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명예나 영광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물’이나 ‘부’는 주로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최종 목적이라는 행복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면,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자연적 재물에 대한 유혹이 실패하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한다.(루카 4,1-13)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리에게도 강력한 유혹의 후보들이 떠오른다. 명예나 명성 안에서 찾는 인간의 행복 고액의 연봉을 받는 직장인, 엄청난 계약금으로 스카우트된 운동선수나 연예인,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부자들은 이에 상응하는 ‘명예’가 주어진다. 또한 우리나라에 골프붐을 불러왔던 박세리 선수가 그 성과를 기억하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박수로 환호하면서도 부러워했다. 그러한 현상은 소위 신지애, 박인비 등 ‘세리키즈’가 대거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또한 한강 작가가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을 때는 작가 본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자랑스러워했고, 외국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면, 그 근저에 놓인 ‘명예’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막강한 후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성 토마스는 ‘명예’야말로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욕구할 만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명예는 각 분야의 가장 탁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자기 명예가 훼손을 당할 위험에 빠지면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의 손실을 감수해서라도 이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I-II,2,2) 그럼에도 그는 행복이 명예에 있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명예는 명예를 받는 자 안에 있지 않고, 명예를 받는 자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외부의 다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명예는 가장 탁월한 자들에게, 벌써 존재하고 있는 탁월성(excellentia)의 표시와 증명으로서 밖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명예 자체가 그들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명예는 행복에 따라올 수는 있지만, 행복이 명예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토마스는 명예와 비슷하지만, 직접적으로 덕행과 연관성이 없는 명성(fama)이나 영광(gloria)에는 더 낮은 가치만을 부여하고 있다. 명성은 주로 사람들의 평판에 달려 있다.(I-II,2,3) 그러나 사람들의 평판은 종종 크게 잘못될 수 있다. 사람들은 유명 가수나 배우들에게 열광했다가 그들의 실수나 잘못을 알게 되면 실망해서 그들을 과도하게 비난하곤 한다. 명성에 손상을 입은 연예인은 기존에 하던 광고 계약 등까지 해지되면 엄청난 재정적 손실도 겪는다. 이에 따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한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진정한 행복이 명성에 있을 수 있음을 배제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명성은 지나치게 우연적인 것이고, 둘째로 인간의 행복은 인간들의 칭송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명예훼손과 명예에 대한 집착(야욕)의 문제점 그럼에도 토마스는 명예나 명성을 영적인 선(善)으로 인정하며, 물질적 선들보다 더 소중히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명예나 명성을 보존하도록 각자가 지닌 권리를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미치게 될 피해를 고려해서 이웃의 명예나 명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명예훼손은 이웃에게서 어떤 것을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절도와 유사하지만, 현세의 사물 중에서는 가장 귀한 것 중에 하나인 명예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더욱 중한 죄다. 그러므로 중상이나 비방으로 이웃의 명예나 명성을 해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죄이다.(II-II,73,3)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가짜 뉴스의 양산이나 ‘딥페이크’와 같은 기술을 이용한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자행되는 현대 사회에서 토마스의 경고는 더욱 시사성이 크다고 하겠다. 토마스는 명예나 명성(또는 영광)을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행위들에 더 강한 추진력을 갖기 위해서 추구하는 경우, 그 자체로는 완전히 합법적이라고 평가한다. “자신의 행위들로 인하여 칭송을 받음을 아는 사람은 더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간다.”(「악론」, IX,1) 더욱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교화를 위해서 명예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이웃을 위한 참사랑에 속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명예를 무질서하게 욕구하는 것은 야욕(ambitio)으로 규정하고 죄가 된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이를 욕구하는 자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거나, 혹은 자신이 받는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배타적으로 자기 스스로 얻은 것으로만 자부하기 때문이다.(II-II,131,1) 성경 안에서도 분명한 예가 나온다. 헤로데가 티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연설하자 군중은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쳐서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고 말았다.(사도 12,20-23) 토마스에 따르면, 명예나 영광을 바라는 것이 이성에 합치되는 질서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악을 저지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얻고자 할 때 중대한 죄를 저지르기 쉽다. <미생>과 같은 드라마에서도 나타나듯이, 많은 직장인은 무능한 상사가 자신의 노력을 가로채서 자신의 명예를 얻으려는 경우 매우 분노하기 마련이다. 과거 황우석 사태처럼 이미 자신이 이룬 성과 이상의 명성을 얻고 나서도 그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여 성과를 부풀림으로써 얻었던 명성과 부마저도 모두 잃어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경우 행복하기는커녕 자신이 쌓아 놓았던 공든 탑마저 모두 무너져 더욱 큰 불행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부’도 ‘명예’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후보에서 탈락한 가운데,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나타나듯이 선거 때만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려고 하며, 한 번 얻고 나면 이를 놓지 않기 위해 ‘계엄’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불사하는 ‘권력’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진정으로 행복을 가져다주게 될까? 다음 회에서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마음의 구원 - 참된 자유

