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에돔의 멸망을 전한 예언자 오바디야

1943년 이전에는 구약성경이 가톨릭 신학생들도 읽지 못하는 금서(禁書)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에 가톨릭교회는 구약성경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신자들을 구약성경에 접근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례 개혁 이전에는 주일 미사 때 구약성경의 독서가 없었으나 지금은 제1독서에서 구약성경을 꼭 읽게 되어 있다. 이단 교회는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생겨난다. 특히 구약 부분은 인간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어 있어 아예 전문가들 이외에는 접근을 금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 오직 하느님,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의 사상이나 성향을 극단적으로 거슬러 행동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구약성경를 읽는 것 자체를 소홀히 하게 되었고 구약성경을 읽는 대신 준주성범을 오랜 세월 동안 읽었다. 사실 구약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을 때 잘못 이해할 위험성도 많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은 1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 점차로 가톨릭 내에서도 활발히 성서학 연구를 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1943년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을 통해 정식으로 성경 문헌을 개방하고 성경 연구의 문을 공식적으로 열어주었다. 유다가 멸망할 때 하느님을 배신하고 갖은 나쁜 짓을 한 에돔의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가 오바디야이다. 오바디야 예언자의 정보는 아주 부족하여 작성 시기는 물론 많은 논란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오바디야 예언자는 에돔에 관해 분명하게 기록했다. 책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초기 시대에는 오바디야가 선지자 엘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앗시리아가 침공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 유배시켰다. 바빌론 유배의 전후로 해서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굳이 나누자면 바빌론 유배 전후로 구분한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 예언자들은 정착 생활을 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배반하지 말고 오직 자신들을 구원한 유일한 하느님만을 섬기고, 계약으로 맺은 율법을 지켜 신실하게 살라고 권고했다. 엄밀히 따지면 하느님을 믿고 있는 채 우상도 함께 주인으로 모신 죄였다. 종교혼합주의라 할까.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곳의 잡신을 섬기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이스라엘은 벗어나지 못했다. 예언자 오바디야는 지속해서 에돔의 멸망을 외쳤지만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고 멸망한다. 유다인들은 비참하게 바빌론으로 끌려가 50여 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오바디야는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언했다. 이제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들이나 이스라엘의 남겨진 이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후세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말씀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13

[말씀묵상] 연중 제28주일

교회에 젊은이들이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받고 줄곧 주일학교를 다니고, 청년부 활동을 하면서 성장하면서 인생에서 제일 친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사춘기에 많은 고민을 그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교회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은 한 젊은이가 주인공입니다. 이 젊은이는 남달라 보입니다. 세상의 성공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이 젊은이는 어릴 적부터 중요한 계명을 다 지키며 살아온 훌륭한 젊은이입니다. 저라면 이 젊은이와 함께 식사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쉬운 일부터 하면서 공동체를 잘 따라오게 권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과격해 보입니다. 이런 젊은이에게 모든 것을 팔고 따르라니요! 너무 급격한 변화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이 성경을 묵상하면서 많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젊은이는 무엇을 진심으로 원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왜 돌아갔고 무엇이 그에게 어려웠을까? 예수님이 말한 ‘가진 것을 팔고 따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부자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많은 것을 가진 부자의 삶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넉넉함이 주는 여유와 그 여유가 가져오는 관대함,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으려고 하는 능력은 부자가 갖고 있는 ‘빛’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진 것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느끼는 우월감, 그것을 잃었을 때 받아들이기 힘든 절망, 소유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충동, 그리고 부의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은 부자의 ‘어둠’입니다. 복음 속 부자 청년은 부자가 가진 ‘빛’을 보여 줍니다. 어릴 적부터 계명을 지켜온 신실함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는 관대함, 진리를 찾으려는 열망 등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부자의 ‘어둠’이 드러납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을 동일시 하기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슬픔이 크게 일어납니다. 이런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크게 놀랍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왜일까? 부자가 그렇게 잘못인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나를 비우고 동료들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온 길이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내 삶을 전적으로 의탁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삶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내 삶을 맡기려는 절박함이 부족합니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통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가진 것들이 많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인정도 받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내가 가진 것은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이처럼,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어려움으로 다가오기에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에서 실마리가 보입니다. 이 말씀은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 말의 진의는 내가 삶의 관점을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바꿀 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가능한 것이 된다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을 통해서 보게 되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많은 것을 갖고 살아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에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중요하게 여기면서 꼭 있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 내게 있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 뜻을 따라 사는데 도움이 되도록 일시적으로 허락된 것으로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내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에 그것들을 팔고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그것 말고 내게 더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실 것도 믿게 됩니다.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제 이야기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찾고 살고 싶었으나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제가 갖고자 하는 것들이 인생에서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가장 의미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조금씩 더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슬퍼하며 돌아갔던 부자 청년도 아마 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일시적으로 허락한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서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깨닫고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더 갖고자’ 하는 삶을 떠나 ‘머리 둘 곳조차 없다’하셨던 예수님의 길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0-13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다윗에게 직언한 예언자 나탄

