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주님 곁으로

일요한담 마지막 회다. 10번도 채 안 되는 글쓰기가 뭐 어렵겠냐 생각했는데 매주 나의 신앙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신앙 관련 글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의 글을 쓰고 싶었고 그래야 독자분들이 내 글 안에서 주님을 느끼실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전문가가 아니기에 나만의 솔직한 일상 체험을 꼭 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마감일을 간신히 맞추면 어느새 또 마감일이었다. 육아 맘으로 ‘방콕’하는 요즘 일상에서 신앙 에피소드를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기에게 걸맞은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나면 할 말도 쓸 말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나의 하루 일과는 집안 곳곳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뭐든지 입으로 집어 넣는 어린 아들을 지켜보는 것이 전부이다. 아기와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고 목욕시킨 후 수유를 끝으로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면 나도 모르게 기절이다. 이제는 바깥 공기 한번 제대로 쐬어 보지 못하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아기 키우면 성당 가기 쉽지 않고 신앙을 유지하기도 힘들다고 했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새삼 느끼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속에 묻혀 살면서 웃고 즐기며 지냈던 과거의 내 모습은 기억조차 없다. 사람들을 만나다가 혹여 감기라도 걸려 아기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사람 만나기를 조심 또 조심하는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성취감으로 삶의 행복을 느끼며 항상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바쁜 내 모습도 사라진지 오래다. 오로지 아기에게 올인하여 단순한 나로 산지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런 나에게 일요한담은 열렬했던 과거의 신앙생활을 추억하며 현재의 신앙 태도를 되돌아보는 의미있는 시간을 갖게 해 주었다. 그리고 아기 때문에 정신없고 바쁘다는 핑계로 내 모습을 돌아보지 않은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반성 또한 하게 해 주었다. “주일 미사는 주님께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소원을 빌러 오는 게 아니야, 지난 한 주간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고 다음 한 주간 혹은 앞으로 내 모습을 계획하고 다짐하는 참회의 시간을 가지러 오는 거지.” 예전에 한 신부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필요할 때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날 부르실 때 언제든 달려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깜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위의 말씀처럼 매주 자신을 냉정히 바라보고 반성하는 성숙된 시간이 필요한 것인데 말이다. ‘여유 있을 때 봉사해야지’라는 마음으로는 평생 봉사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가장 바쁠 때 가장 성실히 봉사 활동을 했던 지난날들, 내가 생각하는 여유의 시간과 하느님이 나를 쓰고 싶어 하시는 시기는 다를 수 있기에 그분이 부르시면 언제든 “예스”를 외쳤던 예전 내 모습이 기억났다. 나의 신앙심을 불러일으키시고 소홀해진 신앙생활에 불을 지피시키 위해 일요한담을 시키셨나 싶을 정도로 글을 쓰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하나둘 생각나기 시작했다. 마치 행복 가득했던 과거의 앨범을 넘겨보면서 예전의 내 모습을 추억하고 그때의 에너지를 다시금 얻어가는 시간이랄까. 여덟 번의 글을 쓰면서 예전의 나로 돌아가 내 삶과 신앙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소중한 기회를 주신 가톨릭신문에 감사드리며 마지막 글을 마무리 한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9-08

