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다가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르 1,16-20 참조)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눈으로 봤고 그분의 가르침을 귀로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반자이자 목격자이며, 동시에 특권을 가진 청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전해주는 ‘예수 이야기’에서 그들은 아직 ‘조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심으로써, 그들은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보내다’ 혹은 ‘파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아포스톨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르 6,7 참조)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제자들은 ‘따르는 이’ 혹은 ‘배우는 이’에서 ‘파견 받은 이’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부여한 ‘권한’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권한’ 혹은 ‘권위’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엑수시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와 함께 머무른 이들이 ‘권한’을 받음으로써 ‘사도’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르 3,14-15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마르 1,15) 그들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의 병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권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다른 이(예를 들면, 군중 혹은 여인들)와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사도, 곧 파견받은 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마르 6,8-9 참조), 먼저 사도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벌의 옷은 선교활동을 위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림으로써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도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옆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두 번째로 파견받은 사도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환대나 거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마르 6,10-11 참조)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미덕이었습니다(창세 18,1-8; 19,1-3; 욥 31,32 참조). 그러나 사도들이 환대를 받을 때에도, 그들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혹시 거절을 당한다면 거절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다녀왔을 때 옷이나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곤 했는데(2열왕 5,17; 이사 52,2 참조), 이 행동은 정결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절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1독서에서 ‘파견 받은 이’의 또 다른 모델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예언자였습니다(아모 7,15 참조). 그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들어 올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적 불균형 현상으로 이어졌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화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법적 부조리 또한 만행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찬 이스라엘로 아모스 예언자는 파견됐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 거룩한 미사성제에 참여한 우리는 사제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미사가 끝나면서 파견을 받는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듣고 몸과 피를 모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은 파견의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제 또는 사제는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그들을 파견한다.” 미사의 은총을 가득 받고 파견된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미사 안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을 힘차게 고백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지혜로운 왕 솔로몬의 타락

지혜로운 사람은 가난해도 즐겁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유해도 걱정에 잠을 못 이룬다. 신라시대의 대학자 최치원(857-?)은 생활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만족하면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기 일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원님과 백정이 있었다. 원님은 그야말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고 착하고 예쁜 부인을 만나 자식도 여럿 두었다. 백정은 천한 신분 때문에 매일 무시당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여 일찍 늙어 보여 결혼도 못 하는 신세였다. 어느 날 원님이 산책 중에 백정을 만났다. 백정은 예의를 갖추어 절을 하였다. “그런데 원님, 안색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곳이라도?” 원님은 하늘을 한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걱정이 너무 많네. 혹시 고을에 강도나 도둑이 들지 않을까? 혹시 누가 나에게 불만이 있는 자가 나를 모함하여 임금님이 갑자기 벼슬에서 파직시키지 않을까? 그 밖에도 걱정거리가 많다네. 내가 이런데 자네는 오죽하겠나?” 그 말에 백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쇤네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가족이 없으니 걱정할 게 없고, 가진 재산도 없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고기를 사람들에게 팔면 돈을 받으니 기쁘고, 매일매일 그냥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그 백정의 말에 원님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이 왔다. 비로소 백정의 밝은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의 삶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보통 인간의 고통은 욕심에서 비롯되고 이 욕심이 사람들을 죄와 잘못된 길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다. 솔로몬 하면 항상 지혜라는 단어가 따라붙을 정도로 영민한 왕이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정을 확립했다면 그의 아들 솔로몬은 안정된 정치적 수완으로 왕국에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정략적인 혼인과 무역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고,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부전자전이라 했나? 솔로몬도 아버지를 닮아 호색가의 DNA(?)를 갖추었다. 그는 수많은 외국 이방인 여인들, 모압 여인, 아몬 여인, 에돔 여인, 시돈 여인, 헷 여인 등 온갖 외국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분명 정치적 장점도 있었지만, 왕궁 깊숙한 곳에서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게 됐다.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국가이며 항상 이스라엘의 문제는 역사는 잡신들과의 투쟁과정으로 점철돼 있었다. 