자고로 권력자는 국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독재자들이 국민을 돌보는 갖은 연출을 하는 것은 민심을 얻기 위해서이다. 마음을 얻는 것은 비단 정치뿐 아니라 직장이나 사회, 가정 등 모든 인간관계에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옛날의 왕이 가진 권력은 절대적이라 왕에게 직언하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 실제로 권력자에게 직언을 했다가 낭패를 보는 것은 예전의 일만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직언을 피하고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고 하고 고집이 세지는 경향을 자주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나이가 들면서 고집이 세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 중 하나이고 뇌의 신경세포와 접촉하여 정보가 오고 가는 부분이 줄어들어 뇌가 굳어지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경우 새롭게 생각하지 않고 원래 하던 사고경로만 따른다. 반면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겸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 계속해서 사고방식이 발전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나탄 예언자는 위세가 당당한 다윗 왕의 통치 시기와 이스라엘이 최고의 발전을 누리던 솔로몬왕 시대에 활약했던 예언자이다. 다윗 왕은 성전을 건축하려는 계획을 나탄에게 상의한다. 다윗이 나탄을 얼마나 신뢰했는지 잘 나타난다. 나탄은 처음에는 다윗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그날 밤 하느님께서 나탄에게 나타나셔서 다윗이 아닌 그의 후손을 통해 성전을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나탄이 성경에서 관심을 받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다윗 왕에게 직언하여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탄은 다윗에게 우화를 들려준다. (사무엘기 하 12장 참조) 한 부자가 한 마리의 양을 가진 가난한 사람에게 빼앗아 자기 손님에게 대접한 이야기를 나탄에게 들은 다윗은 매우 분노하며 죄를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탄은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다.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아내를 데려다 임금님의 아내로 삼았다’며 다윗에게 직언했다. 나탄의 갑작스런 책망에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 여기서 다윗이 어떤 아량을 가진 사람인지 잘 드러난다. 나탄의 직언에 다윗은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잘 드러낸다. 하느님은 죄인이 죽기보다는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다. 나탄이 다윗 왕의 죄와 잘못을 용기있게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일은 예언자의 모델로 여겨진다. 나탄은 참된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데 있어 왕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참된 예언자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06

