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기도 이야기] 죽게 해달라는 이들의 기도를 찬양으로 바꾸시는 하느님(토빗 3,16;3,11-15;13,1-14,1)

20번 정도 기도를 언급하는 토빗기에 따르면 기도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4,19;12,6.7.17.20), 건강과 안전의 청원(5,17), 보살핌과 축복의 청원(7,11;9,6), 후손의 기원(10,11), 부모 공경의 청원(10,13), 자비와 평화의 기원(7,11), 하느님 찬양의 권고(12,6), 조신함과 성공의 청원(4,19), 자비와 구원의 청원(8,4)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토빗기는 죽고 싶다는 이의 기도도 들려줍니다. 토빗은 고지식하다고 싶을 정도로 외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미 고향에 살 때도 집안 사람들과 달리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물을 드렸고, 이방인들 사이에 포로로 살면서도 까다로운 음식 규정을 지키고 동족에게 큰 자선을 베풀고, 그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1,6-20) 축젯날 주검에 닿아 부정하게 된 상황에서(민수 9,10;19,11) 하필 성결법을 지키고자 방이 아니라 담 옆에서 잠을 자다가 눈이 멀었습니다. 그의 고집스러운 신앙생활은 이웃은 물론이고 부인조차 불편하게 한 듯싶습니다.(2,14) 아내를 의심하고 그와 다툰 뒤 토빗은 자기 연민에 쌓여 죽기를 청합니다. “이제 당신께서 …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3,6) 한순간에 눈이 멀어버린 토빗과 남편을 일곱이나 잃게 된 사라 절망 속에서도 목숨 거둬주시길 기도 진실한 기도 하느님께 다다르자 두 사람 고쳐 주도록 라파엘 파견돼 모든 문제 해결되면서 하느님 찬양 일곱 남자와 결혼했지만, 신랑과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모든 남편을 잃은 사라는 이웃의 흉흉한 입담과 자기 신세 한탄으로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을 부잣집 딸입니다. 그녀로부터 매 맞은 여종들이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모욕하자 사라는 목을 매 죽으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남아계실 아버지가 받을 수모를 생각하여 하느님께 죽음을 청합니다. “분부를 내리시어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다시는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게 하소서. … 아버지에게는 저를 아내로 맞아들일 가까운 친족도 일가붙이도 없습니다. 저는 이미 남편을 일곱이나 잃었습니다. 제가 더 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제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저를 모욕하는 저 말이라도 들어 보소서.”(3,13-15) 둘 다 외로움의 낭떠러지에서 죽고 싶은 생각으로부터 올려진 절망적인 기도이지만 이는 하느님 앞에 다다르고 마치 극의 한 장면처럼 라파엘이 파견됩니다.(3,16-17)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토빗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책의 절정을 기도로 장식합니다. “그분께서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 내 후손 가운데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의 임금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나 얼마나 행복하리오? … 복을 받은 이들은 거룩한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미하리라.”(13,4.16.18) 그의 시선은 포로 생활과 나그네살이라는 현실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에 이릅니다. 재산이 많은 토비야 이야기는 나그네살이를 하면서도 재산을 많이 모으는 유다인들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 하지만 토빗, 토비야, 사라, 라구엘, 라파엘 등 앞 세대와 뒷세대, 남녀 모두가 기도하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띕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12,8;14,8-9)는 말씀은 기도하는 이로 하여금 선행을 잊지 않게, 재산을 지닌 이로 하여금 자선을 잊지 않게 도와줍니다. 기도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12,12)는 라파엘 천사의 말씀 자체가 힘이 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1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묵주 기도 끝에는 꼭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많은 분들이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한 단의 마지막, 바로 영광송 뒤에 이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구원송’이라고도 부르는 ‘구원을 비는 기도’입니다. 보통 묵주 기도를 배울 때 이 기도를 같이 배우곤 하는데요. 그래서 평소에 묵주 기도를 많이 바치는 분들 중에는 묵주 기도를 바칠 때가 아닌데도 영광송 후에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 저희 죄를…”이라고 외우다가 ‘아차!’하는 경험을 하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구원을 비는 기도처럼 영광송 다음에 오는 이 기도를 ‘짧은 마침 기도’라고 부르는데요. 짧은 마침 기도는 구원을 비는 기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바쳐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는 묵주 기도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짧은 마침 기도를 곁들이는 것을 권장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짧은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하다”면서 “그러한 기도의 가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신비의 묵상이 고유한 열매를 맺도록 그 신비를 기도로 마무리한다면, 신비의 관상이 더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다양한 짧은 마침 기도 중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일까요? 구원을 비는 기도는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나타나셨는데요. 성모님은 전쟁의 종식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 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묵주 기도의 모후’라고 칭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발현 중 세 번째 발현이었던 7월 13일에 구원을 비는 기도를 알려주시며 묵주 기도의 한 단을 마칠 때마다 바치도록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비는 기도는 ‘파티마의 기도’(Fatima Prayers)라고도 불립니다. 