지금까지 우리는 교리서 1부 ‘한처음’(1~23과)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1부는 존재, 즉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고, 오늘부터 펼치게 될 2부는 ‘마음의 구원’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이 내적 인간, 즉 마음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바라보게 한다. 마음의 구원편은 무려 1년 1개월(1980년 4월 16일~1981년 5월 6일) 동안 교황의 수요 교리로 계속됐고(특별한 전례 시기는 제외), 그 분량도 40과(24~63과)에 이르는 대단원이다. 2부의 중심 말씀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이다. 교황은 이 말씀에서 ‘몸 신학’의 핵심적 의미를 찾았고, 마음이 그 모든 것의 출발이요 중심이라 보았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움직인 것이기에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를 판단하기 전에 내적으로 어떤 상태였는지 먼저 살피라는 뜻이다. 즉 왜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는지, 무엇에 묶여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 참된 자유, 곧 한처음 상태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회복하여 한처음 상태에 놓이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고, 그는 하느님을 뵙는 참된 행복에 머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말론적 의미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는 부활의 삶이다. 1부에서 다루었던 바리사이들과의 이혼에 관한 논쟁(마태 19장, 마르 10장)처럼, 마태오 5장 27절과 28절의 말씀도 창세기 첫 장까지 거슬러 올라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도 다른 말씀과 마찬가지로 규범적 성격을 뚜렷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24과 2항)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갖는 정황도 그 의미가 얼마나 폭 넓은지 알 수 있을 때, 제6계명인 ‘간음하지 마라’는 복음적 의미에서의 ‘이해’와 ‘완성’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인간 행위의 윤리 기준을 외적으로만 보고 판단하던 것을 이제 내적으로, 즉 마음에서 다루는 에토스의 중요한 전환점을 새롭게 제시했다. 또 규범적 성격을 띤 이 복음 구절에 대해 인간적 해석은 하지 말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2부에서 다루는 중심 성경 말씀의 본질에 이르려면, 간음의 범위를 다시 보아야 한다. 구약시대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혼인 관계로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떠나 세상 것을 쫓을 때 간음이라 표현했다. 신약시대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이는 율법이 아니라 영에 따라 가능한 것으로, 그 영의 자리가 바로 마음으로 제시되었다. 세례자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면서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 말했다. 외적인 율법의 영향은 작아지고 복음은 내면에서부터 커져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문제의 본질, 즉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원하고 있다. 이는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간학적인 이유에서도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긴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9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몸의 삼중성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가 자연적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자아 초월적인 면을 지닌 양면성의 존재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인 가치에서 끊임없이 초월적 가치를 선택하고 그 완성을 바라는 이들이다. 이 양면성은 자신의 전 생애를 자녀적 몸, 혼인적 몸, 부모적 몸으로 변화시킨다. 이를 몸의 삼중성이라 하는데, 단순히 육체적이고 외적인 신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에서도 같은 질서이다. 삼중성의 특징을 어릴 때 갖고 놀던 팽이에 비유한다면, 팽이의 아래 뾰족한 부분은 자녀적 몸, 좌측 상단은 혼인적 몸, 우측 상단은 부모적 몸이다. 팽이가 잘 돌고 있을 때는 땅에 닿아 있는 심지 부분이 양쪽 두 축과 균형을 이룰 때다. 삼중성은 한 신분이 정리된 후 다음 신분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분의 상태는 모두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데, 부모에 의해 자녀가 되고, 너를 만나 남편/아내가 되며, 자녀를 만나 부모가 된다. 자녀적 몸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로 한 존재의 근본이요 알파이다. 자녀적 몸은 부모와 분리될 수 없고, 성장 또한 부모와 함께하는 가운데 부모됨, 가족됨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내재해 있는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로 부르는 은총, 곧 자녀의 신분을 얻는다. 혼인적 몸이란 아낌없이 그에게 주고 또 전부를 받는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나의 관계를 혼인적으로 표현했다. 혼인적 몸에서 부모적 몸으로 넘어가지만,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점은 부모이기 전에 서로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유산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다. 부부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은 자녀의 성장에 측량할 수 없는 큰 자양분이요 힘이며, 생명을 지을 토대이기 때문이다. 부모적 몸은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장 참조) 사라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본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3절) 준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를 보며 계획했던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좌절도 맛보았을 것이다. 산을 오르며,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칠 양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7절), 아브라함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는 응답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은 자녀가 아버지를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돼야 함을 뜻한다. 오래 묵상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됨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 여정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부모는 자녀의 근원으로서 또 다른 알파이지만 자녀의 오메가가 아님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와 자녀는 존재가 함께 확장됨을.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 파스칼의 말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깨어 있어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루카 21,34-36 참조)고 자주 권고하신다. 