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아카펠라는 교회 음악이다?

아카펠라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아카펠라는 악기 없이 목소리만으로 화음을 맞춰 부르는 음악인데요. 아카펠라를 들으면 사람의 목소리가 이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카펠라가 교회 음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지금은 교회 음악에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고 있지만, 초기 교회에는 전례 중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이후 9세기경 교회 음악에 오르간이 도입되고 여러 악기들이 차츰 교회 음악에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클래식 음악들도 교회 음악으로 작곡된 곡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목소리로 내는 음악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큰 악기를 두기 어려운 작은 규모의 기도 공간, 경당에서 반주 없이도 하느님께 경건하게 찬미를 드리는 무반주 합창을 불렀습니다. 1500여 년 전부터 무반주 합창을 불러온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이 대표적인데요. 이 합창단이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에서 무반주 합창을 노래해, ‘성당식으로’, ‘성당 풍으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아카펠라(A Cappella)가 성당에서 부르는 무반주 합창을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아카펠라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경에 많이 작곡돼,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렇게 교회 음악을 뜻하던 아카펠라는 19세기 무렵 합창음악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변해 교회 음악과 관계없이 악기 반주 없이 하는 모든 합창을 부르는 말이 됐습니다. 카펠라, 바로 ‘성당’이라는 말이 음악의 한 장르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성당을 뜻하는 카펠라는 이전에도 뜻이 변한 적이 있는 말입니다. 카펠라는 성당 중에서도 작은 규모의 성당, 즉 경당을 부르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 군인의 외투인 카파(cappa)가 뜻이 변한 말입니다. 세례 받기 전 군인이었던 마르티노 성인(316~397)은 어느 날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걸인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카파를 반으로 잘라 내어줬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 성인의 꿈에 마르티노의 반쪽 카파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예비신자 마르티노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줬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그 후 세례를 받고, 나아가 주교가 돼 목자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선종 후에도 성인으로 널리 공경받았지요. 이후 성인의 카파를 보관하기 위한 작은 성당이 세워졌는데요. 사람들은 마르티노 성인의 카파가 있는 이곳을 카펠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마르티노 성인의 성당처럼 작은 성당, 즉 다른 경당들도 카펠라라고 부르게 됐고, 그래서 카펠라는 성당을 뜻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의 일화에서 경당, 경당에서 찬미 노래를 부르는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관련 없는 줄 알았던 ‘아카펠라’에 참 많은 교회의 이야기가 숨어있던 것 같습니다.

2024-09-0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인은 복자보다 높다?

순교자 성월인 9월, 우리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억하며 본받으려 노력합니다. 특별히 기도와 순례를 통해 성인들과 복자들을 공경하고 전구를 청하고 있지요. 순교자 성월은 우리가 기억하는 복자들의 시성이, 하느님의 종들의 시복이 하루빨리 이뤄지기를, 바로 시복시성을 염원하는 마음을 북돋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시복시성이라고 하면 교회가 어떤 인물을 복자로, 그리고 성인으로 선포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 신자들이 영웅적으로 덕행의 길을 닦고 하느님의 은총에 충실한 삶을 살았음을 장엄하게 선언”하는 것이지요.(「가톨릭 교회 교리서」 828항) 시복시성은 교회법적인 절차에 따라 엄정한 검증을 거쳐 진행되는데요. 시복시성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에게 복자, 성인의 순서로 칭호를 부여합니다. 시성을 위한 과정에 복자가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보니 성인이 더 대단하고 높은 분이고, 복자는 그보다는 덜 높은 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자·성인이라는 칭호는 그분들의 공덕이나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광의 차이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복자를 일컫는 라틴어 베아투스(Beatus)는 ‘복된, 행복한, 축복받은’이라는 뜻도 있지만 ‘천국에 있는’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상태를 말합니다. 지복직관이란 하느님을 직접 뵙는(直觀), 지극한 행복(至福)을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1코린 13,12)이라고 말씀하시듯,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를 표현합니다. 성인은 의미상으로 거룩한(聖) 사람(人)을 의미하는데, 실은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거룩한 분은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친교, 일치를 통해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지복직관에 이른, 하느님 나라에 든 분들입니다. 우리는 시성식을 하면 “○○이 성인의 반열에 들었다”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엄밀히 이야기하면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사실 시복식·시성식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하느님 나라에 계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복시성을 하는 이유는 아직 지상교회를 순례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자들이 그분들이 보여준 완덕의 모범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또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길 청할 수 있는 분들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성인들이나 복자들의 명부에 올린 하느님의 종들만을 공적 경배로 공경할 수 있습니다.(「교회법」 제1187조) 그렇기 때문에 아기들은 시복시성을 하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죄의 물들지 않아 하느님의 영광 안에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영웅적인 성덕을 제시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시복시성을 염원한다는 것은 우리가, 또 우리의 후손들이 이분들을 본받으며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길 바라는 일입니다. 순교자 성월, 함께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하면 어떨까 합니다. “후손인 저희들이 그들을 본받아 신앙을 굳건히 지키며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 내려 주소서.”(‘시복 시성 기도문’ 중)