파티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확산되면서 구원을 비는 기도도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가 널리 퍼져 신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교회의 차원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신심과 함께 기도문이 번역돼 전해지다 보니 구원을 비는 기도에 의역도 있고, 또 기도문의 문구가 달라 혼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주교회의는 2011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현재의 기도문으로 통일했고, 2017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구원을 비는 기도를 「가톨릭 기도서」에 싣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의역은 아직 남아 있는데요. 구원을 비는 기도의 라틴어 기도문을 원문과 비교해 보면 ‘모든 영혼들’을 ‘연옥 영혼’으로, ‘특별히 당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영혼’을 ‘가장 버림받은 영혼’으로 의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바칠 때는 통일된 기도문으로 바쳐야 하겠지만, 본래 기도문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바친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10-13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다니엘의 참회 기도(다니 9,2-23)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전형적인 참회 기도를 전해줍니다.(참조: 느헤 1,4-11;9,4-37; 에스 4,17⑬-㉚) 다니엘은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채 채워야 하는 햇수를 곰곰이 생각합니다.(예레 25,11-12) 기도에 앞서 그는 단식하고 자루 옷을 두르고 재를 쓰고 준비한 후, 진지하게 기도와 간청으로 탄원합니다.(9,3) 그의 기도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배신을 길게 고백하고 (9,5-11.13-14) 하느님의 용서를 반복해서 청합니다.(9,9.16) 그런 다음 ‘이제’(9,15.17)라는 말을 통해 하느님께 청하는 바를 밝힙니다. “주님, 당신의 그 모든 의로운 업적을 보시어,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분노와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 주님, 당신 자신을 생각하시어 황폐한 당신의 성소에 당신 얼굴을 빛을 비추십시오. … 눈을 뜨시어 저희의 폐허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성을 보십시오.”(9,16.17.18) 다니엘은 자신이 청하는 바를 단순히 민족의 해방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높인다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때, 그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얼굴을 마주 봄으로써, 서로의 입장을 헤아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느님의 입장을 반영한 기도를 하느님은 바로 들어 주십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며 아뢰고 있는데, 지난번 환시에서 본 가브리엘이라는 이가 저녁 예물을 바칠 때 빨리 날아서 나에게 다가왔다.”(9,21) 가브리엘은 다니엘의 청원이 시작될 때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다는 사실과 그 말씀의 내용을 전달하면서 다니엘을 ‘총애를 받는 사람’(9,23)이라고 칭합니다. 하느님은 기도하는 이들을 총애하십니다. 다니엘서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정도까지 쓰인 글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니엘은 역사의 한 인물이라기보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와 벨사차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와 키루스 등 여러 임금 밑에서 일했던, 또 그 이후 환시를 통해 가려진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보았던 이스라엘 포로 출신의 여러 재상 내지 현인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그들은 공통으로 유배지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기도 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했고(2,18.20-23), 기도 금령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드렸으며(6,11), 우상이나 괴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경배했습니다.(14,4.25) 또 그의 동료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불가마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했고(3,16-18.26-45.52-90), 다니엘이 구한 수산나도 죽음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13,42-43)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박해 시대에 숨어 살면서도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계속되는 어려운 시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도 덕분입니다. 다니엘서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환상과 환시와 꿈, 수수께끼와 비밀, 혼수상태와 와병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불안정한 현실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시사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다니엘은 그러한 상황이 다른 이들의 탓이 아니라 자기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고, 그 시간을 정화와 순화와 단련의 계기로 받아들이고(12,9), 어떠한 상황도 하느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생명의 탯줄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침·저녁기도, 성무일도, 매일 미사, 신앙을 전달하는 방송과 매체는 그에 큰 도움을 줍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06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묵주 기도 신비는 요일에 맞춰서 해야만 한다?