사도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사막 교부들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수도승이 어디서나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이투의 어떤 형제는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경우 매 걸음마다 멈추어 서서, “자, 형제여,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늘 깨어 있었다고 한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77쪽) 깨어 있음의 의미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깨어 있음의 일차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 있음의 참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깨어 있음은 맑은 정신 상태와도 같다. 바오로 사도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라고 권고한다. 포이멘 압바도 “우리에게는 깨어 있는 정신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포이멘 135)라며 정신의 깨어 있음을 강조한다. 깨어 있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내적 자세다. 초기 수도승들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함으로써, 항구히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이 내적 깨어 있음(nepsis)은 매사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 무엇을 할 때 그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늘 깨어 있는 자세다. 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는 악령을 경계하는 신중하고 주의 깊은 자세다. 그래서 유혹이 다가오자마자 거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방어 자세를 정신과 마음에 대한 ‘경계’ 혹은 ‘주의’라고 부른다. 깨어 있음과 기다림 깨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늘 준비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즉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복음의 열 처녀(마태 25,1-13) 이야기를 기억한다. 모두 깨어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음에 빠졌고, 신랑이 왔을 때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다섯 처녀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수도승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 사람, 즉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장차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 깨어 있음과 기도 깨어 있음은 기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권고하셨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제 눈이 새벽에 앞서 깨어 있음은 당신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입니다.”(시편 119,148 불가타역) 또 “한밤중에도 당신을 찬송하러 일어납니다.”(시편 119,62) 이처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에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려 했던 금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미티’라고 불렸다. 사막 교부들도 주님과 사도의 권고에 따라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특히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했다. 이것이 수도승 전통을 통해 이어져 온 밤중기도(viglilia)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잠과의 사투가 벌어진다. 일어나더라도 쏟아지는 졸음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승들은 세상이 잠든 때 깨어 기도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마음의 경계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잠뿐만 아니라 불순하고 불안정한 마음이다. 그래서 깨어 있음은 마음을 늘 순수하게 지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테오도라 암마는 “우리가 깨어 있으면, 이 모든 유혹은 사라집니다”(테오도라 3)라고 말한다. 누군가 아가톤 압바에게 “육체의 금욕과 내적으로 깨어 있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나무와 같아요. 육체의 금욕은 잎이고, 내적 깨어 있음은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은 열매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영을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가톤 8) 안토니우스 압바는 내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독방에 머물라고 권고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오래 있으면 죽는 것처럼, 수도승이 암자 밖에서 지체하거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머무르면 하느님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바다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르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암자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릅니다. 외부에 지체하면서 내부 지키기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안토니우스 10)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현존 앞에 온전히 깨어있는 영혼의 상태이며,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깨어 사는 삶 사막 교부들은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깨어 있어라!”고 권고하고 있는 듯하다. 깨어 산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하며 매사에 의식을 갖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부들이 말한 ‘내적 깨어 있음’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악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온갖 헛된 인간적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적 깊이 없이 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내적 자세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늘 내적으로 깨어 있으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미혹 속에서 헤맬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사랑’과 ‘사랑하다’의 관계

교리서 제16과 “일관된 증여가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1항), “행복은 사랑 안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2항), “사람은 신적 증여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가시적 세상에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 안에 선물의 내적 차원을 가지고 (…) 그의 하느님과 닮은 고유한 모습을 가지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3항)는 사랑의 신학적 논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명사로 한처음의 ‘숨’, 세례 때의 성령,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미 내재된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원천이며 근원적인 이 사랑을 철학에서는 에로스로 표현한다. 교회 문헌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 계획이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어느 모로 분명히 인간에게 부여된 것”(「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3항)이라 에로스를 말한다. 