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하늘땅물벗’ 생태사도직 활성화를 기대한다

기후위기 극복은 인류 최대의 과제다. 우리나라도 전례 없는 폭염과 가뭄, 태풍, 홍수, 산불 등을 통해 극심해지는 기후위기의 영향을 체험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교회 역시 인간의 생태환경 훼손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창조질서의 보전이 신앙적 소명에 속함을 가르쳐왔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자연생태계의 보호가 인간과 사회 생태계의 보호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통합적 생태론을 선포했다. 생태사도직 단체인 ‘하늘땅물벗’ 한국협의회는 10월 9일 서울 명동에서 제1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59개 본당 89개 단체가 참여한 이날 대회는 처음으로 전국의 모든 하늘땅물벗 ‘벗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생태사도직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다짐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늘땅물벗’은 그 유래가 깊다. 교회 환경운동이 처음 태동한 90년대 초 생태적 회개를 바탕으로 창조질서 회복을 지향하며 결성된 이 단체는 창립 이후 다소간의 침체기를 거쳤지만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이후 다시금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모든 사도직 활동이 그러하듯, 생태사도직 역시 교회의 모세혈관이라고 할 수 있는 본당에서의 활동이 관건이다. 보편교회의 창조질서 보전에 대한 굳건한 의지는 본당에서의 왕성하고 적극적인 생태사도직 활동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이번 전국대회가 본당은 물론 교회 내 기관 단체, 수도회와 교육 기관 등 모든 영역에서 생태사도직 활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전교 주일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며 부여하신 선교 사명을 되새기고, 이 숭고한 사명에 투신하고 있는 선교사와 선교 지역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돕기 위해 마련된 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제98차 전교 주일을 맞아 발표한 담화문에서 ‘가서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여라’(마태 22,9 참조)는 성경 말씀을 주제로 모든 사람에게 ‘가서’ 그들을 ‘초대하라’고 권고했다. 교황은 또 시노드 정신은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며 선교 또한 항상 시노드적이라며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선교적 교회가 되기를 권고했다. 복음 선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 직접 수여받은 본질적인 사명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복음 선포는 자랑거리도 아니며,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불행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전교를 압박이나 강요, 개종의 방식으로 잘못 이해하지는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올해 전교 주일 담화에서 인용한 성경 말씀에서, 임금은 종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가서 그들을 혼인잔치에 ‘초대하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강요하지 않고 초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대로,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준다.”(「복음의 기쁨」 1항 참조) 우리는 우리 안에 복음의 기쁨을 가득 채워 흘러넘치게 해야 비로소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교 주일을 맞아 우리 안에 복음을 채우고 이를 이웃에게 선포해야 하는 신앙인의 소명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사설

‘하늘땅물벗’ 생태사도직 활성화를 기대한다

기후위기 극복은 인류 최대의 과제다. 우리나라도 전례 없는 폭염과 가뭄, 태풍, 홍수, 산불 등을 통해 극심해지는 기후위기의 영향을 체험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교회 역시 인간의 생태환경 훼손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창조질서의 보전이 신앙적 소명에 속함을 가르쳐왔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자연생태계의 보호가 인간과 사회 생태계의 보호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통합적 생태론을 선포했다. 생태사도직 단체인 ‘하늘땅물벗’ 한국협의회는 10월 9일 서울 명동에서 제1회 전국대회를 개최했다. 59개 본당 89개 단체가 참여한 이날 대회는 처음으로 전국의 모든 하늘땅물벗 ‘벗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생태사도직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다짐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늘땅물벗’은 그 유래가 깊다. 교회 환경운동이 처음 태동한 90년대 초 생태적 회개를 바탕으로 창조질서 회복을 지향하며 결성된 이 단체는 창립 이후 다소간의 침체기를 거쳤지만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이후 다시금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모든 사도직 활동이 그러하듯, 생태사도직 역시 교회의 모세혈관이라고 할 수 있는 본당에서의 활동이 관건이다. 보편교회의 창조질서 보전에 대한 굳건한 의지는 본당에서의 왕성하고 적극적인 생태사도직 활동을 통해 구현될 수 있다. 이번 전국대회가 본당은 물론 교회 내 기관 단체, 수도회와 교육 기관 등 모든 영역에서 생태사도직 활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24-10-20
방주의 창