솔로몬은 우상숭배가 궁정 안에서 이루어지게 했고, 지나친 세금 부과와 강제노역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다. 큰 둑은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가장 약한 부분부터 방심한 사이 어느새 전체가 무너진다. 하느님의 축복을 약속받는 것으로 시작된 솔로몬의 통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풍요와 큰 성공은 솔로몬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는 결국 타락하게 됐다. 인생에서 겸손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의 마음을 지니자.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14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거부’와 ‘배척’이라는 주제와도 매끈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일은 여타 지방에서도 늘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을 들은 청중의 반응은 성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보인 실감적, 입체적 반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나올까?’(마르 6,2 참조) 하는 말들에 그들이 느낀 심리적 파장이 속속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지니신 ‘치유의 능력’입니다. 곧 가르침과 이적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익명화된 이들의 말들은 그러나 아직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극의 물꼬를 바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고 하는 대목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로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가 줄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졌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다소 거친 배척이 더없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시종일관 예수를 ‘저 사람’이라 부르는 것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무시, 경멸,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의 근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을 가진 ‘아웃사이더’일 뿐입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커다란 반감이 너무도 선명하여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6,3)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말이 낙인처럼 찍힙니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이고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점’을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묘한 심리적 장벽입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노골적인 거부와 배척은 불편한 압박의 틀이 되어 예수님께 먹먹한 경험을 안깁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는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처지를 예언자의 삶에 빗대어 길고도 쓸쓸한 여운을 남기십니다. 배척과 미움의 대명사인 예언자들의 삶에서 당신의 삶을 읽어내고 계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배척은 예수님의 이후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6,5)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6)라는 마지막 구절이 강력한 여진을 남깁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향에서의 ‘거부’와 ‘배척’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믿음과 연관 지으며 그들의 불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듣고 고향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에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바람과 파도, 더러운 영과 질병도 예수님의 권능에 복종했는데,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적수’인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불신이 마치 예수님의 손발을 묶어 버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압도당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믿음의 부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믿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를 편견의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이 타자에게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의 감옥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이 유독 눈에 밟히는 오늘, 생각의 탄력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7-0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간 다윗왕

중국 명나라 시대에 큰 도둑 떼가 국경에 몰려들었다. 왕양명(1472-1528)은 황제의 명령으로 국경 마을로 떠났는데 도둑들은 산속 깊이 숨어 있고 좀처럼 쉽게 정벌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읍에 있는 왕양명의 제자들이 학문을 게을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양명은 즉시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험한 산속에 버티고 있는 도둑이라도 무찌르기를 계속하면 결국 정벌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도둑은 완전히 무찌르기가 정말 어렵다.” 스승의 편지는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에 정진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유혹의 연속이다. 왕양명은 안 될 일인 줄 알면서 하는 것, 열심히 해야 할 때 피우는 게으름, 이런 것들이 모두 마음속의 도둑이라 했다. 그는 이 도둑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남의 것을 탐하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그저 혼자만 잘 먹고 잘살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왕양명은 항상 곧은 마음으로 자신 속의 도둑을 물리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윗왕은 어느 날 밤에 궁전을 거닐다가 멀리서 목욕을 하고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그 여성은 밧 세바란 여성인데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다, 그의 남편은 충신 우리야였다. 그런데 다윗은 부하를 시켜 여성을 데려와 정을 통했다. 다윗은 부하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 꾀를 냈다. 다윗은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에 보내 결국 그를 죽었다. 그후 다윗은 우리야의 부인을 아내로 삼았다. 다윗은 탐욕에 눈이 멀어 부하를 일부러 죽게 하고 그 아내마저 차지하는 죄를 지은 것이었다.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다. “어떤 성에 부자와 가난한 이가 살았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잣집에 손님이 왔는데, 부자는 자기 양이 아까워서 가난한 집의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저런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 놈이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소리를 지르며 흥분한 다윗을 보고 나단은 결정구를 날린다. “그 파렴치한 놈이 바로 임금님입니다. 임금님은 충신 우리야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차지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임금님은 그 일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하느님은 마치 대낮처럼 그 일을 온 천하에 비출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하느님께 큰 죄를 지었소.” 다윗왕은 나단에게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위대한 성군으로 존경받는 다윗왕도 예상외로 죄를 많이 지었다. 그러나 다윗이 위대한 것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뉘우칠 줄 알았던 다윗,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순수한 그의 믿음을 높이 존경하는 것이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07