인간 몸은 육체이고 영혼이다. 육체가 영혼을 지니고, 영혼이 육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긴 세월 이 둘을 분리했고, 사랑 또한 에로스와 아가페로 나누어 서로 만날 수 없는 지점에 있는 사랑인 듯 말했다. 그러나 에로스는 인간 육체에 그 뿌리를 둔 성적 충동 그 이상이며, 인간이 자신의 삶에 열정적으로 집중하게 하고, 욕망과 희열, 감사하는 마음,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주는 선물이요, 생기를 주는 힘이다. “사랑은 영적이면서 동시에 관능적”이다.(「신학대전」 I-9) ‘몸 신학’은 에로스의 본래 의미를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설명한 놀라운 가르침이다. 관능적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는 긴 세월 교회 안에서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 놀라운 사랑의 얼굴을 찾았다. 많은 성인성녀들은 자신의 사랑을 에로스라 고백했고, 또 어떤 성인은 자신의 에로스는 예수 그리스도라 했다. 하느님은 성을 인격과 결합시켰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형태를 말하셨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에로스를 덜 열정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인격적이게 만들어 그 정상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에로스가 지닌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 창조주께 있음을 받아들일 때, 모든 은총의 원천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에로스와 은총이 동반 관계에 있음을 알고 욕망들을 정화하여 타자에게 향하게 된다. 이때 ‘사랑’은 나의 지향과 선택에 의해 행위로 재창조되는 ‘사랑하다’가 된다. “성은 거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 육체성이 지닌 신비한 힘, 그 이상의 것입니다.”(2항) 어느 성소의 길이든, 에로스적 갈망 안에서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행위는 구원의 신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중재하던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백성이 사랑을 잠시 잊은 것이지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떼를 쓰고, 찬미가에서 그 사랑을 노래한다. 묵시록에서는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2,4)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처음 받은 그 사랑을 버리고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려 했던 것이다. 이 사랑은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를 이루는 신앙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여기에 머문다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으로 오신 그 구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누구를 향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의 답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때문”(「신학대전」, Ⅱ-Ⅱ, q.23)이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신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열매는 행복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행복은 재물에 있는가?

복지부가 발표한 ‘2023 자살실태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민이 10년 만에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중년기는 퇴직·은퇴·실직으로 인한 부채 비율, 수입 감소와 파산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좋은 직장을 찾는 이유가 대부분 높은 수입에 있고, 이것에 실패하는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라면, ‘부’(富)나 ‘재물’(財物)이야말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 이러한 생각은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토마스의 시대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행복을 위한 가장 강력한 후보를 찾는 작업을 ‘인간의 행복(beatitudo)은 재물에 있는가’(I-II,2,1)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재물은 최종 목적인 행복에 적합한 후보인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돈이란 교환가치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단일 뿐이고, 그 돈을 지불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상위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돈은 결코 최종 목적이 될 수 없으므로 행복이라 불릴 수 없다. 토마스는 이 질문에 더 명확하게 답변하기 위해 우선 ‘자연적 재물’과 ‘인위적 재물’을 구분한다. 전자는 자연의 결핍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음식물, 음료, 의복, 주택 등) 그렇지만 이것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즉 인간의 생명과 자연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재물은 인간의 최종 목적일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화폐와 같은 인위적 재물은 자연본성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상품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 낸 일종의 척도와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다만 생활에 필요한 자연적 재물들을 사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최종 목적인 행복은 재물 안에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자연적 재물의 경우, 배부르면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본능적으로 더 이상 욕구되지 않지만, 인위적 재물은 충분한 양을 지니고도 이에 만족하는 사람을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들은 왜 그렇게 재물에 집착하는 것일까? 성 토마스에 따르면, “어리석은 무리들은 물체적 선만을 알기에 돈에 복종”하여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다. 이런 집착의 배경에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런 생각을 “팔릴 수 없는 정신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ibid.,ad2) 우리는 이미 토마스의 인격 개념을 다루면서 타인의 인격이 지닌 존엄성이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더욱이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은 후속작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통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이었던 성·입학자격·환경·교육 등에까지 침투한 시장주의를 비판한다. 토마스도 명시적으로 “인간적 선에 대한 판단은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취해져야 한다”(ibid.,ad1)고 주장한다. 따라서 거짓 수요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장에 무비판적으로 우리를 내맡길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며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의 힘이 필요하다. 