2024-09-0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 봉헌금은 꼭 앞에 가서 내야 할까?

‘가톨릭페이’로 봉헌금을 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가톨릭페이는 가톨릭신자 앱 ‘가톨릭하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선불 전자 지급 수단인데요. 아직 모든 본당에서 가톨릭페이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 가톨릭페이를 쓰는 본당이 늘고 있습니다. 가톨릭페이로 봉헌금을 낼 때는 가톨릭페이에 돈을 충전하고 봉헌할 금액을 설정해 둔 다음, 봉헌 바구니에 있는 QR을 찍는 방식으로 봉헌합니다. 현금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봉헌금을 낼 수 있지요. 가톨릭페이로 봉헌을 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현금으로 봉헌을 할 때에는 직접 내야 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결국 모바일기기로 헌금을 하는데 꼭 제대 앞까지 나가야 하는 걸까요? 자리에 앉아서 터치로 송금해도 봉헌금이 전달되는 것은 같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전례 안에서 앞으로 나가서 봉헌을 하는 것과 온라인 송금으로 봉헌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봉헌 중 제대 앞으로 나아가는 봉헌 행렬은 하느님께 나아가 봉헌금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봉헌 행렬은 예물 준비 행렬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예물 준비란 그리스도의 성찬례를 위해 상을 차리고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놓는 예식입니다. 예로부터 신자들은 성찬례를 위해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 왔습니다.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올 때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줄 선물도 가지고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물품을 가져오던 이 선물은 11세기경부터 돈으로 변화했는데요. 이것이 오늘날 봉헌금이 됐습니다. 이 봉헌금에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담겼습니다.(2코린 8,9 참조) 그리고 무엇보다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제물을 봉헌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을 당신 희생 제사 안에서 완전하게 하신다”며 “신자들의 삶, 찬미, 고통, 기도, 노동 등은 그리스도의 온전한 봉헌과 결합되며, 이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게 된다”고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50, 1368항) 결국 제대를 향해 나아가는 봉헌 행렬은 그저 빵과 포도주, 그리고 봉헌금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봉헌과 결합하게 될 우리 자신도 제대에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런 봉헌 예식은 미사가 참례한 모든 이의 희생 제사임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미사 중에는 봉헌 행렬 말고도 제대를 향해 나아가는 행렬이 더 있습니다. 사제와 부제, 봉사자들이 제대로 나아가는 입당 행렬, 복음 선포 전에 복음서를 독서대로 모셔가는 복음 행렬, 영성체를 하러 나아가는 영성체 행렬이 그렇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은 “이러한 행위와 행렬은 각각의 규범에 따라, 알맞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우아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44항) 이번 주일도 봉헌금을 잘 준비하셨나요? 현금으로 준비한 봉헌금이든, 가톨릭페이로 내는 봉헌금이든, 한 주간 우리가 겪은 모든 삶을, 우리 자신을 함께 봉헌하는 마음,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2024-08-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대세(代洗)는 반쪽짜리 세례다?