[말씀묵상]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언젠가 열두 해 동안 하혈해 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봤습니다. 많은 작품이 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이 그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구도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누구의 얼굴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 옷자락 끄트머리에 닿은 여성의 손가락을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예수님께 나아온 여성의 눈길에서 그려낸 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그림을 마음에 간직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음속에서 그 그림을 꺼내어서, 여러분과 함께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림을 닮은 시선으로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시고, 열두 해나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요. 저는 그런 질문이 부족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성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겠지요. 꽤 많은 학자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예수님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를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쓰인 수많은 기록을 발굴했고, 사료를 바탕으로 예수님 시대를 재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시대인 기원후 1세기, 갈릴래아에 수많은 기적 행위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게자 베르메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참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적 신앙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지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행한 수많은 치유 기적 이야기는 그때의 갈릴래아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역시, 그런 기적 행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기적은 진짜였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치유 기적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의 문장을 더듬어 읽습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다급히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 다급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리, 제자들의 모습은 차갑습니다. 제자들의 차가움 가운데 고립된 예수님의 다급함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 여성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여성은 다시 한번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 왜 이 여성은 예수님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있을까요. 율법은 월경 중의 여성을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레위 15,9-27 참조) 월경 중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열두 해나 하혈했다면 그 의미는 좀 달라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성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해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았을까요. 많은 의사를 만나는 동안 모든 재산을 썼을 것이고요. ‘숱한 고생’이라는 표현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담겨 있나요. 바로 그런 여성이 군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정한 여성은 사람들을 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여성은 군중 속의 사람들을, 마침내 예수님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성을 찾아서 그 마음의 짐을 벗겨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죄인이나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랑받는 딸이라고 말이지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와 건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정리될 무렵,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수고스럽게 오실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회당장과 함께 집으로 향하십니다. 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며 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어’ 버립니다. 울음 속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니, 그제야 회당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으로 향하는 회당장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요. 아이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 집에는 사람들이 울고 있고, 이제 저 문 너머에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 사람들의 비웃음을 마주한 절박한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어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의 무심한 말과 표정도 화살처럼 날아드니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물리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러 오시면서, 회당장의 슬픔을 돌보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긴 여성을 찾아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회당장의 모든 걸음에 함께해 주셨고, 계속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열두 해나 하혈했던 여인을 낫게 하시고, 어린아이의 숨결을 돌려주신 사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유 기적’의 사실 여부에만 주목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에는 가득합니다. 복음이 정말 전해주려던 것은, 그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찾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찾고 계시고,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겠지요. 옛날의 기적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어 있는 글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6-30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민심을 잃고 몰락한 이스라엘의 사울왕

