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일 주일이다. 한국교회는 1968년부터 해마다 10월 첫 주일을 ‘군인 주일’로 지내오다 2023년부터는 10월 둘째 주일에 군인 주일을 지내고 있다. 이러한 교회의 관심과 지원으로 군종 사제들은 종교를 초월해 모든 군인들의 영혼을 돌보며, 특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군종교구는 ‘선교의 황금 어장’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청년 영세자를 배출했다. 우리나라 20대 초중반 남성 영세자의 90%가 군대에 입대해 신자가 됐다. 하지만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청년들의 수는 갈수록 줄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여파로 군종교구는 어느 교구보다 더 큰 타격을 받았고, 병영 문화 선진화로 군인들의 휴대전화 사용 및 병영 내 다양한 문화생활이 허용되자 종교활동에 대한 관심은 더욱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군종 사제들은 전국에 흩어진 군성당을 다니며 병사들을 만나고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는 등 헌신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올해 군인 주일 담화에서 군종교구장 서상범 주교가 성경에서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고,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3,6)라는 구절을 인용한 대로, 전역 후 각 본당으로 돌아갈 신앙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종교구가 뿌린 신앙의 씨앗이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온 교회의 책임과 노력이 필요하다. 서 주교는 무엇보다도 기도와 관심을 요청했다. 한국교회에 젊은 피를 공급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목활동을 하는 군종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청년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지원하자.
가톨릭학술상 수상작들이 발표됐다. 올해로 제28회를 맞은 가톨릭학술상은 척박한 한국교회의 학문 연구 풍토 속에서도 교회 학문의 발전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는 연구자들을 발굴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올해 학술상 본상 수상의 영광은 「교부학 사전」을 번역해서 펴낸 노성기 신부와 하성수, 최원오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간행된 「교부학 사전」은 교부들과 연구 주제들, 관련 연구서 등에 관한 문헌학적 정보를 사전식으로 묶은 것이다. 1283쪽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교부들의 가르침을 쉽게 접하도록 한 공로가 크다. 본상 외에 연구상과 번역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토빗기」와 「마르코가 전하는 기쁜 소식」 역시 그 학술적 가치와 문체의 유려함 등으로 학술상 수상작으로서 부끄럼이 없는 역작들이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여 공로상을 수상한 정달영 신부의 업적도 눈길을 끈다. 다시 한 번 수상자들에게 그 노고에 대한 심심한 감사와 축하의 뜻을 전한다. 학술 연구는 비록 직접적인 실용성으로 가늠할 수 없는 높은 가치를 지닌다. 그리스도교 교회의 발전은 신앙과 함께, 복음의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 지성의 활동으로서 학술 연구에 그 바탕을 둔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학술과 학문 연구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신앙뿐만 아니라 인류 문화와 문명의 발전과 성숙을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학술상 수상자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전하며 가톨릭학술상이 한국교회 학물 발전에 더 큰 자극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몇 년 전에 수녀원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아주 불쾌한 목소리로 수녀원 마당에 심어진 은행나무 때문에 냄새가 심하고 나뭇잎이 많이 떨어져 불편하니 나무를 잘라 달라는 요청이었다. 순간 너무 당황했다. 나무를 자르라는 요구에 그들의 불편함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연을 너무 왜곡해서 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만이 먼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아름다운 가을 은행나무의 듀얼리즘이다. 오래전 수녀원 뜰 담 주변으로 처음 심은 나무가 은행나무였다. 그 후 15년이 지나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정원에 떨어진 은행을 주어 그것을 씻을 때는 심한 냄새가 풍기니 코를 틀어쥐고 악취에 대한 불평을 했었다. 하지만 예쁘게 씻긴 은행을 나누는 기쁨도 컸다. 