대세(代洗)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죽을 위험에 처해있거나 죽음을 앞둔 분이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순간, 성직자가 찾아오기 어렵다면, 성직자가 아닌 사람이 간단한 예식으로 세례를 집전할 수 있는데, 이런 세례를 대세라고 부릅니다. 성직자 대(代)신에 세(洗)례를 집전한다는 의미의 한자어지요. 아시다시피 세례성사의 주례자는 성직자입니다. 교회법도 “세례의 정규 집전자는 주교와 탁덕(신부)과 부제”라고 말합니다.(제861조 1항) 또한 세례의 장소도 “성당이나 경당”으로 규정돼 있습니다.(제857조) 죽음에 임박한 분이 성당을 찾아갈 여유는 없겠지요. 그러다 보니 대세는 정규 집전자가 집전한 것도 아니고, 하물며 성당도 아닌 곳에서 세례가 이뤄집니다. 그리고 대세를 받았는데, 천만다행으로 건강을 회복했다면 보례(補禮)를 받아야 합니다. 예비신자처럼 정식 교리를 받고 대세를 받을 때 생략된 다른 입교 예식들을 보충하는 예식이지요. 이렇게 보니 어쩐지 대세는 완전한 세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세는 결코 불완전하거나 반쪽짜리 세례가 아닙니다. 대세 역시 세례로서 부족함 없이 유효한 세례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의 일반적인 집전자는 주교와 사제지만, 교회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성삼위의 이름이 명기된 세례 양식문을 사용하여 세례를 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56항) 교회법 역시 “부득이한 경우에는 합당한 의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적법하게 세례를 줄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제861조 2항) 위급한 상황이라면 성직자가 아니더라도 적법한 세례를 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박해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신앙선조들은 성직자가 부족하고 박해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대세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세가 박해시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 분들이 많이 계시고, 또 죽음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병원에서 대세를 받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어느 날 우리 곁에 갑작스럽게 죽음을 앞둔 분이 세례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바로 우리가 세례를 집전해 그분이 하느님 곁에 가실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대세를 집전하는 방법을 알아둔다면 예상치 못한 그 어느 때 누군가의 영혼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대세를 집전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깨끗한 자연수를 이마에 부으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고 말하면 유효한 세례가 됩니다. 물론 죽음을 앞뒀다고 누구에게나 다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되겠죠. 어른의 경우 대세를 받기 위해서는 신앙의 주요한 진리에 대한 지식이 조금 있고, 어떤 형태든지 세례를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아기의 경우는 죽을 위험이 있다면 지체 없이 세례를 받아야 하고요. 이렇게 대세를 집전한 후에는 ‘대세 보고서’를 작성해 본당에 제출하면 됩니다.

2024-08-1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승천하신 성모님께 무덤이 있다?

지금은 전쟁으로 찾아가기 어렵지만,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빠지지 않는 순례지가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시온산, 최후의 만찬 성당 옆에 자리하고 있는 ‘성모 영면 성당’입니다. 성모 영면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모습을 자랑합니다. 원뿔형 지붕과 지붕을 둘러싼 네 개의 작은 탑이 인상적인 건물이지요. 그리고 성당 내부에는 석관이 있는데요. 석관 위에는 실제 사람 크기로 두 손을 모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의 성모님이 조각돼 있습니다. 영면하신 성모님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입니다. 이쯤 오니 번뜩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면(永眠)은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하늘로 불러올리셨다고 믿고 있는데 어째서 성모님이 영원히 잠들었다고 이야기하는 성당이 있고, 또 우리는 그 성당을 순례하고 있는 걸까요? 일단 왜 성모 승천이 아니라 성모 영면(Dormitio)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됐는지를 살펴야겠습니다. 8월 15일을 성모 승천 대축일로 거행하게 된 것은 1950년부터지만, 실은 8월 15일은 성모님의 축일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축일 중 하나입니다.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에페소 공의회(431년)가 끝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8월 15일을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축일’로 지냈고, 성모 신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당시 성모님의 마지막에 관한 다양한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는데요. 돌아가신 성모님을 무덤으로 옮기던 중 성모님께서 살아나 승천했다는 이야기, 죽은 지 3일 후에 부활해 승천했다는 이야기, 죽지 않고 바로 승천했다는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승천하셨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어떻게 승천하셨는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루살렘 신자들은 성모님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장소를 찾아 경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8월 15일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축일’의 이름도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영면(죽음) 축일’로 변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8월 15일을 성모 영면 축일로 지내오다 8세기경 ‘승천’이란 말을 사용하게 됐다고 합니다. 다시 성모 영면 성당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모 영면 성당에 있는 석관은 비어 있는 석관입니다. 교회는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59항)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도 하늘로 불러올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모 영면 성당의 빈 무덤은 성모님의 육신이 지상에 남아 있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하늘로 불러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언젠가 무덤에 묻히겠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때, 우리의 무덤도 성모님의 무덤처럼 빈 무덤이 되리라 믿습니다.

