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6주일

“행복하여라!” ‘행복한 삶’은 누구나 바라는 삶의 모습입니다. 강의나 강론 때, ‘불행하고 싶은 분’이 계신 지 여쭤보면 대답하는 분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그렇지만 ‘행복하고 싶은 분’을 여쭤보면 모두가 ‘그러고 싶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떤 삶을 살아가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예레미야 예언자는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고, 주님께 머무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7)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의 복된 모습을 물가에 심어졌기에 뿌리와 가지가 튼튼하고, 잎도 푸르고 무성해 무더위에도 가뭄에도 걱정이 없이 열매를 풍부히 맺는 나무에 비유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주님께 머무는 행복한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3)고 시편 저자는 노래합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산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사도로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평지로 내려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에서 온 백성들에게 ‘참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의 대조되는 가르침을 통해 일깨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에 대해 우선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0-21) ‘행복하여라, 지금 사람의 아들 때문에 미움과 쫓겨남과 모욕과 중상을 받는 사람들!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루카 6,22 참조) 한편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거짓된 평가와 칭찬을 받는 거짓 예언자가 된다면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6,24-26 참조)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 대한 말씀은 세상을 멀리하자는, 또는 세상살이를 부정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가난, 굶주림, 슬픔을 당연시하거나 미화하자는 말씀이 아니라,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기준,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기준,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의 출발점을 만족스러운 ‘성취’라고 일러주십니다. 곧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무엇을 이루게 되면 행복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족스럽게 성취한 무엇이 악한 것이어서는 참다운 행복을 줄 수 없기에, 만족하게 성취한 무엇은 ‘선한 것’이어야 한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만족하게 성취한 선한 것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그 또한 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기에, 그 만족하게 성취한 선한 것은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만족스럽게 성취한 선하며 영원한 존재’는 ‘참 행복이신 하느님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의 뜻 때문에, 하느님과 일치하기에 세상적 가치를 포기할 수 있을 때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자신이나 자기 집단만을 위한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현세에서 기준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믿음과 희망에 가치를 두고 사랑을 실천하며 함께 살아갈 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복은 가까이에서 그리고 일상의 소소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낯선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단 1%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행복하게도 또 불행하게도 될 수 있습니다. 그 1%를 저울의 행복 쪽에 올려놓으면, 51%와 49%의 차이로 행복을 향해 우리 마음의 저울이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혹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나로 하여금 불행 51%를 느끼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49%의 행복이 나에게 있음을 마음속에 떠올려 보면 행복을 향한 길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 행복이신 하느님께서 일상의 아주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일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행복을 발견하고, 그 행복을 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수님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 여성 제자들

여자대장부로 불리는 복자 강완숙(골룸바)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역할이 컸다. 강완숙은 결혼 후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책을 얻어 읽는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앙에 이끌렸다. 강완숙은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한국교회의 초석을 세우는데 노력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는 신자들의 옥바라지를 하다 자신도 옥에 갇히기도 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강완숙은 모든 교회의 대표인 ‘여회장’으로 임명됐다. 당시의 양반사회에서는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강완숙은 전교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완숙은 같은 신자의 고발로 관가에 잡혀갔다. 관리들은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그녀에게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강완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포졸들은 그의 어린 아들을 끌고 와 거적을 씌우고 매질을 하기도 했다. 강완숙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회유를 포기한 관리는 1801년 7월 2일 서소문 형장에서 강완숙을 참수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여성 사도, 여성 제자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신약성경에는 여성 제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의 초기 복음 선포부터 많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름도 언급되는 분들도 있고 대부분은 익명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열두 사도 못지않게 예수님의 선교사업을 지지하고 도와준 여성들은 실제 여성 제자라 할 수 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도 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초기 몇 년 동안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당대에 여성의 역할이 경시되었던 측면도 있다고 본다. 성모님은 예수님과 늘 함께 계셨고 예수님께서 임종하실 때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교회의 어머니로 내주셨다.(요한 19,25-27 참조). 2016년 6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령 「사도들의 사도」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열두 사도와 같은 반열에 올리며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 말했다. 교황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마지막까지 따랐고 ‘죽음의 장소인 묘지에서 생명을 선포했다’고 강조했다. 그밖에도 익명의 많은 여성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하면서 초기부터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성 제자들이 도망친 상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가서 함께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마태 27,54-55) 현대의 교회도 여성의 활동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여성의 역할이 기대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2-16

