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박효주
입력일 2025-05-21 09:44:30 수정일 2025-05-21 09:44:30 발행일 2025-05-25 제 3443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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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사도 15,1-2.22-29 / 제2독서 묵시 21,10-14.22-23 / 복음 요한 14,23ㄴ-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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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좋은 친구가 있습니다. 나 혼자라는 느낌에 외롭고, 되는 일이 없을 때, 언제라도 찾아갈 친구. 언제 찾더라도 기쁘게 반겨주는 그런 친구. 많은 말을 안 해도 되는 그런 친구가 있습니다. 나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가 돼 주시려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를 오래 세워두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에게도 친구가 필요하니까요. 인스타그램 @baeyounggil

오늘 복음(요한 14,23)에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한 신명기 6장 5절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 아래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받은 율법 가운데 으뜸입니다(마태 22,36-38 참조). 그만큼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율법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서 지키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운 규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레위기 19장 17절에는 이와 반대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미운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하듯 사랑도 함양해갈 수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과연 어떻게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애씁니다. 안식일이 되면,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 규정(예레 17,22)을 지키려고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기원전 6세기에 시나이산 계약을 어긴 죗값으로 망국의 비극을 겪었기에, 그런 재앙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키려 노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면 하느님 사랑이 실천해야 하는 행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영적 의미를 높게 보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이런 유다인들의 행동이 몸에 밴 습관처럼 비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제정한 고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무래도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인 의미가 원 뜻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에는 고대 근동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이 도움을 줍니다.

▶ 파라오에 대한 사랑:  옛 이집트에 자리했던 ‘아마르나’라는 성읍의 유적부터 보겠습니다. 아마르나는 한때 이집트를 뒤흔든 종교 혁명의 중심지로서, 고대 이집트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신을 섬긴 파라오의 수도였습니다. 옛 이집트의 종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다양한 동물 형상을 한 신들을 섬겼지만, 기원전 14세기 파라오 아케나톤은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며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겼습니다. 이런 행보가 기존 종교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기에 아마르나 시대는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마르나는 이후 성경 학계에서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옛 가나안과 이집트를 오간 서신이 이곳에서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은 ‘아마르나 편지’라 일컬어지는데, 옛 가나안과 이집트의 상황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따르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소규모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루살렘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서간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파라오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나안의 봉신 국가들은 파라오를 ‘사랑’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우리 기준으로는 파라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네들에게 사랑은 정치적 의미로서 ‘충성’을 뜻하였습니다.

▶ 아시리아 주군에 대한 사랑: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임금 에사르 하똔과 관련된 기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에사르 하똔이 봉신 국가들에 황태자인 아슈르바니팔을 ‘사랑’하라고 명하는데요, 이 역시 파라오에 대한 사랑과 맥을 같이합니다. 말하자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선, 계약의 맥락에서도 쓰인 일종의 관용어였던 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성경에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하거나 요구하는 구절이 신명기 6장 5절 외에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에 대해 위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면, 이는 ‘누구든 예수님께 충성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 21장 15절에서 19절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바닷가에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베드로에게 수위권(首位權)을 재확인하신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어보신 의도가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마음이 애틋한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신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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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