2024-08-1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자도 있다?

수녀님, 수사님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수도복을 입고 있는 수도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갈색, 회색, 흰색, 남색 등 수수한 색상에 상하의가 나뉘지 않고 발목까지 길게 늘어진 모습입니다. 수녀님들의 경우 머리 수건을 착용합니다. 이런 수도복은 보는 이들까지도 경건한 마음이 들게 해줍니다. 수도자들이 이렇게 수도복을 입는 것은 수도복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청빈을 실천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축성생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로서 단순하고 단정하며 검소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수도 생활 교령」 17항)고 말하고, 교회법을 통해 “수도자들은 자기의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로서 고유법의 규범에 따라 정해진 수도복을 입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1항) 수도복은 본래 수도회가 세워지던 당시 일반인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입던 평상복이었습니다. 3~4세기경 수도회들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수도원 안에서 복장을 통일해 나갔는데요. 수도회들은 당시의 농부나 서민들이 입던 옷을 수도복으로 삼았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원한 수도자들이기에 가장 최소한의 옷을 입고자 했던 것이죠. 시대가 흐르면서 일반인들의 복장은 변했지만, 수도자들은 당시의 복장을 그대로 이어오다 보니 오늘날에 와서는 수도자들의 복장이 독특한 복장으로 여겨지게 됐습니다. 수도자의 수도복은 봉헌의 표지 단순·단정·검소하고 품위 있어야 사도직 현장에 따라 평상복 입기도 하지만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회들도 있습니다. 특히 예수회나 살레시오회 등 남자 수도회 중에는 별도의 수도복이 없는 수도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수사님 중에 사제품을 받은 신부님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수단이나 클러지 셔츠를 입고 계신 수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교회법은 “고유한 복장이 없는 회의 성직자 수도자들은 제284조 규범에 따른 성직자 복장을 입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669조 2항) 예수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이창현(비오) 신부님은 “사람들 안으로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사도직을 수행하기 때문에 예수회 설립 당시부터 수도복을 따로 입기보다 사제들의 복장인 수단을 그대로 입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녀님들 중에도 수도복을 입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성심 수녀회는 흰 블라우스에 감색 치마를 정복으로 하되, 사도직 현장에 따라 그에 맞춰 평상복을 입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복장이든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 수도회의 경우 정해진 수도복이 있지만, 가난한 이들과 같은 신분으로 함께 일하고 생활하는 공동체에서는 수녀님들이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성심 수녀회 한화관구장 최혜영(엘리사벳) 수녀님은 “성심 수녀회는 설립 당시 과부들의 복장을 수도복으로 입어왔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창설자의 취지를 생각하면서 소박하고 검소한 옷으로 입자고 결의했다”면서 “사복을 입고 있지만 십자가 목걸이로 축성의 표지와 청빈의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24-07-2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은 몇 번 치는 걸까?

