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선생의 제자들은 모두 제 이름으로 된 총서(叢書)를 가지고 있었다. 총서가 있느냐 없느냐, 많으냐 적으냐로 아끼는 제자였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처음 책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이게 모두 그들의 저술인 줄 알았다. 실제로는 꼭 읽어야 할 내용을 초서(抄書)한, 즉 베껴 쓴 책이었다. 총서 대신 일록(日錄)이나 수초(手抄)로 제목을 붙인 경우도 있었다. 황상의 「치원총서」, 황경의 「양포총서」, 윤종심의 「순암총서」, 초의의 「초의수초」 등이 그러한 예이다. 다산이 깊은 정을 두었던 제자 황상은 그렇게 베껴 쓴 총서가 자기 키를 넘겼다. 현재 강진 다산박물관에 남아있는 것만 14책이다. 베낀 책의 목록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가 드러난다. 시인의 삶을 살았던 황상은 각 시대별 주요 시집들을 총서 속에 온전하게 갖추어 놓았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어째서 베껴 쓰기 같은 비효율적인 공부를 시켰을까? 책을 여러 번 밑줄 긋고 메모해 가며 읽는 것이 낫지 무슨 맛에 책을 통째로 베끼게 했을까? 구하기 힘든 책은 전체를 베꼈고, 간혹 핵심만 간추려 썼다. 중간중간 자신의 생각을 남기기도 했다. 그 생각을 살피는 것이 또 중요한 나의 공부 거리다. 공부의 방법으로 이 초서 작업은 뜻밖에 위력적이다. 연암 박지원의 친필 필사본 중 「영대정집」(映帶亭集)이 단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첫머리에 적힌 친필 서문은 나중에 간행된 문집 어디에도 없는 글이다. 처음에는 글의 맥락이 눈에 잘 잡히지 않았다. 공책을 펴서 또박또박 옮겨적고, 전철에서 자리에 앉아 우리말로 옮겼다. 막히는 부분은 다음날 보고, 다시 또 보았다. 전에 미심하던 뜻이 다음번에 보니 명확하게 눈에 들어 왔다. 책을 눈으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어지럽게 메모한 번역을 다시 깨끗하게 옮겨 쓰자 이제 단락별 맥락이 소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덧붙인 메모가 다시 어지러워져서 깨끗한 종이에 한 번 더 필사했다. 앞의 것을 보지 않은 채 내 생각을 메모하자 의미가 한 단계 더 정열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도 나의 필사는 두 차례 더 이어졌다. 베껴 쓰기는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박아서 뇌리에 심는 과정이다. 일종의 되새김질에 가깝다. 기계적으로 영혼 없이 베껴 쓰는 일은 없다. 교회사 연구자인 박용식 선생은 책을 눈으로 읽지 않고 손가락으로 읽는다. 중요한 책은 무조건 통째 입력부터 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3책은 200자 원고지로 근 7000매 분량인데 다 입력했다. 한국 교회사의 주요 저작들이 그의 컴퓨터 안에 없는 것이 없다. 「사학징의」, 「칠극」, 「벽위편」까지 다 있다. 글을 쓰다가 예전에 본 자료가 생각나지 않아 물으면 얼마 안 있어 원문과 함께 대답이 돌아온다.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나는 빈 종이를 꺼내 초서를 시작한다. 문득 예전 읽었던 글을 찾아 베껴 쓰기도 하고, 논문을 준비 중인 글을 다시 베껴 쓰기도 한다. 또박또박, 따박따박 베끼는 동안 글과 대화하고, 글쓴이의 생각 속에서 헤엄친다. 그러고 나서 그 아래에 내 생각을 다시 메모해 둔다. 서류봉투의 뒷면이나 포장지의 뒷면에 적은 메모가 묘목이 되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큰 나무로 자라난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