존재의 거룩

10월 쌀쌀해진 어느 날 새벽, 살아 숨 쉬는 아기를 상자에 담아 내려놓고 돌아서는 한 어머니가 있다. 이렇게 하는 어머니들의 아픈 마음을 다 알기란 어렵다. 건강한 아기도 있고,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기나 뇌성마비가 온 아기도 있다. 심주희 어린이를 만난 수많은 이들이 물었다. “주희가 고통이 저렇게 심하다면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주희에게는 더 좋지 않을까요?” 그는 1981년 2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았고, 지체 장애와 언어 장애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놔두고 가출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뇌성마비로 자율신경의 조절 기능을 상실한 그에게는 강직성 마비증세가 나타났다. 한쪽 어깨를 움직이면 양쪽 팔이 탈골돼 고통을 겪곤 했다. 말 한 마디에도 몸이 울려 고통을 겪었다. 한 번 자극을 받으면 주희의 등은 활처럼 휘어졌다. 거꾸로 휘어지는 등. 자세 교정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주희는 그 격렬한 고통으로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혼자 8년을 돌보며 지내다가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를 버렸다. 그런데 주희가 꽃동네에 오고 나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꽃동네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자원봉사를 청했다. 그의 청은 받아들여져서 부녀가 함께 꽃동네에서 행복하게 살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꽃동네 사람들은 염려했다. 아프고 힘들 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가 없어지면서, 더군다나 이번까지 부모에게 세 번이나 버려지는 상황에 직면해서, 그가 겪을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깊을까 걱정하면서 너무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수선화 같은 그 고운 미소를 잃지 않고’ 하루하루 날들을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수도자인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자매회 신상현(야고보) 수사가 물었다. “너를 세 번씩이나 버린 부모가 밉지 않니?” 그러자 그는 온 존재로 내는 한 마디 한 마디 말들을 모아 경어로 답했다. “선생님, 전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어디 계시든지 잘 사시라고요. 요즘은 기도를 하다 보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예요.” 주희는 1995년 4월 4일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급성호흡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음을 맞기 전 자기를 돌보기 위해 온 신 수사에게 늘 그렇듯 경어로 말했다. “선생님, 엄마 아빠 한 번만이라도 꼭 보고 싶어요.”, “너를 버린 미운 사람들인데도?”, “그래도 엄마 아빠예요. 부모님 용서는 벌써 했어요. 그런데 욕심이 생기는지 자꾸만 보고 싶어져요.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요.” 그는 끝내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귀천하고 장례식이 있던 날, 그의 아버지가 왔다가 장례가 끝난 뒤에 그가 사랑한 딸 심주희 그를 가슴에 품고 다시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심주희, 그는 자신의 온 존재, 고통으로 점철된 자신의 온 삶으로 우리에게 탄생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삶은 ‘한 상태’, 고통보다 축복이 더 큰 상태라는 것을 증거했다. 이 신학적 진리를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탄생(삶) = 상태(축복 > 고통)’ 한 존재가 자기 존재의 원뿌리에 닿아서 부르는 존재의 노래, 저 탄생과 삶의 진리를 증거한 증거자 심주희가 죽기 직전 갈망으로 애타하며 말했다. “욕심이 생기는지 자꾸만 보고 싶어져요.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요.” 자기 존재를 매개해 준 그 존재에 대한 그리움, 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한 존재의 충만을 향한 갈망, 이것이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거룩한 갈망이고 그 자체로 ‘엄청난 축복’인데, 우리는 심주희처럼 자신의 이 같은 갈망을 알고 사는가?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10-20
독자마당

[독자마당] 미국 녹스빌에서 만나는 김대건 성인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미국 테네시주에 위치한 녹스빌이다. 이곳의 한국인 가톨릭신자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매달 첫째 주, 셋째 주에만 한인 미사를 드릴 수가 있다. 다행히도 2시간 반 거리의 내슈빌 한국순교자본당에서 사목하시는 이영승(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이 우리 공동체에 와 주셔서 이곳 Most Sacred Heart 주교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Most Sacred Heart 주교좌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아름다운 성당 모습에 반하며, 이렇게 멋진 곳에서 30명 남짓 작은 공동체가 미사에 참례할 수 있다는 것이 늘 너무 황송하다. 이런 감사한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우리 순교 성인들의 희생과 한국 가톨릭 역사의 특별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가톨릭 역사를 볼 때, 한국천주교회는 스스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운 유례없는 경우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이곳 미국 가톨릭교회에서도 매해 순교자성월이 되면, 한국의 103위 성인을 기억하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으니 말이다. 평소 내가 다니는 현지 성당인 St. Mary 성당 달력의 9월 이미지에는 한국 103위 성인의 그림과 기도문이 들어있다. 그리고 우리 공동체가 한인 미사를 드리는 Most Sacred Heart 성당의 돔 천장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마리아, 요셉이 가장 윗부분에 그려져 있고, 바로 밑에 다른 여러 성인과 함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형상이 그려져 있다. 미국 가톨릭교회의 다양한 나라 공동체 대표 성인들을 표시한 것인데, 우리 한국 공동체의 대표 성인으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한인 미사를 봉헌하러 갈 때마다 한복 입으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바라보면서 항상 감사 기도와 성인의 전구를 청하게 된다. 우리 가톨릭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과 가르침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 가톨릭교회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순교자들의 신앙은 이렇게 타국에서 살아가는 우리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밝은 등불로 우리 신앙생활을 비춰 주시고 모범이 되어 주시는 순교 성인들에게 감사 기도를 드린다. 글 _ 정현주 로사(미국 녹스빌 한인 천주교 공동체)