유명한 성당이나 성지를 순례하다보면 성당 종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에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요. 바로 삼종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삼종기도 종소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종을 제법 많이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종을 몇 번 치는 걸까요? 그래서 삼종기도 시간에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을 찾아가 직접 세어봤습니다. 모두 33번이었습니다. 수원교구 안성성당에도 가서 세어보니 마찬가지로 33번이었습니다. 안성성당에서 7년째 종지기를 하고 계신 유국형(요한) 형제님께 물어보니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예수님 나이가 33세라 33번을 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이라니! 삼종기도에 참 어울립니다. 그런데 삼종기도 종이 33번이 아닌 성당들도 있었습니다. 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의 삼종기도 종은 42번 울립니다. 대전교구 주교좌대흥동성당에서 2019년까지 50년간 종지기를 해오신 조정형(프란치스코) 형제님은 작은 종, 중간 종, 큰 종을 각각 세 번씩 울리고 다시 종들을 20번 가량 연속으로 울리는 방식으로 종을 쳐오셨다고 합니다. 꼭 33번을 쳐야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타종 횟수는 달랐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처음 9번은 타종 방식이 같다는 것입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3번씩 끊어서 3차례 치는 것이지요. 이는 삼종기도 안에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가 셋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삼종기도를 다 바칠 동안 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기 위해 계속 종을 치는 것입니다. 삼종기도는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가 담긴 세 가지 성경 구절(루카 1,28; 루카 1,38; 요한 1,14)과 성모송, 본기도로 구성된 기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번 종이 칠 때 바치는 기도라 해서 삼종(三鐘)기도라고 부르지만, 기도문이 “주님의 천사가(Angelus Domini)~”라는 구절로 시작하기에 ‘안젤루스’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삼종기도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13세기 무렵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릴 때마다 성모송을 3번씩 바쳤고, 이것이 신자들 사이에 크게 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후 16세기에 성경 구절이 추가됐고, 17세기경에 오늘날 우리가 바치는 삼종기도의 형태가 됐다고 합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이 기도를 가능한 한 언제 어디서나 계속 바치도록 간곡히 부탁한다”면서 “말씀이 강생한 신비를 묵상하고 복되신 동정녀께 인사하며 그녀의 자비로운 전구를 바라는 것 등은 변함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41항) 이처럼 삼종기도는 우리가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과 수난과 부활로 이루신 파스카 신비에 이르기까지를 묵상하면서 우리의 아침, 낮, 저녁 시간을 거룩하게 해주는 기도입니다. 비록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삼종기도를 정성껏 바치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성당 종소리 같은 우리가 돼보면 어떨까요.

2024-07-2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회에도 법원이 있다?

‘교회 상식 팩트 체크’에서 종종 ‘교회법’을 인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법은 교회에 관한 여러 제도나 성사, 전례 등에 관한 규범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와 형벌, 재판에 관한 다양한 법규도 실려 있는데요. 그렇다면 재판을 하는 곳, 법원도 있을까요? 네, 교회에도 법원이 있습니다. 교회 법원도 사회의 법원과 비슷한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국 교구들에는 법원이 있는데요. 15개 교구에는 1심 법원이, 관구를 관장하는 대교구, 바로 서울·대구·광주대교구에는 2심 법원이 있습니다. 대법원 역할을 하는 법원도 있습니다. 교황청에 있는 사법기구(Institutions of Justice)입니다. 이전에는 ‘법원’이라고 불리다 2022년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가 반포되면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사법기구 안에는 대사(大赦) 등을 다루는 내사원, 교회의 사법을 올바로 관리될 수 있도록 감독하는 대심원, 그리고 다른 법원들에서 이미 심판한 사건을 제3심이나 그 이상의 심급으로 재판할 수 있는 상급심 법원인 공소원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이 활동하듯이, 교회 법원도 비슷한 구성으로 재판이 열립니다. 먼저 청구인을 변호하는 변호인, 판결을 하는 재판관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사에 관한 재판을 하기 때문에 성사보호관이 검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법원은 사회의 법원과 구조가 비슷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요. 각 교구가 운영하는 법원은 누군가를 단죄하거나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가 각 교구에 법원을 설치한 이유는 혼인장애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이 교회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성사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성사를 통해 맺어진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은 것으로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혼’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 안에서는 결혼생활 중에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또 사회적으로 이혼·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성사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를 교회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혼인이 무효임을 밝히는 소송이 필요합니다. 이를 교구 법원들이 돕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혼인법에 관한 재판 외에도 여러 재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재판들은 법원에서 하기 보다는 별도의 위원회 등을 구성해 진행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시복시성을 위한 재판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교구 법원이 오롯이 신자들의 성사생활 회복을 돕는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수원교구 사법대리이자 재판관인 박석천(안드레아) 신부님은 “교구에 법원이 있는 목적 자체가 혼인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라며 “사회 법원처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고민 상담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시면 좋겠다”고 전하셨습니다.

