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제주교구 복음화센터’ 출범을 축하하며

‘제주교구 복음화센터’가 2026년 새해 첫날 공식 출범했다. 사제·수도자·평신도가 함께 교회의 가르침을 배우고 나누며, 이를 지역사회에서 실천하도록 돕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신앙이 개인의 위안에 머물지 않고, 삶의 선택과 공동체의 방향을 비추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믿는가’만큼 ‘어떻게 살아내는가’를 묻는 자리가 필요하다. 제주교구의 이번 시도는 그 물음에 응답하려는 결단으로 읽힌다. 복음화센터의 강점은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구조’와 ‘함께 나누는 방식’이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시간·지역의 장벽을 낮추고, 교회의 가르침에 관심 있는 누구에게나 문을 연다. 교회 관련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참여자들이 질문과 고민을 듣고 토론에 참여하도록 설계한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본격적인 시노달리타스 이행기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교육의 산실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교회의 가르침은 ‘정답’의 목록이 아니라 ‘길’의 제시다. 인간 존엄, 공동선, 연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같은 원리는 문헌 속 문장으로만 존재할 때 힘을 잃는다. 가정에서의 돌봄, 일터에서의 정의, 지역사회에서의 책임 있는 참여로 구체화될 때 비로소 복음은 살아 움직인다. 제주교구장 문창우 주교는 올해 사목교서에서 “소외된 사람 없이 모두가 함께 숨 쉬는 포용과 연대, 함께 빛을 나누는 평화의 소공동체가 되자”고 당부했다. 복음화센터가 이 여정의 ‘구심점’이 되길 바란다. 교회의 가르침을 더 쉽게 접하고,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용기 있게 실천하도록 돕는 배움의 장, 나눔의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K-성지’를 순교영성 체험의 공간으로

한국교회 성지를 찾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 2025년 서울대교구 내 성지를 찾은 외국인 순례자는 38만 명을 넘어섰고, 성지 미사 참례자 또한 전년 대비 11% 늘었다. 전국 교구의 성지가 다국어 안내 체계를 정비하고 디지털 콘텐츠를 확충하는 등 외국인 순례자 환대 채비에 나선 것은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진정 고민해야 할 본질은 한국교회 순교영성을 세계인과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에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같은 콘텐츠가 한국의 전통과 결합해 전 세계인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한국 고유의 색채가 세련된 감각과 만났을 때 얼마나 강한 설득력이 있는지 보여준 사례다. 성지순례 역시 이러한 ‘K-컬처’의 역동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할 수 있다. 순교자들의 드라마 같은 생애와 신앙 수호 여정을 간직한 성지가 한국교회의 활기찬 모습과 연결될 때, 외국인 순례자들에게는 더 매력적이고 깊이 있는 영적 체험의 공간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방한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순교자들의 유산은 이 땅의 신자들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희망과 일치를 선사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의 말처럼, 한국 순교자들의 신심과 영성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절실한 평등과 희생, 인간 존엄의 가치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불과 200여 년 전 신앙을 증거한 신앙 선조들의 삶은, 세계 각국 순례자들에게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살아있는 신앙의 모델’로 다가갈 수 있다. 모든 순례자가 한국 순교자들의 숨결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정성 어린 마중물을 준비해야 할 때다.

살리는 말 한 마디

뭐가 중요한데?