이것을 맛있게 구어 먹을 때는 이 귀한 것을 거저먹을 수 있다는 것에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런데 긴 시간이 흘러 주변의 이웃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나무가 됐다. 결국 수녀원 공사가 있었던 참에 모든 은행나무를 잘라버렸다. 계절의 온도를 이겨내고 가을을 뽐내려는 노란 잎 은행나무가 거리마다 가득하다. 은행나무는 화사한 노란색으로 가을의 낭만을 즐기게 해 주지만 나무가 품고 있는 노란 열매 은행은 밟으면 악취를 풍기며 고약함을 드러낸다. 주로 길가에 떨어져 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어찌 됐든 여러모로 불편함을 주니 의도치 않은 만인의 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몸에 좋다고 알려진 이 열매를 구입하려면 비싼 값을 내야 하니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길가에 떨어진 것을 주우려 위험을 감수하고 은행을 줍는 분들을 종종 볼 수 있는 가을의 한 풍경도 있다. 그런데 길에서 주운 은행을 먹어도 괜찮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지는 미세먼지와 차량들이 뿜어내는 공해 속에서 자란 도심 속 가로수에서 떨어진 은행을 주어 그냥 먹어도 되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찾아보니 서울 시내 가로수에 떨어진 은행은 먹어도 건강에 이상은 없지만 식약처는 “위생 절차를 거쳐 정해진 양을 익혀서 섭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 알맹이는 겉·속껍질 보호를 받아 오염물질이 닿지 않는다”며 “토양오염도 은행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라고 했다.(헤럴드경제) 그래도 가로수의 특성상 오염 가능성을 생각하여야 하고 정해진 양과 꼭 익혀서 먹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겠다. 또한 은행을 줍기 위해 도로로 뛰어들어 운전자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모한 도전은 멈춰야겠다. 요즈음은 가로수로 식재된 은행나무에 열매 수집망, 마치 거꾸로 펼쳐진 우산 같은 모습의 신박한 은행 받이 그물망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그물망을 쳐서 떨어지는 은행을 한 곳으로 모으는 깨끗한 거리 만들기에 노력한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떨어지는 은행을 모으고, 냄새도 방지하여 가을철 은행나무 열매로 인해 발생하는 시민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겠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열매를 주우려는 분들의 위험을 방지하여 마음 편하게 가을을 즐길 수 있겠다. 이것이 가을이다. 거리를 노랗게 물들인 아름다운 모습도 거리를 걸으며 킁킁거리며 냄새로 인한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을의 풍경이다. 잠시의 불편함을 못 이겨서 수목 교체 작업을 한다면 노란색으로 물들이는 아름다운 가을의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고 몸에 좋다는 그 열매 은행을 더 이상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름답지만 냄새가 나는 이 가을의 풍경을 어찌하면 좋을지 모든 지자체의 고민이 깊어지겠다. 가을이 절정일 때 노랗게 물들어 잎새는 아름다워도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편이 많은 만큼,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통한 또 다른 해결책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삶의 최종 목적지에서 바라본다면 지금의 고통은 신비한 계획 속의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글·사진 _ 박노해 가스파르 ※ 작품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02-379-1975)에서 열리는 사진전 ‘다른 오늘’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2025년 3월 2일까지.
1994년 2월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본당에서는 한 장학회가 만들어졌다. 엘리사벳장학회로 이름 붙여진 장학회는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故) 이혜경(엘리사벳) 씨의 유지를 따른 것이었다. 가족들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씨의 뜻을 받들어 기금을 출연하자, 본당은 이런 귀한 뜻을 받아들여 대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사업으로 장학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그 장학회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꾸준하게 3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오는 사이에 600명에 가까운 청소년들이 장학금으로 학업을 지속하고 사회로 진출할 힘을 얻었다. 장학회 출범 당시 신문사 자료들을 검색하다 보니 사연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생전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하던 고인의 마음, 가족 모두 비신자였음에도 이를 교회에 봉헌한 정성을 본당은 명동대성당 역사와 함께 길이 이어지고 발전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한 모습이었다. 