환희의 신비는 월·토요일, 고통의 신비는 화·금요일, 영광의 신비는 수요일·주일, 빛의 신비는 목요일. 아마 예비신자 교리 때, 혹은 묵주 기도를 배우는 다른 때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묵주 기도는 요일마다 각각 묵상하는 신비가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러 “월요일에는 꼭 환희의 신비만, 화요일에는 고통의 신비만 바쳐야하는 건가요?”하고 궁금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드리자면 꼭 요일에 배정된 신비만을 바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굳이 신비마다 요일을 정해둔 걸까요? 정해두긴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묵주 기도의 요일 배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이 점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2002년에 묵주 기도에 ‘빛의 신비’를 새롭게 제정하실 때 발표하신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교서에서 새롭게 추가한 ‘빛의 신비’를 추가해서 각 신비의 요일 배분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따로 상세하게 설명하시면서 묵주 기도의 요일 배분이 왜 중요한지 가르치셨습니다. 교황님은 “요일 배분은, 전례가 전례 주년의 다양한 시기를 여러 색으로 채색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요일마다 영적인 ‘색깔’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비유하시면서 “전례에서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한 주간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들을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고 강조하십니다.(38항) 전례처럼 신자들이 묵주 기도를 통해 같은 신비를 묵상하면서 일주일 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신비를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묵주 기도는 그저 성모송을 10번 외우면 되는 기도가 아닙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묵주 기도를 두고 “요약된 복음”이라고 칭송하셨는데요. 교황님은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동정녀의 잉태와 예수의 유년기 시절의 신비들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절정 곧 복된 수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구원 사건들이 조화 있게 연결돼 있고, 성령 강림 날 태어난 교회와 이 세상에서의 일생을 마치시고 영혼과 육신이 하늘나라로 올림을 받으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타난 파스카의 결실이 총망라돼 있다”면서 “로사리오(묵주) 기도는 복음적인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44~45항 참조) 묵주 기도는 성모송을 외우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묵주 기도의 4가지 신비 전체를 다 바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아마 많은 분들이 바쁜 일상에 쫓겨 그러기 어렵지 않으실까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제안에 따라 매일 요일에 맞는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 기도를 바쳐보면 어떨까요? 그 여정을 통해 우리의 한 주간을 예수님의 삶으로 가득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10-06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명동대성당은 대성당(basilica)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대성당’이라 하면 많은 분들이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을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본당의 성당이자 한국교회의 역사를 담고 있는 성당이기 때문이지요. 세계적으로 생각해 보면 로마 바티칸에 자리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먼저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동대성당을 부를 때의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부를 때의 ‘대성당’은 사실 다른 말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바실리카(basilica)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말로 ‘대성당’에 해당하는 말인데요. 이 말은 역사적·신앙적·예술적인 중요성을 인정받는 성당이자, 교회를 통해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성당을 일컫습니다. 바실리카는 원래 줄지어 세운 기둥 위에 지붕을 올린 사각형의 넓은 강당 형태의 건축 양식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 재판, 집회, 상거래를 위해 쓰인 이 건축 양식은 교회가 공인되면서 교회의 주요 건축 양식이 됐습니다. 당시 교회가 기존 바실리카를 개조해 성당으로 사용하거나 바실리카 양식으로 성당을 지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역사가 오래된 성당은 대부분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바실리카는 특별한 성당을 높여 부르는 칭호가 됐습니다. 특히 16세기 무렵부터 교회는 특정 성당들을 지정해 바실리카라 부르도록 했는데요. 현재 교회법에는 삭제된 내용이긴 하지만, 1918년 「교회법전」에는 “사도좌의 허락이나 오랜 관습을 따르는 경우 외에는 어떤 교회에도 대성당(바실리카)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을 정도로 중요한 칭호입니다. 여전히 바실리카라는 칭호를 붙일 권한은 교황청에 있습니다. 바실리카에는 대 바실리카(major basilica)와 소 바실리카(minor basilica)가 있습니다. 대 바실리카는 전 세계에 딱 4곳, 그것도 교황님께서 사목하시는 로마에만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초의 바실리카이자 교황님의 주교좌성당인 ‘라테라노 대성당’, 오늘날 교황청이 자리하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 바오로 대성당’, 성모님에 관한 기적이 담긴 전설로 성모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도 불리는 ‘성모 대성당’ 이렇게 4곳입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 4곳의 바실리카를 제외하고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모든 성당은 소 바실리카에 해당합니다. 우리말로 ‘준대성전’이라고도 하는 소 바실리카는 대 바실리카의 일부 특전을 부여받은 성당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한 곳 있습니다. 바로 광주대교구 가톨릭목포성지 ‘산정동 순교자 기념성당’입니다. 그럼 명동대성당을 대성당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대성당은 바실리카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교좌성당(cathedral)을 높여 부르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구장 주교님이 자리하시는 주교좌가 있는 성당은 한 교구의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성당이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대구대교구에도 주교좌 범어대성당이 있습니다.