[말씀묵상] 연중 제5주일

예수께서는 겐네사렛, 즉 갈릴래아 호수에서 어부인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루카는 안드레아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를 첫 제자로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종종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 제자가 필요한 이유는 하느님의 백성을 모아들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제자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옮기는 예수님의 발이요, 만민에게 하늘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예수님의 입이며, 모든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팔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카파르나움과 타브가 사이에 있는 만에서 베드로와 동료들을 만나셨을 것입니다. 이곳의 지형은 마치 자연적으로 형성된 원형극장과 같아서 아래서 말하면 위에 있는 많은 군중에게 의사 전달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뜬금없이 밤새 소득 없이 돌아온 베드로에게 다시 그물을 치라 하십니다. 베드로는 어부의 집이라는 뜻의 벳사이다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였지만, 예수님은 목수로서 생활해 오시던 분으로서 한 번도 그물을 던져보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기 잡는 데 최적의 시간은 밤인데 이미 태양이 눈부시게 비추는 시간에 그물을 치라뇨. 당시의 그물은 세마포를 꼬아 만들어서 해가 뜨면 물속에서도 훤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내리는 데는 적당한 깊이가 좋은데 예수님은 깊은 데로 나가라고 명하십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허탈감과 피로감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껏 깨끗이 씻어놓은 그물을 다시 들고 호수로 나갑니다. 루카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왠지 그분을 신뢰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밤새 허탕 친 것이 억울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던져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했더니 그물이 터지도록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후에 베드로 사도가 행할 일을 미리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승천 후에 베드로는 한 번에 3000명, 5000명의 사람을 신앙으로 이끄는 놀라운 일을 합니다.(사도 2,41; 4,4)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선생님에서 주님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권위를 느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두려움은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분 앞에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 앞에서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물고기는 낚이면 죽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낚이면 삽니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ζωγρέω는 생포한다는 뜻인데, 70인 역 성경에서는 사람을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신성하고 고귀한 일에 동참하도록 영광스럽게 초대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함으로써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루카는 예수님을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로 묘사하는 유일한 복음사가입니다.(5,1) 그리고 루카는 자신의 또 다른 저서에서 제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일을 이어감을 전합니다.(사도 6,2) 하느님의 말씀은 율법, 예언자의 선포 등을 가리킬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느님 말씀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 또한 우리가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구원의 도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복음 선포에 필요한 용기가 부족할 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려야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살릴 것이다.”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2025-02-09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사람 낚는 어부,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

성경에서 첫 번째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漁夫)였다. 성경에는 물고기가 나오는 대목이 많다. 구약성경에서 인간은 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비유된다. 손으로 물건 만드는 것을 업(業)으로 하는 장인(匠人)처럼 어부의 사회적 지위는 전통적으로 매우 낮았다. 잡은 물고기들은 지금처럼 큰 것과 작은 것, 흔한 것과 희귀한 것,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등을 구분하여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가공한 후 시장에 팔거나 외국에 수출했다. 예수님 시대의 모든 종류의 상업은 로마 제국의 엄격한 법률에 따라야 했다. 세금 징수자들은 잡힌 물고기를 보고 세금을 부과했다. 예수님 시대에 랍비나 레위인이나 제사장 중에도 어부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물품 수요가 많아지면서 어부들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많이 변하게 되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과거에 멸시받던 직업이 많은 이들이 원하는 직업으로 바뀌는 경우는 많다. 물고기는 유다인들의 주요한 음식물이었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는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다.(레위 11,9-12 참조) 첫 번째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던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이다. 그 당시 일꾼들을 고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아주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마르 1,20-29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을 물고기에 비유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죄의 바다에서 사람을 낚는 것은 구원과 심판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부르심은 성경에서 가장 일반화된 단어 중 하나로 많은 경우 하느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신약에서 부르심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응답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의 선포와 성령의 증언을 통해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목적을 지닌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히 물고기와 깊은 관계를 지닌다. 스승의 십자가형을 확인한 후 많은 제자들은 허탈하게 고향으로 돌아가 본래 직업인 어부로 활동했다.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져 고기를 많이 잡은 후 주님을 비로소 알아보는 장면이 있다.(요한 21,6-7 참조) 초대교회에서 물고기는 구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이 시간에 주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나는 매일 무엇을 낚고 있는가?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그물, 심지어 부모도 버리고 따랐다. 성경의 언급처럼 즉시 따랐을까? 주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따라나섰을까? 꼭 모두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고 많이 망설였으리라 추측해 본다. 또한 다른 개인적 욕심을 지니고 따른 이들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시간이 흐르며 완성으로 다가간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2-09