이후 본당은 공동체 신자들의 기도와 관심을 텃밭으로 조용하게 생활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의 어깨를 다독였다.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장학 활동을 이어온 여정을 보며 밀알 하나가 싹을 잘 틔워서 여러 나이테를 품은 큰 나무로 성장한 느낌을 받았다. 가족들은 그때 성금 전달식에서 인터뷰를 통해 “학생들에게 나눠진 기금을 통해 죽은 딸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아마도 고인의 넋은 나눔 속에서 매번 새로운 밀알로 뿌려지는 게 아닐까. 장학회 첫 회 기금을 받은 학생들은 이제 장년 세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이 각자의 삶에서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다시 나누는, 그래서 다시 또 다른 밀알이 싹을 틔우는 따뜻한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주님 가을이 이제야 자리를 잡았습니다. 입추의 절기가 무색하도록 우리의 잘못 살아 간 결과인 폭염이 오래 머문 시간 무더위 늦여름 안에서 열매들이 익어가는 소리는 아픔을 견뎌낸 인내와 희생의 소리였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 바쳐진 오곡백과, 열매들의 희생제사는 우리 주님을 닮은 듯 온 몸으로 태양의 뜨거운 열기와 모진 비바람 이겨낸 사랑의 승리 창조주께 영광 돌리며 순종한 아름다운 결실이었습니다. 이렇게 가을이 아름다운 대자연을 이루려 형형색색 곱게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는 계절 앞에서 주님, 우리를 돌아봅니다. 그 무더운 날들 안에서 온갖 열매들은 태양의 뜨거운 빛을 받아 안으며, 매서운 바람을 끌어안으며 사나운 빛줄기를 어루만지며 활활 타는 촛불처럼 자신을 태우며 익어 갈 때 우리는 덥다, 덥다, 못 참겠다, 하면서 차디찬 인공 바람으로 마구 몸을 식히며 더위의 악순환은 반복되고 하나뿐인 지구는 아픔으로 울어야 했지요. 인간이 더위를 피해 살아간 방법은 이기심과 탐욕, 모두 죄악이었습니다. 무절제한 쓰레기로 땅은 신음하고 있고 무분별한 행동들로 바다는 오열하고 있고 인간 만능의 탐욕으로 산과 숲은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을 슬프게 한 저와 인류를 용서하소서. 이제 새롭게 하소서. 언젠가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피조물의 존재로서 이 숭고한 가을이 주는 교훈을 듣습니다. “피조물들이여! 창조주를 기억하며 열매를 맺어라.” 주님! 인내와. 절제. 선행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맺으며 사랑. 기쁨. 평화 온유. 친절로 주님 주신 동산을 곱게곱게 물들여가도록 이 가을에 다짐해 봅니다. 주님 이끌어주소서. 아멘. 글 _ 김영희 요셉피나(서울 묵동본당)
마음이 생각을 만든다. 생각은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내면의 반응이다. 생각에는 종류가 아주 많다. 생각이란 뜻을 가진 한자가 여러 개인 데서 알 수 있다. 사(思)는 곰곰이 따져보는 생각이다. 인간은 사유(思惟)하고 사변(思辨)하는 존재다. 상(想)은 퍼뜩 떠오른 생각이다. 발상(發想)과 연상(聯想) 같은 단어가 그렇다. 념(念)은 콕 박혀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염두(念頭)에 두라거나 괘념(掛念)치 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려(慮)는 짓눌러 헤어나기 힘든 생각이다. 염려(念慮)와 고려(考慮)가 그것이다. 떠오른 생각이 콕 박혀 나가지 않으면 상념(想念)이고, 곰곰한 생각이 깊이를 머금을 때 우리는 사려(思慮)가 깊다고 말한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는 상념이 많다는 얘기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할 때는 사려 깊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사람이 사려는 깊어야 하지만 염려가 깊으면 못 쓴다. 불교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수행을 강조하는 것은 쓸데없는 상념이 마음에 독이 되는 줄 알아서이다. 지혜는 상념이 아닌 사려와 사유에서 나온다. 상념은 사람을 자꾸 길 잃고 헤매게 만들어도, 사려는 깊을수록 밝고 환해진다. 사람의 경쟁력은 어떤 종류의 생각을 많이 하고, 어떻게 관리하느냐에서 나온다. 정조 때 노긍이란 사람이 있었다. 글을 워낙 잘 써서 과거 시험만 보면 합격했다. 그래봤자 지체가 낮아 벼슬을 못 살았다. 그는 분노해서 다른 사람 답안지를 대필해 주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적발되어 평안도 위원 땅으로 귀양 갔다. 유배지에서 두고 온 가족의 막막한 생계와 고단한 처지를 생각하면 밤중에 잠이 올 리 없었다. 하룻밤에도 온갖 상념들이 떠오르다 지워졌다. 새벽이 가까워지면 생각은 괴물처럼 커져서 자신의 영혼마저 집어삼킬 듯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는 밤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쓸데없는 생각과, 반대로 간절하게 소망하는 생각의 목록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떠다니는 생각을 풀이한 「상해」(想解)란 글을 남겼다. 