2024-07-1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당에 들어가면 어디에 절을 할까?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고, 또 나올 때마다 고개를 숙여 절을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성당 앞의 제단을 향해서 예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기는 하는데, 정확히 어디에 인사를 하는 것일까요? 의외로 신자분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단 예수님께 인사드린다 생각하니 예수님이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인사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감실에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은 제대에 인사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올라온 답변들이 서로 달라 헷갈리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성당에 들어갈 때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미사 중 독서자들도 제단에 오르기 전에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대는 성체성사가 재현되는 주님의 식탁이자 성당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제대를 중요하게 여겼는데요.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교회가 그 둘레에 모이는 제대는 한 신비가 지니는 두 가지 측면, 곧 주님께서 희생되신 제단과 주님의 식탁을 나타낸다”며 “그리스도교의 제대가 상징하는 것이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3항) 제대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제사가 이뤄진 제단임과 동시에 예수님과 모든 신자들이 함께 하늘나라의 잔치를 만끽하는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나타”냅니다.(「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297항) 4대 교부 중 한 분으로 유명한 암브로시오 성인도 “제대는 성체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성체는 제대 위에 계신다”, “사실 그리스도의 제단이란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말씀들로 제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제대는 주로 돌로 만드는 데요. 그 이유도 “살아 있는 돌”(1베드 2, 4)이자 “모퉁잇돌”(에페 2, 20)이신 예수님을 더 잘 드러내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는 감실을 “성당 안에서 눈에 잘 뜨이는 뛰어난 곳에 아름답게 꾸며져 기도하기에 적합하게 설치”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교회법 제938조2) 감실을 “최대의 존경심으로써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설치하라고도 말합니다. 다만 감실의 외양과 위치는 “제대에서 이루어진 성체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는 주님께 드리는 경배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83항) 감실은 신자들이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와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고,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대에서 거행되는 성찬례가 없다면 감실도 없는 것이지요.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11항) 제대를 향해 고개 숙여 절할 때마다 성찬례를 통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시고, 또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2024-07-0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황님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무류성’(無謬性)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무류(無謬)는 ‘오류가 없다’는 뜻입니다. 라틴어 인팔리빌리타스(infalliblitas)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라틴어는 단순히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절대 오류에 빠질 수 없다’는 강한 의미를 담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무류성’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교황님입니다. 교회는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25항)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교황님을 참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교황님도 실수도 하고, 잘못 말하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황님이라고는 하지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만약 교황님이 절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미사를 시작하면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라며 고백의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고해성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없다면 죄를 짓지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미사 중 고백의 기도도 바치시고, “15일이나 20일마다 고해성사를 한다”고 밝히신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님이 무류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교회법은 “교황은 그의 형제들을 신앙 안에 굳세게 하는 것이 소임이므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해 고수해야 할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 그의 임무에 의해 교도권의 무류성을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749조) 교황님이 모든 분야에서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목자이자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언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라”(요한 21,15~17)고 명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께도 그 책임과 권한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의 무류성을 교의로 천명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실로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성령이 약속된 이유는 그분의 계시로 새로운 교리를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도들을 통해 전승된 계시 또는 신앙의 유산을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하게 보호하고 신실하게 해설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영원하신 목자」 제4장) 교황님이 새롭게 계시를 받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이미 주어진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데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고,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류성은 이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 곧 교회와 함께 머무시면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교의입니다.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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