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23주일

저에게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로 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유학 시절입니다. 언어를 배우면서 현지 생활에 적응하던 시기에는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하고 싶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길거리에 산책을 나와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 심지어는 주인의 말을 알아듣는 강아지가 부러웠습니다.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로 다시 돌아온 예수님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바라는 것은 한 가지,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다시 듣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는 사람들의 바람에는 예수님께서 손을 얹어 주심으로써 병자가 치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누구인가요?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귀먹은’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형용사 ‘코포스’(마르 7,32)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무딘’ 혹은 ‘둔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청각 장애를 가진 이들을 이방 민족과 연결지었는데, 이방 민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이사 42,17-19; 43,8-9; 미카 7,16 참조) 이러한 연결점을 고려할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간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던 이방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데려간 이는 들을 수 없었던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는 ‘말을 더듬는’ 상태를 표현하고자 그리스어 형용사 ‘모길리오스’(마르 7,32)를 추가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형용사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마르코 복음 7장 32절에서만 등장합니다.(hapax legomenon) 이 단어는 이사야서 35장 6절의 칠십인역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말할 수 없는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이러한 의미는 마르코 복음 7장 37절에서 언급된 “말못하는 이”, 곧 그리스어 ‘알랄루스’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면서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를 받은 병자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마르 7,35)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귀가 열림’, 그리고 ‘혀가 풀림’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신적수동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예수님은 치유자이며 구원자이십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마르 8,18 참조)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놀라서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사람들이 이처럼 놀란 것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치유가 특별히 놀랄 만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당시 이러한 기적 행위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사건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비현실적 사건이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예고하였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 제1독서) 오늘 복음은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릴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고 선포합니다. 기원전 8세기,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예언자의 심판 예고는 실현되었고, 이 결과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페르시아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바빌론의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는데, 이때 예언자(제2이사야)는 바빌론으로부터의 귀환과 예루살렘 재건을 예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고향에로의 복귀가 임박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환과 재건의 희망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미래 없는 멸망을 예고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 안에 담긴 구원의 희망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과 바빌론 유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망과 시련을 체험하도록 하셨지만, 그들을 바빌론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셨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도 절망과 시련,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있었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음으로써 자유와 해방, 곧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 ‘어둔 밤’ 속에서 헤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겠지만, 그들의 장애는 단순히 하느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결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두움을 비추는 밝은 빛을 준비하고 계시며, 우리에게 그 빛을 바라보도록 초대하십니다. 저는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귀를 열어주시고 혀를 풀어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9-0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예언자들의 스승 엘리야