2024-09-29

[성경 속 기도 이야기] 햇곡식을 바치며 올리는 기도 (레위 23,9-14;신명 8,7-10;26,1-11)

더운 여름이 지나고 추수의 계절인 가을이 왔습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왔던 우리 민족은 가을 추수를 끝내기 전에 함께 모여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 조상께 감사드리는 추석을 지내왔습니다. 성경 안에도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레위 23,9-14) 레위기는 책 전반에서 제물과 제사와 축제를 자세히 규정하는데, 그 안에서 기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제물의 봉헌은 피를 뿌리거나 제물을 태우거나 흔들면서 침묵 중에 이루어졌으리라 추측됩니다. 하지만 모든 수확의 맏물을 담은 광주리를 갖다 바치며 하는 기도를 소개하는 신명기 26장은 예외를 보여줍니다. 맏물을 바치는 이들은 우선 사제에게 “주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가 들어왔음을, 오늘 주 당신의 하느님께 아룁니다”(신명 26,3)라고 말합니다. 이어 광주리를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놓으면서 자기 민족의 역사를 회상하는 신앙고백을 합니다.(26,5-9) 끝으로 “주님, 그래서 이제 저희가 주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26,10) 이어 그것을 하느님 앞에 놓고 그분을 경배하며, 레위인과 이방인과 더불어, 즉 하늘과 땅의 모든 이와 더불어 기쁨의 잔치를 벌입니다. 이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과 그의 성취를 고백합니다. 모세는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를 좋은 땅으로 데리고 가신다. … 너희는 배불리 먹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좋은 땅 때문에 그분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신명 8,7-10)라고 예견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확의 맏물을 봉헌하면서 잔치를 벌이는 것 자체가 하느님 약속의 성취에 대한 확인입니다. 이 기도에서 인간 노력의 결실이 단순히 인간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약속과 성취라는 하느님의 계획 안에 포괄되면서 영원한 가치를 얻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의 뜻과 연결될 때 그것은 헛되이 지나갈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서 서 있을 것입니다. 식사 전 기도를 생각해 볼까요?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매우 간단한 기도이지만, 자기가 차리든 남이 차리든, 비싼 돈을 내고 먹든 얻어먹든, 배고픔을 달래고 힘을 얻는 매 식사가 이 기도를 통해 영적인 차원을 얻고 덧없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감사 기도를 통해 또한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것에 대해 건강한 거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새빠지게 일해 모은 것을 내 마음대로 쓴다’는 자신 안에 고립된 생각은 우리를 타인으로부터 또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감사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선하심을 상기시키고 타인에 대한 의무를 일깨우며 우리를 우리가 가진 것의 소유주가 아니라 그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다루는 관리자로 만듭니다. “저희 조상은 떠돌아다니는 아람인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고백(26,5-9)은 선택된 백성에게 고유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에게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서 신앙고백을 작성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분의 이끄심을 고백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면, 어떤 처지든 현재를 수용하고 미래를 그분에 대한 신뢰 속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때에 선사하셨습니다. 땅에서는 영원에서든 모든 것은 그분의 선하심으로 살아갑니다.”(안톤 베젤리, 오스트리아 신부)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29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보 착용은 남녀차별이다?