[말씀묵상] 연중 제27주일

최근 ‘혼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됐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비혼주의자도 많이 늘어났고, 혼인보다는 동거를 원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혼인은 원하지만 아이 없이 부부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혼인 후에 이혼을 선택하는 비율도 높아졌습니다. 최근 어느 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이혼율이 제일 높은 국가였습니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 세상은 급변하지만, 거센 풍랑을 만난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혼인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혼인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는 ‘단일성’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해소성’입니다.(교회법 제1056조) ‘단일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전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해소성은 하느님께서 부부로 맺어주신 남자와 여자를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혼인 서약을 한 부부는 죽음 외에 결코 갈라질 수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혼인예식을 거행하면서 공동체가 보는 앞에서 본인의 결심을 말하고, 주례사제는 신랑과 신부의 합의를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분이 교회 앞에서 밝힌 이 합의를 당신 은혜로 확고하게 하시고 두 분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합니다.” 혼인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기본 가르침을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허락해 주어도 되는지 여부를 묻는 바리사이들을 반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8-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테오스’)과 ‘사람’(‘안트로포스’)을 서로 맞대어 비교하시는데(마르 7,7-23; 8,33 참조), 이 대조를 통해 이혼이 불가능한 이유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무효화하려는 시도는 인간적 행위에 속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이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후대에 제정된) 이혼장과 관련한 율법 조항(신명 24장, 특별히 1절과 3절)을 반대하시면서 여기에 담긴 하느님의 의도와 목적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혼장과 관련하여 모세가 알려준 법적 조문은 혼인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을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 목적이 거부될 때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모세가 관련 법조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이들의 ‘완고함’, 곧 하느님의 창조적 질서를 벗어나 이혼을 하는 상황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앞에서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7절을 인용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6-7)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해 보여주신 ‘첫 번째 원리’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후대의 법적 조항보다 우선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혼인 윤리는 인간의 실패를 용인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느님의 창조에서 시작된 원형에 근거합니다. 오늘 주일 제1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창조, 특별히 여자를 창조하시면서 남자와 여자를 결합하여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창조 원리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상호 종속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협력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는 ‘돕는 이’ 또는 ‘지원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보시어, 사람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원리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도우며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여자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마주 바라볼 수 있는 “그[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지으신 여자를 보고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고 외치는데, 이 말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누구인지(정체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혼인의 고귀함을 일깨워줍니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대한 보도가 성경의 시작, 곧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 곧 혼인이 결코 인간적 선택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 없는,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거룩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협력자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은 사람과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기초 삼아 당신의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혼인의 가치가 세속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힘을 잃어가는 작금의 시대에 혼인의 거룩함과 고귀함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서 되새김질하면서 이 세상에서 창조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원리와 방법을 전파할 수 있는 증인이 되어 봅시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10-06

[말씀묵상]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이자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사회적 약자인 이주민과 난민을 ‘우리’ 안에 초대하여 ‘더욱더 넓은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촉구하는 날입니다. 이는 나와 다른 신앙, 사상, 행동방식을 가진 사람을 용인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평화적 공존을 이루는 기본 원리는 관용과 배려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관용을 베푸는 주체임과 동시에 관용의 대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더 넓은 우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제자 요한은 예수님께 ‘우리 편이 아닌 한 사람이 스승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금지시켰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선한 의지를 지닌 사람을 ‘포용’하고 ‘용인’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제자 공동체라는 범위를 한정 짓고 장벽을 쌓으려는 제자의 거부감을 중화시키며 넓은 마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타인에 대한 포용에 이어 ‘죄를 가볍게 다루지 말라’라는 경고를 주시며 죄를 짓게 하는 손과 발 그리고 눈에 대한 무거운 말씀 가운데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손으로 짓는 죄, 발로 짓는 죄, 눈으로 짓는 죄에 대해 단호하고도 강렬한 세 가지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마르코에게 있어 제자 됨은 취사선택적 태도가 아닌 급진적이고 철저한 자세가 요구된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에서 재확인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를 거부해야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말씀과 더불어 지옥에 대한 말씀 또한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만 하여도 ‘지옥’이라는 단어가 네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라자로와 부자의 비유(루카 16,19-24), 마태오의 산상수훈의 말씀들(5,22; 5,29-30), 이외의 여러 곳(마태 10,28; 24,41.46; 마르 8,36-38)에서도 지옥에 관한 언급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 지옥은 불이 타오르고 깊은 구렁텅이로 가로막혀 있으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받는 장소입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은 뜨거운 불로 형벌을 받는 곳이며, 동시에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은 차디찬 얼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단테의 표현처럼 지옥은 가장 뜨거운 곳인 동시에 가장 차가운 곳인 것 같습니다.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뜨거운 불길로 이해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점에서는 차디찬 곳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부류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타인을 죄짓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스스로 짓는 죄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남을 죄짓게 하는 잘못에 대해서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라고 무거운 말씀을 하십니다. 목에 맷돌을 달아 수장시키는 처형은 실제로 로마나 그리스 몇몇 도시에서 부모를 죽이거나 사회 도덕을 어지럽힌 사람에 대하여 시행되던 형벌입니다. 나귀나 짐승의 힘으로 돌려 곡식을 찧는 큰 맷돌인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면 살아날 희망은 거의 없습니다. 바다에 수장될 경우 장례를 지낼 수 없어서 영혼이 영원히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고 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잔인한 사법적 형벌인 셈입니다. 죄악의 특성은 ‘공범 만들기’와 ‘확장성’에 있습니다. 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타인까지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곱빼기 죄’라고 하겠습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는 그 대상이 명확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인이거나 혹은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까지 포함됩니다. 타인을 넘어지게 한 죄 다음에, 자기 스스로 죄를 짓는 경우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면 그것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 던져 버리라는 다소 극단적인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신체를 절단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현실감과 생동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셈족 특유의 과장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 싹을 자르라는 경고로써 손, 발, 눈이라는 우리의 소중한 지체를 포기할 만큼 생명에 들어가려고 힘쓰라는 교훈을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스스로 조심하여 죄를 멀리하는 것뿐 아니라 행동과 말, 표양으로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 역시 피하라는 교훈이 신체 절단이라는 강렬하고 단호한 말씀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당부가 그만큼 간곡함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다소 거칠거칠하게 다가오는 강렬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걸림돌에 넘어지거나 스스로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애정 어린 눈빛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결단만이 남았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9-29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겸손하고 인성이 좋은 아람 장군, 나아만