오랜 친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작은 체구에서 어떤 힘이 나오는지, 또렷또렷, 빠릿빠릿, 당찬 오뚝이 같습니다. 오랜 시간 간호사로 일하며 환자들을 돌봐온 친구는 지금 어느 큰 병원의 연구 간호사로 있으면서 췌장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가 만난 환자들이 그동안 몇 명이나 될지 가늠해 보기도 어려운데, 환자들에게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제 친구지만 경이롭다 싶습니다. 병원에서 간호사의 역할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많지요. 제게 이 친구는 건강에 관한 한 최고의 조언자로서 적극적인 태도를 항상 강조합니다. 생각이 많아서 머뭇거리는 제게 빠른 실행을 강조하는 친구를 보면, 조금만 방심해도 목숨이 오가는 사선(死線)에서 열렬히 싸워온 어떤 전사(戰士)를 보는 것 같아요. 그 전사는 그러나 모든 일이 심각하지만은 않습니다. 저녁에는 취미로 춤을 추고 여름에는 주말농장을 일구며 일과 휴식의 균형을 잘 맞춰 나가는데요. 이 친구가 제게 자주 하는 말이 “머가 중요해?”입니다. ‘대체 뭐가 중요한데?’라는 질문을 할 때 친구는 주저하고 망설이는 제게 큰 도움 되는 삶의 자세를 알려줍니다. 본질만 보라고, 그러면 간명하게 간추릴 수 있다고. 군더더기는 빼고 핵심만 생각해 보라고. 의료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친구가 언젠가 종로 거리를 걸으며 무심코 던진 이 말. “내 말 아니고, 영화 대사야.” 친구는 웃어넘기지만 제게 이 말은 그때 그 시간 저를 살린 말로, 생각에서 행동으로 건너가는 시간차를 줄여준 효과 만점의 단방약(單方藥)이었지요. 고민되는 문제가 있으면 이 말을 떠올리며 가끔 심호흡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복잡한 일이 간추려지고 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코헬렛의 이 구절이 생각납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코헬 12,12-13) 늘 분주하게 이것저것 재고 고민하는 우리. 하지만 그토록 복잡하게 늘어놓은 우리의 목록들이 실은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니 ‘뭐가 제일 중요한데?!’를 생각하면,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 평생, 삶의 기준점으로 삼는 가치가 또렷해집니다. 친구는 ‘머가 중요해?’에 이어서 “아니면 말고” 툭 덧붙입니다. “이것도 영화대사야, 호호.” 하면서. ‘아니면 말고’는 무책임하고 손쉬운 포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삶에서 본질과 핵심만 남기고 생각하되 사람이기에 하기 마련인 실수가 있어도 움츠러들지 말라는 것, 시행착오를 겁내지 말라는 것. 그리 생각하니 더 큰 용기가 생깁니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성취가 아니라 네 생명을 충만하게 하는 핵심으로 삶의 방향을 세우면 된다고. 그러면 일의 우선순위가 잡힌다고. 새로운 날, 또 어떤 생각도 못 한 일이 다가올지 모르지만, 무섭지 않다고, 차근차근 걷겠다고요. 글 _ 정은귀 스테파니아(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2면
사설

이주노동자의 사람다운 삶을 위해 노력하자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은 ‘값싼 노동력’이라는 낡은 시선과 이들의 삶을 억압하는 제도 사이에서 쉽게 다치고, 쉽게 버려진다. 단속을 피해 달아나다 숨진 유학생, 지게차에 결박된 채 끌려다닌 노동자 사건은 예외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이주민이 겪는 실제의 삶이다. 폭행과 차별, 장시간 노동과 휴일 미보장, 임금체불은 반복되지만, 언어 장벽과 고용허가제에 따른 사업장 이동 제한은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든다.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최소한의 권리조차 배제되는 현실은 더 큰 비극을 예고한다. 교회는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고백한다. 레오 14세 교황은 이주민을 환대하는 공동체야말로 그 존엄이 실현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본당과 신자들은 이주노동자가 겪는 다양한 어려움을 보듬어 주는 등,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동반해야 한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식탁을 나누며 ‘우리의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하는 것도 복음의 실천이다. 미등록 이주민 산모와 아기를 돕는 가톨릭광주사회복지회 여수이주민지원센터의 ‘친정엄마 프로젝트’는 그 대표적인 예다. 국가와 사회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 임금은 노동자의 생명줄이며, 고의·상습 체불은 ‘절도’에 준하는 중대한 범죄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체불 사업주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노동자의 실질적 사업장 이동권을 보장하며, 단속의 인권 기준과 긴급구제 절차를 확립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공동선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시민이다. 오늘 우리의 기도와 연대가, ‘설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이들에게 사람답게 살 권리를 돌려주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3면
독자마당