미사 시간만을 위한 특별한 복식들이 있지요. 주로 신부님이나 전례 봉사자의 복식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직자나 전례 봉사자 외의 신자들도 미사 때 착용할 수 있는 복식이 있습니다. 미사 등의 전례 중에 세례를 받은 여성 신자들이 쓰는 베일, 바로 미사보입니다. 교회가 전례 중 미사보를 사용한 것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씀(1코린 11,2-16)에서 비롯됐습니다. 이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어떠한 여자든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의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1,5) 전례 때 여성은 베일을 써서 머리를 가리라는 것이지요. 심지어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11,9)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구절들만 봐서는 남녀를 차별하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정말 미사보로 남녀를 차별한 것일까요? 사실 바오로 사도는 오히려 교회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자주 강조한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성의 머리를 가리는 것에 관해 언급한 후에 바로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면서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11,11-12)고 강조했습니다. 다른 편지에서도 성별, 출신 모두 관계없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갈라 3,27-28)라며 예수님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이 당시 그리스도교 풍습을 말한 것일 뿐, 절대적인 규칙이나 본질적인 신앙의 행위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코린토 1서 강해」를 집필하신 이영헌 신부님(마리오·광주대교구 성사전담)은 “여성이 머리를 가리는 것은 당시 코린토의 문화 안에서 예의였다”면서 “바오로 사도가 머리를 가리라고 한 것은 기도할 때 예의를 지키도록 당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살던 시대의 문화에서 시작된 미사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사보에는 더 큰 의미가 담기게 됐습니다. 세례 받은 신자가 입는 ‘흰옷’을 나타내게 된 것이지요. 세례성사에서 흰옷은 세례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입었다”(갈라 3,27)는 것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음을 상징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43항) 이런 이유로 세례성사의 흰옷을 입는 예식에서 미사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미사보는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도 뜻합니다. 미사보 착용은 의무가 아니라 자유입니다. 쓰고 싶은 분만 쓰시면 되지요. 미사보에 있어서는 여성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선택할 수 있다는 권한이 있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듯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입고’ 더 깊이 예수님의 성찬례에 함께하고 싶으시다면 미사보를 쓰고 미사에 참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남성분들은 미사보를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2024-09-1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자기 착각에 빠진 요나의 기도(요나 2,3-10)

예언자 요나는 적국인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가라는 주님의 명을 피해 달아나다 폭풍을 만나고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을 지냈습니다. 그는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며 니느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느님께서 벌을 거두신 것을 보고 죽고 싶다고 떼를 씁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드린 기도는 사실을 왜곡하는 기도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폭풍이 일자 이방인 뱃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지만 깊이 잠들어 있던 요나는 기도하라는 선장의 요구를 받고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뱃사람들은 요나를 바다로 집어 던지기 전에 주님(야훼)께서 폭풍을 일으키신 것을 알고 그분께 자신들이 하는 일에 용서를 청합니다.(1,14) 하지만 요나는 사흘 밤낮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합니다.(2,1) 더구나 그의 기도는 왜곡된 사실로 그득합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2,3)라고 하지만 그는 사실 ‘배 밑창에 드러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1,5) 요나는 ‘당신께서 바닷속 깊은 곳에 저를 던지셨다’(2,4)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를 던진 이들은 뱃사람들이었고(1,15) 그것은 요나가 자신의 사명을 피해 도망친 결과였습니다. ‘당신의 눈앞에서 쫓겨난 이 몸’(2,5)이라고 하지만 그는 스스로 주님을 피해 도망갔습니다.(1,3) “헛된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은 신의를 저버립니다”(2,9)라고 하지만 이방인 뱃사람들은 자신들을 불행에 빠뜨린 요나를 구하려 끝까지 애썼고 다른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주님(야훼)의 용서를 구하며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1,13-16) 하느님이 니네베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 때문에 요나는 다시 기도합니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면,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1-8) 요나는 적에 대한 미움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하느님이 자신의 적을 용서하신 사실을 자기 죽음으로 부정하려 합니다. 우리가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을 눈앞에 떠올리는 것이 요나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내 바람과 달리 잘 되고 하느님의 복을 받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부정하며 왜곡된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생각과 다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삐뚤게 이해하는 위선자의 전형입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은 그런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거듭 지적하십니다.(이사 1,15;29,13; 마르 7,6-7; 예레 7,9-10; 호세 6,1-3;8,1-2; 미카 3,3-4; 스바 1,5-6; 즈카 11,5; 마르 12,40; 마태 6,5-7) 내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는 사실을 왜곡하는 위험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은총을 얻으리라 희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나의 거짓된 기도를 들으시고도 요나를 육지에 뱉어 내게 하시고(2,11) 죽고 싶다는 요나를 타이르시고 그에게 자비와 용서를 가르치십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하느님이 요나와 니네베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회하고 회개하는 나 자신도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새로이 시작할 용기를 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휩 오스터하위스, 네덜란드 시인)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1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고통 속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예레미야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같이 하느님과 한 개인의 씨름을 다룬 고백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기록된 예례미야의 다섯 개 고백은 아주 오래되었으면서도 하느님께 따지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치욕과 비웃음을 당하지만, 자신의 기쁨이자 즐거움인 그분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기에 침묵할 수도 없습니다.