신학생 시절 한 선배가 소개해 준 헬렌 켈러의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글을 본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 장애인이었다. 그는 장애를 훌륭히 극복한 현대의 위인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의 삶을 성공적으로 가능하게 한 스승이 있다. 헬렌이 7세 때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보스턴의 한 시각 장애 학원을 찾았다가 만난, 평생의 교사가 될 앤 설리번이었다. 당시 앤 설리번은 겨우 21살이었다. 앤 설리번도 5세 때 눈병으로 시력을 잃었다가 수술로 시력을 회복했지만, 평생 실명의 불안과 싸우면서 살아야 했다. 앤 설리번의 이러한 체험이 헬렌의 교육에 도움이 되었다. 앤 설리번은 엄마가 아기에게 말을 걸듯이 끊임없이 헬렌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말을 써 주었다. 헬렌도 마찬가지로 손가락 말로 대답했다. 헬렌은 1904년 하버드대학 래드클리프 칼리지를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3중 장애의 몸으로 대학 교육을 마친 세계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앤 설리번은 학교 강의실에서 언제나 곁에 앉아 강의를 손가락 말로 헬렌에게 전해 주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내용을 점자로 다시 적어 읽게 하였다. 이처럼 헬렌 같은 위인의 생애에서 앤 설리번이라는 스승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처럼 인생의 큰 행복은 없을 듯하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다. 유명한 예언자 엘리사의 스승이기도 하다.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하나였지만 그의 통치기간 중 이스라엘의 종교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합은 시돈 왕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들였고,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기까지 하였다. 엘리야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역사적으로도 얼마나 혹독했는지 고증된 심각한 가뭄이 닥쳐올 것을 경고한다.(1열왕 17,1) 아합은 엘리야에게 나라를 불행하게 만든 자라고 힐책했지만, 엘리야는 오히려 임금의 잘못이라고 맞받아친다. 엘리야는 카르멜산으로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예언자 사백 명도 함께 모아 대결을 벌인다.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하고 백성들은 반대편의 예언자들을 죽인다. 엘리야의 승천(2열왕 2,1-12 참조)은 엘리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정당성을 부과하고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자기 혼자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여정을 같이 했다. 엘리사는 그의 스승 엘리야가 곧 승천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야의 영적 능력 가운데 장자로서 받아야 할 몫을 요구했다. 예언자들은 분명히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영감을 내렸다고 확신한다.(2열왕 2,15) 엘리야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앙과 열성적인 헌신으로 바알과의 투쟁을 선도한 예언자이다. 그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가르침을 계속 오랫동안 기억하며 실천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08

[말씀묵상]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오늘은 연중 제22주일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생명의 망으로 연결된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라는 부르심을 기억하라는 초대의 날이며, 피조물 보호를 위해 이 시대의 예언자적 행동을 하도록 요구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으로 그 가운데 특별히 ‘부정과 정결’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대의 풍경이 선명하게 담긴 이 논쟁의 발단은, 제자들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다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전통을 깨뜨린 제자들의 행동에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날을 세우며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자신들이 삶에서 철저하게 견제해 온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5)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비위생적이어서가 아니라 비전통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본뜻이 상실되고 맹목적으로 허상의 성채를 쌓는 모양새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숨겨진 위선과 오류를 가감 없이 드러내십니다. 먼저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시어 ‘입술’의 섬김과 ‘마음’의 섬김을 대조하시며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지적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전통’일 뿐이라고 하시며 전통의 권위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 전통의 근원이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음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계명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7,8)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의 전통’에 따라 ‘코르반’이라며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대신 하느님께 드렸다’라고 외치지만, 정작 십계명의 ‘부모공경’을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시며 주객전도임을 명확히 하십니다. 사람이 정해 놓은 것에 집착하여 더 중요한 율법은 오히려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질책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람의 전통’을 율법보다 앞세우는 그들의 위선이 밑바닥까지 들추어지는 것 같아 속 시원함을 느낍니다. 논쟁의 구체적 쟁점은 음식을 먹기 전 ‘손 씻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주제는 단순히 손을 씻는 것보다는 훨씬 원천적이고 광범위합니다. 도덕적 정결함의 근본을 말씀하시며 더 광범위한 주제로 이야기를 전환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7,15) 예수님의 이 논리에 따르면 손을 깨끗이 씻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정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오히려 몸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 부정하게 만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간단명료한 답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아가 ‘음식이 모두 깨끗하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손을 씻지 않은 행위가 음식에 그 어떤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아울러 음식이 모두 깨끗하기에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으로 나뉜 오래된 구분이 사라지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 속에서 나오는’ 죄의 요소를 나열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이 비록 날카롭게 짚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리스어 성경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단수형,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은 복수형으로 표현합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더 많고 