[말씀묵상] 주님 봉헌 축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사십 일째 되는 날은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루카복음 2장 22절에서 40절까지에 따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사십일 째 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산모의 정결례를 치르고 율법대로 아들을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습니다. 레위기 12장 1절에서 8절에 따르면, 산모는 남아를 낳으면 사십 일, 여아를 낳으면 팔십 일간 부정한 상태가 됩니다. 이 기간이 지나면 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가난한 이의 경우에는 비둘기 두 마리를 속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은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정결례 제물로 바친 듯합니다. 그리고 탈출기 13장 2절에 따르면 장자는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주님께 바친 다음 돌려받기 위해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데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성모님과 요셉은 성전에서 예루살렘 사람 시메온을 만나게 되는데요, 시메온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성령께서 그에게 알려주신 인물입니다. 그 예고대로 시메온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 아기 예수를 발견하고 두 팔에 안으며 “이제는 떠나가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찬양, 이후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로 알려지게 되는 기도를 바칩니다. 그때 성전에는 연로한 예언자 한나도 있었습니다. 한나도 아기 예수의 정체를 알아보고 주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 등장하는 ‘한나’는 사무엘기 상권 1장에서 2장에 나오는 예언자 사무엘의 어머니 이름이기도 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에프라임 땅에 살던 엘카나의 첫째 아내로 소개되는데요(1사무 1,2 참조), 한나가 오랫동안 불임이어서 후처로 프닌나가 들어온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나는 후처에게 조롱당하며(1사무 1,6 참조) 괴로움을 겪다 주님께 서원합니다.(1사무 1,11 참조) 다만 서원의 내용이 역설적인데, 아이를 얻는다면 주님께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곧 아이를 얻기 위해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서약한 셈이니, 당시 한나의 신세가 얼마나 암담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소에서 기도한 뒤 한나의 마음이 누그러진 듯합니다. 한나의 사정을 모르는 사제 엘리가 그를 축복해주자, 한나가 음식도 먹고 얼굴도 전처럼 어둡지 않았다고 합니다.(1사무 1,17-18 참조) 그리고 바람대로 아이를 낳은 뒤, 한나가 서원대로 아이를 봉헌하며 부른 찬양이 사무엘기 상권 2장 1절에서 10절에 이어집니다. 사실, 찬양의 내용은 한나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을 낳고”(1사무 2,5)라는 구절이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해 줍니다. 한나의 찬양이 특별한 건, 그가 노래를 부른 시점이 소원이 이뤄진 임신 때나 출산 때가 아니라, 서원대로 아이를 바칠 때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이와 떨어지면 슬프고 괴로울 텐데, 한나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이는 일종의 ‘환희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환희의 신비는 성모님 이전에 한나에게서 먼저 이루어진 셈입니다. 이스라엘이 위기의 나날을 보내던 시기 사무엘을 낳아 이를 잘 넘기게 해준 한나의 이야기는 이후 문헌에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루카 1장과 2장이 대표적입니다. 이 대목도 불임 부부 즈카르야 사제와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얻는 사연으로 시작합니다.(루카 1,7 참조) 한나의 노래는 기쁨에 찬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의 노래, 곧 <마니피캇>에 반영됩니다. 사무엘이 머리를 깎지 못하는 나지르인으로 바쳐진 일(1사무 1,11, 민수 6,3-5 참조)은 루카 1장 15절의 세례자 요한에게 이어집니다.(“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다만 한나의 이미지가 루카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에게 나뉘어 반영되듯이, 사무엘도 세례자 요한과 어린 예수님에게 조금씩 영향을 줍니다. 나지르인으로 바쳐진 아들은 요한이지만, 성전에 봉헌되는 아들은 어린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차지하는 위상을 사무엘도 다윗에 대해 비슷하게 지닙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듯 사무엘은 예수님의 조상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한나의 영향은 예수님 봉헌 대목(루카 2,36-38 참조)에서 여 예언자 ‘한나’에게도 이어집니다.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소극으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정권을 촛불혁명으로 몰아낸 우리가 또다시 비슷한 국면에 부닥쳐 웃지 못할 상황에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봉헌 축일은 비극만이 아니라 구원의 역사 역시 반복함을 알려주어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2025-01-26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믿음으로 예수님께 치유받은 나병환자

