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거짓과 중상모략으로 권력욕을 채우려 했던 디오트레페스

오래전 본당에서 사목할 때 주일학교 교사 한 명이 찾아와 “신부님, 제가 이번에 결혼하는데 신부님이 한번 만나주시겠어요?” 하고 요청했다. “왜?”라고 물어보니, 그는 “친척에게 소개 받은 배우자가 흠잡을 것은 없는데, 또 한편으로는 아주 마음이 끌리지도 않아서요”라고 답했다. “대학병원 의사인데 6개월째라 바쁘고 시간이 없어 병원에 찾아가서 몇 번 본 것이 다였어요. 설명하긴 어렵지만 마음이 조금 개운치가 않아요”라면서. 사목 경험이 많이 없던 나는 쉽게 조언을 내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더 깊이 상의해 보라고 다독여 보냈는데, 지금도 후회가 되는 일이다. 그 교사는 마지막 끈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한 결혼할 남편은 아무 직장도 없는 사기꾼이었다. 여자 쪽으로부터 돈만 갈취하려는 목적으로 벌써 여러 번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했다. 결혼 전 탄로가 나서 집안에 난리가 났지만, 결혼식을 안 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교회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지만 동시에 인간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지상의 공동체인 교회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지닐 수밖에 없다. 교회는 지금도 구원을 향해 나가며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는 공동체이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크고 작은 인간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초대교회 때부터 성경을 잘못 해석해 신자들을 오류로 이끈 이단자들이 문제였다. 지역 교회의 책임자가 자신이 멋대로 성경을 해석하여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거나, 원로가 보낸 서간을 무시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요한의 세 번째 편지 안에는 특히 교회 내에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는 디오트레페스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디오트레페스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정통적인 교회의 권위조차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신자들을 현혹해서 분열을 일으키고 중상모략을 일삼았다. 그 이유는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공동체든지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는 공동체를 위하는 척하지만, 구성원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권력욕이 강한 사람은 전통적이고 상식적인 규율조차도 무시하고 조직 내 파벌을 조성한다. 그러면 자연히 공동체는 분열되어 반목과 대치를 일삼는다. 권력이라고 하면 정치인들을 떠올리지만, 우리의 모든 삶 속에 권력욕이 깊이 작용한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공동체에 있다면 그 공동체, 특히 교회는 더 치명적이다. 권력 지향의 사목자는 교회와 신자들을 지배욕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일치는 본질이고 생명과 같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한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기도했던 이유를 묵상해 보자.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예언의 힘(묵시 11,1-6)

요한묵시록 10장에서 예언자 소명을 받은 요한은 11장에 들어서면서 지팡이 같은 하나의 잣대를 받는다. 그 잣대로 성전과 제단,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이들의 수를 측량하라는 말씀을 요한은 듣는다. 에제키엘서(40~43장)에서도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빌론에 유배간 유다 민족을 위해 이미 사라졌으나 여전히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성전을 이상적으로 소개하는 이야기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에제키엘서와 요한묵시록 11장을 함께 열거하면서 위로와 격려의 예언자적 소명을 짚어내곤 한다. 에제키엘이든 요한이든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의 보호로 굳건히 살아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예언자적 소명이라는 것이다. 성전이란 형상은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고 어렵고 힘든 시간,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위로와 희망이 성전을 측량하는 이야기 안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11장은 에제키엘서의 성전 측량과 다르다. 측량의 수치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측량의 행위가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분리를 만들어낸다. 요한은 성전을 측량함으로써 성전 바깥뜰, 그러니까 이민족들의 공간을 분리해낸다.(묵시 11,2) 성전 바깥뜰의 이민족은 폭력적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묵시 11,2) 폭력과 분리된 듯 서술되어야 할 거룩한 도성은 더 이상 평온하지 않다. 불행히도 거룩한 공간이 폭력의 공간이 된다. 성전과 성전 바깥뜰로 구분된 두 공간은 폭력으로 점철된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요한묵시록의 공간적 배치는 늘 이렇다. 천상이 지상 속에 스며들고 지상이 천상의 공간으로 확대되며, 선과 악이 하나의 공간 안에 뒤엉켜 각각의 의미를 더욱 섬세히 살펴보게 독자를 이끈다. 세상의 일이란 게 이분법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논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우리의 경험칙에서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지혜다. 요한묵시록은 거룩함을 지켜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폭력과 악의 세력 안으로 밀쳐 넣는다. 거룩함은 천상에서 홀로 빛나지 않는다. 성전은 홀로 거룩해서 세상을 등진 공간이 아니다. 세상 속, 그 어두움 속에서 성전은 반드시 세워지고 꾸며져야 한다. 이민족의 폭력은 마흔두 달이라는 시간으로 제한된다. 마흔두 달과 관련해서 요한묵시록은 1260일(묵시 12,6 참조)과 3년 그리고 반년(묵시 11,3; 12,14 참조)의 시간으로 다시 소개한다. 같은 시간을 다른 표현으로 곱씹는 이유와 관련해서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다니엘서 7장 25절이 암시하는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임금(기원전 175~163년)의 박해 시절을 떠올린다. 역사의 한 사건은 그것이 폭력적이고 참담할수록 깊고 묵직한 슬픔과 상처를 남긴다. 기원전 2세기의 그 박해는 요한묵시록이 쓰인 기원후 1세기 말엽에까지 이어져 어렵고 힘든 모든 시절의 메타포로 작동한다. 