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 새 대통령이 선출됐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대화와 타협, 이해와 관용을 통한 사회 통합일 것이다. 그동안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모든 국민이 극단적 대립의 양상을 보여왔다. 여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이권을 위해서 사람들을 갈라 세우려 했던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제21대 대통령 선거 당선인에게 드리는 축하와 당부’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정의와 참된 평화의 길을 걸어갈 믿음직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는 새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벽이 아닌 다리를 세우는 지도자’로서 공동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기를 희망했다. 이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도 원칙을 잃어버리지 않고 정의와 공동선을 위해 헌신해 달라는 요청이다. 세대와 성별, 지역에 따라 국민들을 가르며 혐오와 배제를 정치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했던 구태를 이제는 단호하게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국가 권력이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살피고 보호하는 것을 가장 첫 번째 의무로 여기기를 바란다. 모든 나라와 사회에서 정치와 문화의 성숙도를 드러내는 것은 취약 계층에 대한 사회적 보장의 수준이다. 소외되고 힘없는 이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국가 경제의 발전에 따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생계조차 유지가 어려운 절대적 빈곤의 정도는 완화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존재하며, 이른바 가진 이와 못 가진 이의 격차는 갈수록 극심하게 벌어져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고착되고 있다. 아직도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와 동행하고 빈부 격차를 완화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과 동행하는 정부가 되길 바란다. 새 정부가 주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이다. 지난 정부에서 우리는 남북 간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는 모습을 봐야 했다. 남북 관계는 남한과 북한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주변국들의 정세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실 그간 정부는 남북 관계의 회복보다는 대립과 강경 대응만을 추구해 왔다. 증오와 적개심이 아니라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아울러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기후위기 시대에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생태환경의 보호 정책이다. 무분별한 국토개발과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 정책 등은 기후위기 시대에 공동의 집 지구를 보호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의무에 반대되는 국가 정책 방향이다. 개발과 성장은 물론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지구 환경의 파괴에 대한 우려마저 외면하게 해서는 안 된다. 새 대통령과 새 정부에게 거는 기대와 희망은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절실하다. 공동선에 대한 무관심과 그릇된 권력욕과 집단적 이기주의 등이 결합될 때 민주적 헌정 질서와 법치, 사회 정의가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음을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 대통령과 정부가 이러한 국민의 우려와 기대를 잊지 않고 오로지 공동선과 국민의 권리와 행복을 지켜주는 데 헌신해 주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이 10년간 이어온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미사’가 100차를 맞이했다. 사회사목국 산하 위원회와 기관단체 주관으로 매월 마지막주 목요일에 봉헌되는 미사는 한국교회가 시대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어떻게 동행해 왔는지를 상기시키는 깊은 울림을 전한다. 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2014년)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난한 이들과 난민, 이주민을 향한 애틋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심과 사랑을 한국교회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응답이었다. 2015년 3월 ‘노후원전 지역민들과 미래세대를 위한 탈핵기원’을 지향으로 봉헌된 첫 미사 이후,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 난민과 이주노동자, 환경재난 피해자 등 우리 사회가 때로 외면했던 고통의 현장을 끊임없이 기도로 끌어안으며, 교회가 “세상의 상처를 만지는 치유의 손길”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전례로 드러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여전히 많은 이가 배제되고 소외받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주거권을 위협받는 빈곤층, 해고의 아픔 속에 고공 농성을 이어가는 노동자들, 정치적 갈등 속에 존엄성을 상실한 이들 모두가 교회의 기도와 실천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미사’는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 할 공동의 사명이다. 100번의 미사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한국교회가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와 더 깊이 연대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 넘쳐흐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 사회의 변두리로 나아가는 교회’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유지를 이어받아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응답하는 길을 함께 걸어가자.