한센병(나병)의 아버지로 살았던 이경재 신부님(알렉산델, 1926~1998)님은 ‘성 라자로마을’을 만들었다. 구약시대 나병은 하느님이 주는 천벌로 여겨졌다. 나병환자를 문둥이라고 한 것은 우리나라 남쪽 지방의 욕설이었다. 이 신부님은 40여 년 동안 나환우에 대한 봉사로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쳤다. 신학생 때 다른 신학생들과 성 라자로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신부님이 미사 때 우리 신학생들에게 하신 강론 말씀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다. “나환우들의 진짜 고통은 손이 문드러지고 발가락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공동체와 격리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천벌을 받은 사람처럼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토기공장이 일감이 없어 한가하던 겨울, 수십 명의 사람이 얼굴을 꽁꽁 가린 채 한동안 머물다 밤중에 몰래 어딘가로 가는 것을 여러 번 봤다. 나중에 그들이 나병환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공장에 머무는 동안 근처에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슬픈 일이다. 나병환자들과 16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사목했고 결국은 나병환자가 된 성 다미안 신부님은 나병에 걸리고 나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나병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병이 아니었으면 하느님을 이처럼 절박하게 뵙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저에게 나병을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유다 사회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자로 공동체를 떠나 혼자 살아야 했다. 성경에서 나병은 하느님이 벌을 내린 큰 재앙으로 간주되었다.(레위기 13장 참조) 현재는 치료가 가능한 병이 되었고 나병환자도 많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나병에 걸리면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됐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몸이 썩어 들어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거부감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나병환자가 치료되면 사제에게 나아가 일주일 동안 관찰을 받고, 사제로부터 치료가 되었다는 판정을 받고 정한 제물을 봉헌한 후 다시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며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스승님께서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며 치유를 청했다.(마르 1,40-45 참조)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쳐주셨고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것을 보이라고 하셨다. 성경의 치유 이야기들은 환자가 먼저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부르시는 장면에서는 항상 주도권이 주님께 있다. 가족과의 접촉마저 금지되었던 나병환자에게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고 그를 공동체로 다시 돌아가게 했다는 것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치유를 행하시고 자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말씀하셨다. 즉 믿음이 치유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믿음을 청하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하는 까닭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26