악함을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열두 개의 ‘악함’은 앞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악의는 자주 반복될 수 있는 행위를 나타내기에 복수형을 쓰고, 뒤에 언급되는 여섯 개, 즉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은 사람의 기질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단수형으로 표현하여 구분하고 있습니다. ‘겉’이나 형식이 아니라 모든 악행의 근원이 사람의 내면임을 명토 박아 말씀하시며, 겉으로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면이 그렇지 못할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외적 행위에 집착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이율배반적 모습을 들춰내시며 그들의 헛된 자부심을 벗겨냄으로써 분리와 배척의 상징이었던 ‘정결’과 ‘거룩’의 의미를 새롭게 하시고 재정립하십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돌보라’는 주님의 당부를 우리 삶의 공간에 옮겨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은 어떠한가요? 이 성찰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경건함’을 한 겹 한 겹 아프게 벗겨내는 과정은 우리를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9-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일편단심 예언자 느헤미야

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하나인 율곡 이이(李珥)는 1582년 황해도 감사로 부임했는데, 그곳에는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으로 양반집 딸에서 기생이 된 ‘유지’(柳枝)라는 소녀가 있었다. 총명하고 시도 잘 쓰는 유지는 율곡과 밤새워 이야기하는 말벗이 되었다. 얼마 후 율곡은 한양으로 떠나 둘은 이별했다. 그 후 어느날 율곡이 황해도 재령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 깊은데 문을 두드려서 보니 성숙한 여인이 된 유지였다. 그리운 임을 보기 위해 험한 수십 리 산길을 걸어 찾아온 것이었다. 율곡은 유지와의 사연을 시로 남겼는데 “수용할 수 없는 사모의 정을 애틋하게 느끼면서, 천한 기생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 유지가 걱정이 되고 만약 내세가 있다면 거기서 만나겠다”고 노래했다. 당시에 율곡이 유지를 소실(小室)로 두는 것에 걸림돌은 없었지만, 문제는 율곡의 건강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갑자기 죽으면 어린 유지를 돌볼 수 없다는 책임감에 소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과 유지의 사랑을 담은 세 편의 편지 ‘유지사’(柳枝詞)는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유지는 율곡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삼년상을 치렀고, 그가 죽은 지 25년이 지나서도 율곡을 그리는 시를 썼다. 유지는 평생 죽을 때까지 율곡을 일편단심 마음에 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께 일편단심한 인물로 느헤미야 예언자가 떠오른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의 술을 책임지는 시종이었다. 황제는 늘 독살의 위험이 있어 술 시종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어느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굶주리고 성전은 폐허로 형편없다는 소리를 듣고 통탄하며 슬피 울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왕에게 ‘고향 이스라엘’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고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황제는 느헤미야를 신뢰했기에 그의 예루살렘 귀환을 적극 도왔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지 두 세대가 지난 뒤였는데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가난에 시달렸고 정치가들은 여러 파로 갈려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며 백성들에게 힘을 내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도록 이끌었다. 꼭 좋은 일에는 훼방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성전재건은 불가능하며 반대하고 심지어 느혜미야가 왕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 건축을 한다는 가짜 뉴스도 성행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일을 벌이지 않고 지혜롭게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성전 건립이라는 대공사를 밀어붙였다. 느헤미야에게 성전 재건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루살렘 성전 공사는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전쟁보다 더 많은 방해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환난 중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돌파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역시 필요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9-01

[말씀묵상] 연중 제21주일

요한복음 6장의 말미를 마주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합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 모두가 이 이야기를 전한다고 해서, 그 태도까지 같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특히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서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 복음서는 빵이 많아졌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매조짓습니다만, 요한복음서는 바로 그 일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시고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신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관점은 다릅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과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 긴 ‘생명의 빵’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반응부터 전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긴 이야기에 대한 ‘한줄평’ 혹은 ‘댓글’ 정도가 되겠지요. 새 번역 성경이 ‘거북함’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스클레로스’(σκληρός)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담은 그 단어를 조금씩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공동번역) “이 말씀은 모질구나. 누가 차마 그것을 귀담아들을 수 있겠는가?”