2003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 최초로 공휴일에서 제외된 날이었다. 출근했던 고정원 씨는 저녁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와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다. 자신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던 것. 한참 후 범인이 밝혀지는데 그는 유영철이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불교 신자들이었는데, 그는 문득 죽기 전 아내가 “우리 함께 성당에 갑시다” 했던 제안을 떠올렸고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고 루치아노가 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도 허무하고 다친 마음은 위로받지 못했다. 그는 유영철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본 후, 이제 그 자신이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날마다 한강 다리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것은 선택할 여지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밤, 강물을 내려다보고 하염없이 절망의 눈물을 흘리던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러지 말고 용서해 보지 그래, 죽을 용기가 있다면 까짓거 못 할 것도 없잖아. ” 그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고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갑자기 죽고 싶지 않아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천사의 목소리라고 회상했다. 그는 몇 날을 고심한 끝에 유영철을 용서하기로 하고 법무부에 탄원서를 내고 유영철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를 양자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유영철의 아이들도 돌봐주겠다고 덧붙인다. 유영철도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고, 그는 한번 면회하러 가겠다고 했다. 내가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를 알게 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결심이 사람들에게 감동만 주었다고 믿는 분은 없으리라. 그는 ‘아버지는 미쳤다’고 말하는 딸들과 오래 불화했고 후일 살인 피해자 가족들의 맹비난에 직면한다. - 가톨릭은 사형제도 폐지 운동을 하고 있었고,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쓰려고 구치소 봉사단에 참가하고 있던 때였다. 가톨릭 교정사목위원회는 이 외에도 피해자 구제 모임 ‘해밀’을 운영하고 있었다. 교정사목위원회는 유영철과 고정원 형제의 만남을 주선하는 한편, 내가 만나고 있는 일반 사형수들과 해밀의 피해자와의 만남도 주선했는데, 유영철은 끝내 그 만남을 거부했다. 도저히, 자기가 죽인 살인자 피해자의 가족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이코패스로 유명한 그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걸까? ‘글쎄’ 싶었는데, 나중에 일반 피해자 가족을 만난 우리 사형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형수들 또한 자신이 직접 가해한 사람이 아닌데도 일반 피해자 가족과 만남이 있기 며칠 전부터 자신의 범행들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만남이 있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식은땀을 흘렸다고 했다. 영화 <밀양>의 그 위대한 문제 제기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나는 인간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를 만나 그렇게 뻔뻔하게 ‘나는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쓰려했다고 해도 취재 중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중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살인마 사이코패스 유영철의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닮은 사람들을 만들자" 하는 창세기를 떠올렸으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현인 양심“이라는 구절을 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구절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주의 기도’, 예수님 친히 가르쳐 주신 그 위대한 기도문에서 인간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어쩌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단 하나, 그게 아마도 ‘용서’이니 용서는 죽음마저도 이겨낼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드디어 처가에 왔다!” 제주도 서귀포 정난주 마리아 묘지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말했다. 황사영순교순례지 담당 민형기(안셀모) 신부다. 일행이 거들었다. “1801년에 헤어졌던 부부가 이백 년 만에 다시 만났네요.” 황사영(알렉시오)은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려다 발각돼 능지처참형을 당했고 아내 정난주와 아들 황경한은 제주의 관비로 유배당했다. 아들까지 관비로 살게 할 수 없었던 정난주는 추자도에 두 살배기 젖먹이 아들을 떼어놓는다. 37년간 유배 생활을 하면서 신앙의 모범을 보였고 ‘한양 할망’이라며 칭송을 받았던 정난주. 그래설까. 증거자 정난주의 묘는 일찍이 성지로 조성되었고 이름을 딴 순례길과 성당도 있다. 반면 순교자 황사영은 1980년에야 묘를 발견했으며 의정부교구가 성역화를 시작하는 단계다. 입구조차 찾기 힘든 황사영 묘와 다르게 정난주 묘는 공원처럼 잘 정비돼 있다. 진입로에 야자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커다란 십자가 너머로 푸른 바다가 넘실대는 모습은 제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성지에서 미사를 드린 후 모슬포성당까지 약 4km를 걸었다. 제주교구 순례길 중 고통의 길이라 불리는 ‘정난주길’의 일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훈련장과 4·3 사건 때 주민을 가두었던 고구마 저장창고 등 아픈 역사를 간직한 장소도 만났다. 순교지를 순례하는 것은 고통의 발자취를 더듬는 여정이다. 