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니 마르티노의 무덤 앞에서 든 생각

마테오 리치가 쓴 「교우론」 의 첫 줄은 ‘벗은 제2의 나’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짤막한 한 줄이 동아시아 지식인을 강타했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 이른바 연암 그룹의 이 책에 대한 열광은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이들뿐 아니라 조선 지식인의 문집 속에 이 책의 독서 흔적이 뜻밖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그 자취를 따라가다가 다시 마르티니 마르티노(1614-1661), 중국명 위광국(衛匡國)의 「구우편」(逑友篇)을 만났다. 1599년에 간행된 마테오 리치의 책보다 60여 년 뒤에 나온 서양 우정론의 확장 버전이었다. 책을 읽는데 제2장 ‘참된 벗과 가짜 벗의 구별’에 수록된 삽화가 <부자간의 친구 시험> 또는 <진정한 우정>이란 제목으로 익히 알려진 우리 옛 설화의 근원임을 깨닫고 한 번 더 놀랐다. 아들이 친구가 많은 것을 자랑했다. 늙은 아버지가 아들의 우정을 시험하려고, 실수로 사람을 죽였으니 도와달라고 청하게 했다. 자신의 모든 친구가 도움을 거절한 뒤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가자 두말 않고 도와주겠다고 나섰다는 얘기였다. 우리나라 설화에서는 시체로 꾸며 거적에 말아 지게에 얹고 갔던 돼지를 안주 삼아 기쁘게 술자리를 갖고 파하는 엔딩이 덧붙어 있다. 「교우론」과 달리 「구우편」의 독서 흔적을 찾지 못해 답답했던 마음이 쑥 내려갔다. 마침 2023년 3월, 마지막 연구 학기를 맞아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의 초청으로 6개월간 보스턴에 머물 기회를 가졌다. 그곳 도서관에서 나는 이 두 책에 관한 자료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엄청난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르티니의 중국에 관한 여러 라틴어 저작과 그에 관한 이탈리아어 전집 및 논문집까지 모두 찾아보았다. 서양에 남은 네 종류의 다른 초상화도 찾아냈다. 귀국 후 나는 동아시아에서 우정론 열풍을 불러온 「교우론」과 「구우편」을 정리 번역해서 「중국선비, 우정을 논하다」(김영사)를 펴냈다. 지난 2024년 6월 말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항저우로 건너가서 항저우 대학 근처에 있는 마르티니의 무덤을 찾아갔다. 큰 키에 영성이 넘치는 풍모를 지녔던 마르티니는 세상을 뜬 뒤 수십 년 동안 시신이 조금도 썩지 않아 그곳 신자들에게 신처럼 숭배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무덤은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된 것을 명맥만 남겨 보존한 것이다. 입구에 ‘위광국 전교사 기념관’이란 글씨가 고딕식 원주 위 대리석 문루에 새겨져 있었다. 안쪽 패루에는 앞면에 ‘천주성교수사지묘’(天主聖敎修士之墓)라 쓰고, 뒷면에는 ‘아신육신지부활’(我信肉身之復活)이라고 새겨 놓았다. 공산국가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는 글이 새겨진 서양 선교사의 무덤을 문물보호단위로 관리 보존하고 있었다. 우중에 그것도 새 단장을 위한 공사 중이라 온통 어지러운 상태의 그의 무덤 앞에 선 감회가 남달랐다. 이들이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중국 선교의 노력이 그들의 저작과 함께 조선에까지 닿아,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섭리의 손길로 이어진 경로에 대해 한동안 두서없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1-10