늘 용서해주시는 하느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다

“선생님한테가서 학생회장 사퇴하겠다고 해. 네가 얘기할 때까지 학생회 애들은 매일 집합하게 될거야. 너 때문에 다들 이렇게 혼나는 거 좋아?”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회장이 되면서부터 고3 학생회 선배들의 호령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매일 점심도 못 먹고 불려 오는 학생회 친구들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그렇다고 선생님을 찾아가 학생회장을 그만둔다고 말하는 것은 책임감 없는 행동 같아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연기자이기 때문에 학생회장을 그만두라는 선배들의 얘기가 납득되지 않았지만 당차게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무섭고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선배들한테 더 괴롭힘을 당할까봐 혼자 꾹꾹 참으며 한동안 버텨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7년 후, 방송국 입구를 지나며 경호원분께 인사드리려고 보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나보다 먼저 학생회장을 했던 선배 언니였다. 경호업체에 입사해서 얼마 전부터 방송국으로 출근한다는 선배 언니는 나와는 다르게 마냥 반가워했다. 이 선배 언니는 학생회장 시절에 다른 선배들보다 유독 접촉이 많았다. 조회시간에 학생회장이 구령을 외쳤었는데 이 선배 언니는 구령 연습을 해야 한다며 한겨울에 1시간씩 나를 운동장에 세워놓곤 했다. 3개월 내내 새벽 7시에 혼자 학교 운동장에 나가 소리를 질러댔다. “전체 차렷, 교장선생님께 경례!” 혼자 덩그러니 서서 구령을 외치다 보면 등교하던 학생들이 “어머, 연예인 이인혜다. 쟤 저기서 뭐하는 거야?” 낄낄 웃고 수군대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려왔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연습하다 보면 선배 언니가 뒤늦게 등교하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고 창문에서 내다보는 모습을 목격할 때도 있었다. 어찌나 원망스럽고 밉던지….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얼굴을 마주하니 여전히 얄미운 감정이 들었다. 아니, 반항 한번 못했던 그때의 울분이 더 강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그 순간이 종종 떠오를 때가 있었다. 선배들한테 말 한마디 못하고 당했던 바보 같은 내 모습이 후회가 되어 격한 마음이 울컥 올라오곤 했었다. 며칠 후 선배 학생회장 언니를 다시 만나 차 한잔을 하며 선배들의 괴롭힘에 힘들었던 지난 얘기들을 늘어놨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미안함을 느끼게 얘기해주고 싶었다. 놀랍게도 그 선배 언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상처는 나만 기억하고 있단 사실에 더 억울한 마음이 들어 그날 성당에 가서 열심히 하느님께 선배 언니를 욕하며 고자질 기도를 해댔다. 위로가 돌아올 것이란 기대를 했건만 나에게 들려온 말씀은 주님의 기도 중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였다. ‘나도 남에게 상처 주고 알아채지 못한 일들이 많았을 텐데, 과연 그들은 날 용서했을까?’ 순간 다시 돌아가고 싶은 정도로 후회스러운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해해 주겠지란 생각으로 가족들에게 짜증 내고 화냈던 일까지 전부 기억나기 시작했다. 4개월간의 일도 7년 후까지 용서 못하고 있으면서 내 죄는 용서해달라고 너무 쉽게 기도드리는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남에게 준 아픔은 생각하지 못한 채 내 아픔만 가장 크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매주 주님의 기도를 외치면서 문구 하나하나에 진심을 다하지 못했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다. 용서란 참 힘든 일인데 너무도 당연하게 늘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 또 한 번 고개를 숙이고 다짐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늘 반성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9-01