가뜩이나 고달픈 인생인데 일부러 순교지를 찾아가 선조들의 고통과 희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에 가면 희망의 뿌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순교는 희망을 가장 설득력 있게 증언하는 사건이다. 정난주는 낯선 유배지에서 선행과 친절을 베풀며 신앙의 씨앗을 심었다. 지난한 삶을, 주님을 뵈러 가는 관문으로 알고 희망 속에 살았다. 그러자 신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제주에 복음화의 빛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200여 년이 지난 어느 봄날 그 빛을 되새기는 여정에도 하느님 사랑이 가득했다. 제주에서 만난 따뜻한 마음마다 우정과 환대가 빛나고 있던 것이다. 제주교구 평협 임원들에게, 방문객과 동행하는 이 시간보다 더 중요한 건 없어 보였다. 늘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지 않나,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안달하질 않나. 3일 여정이 끝나고 공항에서 헤어지는데, 꼭 친정 식구들과 이별하는 것처럼 서운했다. 9월에 의정부교구 황사영 순교순례지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없다면 발걸음을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가 다시금 삶이 고단하다 느껴질 때면 나는 친정과도 같은 제주를 떠올릴 테다. 교우들과의 만남과 순례지의 추억 안에서 기어이 희망을 건져 올릴 것이다. 그렇게 친정을 하나둘 늘려가는 것도 좋겠다. 제주에는 ‘한양할망’ 정난주가, 의정부에는 ‘신앙만이 세상을 구하는 약’이라 믿은 황사영이 있다. 그들을 만나러 길을 떠나자고 재촉하는 희망이 우리 안에 있다. 글 _ 정신후 블라시아(작가·의정부교구 파주 목동동본당)
남김없이 피고 지고 Amdo Tibet, 2012. 야크 젖을 짜던 스무 살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러 천막집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지상에 잠시 천막을 친 자이지요. 이 초원의 꽃들처럼 남김없이 피고 지기를 바래요. 내가 떠난 자리에는 다시 새 풀이 돋아나고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아이들이 태어나겠지요.” 충만한 삶이란, 축적이 아닌 소멸에서 오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 삶의 목적은 선물 받은 하루하루를 남김없이 불살라 빛과 사랑으로 생의 도약을 이루는 것이 아니던가. 박노해 사진 에세이 「다른 길」 수록작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박노해 시인 상설 사진전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아일랜드는 한때 ‘비의 땅’이라 불렸다. 연중 절반은 비가 내리고, 안개 낀 하늘이 일상이던 곳. 그런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뜨거운 햇살을 일상으로 맞이했다. 푸른 하늘이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현지인들조차 ‘이례적인 날씨(Unusual Weather)’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상기후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뉴스는 아일랜드 일부 강과 호수에 녹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청정지역의 상징이던 곳에 이상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단지 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기온과 수온 상승, 농업 폐수, 산업 오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흐르던 물이 고이면, 생명의 물은 곧 죽음의 물이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맑은 물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세례의 상징이며, 내면 정화의 은총이며,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다. 그 물이 병들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침묵이 깊어만 간다. 맑디맑은 물의 침묵 속에 이는 경고음을 듣는다. 비슷한 시기, 4월 말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역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수 시간 동안 국가 전체가 멈춰 섰다. 열차는 멈추고 공항은 마비되었으며, ATM과 통신도 끊겼다. 마트는 생필품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도로는 멈춘 차량으로 가득 찼다. 원인 중 하나로 기후로 인한 대기 진동이 지목됐다. 포르투갈 전력 당국은 “스페인의 극심한 온도 변화가 드문 대기 현상을 일으켜 정전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자, 전력이라는 문명의 축도 한순간 붕괴된 것이다. 스페인은 전체 전력의 60% 이상을 풍력과 태양광에 의존하는 재생에너지 선도국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단지 전력만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우리가 누리는 시스템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기후의 요동은 제도와 문명, 일상과 신앙까지 흔들어 놓는다. 선종하신 교종 프란치스코는 권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에서 “아무리 부정하고 숨기며 위장하거나 상대화하려고 하여도, 기후 변화의 표징들은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5항)고 하셨다. 이 말씀은 통계나 분석이 아니라 영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경종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 그러므로 하느님의 땅에 대한 책임은 지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자연의 법칙과 이 세상의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섬세한 균형을 존중해야 함을 의미한다.”(62항) 하늘이 맑다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자연의 질서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고통받는 것은 취약한 존재들이다. 수도자의 삶은 본래 자연과의 조화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도와 노동이 하나 되는 삶은 자연의 리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아프면 기도도, 노동도 고통스러워진다. 이 시점에서 절실한 것은 단순한 에너지 전환이 아니라 마음의 전환이다.