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 수학, 과학,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전인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건축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Chiesa di San Francesco in Rimini)의 중축 공사를 맡으면서입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9세기에 설립된 ‘트리비오의 산타 마리아 경당’(Cappella di Santa Maria in Trivio)이 있었는데, 13세기 중엽 프란치스코회가 새 성당을 성 프란치스코에게 봉헌하면서 ‘산 프란체스코 성당’이 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하나의 네이브(1랑식)에 세 개의 앱스가 있었고, 나중에 남쪽으로 두 개의 경당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14세기에 들어서 말라테스타(Malatesta) 가문의 묘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15세기 중엽 말라테스타 영주가 가문의 수호성인인 산 시지스몬도(San Sigismondo)에게 봉헌할 경당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증축 규모가 확대되었습니다. 증축 공사의 건축 책임자는 마테오 데 파스티(Matteo de’ Pasti)였는데 공사가 확장된 데에는 알베르티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성당 내부는 마테오 데 파스티와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에 의해서 계획되었고, 외부는 내부의 공사가 시작되고 몇 년이 지나 알베르티가 설계를 맡았습니다. 알베르티가 설계한 원안의 파사드를 마테오 데 파스티가 제작한 메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파사드의 1층은 복합 주두가 있는 네 개의 벽기둥에 의해서 세 개의 베이로 분할되고, 각각의 베이는 상부에 반원 아치를 갖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출입구가 있고 그 상부에 페디먼트(기둥 상부의 삼각형 부분으로 박공지붕과 비슷한 일종의 장식 요소)가 있으며, 양쪽 베이는 개구부 없이 마치 블라인드 아치처럼 되어 있습니다. 파사드의 2층은 성당 내부의 네이브와 아일의 높이 차이에 따라서 계획되었는데, 네이브 부분의 전면은 1층의 중앙 부분과 유사하지만, 아일 부분은 곡면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설계의 원안이라고 할 수 있는 마테오의 메달을 보면 파사드의 뒷부분에 대형 돔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돔의 크기는 크로싱의 상부 면적에 상응하지만, 이 돔의 지름은 크로싱이 아닌 건물 전체의 폭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돔이 제대와 성가대석이 있는 성당의 동쪽 부분을 모두 덮도록 계획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알베르티가 이렇게 돔을 크게 설계한 것은, 성당의 중심이 네이브와 아일, 그리고 주출입구와 파사드가 있는 성당의 서쪽 부분(세속의 공간)에 있지 않고 제단을 중심으로 하는 동쪽 부분(거룩한 공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돔이 커지는 것은 르네상스 건축의 흐름이 바실리카 형태의 선형성보다는 중앙집중형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공사는 2층 부분에서 설계와는 다르게 진행되었는데, 먼저 아일 부분의 곡선 지붕이 직선으로 바뀌었고 네이브 부분은 1층과 같은 설계였지만 공사를 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알베르티의 대형 돔은 시작하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1460년 말라테스타 영주가 교황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공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라테스타 영주는 이 건물을 가문을 위한 경당으로 만들고자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성당의 모습보다는 이교도적인 언어로 표현된 상징과 표상들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은 더 이상 ‘산 프란체스코 성당’이 아닌 ‘말라테스타 사원’(Tempio Malatestiano)으로 불렸습니다. 말라테스타에게 성당을 개축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은 기대하기 힘들었고, 그의 이런 행동이 교황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알베르티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기둥보다 벽체를 중요시했습니다. 파사드를 보면 벽체가 내력 역할을 하고 기둥은 장식 역할을 합니다. 이는 로마식 고전주의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남측의 입면을 보면 아치로 구성된 아케이드라기보다 벽체에 가까운 기둥이 연속적으로 있는 콜로네이드로 되어 있는데, 이 또한 고대 로마 건축에서 볼 수 있는 형태입니다. 파사드에는 고대 로마의 개선문 아치와 그리스 신전 파사드의 페디먼트가 모두 나타나는데, 페디먼트가 아치 안에 포함된 이런 형태는 로마 건축의 아치와 바실리카형 파사드가 주를 이루고 그리스 신전의 파사드는 장식화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알베르티가 설계한 대표적인 파사드는 1470년에 완성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Novella)의 파사드입니다.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경우는 내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파사드를 비롯한 외부 전체의 설계를 맡았기 때문에 알베르티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내부가 오래전에 완공되었고 파사드 역시 거의 시공된 상태에서 파사드의 나머지 부분을 설계해야 했기에, 알베르티에게는 중세 고딕 양식과의 조화를 비롯하여 설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선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포인티드 아치(첨두 아치)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해결 과제였습니다. 알베르티는 기존의 건축 양식으로부터 기하학적 요소들을 찾아서 로마의 고전주의가 갖는 기하학적 요소들과 접목시켰습니다. 곧 원, 반원, 사각형, 삼각형의 기하학적 요소들을 원형 창, 아치, 벽체, 페디먼트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토스카나 지역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나타나는 것으로, 알베르티는 대리석의 다양한 색을 이용해서 중세의 기하학적 요소들을 파사드에 넣은 것입니다. 