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분단 80주년, 민족화해 노력 이어가야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가 제100차 전국회의를 열고 광복과 분단 80주년을 맞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다시금 이어가야 함을 천명했다. 특히 민화위는 작금 우리 사회에서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형제간의 화해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이러한 민화위의 현실 인식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며 특히 서로 간의 대립과 긴장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남북 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평화 정착의 과제는 항상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현재의 남북 관계 경색은 남한과 북한 당국의 민족 화해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데 크게 기인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지난해 말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가 얼마나 민주주의적 헌정 질서에 따라 이 혼란을 정의롭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와 국가의 미래가 크게 좌우되는 만큼 온 국민의 눈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북 관계 긴장 완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 궁극적으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 상호 간의 강대강 적대적인 방식의 정책으로는 결코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인 교훈이다. 어떤 경우에도 무력과 폭력으로 평화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적한 국가적 과제들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항상 그 전제가 되어야 한다. 분단 80주년을 맞는 올해 그러한 지혜가 절실하다.

‘낀세대’ 위한 사목에 더욱 힘써야

교회 내에서 청년이라고 하면 보통 20대부터 30대 초반 정도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도 이들 세대가 대부분 본당 청년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취업이 늦어지고 결혼도 늦어지는 추세에 따라 청년 연령대도 높아져, 30대 중후반 혹은 40대까지도 청년회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통상적인 청년사목 자체는 여전히 20대에서 30대 초반 위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나이 든 청년들은 청년회에 계속 남아있기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중년 모임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3545 세대, 곧 ‘낀세대’들은 청년과 중년 그 사이 어디쯤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소외되기 십상이다. ‘청년인 듯 청년 아닌 청년 같은’ 세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행스럽게 교회 내에서도 이미 수년 전부터 낀세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사목적 배려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여러 교구와 본당에서 청·장년모임이나 신앙 아카데미, 피정 등과 같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고, 긍정적인 반응도 얻고 있다. 하지만 전체 교회 차원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일부 사례로만 그치는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보다 적극적인 교회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낀세대를 바라보는 인식 개선이 선행돼야 하며, 나아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더 이상 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주도적인 세대, 말하자면 ‘낀세대’가 아닌 ‘가교세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일요한담

‘제 탓이오’를 실천합니다

“안녕하십니까? 개그계의 중소기업 장용입니다!” 행사를 시작할 때 자주 쓰는 나만의 인사말이다. ‘중’보다는 ‘소’에 가깝다. 절대 돈을 많이 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평생 월급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때그때 건건이 주어지는 일을 수행할 뿐이다. 일자리보다는 일거리를 찾아서 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나도 중소기업(?)으로서 축제 행사보다는 중소기업이나 관련 협회 행사가 많은 편이다. 하지만 실제로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행사를 자주 하기가 어렵다. 규모로 보나 예산으로 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직원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으로 전문 사회자를 쓰겠다는 결정은 오롯이 대표의 넉넉한 마음이다. 20여 년 전, 수출도 많이 하는 아주 튼실한 한 강소기업의 송년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담당 부장님은 책임감도 강하고 나름 여기저기 조사해서 준비도 많이 했고, 그의 두 눈에는 행사를 멋지게 하고 싶은 의지가 가득했다. 1부 의식행사를 끝내고 2부 여흥 시간과 만찬을 안내하고 있는데 얼굴이 하얘지셔서 나에게 달려왔다. “홍길동님 축사가 빠졌어요!” 나도 당황스러웠다. 축사 명단에 홍길동이란 이름은 없었다. “주신 명단은 다 소개했고요, 홍길동이란 분은 명단에 없는데요?” “네에? 어디 봐요. 어! 진짜 없네요.” 담당 부장의 얼굴은 홍콩 무술영화에 나오는 강시처럼 더 하얗게 변했다. “어쩌죠? 제가 이분을 빼먹었네요” 하면서 곁눈질로 사장님을 의식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훔쳐본 내 눈에 들어온 사장님의 얼굴엔 이미 천둥이 치고 있었다. “부장님, 괜찮아요. 일단 그 누락된 분은 잠시 후 만찬 때 건배사로 대체하면 되고, 사장님께는 사회자가 실수해서 빠진 거라고 말씀드리세요. 그리고 혹시나 또 펑크 나는 게 있으면 사회자한테 다 돌리세요. 부장님은 내일도 나와야 하고 계속 직장 생활해야 하잖아요. 나야 오늘 하루 왔다가는 것이고, 사장님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안 부르면 되고. 하하하~!” 담당 부장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졌다. 전문회사를 안 쓰고 자체적으로 알뜰하게 준비하다 보면 종종 벌어지는 장면들이다. 나도 이런 경험이 익숙하지 않았을 땐 홍당무처럼 벌게진 담당자의 얼굴을 보면서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도와줄 수 있을까?’ 고민을 하던 어느날 문득 기도문이 떠올랐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래! 이거야!’ 미사 시간에 습관처럼 중얼거릴 것이 아니고 일상에서 실천하자는 생각에 무릎을 치면서 나는 ‘내 탓이오 기법’을 쓰기 시작했다. 종종 ‘내 탓이오 기법’은 담당자들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사건 이후로 그 담당부장님의 강력한(?) 노력 덕분에 몇 번 더 초대받아 내 일거리는 풍성해졌다. 신앙이 있다는 것, 성당을 다닌다는 것은 크게 대단한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저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고 상대방을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고 양심을 수련하는 것이리라.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