1939년 독일의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폴란드를 완전히 장악한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평화회의를 제의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거부하자 독일은 프랑스 파리까지 단번에 진격했다. 이제 마지막 영국만이 남았다. 영국을 향한 공격이 계속됐기 때문에 영국 국민은 대단히 불안했다. 평화 협상을 제의하는 국민들도 많았다. 말이 평화 협상이지 독일에 점령당하는 것이었다. 이때 영국은 처칠을 수상의 자리에 앉히고 전시 내각을 구성했다. 처칠은 의원들과 국민들에게 “내가 영국을 위해 바칠 수 있는 것은 피와 노력과 땀과 눈물뿐입니다. 나는 모든 힘을 기울여서, 또한 하느님의 도움에 의지하여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 마지막 목적은 단 한 가지, 승리입니다”라고 역설했다. 처칠은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중요한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치는 민심이 떠나면 민심은 모래처럼 흩어지고 힘이 분산되어 전쟁에서는 백전백패한다. 사무엘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 뽑았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안에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우리 민족을 구할 수 있겠어?’하며 얕잡아 보고 사울을 따르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사울은 처음에는 큰 포용력을 가지고 자신의 정적들을 감싸 안았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 책봉된 사울은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고 백성들은 사울을 하느님이 보내주신 임금으로 섬겼다. 사울이 왕에 오른 지 2년이 지나 필리스티나와 전쟁을 벌였다. 아군의 군대는 적군의 위세에 눌려 모두 떨고 있었고 병사들도 하나둘씩 도망쳤다. 마음이 급해진 사울은 자신이 제사를 지냈다. 그때 바로 사무엘이 나타나 하느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것을 백성들 앞에서 추궁했다. 사울은 전쟁에서는 다행히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전폭적인 존경을 받던 예언자 사무엘의 추궁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는 큰 결함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사울은 후에도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보다 자신을 드러내는 전승비를 세우는 것에 더 신경을 썼다. 결국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을 버리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 하느님의 버림을 받은 사울은 더욱 궁지로 몰렸는데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백성의 인기를 독차지한 것이었다. 사울은 다윗을 노골적으로 질투하고 시기했다. 그럴수록 이스라엘 백성의 민심이 떠나고, 가족들의 냉대를 받고, 스승 사무엘에게도 버림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사울은 왕의 자리는 차지하고 있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손꼽는 영웅이었지만 국민들의 마음을 놓쳐버린 실패한 군주였다. 능력이 출중한 장수였던 사울왕이 권력을 잡은 후 교만해져 민심을 잃고 하느님의 징벌을 당했다, 추락하는 그의 삶은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큰 교훈을 안겨준다. 지도자의 가장 큰 힘은 민심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6-30

[말씀묵상] 연중 제12주일

오늘 복음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던 예수님께서 침몰할 위기에 빠진 배를 구하기 위해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만드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이런 초자연적 기적은 예수님이 갖는 ‘신성’(하느님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묵상은 이 같은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 또 다른 차원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는 복음서의 전체 맥락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지난주와 이번 주 복음인 마르코 복음 4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에게 가르침을 펼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가르친 내용은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것입니다. 먼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가 나오고 이후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나옵니다. 바로 지난주 복음이지요. 제자들은 군중들과 함께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저녁이 되자 예수님이 타고 가르치시던 배와 다른 배들을 동원해서 호수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서운함이 있어 보입니다. 다 죽게 됐는데 걱정도 안 하고 혼자 태평하게 잠을 자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람과 호수를 잠잠하게 하신 후 오히려 제자들을 야단치는 듯 말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이 같은 예수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무엇을 겁내는가? 믿음이란 과연 어떤 것을 믿는 것인가? 무엇을 믿는가, 왜 믿는가는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며,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분의 뜻을 살아갈 때 구원을 얻기에 믿는 것입니다. 지난주 복음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따르면 하느님은 땅에 씨를 뿌리시는 분이며 그 씨가 저절로 자라나게 하는 분입니다. 그 열매를 수확하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겨자씨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통해 세상을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너무도 미약해 도저히 큰 나무가 될 것이라 믿기 어려운 것을 자라게 해 하늘의 새들이 그늘에 깃들게 하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예수님은 알려주십니다. 묵상해 봅니다. 하느님은 항상 땅에 씨를 뿌리시는 분입니다. 땅은 바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삶에서도 그분은 늘 당신을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 씨를 뿌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삶이 내 기대와 바람대로 잘 풀릴 때도 씨를 뿌리시고 전혀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할 때도 씨를 뿌리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나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에게도 그러하십니다. 더 나아가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도 씨를 뿌리십니다. 우리는 정말 이런 하느님을 믿나요? 그렇게 뿌린 씨가 저절로 자라나 열매를 맺도록 하는 분도 하느님입니다. 다만, 그 씨가 길이나 돌밭,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닦고 삶을 바꿔 가야 합니다. 이렇게 자란 열매를 걷는 것도 하느님의 몫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삶의 열매를 내가 수확한다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밭에 뿌린 씨의 열매는 하느님이 거둬 가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열매를 거두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나요? 하느님이 뿌린 씨는 참 작습니다. 마치 초라한 나의 모습과 능력처럼 미미합니다. 도저히 저런 모습과 능력으로는 뭔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런 작고 초라한 것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믿나요? 제자들은 어떤 하느님을 믿었을까요? 많은 경우 겁을 낸다는 것은 자신의 기대가 이뤄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집니다. 