2024-10-20
현장에서

“우리말이 참 아름답죠?”

“우리말이 참 아름답죠?” 10월 12일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제20회 심포지엄 중 황경훈(바오로) 박사가 발표 중 한 말에 수원교구청 강당이 웃음바다가 됐다. 이유인즉 앞서 3번의 발제가 필리핀·대만·인도네시아에서 온 이들의 발표였기 때문이다. 동시통역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어가 모국어인 대부분의 참가자들에게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 신학 발표는 가뭄의 단비 같았던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외국어는 아무래도 답답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좋지 않은 번역이라면 원문을 보는 것만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이번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도 번역가의 노고를 치하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작품이 아무리 좋은들 이를 와 닿지 않게 번역했다면 노벨문학상은 요원했을 것이다. 좋은 번역의 중요성은 비단 노벨문학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 신학도 좋은 번역이 중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부들이나 성인들의 말씀도, 그리고 2000여 년에 걸쳐 쌓아온 신학연구도 대부분 우리말이 아니다. 언젠가 한 신학자가 유학 당시를 회고하며 “현지인들은 단어만 들어도 쉽게 이해되는 개념을, 우리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고 익혀야 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좋은 번역이 있었다면 그도 그런 어려움이 적었을 터다. 위대한 신학 작품들을 좋은 번역으로 만날 수 있다면 우리 신학계의 저변이 넓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한국가톨릭학술상 본상으로 번역 작품들이 선정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지금 나오는 좋은 번역을 딛고 언젠가 아름다운 우리말로 신학을 하는 것이 더욱 자유로운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2024-10-20
사설

모든 이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전교 주일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며 부여하신 선교 사명을 되새기고, 이 숭고한 사명에 투신하고 있는 선교사와 선교 지역을 물질적, 정신적으로 돕기 위해 마련된 날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제98차 전교 주일을 맞아 발표한 담화문에서 ‘가서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여라’(마태 22,9 참조)는 성경 말씀을 주제로 모든 사람에게 ‘가서’ 그들을 ‘초대하라’고 권고했다. 교황은 또 시노드 정신은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며 선교 또한 항상 시노드적이라며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선교적 교회가 되기를 권고했다. 복음 선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 직접 수여받은 본질적인 사명이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복음 선포는 자랑거리도 아니며,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불행할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전교를 압박이나 강요, 개종의 방식으로 잘못 이해하지는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올해 전교 주일 담화에서 인용한 성경 말씀에서, 임금은 종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가서 그들을 혼인잔치에 ‘초대하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강요하지 않고 초대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대로,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준다.”(「복음의 기쁨」 1항 참조) 우리는 우리 안에 복음의 기쁨을 가득 채워 흘러넘치게 해야 비로소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교 주일을 맞아 우리 안에 복음을 채우고 이를 이웃에게 선포해야 하는 신앙인의 소명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2024-10-20
일요한담