마흔두 달은 거룩한 도성, 거룩한 백성이 살아내는 모든 시간들의 상처가 된다. 그럼에도 상처의 시간은 절망과 소외의 시간이 아니라 예언의 시간이어야 한다.(묵시 11,3)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잔대로 상징화된 두 증인이 나타난다. 유다 전통에서 두 올리브는 이스라엘의 두 영웅, 그러니까 대사제 여호수아와 세상의 지도자 즈루빠벨을 암시한다.(즈카 4,1-14 참조) 종교와 정치의 영역을 아우르는 두 영웅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등장을 기다리는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묵시주의의 시대에 이르러 종말론적 영웅으로 재해석되었다. 구원 상징하는 ‘두 증인’ 등장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 함께하신다는 위로 전달 강력한 하느님 권능 재확인 역사의 두 영웅은 구원과 희망의 상징으로 거듭났고 두 증인을 소개하는 요한묵시록은 폭력의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을 터. 좌절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두 증인을 통해 희망을 견지하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건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증인을 소개하는 서사는 역사 속 하느님의 권능을 배경으로 더욱 힘찬 형식을 빌어 진행된다. 희망은 분명하게 강력한 것이어야 한다는 다짐을 한 것 마냥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단단하고 선명하다. 먼저 두 증인 입에서 나오는 불이다.(묵시 11,5 참조) 원수를 삼킬 정도로 강력한 불은 하느님의 분노를 가리키는 전형적 은유다.(2열왕 1,10 이하; 루카 9,54 참조)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실천하는 모든 이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전통적 믿음이 불이라는 형상 속에 스며들어 있다. 여기에 덧붙여 두 증인은 하늘을 닫는 권한도 지닌다. 하늘을 닫는 권능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참조한 듯하다.(1열왕 17,1)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엘리야를 통한 하느님의 힘찬 권능에 대한 이야기를 소중히 여겨 예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그분을 향한 믿음의 근거로 사용하기도 한다.(루카 4,25; 야고 5,17 참조) 물을 핏빛으로 만드는 모세의 이야기도 첨가된다.(탈출 7,17 참조) 모세는 그야말로 민족의 영웅이고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서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셨다. 두 증인이 모세처럼 꾸며지는 건,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은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리라. 두 증인에 대한 묘사는 11장 6절 후반부에 이르러 절정에 치닫는다.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닌, 특정 민족이나 공간에 치우치지 않는, 그리하여 온 세상 위로 권능을 떨치는 두 증인의 모습은 경이롭다. 그 누구도 대적 못 할 두 증인이기에 그들이 존재하는 한, 예언의 힘은 맹위를 떨칠 것이다. 그런데, 두 증인은 자루 옷을 입고 있었다.(묵시 11,3 참조) 마흔두 달, 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 옷은 두 증인을 감싸고 있었다. 자루 옷은 고통과 회개의 은유로 사용된다.(이사 22,12; 예레 4,8; 마태 11,21) 요한묵시록은 천상의 기쁨, 영광 혹은 권능을 드러낼 때 ‘흰 겉옷’을 사용한다. 자루 옷은 아니다. 두 증인의 옷차림에서 요한묵시록 서사의 긴장이 진하게 느껴진다. 예언자의 운명은 그리 영광스럽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것. 그들은 고통과 회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인가. 11장 7절에 다다를 때, 두 증인은 죽음을 맞닥뜨리고 만다. 그들의 죽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밝혀야 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9면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 34,9 참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소유하고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더해가면 갈수록, 자신의 공간을 채우는 수많은 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행복, 하느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 행복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하십니다. 곧 일흔두 명의 제자를 ‘주님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견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루카 10,3)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만큼이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롯이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제자들은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시선을 두고, 하느님께만 속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한 제자들은 그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라고 인사를 건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8)고도 말씀하십니다. 행복의 기초가 되는 평화의 인사와 음식을 서로 나누며, 한 식탁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걸어갈 이 모든 여정을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사명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간의 체험을 말씀드리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정 기뻐해야 할 일은 그들이 이룬 놀라운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20 참조) 이렇게 일흔두 제자는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인생살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에 대한 체험을 예수님께 보고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체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소중히 여길만한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의 특별한 하느님 체험은 이렇습니다. 사제 수품을 준비하며 가진 30일 피정이 그 첫 번째입니다. 