제자들은 호숫가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여전히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만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려 했고,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에 좌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믿는다는 영어 동사 ‘Believe’는 사랑한다는 동사 ‘Love’와 어원이 같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냥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신뢰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는 질문은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묻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내 경험 안에서, 내 바람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판단하는 삶은 늘 두려움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을 느끼고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뿌리입니다. 그렇기에 바람과 호수를 포함한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신뢰하고 사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가지신 그 믿음을 나의 믿음으로 삼고 살도록 초대받은 제자들입니다. 쉽지 않은 일들이 많고, 감당하기 힘든 일도 벌어지고 스스로가 초라하게 여겨지는 순간도 일어나지만, 항상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아야겠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6-23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이스라엘 최후의 판관 사무엘

옛날 아테네에서 누더기 옷을 걸친 한 노인이 거리에서 소리를 쳤다. “여러분, 돼지가 되어 즐기기보다는 사람이 되어 슬퍼하십시오. 사람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니까요.” 노인은 당대의 스승, 소크라테스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말에 호응했다.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지 알게 된다고 했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당시 아테네의 부패한 정치가와 학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올바르게 살라고 충고를 거듭했다. 아테네 정부는 눈엣가시 같은 소크라테스를 잡아 “청년들을 현혹하고 국가에 해를 끼친다”는 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을 탈출시키려 했지만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끝내 사형당하고 말았다. 예언자는 히브리말로 ‘나비’(nabi)혹은 ‘로에’(roeh)라 하는데, 하느님의 말씀을 대리해서 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권력자의 미움을 받아 박해나 죽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였다.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자를 꼽으라면 사무엘이 빠질 수 없다. 사무엘은 예언자 중의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판관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마지막 판관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첫 예언자로 칭송받는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인과 본래 살고 있던 필리스티아인은 계속해서 충돌했다. 기원전 10세기경 필리스티아인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스라엘은 실로에 있던 하느님의 계약 궤까지 모셔와 전투를 했지만 대패하고 계약 궤마저 필리스티아인에게 빼앗기고 만다.(1사무 4,1-17) 나중에 이스라엘은 우여곡절 끝에 하느님의 계약 궤를 되돌려받았다. 전투에서 진 후 이스라엘에서는 강력한 왕조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사무엘이 등장해 왕정을 분명하게 반대했다. 왕조국가가 되면 생겨날 폐해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설명했다.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왕의 종이 될 것이라 경고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경고를 귓등으로 들었다. 할 수 없이 사무엘은 12지파 중 선택된 야곱의 막내아들 베냐민 지파 중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뽑았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민족중흥의 주역이었으며, 왕국의 건설자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의 왕은 주변 나라의 군주와 분명히 다르다. 이스라엘 왕은 절대군주가 아니며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주 하느님뿐이었다. 위대한 예언자 사무엘도 자식 복은 없었다. 늙은 나이에 판관으로 임명한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아를 판관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탐관오리의 길을 갔다. 최고의 예언자 사무엘에게도 아들들의 타락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사무엘은 아들을 감싸고 선택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과 경고에 순응했다. 이처럼 사무엘은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사울에게 기름 부어 축복하는 사무엘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

2024-06-23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목숨을 걸고 정의를 외쳤던 아모스

중세 영국의 비인간화를 비판한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1478~1535)는 영국인들이 존경하는 대법관이었다. 이미 왕비를 6명이나 폐위시키고 대부분 처형시키는 불의한 군주였던 헨리 8세가 다시 왕비인 캐서린과 이혼하고 궁녀와 결혼하려고 하자 토마스 모어는 국왕이라도 국법을 어기면 안 된다고 하며 결국 대법관직을 사직했다. 헨리 8세는 믿었던 토마스 모어를 런던탑에 가두었고 결국 반역죄로 몰아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이때 단두대에서 했던 토마스 모어의 말이 영국인들 사이에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평소 유머를 즐겨하던 토마스 모어는 관리에게 “목은 잘리더라도 죄 없는 수염은 다치지 않게 해주게”하며 여유를 보였다. 그는 죽기 전 시편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54,4)를 마지막 기도로 바치며 장렬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토마스 모어의 정의와 용기는 지금도 영국인들의 기억과 그들의 삶 속에 살아있다. 트코아의 목양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모스는 어느 날 이스라엘이 몰락하는 환시를 보았다. 이스라엘의 전 지역이 망하고 불바다가 되어 백성들은 곤욕을 치르고 임금과 관리들은 포로로 잡혀간다는 내용이었다. 하느님은 아모스에게 자신의 말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아모스는 평생 양을 치고 나무를 가꿔서 먹고사는 무식하고 능력도 없는 일개 농부의 말을 누가 귀담아듣겠냐며 부르심을 거절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아모스에게 당신의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심부름꾼이 되어 달라며 계속 설득했다. 아모스는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아모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사실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물질이 풍요해질수록 정신은 타락하여 사회의 기강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지도자나 백성들은 방심하고 있었다. 특히 지도자들은 술과 여자에 빠져 흥청거리며 정치는 뒷전이었다. 사회의 지도층이 썩고 부패하자 물질주의의 나쁜 물이 종교에도 물들어 갔다. 물질의 풍요가 극성을 부려 지도층이 부패할수록 일반 서민들은 더 착취당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힘 있는 자들이 마음대로 서민들을 착취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커져만 갔다.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당시의 이스라엘의 위선과 잘못에 대해 엄하게 고발했다. 종교도 예외가 없었다. 이런 아모스의 예언은 당시의 지도층들에게 큰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사제들은 아모스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과 공격을 감행한다. 지도자는 무엇보다 쓴소리를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아첨은 지도자에게 우선 듣기는 좋지만 결국 모두 파멸과 멸망으로 이끈다. 어떤 공격과 모함에도 아모스는 당당했다.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아모스야말로 참된 예언자였다. 아모스는 목숨을 걸고 특별히 정의를 강조했다. 아모스같은 예언자는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인재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6-16