또한 알베르티는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과제로 남겨진 네이브와 아일의 높이 차이에 의한 경사 부분의 문제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그리스 신전의 소용돌이 문양과 함께 곡선으로 마무리함으로써 해결하였습니다. 알베르티는 토스카나 로마네스크를 대표하는 피렌체의 ‘산 미니아토 알 몬테 성당’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중세의 기하학적 요소를 고대 로마의 기하학적 요소로 단순화하였고, 특히 고대의 정사각형 정수 비례에 의한 구성 체계를 선호하였습니다. 이렇게 알베르티가 중세의 성당에 르네상스의 아름다운 옷을 입힐 수 있었던 것은 그 성당에 그 아름다움이 어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의 성당들은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지요?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다양한 생물종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소중히 다뤄져야”

한국 정부는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협약에 따른 국가관할권 이원지역의 해양생물다양성 보전 및 지속가능한 이용에 대한 협정‘(이하 BBNJ 협정)의 비준서를 3월 19일 뉴욕 유엔 사무국에 기탁했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 21번째이자 동아시아 최초의 비준국이 됐다. BBNJ 협정은 공해 및 심해저 지역의 해양생물다양성 보전과 지속가능한 이용을 위한 국제법적 틀을 마련하기 위해 도입된 협정이다. BBNJ 협정 비준을 계기로 한국은 공해상 해양 거버넌스 구축을 위한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 해양보호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할 수 있게 됐다. 한편 환경보호단체들은 이번 BBNJ 협정 비준을 기점으로 우리 바다를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 로드맵도 수립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해 보호 협력했으나 우리 바다 보호 정책 필요 전 세계 바다의 64%는 특정 국가의 관할권이 없는 공해로, 책임과 관리의 주체가 없어 해양생물다양성이 심각한 수준으로 파괴되고 있다. 국제사회는 기후위기, 과도한 어업, 해양 쓰레기 등의 인간 활동으로 바다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훼손될 것을 우려해 20년간 BBNJ 협정을 논의했으며, 2023년 유엔 총회에서 193개국 만장일치로 협정이 채택되었다. BBNJ 협정의 주요 내용으로는 ▲공해 및 심해저에 해양보호구역을 지정 ▲공해 및 심해저 산업활동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의무화 ▲공해에서 발견된 유전 자원에 대한 이익공유 등이 있다. 3월 13일 국회에서 BBNJ 협정 동의안을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다. 정부는 “이번 비준은 협정 발효를 앞당기고 해양보호를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동참하는 중요한 조치”라며, “한국은 협정 비준을 계기로 공해상 해양 거버넌스 구축을 위한 논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환경단체들은 BBNJ 협정 비준을 환영하면서도 우리나라 바다를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 수립을 촉구했다. 환경운동연합은 논평을 통해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국제사회는 2030년까지 바다의 30%를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할 것을 약속했으나,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지정된 해양보호구역은 1.8%에 불과하다”며 “정부는 이번 BBNJ 협정 비준을 기점으로 우리 바다를 보호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 로드맵을 수립하고, 시민사회 및 전문가들과 함께 투명하고 민주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해양생물 다양성 위한 BBNJ 협정…한국, 21번째·동아시아 최초 비준국 프랑스·영국 해역 40%↑ 보호구역 지정…해양보호구역 확대돼야 해양생태계 보호의 중요성 지구생명지수(LPI, Living Planet Index)에 따르면, 관찰된 야생동물 개체군의 평균 규모는 지난 50년간(1970년~2020년) 73% 감소했다. 이 중 담수 개체군이 85%로 가장 급격한 감소세를 보였고, 육상(69%)과 해양 개체군(56%)이 그 뒤를 이었다. 세계자연기금(WWF)이 2022년 발간한 「지구생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반세기 동안 상어, 가오리 등 상위포식자 18종 중 71%가 감소했고 2100년까지 해양생물 중 84%가 높은 멸종위험을 겪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개체군의 규모가 특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해당 생물종은 생태계 내에서 본래 수행하던 역할, 즉 종자 산포나 영양순환을 비롯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개체군이 감소하면 회복탄력성이 감소하고 생태계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식량이나 깨끗한 물, 안정적인 기후를 위한 탄소 저장 등 생태계가 인간에게 주는 다양한 혜택이 줄어들게 된다. 해양생물다양성 감소를 막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제기구는 해양생태계의 건강성을 보전하기 위해 당사국과 공동의 목표를 수립하고 국제적인 협약을 맺고 있다. 그 일환으로 ‘생물다양성협약’(CBD)을 수립해 생물다양성 보존 필요성에 대한 범지구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특히 2022년 열린 ‘제15차 생물다양성협약(CBD) 당사국총회’에서는 ‘쿤밍-몬트리올 글로벌 생물다양성 프레임워크’(GBF)를 수립해 2050년까지의 달성목표, 2030년까지의 실천목표, 구체적인 이행과 평가요소 등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최소 30%의 육상·해양보호구역 지정 ▲훼손 생태계 최소 30% 복원 ▲침입외래종 도입·정착률 최소 50% 감소 ▲생물 멸종률·리스크 10% 감소 등이 담겼다. 이에 프랑스와 영국 등은 자국 해역의 40% 이상을 해양보호구역으로 설정했고 미국은 관할 해양 면적의 19%를, 일본은 9%를 해양보호구역으로 설정했다. 한국도 지난해 관계부처와 GBF를 반영한 ‘제5차 국가생물다양성 전략(2024~2028)’을 수립했다. 