(200주년 신약성서) 세 가지 번역은 어떤 부정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는 면에서 닮아있습니다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거북하다’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어렵다’는 말에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느낌이 강하고, ‘모질다’는 낱말에서는 당혹감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듣고 있다’, ‘알아듣다’, ‘귀담아듣다’라는 표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번역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먼저는 제 그리스어 실력이 짧은 탓입니다만, 무엇보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의 생각을 한 문장에 담아내기는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스클레로스’라는 낱말을 저마다 조금씩 달랐을 부정적 감정의 그릇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 낱말을 그렇게 사용하면, 저 번역들은 읽는 사람들의 여러 마음도 담아낼 수 있을 겁니다. ‘생명의 빵’ 이야기를 돌아다보면, 솔직히 불편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 대화에서는 예수님의 뜻과 사람들의 욕구가 끝없이 어긋나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기어코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굳이 들추고 헤집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그래도 사람들은 묻기도 하고 청하기도 하는데,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33.35.51절) 사람들은 이 말씀 앞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절)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52절) 사람들은 저마다의 경험칙 안에서 의문을 가졌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날 그곳의 사람들이 무엇을 느꼈을지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도 있습니다. 문장에 기대어 대화에 뛰어든 우리는 저마다 무엇을 느낄 것이고, 그렇게 질문을 할테니까요. 사람들은 떠나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물끄러미 물으십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새 번역, 공동번역) 그런데 누군가는 이 말을 다르게 옮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까?”(200주년 신약성서) ‘귀에 거슬리다’와 ‘걸려 넘어지다’는 번역의 원문은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랍니다. 그런데, 이 낱말은 대개 ‘죄를 짓다’(짓게 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스칸달론’입니다. 이 낱말에는 ‘장애물’(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 같은)의 의미가 있습니다. 추문을 뜻하는 ‘스캔들’이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용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걸음이 멈추듯이, 말씀을 듣다가 어떤 낱말이나 표현에 마음이 멈추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스의 교양인들과 어떤 교부는 그런 순간을 ‘스칸달론’이라고 표현했다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스클레로스’에 표현한 사람들의 마음은 ‘스칸달리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복음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빵을 먹은 사람은 오천 명이 넘었는데, 이제 남은 사람은 열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열두 제자들은 남았습니다. 베드로는 질문을 멈추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시작하여 생명의 빵 이야기를 따라 듣는 동안, 어느 땐가 우리의 발걸음은 멈추고, 때로는 불편한 마음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계속 따라간다면, 언젠가 우리의 걸음은 다시 멈추고, 그만큼 자주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질 겁니다. 하지만 이 걸음을 포기한다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며 어떤 힘을 낼지 영영 알 수 없겠지요. 열두 제자를 향하던 질문이 우리에게도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8-2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니네베의 멸망을 예언한 나훔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1883~1945)는 청년 시절 문학적이며 지성적이었다. 그는 마르크스 얼굴이 새겨진 메달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로 사회주의 이념에 진심이었다. 무솔리니는 19세 때 병역을 피해 스위스로 도망쳐 낮에는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사회주의를 연구했는데, 선동가로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11번이나 감옥에 갇혔다.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10년 동안 저널리스트로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가져온 파멸 상태를 본 그는 사회당원으로서의 활동을 그만뒀다. 1918년 무솔리니는 구체제의 악습들을 완전히 청산해 낼 수 있는 단호한 독재자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파시스트 운동은 민족주의와의 결합에 힘입어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재향군인들의 실업과 정부의 취약성, 국회의원들의 부패 사이를 파고들어 무솔리니는 세력을 확장했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폭동을 이용해서 무솔리니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여 권력을 잡았다.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 동맹을 맺고 국민들을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한 지도자의 정책이 나라의 운명을 지옥과 같은 고난으로 몰아넣은 사례가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대표적이다. 1945년 4월 27일 무솔리니는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처형됐다. 그의 시체는 밀라노 미잘로 로레토 광장 과거 공산당원들을 공개 처형하던 바로 그 교수대에 거꾸로 매달렸다. 예레미아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예언자 나훔은 고향이 ‘엘코스’라는 것 외에는 별로 정보가 없다. 나훔서는 지도자들의 불의한 시책이 국가를 패망으로 몰고 간다는 사실을 니네베의 폐허를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들의 올바른 지도와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예언자 나훔은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네베로 가서 예언했다. 기원전 8세기 후반과 7세기 초엽은 앗시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팽창하는 시기였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100여 년간 이스라엘을 괴롭혀왔다. 기원전 652년부터 왕좌 계승을 위한 형제간의 권력다툼을 통해, 결국 앗시리아의 힘은 기울고, 멸망을 향해 추락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612년 니네베가 멸망하고 시리아 하란 지역의 아시리아 군대도 공격으로 전멸당해 기원전 609년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하느님께서 위로하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나훔은 이름 그대로 고통 중에 억압받던 유다인 위로하며 악행의 말로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전체적으로 나훔서에는 앗시리아의 지배에 고통 당하던 유다인의 울분과 증오가 잘 담겨 있다. 