(예레 15,15-16) 그는 자신의 사명 때문에 자신이 처하게 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화를 내고 따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분을 계속 신뢰합니다. 그의 마음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습니다. … 그럴지라도 당신께 공정성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의 길은 번성하고 배신자들은 모두 성공하여 편히 살기만 합니까?”(예레 11,20;12,1) 큰 고난을 겪는 예레미야는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닥치게 하시고 그들을 부수시되 갑절로 부수어 주소서.”(예레 17,18)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마시고 … 그들을 당신 앞에서 거꾸러지게 하시고 당신 분노의 때에 그들을 마구 다루소서.”(예레 18,23) 나아가 자기의 운명을 욕하며 신세 한탄을 합니다.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 …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와 고난과 슬픔을 겪으며 내 일생을 수치 속에서 마감해야 하는가?”(예레 20,14.18). 그는 급기야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하느님께 실망을 느끼고 하느님을 나쁘게 말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이 되었습니다.”(예레 15,17)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예레 20,7) 하지만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원망에도 화를 내시지 않습니다. 다만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면’(예레 15,19)이라고 따끔한 주의를 주시면서 그를 당신의 대변인으로 만드시고 그에게 여러 가지를 약속해 주십니다.(예레 15,19;20-21) 하느님은 예레미야가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앞으로의 사명에 걸맞게 성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사람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먼저 지쳤다면 어찌 말들과 겨루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만 의지한다면 요르단의 울창한 숲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예레 12,5) 너무나 힘들어 타인과 하느님과 자신 등 누구에 대해서도 고운 말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마음을 토로할 수 있으며 하느님은 그것을 귀여겨들으시고 설령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해 주십니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디인지를 내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계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 11,33)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마태 1,23)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길(요한 14,6)이십니다. 첫 번째 고백과 두 번째 고백이 예레미야의 기도(11,18-20; 12,1-4; 15,10; 15,15-18)와 하느님의 응답(11,21-23; 12,5-6)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세 번째 네 번째 고백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상대방을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자세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 그분의 위안을 얻도록 이끕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9-0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아카펠라는 교회 음악이다?

아카펠라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아카펠라는 악기 없이 목소리만으로 화음을 맞춰 부르는 음악인데요. 아카펠라를 들으면 사람의 목소리가 이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카펠라가 교회 음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지금은 교회 음악에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고 있지만, 초기 교회에는 전례 중에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이후 9세기경 교회 음악에 오르간이 도입되고 여러 악기들이 차츰 교회 음악에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클래식 음악들도 교회 음악으로 작곡된 곡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람의 목소리로 내는 음악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큰 악기를 두기 어려운 작은 규모의 기도 공간, 경당에서 반주 없이도 하느님께 경건하게 찬미를 드리는 무반주 합창을 불렀습니다. 1500여 년 전부터 무반주 합창을 불러온 시스티나 성당 합창단이 대표적인데요. 이 합창단이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에서 무반주 합창을 노래해, ‘성당식으로’, ‘성당 풍으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아카펠라(A Cappella)가 성당에서 부르는 무반주 합창을 일컫는 말이 됐습니다. 아카펠라는 특히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경에 많이 작곡돼, 유럽 전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그렇게 교회 음악을 뜻하던 아카펠라는 19세기 무렵 합창음악이 대중화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변해 교회 음악과 관계없이 악기 반주 없이 하는 모든 합창을 부르는 말이 됐습니다. 카펠라, 바로 ‘성당’이라는 말이 음악의 한 장르를 뜻하는 말이 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성당을 뜻하는 카펠라는 이전에도 뜻이 변한 적이 있는 말입니다. 카펠라는 성당 중에서도 작은 규모의 성당, 즉 경당을 부르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이 단어는 로마 군인의 외투인 카파(cappa)가 뜻이 변한 말입니다. 세례 받기 전 군인이었던 마르티노 성인(316~397)은 어느 날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고 있는 걸인에게 자기가 입고 있던 카파를 반으로 잘라 내어줬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 성인의 꿈에 마르티노의 반쪽 카파를 입은 예수님이 나타나 “예비신자 마르티노가 이 옷으로 나를 입혀 줬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그 후 세례를 받고, 나아가 주교가 돼 목자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선종 후에도 성인으로 널리 공경받았지요. 이후 성인의 카파를 보관하기 위한 작은 성당이 세워졌는데요. 사람들은 마르티노 성인의 카파가 있는 이곳을 카펠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마르티노 성인의 성당처럼 작은 성당, 즉 다른 경당들도 카펠라라고 부르게 됐고, 그래서 카펠라는 성당을 뜻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의 일화에서 경당, 경당에서 찬미 노래를 부르는 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관련 없는 줄 알았던 ‘아카펠라’에 참 많은 교회의 이야기가 숨어있던 것 같습니다.

202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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