「성심보(聖心報)」와 「고려치명사략(高麗致命事略)」

「성심보」는 1887년부터 1949년 중국 공산화 직전까지 상해 서가회 천주당에서 매달 펴냈던 유서 깊은 신앙 잡지다. 발행인을 맡았던 심칙관(沈則寬, 1838-1913) 신부는 이 잡지에 조선 교회사를 순교자들의 자취 소개 중심으로 연재하였다. 1895년 6월, 제 97호에 실린 「고려치명」이란 첫 글에서 심 신부가 강완숙, 윤점혜, 문영인 세 여성 순교자를 소개한 것은 뜻밖이다. 내용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참고하였다. 이 글을 두고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심 신부가 조선 교회사의 큰 흐름을 살피는 내용으로 연재를 확장하면서 불어로 된 달레의 두꺼운 책 속에 숨어 있던 조선 교회의 여러 상황들이 현장 중계하듯이 이어졌다. 그들은 어떻게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 모진 박해의 시련 앞에서 어떻게 한 치의 의심 없이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나?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글에 소개된 조선 교우들의 순교 장면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분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총 24회로 이어지는 대장정이 시작되어, 1898년에야 마무리 되었다. 이 글 묶음은 1900년에 「고려치명사략」이란 제목 아래 한문 222쪽의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이것은 중국인 신부가 기사본말체의 역사 서술 방식을 채택해 재정리한 최초의 한문본 한국천주교회사였다. 원본인 달레의 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간명하고도 신선한 편집이었다. 지금부터 124년 전의 일이다. 잡지 연재 당시의 인명 표기는 엉망진창이었다. 강완숙은 성이 강(康)씨로 바뀌고, 윤점혜는 웅(熊)씨로 둔갑했다. 문영인은 맹(孟)씨로 써놓았다. 이승훈이 손봉의(孫鳳儀)가 되고, 이벽은 필의(畢義)로 표기하였다. 당초 달레는 이름을 알파벳 표기로만 적었는데, 중국과 조선의 한자음이 완전히 다른데다 심 신부가 조선어 한자 발음을 몰라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알파벳 표기에 가까운 중국음의 한자를 찾다 보니 벌어진 소동이었다. 막상 잡지 원고를 묶어 펴낸 「고려치명사략」에는 대부분의 이름이 바로 잡혔다. 최근 소진형 씨의 연구에 따르면 심칙관 원고의 인명 오류를 바로 잡아준 것은 뮈텔(1852-1933) 주교였다. 뮈텔 주교가 1898년 건강상 이유로 상해에 건너갔을 때 당시 『고려치명사략』의 출간을 준비 중이던 상해 서가회에서 뮈텔 주교께 인명과 장소 표기의 수정 검토를 요청했던 것이다. 뮈텔 주교는 이에 자신이 새로 입수한 「황사영백서」 등의 자료에 근거하여 인명 표기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었고 다른 자료까지 제공하였다. 그 결과 출판된 「고려치명사략」에는 달레의 책에 없는 정보까지 일부 첨가될 수 있었다. 더욱이 이 책이 1900년 당시 의화단의 난으로 중국 각지의 천주교회가 초토화되고, 신자들이 무자비하게 살육되는 와중에 조선 교우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이 시련을 이겨 내자는 취지에서 간행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뜻깊다. 무려 124년 전에 간행된 최초의 한문본 한국천주교회사 「고려치명사략」은 소진형 씨의 연구 외에 이제껏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고, 자료 가치가 없다고 보아 번역도 되지 않았다. 놀랍고 부끄럽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1-03