나훔은 니네베의 멸망은 하느님의 뜻이며, 심판의 날에 악인은 처벌당하고 성읍은 완전히 파멸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분명하게 예언한다. 나훔서의 내용은 니네베의 멸망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주제를 향하고 있다. 니네베의 멸망을 초래한 것은 결국 포악한 통치자들 때문이다. 나훔은 불의는 결국 망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은 결국 승리한다는 위안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2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외친 예언자 에제키엘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을 남긴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이다. 파스칼은 본래 착실하고 검소한 청년이었는데 갑자기 노는 일에 빠져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왔다. 1654년 11월 23일에도 파스칼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밤에 약 2시간 동안 그는 놀라운 초월적인 체험을 했다. 그 이후 파스칼은 사교계에 발을 끊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파스칼은 죽기 얼마 전부터 그리스도교에 깊이 빠져들어 신앙을 전하기 위해 글을 썼다. 그가 남긴 글을 모아 엮은 책이 바로 유명한 「팡세」(Pensées, 생각)이다.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이 메모는 지금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600여 단어의 신앙고백은 뜨거운 체험에 대한 확신과 기쁨, 감동이 서려있다. 이처럼 신비롭고 초월적인 체험은 사람을 완전히 변화시킨다. 에제키엘은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나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이 유다를 정복하고 주요 인사들을 포로로 잡아갈 때 바빌론으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에제키엘은 제사장인 동시에 예언자였다. 에제케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비난하고 위협하고 경고하지만 동시에 위로하며 격려한다. 유배 기간이 지나면서 유다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는데도 많은이들이 그냥 정착하려고 했다. 유배 기간 중 배교하는 이들도 많았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도덕, 문화가 사라지고 있는 것을 개탄했다. 에제키엘은 '그발' 강가에서 포로들 속에 끼어있다가 하늘이 열리며 나타나는 신비로운 발현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때 에제키엘이 본 것은 바람, 구름, 불이었다. 이어서 네 짐승, 바퀴, 홍수와 같은 소리, 말소리 등을 보고 듣게 되었다. 에제키엘이란 이름은 히브리말로 ‘하느님이 강하게 하신다’라는 뜻이다. 에제키엘은 환시, 환청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고 하느님의 영(靈)에 이끌려 예언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에제키엘도 미움과 박해를 받기는 했지만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 가운데서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다. 에제키엘은 젊은 나이에 포로가 되어 고국을 떠나게 되었고 나라가 망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던 인물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장래에 어떠한 희망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때에 그는 이스라엘에게 민족중흥에 관한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본국 귀환을 예언하고 회심을 통해 영적 생명을 소생시켜야 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예언했다. 누구라도 삶에서 신비롭고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체험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사도 바오로는 갈라티아인들에게 보낸 서간 5장에서 열매로써 하느님에게 온 것인지 악의 세력에게 온 것인지를 분명히 식별하게 해주셨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18

[말씀묵상] 연중 제20주일

3주 동안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생명의 빵’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빵’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의미인지,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지를 묵상하게 이끕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지난 주 복음은 이 말씀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이 이번 주 복음의 첫 문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걸까요? ‘살아 있는’이라는 단어에 집중해 봅니다. 2019년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가 발표되었습니다. 청년을 주제로 한 제15차 세계주교시노드의 후속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표한 사목적 권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000년 전에 사셨지만, 교회는 그리스도가 지금도 살아 계신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스스로를 ‘살아 있는’ 빵이라고 말하신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즉, 예수님이 생물체로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살다 가신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죽어야만 만날 수 있는 미래의 분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인생 여정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한 전기 혹은 역사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가 만나는 현장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묵상합니다. 다음으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는 문장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특히 ‘살과 피’라는 단어가 다가옵니다. 아마 대부분 신자는 ‘살과 피’를 통해 성찬례를 떠올릴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십니다.