1811년 「동국교우상교황서」의 감동

지난 2024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 연구차 대만 중앙연구원에 머물렀다. 「신미년백서」로 더 알려진 「동국교우상교황서」(東國敎友上敎皇書)란 필사본의 원본을 확인하고, 주변 자료를 더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중앙연구원 부사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간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누구도 실물은 보지 못한 듯했다. 이곳 도서관에서도 희귀본으로 분류되어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라는 것을 어려운 절차를 거쳐 굳이 원본을 꺼내서 여러 날 살폈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1801년 황사영 체포와 함께 백서가 압수되면서 신유박해 당시의 가장 생생한 증언은 통째 의금부 창고로 들어갔다. 초토화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 교회에 알려 도움을 청하려는 절박한 심경으로 10년 뒤인 1811년에 북경 주교와 로마 교황님께 올린 탄원서가 한문 원문으로 이 책 속에 들어 있다. 당시 글의 작성자는 황사영 백서를 보지 못해, 이 탄원서 속 조선 교회에 대한 기술은 그 이후에 전해 들은 것을 수습한 것이었다. 사제 파견 요청과 함께 신유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사적을 자세히 적고, 당시 조선 교회의 처지를 탄원하였다. 교황님께도 따로 편지를 써서 그 글을 교황청으로 보내줄 것을 북경 주교에게 요청했다. 책 뒤쪽에 북경 주교의 답장과 조선 교회의 재답장이 실려 있다. 이중 교황님께 보낸 자료는 윤민구 신부에 의해 한문 원본이 로마에서 확인되었고, 북경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포르투갈, 이태리어 번역본만 찾아냈다. 한문으로 된 원래 글은 오직 이 책에만 남아있다. 뒤쪽의 두 통 편지도 여기에만 실린 것이다. 대만의 교회사 연구의 대가인 고위녕 교수를 만나 여쭈니, 원래 상해 서가회 도서관에 있던 것이 중국 공산화 당시 예수회 자료가 필리핀 마닐라로 소개될 때 그리로 갔다가, 1960년대 초에 한문 자료만 대만에서 개교한 예수회 소속 보인대학으로 다시 보내져서 대만에 남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린 대만의 황덕관(黃德寬) 신부는 1985년 보인대 신학논집에 발표한 「한국교우와 한국천주교」라는 논문에서 1985년 당시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시복식 미사의 감동적 장면을 묘사하면서 한국 교회사와 이 책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원본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연필로 공책에 메모를 거듭하였다. 여주 지역 순교자들의 이름이 유독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지역 신자가 작성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유사정(兪斯定)의 이름으로 보낸 네 번째 편지를 보고는 유스티노라는 본명을 썼던 조동섬의 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귀국 전 대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학연구중심의 주최로 이 자료를 가지고 발표를 했다. 대부분 이 책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던 터라 도서관장과 관련 학자들이 참석해서 큰 관심을 표시했다. 처음 이 자료를 세상에 알렸던 황덕관 신부가 중국을 통해 서학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가 200년 만에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발전을 이룬 것을 보며 우리는 왜 저들처럼 못하나 하며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던 논문 속의 목소리가 오래 생각 속에 맴돌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0-20
사설

군종교구의 활동에 기도와 관심을

군일 주일이다. 한국교회는 1968년부터 해마다 10월 첫 주일을 ‘군인 주일’로 지내오다 2023년부터는 10월 둘째 주일에 군인 주일을 지내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관심과 지원으로 군종 사제들은 종교를 초월해 모든 군인들의 영혼을 돌보며,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군종교구는 ‘선교의 황금 어장’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청년 영세자를 배출했다. 우리나라 20대 초중반 남성 영세자의 90%가 군대에 입대해 신자가 됐다. 하지만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청년들의 수는 갈수록 줄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여파로 군종교구는 어느 교구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고, 병영 문화 선진화로 군인들의 휴대전화 사용 및 병영 내 다양한 문화생활이 허용되자 종교활동에 대한 관심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군종 사제들은 전국에 흩어진 군성당을 다니며 병사들을 만나고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올해 군인 주일 담화에서 군종교구장 서상범 주교가 성경에서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고,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3,6)라는 구절을 인용한 대로, 전역 후 각 본당으로 돌아갈 신앙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종교구가 뿌린 신앙의 씨앗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온 교회의 책임과 노력이 필요하다. 서 주교는 무엇보다도 기도와 관심을 요청했다. 한국교회에 젊은 피를 공급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목활동을 하는 군종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청년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지원하자.