한 달이라는 긴 여정을, 그것도 성 이냐시오 영성에 따라 처음 걷게 되는 피정이었기에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피정을 마치며, 제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자리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본당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의 사제 생활 가운데의 체험이, 체험을 더욱 키워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 또한 하느님의 체험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연수 봉사자들과 연수를 준비하면서, 연수가 진행되는 가운데 연수생들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연수 여정 안에서 제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성숙하고 미성장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치유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손길을 펼쳐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손길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발행일 2025-07-06 제3449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작은 두루마리(요한 묵시록 10장)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지기 전, 작은 두루마리를 펴 들고 있는 천사가 나타난다. 구름에 휩싸인 천사의 모습은 마지막 시대 메시아의 개입을 알리는 ‘사람의 아들’(다니 7,13 참조)과 닮았고 당신 백성 앞에 장엄히 나타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서술과도 닮았다.(탈출 16,10; 1열왕 8,10 참조) 천사는 땅과 바다를 발판 삼아 서 있다. 천상과 지상의 공간적 구분은 천사의 형상 안에서 희미해지고, 희미해진 만큼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간 역사 안에, 백성들 삶 한가운데 천상의 섭리가 천사를 통해 구현된다. 천사의 머리 위 무지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하느님과 인간 세상을 연결하는 계약의 상징인 ‘무지개’(창세 9,13 참조). 천사는 하늘과 땅, 하느님과 인간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는 메타포로 등장한다. 천사를 둘러싼 시간적 구성도 매한가지다. 천사가 등장하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묵시 10,6 참조)이다. 우리말 성경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라 번역했지만, 그리스말 본문은 ‘더 이상 존재할 시간이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시간은 도대체 어떤 시간일까. 천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리거나 기다릴 시간이 없는 그 시간에 천사는 창조의 하느님을 호출하고 그분을 두고 맹세한다. 이 맹세는 마지막 때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 대목과 겹친다(다니 12,7 참조). 다른 시간을 허용하지 않아 더 이상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그 시간은 사실 마지막, 완성의 시간이(어야 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시는 하느님께 맹세하는 천사는 마지막 종말의 때를 이야기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처음과 끝이 하나가 된다. 우리의 이야기는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는 시간’ 또한 소개하고 있다.(묵시 10,7 참조) 혹자는 ‘아직 다다르지 않은 종말의 시간’이라고 해석하고 종말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과도기적 시간이 우리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다 보면 우리말 성경처럼 하느님의 섭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그 완성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대로 그분의 신비가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10,7) 그러나 그리스말 본문은 ‘과거형’ 동사를 사용한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가 울리는 장면은 이야기의 서술상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11장 15절에 가서야 등장한다), 그 시간을 물리적 시간의 미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고 충만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울리는 시간은 하느님의 섭리가 ‘이미,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가리키는 시간적 지표다. 요컨대, 천사가 외치는 이야기의 현재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는 ‘진공(眞空)의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바로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라는 것이고,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시간이라는 것이다. 사실 믿는 이들의 시간은 늘 ‘완성의 시간’이고 ‘마지막 시간’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다가올 시간에 대한 설렘은 믿는 이들의 몫이 아니다. 믿는 이들은 온전히 지금을 전부로,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더 이상의 기록은 필요치 않다. 더 이상 읽어야만 하고 그래서 깨달아야 하고, 깨달음을 기반으로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외침이나 환시의 시간은 무용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마지막이고 완성된 시간을 살아갈 ‘주체’, 곧 ‘예언하는 주체’를 소개한다. 천사가 요한에게 제시하는 작은 두루마리는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히기 위해 등장한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를 두고 말씀을 받는 것, 그러니까 예언자적 소명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에제키엘서 2장 참조) 요한의 캐릭터는 본 것을 글로 옮기는 필자에서(묵시 1,19 참조)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변모한다. 글이 말로써 생명력을 얻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된다. 이어지는 요한묵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묵시 11,3.6.10 참조) 일곱째 천사 나팔 울리는 때를 물리적 ‘미래’로 해석해선 안 돼 믿는 이들에게 시간은 언제나 완성의 시간이며 마지막 시간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언자의 운명은 혹독하다. 작은 두루마리를 삼키는 것이 입에는 달지언정 배 속은 쓰리기 때문이다.(묵시 10,10; 예레 15,10.15-18 참조) 예언의 말씀은 고맙거나 기쁘거나 만족스러울 때도 있지만, 때론 반감과 대립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비난의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예레 20,3 참조) 예언의 말씀이 불러오는 반응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꾸며놓은 시간의 성격을 다시 되짚어 보면 어떨까. 