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성변화(聖變化)’된 ‘살과 피’를 모십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살아 계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모신다는 것이 내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진정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충만하게 주어지는 은총의 의미를 모른 채 그냥 관습적으로 혹은 별 의식 없이 전례에 참여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살)은 예수님이 살아온 인생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몸을 갖고 사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유한하듯 몸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그 유한한 인생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에 맞게 살아가신 인생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이렇듯 유한한 인생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살아가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 삶을 따라가는 사람은 유한한 인생을 통해 영원한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당신의 피를 나누신다고 만찬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의 표징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동료 이웃들에게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삶이 죄에 빠진 삶입니다. 그런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삶이 예수님의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사랑을 위해 바치셨습니다. 그런 당신의 몸(살)과 피를 나누신다는 것은 우리를 예수께서 걸으신 사랑의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나만을 위한 인생, 하느님 없는 인생이 아니라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세상 속에서 동료들과 사랑을 나누는 인생으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를 다시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결국 예수님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며 살아보려고 애쓰고,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 그분이 믿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내 안에 머무르고 내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삶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하느님도 ‘살아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내 삶과는 무관하게 저 멀리 높은 곳에서 관찰하는 분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사랑을 나누시는 분이시기에 내 삶과 늘 함께하십니다. 그런 분이 하느님 아버지라는 것을 알려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내 삶의 근본적인 힘으로 삼는 것을 ‘말미암아’ 산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에 그런 예수님의 인생을 내 삶의 근본적인 힘으로 삼는 것도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오늘 1·2독서는 모두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 세상의 논리에 따라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은 사라질 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먹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인생과 그분이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만을 능력이자 지혜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늘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빵이라는, 우리의 욕망과 기대와는 동떨어진 대답만을 하실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믿을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먹고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오늘 복음은 묻고 있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08-18

[말씀묵상] 연중 제19주일

요한복음 6장이 전하는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담화는 지난 주일에 이어서 이번 주일에도 소개됩니다. 지난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체험하였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면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 힘쓰는 군중을 상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만나를 받아먹은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만나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요한 6,31-33 참조) 이번 주일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이 등장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으로 소개하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는데(요한 6,41),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유다인들의 불만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 곧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아 행동하고 말하는 ‘파견받은 자’에 대해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불만을 늘어놓는 모습에서 우리는 구약성경 속 사건들, 특별히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실 수 없어서 불평하였고(탈출 15,24),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때를 그리워하며 현재 처한 상황에 불만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탈출 16,2-3)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과 의심의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다인들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을 가르치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이 의심을 버리고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요한 6,47 참조)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표현 양식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 말씀은 앞서 6장 35절에서 언급되었는데, 여기에서 다시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나는 ∽이다”(그리스어: ‘에고 에이미’)는 요한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신원을 설명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 양식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빵’ 외에도 ‘세상의 빛’(요한 8,12; 9,5), ‘문’(요한 10,7), ‘착한 목자’(요한 10,11.14), ‘부활과 생명’(요한 11,25), ‘길’(요한 14,6), ‘참 포도나무’(요한 15,1)와 같은 상징적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나는 ∽이다”라는 표현 양식으로 예수님의 본질 자체를 규명하기보다 예수님과 인간 사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생명은 