[독자마당] 본당 설정 50주년에, 나는

생각해 보면 참으로 겁 없이, 다가올 험난한 미래를 모른 채 2024년 4월 ‘25주년사 편찬위원회 발대식’에 참여했다. 클라라 위원장을 비롯해 바울리나, 플로라, 미카엘라 자매, 솔로몬 형제, 그리고 나까지 여섯 명이 편찬위원으로 함께했다. 얼마 뒤 사제관 1층 소회의실이 위원들의 회의실로 정해졌고, 그곳엔 미카엘라 자매가 부직포로 정성껏 만든 ‘집현전’이라는 명패가 붙었다. 갈곶동본당 공동체가 걸어온 자취를 기록하기 위해 지혜를 모으자는 뜻으로 솔로몬 형제가 지은 이름이었다. 그 명패는 1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첫 회의에서는 업무를 분담했다. 솔로몬 형제가 오산의 역사와 본당 관련 통계 자료를 맡았고, 나머지 자매들은 일곱 분의 역대 사제들을 나누어 맡아 본당의 역사를 사진과 글로 기록하기로 했다. 내가 맡은 시기의 자료는 너무도 부족했다. 창고 속 먼지 쌓인 기안 철과 주일학교 자료를 뒤졌고, 관계자들의 기억을 조각조각 모아 빈틈을 채워 나갔다. 2025년 11월 출간을 목표로 우리는 한배에 올랐다. 신부님별 사목 활동 정리는 2024년 연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위원들 모두 본업과 성당 봉사를 병행하다 보니 작업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6월 말에 1차 초안을 출판사로 보내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 그때부터는 ‘활자와의 싸움’이었다. 오타와 맞춤법은 AI의 도움을 받았지만, 숫자와 날짜, 고유 명사를 끝까지 확인하고 책임지는 일은 결국 사람의 몫이었다. 눈이 빠질 듯한 통증과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이 이어졌다. 주중에는 각자의 하루를 마친 뒤 원고 앞에 앉았고, 주말에는 미사 후 카페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같은 문단을 들여다보며 문장의 맥락과 날짜의 정확성을 하나하나 짚어 갔다. 세 차례의 교정을 목표로 달린 끝에 9월 말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고, 10월 1일 마침내 출판 승인을 받았다. 드디어 2025년 10월 26일,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본당 설정 25주년 기념 미사 날, 우리는 우선 표지만 완성된 가본(假本)을 봉헌했다. 그리고 우리가 애초 목표로 했던 11월 23일에 594쪽에 달하는 책이 도착해 신자들에게 구역별로 순조로이 배포되었다. 책을 받아 든 순간, 벅찬 감동보다는 “진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고통의 순간도 많았다. 일의 진척이 더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을 위원장님은 책이 거의 완성될 무렵 활자만 봐도 속이 울렁거리는 후유증을 앓았다. 나 역시 내 일을 미뤄둔 채 매달려야 하는 상황에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 위로를 청했다. 고된 작업은 나를 더 자주 주님께 데려갔다. 집현전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위원들 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는 말씀 덕분이었다. 여정은 끝났지만 아직 완전히 그 기억에서 빠져나온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더 흘러야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기록을 정리하며 수많은 신자와 봉사자의 겹겹이 쌓인 시간을 보았다. 엄마 품의 아이는 어느새 청년이 되었고, 한때 성당을 날쌔게 누비며 봉사하던 자매님들의 걸음은 느려졌다. 성전 건립을 위해 식당 한쪽에서 손수 밥을 짓던 어르신들은 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다. 사람의 스물다섯이 젊음의 시간이라면, 공동체의 스물다섯 해는 성숙이 시작되는 계절일 것이다. 그 시간을 기록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앞으로 본당이 차츰 단단히 영글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내게 허락된 특별한 은총이 될 것이다. 갈곶동본당 설정 50주년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글 _ 김윤희 루치아(수원교구 갈곶동본당)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2면
방주의 창