2025-02-16
나의 하느님 공부

거짓의 사람들

긴 냉담을 거쳐 다시 교회로 돌아온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은, ‘왜 사춘기 시절 내가 그렇게 열심히 교리 공부를 했을 때, 본당에서 마귀의 존재와 활동에 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을까’라는 점이었다. 지옥의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야 그것이 우리 선조 신앙인들이 중세와 그 이후에 걸쳐 저지른 신앙의 오용 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지만, 이 두 가지가 빠진 교리는 그 자체로 엉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우리 개개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절절하게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으니, 나를 비롯한 수많은 청소년이 인생의 어떤 모퉁이에서 쉽사리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이유를 그래서 나는 이제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교회의 교리에는 ‘가슴’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빛과 그림자도 없고, 분노와 눈물도 없고, 그저 맹숭한 경건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겨우 사제들과 교리교사와 동료들의 인간적 온정과 그 불완전한 사랑에 기대어 있었던 것이다. 이 악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건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이후에 예수님이 마귀를 쫓아내시고 그들을 ‘거짓의 아비’라고 단순하게 정의하셨던 것을 떠올렸다. 또한 이 세상에 ‘하얀 거짓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거짓과 진실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얀 거짓말이라는 단어처럼 자기 기만적인 교만이 또 있을까. 언젠가 내가 참으로 순수하게 하느님께 의탁하며 살던 한 시절, 나는 그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 마음속에 작은 모래 폭풍 같은 것이 심하게 일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지금도 내 갈등의 가장 큰 부분은 내가 자꾸만 ‘하얗다’라고 나 혼자 주장하는, 하얗고 노랗고 검은 거짓말들을 일상에서 자꾸 하게 된다는 것임은 물론이다. 지난번 글에서 영국 A6 도로에서의 살인범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들 앞에서 했던 그 거짓말을 보면 짐작이 될지도 모르겠다. 「거짓의 사람들」에 나오는 수많은 예시 중 가장 압권은 역시 그가 가톨릭 사제들과 함께 정신과 의사 자격으로 구마에 참여하는 부분일 것이다. 피구마자 속의 마귀는 처음 자신의 존재가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이 몸에서 나가면 구마자(저자 스캇 펙) 의 가족에게 들어갈 것이라고 겁을 준다. 그때 섬뜩해졌던 그는 악이 결국 거짓의 아비라는 생각을 하며 겨우 그 공포의 협박에서 빠져나온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소녀 속에 들어있던 마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애처로운 소녀의 슬픔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때 단호하던 구마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르시시스트를 연구하는 의사들이 하는 말, ‘나르시시스트의 마지막 말은 늘 피해자 코스프레’라는 것이 이와 상통한다. 스캇 펙 역시 악을 일종의 나르시시즘으로 정의했다. 나는 가끔 성모님께서 파티마에 발현하셨을 때, 그 어린아이들에게 지옥을 보여주셨던 것을 생각한다. 지금으로 치면 아동 학대에 해당할 만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성모님은 하셨다.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옥은 지옥 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악이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은 악 같은 것은 없다고 하는 말이니까. 그리고 이 어려운 시대의 복판에 서서 온갖 인간적인 고뇌들로 시달리며 이제 나는 겨우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유혹은 여자도 남자도 돈도 학력도 명예도 아니고, 하느님은 없으며 기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력한 것이라는 속삭임, 네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 세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자가 결국 승리한다는 속삭임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주님의 기도 중에 늘 빌어 본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악에서 구하소서. 부디 아멘.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2025-02-16
방주의 창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 - 인공지능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지침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면 비슷한 콘텐츠가 계속 추천되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콘텐츠가 이렇게 많은 것에 환호하며 계속 그 콘텐츠를 보다 보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서비스 이용자의 관심, 성향, 그리고 콘텐츠 이용 행태를 분석하여 이용자에게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는 AI 알고리즘 덕분입니다. 그러나 이용자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만 제공받게 되면서, 자신과 비슷한 의견이나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만 주로 소통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기존 신념은 더욱 강화되는 반면,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기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이를 ‘에코 챔버 현상’(echo chamber effect)이라고 합니다. 이 현상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우선, 비슷한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강한 동질감이 형성되어 유대가 강화되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반면, 비슷한 정보에만 노출되면서 사고의 편향이 심화되고,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의 확신과 부합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이 심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정보의 검증은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됩니다. 따라서 검증되지 않은 정보(허위 사실이나 가짜 뉴스)가 확산되면서 잘못된 믿음이 강화되고, 다양한 관점을 접하지 못해 균형 잡힌 판단이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다른 의견을 가진 집단 간 대립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분열이 발생합니다. 사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매일 추천되는 콘텐츠를 소화하기에도 바쁜 현대인들이 그 정보의 진위 여부를 따질 필요성을 느낄지조차 의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AI 알고리즘의 늪에 깊숙이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2025년 1월 28일, 교황청 신앙교리부와 문화교육부는 인공지능(AI)의 올바른 사용을 위한 「옛것과 새것」(Antiqua et Nova)이라는 문헌을 발표했습니다. 이 문헌은 총 117항으로 구성되며, 교육, 경제, 노동, 보건, 인간관계, 그리고 전쟁 분야에서 AI 발전이 가져오는 도전과 기회를 설명하며, 가톨릭 기관들과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AI의 윤리적 발전과 활용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이 삶을 충만하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안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핵심적인 단서로, 이 문헌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을 인용하여, AI와 관련해 ‘지능(intelligenc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35항), AI는 인간 지능의 인공적 형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간 지능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철학적·신학적 전통에서 인간의 지능(지성)은 논증하는 이성(ratio)뿐만 아니라, 진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지적 통찰(intellectus)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이면서 상보적인 차원을 드러냅니다.(14항) 또한 인간의 지능은 인간의 육체성, 관계성, 진리와의 관계, 세상에 대한 청지기직(stewardship) 등을 통해서 통합적으로 파악됩니다.(16~29항) 이 문헌은 AI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간 지능을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을 보장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하루빨리 번역되어, 많은 분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옛것과 새것’(마태 13, 52)의 지혜를 바탕으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 특히 최근 급격히 발전한 인공지능(AI)이 가져오는 도전과 기회에 대해 성찰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1항)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