우연히 알게 된 신앙의 맛

나는 이맘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떠오른다. 우연한 기회에 성지순례를 준비하던 팀들을 소개받게 되어 얼떨결에 가게 된 이스라엘 성지순례!! 뒤늦게 결정되는 바람에 제대로 된 성경 공부도 못하고 합류하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무지했기에 시작이 가능했던 것 같단 생각이 든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땐 마냥 좋았다. 성지순례가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성지순례에 가서 무엇을 생각하고 고민할 것인지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국제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해외여행이라는 기분이 들어서 설레느라 바빴다. 나와 함께 하는 멤버들은 모두 성당유치원 여선생님들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밝고 유쾌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끌어주었고 덕분에 금방 친해질 수 있어서 더욱 들떠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에 도착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숙소에는 성지순례를 온 다른 단체들로 북적북적했고 한국 사람들도 많아 서로 인사도 나누는 등 해외 관광 온 느낌이 가득했다. 보통 단체로 가는 해외여행 패키지도 유명한 성당이나 천주교 관련 명소들을 방문하다 보니 성지순례도 그 정도일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면서 일정에 대한 기대까지 생겼었다. 그런데 다음날, 성지순례가 시작되자마자 내가 상상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아침에 만난 선생님들은 어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동을 위해 준비된 차량에 올라타자마자 함께 하는 분들의 차분함이 공기 중에도 느껴졌다. 마치 고해성사 전 성당에서 마음을 다잡고 묵상 속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분위기 같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드리는 기도와 성경 말씀은 그동안 들었던 교리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차 안에서 성경 구절을 읽어보고 그 장소에 가서 말씀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서로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 기도하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이 모든 것들이 경건하게 다가왔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해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장 한가운데에 있어 정신없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어수선함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 곳 한 곳에서 예수님 행동 하나 말씀 하나가 전부 느껴져 가슴이 저며 왔다. 성당에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내 모습은 평상시와 달랐다. 예전 같았으면 언어가 달라 집중이 안 됐겠지만, 이번에는 마음으로 들을 수 있어 두 손이 절로 모아졌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세상에 정말 우연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세례를 받아 제대로 된 성경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교육을 받으러 간 덕분에 성경책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학생들의 첫영성체 수업을 준비하면서 그제야 창세기를 정독했다. 우연히 따라가게 되었단 표현이 맞을 정도로 얼떨결에 참여하게 된 성지순례를 통해 신약성경 말씀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덕분에 창세기와 탈출기 성서 공부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나에게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빈털터리 신앙심으로 지금까지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하느님은 말로만 신앙인이었던 내게 진정한 신앙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반감이 들지 않게 다양한 우연을 통해서 말이다. 나에게 있어 우연한 신앙 공부의 기회들은 찐으로 예수님을 느끼고 말씀을 실천하고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진짜 기도법을 발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느님이 원하는 좀 더 깊은 신앙인이 되기 위해, 제대로 된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앞으로 하느님께서 내게 또 어떤 우연을 내려주실까 내심 기대가 된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8-25

성모님에 대한 믿음

“가톨릭은 성모마리아를 믿는거지? 개신교는 예수님 믿고?” “아니, 우리도 예수님 믿어.” 이런 질문이 나올 때면 나는 가톨릭신자에게 성모님은 어떤 특별한 존재인지 설명하기보다 늘 흥분해서 유치한 대답만 하기 일쑤였다. “우앙~~”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자동으로 벌떡 일어나지는 요즘. 엄마가 된 나에게 이런 질문이 다시 온다면 이제는 조금 다르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어머니로서 성모님께서 행하셨던 모습이 새삼 더 깊이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기가 아프면 내가 케어를 잘못한 거 같아 미안해지고 조금만 다쳐도 말 못 하는 아기에게 큰 아픔을 준 것 같아 나 스스로에게 원망스런 마음이 든다. 아기가 울면 내가 아이의 마음을 빨리 알아차려 주지 못해서인 것 같아 부족한 엄마라는 자책도 하게 된다. 나도 이런데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마음이 어떠셨을까? 십자가에 못 박히는 모습을 보실 땐 또 어떠셨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엄마임이 틀림없다. 아무리 하느님께서 뜻하신 바가 있다 하시더라도 엄마로서 그 광경을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롭고 아프고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도 성모님은 하느님을 믿고 기도를 드리며 차분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예수님을 지켜보셨다. 진정한 성녀이자,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크신 엄마의 모습으로 존경 그 자체란 생각이 든다. 요즘 나는 늙은 초보 엄마라 아기에게 서툴고 부족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정서적 안정감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아예 휴직을 하고 육아에 ‘올인’하고 있다. 밖에 나갈 때면 늘 꼼꼼하게 화장하고 머리 세팅도 하고 날씨에 맞춰 뭘 입을지 고민하는 풀세팅 치장 시기는 끝난 지 오래다. 꾸미기는커녕 세수라도 하고 나가면 다행이고 모자는 필수품이 되었다. 카리스마있는 교수 말투에서 “~했또요?”라는 혀짧은 애교 말투와 하이톤의 목소리가 자동 발사된다. 사람들 만나고 다니다 혹여 감기라도 걸려 아기에게 수유를 못 할까봐 외출도 자제하며 인생 최대의 절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기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어 선택한 1년간의 모유 수유 계획 때문에 임신 살을 그대로 남겨놔 몸도 마음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연기자, 교수, 홍보대사, 대학 지원사업 평가 위원, 영화제 운영위원, 방송사 시청자위원, 문화재단 이사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는 데서 에너지를 얻고 일정이 힘들어도 결과에서 오는 성취감으로 인생의 행복을 찾던 나는 온데간데없다. 엄마로서 역할에 충실하고자 당분간 모든 것을 내려놨지만 사실 마음 한구석엔 살짝 아쉬움도 남아있다. 성모님은 어떠셨을까?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셨을 때 과연 어떤 마음이셨을까? 내 아이를 위해 잠깐 나를 희생하는 결정도 이리 힘든데 어떻게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에 자신을 버리고 주시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우리는 늘 ‘본받자’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신앙인으로서 ‘본받음’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님을 요즘 엄마로서의 일상 체험을 통해 피부로 느끼고 있다. 나는 성모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안 믿고 성모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대단한 신앙적 믿음을 믿는다. 하느님께 선택받은 가장 본받아야 할 여성으로서,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그리고 모두의 엄마로서 성모님을 존경하며 오늘도 그분께 기도를 올린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8-18