초서(抄書)의 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제자들은 모두 제 이름으로 된 총서(叢書)를 가지고 있었다. 총서가 있느냐 없느냐, 많으냐 적으냐로 아끼는 제자였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처음 책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이게 모두 그들의 저술인 줄 알았다. 실제로는 꼭 읽어야 할 내용을 초서(抄書)한, 즉 베껴 쓴 책이었다. 총서 대신 일록(日錄)이나 수초(手抄)로 제목을 붙인 경우도 있었다. 황상의 「치원총서」, 황경의 「양포총서」, 윤종심의 「순암총서」, 초의의 「초의수초」 등이 그러한 예이다. 다산이 깊은 정을 두었던 제자 황상은 그렇게 베껴 쓴 총서가 자기 키를 넘겼다. 현재 강진 다산박물관에 남아있는 것만 14책이다. 베낀 책의 목록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가 드러난다. 시인의 삶을 살았던 황상은 각 시대별 주요 시집들을 총서 속에 온전하게 갖추어 놓았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어째서 베껴 쓰기 같은 비효율적인 공부를 시켰을까? 책을 여러 번 밑줄 긋고 메모해 가며 읽는 것이 낫지 무슨 맛에 책을 통째로 베끼게 했을까? 구하기 힘든 책은 전체를 베꼈고, 간혹 핵심만 간추려 썼다. 중간중간 자신의 생각을 남기기도 했다. 그 생각을 살피는 것이 또 중요한 나의 공부 거리다. 공부의 방법으로 이 초서 작업은 뜻밖에 위력적이다. 연암 박지원의 친필 필사본 중 「영대정집」(映帶亭集)이 단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첫머리에 적힌 친필 서문은 나중에 간행된 문집 어디에도 없는 글이다. 처음에는 글의 맥락이 눈에 잘 잡히지 않았다. 공책을 펴서 또박또박 옮겨적고, 전철에서 자리에 앉아 우리말로 옮겼다. 막히는 부분은 다음날 보고, 다시 또 보았다. 전에 미심하던 뜻이 다음번에 보니 명확하게 눈에 들어 왔다. 책을 눈으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어지럽게 메모한 번역을 다시 깨끗하게 옮겨 쓰자 이제 단락별 맥락이 소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덧붙인 메모가 다시 어지러워져서 깨끗한 종이에 한 번 더 필사했다. 앞의 것을 보지 않은 채 내 생각을 메모하자 의미가 한 단계 더 정열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도 나의 필사는 두 차례 더 이어졌다. 베껴 쓰기는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박아서 뇌리에 심는 과정이다. 일종의 되새김질에 가깝다. 기계적으로 영혼 없이 베껴 쓰는 일은 없다. 교회사 연구자인 박용식 선생은 책을 눈으로 읽지 않고 손가락으로 읽는다. 중요한 책은 무조건 통째 입력부터 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3책은 200자 원고지로 근 7000매 분량인데 다 입력했다. 한국 교회사의 주요 저작들이 그의 컴퓨터 안에 없는 것이 없다. 「사학징의」, 「칠극」, 「벽위편」까지 다 있다. 글을 쓰다가 예전에 본 자료가 생각나지 않아 물으면 얼마 안 있어 원문과 함께 대답이 돌아온다.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나는 빈 종이를 꺼내 초서를 시작한다. 문득 예전 읽었던 글을 찾아 베껴 쓰기도 하고, 논문을 준비 중인 글을 다시 베껴 쓰기도 한다. 또박또박, 따박따박 베끼는 동안 글과 대화하고, 글쓴이의 생각 속에서 헤엄친다. 그러고 나서 그 아래에 내 생각을 다시 메모해 둔다. 서류봉투의 뒷면이나 포장지의 뒷면에 적은 메모가 묘목이 되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큰 나무로 자라난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0-27

1811년 「동국교우상교황서」의 감동

지난 2024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 연구차 대만 중앙연구원에 머물렀다. 「신미년백서」로 더 알려진 「동국교우상교황서」(東國敎友上敎皇書)란 필사본의 원본을 확인하고, 주변 자료를 더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중앙연구원 부사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간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누구도 실물은 보지 못한 듯했다. 이곳 도서관에서도 희귀본으로 분류되어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라는 것을 어려운 절차를 거쳐 굳이 원본을 꺼내서 여러 날 살폈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1801년 황사영 체포와 함께 백서가 압수되면서 신유박해 당시의 가장 생생한 증언은 통째 의금부 창고로 들어갔다. 초토화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 교회에 알려 도움을 청하려는 절박한 심경으로 10년 뒤인 1811년에 북경 주교와 로마 교황님께 올린 탄원서가 한문 원문으로 이 책 속에 들어 있다. 당시 글의 작성자는 황사영 백서를 보지 못해, 이 탄원서 속 조선 교회에 대한 기술은 그 이후에 전해 들은 것을 수습한 것이었다. 사제 파견 요청과 함께 신유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사적을 자세히 적고, 당시 조선 교회의 처지를 탄원하였다. 교황님께도 따로 편지를 써서 그 글을 교황청으로 보내줄 것을 북경 주교에게 요청했다. 책 뒤쪽에 북경 주교의 답장과 조선 교회의 재답장이 실려 있다. 이중 교황님께 보낸 자료는 윤민구 신부에 의해 한문 원본이 로마에서 확인되었고, 북경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포르투갈, 이태리어 번역본만 찾아냈다. 한문으로 된 원래 글은 오직 이 책에만 남아있다. 뒤쪽의 두 통 편지도 여기에만 실린 것이다. 대만의 교회사 연구의 대가인 고위녕 교수를 만나 여쭈니, 원래 상해 서가회 도서관에 있던 것이 중국 공산화 당시 예수회 자료가 필리핀 마닐라로 소개될 때 그리로 갔다가, 1960년대 초에 한문 자료만 대만에서 개교한 예수회 소속 보인대학으로 다시 보내져서 대만에 남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린 대만의 황덕관(黃德寬) 신부는 1985년 보인대 신학논집에 발표한 「한국교우와 한국천주교」라는 논문에서 1984년 당시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 미사의 감동적 장면을 묘사하면서 한국 교회사와 이 책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원본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연필로 공책에 메모를 거듭하였다. 여주 지역 순교자들의 이름이 유독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지역 신자가 작성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유사정(兪斯定)의 이름으로 보낸 네 번째 편지를 보고는 유스티노라는 본명을 썼던 조동섬의 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귀국 전 대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학연구중심의 주최로 이 자료를 가지고 발표를 했다. 대부분 이 책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던 터라 도서관장과 관련 학자들이 참석해서 큰 관심을 표시했다. 처음 이 자료를 세상에 알렸던 황덕관 신부가 중국을 통해 서학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가 200년 만에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발전을 이룬 것을 보며 우리는 왜 저들처럼 못하나 하며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던 논문 속의 목소리가 오래 생각 속에 맴돌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0-20