그중 해수부는 1000㎢ 이상의 대형 해양보호구역을 지정해 현재 1.8%뿐인 해양보호구역을 2027년까지 3.6%, 2030년까지 30%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환경운동연합은 “우리 바다의 3.6%만을 해양보호구역으로 지정하겠다는 계획은 보호구역을 확대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빈약한 의지만을 보여줄 뿐”이라며 “우리나라에 지정된 해양보호구역 중 어업, 레저, 선박 등 인간 활동을 제한하는 곳은 한 곳도 없으며 일부 개발 행위만 제한될 뿐 대부분의 해양보호구역이 서류상의 보호구역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현실”라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생물 다양성 감소를 막기 위해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황은 “우리 때문에 수많은 생물종들이 더 이상 그들의 존재 자체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고 그들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지 못할 것”이라며 “우리가 그렇게 할 권리는 없다”(33항)고 밝힌다. 아울러 “모든 피조물은 서로 연결돼 있기에 사랑과 존경으로 소중히 다뤄야 한다”며 “멸종 위기에 놓여 있는 생물종들을 특별히 보살피면서 보호 계획과 전략을 개발해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생물종들을 철저히 관리하게 해야 한다”(42항)고 당부했다.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6면

[인터뷰] 주 네덜란드 교황대사 끝으로 퇴임한 장인남 대주교

“사랑합니다!” 1976년 청주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교현동본당 보좌를 끝으로 줄곧 청주교구를 떠나 있었던 장인남(바오로) 대주교는 지난 3월 20일 청주 내덕동주교좌성당에서 열린 퇴임감사미사에서 교구민들과 사제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1985년 엘살바도르 서기관을 시작으로 교황청 외교관으로서 교황청과 주재국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했던 장 대주교는 2월 13일 네덜란드 교황대사를 끝으로 퇴임했다. 4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장 대주교는 교황청 외교관으로 지낸 시간을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었다”고 회고했다. 오랜 외국 생활 후 돌아와 한국 ‘촌놈’이 됐다는 일흔여섯의 사제는 한국에서 새롭게 펼쳐질 사제로서의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빛이 반짝였다. ■ 순명하는 삶 청주교구 북문로본당(현 서운동본당)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장인남 대주교는 메리놀 외방 전교회의 외국인 신부들을 보며 사제 성소를 키웠다. “어린 시절 북문로성당에서 복사도 하고 친구들과 뛰어놀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메리놀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을 보면서 신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목자를 꿈꿨죠.” 장 대주교는 1976년 사제품을 받고 신자들 곁에서 사목하는 사제를 꿈꿨으나 1982년 유학길에 올랐다. 교황청 외교관학교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뒤 1985년 주엘살바도르 교황대사관 서기관을 시작으로 40년간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가 본당에서 사목을 한 기간은 1976년부터 교현동본당 보좌로 있었던 2년여 뿐이다. “당시 청주교구장이셨던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님의 배려로 유학길에 올랐지만, 처음에는 적응하는데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아 힘들었고, 교황청 외교관 활동을 시작하고서는 주재국의 외교관들과 만나는 업무를 주로 하면서 신자들과 만나는 사목에 대한 갈증도 있었죠.” 타지 생활로 마음이 약해질 때 힘이 돼준 것은 어머니의 신앙이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제게 주님의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로 갈 수 있는 길을 여는 역할을 했던 요셉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니 겸손하게 순명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가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제가 어려운 시간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교황청 외교관 활동 중에 기쁨이 됐던 순간을 묻자, 장 대주교는 첫 임지였던 엘살바도르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교황청 외교관은 신자들과 만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외교관 업무가 없는 주말에 신자들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교구에 부탁을 드렸고 외곽지대에 있는 가난한 신자촌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죠. 엘살바도르 신자들과 만나서 함께 기도했던 시간이 큰 기쁨으로 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 13개 국가에서 찾은 주님의 선물 장 대주교는 1985년 엘살바도르 교황대사관 서기관을 시작으로 에티오피아, 시리아 교황대사관 서기관, 그리스와 벨기에 교황대사관 참사관을 마친 후, 2002년 대주교 임명과 동시에 방글라데시에서 교황대사로 활동했다. 이후 우간다, 태국,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네덜란드 등 총 13개 국가에서 교황청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방글라데시는 전체 인구 중 가톨릭신자가 0.3%에 불과하지만 신자촌을 이뤄 단단하게 신앙을 지켜나가는 모습인가 하면, 일찌감치 복음이 전파된 네덜란드는 인구의 20%가 가톨릭신자이지만 미사 참례자는 3%가 되지 않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신앙은 주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7년과 2019년 미얀마와 태국에 있을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 사목방문을 준비했던 시간은 장 대주교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태국 방문은 큰 국가적 행사였습니다. 태국 왕가에서 환영식을 요청했으나 교황님은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원하셨죠. 전 세계 사목방문 일정으로 고된 와중에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신자들에게는 항상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셨어요. 