마지막이라서 더 이상의 기대와 바람이 필요 없는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설렘이나 지금에 대한 비판이 아닐 것이다. 빗대자면, 생의 마지막에 내놓아야 할 마지막 말이 앞으로의 계획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혹은 제 삶에 대한 후회가 전부일 수 없듯이 마지막에 외쳐야 할 예언의 말씀은 그저 마지막 꼭 해야 할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꼭 해야 할 그 말은 머뭇거림이 없어야 하고, 계산이 없어야 한다. 그 마지막 말이 예언의 말씀이라면, 그 마지막 말을 듣고 기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실은 마지막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섣부른 편견 때문이 아닐까.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이 마지막 시간에 예언자들의 등장은 울려 퍼져야 할 말들을 늘어놓는 도구가 필요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두루마리를 삼킨 요한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며 요한묵시록 어디에도 요한이 설파하는 예언의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은 그저 말씀이 체화된 한 ‘주체’가 된 것이고 그 주체가 있음으로 되었다고, 그것이면 충분하고 그것으로 마지막 시간에 하느님의 섭리가 완전히 드러난 것이라고 요한묵시록 10장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말씀의 사람, 예언자는 온 생애 매 순간, 마지막을 살듯 살아가는 사람이고, 삶의 모든 순간에 일곱째 나팔이 울려 퍼지길 제 몸으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제 속으로 삼켜져 말씀 자체로 거듭나는 이가 예언자일 것이다. 예언은 늘어놓는 말과 언변이 아니라 살아내는 인격을 통해 하느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9면

[말씀묵상]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교황 주일

오늘은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두 사도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께서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케파(바위)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마태 16,18 참조) 베드로는 아람어 케파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촌 벳사이다(어부의 집)에서 요나의 아들(시몬 바르요나)로 태어나 어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사람 낚는 어부로 예수님께 불림을 받습니다.(마태 4,19 참조) 이후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는 순수하고 솔직하기도 하지만, 수제자의 자격이 의심될 정도로 허술하기도 합니다. 바위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나약하고 겁도 많습니다. 스승은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계시는데 잠을 이기지 못하여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마태 26,40 참조) 물 위를 걸어 예수께로 나아가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지기도 합니다.(마태 14,30 참조) 결국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의 배반은 작지 않은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3) 하물며 갈릴래아인 특유 억양의 사투리 때문에 예수님의 일행임이 탄로 난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부정했습니다.(마태 26,70 참조) 비록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지만, 저주의 맹세까지 하면서 말입니다.(마태 26,74 참조) 그래서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를 깨달은 베드로가 대사제의 저택 밖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8,12) 하지만 베드로는 죄에 절망하지 않고 회개했습니다. 단순한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주저앉아 뒤만 돌아보고 있는 것이고, 회개는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보다 큰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가 회개를 가능케 합니다. 한편,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사울은 유다 땅 안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17㎞나 떨어진 다마스쿠스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쫓아 서둘러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뵌 사울은 눈이 멉니다. 그런데 사울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눈이 먼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사울이 눈을 떴으나 볼 수 없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사도 9,8 참조) 이는 영적인 어둠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흘 동안 사울은 영적인 혼란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 사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 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혀 기꺼이 박해자가 되기로 작정했지만, 이제는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이었던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난 바오로는 더는 그분을 신성모독자로 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신성모독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형 외에는 다른 형벌이 없는 그 치명적인 죄를 말입니다. 사흘의 시간이 지나고 하나니아스로부터 성령의 안수를 받아 사울은 눈을 뜨게 됩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갔다는 표현(사도 9,18 참조)은 영적인 어둠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는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눈을 뜬 바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유다처럼 자신이 지은 죄에 절망하여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그 큰 죄에도 불구하고 감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거나 말입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로써 사울이 바오로로, 최악의 박해자가 최고의 선교사로 거듭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1코린 15,10)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 모두 죄를 지었지만, 절망하여 주저앉아 있지 않고 일어나 ‘담대히’(사도 4,13; 28,31 참조)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들이 담대한, 어찌 보면 뻔뻔한 복음의 선포자가 될 수 있게 해준 것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두 사도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회개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다면 누구나 회개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