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을 내려놓고 자족하는 삶을 익혀야만 한다. 물과 흙, 공기와 햇빛을 ‘자원’이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공동 피조물’로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이 필요하다. 태양과 달을 형제요 자매로 부르던 성 프란치스코의 눈길 위에 간절한 염원이 담긴 실천 하나가 절실하다. 지구가 보내는 이상 징후, 이 지속되는 새로운 사태 앞에서 침묵으로 응답하며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침묵으로 답하며 움직이는 이들의 깊은 탄식과 소리 없는 외침은 희망이 된다. 그 침묵의 응답은 작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며, 고요히 고통받는 피조물들과 연결된 연대의 실천이다. 더 많은 소비의 흔적이 아닌 더 깊은 책임의 자취이다. 그리고 그 자취 위에 희망의 씨앗을 뿌려 꽃을 피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 모두의 몫이 되었다. 글 _ 이은주 마리헬렌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3년 전부터 다큐멘터리 감독인 남편과 함께 전남 동부지역으로 촬영을 다닌다. 지금은 그저 인적 없는 고갯길이고 갈대 흔들리는 강둑이나 시골의 초등학교 운동장인 곳들. 그 한쪽 곁엔 표지판이 서 있다. ‘여순1019사건’ 유적지임을 알리는 표시다. ‘경찰은 이곳에서 주민 30여 명을 네 차례에 걸쳐 학살했다.’ 광양시 옥룡면에 있는 이 작은 표지판은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말해준다. 무심코 지나쳤을 공간에서 시간을 본다. ‘기억은 평범한 순간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나중에야 그들이 남긴 상처에 의해 기억된다’는 크리스 마크의 말처럼 평범하지 않은 순간이 남아 있는 공간, 그 상처들이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10여 년 전, 남편은 혼자서 한국과 일본에 남겨진 터널과 굴, 참호와 진지, 탄광을 찾아다녔다. 컴컴한 지하에 들어가서 별로 찍을 것도 없는 굴 속을 촬영하기 시작한 지 4년, 대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따라가 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지하 공간에 살았던 또 일했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그곳엔 사람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온천으로 알려진 관광지인 일본 미이케 탄광. 그곳은 92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어 가혹한 노동으로 비참한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나가사키의 하시마섬과 조선소도 마찬가지다. 그곳뿐 아니었다. 아름다운 제주도의 오름 360여 개 중 120여 개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결호작전’의 지하 진지였다. 송악산에도 수월봉에도 일출봉에도 제주도민들의 노동과 굶주림과 고통으로 만들어낸 지하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제주도는 그야말로 온 섬이 눈물 구멍이었다. 내가 선 땅의 시간을 알아가면서 그 공간들이 새롭게 보였다. 그 시간이 모두 지나갔다고 해서, 그저 웃고 먹고 떠들며 놀다 올 수는 없었다. 우리가 두 발 디디고 선 이 땅, 저 아래는 우리가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지만 이 땅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시간이 남겨져 있다. 마을 입구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의 나고 자람을 지켜보며 나이테를 넓혀왔듯이, 이 땅에도 그 위에서 살던 사람들의 시간이 스며들며 쌓여왔다. 어떤 땅은 슬픔이 가득 차 있고 어떤 땅은 한이 서려 있고 어떤 땅은 축복이 깃들어 있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땅, 그 공간의 시간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슬픔이 있다면 위로를, 한이 있다면 해원(解冤)을, 축복이 있다면 감사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 공간의 맨 끝, 시간의 겹 맨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그 끝에, 그래서 맨 앞이 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슬픔과 한이 서린 공간에 가게 된다면, 먼저 그 공간의 시간을 기억해야 한다. 전부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더듬어 살필 수 있는 역사, 특별한 사건은 기억하고 충분히 애도하는 것. 그것이 맨 앞에 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러고 나서 그곳을 오래 걷거나, 풍경을 감상하고 또 즐거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 새로운 시간을 그 공간에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슬픔의 시간이 모두 흘러넘치도록 말이다. 우리는 공동의 사건을 기억하며 위로하기 위해 표지와 기념의 장소를 만든다. 아프고 억울한 사회의 공동 기억은 지우거나 잊는 것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함으로써 치유되기 때문이다.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꼭 13년 전이던 2012년 6월 ‘평양교구 신우회’ 총무로 일하던 김만복(로사) 씨를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80세였다. 평양에서 기차 한 정거장 거리인 평안남도 서포에서 태어난 분이다. 6·25전쟁 중 1950년 12월 7일 대동강을 건너 월남해 남대문시장에서 평생 장사를 하며 건실하게 살았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 자택에서 만났을 때, 서포와 평양이 함께 나오는 위성 지도를 손에 들고 어릴 적 고향과 성당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설명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13년 만에 평양교구 신우회를 다시 취재하며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평양교구 1세대 신자들은 대부분 선종했거나 생존해 있어도 외부 활동은 어렵다고 한다.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 문화관 소성당에서 매월 넷째 주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리는 평양교구 신우회 정기미사에는 자제들 위주로 10명 정도가 모이고 있다. 평양교구 신우회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외형적으로 작아진 것보다 더 큰 변화는 한국 사회가 갖는 통일에 대한 당위성과 열망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평양교구 신우회를 지도하는 장긍선(예로니모) 신부가 “제일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라고 했던 말이 크게 다가왔다. 분단 80주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남한과 북한이 한 민족, 한 나라였고 그렇기에 다시 하나가 돼야 한다는 사실조차 낯설게 받아들이거나 심지어 거부하는 청년들도 많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평양교구 신우회는 교회 안에서 분단과 6·25전쟁의 아픔을 가장 크게 안고 있는 단체다. 평양교구 신우회를 바라보며 남과 북이 다시 만나고 궁극적으로 한반도가 하나의 나라가 되는 꿈을 꾸게 된다.
