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교회 선교 사명 수행에 중추적 역할 기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숫자 ‘60’은 역사의 한 주기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가 60년 동안 보편교회에 보여준 헌신과 노력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경험들이 새로운 출발을 위한 든든한 밑거름이 되리라 믿습니다.” 바티칸 시국 행정부 차관 에밀리오 나파(Emilio Nappa) 대주교가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 설립 6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방한했다. 2022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교황청 전교기구 총재를 역임한 나파 대주교는 한국지부가 앞으로도 보편교회의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다. “1990년대 후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결정으로 서울대교구를 비롯한 한국교회는 교황청의 재정적 지원을 더 이상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세계 곳곳 어려운 교회와 교구를 돕기로 한 것이지요. 이러한 한국교회의 너그러움은 오늘날 세계 여러 교회의 귀감이 됩니다” 나파 대주교는 “한국지부는 단순히 한국교회 기구가 아닌 보편교회 기구로 한국의 선교사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선교 사명을 수행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고 있다”며 “이는 1200여 개에 이르는 선교 지역 교구의 선교사들이 생활하고, 성당을 짓고, 교리교사를 양성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지부가 더욱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한국교회 각 교구에 전교기구를 담당하는 지부를 두는 것도 필요하다 본다”며 “한국지부와 각 교구 간 긴밀한 소통 속에 세계 교회의 어려움을 더욱 잘 이해하며 보편교회와의 협력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파 대주교는 전교기구 활동과 지원의 핵심이라 할 선교에 관해서는 ‘비범함’을 키워드로 꼽았다. “모든 믿는 이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직접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믿음과 희망, 사랑의 정신으로 일상의 작은 일들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정신으로 하느냐입니다. 평범한 일을 비범한 정신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이탈리아 나폴리가 고향인 나파 대주교는 한국과 이탈리아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민족적 성향도 닮은 점이 많다고 전했다. 그는 “한국의 주교님들과 신자분들의 환대를 받으며 감정이 풍부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을 지닌 제 고향에 온 느낌을 받았다”며 “퇴원 후 성녀 마르타의 집으로 돌아오신 교황님께 한국 신자분들의 환대, 그리고 교황님의 쾌유를 청하는 기도와 응원을 직접 전하겠다”고 밝혔다. “가톨릭이라는 단어는 신앙을 통한 하나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계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형제자매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 도움을 전할 수 있는 건 큰 축복입니다.” 3월 26일 입국한 나파 대주교는 이날 주교회의 정기총회 중인 한국 주교단과 서울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 기념미사’를 함께 봉헌했다. 이후 주교회의를 찾아 상임위원회 주교들과 오찬과 간담회를 열고, 28일 대구대교구, 29일 수원교구, 30일 서울대교구 등을 방문한 후 31일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 60주년 기념미사에 함께했다.

“연민의 하느님 시선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삶 기록”

“사람이 고통받는 현장에서 사진 찍습니다” “사진은 개인적 유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든 순간에는 소명의식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받고 있는 현장에 저를 부르셨고, 저는 사진으로 응답할 뿐입니다. 세상과 인간을 위하시는 연민의 하느님 모습을 사진으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겪는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사진에 담고 있는 장영식 작가(라파엘로·부산교구 전포본당)는 노동 현장이나 사회 현안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본래 어릴 적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아 흑백 사진을 찍다가 몸담고 있던 교직을 떠난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처럼 사회적 약자들과 부조리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2011년 1월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인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영도조선소 제85호 크레인 고공 농성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입니다. 제85호 크레인 고공 농성도 그렇고,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 현장에서 제가 사진을 찍은 것은 하느님은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계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진작가로서 지금, 바로 여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장 작가는 오늘날에는 사진기를 손에 드는 사람은 누구나 사진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진을 통해 현실을 왜곡 없이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진작가라고 해서 특별한 자부심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이미지 시대이기 때문에 언어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지를 통해 현실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도 뒤따릅니다. 사진 뒤에서 사진이 말하고자 하는 언어를 읽어야 합니다. 항상 제가 붙박고 살고 있는 현실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사진가로서의 역할에 성실하게 임하고 싶습니다.” 장 작가는 지금도 구미 한국옵티칼지회, 서울 세종호텔,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벌이는 현장 등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픔의 현장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신앙에서 힘을 얻기에 가능한 일이다. “저는 현장에 사진기와 묵주를 꼭 지니고 갑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기억하고 연민의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국가의 부조리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짓밟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부르실 때, 응답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장 작가는 “안동교구 정양모(바오로) 신부님과 부산교구 고(故) 서공석(요한 세례자) 신부님의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면서 “최근 한국사회 현실에서 교회가 시대적 징표를 올곧게 읽고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순 시기를 거룩하게 보내는 참된 회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1면

“삶의 위기 속 깨달은 ‘행복’ 나누고 싶어 봉사”