재물 소유의 정당성 인정하면서도 불의한 집착 없는 올바른 사용 강조 잉여물은 보다 가난한 사람 위한 것 재물 소유의 정당성과 부당한 집착의 구별 그렇지만 토마스는 재물의 소유를 무조건 폄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근거를 들어 사유 재산권을 정당화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각자는 모든 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사용하는 것을 얻고자 가장 열심히 노력한다. 둘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것을 돌보도록 지정한다면 더 질서가 있게 된다. 셋째로, 각자에게 자신의 소유가 있다면 국가는 더욱 평화롭게 된다. 공동으로 소유할 때에는 다툼이 생기기 때문이다.(II-II,66,2) 토마스에 따르면,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재물의 소유도 정당하다. 그러나 모든 자연적 경향들은 인간 본성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는 이성에 따라 규제되어야 한다. “이 기준을 벗어나는 것, 곧 정해진 한계 이상의 재물을 획득하거나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죄이다.”(II-II,118,1) 토마스는 ‘재물 소유에 대한 무질서한 사랑’을 인색(avaritia)이라 부르며, 이런 죄로부터 다른 악습들이 생겨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탐욕과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대해 동정할 줄 모르는 ‘완고함’이 생겨난다. 여기서 인간을 끝없는 근심과 쓸데없는 걱정으로 몰아넣는 ‘불안’이 나온다. 재물을 얻기 위해 폭력과 사기, 배신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나타난다. 토마스는 다른 인격체들을 착취하고, 도구화하고, 상품화할 재산으로 삼는 내적 상태를 단호하게 단죄한다. 재물의 소유와 사용에 대한 구분 토마스는 이렇게 재물에 대한 불의한 집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한다. 자연적이나 인위적 재물이 사적인 것이라 해도, 재물의 사용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각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자신과 자기 가족에 필요한 재화를 자유롭게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것, 즉 잉여물은 정의에 대한 의무에 따라 보다 궁핍한 사람들이나 사회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II-II,118,4,ad2) 토마스는 심지어 ‘극단적으로 필요한 경우, 궁핍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재화를 자기 것으로 취하는 것은 정당하다’고도 주장했다. 소유물에 대한 권리보다 생명을 위한 권리가 더 우세하기 때문이다.(II-II,66,7,ad2) 이 주장 안에서는 E. 프롬이 자신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내면적 지배, 착취의 태도나 경향을 의미하는 ‘소유’와 존중, 헌신, 사랑의 태도를 가리키는 ‘존재’를 구분했던 정신과의 유사점이 발견된다. 재물을 소유하는 데 실패한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는 문화는 결코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가 아니다. 토마스는 최종 목적인 행복은 아니더라도 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재물을 올바르게 소유하고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만일 재물 안에 행복이 있지 않다면, 또 다른 강력한 후보인 ‘명예, 권력, 쾌락 등’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다음 회에서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23 제3434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몸에 관한 앎, 세가지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 2장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살폈으니, 오늘은 1장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인간에 관한 앎을 더해보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ᅠ사람을ᅠ만들자.’”(창세 1,26) 하느님은 당신 계시에서 혼자가 아닌 관계를 드러내는 '우리'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해 사람이 당신들의 ‘모상’(imago)이며 또한 ‘유사함’(similitudo)이라고 명료하게 말했다. ‘모상’은 그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인간 존엄성의 존재론적 뿌리가 당신에게 있음을, ‘유사함’은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과 다르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그래서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마태 5,48; 루카 6,36) 인간에 역동적 공간이 있음을 말한다.(로마 3,26: 8,30 참조) 완전함을 향해 인간이 나아가야 할 이 역동적 실현은 하느님 ‘모상’인 몸에 관한 이해와 속성 그리고 몸의 언어에 담겨있다. 이를 질문으로 표현하면, ‘나는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몸은 어떤 속성을 지녔는가? 몸은 어떤 언어를 표현하는가?’이다. 첫째, 몸은 선물이다. 나는 선택과 자유 없이 남자/여자로 태어났고, 또 그 성(남성성/여성성) 그대로 거두어진다. 한 번은 세상 안으로, 또 한 번은 세상 밖으로의 불림이다. 그 부름을 살아가는 역사적 인간은 존재 자체가 선물이며 형이상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고,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갖는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내 눈이나 세상의 눈보다,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의 눈에 더 아름답고 더 가치가 있으며,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생의 목적이 있음을 안다. 둘째, 몸은 혼인적 속성을 지녔다. 혼인적 속성을 살 것이지 아닌지는 자신의 선택과 자유 안에 있다. 인간 몸이 육체성만 있지 않듯이 혼인적 속성 또한 결혼을 해서 나누는 성적인 육체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몸이 지닌 내적인 질서, 곧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혼인한 이들은 부부 결합 방식으로 전부를 주고 전부를 받는 관계이지만, 동정이나 봉헌자들은 지향에 의해 생식성의 사용을 배제한 차원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실현한다. 이는 하느님이 성자를 통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셨듯이 인간 또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삶의 형태이다. 만약 몸을 ‘선물’의 논리로 이해하고 행한다면, 내어줌은 자기 탈출, 자기 초월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갈망의 놀라운 실현이다. 셋째, 몸은 사랑의 언어를 드러낸다. 눈짓, 손짓, 미소, 말 등으로 드러나는 이 언어는 자신의 감정을 타자에게 전달하는 인격의 표현 수단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우리”(창세 1,26), 즉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하게 자신의 전부를 주고 받아들인다. 다른 분을 위해, 다른 분과 함께, 다른 분 안에 현존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결국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와 함께, 누구를 향해’ 살아갈 때, 처음부터 자신의 몸에 쓰여진 그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인간에 대한 정의는 혼자가 아닌 관계에서 찾게 되고, 타자는 ‘나’를 보완하는 사람이 아닌 또 다른 나로 나의 책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망을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정점에 있다. 그분의 몸(성체)은 자신을 선물로, 자신의 신부와 하나 되기를 바라는 혼인적 속성으로, 사랑의 언어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임이 곧 내어줌이 되고, 이 관계가 세상 안에서 변화되면서 몸이 성사요 거룩함의 주체임을 드러내는 여정이 된다. 몸의 길이 곧 사랑의 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내려가라!