낮은 곳에 있는 이들, 평범한 사람들 곁에 머물며 함께하시려는 교황님을 뵈며 제가 걸어가야 할 사목자의 길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 일흔여섯 사제의 눈빛, 다시 빛나다 10여 개 국가를 오갈 때마다 단출하게 짐을 싸는 장 대주교가 빼놓지 않고 챙기는 두 가지 물건이 있다. 어머니가 쓰셨던 오래된 묵주와 프랑스 교황대사관 참사관 시절 인연을 맺은 로렌조 안토네티 추기경이 선물한 주교반지다. “성 요한 23세 교황님이 끼셨던 반지를 가지고 계셨던 로렌조 추기경님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반지인데 너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맡기겠다’며 제게 주셨습니다. 묵주도 어머니가 항상 가족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이죠. 반지와 묵주를 지니고 다니면 두 분이 항상 옆에 계시는 것 같아 큰 힘을 얻었습니다. 제가 40년간 교황청 외교관이라는 중책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저를 위해 기도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가족과 지인, 신자분들 덕분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40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많은 것이 변해있었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꿈꿀 수 있기에 장 대주교는 앞으로 펼쳐질 사제의 삶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40년 만에 한국의 신자들과 만났으니 신자들과 함께 지내며 기도하는 것이 앞으로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북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북한에서 선교생활도 꿈꾸고 있습니다. 평안북도에서 태어나신 부모님의 오랜 바람을 이뤄드리고 싶기 때문이죠. 북한이탈주민을 돕고 있는 교회기관과 손을 잡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교황청 외교관으로, 고향을 떠나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장 대주교에게 남은 것은 ‘감사함’이다. “4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난 시간을 회고하며 늘 주님의 은총이 함께했기에 참 감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제로서 주교로서 제대로 살지 못해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교회의 일꾼으로 살게 해주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죠. 죽는 날까지 사제로 잘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드립니다.”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1면

[당신의 유리알] 당신의 자리는 없습니다

독일의 작가 케테 콜비츠는 1914년 10월 30일 일기에, 침묵을 담아줄 한 문장을 적었다고 한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지난해 겨울, 신학생과 사제들의 영성 면담을 해 오셨던 메리놀 외방 전교회 길고수 갈멜로 신부님을 뵈었다. 어떤 신부는 이분을 떠올리면 어색한 한국어가 생각난다고 했고, 누구는 아직도 길 신부님 목소리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감동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무엇이 이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일까. 미국인 길고수 신부님과의 면담은 새로웠다. 좋은 분이라는 것과 영성 지도를 길게 하지 않으시고 고해성사를 봐도 보속이 믿을 수 없게 적다는 게 학생들에게 매력이었다. 대부분의 면담은 신학교 면회실에서 이뤄졌다. 한 번에 30분 정도. 길 신부님은 주로 긴 소파 옆에서 듣기를 좋아하셨다. “그래 다니엘,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내셨어?~” 저음의 느린 말씨와 다정한 미소 때문일까. 그때도 지금도 신부님은 할아버지처럼 느껴진다. “여러 해 동안 신학생들의 영성 면담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만날 때 어떤 것에 중점을 두셨나요?” 사람을 대할 때, 특별히 어떤 준비를 하시는지가 궁금했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요. 신학생들이 물어보는 것이 대부분 비슷하다는 거예요. 물론 면담을 3년 정도 해보니 배우는 것도 있었지요. 어떤 친구는 작은 문제가 있어서 함께 기도해 줬고, 책도 보면서 어떻게 도와줄지 찾아봤지요.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어요. ‘만약 신학교가 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있다’고 권하기도 했지요. 때때로 어떤 친구는 면담하기 참 까다로웠어요. 이를테면 자기는 ‘열심히 하고 있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책으로 공부하고 그분처럼 잘살고 싶다’고 말해요. 하지만 저는 그랬어요. ‘너는 우선 교구 사제 생활을 배워야 한다’고. ‘원한다면, 새로운 길을 생각해야 하고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줘요. 영성 면담을 하는 학생들도, 사제도… 마찬가지예요. 매년 성령께서 새로운 길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똑같은 내용의 영성 면담은 재미가 없어요.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저는 말하려고 했지요.” 예수님이 용하다는 소문을 듣고 다가왔던 사람 중에는 제자들도 숨어있었다.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어떤 분이신지 둘러보고 예수님을 재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 나도 그랬다. 처음에 길 신부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했다. 하늘에도 묻지 못한 이야기를 어떻게 모르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초반 시간을 허비했다. 참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려 해도 ‘아니야, 기다려! 아직 아니야’ 이렇게 잠재우길 여러 차례… 신부님도 알고 계셨을 것이다. 돌아보면 그때 다니엘 신학생은 길을 헤매고 있었다. “당시에 다니엘 신학생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쯤이면 웃으며 말씀해 주실 것 같았다. 하지만 미소만 지으실 뿐, 고해의 비밀처럼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부족하고 실수투성이인 과거를, 하느님은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늘 그렇듯 인간만이 자신을 찌르고 용서하지 못한다. 길 신부님은 언제나 기다리는 분이셨다. 