빵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지며,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믿음’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다인들의 잘못된 정보를 바로 잡아주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요한 6,48)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와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나’와 ‘생명의 빵’을 대조시킴으로써 ‘참된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환기하고, 더불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을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이 빵을 먹을 때 영원히 살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주실 빵은 예수님의 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의 살”(요한 6,51)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맞이할 죽음을 암시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누군가의 살을 먹는다”라는 양식이 적대적 행위를 표현하려고 은유적으로 사용되었다면(시편 27,2; 즈카 11,9 참조), 요한복음에서는 부정적 의미를 지닌 표현 양식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 지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빵을 주시는 분, 곧 생명의 주관자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제1독서에서 확인됩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 왕국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로서(BC 875-853) 아합 임금에 맞서 이교신 숭배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1열왕 17-19장, 2열왕 1장 참조) 그는 카르멜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을 벌이고 승리의 결과로 그들을 모두 죽였습니다.(1열왕 18,20-40 참조). 아합 임금의 아내 이제벨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격노하였고, 이에 엘리야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이제벨의 칼을 피해 시나이 광야(유다의 브에르세바)로 피합니다. 죽음의 위험에 처한 엘리야는 너무나 두렵고 고통스러운 나머지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열왕 19,4)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목숨을 거두시는 대신에 천사를 보내어 빵과 물로 그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으로 소개하면서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복적으로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계시의 반복은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오해 혹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시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전달되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보여준 불평과 불만의 모습은 우리에게는 반면교사입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과 친교를 맺을 수 있으며, 이 친교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08-1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게 된 투덜이 예언자 요나

더운 여름에는 공포영화가 제격이다. 서스펜스 영화의 달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어린 시절의 우연한 경험에서 연출의 바탕을 얻었다. 그는 어린 시절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부두에 있는 상선 숫자를 세어 자기 방의 벽에 기록하는 일을 즐겨 했다. 아들의 이상한 행동이 늘어가자, 아버지는 히치콕에게 친구인 경찰서장에게 편지를 갖다주도록 했다. 편지를 받은 경찰서장은 히치콕을 그대로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다. 유치장에 있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어린 히치콕은 긴장감과 불안, 공포를 경험했고, 풀려났을 때 느끼는 자유의 기쁨을 체험했다. 훗날 긴장과 공포에서 해방되었을 때의 후련한 기쁨이 온다는 것을 터득해 자신의 영화에 이용했다. 성경에서 여름에 볼만한 공포영화를 만든다면 단연 요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요나서는 한가지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의 계기가 됨으로써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이 흥미를 유발한다. 하느님께서 니네베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했을 때, 요나는 다른 예언자들처럼 줄행랑을 쳤다. 요나는 유다인을 억압했던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어쩌면 요나는 편협한 마음을 가진 애국자였다. 요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기꺼이 했지만, 사악한 니네베의 선교사가 되는 일은 단호히 거부했다. 요나가 탄 배가 커다란 폭풍우에 휩싸였고 이방인 선원들은 제비를 뽑아 요나가 폭풍우의 원인임을 알아냈다. 이방인 선원들은 심한 폭풍우 때문에 배가 망가질 판이 되자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 폭풍우는 즉시 잠잠해졌다. 하느님은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게 했고 요나는 사흘 밤낮을 꼼짝없이 그 안에 머물러야 했다. 요나는 물고기 배 속에서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고 사흘 후 나올 수 있었다. 요나는 니네베로 가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잿더미로 변한다며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자 니네베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에 들어갔다.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자 하느님께서는 계획했던 재앙을 거두셨다. 요나는 니네베가 망하지 않게 되자 하느님께 불평을 터뜨리며 화를 냈다. 요나는 성을 떠나 초막을 치고 아주까리 나무 그늘에 앉았다. 시원한 그늘에 기분이 좋았는데 이튿날 벌레가 먹어 그늘이 사라졌다. 해가 쨍쨍 내리쬐자, 요나는 더위에 기절할 지경이었다.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며 투덜거렸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아주까리 나무하나가 죽었다고 화를 내는 것을 지적하며, 니네베에 많은 사람과 가축이 있는 것을 상기시켰다. 요나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이 너무 크고 신비롭다. 인간은 편협한 생각으로 은총과 축복 속에 살면서도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메시지에 민감한 반응 보이는데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를 닫고 있는 처사에 일침을 가한 것이다. 구원에는 어떤 차별이나 특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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