오늘날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실력도 실력이지만 인성이 좋아야 한다. 6·25전쟁 중공군 공세 때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밴 플리트 장군은 아주 특별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명장 패튼 사령관이 최고로 칭찬한 지휘관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장기적인 국군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장교 인력 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재를 털고 주변의 돈을 모아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유명한 일화는 6·25전쟁 중 그의 아들, 밴 플리트 주니어 공군 대위가 북한 순천지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실종된 사건이었다. 이틀에 걸친 수색이 효과가 없자 불필요한 희생을 걱정해 직접 수색을 중지시킬 정도로 공과 사가 엄격했다. 그는 전쟁 후 교류가 없던 다른 미군 장군들과 달리 한국의 발전을 위해 자주 방문하며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전쟁영웅인 그는 정치권의 부름을 거절하고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였다. 그는 죽기 전까지 소매를 걷어붙이고 여러모로 한국을 도왔다. 자신의 집무실 이름을 '한국의 방'이라고 했고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이야기하며 아들의 혼이 묻혀있는 한국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오늘날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있는 까닭이다. 아람 군대의 장수인 나아만은 임금이 소중하게 여기는 큰 인물이었지만 불행하게 나병 환자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병 환자를 사회에서 추방했지만 아람에서는 왕과도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나아만의 집에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데려온 어린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이 소녀는 주인의 병을 고칠 이스라엘 지역의 유명한 예언자를 소개했다. 몸종이 친절을 베푸는 것을 보면 주인의 심성이 좋고 잘 대해주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를 통해 엘리사의 명성이 이방인 땅에도 전파되는 순간이었다. 나아만은 임금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고 아람 임금은 친서를 써주었다. 나아만은 많은 재물과 함께 이스라엘 임금에게 향했다. 편지는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은 전쟁의 빌미를 찾고 있다면서 옷을 찢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엘리사는 왕실에 나아만을 자신에게 보내라 한다. 나아만은 대규모 군대와 함께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심부름꾼이 나와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예언자의 말만 전한다. 나아만은 긴 여행 끝에 도착했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엘리사에게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려 했다. 부하들이 막아서며 어려운 일도 아닌데 한번 해보라는 권유에 가르침대로 하니 나아만은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나아만이 나병을 고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교만과 자존심을 버렸고 부하들이 충고를 들을 줄 아는 넓은 아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만은 치유 후에도 겸손하고 인성이 좋은 사람임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는 더더욱 어떤 분야든지 겸손하고 인성이 좋아야 한다. 교만과 이기심은 자신과 주변까지 추락시킨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29