나는 묻고 싶었다. “신부님은 상담하실 때나 대화하실 때 그 사람의 고백을 기다리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영성 생활은 계속 노력해야만 합니다.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사제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오늘 미사를 했고 성무일도도 그렇고 기도도 했다. 나는 착한 사제다?’ 아니에요. 기도 생활은 하면 할수록 힘든 겁니다.” 그 말씀이 맞다. 얼마나 힘들면 성무일도의 첫 기도가 ‘하느님 날 구하소서’겠는가. 지금 마음 같아서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하느님이 세상 좋은 것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시길’ 간절히 청한다. 간절함에는 언제나 아픔이 있고. 농민들의 솔직한 삶을 판화로 표현했던 독일 작가 케테 콜비츠는 두 차례의 전쟁 통에 막내아들과 손주를 잃는다. 이 비통함으로 그녀는 몇 년간 작업을 놓는다. 독일 나치가 미워했던 작가는, 전쟁으로 겪어야 했던 시대의 비극을 ‘어머니’라는 품으로 끌어안고자 했다. 그 조각품 중 하나가 전쟁 중에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형상의 ‘피에타’였다. 사실 지난해 10월 말 신부님을 뵙기로 한 날 약속을 미뤄야 했다. “여보세요~ 다니엘 신부님?” 길 신부님의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린다. “길 신부님. 오늘 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때 고집했다. 가족들이 충분히 애도할 수 있도록 내 슬픔을 삼켜야 한다고. “아이고 저런…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길 신부님은 몇 마디 하지 않으셨는데, 참았던 눈물이 울컥했다. 그 음성은 깊은 공감 속 진동. 그때 알았다. 신부님께 영성 지도를 받은 사제들이, 말씀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고 한 이유를… 솔직하게 묻고 싶었다. “우리는 아픔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특히 교우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사제는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중해야 해요. 가끔 사제들은 진부하게 말할 때가 있어요. ‘기도해 드릴께요’라든가 ‘성모님께 기도하세요!’라든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교우들의 희망까지’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친동생이 죽었을 때, 미국 집에 갔어요. 장례식 동안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거기 본당 신부님도 오셨고요. 엄마와 아버지는 슬픔 중에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본당 신부님은 우리 어머니에게 ‘어려운 일이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일찍 부르셨다’라고 말했어요. 슬픔을 덮는 말입니다. 방금 아들을 잃은 여인에게 말이지요! 어머니가 소리쳤어요. ‘여기서 당장 나가세요! 지금 나에게 하느님 이야기를 한다고!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런 하느님의 자리는 지금 없어요!’ 물론 나중에 어머니는 본당 신부님께 잘못했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원하신 건 ‘위로’였습니다. 이럴 때 위로하는 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냥 ‘기도하겠다’ 하면 되지요.” 말은 느리게, 가르침은 공감보다 더 느리게…. 너무 쉽게 아픔을 조절하려 했던 우리는 타인의 상처 앞에서 해결만 하려 했다. 길 신부님께 신학생들은 고해성사를 원했다. 길게 안 하시고 농부처럼 담백하고 솔직하게 공감하셨고 적은 보속을 주셨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적게 주시냐?”고 어느 사제가 물었더니, 길 신부님은 “면담 후 귀가하면서 내가 준 보속들을 똑같이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생의 슬픔 앞에서 고통을 나눠 지는 공감과 동행의 답이었다. 오늘도 저편에서 말씀하시는 듯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 허허.” 글 _ 박홍철 다니엘 신부(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3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 가톨릭 언론의 태동, ‘천주교회보’ 창간

“本報는 左의 세 가지 要求에 應하야 出生하였으니 一은 南方敎區내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대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 1927년 4월1일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中에서) 1927년 4월 1일, 대구의 남방 천주공교 청년회가 한국 가톨릭 언론의 효시인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를 창간했습니다. 아래로는 22세, 위로는 41세까지 5명의 젊은 평신도들이 펴낸 천주교회보는 그 후 ‘가톨릭신문’으로 불리우며 민족과 교회와 함께하며 2027년 창간 100주년을 맞게 됩니다. 한국천주교회가 진리에 목마르고 백성들의 고통에 아파하던 청년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시작됐듯, 가톨릭신문 역시 복음 선포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청년들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너무도 오래 묵묵했다!’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는 창간호에서 신앙의 열정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낫다! 낫다! 적고 적은 이 내 몸이 고요한 첫 새벽에 그윽히 울리는 종소리처럼 우렁차게 소리치고 나왔다/너무도 오래 묵묵했다. 눈이 있어도 못 보았다. 귀가 있어도 못 들었고 입이 있어도 말 못 했고 손이 있어도 못 적었다/알고 싶다. 교회 사정 전하고 싶다. 이리저리 진리로써 인간불순 복멸하여 승전고를 울려보자/우리의 이마에는 십자가를 새겼으며, 발사마 향으로 목욕하고 신덕으로 무기 삼아 예수 말씀 앞세우니 위세 당당 이내로세/눈 있는 자 어서 보라. 입 있거던 말할지며 용맹커던 도전하라. 모든 사배 만고의 진리에 항복하리라.” 젊은 평신도들은 결연하게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고 복음을 선포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듣지 못하며, 입으로는 말 못 하고, 손으로는 글을 쓰지 못했던 답답한 마음과 무력한 상황을 타파하리라는 결기를 창간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정을 널리 전하고 복음의 진리를 바탕으로 정의를 실현하며 십자가와 말씀을 높이 세워 굳건한 믿음과 용맹한 태도로 진리를 전하리라는 젊은이들의 풍모는 위풍당당했습니다. 