[말씀묵상] 연중 제3주일, 하느님의 말씀 주일, 해외 원조 주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을 방문하신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고향에 가신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심으로써 당신의 소명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읽으신 이사야서의 이 대목(이사 61,1-2 참조)이 쓰인 것은,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칙령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로부터 풀려나 성전과 예루살렘을 복구하도록 되돌려 보내진 때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가 바로 당시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제이자 율법 학자인 에즈라는 백성들에게 율법서를 읽어줍니다. 주님 뜻을 따르는 백성 공동체를 재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이 그것을 듣고 울었습니다. 주님의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한 자신들의 처지가 부끄럽고 한스러웠을 것이고, 그분을 따르는 참된 공동체를 잿더미에서 복구해야 하는 그들의 사명이 버겁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즈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맛있는 음식과 단 술을 나누도록 합니다. 이방인의 왕에 의해 갑작스레 주어진 해방이지만 그들은 자유를 얻었고, 그들을 이끌어줄 율법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규정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주고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이 대목은 또한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의 선포와 연결됩니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돌아오면 이스라엘은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희년은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시키는 때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해방과 땅이라는 두 가지 선물을, 그것을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때입니다. 또한 안식년과 희년에는 모든 사람과 가축과 땅이 쉬어야 합니다.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서도 안 됩니다. 이 규정이 지켜지려면 특히 가진 자들의 큰 희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 규정은 과연 잘 지켜졌을까요?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백성들이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을 멸망시키고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땅이 쉴 수 있게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레위 26,14-39 참조) 이스라엘의 멸망과 백성의 귀양은 그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 약한 이들을 돌보지 않고 오히려 착취한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희년의 선포와 연결하여 하느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기시킵니다. 서로를 형제로 대하고, 그들이 가난이나 폭력이나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참된 자유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돌보는 사랑의 공동체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를 고향 사람들 앞에서 다시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이야기에는 후반부가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선포에 감동한 이들을 도발하시며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화를 내며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약속이 더 이상 혈연이나 지연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며, 유다인들이 당신을 박해하고 배척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나자렛 사건으로 당신의 사명을 선포하시고 수난과 부활에 이르는 파스카의 여정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소명, 즉 사랑으로 서로 돌보고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는 백성의 공동체를 이루는 소명은 제자들을 통해 초대 교회로 이어집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공동체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으로 묘사합니다. 역할과 능력과 은사가 서로 다른 지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한 몸을 이루는, 아름다운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이 구원을 세상 끝까지 모두에게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제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머리이신 주님의 모범을 따른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며 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소명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다른 이의 가난과 고통과 억압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서로를 돌보아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1코린 12,26)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코린1 12,24-25 참조) 주님, 오늘 당신의 몸인 교회가 세상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형제들에게 사랑의 빛을 환히 비추는 날이 되게 하소서. 아멘.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사목연구소 소장)

2025-01-26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께 희망을 안고 기다린 신앙인, 엘리사벳

세계 어린이들의 친구인, ‘미키 마우스’를 창조한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는 창고에서 어렵게 지내던 시절에 쥐를 모델로 미키 마우스를 창조했다. 디즈니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로 건너갔는데 미술관에서 많은 명화를 보았다. 이 체험은 훗날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전쟁 후 미국으로 돌아와 광고회사에서 일하다, 19세에 동료들과 낡은 창고를 빌려 만화사를 설립했다. 1919년 처음으로 만화영화를 만든 디즈니는 계속해서 만화영화를 제작했지만, 대공황으로 그의 회사는 한순간에 도산하고 말았다. 디즈니는 더러운 창고에서 지내면서도 사업을 구상하는데 몰두했다. 심심한 디즈니는 창고에 들어오는 쥐들에게 빵부스러기를 던져주었는데 한 마리가 유독 디즈니와 친해졌고 ‘모티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27세가 되던 해 빈털터리의 디즈니는 할리우드로 향하는 기차에서 아내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모티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꺼리는 동물인 쥐를 유쾌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로 만드는 기발한 발상을 했다. 처음 이름은 ‘모티마 마우스’였는데 그의 아내 릴리안이 미키가 좋겠다고 해서 ‘미키마우스’가 탄생했다. 디즈니는 만화영화 <미키 마우스>를 제작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계속해서 디즈니랜드를 세워 오늘까지 미국의 대표적 명소가 되었다. 월트 디즈니는 나락에 떨어지고도 계속해서 기회를 기다리며 노력을 통해 끝내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성모 마리아의 친척이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한마디로 기다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도 아이를 갖지 못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제약을 받는 치명적인 결함이 되었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은총을 기다리며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사람이 믿음을 갖고 진심으로 기도하면 하늘에 닿는다는 말처럼 기적처럼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늙은 나이에 자녀를 잉태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도 천사를 보내시어 인류의 구원을 약속하셨다. 마리아는 임신을 한 후 며칠 동안 험한 산길을 걸어 엘리사벳을 찾았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칭송한다. 엘리사벳은 오랫동안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응답을 기다렸던 인물이다. 믿음의 기다림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할 때 즉시 응답이 없으면 실망하고 포기하기도 한다. 특히 고통의 삶이 지속될 때 우리는 신앙이 뿌리째 흔들린다. 엘리사벳은 하느님은 언젠가 우리의 기도에 꼭 응답하신다는 것을 증거한 인물이다. 신앙은 희망으로 이어지고 사랑은 열매를 맺는다. 엘리사벳의 삶은 아무리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느님께 희망을 안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5-01-19