일본 문학의 거장 엔도 슈사쿠(1923~1996, 바오로)의 소설 「침묵」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로마 교황청에 한 가지 보고가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크리스토발 페레이라 신부가 나가사키(長崎)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背敎)를 맹세했다는 것이다.” 페레이라 신부는 일본에서 33년 동안 체류한 일본 교회의 총책임자였다. 그의 제자인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일본인 젊은이 기치지로를 만나 우여곡절 끝에 일본에 입국하게 된다. 로드리고는 신자들의 환영을 받고 사목활동을 이어가지만, 결국 나가사키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된다. 이후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의 배신으로 관가에 붙잡히고, 수많은 신자가 고문을 당한 뒤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힘없이 죽어가는 신자들을 바라보며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의 침묵에 점점 믿음을 잃어간다. 그는 배교한 자신의 스승을 직접 보게 되고, 더욱 혼란에 빠진다. 로드리고 신부도 후미에(예수나 성모 마리아 모습을 새긴 목판이나 금속판)를 밟게 된다. 후미에는 일본 내 기리시탄(가톨릭신자)을 색출하고 박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였다. 그가 동판에 발을 올리자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리라.” 그제야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이 침묵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엔도 슈사쿠는 평소 강연에서 자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순교자를 존경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신약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는 스테파노 부제였다. 그는 돌에 맞아 순교했다. 초대교회에는 예수님의 사도들 외에도 처음으로 일곱 명의 부제를 선출했다. 신자 수가 늘어나자, 사도들이 선교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신심 깊은 신자 중 일곱 명을 뽑아 부제로 세우고, 음식 분배와 재정 등을 담당하게 했다. 스테파노 부제는 사도들에게 안수를 받고,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모세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거짓 고발과 위증으로 체포되어, 의회에서 심문을 받은 후 성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그가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을 보았다고 외치자, 군중은 더욱 격분해 그를 돌로 치기 시작했다.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라고 기도하였다. 이어 더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성 스테파노의 유해는 415년경 예루살렘 근처에서 발견되어 스페인, 아프리카, 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 등지로 나뉘어 전해졌다. 유해가 안치된 기념성당들에서는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29 제3448호 18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두 사람

1896년 10월, 인천의 교도소에 다급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온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고종 황제. 당시 그 교도소에서는 일본군에 살해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격투를 벌이다 일본인을 살해한 청년 김창수의 사형이 임박해 있었다. 죄수의 심문서를 보고받던 고종이 김창수의 ‘국모보수’(國母報讐: 국모의 원수를 갚다)라는 죄목을 발견하고, 교도소에 전화를 걸어 사형을 일단 멈추도록 명했다.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설치된 것은 사형일로부터 불과 사흘 전으로, 역사엔 가정이 없지만 며칠 늦었으면 김창수는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김창수는 젊을 시절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이름이다. 김구 선생은 가장 상징적인 독립운동가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될 때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끝까지 임시정부를 운영해 대한민국의 적통성을 지켜냈다. 김구 선생은 8·15 광복 후 귀국해 한반도 분단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남북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1949년 경교장에서 정치적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됐다. 생전 서울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했던 김구 선생은 언제든지 천주교에 입교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피격 당시 박병래 성모병원장(요셉, 1903~1974)은 경교장에서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줬고, 간호 수녀들이 그의 시신을 염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을 때 사형수 두 명도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중 한 명이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며 조롱했다. 인간의 이런 심리는 무엇일까? 다른 쪽의 사형수는 그에게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며 예수님을 옹호했다. 그리고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자,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다”라고 화답했다. 어떤 학자는 이를 성경에 있는 가장 극적인 회개의 장면이라고 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기회를 주신다. 회개의 진정한 의미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했다. 두 사형수의 태도는 죽음을 맞이하는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골고타 언덕의 두 사형수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매 순간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큰 은총이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의 비문에는 감동적인 글이 적혀있다. “나는 바오로의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의 능력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 하느님, 나는 회개하는 강도에게 주셨던 은혜를 구합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8면