창간사에 나타난 ‘천주교회보’의 창간 이념은 소식 보도, 의견 교환, 보조 일치 등 3가지였는데 그 중 ‘의견교환’은 1949년 ‘조국성화’로 바뀌었습니다. 창간의 역사적 배경 ‘천주교회보’가 창간되던 때는 일제의 억압적 통치가 형식적으로나마 완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일제 무단 통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한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정책으로 식민 통치의 방향을 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해 9월부터 일제는 민간 신문을 인가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됐습니다. 종교신문의 경우, 정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그 이전에도 발행이 가능해 1911년 감리교에서 월 2회 회보가 발행됐었고 천주교에서도 경향잡지가 발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 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일본 천주교회 정기간행물의 독자들이 있었습니다. 1923년에 창간된, 일본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가톨릭 타임스가 대표적인데, 한국의 ‘천주교회보’ 창간 역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주교회보’ 창간 당시인 1927년 4월 우리나라 총인구는 약 1900만 명이고 가톨릭신자는 약 11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민족 전체의 문맹률이 80%에 달했고, 미미한 교세와 신자 수 등을 고려할 때 회보 발간의 결단은 만용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천주교회보’ 창간 후 3개월이 지난 7월에는 서울 청년회연합회도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별’을 창간했습니다.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 가톨릭신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간 이후 지금까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일제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생활, 실상에 대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 액션 활동, 복음 선포 활동들,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과 한국 최초의 공의회, 일제의 교회 탄압 등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가톨릭신문 지면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료입니다. 더욱이 6·25전쟁 후 지식인들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들, 수도회들의 진출과 창설, 각 교구와 본당들의 설립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 교계 제도의 설정 등 다른 어디에서도 온전히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한국 사회와 교회에 소개한 가톨릭신문의 역할은 이후 한국교회가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쇄신과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는데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아울러 60년대 이후 한국의 역사 현실, 정치 및 사회 현실 안에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해 온 교회가 사회 불의를 고발하고,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민족과 역사 안에서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긴 휴간의 안타까움과 복간 대구의 청년회에서 발행하던 천주교회보는 간행이 거듭됨에 따라 더욱 충실하게 발행됨으로써 교회 전체의 소식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에 따라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1928년 4월 1일 창간 1주년 기념호에서 “모든 교우들이 이 회보를 항심으로 보고 또 힘대로 도와주기를 권면한다”고 격려했습니다. 나아가 1931년 7월 7일, ‘천주교회보’를 교구 기관지로 공식 인정한데 이어, 8월 1일자에는 ‘천주교회보사’를 설치해 회보 발행을 교회 당국과 청년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발행에 따른 경영상의 어려움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 후원회를 조직하고 교회 전체가 회보 발행을 재정적으로도 적극 지원해 주기를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소식을 전하던 ‘천주교회보’는 1933년 4월 1일자를 끝으로 1949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기나긴 휴간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는 전국 주교회의가 신앙 교양 잡지를 통합 발행한다는 취지로 대구와 서울의 청년회가 각각 발행하던 ‘천주교회보’와 ‘별’의 발행을 중지하도록 결의한데 따른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회보’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고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 4월 1일 복간까지 한국교회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2면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에 착수하고 피렌체 고아원과 산 로렌초 성당의 설계와 시공을 맡은 지 십 년이 훌쩍 지난 1432년, 그가 여전히 인생에서 가장 바쁘면서도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제노바(Genova,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태생의 한 젊은이가 금의환향(錦衣還鄕)하듯이 피렌체 땅을 밟았습니다. 격식 차린 옷매무새에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한 그는, 부친이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다가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어 제노바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 태어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입니다. 