[말씀묵상] 연중 제2주일

우리는 ‘희망의 순례자들’로서 희년의 기쁨을 체험하고 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한없이 부족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사랑의 신비를 되새기며 연중시기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전하는 갈릴래아 카나에서의 혼인 잔치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 희년의 삶을 살아갈지를 일깨워 줍니다. 성모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제자들과 그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다 떨어졌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포도주가 다 떨어져 잔치를 주관하는 이들이 당혹해할 것을 헤아리셨을 뿐 아니라, 아들 예수님께서 그러한 상황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임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께서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대답하심에도 불구하고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세 동이들이 물독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일꾼들에게 말씀하시고, 다시 그것을 퍼서 과방장에게 가져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개의 물독에 가득 찬 물을 좋은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일꾼들은 이 놀라운 기적이 누구 덕분에 이루어졌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신랑도 그리고 과방장도 그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누구 덕분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도주가 떨어지는 상황을 알아차리고 아들 예수님께 상황 해소를 청한 성모님 덕분에, 더 나아가 실제로 그 놀라운 일을 이루신 하느님이신 예수님 덕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 덕분에 사는지를 깨닫는 것만으로도 신앙생활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그리고 그분께서 선물로 보내주시는 이웃들의 도움의 손길 덕분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일깨워 주는 교회 공동체 덕분에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여 성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덕분에’라는 마음을 간직하며 감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곧 하느님과 이웃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를 드리며, 또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덕분에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며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 덕분에, 곧 사랑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우리의 마음과 실천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회 공동체 덕분에 감사하다, 하느님 덕분에 감사하다’는 칭송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과 이웃 덕분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와 하느님을 칭송할 수 있도록 하는 삶이야말로 희년의 표징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때에는 세상살이에서 오는 갈등과 상처와 고통의 어두운 터널을 견디어 내고, 극복해 가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길고 어두운 터널이라고 해도 그 끝에는 환한 빛을 가져다주는 출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그리고 서로에게 ‘하느님 덕분에,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감사합니다!’라는 마음과 표현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증거의 삶을 살아가라고 각자의 직분과 활동에 맞게 적합한 은사를 주십니다. 곧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치유의 은사, 기적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를 각 사람에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각자가 선물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연대하여 공동선을 이루어가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이사야 예언자가 예루살렘을 두고 노래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마음에 들어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기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카나에서 이루신 첫 번째 표징 덕분에 제자들을 포함한 그 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키울 수 있었듯이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체험하게 되는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하느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시는 이웃의 손길 덕분에 더욱 감사하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시편 31,25) 글 _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 주임) 조성풍 신부는 1993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미국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수학했다. 서울대교구 해방촌본당 주임, 서울대교구 사목국 일반교육부 담당,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등을 거쳤다.

2025-01-19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계시와 상징(묵시 1,1-2)