생각에 대한 생각

마음이 생각을 만든다. 생각은 외부의 자극에 대한 내면의 반응이다. 생각에는 종류가 아주 많다. 생각이란 뜻을 가진 한자가 여러 개인 데서 알 수 있다. 사(思)는 곰곰이 따져보는 생각이다. 인간은 사유(思惟)하고 사변(思辨)하는 존재다. 상(想)은 퍼뜩 떠오른 생각이다. 발상(發想)과 연상(聯想) 같은 단어가 그렇다. 념(念)은 콕 박혀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염두(念頭)에 두라거나 괘념(掛念)치 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려(慮)는 짓눌러 헤어나기 힘든 생각이다. 염려(念慮)와 고려(考慮)가 그것이다. 떠오른 생각이 콕 박혀 나가지 않으면 상념(想念)이고, 곰곰한 생각이 깊이를 머금을 때 우리는 사려(思慮)가 깊다고 말한다. “넌 생각이 너무 많아!”는 상념이 많다는 얘기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할 때는 사려 깊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사람이 사려는 깊어야 하지만 염려가 깊으면 못 쓴다. 불교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수행을 강조하는 것은 쓸데없는 상념이 마음에 독이 되는 줄 알아서이다. 지혜는 상념이 아닌 사려와 사유에서 나온다. 상념은 사람을 자꾸 길 잃고 헤매게 만들어도, 사려는 깊을수록 밝고 환해진다. 사람의 경쟁력은 어떤 종류의 생각을 많이 하고, 어떻게 관리하느냐에서 나온다. 정조 때 노긍이란 사람이 있었다. 글을 워낙 잘 써서 과거 시험만 보면 합격했다. 그래봤자 지체가 낮아 벼슬을 못 살았다. 그는 분노해서 다른 사람 답안지를 대필해 주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다가 적발되어 평안도 위원 땅으로 귀양 갔다. 유배지에서 두고 온 가족의 막막한 생계와 고단한 처지를 생각하면 밤중에 잠이 올 리 없었다. 하룻밤에도 온갖 상념들이 떠오르다 지워졌다. 새벽이 가까워지면 생각은 괴물처럼 커져서 자신의 영혼마저 집어삼킬 듯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는 밤마다 자신을 괴롭히는 쓸데없는 생각과, 반대로 간절하게 소망하는 생각의 목록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떠다니는 생각을 풀이한 「상해」(想解)란 글을 남겼다. 이 글 속의 생각들은 그의 영혼을 침식시키는 독이었고, 한편으로 절망 속에 ‘언젠가’를 꿈꾸게 해 준 약이기도 했다. 허균은 「연념잠」(煉念箴)이란 글을 지었다. 머릿속에 콕 박혀 안 나가는 생각을 어떻게 단련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고를 담았다. 마음은 본래 텅 비어 맑은데 잡생각이 끼어들면서 흐려진다. 사람은 제멋대로 날뛰는 생각을 잘 간수해서 고요함으로 안정시키되 정성스럽게 보살펴야 한다고 썼다. 잡념을 제거하는 것이 마음공부의 관건이라고 보았다. 묵상(默想)과 명상(瞑想)은 침묵 속에 눈을 감고 수없이 많은 생각을 차례로 떠올려 점검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생각 자체를 침묵시키고 잠재우는[瞑] 일이기도 하다. 관상(觀想)은 생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살펴보는 일이면서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 가며 떠올려보아 점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수많은 생각 속에 살아간다. 그 생각이 종류와 성질도 각기 다르니, 관리가 필요하다. 생각이 통제를 벗어나면 정신 나간 사람이 되고, 내가 생각의 주인이 되면 정신 차린 사람이 된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인가? 내 생각은 잘 관리되고 있는가, 아무 데나 둥둥 떠다니는가?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0-13