교회는 매년 6월을 예수 성심 성월로 지낸다. 특별히 그 거룩한 날 중 하루를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로 기념한다. 한국 주교회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이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해 모든 하느님 백성이 사제직의 존엄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도록 했다. 오늘날 교회는 사제직과 관련해 많은 고민을 안고 있다. 그중 하나는 가톨릭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어 온 성직자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다. 그러나 거룩한 성사를 집행함으로써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재현하는 사제직의 존엄함이, 성직주의에 대한 비판 속에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 심화되는 사제 성소의 부족은 교회 생활과 신앙 생활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제 수가 급감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사제 지망자의 감소로 인해 원로 사목자의 비율은 높아지고, 사제단의 고령화 현상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사제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고, 완전한 성덕을 향해 나아가며, 교회와 세상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분이다. 사제들 스스로 성덕을 향한 자신의 소명을 철저히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특별히 신자들은 사제직의 존엄함을 잊지 않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와 정성으로 함께해야 한다. 사제 성화는 단지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공동체 전체가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동반하며 지지할 때,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성심성월을 맞아, 우리 모두가 사제 성화를 위한 기도의 불을 다시 밝히자.
올해 우리는 광복 80주년을 맞이하며 기쁨과 아픔이 교차하는 역사의 경계에 서 있다. 해방은 완전한 독립을 뜻하지 못했고, 분단은 지금껏 민족의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의 비상계엄 사태와 그 여파는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과 불신이 얼마나 깊은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이 뿌리 깊은 분열과 증오의 시대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남북의 긴장, 사회의 이념적 대립, 정치적 갈등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분단 80년의 잔재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분열을 넘어서려는 첫걸음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는 용기’이며, 이는 복음에서 비롯된다. 희망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실천의 동력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지막 부활 우르비 엣 오르비에서 “사랑이 증오를 이겼고, 빛이 어둠을 이겼으며, 용서가 복수를 이겼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은 이 부활 신앙 안에서 화해의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다. 오늘날의 평화는 제도나 법 이전에, 서로를 돌보는 일상적 선택에서 시작된다. 광장보다 가정에서, SNS보다 침묵의 기도에서 우리는 평화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선포한 희년의 정신, ‘희망의 순례자들’처럼 우리는 갈등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갈등의 경계에 서 있는 침묵하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꺼지지 않는 희망을 품고,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함께 내딛는 것이다. 이 땅의 진정한 해방은 그때에야 완성될 것이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공주였다고 한다. 아름답고 총명한 그녀를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가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거절했으나 아폴로는 그녀에게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예언의 능력을 주며 그녀를 유혹한다. 그러나 그 예언의 능력을 받고도, 그녀는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신은 불멸이고 늙지 않는데, 자신은 인간이고 늙고 죽으니 그 결과는 비참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젊은 그녀가 이 당연한 것을 알고 있다니 놀랍다. 대개 젊은 아가씨일 경우, 얼굴이나 성격이 맘에 안 들어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가 아닌가. 그러니 어쩌면 그녀가 아폴로에게 능력을 받기 전에 이미 예언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어쩌면 예언이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 아무튼 이 신의 아들은 화가 났으나, 한번 부여해 준 예언의 능력은 철회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카산드라의 입에 침을 뱉으며 자신이 사랑하며 축복하던 그 입으로 저주를 내린다. “그래 너는 올바른 예언을 할 것이다.