2025-02-16
현장에서

모두가 바다로 나갈 배

“배의 역할은 안전한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게 아니라 바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박현동(블라시오) 아빠스가 2월 6일 해외선교사 파견 미사 강론에서 한 말이다. 당연한 말임에도 이날따라 새롭게 느껴졌다. 아빠스가 미사를 주례하던 제대 앞에 넘실거리는 파도 위를 떠가는 배가 선교사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설치돼 있어 더 공감이 갔는지도 모른다. 배가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항구에서 이끼만 낀 채 낡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안전할지는 몰라도 마냥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선교사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나’를 배에 대입해 본다. 일단 ‘도대체 무슨 배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바다로 나가느냐 마느냐를 떠나 무슨 배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고민조차 안 하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일상에 정신이 팔리니 삶에 대한 장기적인 관점에 소홀해졌다. 마치 배가 당장 정박해 있는 자리의 불편함만을 걱정하고 토로하는 듯하다. 해외선교사 파견 미사에서 교육을 마치고 수료한 사제·수도자들 모습은 설렘과 떨림, 기대감과 두려움이 교차해 보였다. 가고 싶었던 선교지로 발령받은 선교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선교사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어찌됐든 순명하고자 다짐한 모습은 똑같았다. 2025년 새해가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하느님은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당신 뜻에 알맞은 역할을 준다고 한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선교사들처럼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배인지 알고, 나 자신이 나갈 바다는 어떤 바다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는 새해가 되길 다짐해 본다.