“왜 요한묵시록을 읽는가”라는 물음에 흔한 답들은 이런 것이다. 미래에 펼쳐질 종말을 알고 싶으니까, 그 종말의 시간에 도대체 무엇이 펼쳐지는지 궁금하니까, 아니면 종말의 심판, 재앙 등을 피할 수 있는 묘책이 무엇일까 살펴보기 위해서라는 답들. 종말을 염두에 둔 이런 답들은 진지한 신앙인들에게 낯설다. 우리 일상과는 멀어도 한참 먼 시간의 일들이라 낯설고, 그 먼 시간에 대한 얼마간의 호기심이 어른거리는 답을 얻고자 성경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요한묵시록을 읽는다는 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닐테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요한묵시록을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나가려 한다. 무엇보다 종말에 대한 괜한 호기심이나 막연한 두려움은 우리의 독법과 무관하다. 요한묵시록의 첫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로 시작한다. 그리스말로 ‘아포칼립시스’라는 ‘계시’는 ‘장막을 걷어낸다’는 뜻을 지닌다. 숨겨지고 가려진 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계시다. 문법적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Ἰησοῦ Χριστοῦ)는 그리스말 명사의 속격(屬格·Genitive case) 형태로 쓰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말의 속격은 주체적 의미와 객체적 의미를 동시에 나타낸다. 두 의미를 염두에 두고 번역하면 이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주체) 예수 그리스도를(객체) 밝히 드러내는 이야기라는 것. 요컨대 요한묵시록은 예수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여러 상징들을 통해 찬찬히 풀어놓은 글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미 알고 그분을 이미 믿고 있다면,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새로울 게 없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간략하나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그분의 공생활이 모든 계시의 절정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계시라는 말마디는 밀교나 신비주의자들의 감추어진 정보 따위가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계시를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할 복음으로 이해했고(로마 16,25; 갈라 1,16 참조), 복음서에서 계시는 젖먹이 어린이들에게조차 건네어진 하느님의 구원에로의 초대로 읽혀진다.(마태 11,25 참조) 그럼에도 요한묵시록을 읽을 때마다 미래에 펼쳐질 종말을 염두에 둔 태도가 흔한 이유는 아마도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이란 문장 때문일 것이다.(묵시1,1) 특별히 ‘머지않아’로 번역한 ‘엔 타케이’(ἐν τάχει)가 아직 남아 있을 또 다른 계시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엔 타케이는 전형적인 묵시문학의 시간 개념이다.(다니 2,28 참조) 이를테면, 종말의 시간이 ‘이미’ 다다랐다는, 그래서 ‘결정적으로’ 종말의 시간이 지금 여기서 펼쳐졌다는 의미가 엔 타케이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엔 타케이를 ‘갑자기, 곧, 느닷없이’로 번역하기도 한다. 어떠한 시간적 여유나 기다림조차 허락치 않는, 지금이야말로 계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지금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는 현재형의 사건들이어야 한다. 대개의 학자들은 그 사건들을 예수님과 그분이 주시는 구원으로 해석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한 요한묵시록은 그 읽기가 끝난 지점에 예수님을 갈망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여, 요한묵시록의 모든 읽기는 예수님을 찾는 것으로 방향 지워진 것이다.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은 결국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마지막 시대의 구원에 관련된 것이고 요한묵시록 스물두 개의 장을 읽는 것은 그 구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갑자기, 곧, 그리고 느닷없이’ 이루어졌다는 희망과 위로를 얻어 누리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을 열거하는 요한묵시록의 모든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이나 사실을 반영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1장 1절은 계시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그리고 요한에게 ‘알려졌다’고 말한다. ‘알려졌다’라고 번역된 동사는 ‘세마이노’(σημαίνω)로 ‘상징화하다’는 뜻을 지닌다. 요한묵시록은 미래에 펼쳐질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두고 여러 상징으로 새롭게 소개한 글이다. 요한이 보고 듣고 그래서 기록한 요한묵시록은 요한이 가진 수많은 상징들로 꾸며진 새로운 예수님이다. 다만 그 상징들은 예부터 켜켜이 쌓여 온 오래된 것들이라 누구나 이미 알고 있어서 새로울 게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요한묵시록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익숙한 상징들의 새로운 조합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예수님을 제 삶의 언어(상징)로 수없이 상상하며 갈망하는 사랑의 노래가 된다. 요한묵시록을 읽으면서 무엇을 위해 읽는다고 생각하지 말자. 무엇을 더 알고, 더 챙겨서 내 신앙의 정도를 한껏 들어 높이려고 요한묵시록을 읽지는 말자. 지금 내가 읽는 요한묵시록은 언젠가 내 삶의 어느 곳에서 이미 만난 예수님을 다시 만나려는 희망과 설렘의 기록이기에. 지금 내가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통해 예수님을 그토록 갈망한 그 사람, 요한을 우리는 부러워해야 한다. 그의 믿음을, 그의 사랑을….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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