다행히도 1428년 가문에 대한 추방령이 철회되고 알베르티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고향 땅에 드디어 발을 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낯선 피렌체에 온 것은 단지 이곳이 아버지의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피렌체에 도착한 그는, 오래 지체하지 않고, 대성당 공사 현장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일꾼들에게 기중기 사용법을 가르치고 있는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를 찾아갔습니다.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와 한 세대 차이가 났지만, 인문학적 지성을 갖춘 중견 건축가와 건축에 관심이 많은 젊은 인문학자는 그것만으로도 친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알베르티는 인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한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대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제노바에서 베네치아로 이주한 알베르티는 10대 중반에 파도바 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0대 후반에 볼로냐 대학에서 교회법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알베르티는 혼외 자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삼촌들의 지원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천재 조카가 인문학은 물론이고 수학과 물리학, 예술과 문학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고 나 몰라라 하는 삼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문학 섭렵한 당대 최고 지성 브루넬레스키와 교류하며 영향 받아 원근법·비례 숙고한 「회화론」 펴내 고대 로마 유물 복원했던 경험 토대 10권의 건축 이론서 「건축물론」 집필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머물면서 1435년 그의 첫 번째 예술 관련 저술인 「회화론」(Della Pittura)을 썼습니다. 이 책은 회화의 기초 이론에 관한 것으로, 알베르티는 그 서문에서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기베르티, 마사초 등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회화에 있어서 입체적으로 다른 거리에 있는 여러 사물을 한 평면에 표현하는 것과 그 사물들을 같은 비율로 축소하는 것, 곧 원근법과 비례에 대해서 깊게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원근법(투시도법)을 창시한 브루넬레스키에게 이 책을 헌정하였습니다. 알베르티는 이렇게 회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지만,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실제로 회화 작품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작품 활동보다는 회화와 관련된 학문적 연구에 더 몰두한 듯합니다. 하지만 회화와는 다르게 건축과 관련해서 알베르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조언과 지도를 받으면서 몇몇 공사를 수주하였고, 이후 루첼라이 가문과 인연을 맺으면서 건축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교회법을 공부한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가기 전인 1430년대 초에 로마 교황청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20년이 지난 1450년대 초에 그는 다시 로마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알베르티는 피렌체에서 ‘팔라초 루첼라이’의 파사드 작업을 마칠 즈음이었는데, 최초의 인문주의자 교황으로 불리는 니콜라오 5세 교황이 1450년 희년을 보내면서 로마의 도로와 수로를 새롭게 정비할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볼로냐와 피렌체에서 공부하고 1444년 피렌체 공의회에도 참석한 바 있는 인문주의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알베르티는 교황청 건축 자문직을 맡았고, 교황의 배려로 하위 성직자로 임명되어 고대 로마 유적의 복원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중요한 공사가 천년이 넘은 ‘아쿠아 비르고(Aqua Virgo) 수도교’의 보수인데, 멀리 수원지(水源池)에서 로마 시내까지 깨끗한 물을 끌어다 중앙 급수대까지 공급하는 수로 복원 공사입니다. 그 중앙 급수대에 세 개의 길, 곧 ‘트레 비에’(tre vie)에서 물이 흘러들어와 만난다고 하여 그 이름을 ‘트레비’(Trevi)라고 지었고, 훗날 그곳에 지금의 ‘트레비 분수’가 만들어졌습니다. 알베르티는 로마에 머물면서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고, 로마의 고전 건축에 대해 깊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피렌체에서 건축가로서 활동한 알베르티는 총 10권의 건축 이론서 「건축물론」(De re aedificatoria)을 집필하여, 1452년 로마에 갔을 때 니콜라오 5세 교황에게 증정했다고 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최초의 건축서인 이 대작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수정을 거듭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알베르티의 「건축물론」에 영향을 준 책은 1세기 고대 로마의 가장 훌륭한 건축가이자 공학자인 비트루비우스의 「건축론」(De Architectura)이었습니다. 하지만 책은 사라지고 내용만 전해져 왔는데, 그 필사본이 1415년경 인문학자 포조 브라촐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알베르티는 1400년 전 고대 로마의 건축학을 최초로 연구하여 「건축물론」을 쓴 것입니다. 세상은 알베르티에게 ‘만능인’(萬能人) 혹은 ‘전인상’(全人像)이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이런 표현은 반세기 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어울리지만, 알베르티 역시 이런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엄청난 지식욕을 가졌고, 그것 때문에 그들의 삶에는 사실상 만족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알베르티는 가정환경 덕에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조르조 바사리는 알베르티의 생애를 쓰면서 독서를 많이 하는 예술가는 독서로부터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갖기 때문에 그림이나 건축에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신의 영감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다면 그 예술가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치게 됩니다. 알베르티는 그의 인문학적, 과학적, 예술적 역량을 모두 동원하여 리미니의 산 프란체스코 성당(말라테스타 사원), 피렌체의 루첼라이 팔라초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파사드, 그리고 만토바의 성 세바스티아노와 성 안드레아 성당 등을 설계하고 지었습니다. 알베르티 덕분에 피렌체의 르네상스 성당들이 바깥세상을 향하게(ad extra) 되었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0면