성 김대건 신부의 모자 술

6·25전쟁 때 피랍되어 순교한 유영근 신부의 「소팔가자를 방문하고」란 기행문을 읽었다. 1944년 2월부터 5월까지 「경향잡지」에 실렸다. 중국 지린성 소팔가자는 김대건과 최양업 두 분 신부님이 늦어지는 귀국을 기다리며 페레올 주교님께 삭발례를 비롯 부제품까지 받았던 뜻깊은 장소다. 유 신부는 김대건 신부님이 이곳을 떠난 지 100주년 되던 해를 맞아 1월 중순 만주의 혹독한 추위 속에 우마차를 타고 어렵게 이곳에 도착했다. 「수선탁덕 김대건전」과 「최도마 신부 전기」를 집필한 유영근 신부가 두 분의 체취를 찾아 오매불망 그리던 곳이었다. 그곳 정(丁) 안드레아 신부 가정에서 유 신부는 김대건 신부가 조선으로 떠날 때 남겨두고 간 만주 사람의 두루마기와 모자 이야기를 들었다. 김 신부의 치명 이후 그곳에서는 이 두 가지 물건을 천하에 없는 보물로 여겨왔다. 위중한 병자의 몸에 두루마기를 덮어주면 그 병이 말끔히 나았다. 모자는 병자에게 씌우기만 해도 쾌유되었다. 그 뒤 두루마기는 도둑맞고, 모자는 어느 신부의 강청으로 빼앗겨 당시에는 모자에 달렸던 술 절반만 남아 있던 상태였다. 유영근 신부는 중간에 들른 소도시에서 청해온 사진사에게 부탁해 그곳 홀랑(呼蘭) 수녀원 분원장 정 테클라 수녀님이 보관 중이던 그 모자술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함께 소개했다. 유 신부는 수녀님께 간청하여 남은 모자술에서 대여섯 가닥을 어렵게 얻어왔다. 귀국 길에 유 신부는 당시 신의주본당 주임으로 있던 동기생 오기선 신부에게 들러 모자 술 두 개를 나눠주었다. 유 신부가 가졌던 것은 사변 통에 사라지고 오기선 신부에게 나눠준 그 비단 모자술의 두 가닥이 현재 절두산순교성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에 보존되어 전한다. 만주에 남았던 것도 이제 와 찾을 수 없게 되어, 성 김대건 신부님이 소팔가자를 떠나 올 때 남겨둔 유품은 이것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지 싶다. 유 신부의 기행문 기록과 오기선 신부가 「사제생활 반생기」에 남긴 술회를 통해 비로소 앞뒤로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오늘날 이 모자술의 사연은 까맣게 잊힌 채 박물관의 한 유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안타깝다. 또 유 신부는 기행문에서 「소팔가자소사」(小八家子小史)란 책자를 인용했다. 복잡한 경로로 추적해 보니 이 책자는 당시 만주교구에서 펴낸 「만주공교월간」(滿洲公敎月刊)이라는 잡지에 실린 글이었다. 잘못된 정보이기는 하나 1843년 당시 페레올 고 주교님과 메스트르 신부님이 머물 때 이야기며, 혼자 남은 최양업 신부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세 사람의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다가 8~9년 만인 1852년에야 입국하여 바로 이듬해 세상을 뜬 일이 적혀 있었다. 이런 글들을 바탕으로 유 신부는 「최도마 신부의 전기」에서 김대건 신부를 조선에 보내놓고, 순교 소식을 들었던 최양업 신부의 낙담과 절망, 그리고 조선사목구의 진출을 준비 중이던 페레올 주교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안타까운 입국 시도 등을 자세히 담아낼 수 있었다. 기록이 기록을 부르고, 정보가 정보를 낳는다. 끈 하나를 당기면 거기에 엮인 사연들이 줄달아 달려 나온다. 편린에 불과했던 조각 정보가 어느새 큰 서사가 되어 우리 앞에 드러난다. 우리가 매 순간 사소한 기록들에 더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0-06