‘새만금’ 이름을 다시 생각한다

2023년 8월 부실한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장으로 떠들썩할 때만 해도 새만금이라는 곳은 내 관심사에서 희미했다. 그러다 그 이름이 인장처럼 박히게 된 것은 2024년 노틀담 수녀회 생태영성세미나 때 다큐멘터리 영화 <수라>를 보고 나서다. 영화는 군산, 김제, 부안 사이에 흐르는 만경강과 동진강 발치에 펼쳐진 천혜의 갯벌 해안에 33.9km의 세계 최장 방조제가 생기면서 일어난 사연을 들려주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갯벌을 파괴하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의 사투가 펼쳐졌다. 새만금은 바로 이 갯벌을 매립해 옥토로 만들겠다며 만경평야의 '만'과 김제평야의 '금(김)'을 합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전에 만경강-동진강 하구 갯벌로 불리던 때는 바지락과 온갖 생물들이 지천이었고, 풍부한 먹거리 때문에 하늘을 가릴 만큼 많은 다양한 철새가 춤을 추던 곳이다. 주민들도 이 갯벌에 기대어 풍족하게 살았다. 특히 도요새 십만 마리의 군무를 목격한 이들은 1991년 방조제 공사의 첫 삽을 뜨던 때부터 지금까지 만신창이가 된 새만금을 부둥켜안고 새 한 마리, 조개 하나라도 더 살아남아 있는지 찾아 헤매고 있다. 대표적인 그룹이 ‘시민생태조사단’이다. 누가 시킨 것도,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수십 년간 이 일을 해오고 있다. 그 이유가 나를 새만금에 사로잡히게 하였다. ‘아름다움을 본 죄’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모르고 ‘아름다움을 본 죄’만으로도 이토록 자연을 돌보는 그들 앞에서, 나는 ‘아름다움’ 자체인 창조주 하느님을 믿고 사는 수도자인데도 새만금에서 벌어진 생태 학살조차 몰랐다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너무 늦게야 새만금을 알게 된 것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그 후 나는 ‘아름다움을 본 죄’라고 답하는 아름다움을 본 죄인이 되어 2025년 2월 새만금 환경생태 1차 기행에 참가하였다. 새만금 내 수라갯벌과 해창갯벌, 잼버리 야영장까지 둘러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방조제가 생기고 매우 적은 해수 유통이 얼마나 새만금을 썩게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조개와 생물들이 폐사하고 철새들이 줄어들고 갯벌 생태계가 무너졌는지,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한 개발을 위해 갯벌을 육지화하는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리고 수십조가 넘는 혈세를 부어야 하는지, 이미 적자운영 중인 군산공항 옆에 마지막 남은 수라갯벌을 없애고 지으려는 신공항의 조류 충돌 위험이 무안국제공항의 650배에 달할 만큼 높은지 등이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창조 작품을 인간이 감히 이렇게 훼손하고도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지 두렵기까지 했다. 기후학자들의 예견으로 보면 적극적인 기후위기 대응을 하지 않는 한,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 도시들이 잠길 날이 그리 멀지 않은데 개발자들은 이 사실을 염두에나 두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을 파괴하고도 새만금이 옥토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새만금보다는 옛날처럼 만경강-동진강 하구갯벌로 부르자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새만금이 이름값을 못 한다는 반증이다. 사실 옥토는 갯벌 그 자체로 있을 때였다. 그 위에 사람들이 거룩할 정도로 무릎 꿇고 바지락을 쓸어 담을 때였다. 철새들이 하늘을 덮을 때였다. 천지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흙으로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의 협력자로 데려오셨다. 다만 사람이 그들을 알맞은 협력자로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창세 2,18-20 참조) 우리는 정녕 새들이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생태계 균형을 이루는 중요한 협력자임을 인정해야 한다. 더욱이 그들의 군무는 ‘아름다움을 보는 죄인’을 더 많이 낳고 최선을 다해 창조세계를 돌보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새겨졌던 새만금이 흐려지고 ‘새만은(새많은) 갯벌’이라는 이름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새만은(새많은) 갯벌’을 너도나도 자꾸 부르면 말이 씨가 되지 않겠는가! 글 _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노틀담 수녀회,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 1988년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했고,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서 생명문화학 석사를 받았다. 인천교구 환경사목부 사무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노틀담 생태영성의 집에서 생태영성교육을 담당하며,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환경운동 실천 공로로 인천광역시의 ‘제1호 환경특별시민’에 선정됐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3면
일요한담