우리 스승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 이 강생의 신비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을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이 그분을 내려오게 하였고, 당신 생명을 온전히 내어주게 하였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예수님을 본받고자 전 삶을 투신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래로 내려가려 부단히 노력했고 제자들에게도 ‘내려가라’ 권고하였다. 역설의 신비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우리가 자신을 낮출 때 높여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가장 높은 사람이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와 타인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 가르침은 분명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지 위로 올라가 남 위에 군림하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역설의 길,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 남을 섬기는 길로 초대받았다.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겸손의 길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임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겸손을 위한 분투 사막 교부들은 겸손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겸손은 그들 일상생활의 본질과도 같았다. 그들은 겸손에서 멀어져 교만에 빠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교만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의 제자란 상상할 수 없었다. 온갖 덕에 나아간 사람을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그래서 때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겸손을 위해 분투했다. 어떤 수도승들은 사제품을 주려는 주교를 피해 도망 다니곤 했다. 그들은 늘 초심자로 남아있기를 바랐고 매일 초심자로 시작하려 노력했다. 피누피우스 압바가 대표적이다. 매우 큰 수도원의 연로한 사제였던 그는 모두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열렬히 추구했던 겸손을 실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 번씩이나 몰래 수도원을 도망쳐 신분을 감추고 먼 곳에 있는 다른 수도원에 지원자로 입회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자기 형제들에게 발각되어 다시 본래의 수도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그는 오랫동안 찾다가 마침내 발견한 겸손한 삶을 악마의 질투로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에 슬퍼했다.(규정집 4,30.31) 최상의 덕 오르 압바는 겸손을 ‘수도승의 화관’이라고 했다.(오르 9) 7세기 시리아 수도승 이사악은 겸손을 ‘하느님의 옷’이라고까지 하였다. 수도승 전통에서 겸손은 모든 덕의 절정이자 꽃으로 간주되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참된 겸손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완덕과 순결의 끝에 도달 할 수 없다”(규정집 12,23)고 말한다. 다음 일화는 교부들이 겸손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떤 형제가 ‘당신이 본 환시를 말해주십시오’라고 청했을 때 파코미우스는 우회적으로 대답했다. ‘나는 죄인이라 하느님께 그것을 보여 달라고 청하지 않소. 그러나 무엇이 위대한 환시인지 들어 보시오. 당신이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 그것이 위대한 환시요.’”(「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300쪽) 겸손한 사람은 바로 겸손하신 그리스도를(마태 11,29) 닮은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하지 못한 수도승이나 신앙인은 스승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 겸손은 악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덕이다. 악령과의 싸움에서 겸손은 기도와 더불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다. 악령은 겸손한 자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번은 악령이 칼을 들고 마카리우스 압바에게 다가와 그의 발을 자르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겸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악령이 말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도 모두 가지고 있다. 너는 단지 겸손 때문에 우리와 구분된다. 너는 겸손으로 우리를 능가한다.’”(대大마카리우스 35) 카시아누스는 겸손 없이 우리는 어떤 악령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규정집 6,1) 이처럼 겸손은 악령이 범접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반면, 교만은 악령이 공격해 들어오는 빈틈과도 같다. 우리가 교만할 때 악령은 우리를 쉽게 공격한다. 악령은 아무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누가 악령의 공격을 심하게 받는다면 하느님께 앞서 나갔다는 것을 방증한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수록 악령은 우리를 더욱 맹렬히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악령의 공격을 피하는 최상의 무기는 교만일 것이다. 순종의 토대 아담은 스스로 올라가려 했기에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결국 교만으로 불순종하여 낙원에서 쫓겨났다. 교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했던 불순종의 토대라면, 겸손은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게 해주는 순종의 토대다. 그래서 사막 교부들은 겸손과 순종의 길을 가고자 그토록 노력했고 교만과 불순종에 빠지지 않으려 치열하게 싸웠다. 신클레티카 암마는 “못 없이 배를 만들 수 없듯이, 겸손 없이 구원될 수 없습니다”(신클레티카 26)라고 말했다. 또 테오도라 암마도 “금욕 수행이나 철야 혹은 어떤 노고로도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참된 겸손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테오도라 6)고 말했다. 