“저뿐 아니라 가능한 많은 이들이 이웃 사랑을 베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려운 이웃들은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삶을 살면 자기 자신의 삶도 하느님께서 바꿔주십니다. 제가 위기를 극복하게 된 것처럼요.” 자원봉사활동 누적 1만5000여 시간으로 3월 14일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추천포상 국민포장을 수상한 퇴직공무원 윤영근(로베르토·수원교구 군포 부곡동본당) 씨는 봉사활동의 중요성에 대해 이처럼 말했다. 윤 씨는 “나보다 잘난 사람과만 비교하면 봉사나 후원하기 어렵다”며 “대중매체에 나오는 소위 잘 사는 1%가 아니라 다수의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을 바라보면 봉사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윤 씨가 본격적으로 봉사와 후원의 삶을 산 건 1980년 그가 21살이던 때 창원시 공무원으로 임용되면서부터다. 이후 공직생활 40여 년간 공무원 동료들과 함께 만든 밴드로 없는 시간도 끌어모아 자선 음악회를 열거나 직접 하모니카 공연을 하며 후원을 이어나갔다. 윤 씨는 “공무원으로 일하며 알게 된 건 열악하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음에도 복지정책의 까다로운 요건을 통과하지 못해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이들이 정말 많다는 것”이라며 “공무원 밴드만으로는 어려웠겠지만 공직생활 중 알게 된 여러 음악인들이 도움을 줘 바쁜 가운데에서도 공연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윤 씨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내·자녀와 함께 검소하게 생활하며 월급 일부를 매번 어려운 이웃을 위한 후원으로 쓰고 있다. 그는 “우리 가족은 차도 없고, 여름에 에어컨도 쓰지 않는다”며 “술도 담배도 하지 않다 보니 멀어진 지인들도 있지만, 그 덕에 이웃사랑에 쓸 여유를 얻었다”고 했다. “6살 때 어머니가,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런데 세상은 제가 돈을 벌어서 공부하며 살아남아야 했죠. 우유 배달부터 막걸리, 신문 배달까지 안 해본 게 없었습니다.” 윤 씨가 월급까지 아껴가며 이웃을 돕게 된 이유는 그의 과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윤 씨의 어린 시절은 당시 또래들보다도 힘겨웠다. 심지어 청소년 시절 비포장도로를 자전거로 타고 가다가 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고 말았다. 환경을 극복하고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취업이 힘들었다. 윤 씨는 “공무원은 시험만 잘 보면 학력과 상관없이 일할 수 있다는 말에 입대해 공부를 병행했고, 전역을 앞두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회상했다. 윤 씨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왔기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신앙생활하며 하느님께 받은 행복을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제가 공무원이 되고 또 기회를 얻어 대학원까지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오랜 기간 봉사하니 받은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것을 나누고자 지금도 지역에서 틈틈이 봉사하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1면

[인터뷰]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수상하는 브라우크만 수녀

“처음에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의료인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어서 상을 안 받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상은 저 혼자만이 아니라 원주가톨릭병원에서 오랜 세월 같이 일했던 모든 분들에게 주는 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받기로 했습니다.” 원주가톨릭병원장 하이디 브라우크만 수녀(Heide G. Brauckmann·프란치스코 전교 봉사 수녀회)는 제41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수상의 기쁨을 43년 동안 원주가톨릭병원에서 함께 봉사한 이들과 함께 나눴다. 브라우크만 수녀는 원주가톨릭병원이 지금까지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봉사자들과 후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후원자가 있습니다. 원주시 문막읍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오던 형제님이 진료를 받고 약값을 주시면서 꼭 봉투 하나를 같이 주고 가셨어요. 봉투 안에는 큰돈이 들어 있었고, 원주가톨릭병원 초창기에 병원을 꾸려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이번 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감추고 원주가톨릭병원을 후원해 주셨던 여러분들을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1943년 독일 베스트팔렌(Westfalen)에서 태어난 브라우크만 수녀는 1966년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하기 전 독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며 교육 분야에도 뜻이 있었지만 가난하고 피폐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에게 더 큰 봉사를 하기 위해 간호학을 공부했고, 보다 전문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느껴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1975년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당시 원주교구장이셨던 고(故) 지학순(다니엘) 주교님께서 저에게 결핵 환자들 치료를 부탁하셨어요. 1980년대 초만 해도 한국에 결핵 환자들이 많을 때입니다. 1981년 지 주교님의 협조를 얻어 원주교구청 3층에 진료소를 개설했는데 교구청 통로를 환자들이 가득 채울 정도로 환자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원주에 병원이 몇 개 없었습니다.” 그 후 1982년 원주시 학성동에 ‘원주가톨릭의원’을 개원했고 현재의 원주가톨릭병원으로 성장했다. 브라우크만 수녀는 올해 개원 43주년이 된 원주가톨릭병원 발전 방향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우리 병원 이용자들 대부분은 노인들입니다. 임종을 앞둔 노인들을 위한 호스피스 기능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병원 공간의 한계 때문에 호스피스 병동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주지역에는 아직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한국 문화가 낯선 이주노동자들에게 의료 혜택을 주는 활동도 앞으로 강화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브라우크만 수녀는 한국 의학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의사는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고 이런 마음으로 일하면 의사 스스로도 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와 주식회사 보령이 주최하는 제41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 시상식은 3월 24일 오후 5시 서울 이촌동 대한의사협회 지하 1층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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