[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스라엘 빵 가게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빵을 보면, 납작하고 둥그런 것이 광야의 돌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실 때 사탄이 빵으로 유혹했을 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람이 오래 굶고 나면 눈앞의 것이 빵인지 돌인지 헷갈릴 터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당신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든 군중을 먹이셨다는 빵도 이런 것일 듯합니다. 지금은 먹을거리가 많다 못해 식이 조절을 하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는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와 조상들은 굶는 자식을 보며 파종할 씨앗으로 배고픔을 달랠지, 다음 농사를 기약할지 치열하게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옛 이스라엘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씨를 뿌린 이들이 수확하여 기뻐하는 모습이 시편 126장 5~6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옛 이스라엘에서도 가난한 이들은 보리 빵, 부유한 이들은 밀 빵을 먹었다고 하니 ‘꽁보리밥’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 하권 7장 16절에 따르면, 구약 시대 밀 가격은 보리의 두 배였습니다. 요한 6장 9절에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표징을 일으키실 때 한 어린아이가 마중물처럼 내어놓은 빵도 보리 빵입니다. 요한 6장 4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표징을 일으키신 때는 파스카 즈음입니다. 곧 보리를 수확하던 때입니다. 사실 파스카 축제는 맏배의 재앙에서 백성이 구원받은 기적을 기념하지만, 농사와 관련된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 탈출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주님의 은혜를 피부로 느낄 수 있기에 주님의 계명도 상대적으로 쉽게 지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은 주님의 은혜를 머리로만 알고 체감하지는 못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런 탈선을 방지하려고 오경에서는 백성이 자자손손 이집트 탈출의 구원을 기억할 수 있도록 파스카를 비롯한 명절들을 주님의 현존 앞에서 지키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다만 당시는 농경 사회였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일도 중요하지만 농사를 팽개치고 주님 현존을 찾아가기는 어렵겠지요. 이에 성경에서는 주요 명절들을 농사 절기와 맞물리게 제정하였습니다. 탈출기 23장에도 그런 명절이 무교절, 수확절, 추수절이라는 농경 용어로 등장합니다. 무교절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축제이므로 파스카를 가리키고요, 수확절은 밀을 수확하는 주간절, 추수절은 포도와 올리브 등을 거둬들이는 초막절을 가리킵니다. 이 가운데 무교절, 곧 파스카 즈음에는 보리 수확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명절은 농사 절기와 맞물리므로 기후와도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마르코 복음 6장 39절도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때가 파스카 즈음임을 추측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 자리 잡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나라이므로 풀밭이 푸른 시기는 늦가을부터 늦봄까지의 우기뿐입니다. 파스카를 지내는 봄에 늦은 비(신명 11,14)가 내리고 나면 건기로 접어들며, 그때부터는 온 들판이 누렇게 뜹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 기적은 천지가 비를 맞아 생기를 되찾은 봄에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을 기념하는 성전도 갈릴래아 바닷가에 자리했습니다. 예부터 ‘일곱 샘’이 있던 장소라 하여 그리스어로 ‘헵타페곤’인데, 지금은 발음이 와전되어 ‘타브가’라 합니다. 이곳 성전의 제대 아래 검은 돌이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드리신 장소라고 합니다. 제대 앞에는 비잔틴 성당의 유적인 사병이어 모자이크도 있습니다. 다만 오병이 아니라 사병인 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한자리를 차지하신다는 상징성을 살린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이실 수 있었을까요? 저는 이 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기적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께 오병이어를 내어놓은 아이 말고도 군중에게는 비상식량이 조금씩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교통이 발달하지도, 식당 등의 시설이 흔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뜻 나누기는 쉽지 않았겠지요. 내 식량을 타인에게 주었다간 언제 굶게 될지 모르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한 아이가 내어놓은 빵을 예수님께서 나누기 시작하시자 덩달아 제 것을 꺼내다 보니 모두가 먹고도 남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먹고 남은 조각만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고 하니 이는 분명 빵이 많아진 기적입니다. 말하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기쁨도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나눔 끝에 풍성하게 돌려받은 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8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두려움(묵시 9,13-21)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다.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인간은 죽어간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제 손으로 행한 일들을 포기하지 않고 저만이 숭배하는 우상을 끝내 움켜쥔다. 