맞서는 이들은 거센 물속에 가라앉은 납덩이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표현이 그분의 탁월한 ‘힘’을 보여줍니다. 주님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이름인 ‘야훼’의 줄임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여기서 그분을 얼마나 친밀히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가 당신과 같겠습니까?”(탈출 11절)는 노래의 중심이자 그 전환점입니다. 이 질문에서 어떤 신들과도 비길 수 없는 주님의 탁월함이, 또 그분이 일으키시는 기적의 뛰어남이 드러납니다. 그분에 맞설 이나 비길 이는 아무도 없고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3~10절의 노래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찬양하고 12~18절은 미래를 지향합니다. 지금까지 선사된 것이 감사의 이유이지만 또한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 이미 찬양에 포함됩니다. ‘힘과 노래’는 주님의 권능 드러내 생생하게 펼쳐지는 듯한 기도문과 비유로 그분의 탁월한 힘 보여줘 하느님은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해 함께 부르는 노래로 고백받아야 이와 같이 기도 안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들어섭니다. “땅이 그들을 삼켜 버렸습니다.”(16절)는 민수기 16장의 반역을 암시하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필리스티아, 에돔, 모압, 가난안 민족들을 거쳐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당신께서 살려고 만드신 곳’(17절)은 후에 솔로몬이 세우게 될 성전을 가리킵니다.(1열왕 8,49; 2역대6,39) “주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다스리신다.”(18절)는 마지막 구절은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언제나 도와주시고 이끄시는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노래 전체는 점차 확장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남성)이 “나는 노래하리라”(1절)로 시작하지만 미리얌과 여자들은 “너희는 노래하여라”(20절)라는 추임새를 넣고 남성과 여성이 마주하여 웅장한 이중의 합창을 하는 듯합니다. 게다가 여자들은 손북을 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동반합니다.(판관 11,6-8; 1사무 18,6-8; 예레 31,4 참조) 합창단과 관현악단과 무용단이 모두 함께 신나는 음악을 엮듯이 찬양의 기도는 모든 이들을 포괄합니다. 누구보다 위대하신 하느님은 시간을 넘어 변함없이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십니다. 나의 노래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로 찬양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7-21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짝을 찾으며 바치는 기도

“아내를 얻은 이는 행복을 얻었고 주님에게서 호의를 입었다.”(잠언 18,22)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은 뒤 이사악의 부인감을 자기 고향에서 얻어 오도록 자신의 가장 나이 많은 종을 파견합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에 함께해 주시고 자기에게 미래를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를(창세 24,7 참조) 그에 앞서 보내시리라 믿습니다. 자신의 짝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짝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자신의 사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종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 오늘 일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제 제가 샘물 곁에 서 있으면, 성읍 주민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것입니다. 제가 ‘그대의 물동이를 기울여서, 내가 물을 마시게 해 주오.’ 하고 청할 때,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먹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 소녀가, 당신께서 당신의 종 이사악을 위하여 정하신 여자이게 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자애를 베푸신 줄 알겠습니다.”(창세 24,12-14) 여기서 자기에게도, 또 달리 말하지 않아도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소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러한 소녀는 친절하고, 다른 이를 돌보고, 나그네를 맞아들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까지 배려하는 부지런한, 훌륭한 여인의 덕을 갖춘 이를 의미합니다. 목마른 낙타 한 마리가 70리터의 물을 마시니 그가 데려온 열 마리 낙타에게 주저함 없이 물을 샘에서 길어 먹이는 소녀는 배려심과 수행 능력을 겸비한 아름답고 뛰어난 여인으로서 이사악의 아내,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종의 행위와 하느님의 도우심이 복합되면서 하느님이 누구를 이사악의 아내로 정하셨는지가 드러납니다. 종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창세 24,15 참조) 레베카가 등장하고 자신이 기도한 대로 그녀가 행동하자 종은 무릎을 꿇어 주님께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에게 당신 자애와 신의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창세 24,27) 그는 주님께서 그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어 그는 주인의 아우 집안인 레베카의 집에 들어가고 그 가족들에게 자기가 바친 기도와 그 기도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증언합니다. 이로써 그의 말을 듣는 가족들은 이 일에 분명히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고, 하느님께서 몸소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사악과 레베카의 결혼을 승낙합니다.(창세 24,50 참조) 이에 다시 한번 종은 땅에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합니다(창세 24,52 참조). 평생의 반려자를 찾는 것은, 또 그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매우 어렵습니다. 결혼 문제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 더 이상 자신의 힘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는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많은 종은 그런 자세의 모범입니다. 그는 사건 전체에서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다섯 번이나(24,12-14;26-27;42-44;48;52) 기도합니다. 누구에게나 미래를 향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에서 보이듯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셨고 앞으로도 우리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누구나 혼자 길을 걷지 않고 그분과 함께 갑니다. 그분의 도움을 믿고 그분과 함께 내리는 결정에 큰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7-14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이사(移徙)하면서 바치는 기도

올 연말까지 기도에 대해 여러분과 생각을 나눌 신정훈 미카엘입니다. 언젠가 어느 신자분이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까?”하며 여러 번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끝까지 저는 그분에게 시원한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분은 어려운 문제를 안고 계셨고, 올바른 기도를 드리면 그 문제가 즉시 풀어지리라 여기셨던 듯싶습니다. 명의의 한 수에 깊은 병이 씻은 듯이 나는 것처럼 기도를 문제의 해결 도구로 삼고자 하는 생각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람은 그분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안에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쁜 일, 또 슬프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활동하시도록 합니다. 기도에서 각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기도의 구체적인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에 우리는 성경을 따라가면서 기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칼 라너 신부님은 어떤 이에게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것이 곧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느님과 가까워질 것입니다. 제 글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의견 주시면(shinmichael@hanmail.net) 짧고 부족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나이 마흔의 야곱은 형 에사우를 피해 부모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야곱의 기도는 여러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야곱은 하느님을 ‘당신’으로 표현하면서 그분과 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야곱은 되돌아오는 길에 형이 장정 사백 명과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하느님을 찾습니다. “저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당신 종에게 베푸신 그 모든 자애와 신의가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사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 요르단강을 건넜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이 두 번째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 말씀으로 시작하고 맺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야곱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위안과 도움을 찾는 야곱은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하느님과 친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기도가 야곱에게 힘을 줍니다. 학교나 일자리 등 많은 이유에서 우리는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낯선 환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분에게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이끕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01년 서울대교구 사제로 서품됐으며, 뮌헨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전공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강의했으며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 자문 위원이다. 2020년부터 독일 뮌헨 상트 막시밀리안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역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신학 주석」 시리즈, 「그리스도교 신앙」(공역) 등이 있다. 기획 ‘성경 속 기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전 교수인 서울대교구 신정훈(미카엘) 신부가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기도를 바로 알고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입니다.

2024-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