[말씀묵상] 연중 제24주일

좋은 질문을 던져야 좋은 답을 얻는다고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에서도 맹목적 믿음보다는 스스로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많은 이들에게 다양한 가르침을 주셨지만, 때로는 질문을 통해 사람들을 성장시키십니다. 예를 들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는 질문,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는 질문은 단순히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를 성찰함으로써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도록 초대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던지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질문입니다. 복음의 전후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가운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징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의 답을 듣고, 다시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예언자 중 한 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종종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틀을 통해 판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기존 관념으로 타인을 판단하게 되면, 그 사람의 참모습을 알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단순히 뛰어난 가르침을 주는 스승님, 사람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인물, 초자연적 기적을 행하시는 신적 존재로만 본다면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 깨닫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의 시각을 넘어, 제자들에게 자신과 함께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들 자신의 언어로 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이렇게 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수제자 베드로의 대답이 정답처럼 들리지만, 그 후의 복음 내용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겪어갈 길에 대해 알려주시는데, 앞서 정답을 말한 베드로 성인이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요? 더 나아가 예수님은 베드로 성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며 야단치시는 장면까지 나오니 더욱 혼란스럽게 다가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과 마음이 다 통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그의 고백 역시 예수님을 진정 이해해서 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예전부터 들어온 그리고 기대해 온 그리스도라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대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나서서 그 힘든 길을 갔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찾고, 사랑을 나누고, 그런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수 있기를 그들은 원했습니다. 이 열망과 용기를 하느님이 심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신들이 생각한 메시아의 모습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진정한 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걸어가는 사랑의 길은 세상의 환호에 안주하지 않고, 반대자들의 반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의 뜻을 살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걷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박까지 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뜻을 관철시키려 한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기대를 이루고자 합니다. 이런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면서 계속 함께 가기를 원하십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이나 욕망을 갖고 따르면 함께 갈 수 없기에 각자의 인생에 부여된 하느님의 사명을 갖고 따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제 삶을 돌아봅니다. 저 역시 하느님이 주신 열망 덕분에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으나 어리석음과 두려움 속에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저와 함께 걸으셨습니다. 이 여정을 통해 저는 무엇을 원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1·2독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주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실천하는 믿음이 제가 예수님을 따를 때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알려줘서 알 수 있는 분, 열심히 공부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분은 늘 삶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셨고, 지금도 그렇게 삶을 통해 만나게 되는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정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면서 질문을 던지시는 분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삶에서 예수님이 던지는 이 질문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가 고민하고 자신의 삶에서 진실하게 답을 찾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고 만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이 길을 걸어갑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9-1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최후의 날 예언한 스바니야 예언자

예로부터 사람들은 개를 가축과 애완용으로 길들여 옆에 데리고 살았다, 그 역사가 약 2만 년에서 4만 년 전부터라니 유구하다. 얼마 전 동영상에서 큰 곰이 우리를 넘어 강아지를 공격하자 어미 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0배나 큰 곰을 맹렬하게 공격해 곰이 허둥지둥 도망가는 것을 보고 그 용맹성에 놀랐다. 개는 훈련을 받으면 구조견이나 마약탐지견, 시각장애인인도견이 되는 아주 이로운 동물이다. 그런데 비슷한 줄 알았던 들개와 이리는 서로 다른 종(種)이다. 이리는 개와 달리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사납고 잔인한 동물이다. 성경에서 이리는 안 좋은 것에 비유할 때 자주 등장한다. 스바니야 예언자가 대표적으로 이방인들의 죄를 지적할 때 이리의 습성을 비유했다. “그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그 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스바 3,3) 성경 저자들은 이리에 비유되는 악인들이나 악한 제도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고 끔찍함과 잔인함을 비유하고 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기적인 종교 지도자들, 부정직한 대신들과(스바 3,3) 거짓 예언자들과 거짓 교사들도 싸잡아 이리의 습성을 닮았다고 매섭게 공격했다. 스바니야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숨기셨다’ 또는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를 의미하는데 활동 현장은 예루살렘 성이었다. 기원전 7세기 중엽 이집트를 점령한 아시리아에게 근동의 패권이 넘어왔다. 아시리아는 주변 민족들을 파멸시키고 잔학 행위를 저지르며 세력을 키웠다. 이스라엘은 왕국의 주권과 하느님 신앙을 포기하고 아시리아의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렸다.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는 아시리아의 우상을 세워졌고, 매음이 성전에서 행해졌다. 요시야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고작 8살이라 직접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어 상당 기간 섭정이 이뤄졌고, 이 시기에 스바니야가 열심히 활동했다. 요시야 왕 때 섭정을 한 권세가들은 우상 숭배를 자행하고 사회를 도탄에 빠뜨렸다. 이러한 시대 배경 아래 스바니야 예언자는 우상 숭배자들과 불의한 지도층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고(1,2-13), ‘아시리아의 몰락’(2,13-15)을 예언한다. 스바니야는 ‘교만’이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가르친다. 교만은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반항, 우상 숭배,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며 마침내 사회 부정과 불의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스바니야는 ‘하느님의 심판’ 곧 ‘주님의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다른 예언자와 달리 무섭게 빠르게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그의 예언은 50년 후 예루살렘 멸망으로 현실이 된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께만 기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들이 희망이 된다고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왕국이 멸망한 후에라도 미래를 희망할 근거는 존재한다는 스바니야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기대하는 한 줄기 빛이 된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과 스승 엘리야를 백성들과 이어준 엘리사