죽음의 재앙도 인간의 완고함을 꺾지 못한다. 대개 재앙의 서사를 인간의 부도덕성이나 일탈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앙의 성격은 그러하다. 잘잘못을 가려 정의의 단호한 심판을 재앙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묵시문학의 전형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재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질만한 소재가 요한묵시록 9장 13절 이하에 눈에 띈다. 재앙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유프라테스에서부터 그 질문은 시작한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시작하자,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큰 강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는 네 천사를 풀어 주어라.”(14절) 요한묵시록 7장에서 네 천사는 하느님 백성의 등장을 알렸지만, 9장에서는 땅을 향한 재앙을 알리는 존재로 소개된다. 네 천사는 유프라테스강에 묶여 있다. 동쪽 끝을 가리키는 유프라테스는 미지의 무서운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막연한 공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창세 15,18; 신명 1,7; 1열왕 5,1; 에녹 56; 에제 38-39 참조) 네 천사는 인간의 삼분의 일을 죽이려는 준비를 이제껏 해왔고 마침내 그 시간은 무르익었다. 네 범주로 소개되는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이라는 그 시간은 ‘필연적이고 확실한 시간’을 가리키는 묵시문학의 은유적 시간이다. 인간의 삼분의 일이 죽는 건 피할 수 없고, 반드시 혹은 필연적으로 삼분의 일의 죽음은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이 해, 이 달, 이 날, 이 시간’은 품고 있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부터 오는 재앙은 인간들이 그렇다고 믿은,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을 먹이 삼아 커나간다. 이 두려움은 유다 사회가 오래전부터 믿어온 하나의 ‘민간 신앙’이다. 묵시주의는 이러한 민간 신앙을 발판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했다. 동쪽에서 올 것이라는 막연한 심판의 재앙, 그것이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재앙이라면 이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민중이 스스로의 삶을 심판하고 정제하고 다잡는 인생의 길잡이로 재앙을 쓰고 읽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향하는 길을 다듬어 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잡이는 더욱 강하고 더욱 선명하면 좋을 터. 제 삶이 더욱 반듯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절부터 기병대가 나타난다. 기병대는 ‘이억’의 숫자로 소개된다. 그리스말 본문은 ‘디스뮈리아데스 뮈리아돈’(δισμυριάδες μυριάδων)으로 되어 있는데, 굳이 직역하자면, ‘만(萬)들의 이만(二萬)’, 그러니까, 2×10,000×10,000= 200,000,000이 된다. ‘만’(萬)을 가리키는 ‘뮈리아스’(μυριάς) 는 ‘대단히 많은’ 혹은 ‘셀 수 없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숫자는 셈을 하기보다 셈을 하지 않는 게 맞다. 다만 우리는 ‘이억’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내포하는 두려움의 극단을 읽어내야 한다. 인간이 삼분의 일이나 죽어가는 일은 너무나 두렵고, 두려운 만큼 황망한 일이라는 것. 그 옛날 소돔의 멸망 역시 그러했으리라. 이억의 기병대가 뿜어내는 불과 연기와 유황은 소돔이 종말을 맞닥뜨릴 때 결정적으로 등장한 상징체들이다.(창세 19,24.28 참조) 그러나 인간이란 참 질기고 억세다. 우리가 만든 것들, 우리가 이루어 온 것들, 그리고 우리가 지탱해 온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나머지 사람들도 저희 손으로 만든 작품들을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귀들을 숭배하고 또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금이나 은이나 구리나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숭배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묵시 9,20) 인간의 욕구는 숭배 대상에 정확히 투사된다. 불의한 자 심판받는다는 서사 민중 스스로 다듬어온 신앙 정작 욕망 포기 않는 이들은 회개할 의지 없이 우상숭배 숭배는 자기의 인정 욕구에 대한 숭배가 되어버린다. 보지도, 듣지도,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우상들을 마치 살아 있는 듯 숭배하는 인간들은 무엇을 숭배하는지 모른 채 그 무엇을 늘 찾아다닌다. 타자화해 놓은 것은 실은 자신을 투사시킨 지독한 교만과 이기(利己)의 신기루가 된다.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숭배다. 끝끝내 자기를 두고 숭배하는 인간은 스스로 회개하지 않는다.(21절) 회개하지 않아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우리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전통적 인식 아래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끝을 파멸이나 징벌로 정리되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인간들’의 운명에 대해선 우리는 모른다. 다만 제 작품을 포기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은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다. 동쪽 유프라테스에서의 재앙에 두려워할 줄 아는 인간은 실은 복된 이들이기도 하겠다. 제 잘못에 대한 일말의 공포심은 정의나 선에 대한 갈증이나 존중을 내포하고 있어, 죽어간 인간의 삼분의 일은 적어도 제 삶에 대해 부끄러움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삼분의 일의 죽음은 그리하여 스스로 회개할 줄 아는 최소한의 양심을 위한 손짓이 아닐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행여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며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일까라며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사건 앞에 아무런 감정의 요동을 표하지 못(안)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당황스럽다. 얼마나 죽어야 그 완고함이 해제될까. 얼마나 참혹해야 저만이 옳다고 믿는 그 우상을 던져버릴까. 이억의 기병대가 오기 전에, 그리하여 또 다른 죽음이 닥치기 전에, 헛된 우상에 물든 이들에게 우리는 담대히 재촉해야 한다. 얼른 회개하라고….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6-22 제3447호 19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재앙의 정체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떨어진 별’이 등장한다. ‘떨어진 별’을 두고 타락한 천사, 혹은 사탄이나 악마로 해석한다. 