2024-10-13
사설

가톨릭학술상 수상자들에게 축하를

가톨릭학술상 수상작들이 발표됐다. 올해로 제28회를 맞은 가톨릭학술상은 척박한 한국교회의 학문 연구 풍토 속에서도 교회 학문의 발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연구자들을 발굴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올해 학술상 본상 수상의 영광은 「교부학 사전」을 번역해서 펴낸 노성기 신부와 하성수, 최원오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간행된 「교부학 사전」은 교부들과 연구 주제들, 관련 연구서 등에 관한 문헌학적 정보를 사전식으로 묶은 것이다. 1283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교부들의 가르침을 쉽게 접하도록 한 공로가 크다. 본상 외에 연구상과 번역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토빗기」와 「마르코가 전하는 기쁜 소식」 역시 그 학술적 가치와 문체의 유려함 등으로 학술상 수상작으로서 부끄럼이 없는 역작들이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공로상을 수상한 정달영 신부의 업적도 눈길을 끈다. 다시 한 번 수상자들에게 그 노고에 대한 심심한 감사와 축하의 뜻을 전한다. 학술 연구는 비록 직접적인 실용성으로 가늠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교 교회의 발전은 신앙과 함께, 복음의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 지성의 활동으로서 학술 연구에 그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학술과 학문 연구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신앙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와 문명의 발전과 성숙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학술상 수상자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전하며 가톨릭학술상이 한국교회 학물 발전에 더 큰 자극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024-10-13
방주의 창

은행나무와 가을

몇 년 전에 수녀원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아주 불쾌한 목소리로 수녀원 마당에 심어진 은행나무 때문에 냄새가 심하고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불편하니 나무를 잘라 달라는 요청이었다. 순간 너무 당황했다. 나무를 자르라는 요구에 그들의 불편함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연을 너무 왜곡해서 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만이 먼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아름다운 가을 은행나무의 듀얼리즘이다. 오래전 수녀원 뜰 담 주변으로 처음 심은 나무가 은행나무였다. 그 후 15년이 지나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정원에 떨어진 은행을 주어 그것을 씻을 때는 심한 냄새가 풍기니 코를 틀어쥐고 악취에 대한 불평을 했었다. 하지만 예쁘게 씻긴 은행을 나누는 기쁨도 컸다. 이것을 맛있게 구어 먹을 때는 이 귀한 것을 거저먹을 수 있다는 것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긴 시간이 흘러 주변의 이웃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나무가 됐다. 결국 수녀원 공사가 있었던 참에 모든 은행나무를 잘라버렸다. 계절의 온도를 이겨내고 가을을 뽐내려는 노란 잎 은행나무가 거리마다 가득하다. 은행나무는 화사한 노란색으로 가을의 낭만을 즐기게 해 주지만 나무가 품고 있는 노란 열매 은행은 밟으면 악취를 풍기며 고약함을 드러낸다. 주로 길가에 떨어져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어찌 됐든 여러모로 불편함을 주니 의도치 않은 만인의 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몸에 좋다고 알려진 이 열매를 구입하려면 비싼 값을 내야 하니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길가에 떨어진 것을 주우려 위험을 감수하고 은행을 줍는 분들을 종종 볼 수 있는 가을의 한 풍경도 있다. 그런데 길에서 주운 은행을 먹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지는 미세먼지와 차량들이 뿜어내는 공해 속에서 자란 도심 속 가로수에서 떨어진 은행을 주어 그냥 먹어도 되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니 서울 시내 가로수에 떨어진 은행은 먹어도 건강에 이상은 없지만 식약처는 “위생 절차를 거쳐 정해진 양을 익혀서 섭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 알맹이는 겉·속껍질 보호를 받아 오염물질이 닿지 않는다”며 “토양오염도 은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라고 했다.(헤럴드경제) 그래도 가로수의 특성상 오염 가능성을 생각하여야 하고 정해진 양과 꼭 익혀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또한 은행을 줍기 위해 도로로 뛰어들어 운전자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모한 도전은 멈춰야겠다. 요즈음은 가로수로 식재된 은행나무에 열매 수집망, 마치 거꾸로 펼쳐진 우산 같은 모습의 신박한 은행 받이 그물망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그물망을 쳐서 떨어지는 은행을 한 곳으로 모으는 깨끗한 거리 만들기에 노력한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떨어지는 은행을 모으고, 냄새도 방지하여 가을철 은행나무 열매로 인해 발생하는 시민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겠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열매를 주우려는 분들의 위험을 방지하여 마음 편하게 가을을 즐길 수 있겠다. 이것이 가을이다. 거리를 노랗게 물들인 아름다운 모습도 거리를 걸으며 킁킁거리며 냄새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을의 풍경이다. 잠시의 불편함을 못 이겨서 수목 교체 작업을 한다면 노란색으로 물들이는 아름다운 가을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고 몸에 좋다는 그 열매 은행을 더 이상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름답지만 냄새가 나는 이 가을의 풍경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든 지자체의 고민이 깊어지겠다. 가을이 절정일 때 노랗게 물들어 잎새는 아름다워도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이 많은 만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통한 또 다른 해결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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