생명을 나누는 길에서

30년쯤 되었을까. 백혈병을 앓던 미 공군사관생도 김성덕(브라이언 성덕 바우만) 군이 조혈모세포 기증자를 찾고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도 전해졌고, 많은 사람이 유전자 적합성 검사를 받았다. 나 역시 혈액원을 찾아 기증 의사를 밝혔지만 결과는 불일치였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초등학생 아이가 나와 완전히 같은 유전자 적합성을 지니고 있어, 내가 기증하면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기증을 승낙하자 생활 전반에 주의가 요구되었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으며, 이식일이 가까워질수록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교통사고까지 조심해 달라는 당부를 들었다. 마치 내가 임신이라도 한 사람처럼 보호의 대상이 된 느낌이었다. 기증을 위해 2박3일간 입원하게 되었다. 서약서를 쓰며 뜻밖의 문장을 마주했다. 전신마취 후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에 동의하느냐는 내용이었다. 순간 망설임이 스쳤다. 내 치료도 아니고, 타인을 돕는 일인데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벌써 환아는 면역력을 거의 제로로 만든 채 무균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포기하면 그 아이의 생명도 위태로워질 상황이었다. 아내는 이제 와서 물러설 수 있겠느냐며 조용히 등을 떠밀었다. 골반에서 골수 1000cc를 채취하여 제공했고, 이식은 다행히 원만히 이루어졌다. 그 아이의 혈액형이 이제 나와 같은 B형으로 바뀐다는 말을 듣고는 생명의 신비 앞에 잠시 말을 잃었다. 회복 후 강의실로 돌아가 보강하려 했더니, 학생들은 박수로 맞아 주며 쉬어도 괜찮다고 했다. 이식 과정을 들은 학생 중 상당수가 헌혈과 조혈모세포 기증 등록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삶을 전하는 시간이었기에 더욱 감사했다. 요즘은 입원이나 전신마취 없이 말초혈관에서 성분 헌혈 방식으로 이식이 가능해져, 당시와 같은 부담은 크게 줄었다. 이식 후 일주일이 지나 열린 감사의 밤에서는 여러 수혜자 가족과 기증자가 한 줄로 서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누가 누구에게 기증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부모는 기증자들을 끌어안고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렸고, 어떤 가족은 큰 절로 고마움을 전했다. 그 장면 앞에서 나 역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백혈병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병이다. 내가 만났던 환우들 가운데는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도 있었고, 20년째 군 복무 중인 부사관도 있었으며, 젊은 대학생과 유명 배우도 있었다. 북한에서 치료를 위해 탈북한 고위층의 딸도 있었다. 병은 차별하지 않는다. 조혈모세포 유전자 적합성 데이터베이스는 과거에 비해 많이 확보되었고, 의학적 기술도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넘기 어려운 벽이 있다. 바로 경제적 어려움이다. 치료의 길은 열려 있지만,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힘이 부족한 이들이 있다. 지금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치료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이웃의 손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참조)라고 말씀하셨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복음의 자리를 향한다. 이 글을 읽는 우리의 작은 마음과 나눔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갈 수 있는 내일이 될 수 있다. 생명을 나누는 이 길에, 더 많은 이가 함께해 주기를 조심스럽게 청해 본다. 글 _ 노봉수 야고보(서울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2면
현장에서

“신자세요?”

사람을 함부로 갈라서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그런데 가톨릭신문 기자로 살다 보니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몹쓸(?) 사람이 되고 말았다. 두 부류란 바로 ‘신자’와 ‘비신자’다. 만나는 사람은 물론이고, 미디어에 나오는 사람들이 신자인지도 궁금하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대화 속 인물에 대해 혼잣말로 “신자인가?”하고 되뇌다가 “직업병”이라며 핀잔을 듣곤 한다. 그 직업병 덕분에 찾은 취재원도 여럿이다. 신자인지 알아보는 쉬운 방법은 “성당을 다니는지”를 묻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보통 “교회 다닌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명’까지 있다면 확실하다. 다만 ‘가톨릭’인지는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교회나 성공회 신자들도 ‘성당’을 다니고, ‘세례명’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신입 기자 시절 ‘세례명’까지 있는데 가톨릭 신자가 아닌 걸 알고 속으로 당황한 기억이 있다. 성사로서 세례를 거행하는 정교회와 성공회의 세례는 가톨릭교회에서도 유효하다. 일부 개신교회의 세례도 그렇다. 가톨릭교회도 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그리스도교 신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갈라진 형제’라 부른다. 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이 일치 활동에서 갈라진 형제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가르친다.(「일치교령」 4항) 물론 갈라진 형제들은 가톨릭교회의 성사에 참여할 수 없고, 서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치’를 말하는 이유는, 역시 우리가 믿는 주님이 ‘한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잊지 말아야겠다.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3면
사설

그리스도인은 갈등 치유하는 ‘화해의 사도’