은총을 되갚는 기쁨

“너 세례받고 하느님한테 원하는 대학가게 해달라고 기도해봐, 들어주실지 아니?”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에게 아주 솔깃한 유혹이었다. 갓 세례를 받으신 엄마가 나를 인도하고자 군침 도는 미끼를 던지셨고 대학입시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무엇도 할 수 있던 열정 시기였기에 나는 덥석 예비자 교리 교육을 신청하게 되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했던 고3 수험생이었지만 틈틈이 기도문을 외우고 학원시간을 조정해 교육도 받고 한 시간 더 잘 수 있는 황금 같은 주일에도 꼬박꼬박 미사를 드리러 갈 정도로 나의 정성은 대단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 내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그 무엇을 못하겠는가.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신문방송학과 수시모집 합격!’ 나에게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찾아왔다. 사실 입시에서는 어떤 대학을 선택해서 지원할지 결정하는 것도 실력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운도 따라야 한다. 비록 나는 성경책 읽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초보 신자였지만 내 실력만으로 고려대학교 입학이 절대 불가능하단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체험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나름 굳건했다. 이런 이유로 주일 미사에 빠짐없이 참례해 하느님께 감사 봉헌과 기도를 꾸준히 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런 기쁨도 잠시였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 복잡한 생각들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대학입시를 위해 성당을 나가기 시작했지 진실된 신앙심으로 하느님을 만나러 간 게 아니었는데 왜 하느님을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까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분명 내 검은 속내를 다 읽으셨을 텐데도 말이다. 십자가상을 볼 때마다 내심 찔리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보에 청년 성가대 모집 공고가 올라왔고 엄마는 또다시 나에게 유혹의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너 대학 합격 감사의 의미로 성가대 봉사해 보는 거 어때?” 정말 생각이 없었지만, ‘감사의 의미’라는 단어가 가슴 깊게 파고들었다. “감사한 건 알지. 근데 난 어렸을 때 방송활동을 합창단으로 시작했어서 왠지 성가대도 일로 느껴질 것 같아서 부담되네. 초등부 교사 모집하면 그건 가능하겠다. 아이들 좋아하니까.” 타당한 변명거리를 찾던 중 나온 제법 훌륭한 핑계였다. 처음 대합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내게 주신 큰 은총을 어떻게라도 보답하고 싶단 생각이 가득했는데 막상 봉사로 보답해야 한단 생각을 하니 귀찮기도 하고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잘 피해갔다 생각했는데 바로 다음 주 주보에 ‘초등부 교사 모집’ 공고가 떡 하니 실려 있었다. 나의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누군가 바로 잡아주시려는 듯한 느낌이 ‘팍’ 들었다. 나에게 주신 은총은 내가 절대 받을 수 없는 하느님의 과한 자비였는데 그걸 홀라당 받기만 하고 은근슬쩍 넘기려고 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결국 미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제일 첫 번째로 교사 모집 신청서를 냈고 그 이후로는 내 탈렌트를 원하는 천주교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고 있다. 한마음한몸운동본부 홍보대사, 청소년 생명사랑 홍보대사, 파티마성모발현 100주년 기념 강연, 주일학교 행사 강연, 고통과 아픔을 기도로 극복한 문화예술인의 이야기를 담은 책 「슈퍼스타」 발간, 서울주보 글, 평화방송 라디오, 그리고 가톨릭 신문까지…. 24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대학 합격 발표 후 그 어떤 고민과 스트레스 없이 세상이 마냥 아름다워 보이고 마냥 감사했던 그때를…. 그날의 은총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모든 은총을 되갚는 날까지 난 최선을 다해 봉사의 기회를 잡을 것이다. 받는 은총 뒤에는 반드시 베푸는 마음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은 채…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8-11