이 글 속의 생각들은 그의 영혼을 침식시키는 독이었고, 한편으로 절망 속에 ‘언젠가’를 꿈꾸게 해 준 약이기도 했다. 허균은 「연념잠」(煉念箴)이란 글을 지었다. 머릿속에 콕 박혀 안 나가는 생각을 어떻게 단련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고를 담았다. 마음은 본래 텅 비어 맑은데 잡생각이 끼어들면서 흐려진다. 사람은 제멋대로 날뛰는 생각을 잘 간수해서 고요함으로 안정시키되 정성스럽게 보살펴야 한다고 썼다. 잡념을 제거하는 것이 마음공부의 관건이라고 보았다. 묵상(默想)과 명상(瞑想)은 침묵 속에 눈을 감고 수없이 많은 생각을 차례로 떠올려 점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생각 자체를 침묵시키고 잠재우는[瞑] 일이기도 하다. 관상(觀想)은 생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살펴보는 일이면서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 가며 떠올려보아 점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많은 생각 속에 살아간다. 그 생각이 종류와 성질도 각기 다르니, 관리가 필요하다. 생각이 통제를 벗어나면 정신 나간 사람이 되고, 내가 생각의 주인이 되면 정신 차린 사람이 된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가? 내 생각은 잘 관리되고 있는가, 아무 데나 둥둥 떠다니는가?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모성은 자녀에 대한 한없는 희생과 헌신을 의미하고 여성의 덕목으로 해석돼 왔다. 자녀 사교육에 대한 열정도 어머니의 역할에서 비롯해 비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여성은 자신보다 자녀의 성취를 위해 애쓸 때 덜 비난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모성도 가족의 성공, 계층 유지와 관련돼 있으니 이기적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이 되면 어머니의 역할은 끝나는 것으로 해석됐으나, 자녀가 결혼한 후에도 어머니들은 손자녀 양육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직업과 가정생활 병행이 힘들고 보육제도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맞벌이 자녀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고학력 어머니들은 자녀의 학습을 보충·지도하고 사교육 정보를 수집한다.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니는 자녀의 과제, 논문, 상급 학교의 원서 작성을 도와준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자녀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모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어머니들이 자녀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고 이러한 행위를 사랑으로 해석해 죄의식을 갖지 못하게 한다. 낮은 학점을 받은 대학생의 어머니가 교수를 찾아와서 따졌다는 이야기, 대학을 졸업한 자녀가 회사 면접을 볼 때 어머니들이 면접이 끝날 때까지 회사 앞에서 기다린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해외 유학을 다녀와서 엄마에게 “나 이제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 ‘헬리콥터맘’ 자녀들의 이야기와, 임용된 이후 자기 연구실을 꾸미는 것도 어머니가 와서 해줬다는 어떤 대학 교수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어머니에게 자녀는 늘 아이와 같으니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가 된다. 90세의 어머니도 70세의 자녀에게 “조심해서 다녀라”고 노심초사하기 마련이다. 또 구조적 실업이나 경기불황으로 청년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경우 부모가 자녀의 생존을 책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머니가 자녀의 인생을 계획하고 관리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주변에서는 이러한 분리를 생각하지 않고 자녀들이 영원한 마마보이, 마마걸로 살기를 바라는 어머니들을 발견하곤 한다. 이러한 행위가 과연 자녀에게 도움이 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녀들은 과잉보호와 가족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위험에 노출되거나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지 못할 것이다. 철학자 사라 러딕(Sara Ruddick)은 「모성적 사유」에서 “어머니는 자녀가 독립적이고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돌봄이나 간섭을 억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어머니는 돌봄으로 형성되었던 애착관계 때문에 분리의 아픔을 감당해야 한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는 진정으로 돌봄이 필요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치매 환자 아버지의 보호자가 된 청년 조기현은 「아빠의 아빠가 됐다」에서 어린 나이에 아픈 부모를 돌보는 영케어러들의 경험을 기술한다. 