[말씀묵상] 연중 제11주일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중심 주제입니다.(마르 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자연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표상들을 ‘비유’로 들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 주셨습니다.(마르 4,33 참조)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 비유를 만나는데, 그중 하나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관한 비유(마르 4,26-29)이고,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마르 4,30-32)입니다. ‘비유’는 그리스어 ‘파라볼레’의 번역으로,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파라볼레’는 하느님의 통치 혹은 행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 등장하는 ‘파라볼레’는 히브리어 ‘마샬’에서 어원적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마샬’은 ‘다스리다’라는 동사와 연관이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 ‘비유’의 형식을 사용한 이유는 ‘파라볼레’에 대한 히브리어의 어원적 기원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먼저 첫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26-29) 어떤 한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사람은 이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지만, 씨앗은 성장하고 활동합니다.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나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비록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말씀은 밭에 뿌려진 씨처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내고 이삭을 맺게 됩니다. 특별히 첫 번째 비유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 때가 되어 곡식에 낫을 내는 농부를 언급하며 결정적인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도 ‘주님의 날’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낫을 대어 수확을 시작하십시오. 땅의 곡식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왔습니다.”(묵시 14,15) 이어서 두 번째 비유를 살펴봅시다.(마르 4,30-32) 씨앗이 땅에 뿌려지고 그 위에서 싹이 자라나는 과정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직경 2밀리미터보다 작은 씨앗이지만,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성장 과정 자체보다는 아주 작은 씨앗과 거대한 나무를 비교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 알의 작은 겨자씨처럼 당장에는 눈으로 보기 어려울지라도 나중에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이 세상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로 성장하는 과정은 하나의 기적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께서 활동하신다고 확신하셨고,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자연 속 작은 것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셨습니다. 겨자씨가 자라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는 비유(마르 4,32)는 구약성경의 전통, 특별히 에제키엘 예언서의 비유적 예고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제 17,22-24)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심으신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에서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거대한 나무로 자라나 온갖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이게 될 것입니다. 향백나무는 새들과 들짐승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나무의 종류에 속하는데, 목질이 견고하고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다윗의 후손, 곧 바빌론 1차 유배 당시 끌려간 여호야킨 임금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향백나무에 관한 짧은 비유를 통해 다윗 왕조의 회복과 번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향백나무의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에제키엘 17장 23절의 말씀은 의구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향백나무는 본래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서의 저자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향백나무는 과실수가 아니지만 하느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향백나무도 열매를 맺는 기적을 보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합니다.(에제 36,3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을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로 소개합니다. 하느님 없이 세상 만물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그 안에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고 약해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거대하고 강한 것이 되면서, 이러한 신비롭고 놀라운 변화에서 우리는 경이로운 하느님의 권능과 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 속에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직접 활동하시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인간의 통찰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느님 나라는 늘 비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려면 하느님의 도우심, 곧 신적 계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통치가 가져올 변화를 수용하려는 자는 신비를 이해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자에게 하느님 나라는 비유로 남아있을 것입니다.(마르 4,11-12 참조) 비유는 믿지 않는 이에게는 허구일 수 있지만, 믿는 이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며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물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힘찬 어조로 고백한 그 믿음을 우리도 각자의 삶 안에서 고백합시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ㄴ-7)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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