교회는 매년 1월 18일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25일까지 8일간을 일치 주간으로 지내며 함께 기도한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물질만능주의, 양극화 등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오늘날 상황에서 일치를 위한 기도는 더욱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한국그리스도교신앙과직제협의회는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제목의 공동담화문을 발표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본보기가 되어,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는 ‘화해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가 형식적인 만남을 넘어 영적 일치와 우정을 쌓음으로써 세상에 희망을 전해야 함을 당부한 것이다.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청주교구 서운동본당과 한국기독교장로회 청주제일교회 이야기는 좋은 본보기다. 청주제일교회는 복자 오반지(바오로)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터로 알려진 교회 내 부지를 제공했고, 서운동본당은 그곳에 ‘순교 정원’과 더불어 지역사회에 기여해 온 제일교회의 의미를 기리는 ‘민주 정원’도 함께 조성했다. 충청북도의 종교 평화 프로그램에도 포함됐다고 하니, 교파 간 갈등과 반목 대신 화해와 일치를 보여주는 의미도 크다. 개신교회 뒷마당을 드나드는 천주교 신자들과 이를 환대하는 개신교 신자들의 모습이 생경하지 않은 것은,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일치 주간을 맞아 이 두 교회의 모습처럼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서로 화합하며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화해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하자.

발행일 2026-01-18 제3475호 23면
일요한담

새벽에 피어나는 묵상 수필

지난여름, 충북농업기술원에서 특강을 맡게 되었다. 초청을 담당한 과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순간, 시간은 뜻밖에도 거꾸로 흘렀다. 그는 45년 전 가톨릭학생회 동아리에서 함께했던 제자였다. 그때 나는 지도교수였고, 그는 아직 세상 앞에 서툰 학생이었다. 졸업과 함께 각자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소식은 자연스레 끊겼다. 그런데 어느 날, 제자가 우연히 SNS에서 나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작은 인연의 실마리가 다시 강단 위의 만남으로 이어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의를 앞두고 우리는 옛 동아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자매’라는 이름의 모임이 지금도 카카오톡 방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도 초대해 달라 했고, 곧 반가운 인사들이 이어졌다. “교수님, 꼭 한번 뵈어요”, “주례 서 주셨던 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호주에 사는 제자는 귀국하면 가장 먼저 인사드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흩어졌던 인연은 다시 사람을 불러 모았고, 결국 제자와 한 저녁 식탁에 마주 앉게 되었다. 그날 나는 얼마 전 출간한 「영혼과 육신을 살리는 음식 이야기」를 작은 기념으로 건넸다. 제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었고, 나는 여전히 학교와 가톨릭교수협의회 그리고 본당에서의 일상을 나누었다. 신앙 이야기와 추억이 겹치자 오랜 공백은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는 마치 늘 함께해 온 사람들처럼 웃고 공감했다. 헤어지며 제자들은 “영원한 동아리 지도교수님”이라는 과분한 말을 남겼다. 그 한마디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 뒤로 카톡방은 하루도 쉬지 않고 살아 움직였다. 매일 복음 말씀이 공유되고, 신부님의 강론이 이어졌다. 묵묵히 준비해 주는 제자들의 마음이 고마워, 나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묵상 수필을 시작했다. 성경을 신앙의 언어로만이 아니라, 식품과학자의 시선으로, 때로는 농업인의 삶의 언어로 다시 읽어 내려간 글이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이렇게도 다가올 수 있군요”라며 기뻐해 주었다. 그 변화는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다. 매일 이른 새벽, 말씀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고요하고도 충만한 시간이 되었다. 바쁜 일상에서도 그 글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돌이켜보면, 내가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남겼다기보다 그들이 다시 내 삶 안으로 신앙의 숨결을 불어 넣어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르침은 시간이 지나 사라질 수 있지만, 함께 나눈 말씀의 온기와 삶의 태도는 사람 사이에 남아 조용히 이어진다. 신앙은 거창한 선언으로 자라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 만남 하나, 잊고 있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인사 한마디, 그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은 성실함 속에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제자들과 나눈 이 작은 수필의 인연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내게 다시 맡기신 ‘지도’가 아니라 ‘동행’의 소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서 가르치기보다 나란히 걷도록 부르시는 초대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묻는다. 얼마나 더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더 함께 머물 수 있는가를. 신앙은 그렇게, 말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머물며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글 _ 노봉수 야고보(서울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발행일 2026-01-11 제3474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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