그 별에게 구렁의 열쇠가 ‘주어졌다.’ 별이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별에게 열쇠를 주었다. 학자들은 이런 수동태 형식을 ‘신적 수동태’라 부른다. 요한묵시록은 악의 세력이 휘두르는 힘을 묘사하기 위해 대부분 신적 수동태의 형식을 빌려온다. 요한묵시록의 악은 힘이 있어도 얼마 안 가서 사라져 버리거나 무너져 버린다. 악은 그렇게 무능력하다. ‘신적 수동태’의 주체는 감추어져 있으나 대개 하느님으로 인식한다. 달리 말하자면, 참된 권능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이셔서 악은 하느님과 동등하거나 하느님을 대적할 힘 따위는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신념이 ‘신적 수동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렇다면, 하느님은 기쁨, 행복, 성공 그리고 정의, 진리, 평화 등의 단어들 틈에서만 사유되어서는 안된다. 재앙, 고통, 불행, 나아가 사탄과 악마의 틈바구니 안에서도 그분의 섭리에 대해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그러므로, 사탄이나 악마의 폭력이나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다시 되새기는 메타포가 된다. 별이 구렁을 연다. 거기서 큰 용광로의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온다. 이 연기는 모든 것을 어둡게 만들고 모든 것을 집어삼켜 혼돈으로 만든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그러니까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는 장면 서술이다.(창세 1,2 참조) 하느님의 손길이 빚어내는 모든 ‘있음’ 이전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없음’과 동의어다. 떨어진 별로 시작하는 재앙의 서사는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없는 것들의 이야기다. 없는 것들을 아무리 자세히, 기묘하게 묘사한들, 그것은 사탄과 악마를 그려내는 ‘수동태’의 힘처럼 하느님 앞에선 부질없는 것들일 뿐이다. 부질없는 것들은 메뚜기, 땅의 전갈과 같은 것들로 형상화된다. 이것들의 폭력은 땅의 풀과 푸성귀, 나무로 대변되는 ‘자연’도 아니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믿는 이들도 아닌,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다. 단번에, 그리고 습관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해석해 버릴 것이다. 요한묵시록의 재앙은 하느님과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나쁜 이들을 향한 경고라고. 그러나 이런 선악 구도의 결과론적 징벌이 요한묵시록의 재앙이라면 굳이 하느님과 어린양까지 언급하며 심판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 나쁜 일에 공분을, 선한 일에 기쁨을 지니는 건 인간 일반의 현상이므로. 우리의 이야기는 5절부터 재앙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차근차근 펼쳐나간다. 다섯 달, 한계가 명확한 그 다섯 달 동안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이들은 재앙의 희생자가 된다. 그 사람들은 죽는 게 아니다. 메뚜기로부터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사람들은 죽기를 바란다. 한낱 메뚜기가 사는 시간이 다섯 달이고, 신약성경은 ‘다섯’을 ‘몇 안 되는 것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했다.(1코린 14,19; 루카 12,6; 마태 25,2 참조) 그렇게 허무한 다섯 달인데, 그 짧은 시간을 버틸 재간이 사람들에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메뚜기, 그것이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존재인가. 이제 메뚜기를 적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해치는 메뚜기는 그야말로 전투에 임하는 장수와 같다. 종말의 위기를 다루는 요엘서의 서술과 흡사하여(요엘 2,4 이하 참조) 메뚜기를 종말론적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메뚜기의 서술은 허망하다. 메뚜기에 관한 모든 서술은 실재하지 않는, ‘~같은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금관 같은 것’, ‘머리털 같은 것’, ‘사자 이빨 같은 것’, ‘마차들의 소리 같은 것’, ‘전갈 같은 것.’ 이런저런 ‘~같은 것들’은 실은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견디기 힘든 고통 안에서도 좌절과 죄책감 빠지지 않길 마치 9장이 시작될 때 구렁에서 나온 연기와 같다. 모든 것을 어둠 속에 집어삼켜 무엇 하나라도 제 본연의 모습을 뚜렷이 드러나지 못하게 만드는 연기 말이다. 금관이든, 사자 이빨이든, 떠들썩한 마차 소리든, 모든 것은 메뚜기를 향하지만 메뚜기를 비껴가서 메뚜기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니 메뚜기는 히브리 말로 ‘아바똔’(אֲבַדּוֹן), 그리스말로 ‘아폴리온’(Ἀπολλύων)이라 부르는 ‘지하의 천사’(우리말 번역은 ‘지하의 사자’로 되어 있다)를 임금으로 모실 수밖에. ‘아바똔’은 ‘파멸의 공간’이란 뜻이고, ‘아폴리온’은 파괴자란 뜻이다. 두 단어 모두 생명에 반하는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뚜기를 소재로 서술된 재앙과 고통의 끝이 죽음이라니. 전투사의 모습으로 꾸며진 메뚜기가 전투 한번 해보지 않은 채, 죽음의 메타포 ‘지하의 천사’를 제 임금으로 섬겨버렸으니, 잔뜩 긴장한 채, 이를 깨물며 재앙과 고통의 끝을 탐험하고 그 정체를 묻는 우리의 읽기는 허무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질 것은 명확하다. 죽음은 대결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다섯 달로 한계 지워진 시간, 사람들이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그 시간의 주인공 메뚜기는 사람들을 해치고 죽일 만큼 대단한 힘이 없다는 것. 모든 재앙의 끝은 죽음을 향하고 있어 재앙은 그렇게 허무하다는 것. 재앙과 고통의 끝에서야, 그 허무함의 민낯이 드러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희망을 발견할지 모른다. 하느님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조차 죽음 같은 재앙은 징벌이 아니라는 희망 말이다. 견디기 힘든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못남을 탓하며 죄책감에 빠질 때가 많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어’, ‘나는 늘 왜 이럴까’ 하는 좌절과 패배의 소용돌이, 그 안에서 우리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겠지만 우린 다시 한번 그 고통의 정체에 대해 최대한 섬세하게 물어야 한다. 그 고통의 끝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무한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은 우리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고통에 주눅 들어 미리 단정 짓고 후회하는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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