아기를 통해 알게 된 하느님 사랑

나는 9개월차 규영이 엄마다. 마흔이 넘어 결혼해 다들 노산이라며 걱정했지만, 다행히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자연임신이 되어 자연분만으로 아기를 낳고 열심히 모유 수유 중인 ‘육아맘’이다. 신선한 모유를 제공하기 위해 직접 수유하고자 출산 후부터는 맘 놓고 외출 한번 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하루하루 감사함 속에서 몸소 신앙을 느끼며 살고 있다. 사실 처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런 감사함을 모른 채 불안함과 우울함이 앞섰다. 나이가 있어 임신이 어려울 테니 애초부터 시험관을 시작해 보라거나 임신 준비를 위해 한약을 먹어 보라는 등 주변에서 염려와 우려 섞인 말들 많이 해주신 터라 임신 준비를 1년 정도 잡아놓은 상태였다. 운동도 더 열심히 하고 한약도 먹고 산전 검사도 하며 1년 동안 몸을 만들면 ‘임신이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동안 벌여놓은 일들도 1년 동안 정리해놓으면 되겠다는 치밀한 계획까지 잡아놨었다. 다행히 좋은 드라마 두 편의 섭외가 들어왔고 드라마 촬영과 경성대 AI미디어학과 학과장을 하며 1년을 알차게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막 임신 준비를 시작할 무렵, 이미 임신이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기적 같은 기쁜 일인데도 불구하고 촬영 번복과 학교 휴직을 순식간에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언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는 앞날을 생각하니 그동안 열심히 쌓아왔던 내 커리어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만 흘렀다. 두통, 메스꺼움, 속쓰림, 부종, 당 등 임신으로 인해 견뎌야 하는 고생스런 날들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배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잉태의 신비로움에 따른 신앙적 생각들이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내 몸에 콩알 하나가 생기더니, 갑자기 콩닥콩닥 심장이 만들어지고 혈관이 하나씩 이어져 몸통과 머리가, 그리고 팔다리가 뿅뿅 생겨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나서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필요한 신체 일부가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지면서 어떻게 온전한 사람으로 완성될 수 있는지…. 이건 신이 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느님의 대단하심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는 더했다. 잘 보이지도 않으면서 엄마 품에 안기면 포근함을 느끼고 잘 들리지도 않으면서 엄마의 목소리가 나면 울음을 그치는 모습은 그 어떤 마술쇼보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성당에 가서 하느님의 따스한 품을 느끼며 안정감을 찾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가 뭐길래….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도 나를 따르고 나를 의지하고 나를 제일로 생각해 주는 내 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큰 감동이 밀려와 힘듦과 고통은 사라지고 울컥함만 남는다. 아직도 산후통이 있어 일어나서 첫발을 디딜 때마다 뼈가 아프고 아기를 안느라 팔목은 시큰하고 수유하느라 어깨는 말려있고 골반도 틀어져서 처녀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래도 내 품에 안기면 뭐가 그리 신나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환한 웃음을 짓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 행복함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난 하느님처럼 해준 것도 없는데, ‘내가 뭐가 좋다고 이렇게까지 행복해 할까’ 순간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왜 제 부탁 안 들어주세요? 저 너무 힘들어요”하며, 내가 원하는 것만 쭉 늘어놓고 투정만 부리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기가 나를 만날 때 해주듯이, 하느님을 만날 때 환한 웃음으로 좋음을 표현하고 함께 계셔주심에 감사하는 내가 되겠다고 다짐해 본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경성대 AI미디어학과 교수)