제2차 세계대전 말 독일은 천혜의 방어망 라인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삼았다. 라인강은 강폭이 넓고 회오리치는 곳이 많아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최적지이다. 히틀러는 라인강의 모든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중부 라인강변에 도착한 미군 일부는 아침 안개가 걷히고 포연이 사라진 뒤 기적을 목격했다. 라인강 사이의 레마겐과 에르펠을 잇는 철교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 이 다리에서만 폭발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군 특공대는 다리 위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한발씩 전진해 1945년 3월 7일 다리를 접수했다, 연합군에게 점령된 라인강 최초의 다리인 셈이다. 연합군은 라인강 너머로 교두보를 마련했고 대공포대를 설치했다. 베를린으로 직행하는 독일의 전략요충지로 계속 병력과 탱크와 물자를 수송했다. 히틀러는 크게 화를 내며 지휘한 장교들을 처형했고, 독일군은 여러 번의 공습과 심지어 실험 중이던 V2로켓까지 10발 이상 발사했지만 다리를 폭파시키지 못했다. 열흘 정도 지나 다리 중간이 무너졌지만 이미 많은 병력이 동쪽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연합군의 라인강 도하는 연합군 심리와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고,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베를린으로 밀고 들어갔다. 레마겐의 철교 덕분에 수많은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투와 전쟁에서 다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레마겐 철교의 존재는 기적 같은 일이다. 예언자도 결국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기적을 사람들에게 이어주고 백성들에게 예언을 전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엘리사가 처음 예언자로 활동할 때는 아합의 통치 말년이었다.(1열왕 19,1-17)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와 같이 기적으로 유명하다. 엘리사의 첫 번째 공식 활동이 스승의 승천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엘리야의 옷을 집어 들고 내리쳐 요르단강물을 갈라친 것이었다. 엘리야가 행했던 기적을 다시 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엘리사를 그들의 지도자와 엘리야의 계승자로서 섬겼다. 대부분의 기적 설화들은 깊은 존경심과 경건한 경외심을 지닌 예언자 그룹과 목격자들과 관련되어 있다. 엘리사는 기적 설화들이 쌓여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기적은 나병 걸린 아람의 장군 나아만을 고친 것이었다. 죽은 후에도 엘리사의 기적은 중단되지 않았다. 죽은 엘리사의 몸에 닿은 다른 주검이 다시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섰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탁월하고, 동정심 많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는 엘리사의 인간성이 예언자 그룹의 제자들 기억에 깊이 간직되었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이스라엘 역사에 준 영향력에 대한 진정성은 명백했다. 왜냐하면 엘리사는 우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맨 앞자리에 놓았다. 그가 행한 무수한 기적들도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였던 것이다. 엘리사는 평생을 스승과 제자단, 그리고 백성들을 이어주는 평화와 생명의 다리 역할을 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15