2025-02-16
열린마당

가난한 노인 돌봄은 교회의 사명이다

최근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4명은 빈곤층에 속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노인 빈곤율이 고령층으로 갈수록 심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말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급속한 고령화와 경제적 불평등 속에서 가난한 노인들이 더 늘어가고 있다. 가난한 노인이 늘어나면 고독사, 노인 소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가난한 노인들의 경우 가족 없이 혼자 지내거나 외부 활동 없이 외롭게 사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복지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노인들을 찾아나서 물질적 지원뿐만 아니라 정서적 지원에 앞장설 필요가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교구와 일선 본당, 사회복지기관과 연계해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이들이 사회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노인들이 신앙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영적으로 돌보는 노력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교회는 노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성사 집전, 기도 모임 등을 통해 이들과 영적인 여정에 함께해야 한다. 또한 가난한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무관심을 해소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 이들이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힘써야 한다. 물론 교회의 힘만으로는 노인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노인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연금 및 기본소득제도 개선 등 정부와 사회의 노력이 함께해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는 노인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의 실천이자 자비가 넘치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다.

2025-02-16
사설

분단 80주년, 민족화해 노력 이어가야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가 제100차 전국회의를 열고 광복과 분단 80주년을 맞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다시금 이어가야 함을 천명했다. 특히 민화위는 작금 우리 사회에서 갈라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형제간의 화해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이러한 민화위의 현실 인식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며 특히 서로 간의 대립과 긴장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남북 관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평화 정착의 과제는 항상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현재의 남북 관계 경색은 남한과 북한 당국의 민족 화해에 대한 의지가 부족한데 크게 기인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지난해 말 발생한 비상계엄 사태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가 얼마나 민주주의적 헌정 질서에 따라 이 혼란을 정의롭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와 국가의 미래가 크게 좌우되는 만큼 온 국민의 눈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북 관계 긴장 완화와 한반도 평화 정착, 궁극적으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 상호 간의 강대강 적대적인 방식의 정책으로는 결코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역사적인 교훈이다. 어떤 경우에도 무력과 폭력으로 평화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적한 국가적 과제들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도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항상 그 전제가 되어야 한다. 분단 80주년을 맞는 올해 그러한 지혜가 절실하다.

2025-02-16
독자마당

[독자마당] 다가온 새해, 희년을 보내며

소금인형 류시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 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네 지난 주일 저녁 청년 미사 중 부주임 신부님의 강론에서 류시화 시인의 <소금인형>을 들었다. 이날 복음은 ‘카나의 혼인 잔치’에 관한 복음이었다. 신부님께서 들려주신 소금인형 이야기는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소금인형이 대상을 향해 다가서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바다는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이자 세상을 말한다. 소금인형이 바닷물을 통해 녹아내리는 모습은 우리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소금인형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교훈은 소금인형이 바다라는 대상에 자신을 희생하며 내어놓는 것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사랑과 이해이며 대상과의 일치이다. 묵상 중 요즘 나는 어떤 모습, 어떤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떳떳한 신앙 활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말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있어 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개인의 안위와 행복만을 좇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해본다. 잘 알려진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와는 반대로 위로하기보다는 위로받기만을 바라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기만을 바라며,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기만을 바라는 건 아닌지 말이다. 소금인형의 이야기처럼 상대방과 세상을 잘 이해하려면 온전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나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어야 하며, 이해할줄도 사랑할줄도 알아야 한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라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의 말씀처럼 일꾼들은 시키는 대로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평범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각자 모두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셨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사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훌륭하다. 2025년 희년을 지내면서,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며 신앙인으로서 잘 살아가는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겠다. 글 _ 김지헌 다니엘(서울대교구 동작동본당)

2025-02-09
사설

‘낀세대’ 위한 사목에 더욱 힘써야

교회 내에서 청년이라고 하면 보통 20대부터 30대 초반 정도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도 이들 세대가 대부분 본당 청년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취업이 늦어지고 결혼도 늦어지는 추세에 따라 청년 연령대도 높아져, 30대 중후반 혹은 40대까지도 청년회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통상적인 청년사목 자체는 여전히 20대에서 30대 초반 위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나이 든 청년들은 청년회에 계속 남아있기가 부담스럽다. 그렇다고 중년 모임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3545 세대, 곧 ‘낀세대’들은 청년과 중년 그 사이 어디쯤에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소외되기 십상이다. ‘청년인 듯 청년 아닌 청년 같은’ 세대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다행스럽게 교회 내에서도 이미 수년 전부터 낀세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이들을 위한 여러 가지 사목적 배려들이 이어져 오고 있다. 여러 교구와 본당에서 청·장년모임이나 신앙 아카데미, 피정 등과 같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고, 긍정적인 반응도 얻고 있다. 하지만 전체 교회 차원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일부 사례로만 그치는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보다 적극적인 교회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낀세대를 바라보는 인식 개선이 선행돼야 하며, 나아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더 이상 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주도적인 세대, 말하자면 ‘낀세대’가 아닌 ‘가교세대’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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