2024-07-28

부르심과 응답

나에게 초등부주일학교 여름 캠프는 20대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 중 하나이다. 강의가 끝나면 대부분의 친구들이 학회실이나 동아리방에 남아 수다를 떨거나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며 보냈지만 나는 좀 달랐다. “인혜야, 오늘 강의 끝나고 술 한잔하러 갈까?” “미안, 나 오늘 성당 교사 회의라서 가야 해.” “그럼 내일은? 단체 미팅하는데 낄래?” “미안해, 나 내일은 레크리에이션 교육받으러 가야 해.” 특히 여름 캠프와 주님 성탄 대축일, 은총시장 등 초등부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준비를 위해 매일 성당으로 출근하기 일쑤였다. 간혹 어떤 친구는 나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너 혹시 수녀님 되고 싶은 마음 있어?” 다양한 의혹 속에서도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 생활의 절반을 성당에서 바쁘게 보냈다. 그땐 성당에서의 활동이 마냥 신나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미사를 드리는 것도 즐겁고 미사 후 교리를 가르치는 것도 뿌듯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고 재미나게 신앙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좋았다. 아이들이 연기자인 선생님을 반가워하고, 학부모들이 나를 믿고 캠프를 보내주거나 모금에 참여해 주실 때의 보람은 연기자 활동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큰 보람으로 다가왔다. 당시 나의 교사 활동은 진심으로 적극적이었다. 평교사로 시작해 부교감, 교감까지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교사 활동을 했고 연기자로 가장 이름을 알린 ‘쾌걸춘향’ 드라마를 촬영하면서도 본당 대표로 주님 성탄 대축일 행사 교육을 받으러 다닐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런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나에게 신앙심이 대단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나에게 그 시절은 빈약했던 내 신앙심이 단단하게 뿌리내리던 시기로 기억된다. 성경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말씀에 눈을 뜨고 기도하는 방법도 터득했기 때문이다. 토요일 초등부 미사가 끝나고 뒷정리를 마치면 나는 늘 맨 마지막으로 성당을 나왔다. 불 꺼진 성당 맨 앞줄에 홀로 앉아 기도하면 그 시간만큼은 솔직한 내 안의 모습으로 하느님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 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쭉 늘어놓다 보면 억울하고 불만투성이였던 감정들이 사라지고 감사한 한 주로 마무리되곤 했다. 불투명한 내 미래 또한 더 이상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어진 기회마다 최선을 다하다 보면 하느님께서 진정한 길로 인도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교사를 하면서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내게 주신 여러 탈렌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고민하게 되었고 연기자와 교수라는 두 가지 직업을 가진, 남들과는 다른 길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봉사라고 여겨졌던 일들이 사실은 하느님의 남다른 ‘자녀 교육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초등부 교사 활동을 통해서 나의 말랑말랑한 신앙심을 단단하게 키우시고 나약하고 위태로웠던 마음을 단련시키는 기도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직업과 잘할 수 있는 직업을 직접 찾게 해주시기도 했다. 여유 있을 때 하는 봉사가 아닌, 나를 필요로 하실 때 적극적으로 응한 덕분에 지금의 내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날이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