[말씀묵상]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신부님, 교목실 창문 너머에는 목련 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목련은 신학교 성당 곁에도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몇 해의 봄을 지나면서도 그 나무를 피해 다녔습니다. 꽃이 만개했을 때도, 애써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날아오를 듯, 포롱포롱 가지마다 핀 하얀 꽃잎들이, 질 때만큼은 너무나도 서글펐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올해 봄에는 무언가 홀린 듯이, 목련 지는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하얀 꽃잎이 녹슬어 떨어지는 모습은, 목이 잘리어 피를 흘리는 것 같았고, 저는 문득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목련이 피를 흘리며 지고 나니, 봄이 왔습니다. 봄을 알리는 그 꽃은, 봄이 만개할 때는 자취를 감추더군요. 학교 앞뜰에 벚꽃이 만개할 무렵 존재를 감춘 목련은, 여름 뙤약볕 아래 잎을 돋우어 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은 그 앞을 뛰어다니며 웃음 지을 것이고, 그 앞을 지나 성당에서 두 손을 모을 겁니다. 신부님, 당신이 목을 떨군 그 땅에, 교회는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꽃피우고 있습니다. 저는 아무도 찾지 않는 여름 목련 아래서, 당신을 기억합니다. 신부님과 동료 순교자를 기억하는 오늘, 교회 공동체는 루카 복음의 말씀을 되새깁니다. 말씀은 송연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목련꽃을 애써 피하고 다닐 무렵,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도 서운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바른 정신을 가진 맑은 청년이 내몰린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입바른 소리가 싫어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그 억울한 죽음을 마주했다면, 다시는 누구도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목도한 사람들은, 다시 그 십자가를 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고통의 의미를,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신앙이 그런 방식으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때마다, 사람들은 스러져갔습니다. 우리 신앙은 왜 이리도 사람들의 고통에 관대한가. 신앙은 왜 고통을 예방하려 하지 않는가. 피로 새겨진 저 말씀을 눈물로 닦으며, 저는 묻고 또 물었습니다. 그럴수록, 저 문장은 제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여름 목련 나무 앞에서, 다시 성경을 폅니다. 말씀 구절을 찾아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십자가를 ‘지다’를 표현하기 위해 ‘아이로’(αἴρω)라는 낱말을 썼습니다. 이 단어는 ‘짐을 짊어지다’는 뜻입니다. 이 낱말에는 무게를 견디어 내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복음 어귀에, 다시 한번 십자가 이야기를 꺼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오늘날 성경이 ‘짊어지다’로 번역하는 이 낱말은 ‘바스타조’(βαστάζω)입니다. 이 단어도 ‘옮기다’, ‘참다’, ‘짐을 지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 어감은 조금 다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안고 간다는 뜻에 가깝지요. 아기 엄마가 젖먹이를 품에 안고 갈 때, ‘아이로’보다는 ‘바스타조’에 가깝습니다. 역설적입니다. 아마도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놀랐을 겁니다. 십자가라는 형벌도구를, 아이를 품듯 하라니요. 그런데, 이 ‘바스타조’라는 낱말은 로마서에 다시 등장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주어야 합니다.”(로마 15,1) 바오로 사도는 나약한 이들을 보듬는 일을 표현하고자 ‘바스타조’란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십자가를 지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일이기도 하겠지만, 누군가의 어려움과 고통을 돌본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십자가를 대하는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두 단어를 오가는 이유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또렷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신앙의 여정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견디어 낸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 소중히 끌어안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면, 저는 끌어안는 쪽을 택하려 합니다. 신부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들립니다. 교실 창가로 아이들이 보입니다. 교실에 걸린 십자가 아래로, 아이들은 따뜻한 햇볕을 책상 위에 펴고, 책을 읽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이곳의 오늘은 안온합니다. 당신이 꿈꾸었을 일상을 저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더 이상 숨어서 신앙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함께 기도할 수 있고, 우리 손에는 한글로 된 성경이 들려있어서, 마음껏 성경을 소리 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꾸벅꾸벅 졸 수 있습니다. 그런 일상을 살아가는 저희로서는,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박해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리셨나요. 어떤 힘을 내는 말이었나요. 저는 신부님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의 안온함은 어제의 절박함과 너무 멀고, 저는 그 소슬한 거리를 좁히지 못해, 격절의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제야 저는 어제의 서운함이 부끄럽습니다. 신부님, 어느 날 무심한 눈길이 목련에 가닿는다면, 저는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 오늘 말씀을 포개어 두고, 삶과 꿈을 다시 성찰하겠습니다. 당신이 이른 봄의 목련꽃처럼 행하신 사제직을, 저는 여름 목련처럼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십자가를 품에 꼬옥 안고, 자박자박 걸으며 그 뒤를 따르겠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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