겸손이 구원의 유일무이한 무기인 순종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인간적 성숙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사람의 깊이와 됨됨이를 가늠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오래전에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떠나는 날 한 노(老) 신부님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 이 죄인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필자가 몸 둘 바를 몰라 “신부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하자, 그분이 말했다. “우리 노인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죄를 지었기에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그분에게서 묻어나는 겸손을 강하게 느꼈었다. 이런 겸손한 모습은 평생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감추어진 삶을 통해 몸에 밴 깊은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인격과 언행을 통해서도 이런 겸손이 묻어나온다면,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의 참 제자일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

발행일 2025-03-16 제3433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몸 신학 교리]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고독-일치-순수는 인간 본성의 근본 원리로 서로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고독은 자신을 초월하여 너(altro-Altro)에게 건너갈 수 있는 장치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너를 만나 이루는 하나됨의 기쁨은 순수가 있어야만 영원히 가능하다. 이 본성의 가장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우리를 찾아 하늘에서 오셨고(물리적·역사적인 몸), 교회 안에서 영원히 내어 주신 그분 안에서 찾은 몸의 의미다.(성체적인 몸) 그래서 몸의 길은 사랑의 길이고, 인간도 사랑도 신비로 가득하다. 인간에겐 땅(자연적인)의 가치를 열심히 찾아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고, 반대로 초월적 가치를 부지런히 찾아도 닿지 않는 무엇이 있다. 자연적인 가치와 자아 초월적인 가치가 함께 있는 긴장감, 그 긴장감으로 끊임없이 성장 변화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요 매력이다. 사랑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적 사랑이 신적 사랑으로 변화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낳음 받았고, 행복하라고 몸을 주셨다. 때가 되면 하느님은 이 몸과 눈물만을 거두어 영광으로 완성시키실 것이다. ‘원순수’에 대한 가르침이 교리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원순수 상태를 회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는데, 루카 복음 15장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너무나 멀리 간 지방의 의미, 돼지들의 먹잇감이라도 먹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 먹이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탕진됐음을 알았고, 자신의 정체성 회복은 아버지의 집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원체험을 기억하고 되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원순수의 회복은 인간이 가야 할 진리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처음 상태를 회복했고,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회복하는 은총을 반복 체험한다. 이것이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사람이 되신 신비의 궁극적 목적이다.(로마 8,23 참조) 20세기 들어 새로운 인간학이 세상에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정합적 인간학(Antropologia adeguada)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인간을 정의했고, 교리서를 통해 선포했던 것이다. 새로운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페르소나(persona)라 정의한다. 우리말에선 인격, 사람, 인간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그 어느 단어도 본래의 뜻을 다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어떤 것을 통해서 연주하다’(per-suonare)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 연주하고, 남편은 아내를 통해 아내는 남편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단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페르소나의 개념이 삼위일체 및 그리스도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성됐고,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넓혀졌다. 인간 본성의 내적 특징이 강조된 ‘Persona’를 첫 글자 ‘P’가 대문자일 때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칭하는 ‘위격’으로, 소문자일 때는 대체로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뜻으로 번역했다. 하느님과의 내적이고 역동적인 구조 안에서 하느님 모상으로서 인간을 생각한 개념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만 해소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것은 ‘낳음’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 그 정점에 이르면 하느님을 만난다.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되지 않는 인간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고독-일치-순수가 인간 편에서 느끼는 내적 지각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초월성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인간을 보이는 모습 그것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이고 너이고 우리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9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것인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의 도움으로 어느 시대의 인류도 누리지 못한 문명의 풍요를 즐기고 있다. 