15초

초기 교회의 현장을 찾아 황무실 성지에 들렀을 때 일이다. 기념비 속 이름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는데 차 한 대가 들어선다. 시동을 안 끈 차에서 운전자가 내리더니 입구 곁의 방문 스탬프를 공책에 쾅 찍고는 성지 쪽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를 몰고 되나간다. 내렸다 타는 데 걸린 시간이 15초쯤? 동행인은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부부는 전국의 성지를 순례 중인 듯했다. 이 일대는 근처 솔뫼와 신리를 비롯한 여러 성지들이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어 한 차례 방문으로 여러 개의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가성비가 높은 지역이다. 이분들도 처음에는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14처를 돌며 묵주기도도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순례지마다 반복되는 비슷한 순교 서사에 실감은 사라지고 감동도 무뎌져서 스탬프를 향한 열망만 남은 듯했다. 몇 개만 더 찍으면 내외가 미사 시간에 전체 교우 앞에 나가 축복장을 받을 생각에 흐뭇했을 것이다. 몇 시간을 달려와 장소를 찾아 헤매다가 도착한 곳에서 막상 머문 시간이 고작 15초다. 주교회의에서 발행한 성지 관련 자료집에 따르면 2024년 현재 전국에 167곳의 성지가 등재되어 있다. 처음 2011년 시작 당시 111곳이던 성지는 2016년 167곳으로 늘어났고, 연말에 나올 새 자료집에는 전국 성지의 숫자가 190곳가량으로 확대되리라고 한다. 각 교구별로 새 성지 진입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 선정에 애로가 적지 않았다는 말도 들었다. 어쨌거나 그동안 성지순례를 완주해 축복장을 받은 이만 1만 명을 넘어섰다는 전언이다. 이미 완주했거나 순례길에 나선 분들의 순수한 신앙과 열정을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다녀야 할 성지가 많아지면서 15초짜리 순례가 더 늘어나지 않을까 걱정은 된다. 순례단을 실은 버스 한 대가 도착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내려 서로 먼저 스탬프를 찍느라 바쁘다. 기도나 설명 듣기는 뒷전이다. 하루에 여러 곳을 다녀야 해서 한곳에 오래 머물지도 못한다. 개중에는 남의 공책까지 들고 와 대신 스탬프를 찍어주는 나눔 봉사까지 한다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순교의 정신을 기리고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처음 취지와 달리 성지순례는 이제 여행사의 인기 관광 상품이 되었다. 외부 방문객의 숫자에 예민한 지자체야 관광 활성화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지원한다지만, 과연 그런가? 만들어만 놓고 찾는 이 없고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된 성지도 적지 않다. 사실 관계가 명확지 않아 고개가 갸웃해지는 곳도 있다. 거기서 거기인 천편일률의 성지 조성도 답답하다. 빈 무덤만 잔뜩 늘어선 풍경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과한 장식이나 설치물이 때로 보기에 괴롭다. 애초에 전국에 이런 성지가 이렇게 많을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가 든다. 집채만 한 주춧돌이 놓인 뒤 수십 년째 방치된 천진암 성지의 100년 성전 터는 볼 때마다 민망하다. 수백억을 들였다는데 사실 관계마저 의혹투성이인 김범우 성지 같은 곳도 이를 어쩌나 싶다. 진실을 얘기해도 입 다물고 외면한다. 초기의 부실한 연구와 확대 해석, 지역 교회에 대한 과도한 열정이 빚어낸 참사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09-29