이들은 아픈 부모 돌봄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거나 직장을 다니지 못한다. 이들은 다른 연령층의 돌봄 제공자들보다 더욱더 어려움에 처해 있다. 노년과 장애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족의 돌봄에 의존하기에 그 가족은 힘든 상황에 있다. 과잉보호와 돌봄이 가족이라는 배타적 울타리에서 이뤄질 때 정작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소외된다. 우리 사회에서 돌봄의 수혜나 분배는 불균형적이다. 자녀와 분리된 삶으로 나아간다고 나쁜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지원하면 된다. 노년기 여성들은 자녀의 삶을 그들에게 맡기고 돌봄에서 자유로워져서 자신에게 몰두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하면 좋겠다. 누군가를 돌보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다면 가족을 넘어 공동체 차원에서 정말 돌봄이 필요한 곳,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 돌봄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돌봄이 여성에게만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교황청과 한국교회는 9월 24일 로마에서 서울 세계청년대회의 주제가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발표했다. 이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죽음을 이기고 생명과 사랑의 은총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을 젊은이들에게 전하려는 뜻을 담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전 세계의 젊은이들과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청년대회가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선다. 우리는 이 대회가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도록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깊은 고민의 과제였던 청년사목의 획기적 전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때마침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가 9월 27일과 28일 개최한 ‘WYD와 한국청년’ 심포지엄은 한국교회 청년사목의 쇄신 방향을 적절하게 짚어주었다. 다양한 의견들이 피력됐지만 요지는 기성세대의 시대착오적인 패러다임을 청년들에게 강요하지 말자는 것으로 파악된다. 성장주의가 초래한 청년들의 문제에 대해 성장주의로 대응하려는 안이함, 수직적인 하향식 권위주의에 기댄 사목, 청년들이 종교적 열망에 소홀하다는 편견 등은 청년들에 대한 큰 오해다. 세계청년대회는 전 세계 청년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자리이기에 철저한 준비를 통해 차질 없이 치러져야 할 대규모 행사다. 동시에 우리 모든 젊은이들이 참으로 예수님을 자기 삶 안에 모시는 신앙의 삶을 다지도록 이끌어야 하는 소중한 기회다. 청년사목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쇄신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대회의 가장 풍성한 결실이 될 것이다.
주교회의와 한국정교회대교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AI, 봉사자인가 지배자인가?’를 주제로 9월 27일 공동으로 개최한 심포지엄은 매우 시의적절할 뿐만 아니라, AI의 발전과 관련해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방향성에 대해 올바르게 제시했다. AI는 인류 문명의 가장 큰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 AI는 산업혁명, 영화와 라디오 및 TV의 발명, 그리고 획기적인 정보처리기술과 전달수단의 발달에 따른 PC와 인터넷의 대중화 등 이전의 기술 문명 발달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위험성이다. AI가 가져올 편리와 편의, 새로운 가능성이 큰 만큼 예견하거나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악용도 우려된다. 실제로 딥페이크의 만연 등 그 우려는 현실화됐다. 그런 의미에서 심포지엄에서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AI는 봉사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지배자인가를 물었다. 가톨릭교회는 이미 AI가 인간 존엄성의 원리에 부합하고 공동선을 지향하며, 사회적 연대에 기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AI가 제공하는 경제적 이익의 유혹은 자칫 이러한 원칙에 벗어나는 오용의 위험성을 드러냄에 따라 국제적인 규제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특별히 교회는 큰 잠재력을 지닌 AI가 참되게 인류에 봉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깊은 사목적 관심을 갖고 선의의 전문가들 및 시민들과 함께 이 기술이 효율성에 매몰되지 않고 봉사자의 역할을 하도록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이끌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