이처럼 전 세계를 여행할 수도 있고, 원하기만 하면 새롭게 발전한 ‘챗지피티’(ChatGPT) 등을 이용하여 앉은 자리에서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현대인이 어째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일반인들조차 과거 왕이나 제후만이 누렸을 호사를 누리면서도, 현대인이 공허감과 소외, 권태, 상실, 좌절, 절망 등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이후의 기술 발전에 고무된 인간들은 인간 이성은 끊임없이 진보하며 모든 행복과 자유를 성취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낙관적인 기대감은 20세기에 들어서며 체험했던 제1·2차 세계대전과 환경오염 등의 가공할 결과를 통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러한 위기와 함께 서구를 중심으로 허무주의와 무신론적인 경향이 널리 퍼지면서 현세적인 행복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 「신학대전」 제II부에서 ‘인간의 행위’와 ‘인간적 행위’ 구분 인간적 행위만이 행복 찾는 출발점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새롭게 ‘진정한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잘 알려지지 못했지만, 철학과 신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행복’에 대한 매우 풍부한 성찰이 제시되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철학과 신학이 쌓아 온 행복 개념에 대한 통합적인 성찰이 발견되는 곳이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이제 우리는 성 토마스가 인간이 추구하고 있는 행복에 대해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행복 발견의 출발점이 되는 ‘인간적 행위’ 성 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I부에서, 본격적으로 행복에 대해서 고찰하기에 앞서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한다. 인간이 행하는 호흡작용, 소화작용, 수면, 무릎 반사 등등은 모두 ‘인간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적 행위’란 오직 인간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행위만을 의미한다.(I-II,1,1) 성 토마스에 따르면, 다른 피조물들은 마치 궁수의 의지에 따라 화살이 표적을 향해 쏘아지듯이 육체적 필요성이나 동물적 본능의 충동에 의하여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I,2,3) 그러나 인간만은 자신의 행위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어떤 목표를 향해 행위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은 ‘이성적 본성을 지닌 개별적 실체’로 정의된 인간 인격의 고유함을 더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인간]는 스스로 자기 활동들의 원리이고, 말하자면 자유 의지를 소유하고 자기 활동들을 통제한다.”(I-II, 머리말) 따라서 오직 이 ‘인간적 행위’만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구분은 동물, 심지어 곤충에 대한 생태 연구로부터 인간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려는 다양한 연구들의 타당성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주목하게 만든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동물’로서의 인간 행동을 예측하는 데는 도움이 되더라도 ‘이성적 본성’을 지닌 고유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느낄 수 있거나 지각할 수 있는 행복”만을 주제로 삼고 있는 일부 심리학적 경향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려면 필수적으로 인격이 지닌 고유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인간 추구의 최종 목적인 ‘행복’ 성 토마스는 계속해서 인간은 행위할 때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므로, 의지를 온통 채워 줄 수 있는 일생의 ‘최종 목적’이 있어야 한다(I-II,1,4)고 주장한다. 그가 자신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인간적 행위가 지니고 있는 목적 지향성에 대한 탐구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하나의 행위를 설명하는 목적에 대해 다시 그 목적을 정당화하는 상위의 목표를 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행위를 ‘좋은 학점의 취득’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설명했다면, 다시 ‘학점의 취득’은 ‘취직’이나 ‘돈을 버는 것’이라는 보다 상위의 목적을 가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목표가 어떤 좋음, 곧 선(善)을 달성하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성적 본성 지닌 개별 실체 최고선은 ‘행복’으로 모두 동일해도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 그런데 그는 이러한 질문과 대답이 무한히 간다면 우리의 욕구 자체가 공허하고 쓸데없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어디선가는 더 이상 상위의 목적을 얘기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고 말한다. 가령 ‘잘 사는 삶’이나 ‘인간다운 삶’은 더 이상 다른 것의 수단이 되지 않으면서 필요로 하는 것이 없는, 오직 그 자체로 자족적(自足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목적을 ‘최종 목적’, 곧 ‘최고선’이라 부른다. 성 토마스는 바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기본 틀로 사용한다. 그런데 성 토마스는 이어서 모든 인간 활동의 원천이 되는 최고의 궁극적인 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행위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데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최종 목적을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같이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마다 ‘행복’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가와 이를 실천할 구체적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 활동의 목적들은 인간이 행복을 찾기 위해 쏟아붓는 에너지만큼이나 여러 가지이며, 그 최종적인 최고선이 무엇인지를 찾는 가운데 인간은 많은 실수를 범한다. 그러므로 행복의 본질을 찾는 우리 성찰의 다음 단계는 인간의 욕구 내지 의지의 건전함을 결정하는 것이고, 어떤 개별적인 대상이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다음 회부터는 많은 이가 그 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는 강력한 후보들, 즉 부(재물), 명예 또는 명성, 권력, 육체의 건강, 풍부한 지식 등을 하나하나 철저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3-09 제3432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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