2024-07-21

오늘도 하느님 감사합니다

“넌 연기자로 안 돼. 다른 일을 선택해 봐.” 11살에 MBC 어린이 합창단을 시작으로 단역부터 차근차근 올라가 20살에 KBS 드라마 ‘학교3’의 주인공을 맡을 때까지 내가 꾸준하게 듣던 말이다. “예술가는 술도 마시고 놀아보기도 하는 경험이 많아야 하는데, 넌 너무 모범생 마인드야.” “네가 엄청 이쁜 얼굴도 아니잖아.”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느님 도와주세요’라고 외칠 뿐이었다. 나는 연기가 좋았다. 한없이 못나 보이는 실제 내 모습을 숨기고 또 다른 내 안의 모습을 연기로 당당히 표현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다들 내게 연기자는 안 된다고 하니 늘 속상하고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인 생각과 고민을 안고 꾸역꾸역 버티며 연기자 활동을 이어오던 어느 날, cpbc 라디오에서 연락이 왔다. “인혜씨,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낮 12시부터 1시까지 시간 어떠세요? 어려운 이웃의 사연을 소개하고 청취자분들께 기부받는 프로그램 진행을 부탁드리려고요.” 지금 내 마음도 힘든데 힘든 이웃을 도와주는 프로그램 진행자라니…. 너무도 거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불현듯 내 마음속 외침이 생각났다. ‘하느님 도와주세요.’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던 내 괴로운 마음을 달래주시려는 하느님의 사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나눔’은 토·일요일 이틀 꼬박 진행해도 총 기부액이 몇백만 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 나에게는 부담이 없게 다가왔다. 덕분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주어지는 사연에 진심만을 담아 내 방식대로 프로그램 진행을 할 수 있었다. 제작진들은 연기자라는 나의 장점을 살려 사연자의 감정을 연기로 표현할 수 있는 내레이션 파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사연을 읽다 보면 때때로 목이 메이고 울먹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기부액이 2배, 3배, 5배까지 크게 늘어난 것이다. 다들 그만하라고 했던 내 연기를 이 프로그램에서 유일하게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께서 내게 연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하신 이유가 여기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연기자로서 적합한 성격도, 뛰어난 외모도, 다양한 경험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하느님은 내게 타인의 상황과 감정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잘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을 특별하게 내려주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다란 보람과 감사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시작한 지도 벌써 6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어려운 이웃들의 사연이 너무 기구하다 보니 진행하면서 우울해질 텐데 왜 임신해서도, 9개월된 갓난아기를 키우면서도 이 프로그램을 여전히 진행하고 있는지 말이다. 가정폭력, 심각한 화상 환자, 미혼모. 기구한 이들의 삶의 이야기가 내게 전혀 우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내 말 한마디, 내 내레이션 한번이 이들에게 또 다른 희망의 날을 불러오게 할 수도 있다는 기대가 보이기 때문이다. 연기자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도 이제 더는 없다. 내 연기가 이렇게 좋은 일에 쓰일 수 있음에도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재능을 직업으로 주신 하느님께 오늘도 감사드린다. 글 _ 이인혜 데레사(배우)

2024-07-14

김대건 신부, 한국의 성인을 넘어 세계의 성인이 되다

돌이 좋아 오로지 돌조각만 고집하며 50년이 넘도록 돌과 함께 살아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업장에 간다. 그곳에 가면 돌조각을 할 수 있어 즐겁기 때문이다. 1972년, 명지고등학교 1학년 때 유영교 선생님을 만나면서 망치질을 배우기 시작해 1975년부터 홍익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전뢰진 교수님께 돌조각을 배웠다. 이후 대리석 조각의 본고장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유학을 하면서 다양한 대리석을 공부하게 되었다. 조각의 재료는 돌, 철, 나무, 테라코타, 브론즈 등 다양하지만 작가와 특별히 궁합이 맞는 재료가 있는 것 같다.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조각이 탄생하려면 조각가와 재료, 작품의 형태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돌조각을 하는 작가는 참을성이 많고 끈기있고 성실해야 한다. 반면에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면이 있다. 성질이 급하거나 역동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는 돌 보다는 철이 잘 어울린다. 돌은 진솔하고 정직한 재료여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한번 망치질하면 한번 망치질한 효과만 나타난다. 조각용 돌은 대리석, 화강석, 현무암 등 다양하고 대리석 종류만 수백 가지가 된다. 신경질적인 성격(Nero Belgium), 맑고 고귀한 느낌(Statuario), 텁텁하고 서민적인 성격(Traveritino), 귀티가 나는(Rosso Portugal),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Carrara Bianco), 자유분방한 아줌마 같은(Rosso Verona), 따뜻하고 화사한(giallo Siena) 느낌 등으로 분류된다. 돌을 조각하려면 조각하기 전에 돌을 완전히 파악해 돌의 결을 읽어내야 하며 돌과 대화하면서 타이르고 구슬러야 한다. 돌과 싸워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작업을 할 때는 먼저 머릿속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구상된 형태를 다양하게 스케치해 본다. 스케치한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 점토로 제작하고 완성된 점토가 마음에 들면 석고나 폴리로 캐스팅을 한다. 그에 어울리는 크기와 색상의 대리석을 찾아 조각하는 것이 마지막 단계다. 대리석 조각을 하다 보면 무늬와 크랙이 대리석 속에서 나타날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돌조각을 하는 작가들은 “사람의 속마음도 알 수가 없지만 대리석의 속은 더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얼굴이나 손과 같은 중요한 부분에 이상한 크랙이 나타나면 작업을 중단하고 다른 대리석을 찾아서 처음부터 다시 조각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을 멈출 수가 없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 성상은 완성될 때까지 이상한 크랙이나 무늬가 나타나지 않았다. 완벽한 대리석이었던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제작할 때 사용한 대리석(Statuario)보다 더 좋은 대리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상의 대리석을 찾아서 성상을 무사히 완성하고 안전하게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의 기도와 김대건 신부님이 옆에서 항상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물론이고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를 가이드가 “갓”이라고 설명하면 외국인들은 “GOD?”이라고 되묻는다고 한다. 이제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의 성인을 넘어서 세계의 성인이 되셨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하는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김대건 신부님의 담대하고 배짱 있으며 겸손하고 너그러운 심성을 배우고 본받기를 희망한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7-07