차곡차곡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김영사, 2022)를 출간하고 큰 공허감이 몰려왔다. 태풍이 쓸고 간 폐허에 혼자 선 듯 허망했다. 마음을 달래려고 황사영 백서의 원본 필사를 시작했다.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 크기의 명주천에 깨알 같이 쓴 글자가 무려 1만3384자였다. 원본하고 똑같은 크기에 동일한 행배열로 베껴 썼다. 불경 사경(寫經)에 쓰는 극세필을 구해 한 달 넘게 걸려 어렵게 완성했다. 인상을 찡그려 가며 베껴 쓰는 사이에 배론 토굴 속에서 조선 교회를 구해야 한다는 간절한 일념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황사영의 마음이 내 안에 새겨졌다. 앞서 책을 쓸 때 머리로 읽고 정보로 찾아 읽던 그 글이 아니었다. 순교자의 비명 소리와 회한에 찬 탄식, 피눈물의 간구가 응축된 장대한 서사가 메아리쳤다. 그 뒤 1811년 신미년 백서를 비롯해 북경으로 보내진 각종 편지의 원본 사진을 원래 크기대로 전사하는 작업을 차례로 진행해서 모두 마쳤다. 지난 7월 말 전남 강진에 갔다가 숙소에 딸린 작은 전시장에서 촛불을 그린 소폭의 그림을 보았다. 양초의 몸체 부분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 손전화로 찍어 확대해 보고는 놀라 기함을 했다. 가로와 세로 3센티미터 가량의 정사각형 안에 반야심경 전문 270자를 붓으로 써놓았다. 1제곱센티미터 안에 30여자씩 쓴 크기였다. 상경 후 작가를 수소문해 찾아가 만났다. 김재현 선생은 전남 지역에서 퇴임한 미술 교사였다. 낙도의 섬 학교에서 밤중에 숙직을 서고 있으면 적막하고 무서워서 반야심경을 쓰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그의 기록은 100원짜리 동전 크기의 1.9센티미터 사각형 안에 반야심경을 모두 써넣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를 만나 사용하는 붓을 보고, 실제 작품을 더 보고 나자 나도 다시 작은 글씨를 써볼 생각이 났다. 그의 글씨는 내 황사영 백서 글씨 크기의 절반 보다 훨씬 작았다. 그날부터 작은 글씨에 다시 도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신기하게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크기의 글씨가 문득 써지는 것이 아닌가? 며칠 전 출판사 편집자와 얘기하다가 그 글씨 사진을 보여 주자 눈이 동그래지더니 독일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연필로 쓴 작은 글씨」(문학동네, 2023)란 책을 귀띔해 준다. 책을 구해 보니 이건 또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다시 그 글씨에 빠져 연필 아닌 붓으로 같은 크기의 글씨를 한동안 썼다. 뒤이어 폴란드 화가 로만 오팔카가 깨알 같은 글씨로 그린 그림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8월 한 달 동안 폭풍우 같이 미세 글씨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다. 작은 조각 종이에 극세필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글씨를 쓰면서 아침을 시작한다. 고물고물 이어진 글자들은 일종의 물결 같다. 또박또박 써나가는 동안 순수한 기쁨이 내 안에 차오른다. 나이를 먹어 가니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들이 좋다. 한꺼번에 말고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이루어가는 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나는 좀 더 천천히 가야겠다. 더 목적 없이 서성거리고, 더 느리게 걷고, 더 많이 눈 감고, 더 가만히 음미해야겠다. 한 글자 한 글자씩 써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넓은 지면을 무늬처럼 꽉 채우는 깨알 글씨처럼.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09-15

다시 주님 곁으로

일요한담 마지막 회다. 10번도 채 안 되는 글쓰기가 뭐 어렵겠냐 생각했는데 매주 나의 신앙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앙 관련 글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글을 쓰고 싶었고 그래야 독자분들이 내 글 안에서 주님을 느끼실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나만의 솔직한 일상 체험을 꼭 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마감일을 간신히 맞추면 어느새 또 마감일이었다. 육아 맘으로 ‘방콕’하는 요즘 일상에서 신앙 에피소드를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걸맞은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나면 할 말도 쓸 말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나의 하루 일과는 집안 곳곳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뭐든지 입으로 집어 넣는 어린 아들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이다. 아기와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고 목욕시킨 후 수유를 끝으로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면 나도 모르게 기절이다. 이제는 바깥 공기 한번 제대로 쐬어 보지 못하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아기 키우면 성당 가기 쉽지 않고 신앙을 유지하기도 힘들다고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느끼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속에 묻혀 살면서 웃고 즐기며 지냈던 과거의 내 모습은 기억조차 없다. 사람들을 만나다가 혹여 감기라도 걸려 아기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사람 만나기를 조심 또 조심하는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성취감으로 삶의 행복을 느끼며 항상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바쁜 내 모습도 사라진지 오래다. 오로지 아기에게 올인하여 단순한 나로 산지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런 나에게 일요한담은 열렬했던 과거의 신앙생활을 추억하며 현재의 신앙 태도를 되돌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아기 때문에 정신없고 바쁘다는 핑계로 내 모습을 돌아보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반성 또한 하게 해 주었다. “주일 미사는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소원을 빌러 오는 게 아니야, 지난 한 주간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고 다음 한 주간 혹은 앞으로 내 모습을 계획하고 다짐하는 참회의 시간을 가지러 오는 거지.” 예전에 한 신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필요할 때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날 부르실 때 언제든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위의 말씀처럼 매주 자신을 냉정히 바라보고 반성하는 성숙된 시간이 필요한 것인데 말이다. ‘여유 있을 때 봉사해야지’라는 마음으로는 평생 봉사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가장 바쁠 때 가장 성실히 봉사 활동을 했던 지난날들, 내가 생각하는 여유의 시간과 하느님이 나를 쓰고 싶어 하시는 시기는 다를 수 있기에 그분이 부르시면 언제든 “예스”를 외쳤던 예전 내 모습이 기억났다. 나의 신앙심을 불러일으키시고 소홀해진 신앙생활에 불을 지피시키 위해 일요한담을 시키셨나 싶을 정도로 글을 쓰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하나둘 생각나기 시작했다. 마치 행복 가득했던 과거의 앨범을 넘겨보면서 예전의 내 모습을 추억하고 그때의 에너지를 다시금 얻어가는 시간이랄까. 여덟 번의 글을 쓰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가 내 삶과 신앙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소중한 기회를 주신 가톨릭신문에 감사드리며 마지막 글을 마무리 한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9-08