하지만 아무도 너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카산드라는 아름다워서 사랑을 받았다가 총명했기에 신의 사랑을 거부하자 바로 그 이유로,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형벌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고독과 고통의 터널로 영원히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나라와 함께 멸망하여 목숨을 잃는다. 일전에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라는 책에도 썼지만, 몇 년 전 예루살렘 광장에 섰을 때 나도 카산드라를 떠올렸었다. 내가,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내가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거기서 군중에게 돌에 맞아 죽은 스테파노 성인을 생각했고, 이곳에서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벌이던 젊은 예수를 떠올렸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구세주를 환영하던 그 군중들이 며칠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했던 그 군중으로 변해버렸던 것을. 하지만 또 생각해 본다.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것도 분명 저주이지만 어떤 사람이 거짓만 말해도 열광하는 군중이 있다는 것도 엄청난 저주라는 것을 말이다. 이미 인류의 역사는 우리 모두를 비극으로 이끌어 가던 이런 종류의 열광을 수도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만일 두 기로에 서 있다면 어떨까. 만일 둘 중에 너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 묻는다면 말이다. 스테파노 성인 혹은 이 땅과 온 세상의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 그들이 겪은 육체적 고난보다 더 고통스레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들의 외로움이었다. 언제나 그것이 나를 더 많이 울렸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어둡고 절망적인 책이 아니다. 요나가 있고 니느웨의 군중들도 있다. 그곳의 군중들은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했고 절제하기 시작했기에 멸망의 예언을 거슬러 구원받았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말하자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치다가, 예언자의 말을 듣고 깨달아 “호산나”라고 외친 것이다. 어떤 순서를 밟을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예수에게 외쳤던 내 지난날은 변화할 수 있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 ” 하고. 그러나 나에게 그것은 반드시 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거짓을 말해도 열광 받으며 이 지상의 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힘겹지만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결심,“이의 있습니다” 하고 말해야 하는 용기. 그리하여 홀로 있는 시간에 “주님 저는 많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당신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라는 결심을 말이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당진본당 늘푸른 성서대학은 5월 15일 해미순교자국제성지를 순례했다. 성지에 도착한 어르신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 곁을 떠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조각상을 마주한 후부터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성전에서 성지소개 영상 관람이 있고 난 뒤 11시에 여러 본당의 많은 순례객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가 시작되었다. 성지 전담 한광석(마리아 요셉) 신부는 강론 중에 “해미순교자국제성지는 한국교회 최초이자 유일의 국제성지로 교황님의 이름으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성지로는 드물게 생매장 순교터와 묘가 함께 있는 곳으로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함께 묵상할 수 있다”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인 힘과 용기를 이번 순례를 통하여 얻길 희망한다"고 했다. 아울러 그의 저서 「그런 하느님은 원래 없다」라는 책을 소개하며 책 첫머리에서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라는 니체의 말을 좋아하며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순교자의 무덤을 형상화한 원형 모양의 성지기념관에는 순교 당시 모습을 담은 조각과 판화, 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가 안치돼 있었다. 오른편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진둠벙’이 있었다. 생매장마저 번거롭다고 포졸들은 개울 한가운데에 신자들을 둠벙(웅덩이)에 빠뜨려 죽인 것이다. 오후에는 조선 박해시기 내포지역의 수많은 신자가 잡혀 와 고통받은 해미읍성을 찾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는 1000여 명의 믿는 이가 목숨을 잃은 곳이다. 읍성 남문을 들어서니 성안은 평온하다. 저 멀리 다른 나무보다 훨씬 큰 회화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충청도 사투리로는 ‘호야나무’라고 한다. 300년 넘은 거목에는 ‘옥사에 수감된 신자들을 끌어내 동쪽으로 뻗어있던 가지에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으며 지금도 철사가 박힌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회화나무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있다. “8월에 연황색 꽃이 새 가지 끝에 달리며 열매는 9~10월에 노랗게 익는다.” 거룩한 영혼들은 모두 부활해 떠났고 지금은 고요한 평화가 깃든 해미읍성에는 순교터와 증거터가 여러 곳에 있어 교육 효과가 큰 곳이며 넓은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어서 노약자나 어린이도 어렵지 않게 도보로 순례할 수 있는 편안한 곳이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 25,34) 글 _ 김윤구 미카엘(대전교구 당진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