김대건 신부 성상 축복식과 감사미사

2023년 9월 16일 오후 4시30분(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님 성인상 축복식이 거행됐다. 이날은 김대건 신부님이 순교한 지 177년 되는 날이었다. 축복식을 주례한 성 베드로 대성당 수석사제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님은 “김대건 신부님을 시작으로 이제는 각 민족과 나라를 대표하는 성상들이 들어설 것”이라며 “오늘의 행사는 동양과 서양의 교회가 함께 나가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며 시작”이라고 말했다. 축복식에는 주교회의 의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를 비롯해 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 전 군종교구장 유수일(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티토) 주교, 청주교구장 김종강(시몬) 주교, 부산교구 신호철(비오) 주교 등 주교단과 한국과 로마에서 찾아온 한국 순례단 400여 명이 참석했다. 김대건 신부의 삶을 그린 영화 ‘탄생’ 제작진과 출연진들 그리고 우리 정부 대표들도 함께했다. 김대건 신부님 성상은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에 이어 유흥식(라자로) 추기경님과 염수정 추기경님이 뿌리는 성수를 받으며 가톨릭교회의 자랑스러운 성인임을 전 세계 알렸다. 축복식 끝엔 로마 한인 본당 청년들의 사물놀이 공연으로 더욱 빛이 났고, 추기경과 주교, 사제 그리고 대표단 모두가 한국의 전통 사물놀이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며 우리 문화를 환영했다. 축복식에 앞서 오후 3시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베르니니의 조각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유흥식 추기경님의 주례로 감사미사가 봉헌됐다. 유흥식 추기경님은 강론에서 “25년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어떤 어려움에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았던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전 세계 젊은이가 본받길 기대하고 기도드린다”고 했다. 유흥식 추기경님은 감격스러워 눈시울을 붉히며 강론을 잠시 멈추기도 하셨다. 한국 신부님들과 수녀님들로 구성된 성가대에서 울려 퍼지는 성가와 추기경님의 강론은 감격스럽고 웅장해 평생 잊을 수 없는 미사였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날 오전 10시에 교황 사도궁 클레멘스 홀에서 한국의 순례단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환영을 해주셨고 2014년 8월 방한 당시 김대건 신부님이 태어난 충남 당진 솔뫼성지를 방문했던 일을 회고했다. 교황은 당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라는 문구가 떠올랐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제이자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나이에 순교한 김대건 성인은 여러분들 신앙의 아름다운 역사를 영적인 눈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김대건 신부님에 대해서 많은 공부를 하셨고 우리 김대건 신부님을 존경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교황님 알현 때 한국 전통의상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는데 “이 옷이 김대건 성상의 두루마기와 같은 옷”이라고 소개하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550년간 비워져 있던 중요한 자리에 김대건 신부님 성상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니 내 손을 꽉 잡아주셨다. 그리고 바로 엄지손가락을 세우시며 최고라고 답례를 해주셨다. 글 _ 한진섭 요셉(조각가)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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