늘 용서해주시는 하느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다

“선생님한테가서 학생회장 사퇴하겠다고 해. 네가 얘기할 때까지 학생회 애들은 매일 집합하게 될거야. 너 때문에 다들 이렇게 혼나는 거 좋아?”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면서부터 고3 학생회 선배들의 호령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매일 점심도 못 먹고 불려 오는 학생회 친구들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렇다고 선생님을 찾아가 학생회장을 그만둔다고 말하는 것은 책임감 없는 행동 같아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연기자이기 때문에 학생회장을 그만두라는 선배들의 얘기가 납득되지 않았지만 당차게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무섭고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선배들한테 더 괴롭힘을 당할까봐 혼자 꾹꾹 참으며 한동안 버텨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7년 후, 방송국 입구를 지나며 경호원분께 인사드리려고 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나보다 먼저 학생회장을 했던 선배 언니였다. 경호업체에 입사해서 얼마 전부터 방송국으로 출근한다는 선배 언니는 나와는 다르게 마냥 반가워했다. 이 선배 언니는 학생회장 시절에 다른 선배들보다 유독 접촉이 많았다. 조회시간에 학생회장이 구령을 외쳤었는데 이 선배 언니는 구령 연습을 해야 한다며 한겨울에 1시간씩 나를 운동장에 세워놓곤 했다. 3개월 내내 새벽 7시에 혼자 학교 운동장에 나가 소리를 질러댔다. “전체 차렷, 교장선생님께 경례!” 혼자 덩그러니 서서 구령을 외치다 보면 등교하던 학생들이 “어머, 연예인 이인혜다. 쟤 저기서 뭐하는 거야?” 낄낄 웃고 수군대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왔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연습하다 보면 선배 언니가 뒤늦게 등교하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고 창문에서 내다보는 모습을 목격할 때도 있었다. 어찌나 원망스럽고 밉던지….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얼굴을 마주하니 여전히 얄미운 감정이 들었다. 아니, 반항 한번 못했던 그때의 울분이 더 강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그 순간이 종종 떠오를 때가 있었다. 선배들한테 말 한마디 못하고 당했던 바보 같은 내 모습이 후회가 되어 격한 마음이 울컥 올라오곤 했었다. 며칠 후 선배 학생회장 언니를 다시 만나 차 한잔을 하며 선배들의 괴롭힘에 힘들었던 지난 얘기들을 늘어놨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미안함을 느끼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놀랍게도 그 선배 언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상처는 나만 기억하고 있단 사실에 더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날 성당에 가서 열심히 하느님께 선배 언니를 욕하며 고자질 기도를 해댔다. 위로가 돌아올 것이란 기대를 했건만 나에게 들려온 말씀은 주님의 기도 중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였다. ‘나도 남에게 상처 주고 알아채지 못한 일들이 많았을 텐데, 과연 그들은 날 용서했을까?’ 순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정도로 후회스러운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해해 주겠지란 생각으로 가족들에게 짜증 내고 화냈던 일까지 전부 기억나기 시작했다. 4개월간의 일도 7년 후까지 용서 못하고 있으면서 내 죄는 용서해달라고 너무 쉽게 기도드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남에게 준 아픔은 생각하지 못한 채 내 아픔만 가장 크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매주 주님의 기도를 외치면서 문구 하나하나에 진심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용서란 참 힘든 일인데 너무도 당연하게 늘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또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다짐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늘 반성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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