[순례, 걷고 기도하고]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성당

유명 가톨릭 미술가 작품 가득한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 화강암 성당과 중정·회랑·잔디마당 어우러진 기도의 장소 6·25전쟁 순교자 묘역은 2017년 성지로 선포 북한강과 나란한 경춘가도를 따라 춘천 시내로 들어서자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회벽돌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성당이다. 성당은 예전 그대로 약사리고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지만 주변은 변화가 있었다. 2013년 성역화 사업으로 성당 앞은 중정과 회랑이 조성됐다. 교구의 얼굴인 주교좌성당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러낼 뿐 아니라 신자들이 언제든 찾아와 묵상하고 기도하는 순례의 장소로 거듭난 것이다. 춘천 지역 복음화에 헌신한 엄주언(마르티노, 1872~1955) 회장의 세례명을 딴 말딩회관을 지나 두 팔 벌려 춘천 시내를 아우르는 예수성심상 곁으로 계단을 오르면 아치 너머로 널따란 중정, 잔디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정원 좌우에는 십자가의 길 14처를 봉헌할 수 있는 회랑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끝에 한국교회 석조성당의 대표작이라 할 죽림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건축 역사는 6·25전쟁의 아픔과 궤를 같이한다. 죽림동본당은 1949년 엄주언 회장을 비롯한 신자들과 당시 본당 신부였던 토마스 퀸란 주교(Thomas F. Quinlan, 한국명 구인란)가 마련한 현재 자리에서 성당 건축의 첫 삽을 떴다. 그런데 외벽을 쌓고 동판 지붕까지 얹는 공사까지 마무리한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성당을 지키던 성직자들은 미사 도중 인민군에게 끌려가고 공습으로 성당 한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공사는 중단됐고 전쟁 중 이 터에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수녀들이 주민들을 돌보며 식량을 나눠줬다. 결국 성당 공사는 미군과 교황청의 지원으로 1953년에야 마무리됐고 1956년 6월 성당 봉헌식이 거행됐다. 대대적인 보수공사(1998년)를 거친 성당은 2003년 6월 25일 근대 건축 유산 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됐다. 화강암을 차곡차곡 쌓은 성당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고풍스럽지만, 성당 곳곳에 자리한 성미술 작품의 아름다움 그리고 그 작품이 담은 의미를 새기다 보면 이곳이 ‘가톨릭 미술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다. 회랑의 끝 성당 오른편에 최종태(요셉) 작가가 제작한 예수성심상이, 왼쪽에는 이춘만(크리스티나) 작가가 고(故) 김세중(프란치스코) 작가의 원작을 살려 다시 세운 성모자상이 성당을 보듬어 안 듯 자리하고 있다. 성당을 나드는 청동문도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문에 걸린 아일랜드풍의 옛 십자 문양 한 쌍은 강원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전쟁 후 주교좌성당을 건축하는데 힘을 보탠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업적을 기린다. 문양 아래는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안고 생명의 땅 이집트로 가는 장면과 예수의 산상설교 장면이 부조로 표현돼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하고 따스함이 묻어나오는 공간. 제대와 감실, 독서대 등 성당 내부의 성물과 좌우의 유리화 등도 모두 내로라하는 가톨릭 미술가들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오전 11시 미사를 앞두고 성당을 찾아 주님과 하나 됨의 시간을 갖는 신자들이 앉아 있다. 성당 뒤편 너른 공간은 지난 2017년 성지로 선포된 춘천교구 성직자·순교자 묘역이다. 이곳에는 6·25전쟁 때 순교해 현재 시복이 추진되고 있는 이광재(티모테오) 신부 등 춘천교구 순교 성직자들이 잠들어 있다. 가장 오른쪽 하느님의 종 프랜시스 캐너밴(Francis Canavan, 1915~1950, 손 프란치스코) 신부의 생애를 읽어 내려 간다. # 1950년, 한국말을 배우며 사목을 준비하던 손 신부는 당시 지목구장인 토마스 퀸란 신부와 함께 성당을 지키다 공산군에게 체포됐다. 다른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수백 명의 전쟁포로와 함께 북한 깊숙이 압송되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에 내몰린 손 신부는 1950년 12월 6일 폐렴으로 선종했고 동료 성직자들의 손에 의해 차디찬 압록강 변에 묻혔다. 손 신부 곁에는 춘천지목구의 첫 한국인 사제 김교명(베네딕토) 신부, 패트릭 라일리 신부(Patrick Reilly, 라 바드리시오), 백응만(다마소) 신부, 앤서니 콜리어 신부(Anthony Collier, 고 안토니오,), 이광재 신부, 제임스 매긴 신부(James Maginn, 진 야고보) 등 6·25전쟁 중 순교한 성직자들의 생애와 순교 상황 등이 빛바랜 흑백 사진과 함께 안내돼 있다. 현대의 순교자들. 불과 75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아픈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성직자들이 하루빨리 시복시성의 영광스런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며 묘역 앞에 섰다. 예수성심을 주보로 하는 성당 마당 곁에서 이곳에 잠들어 있는 성직자들이 닮고자 했던 예수성심을 떠올려 본다. 성당 곁 예수성심상 아래 새겨진 글귀를 기도 삼아 봉헌한다. ‘십자가에서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성심은,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 마음 자체이며 온 인류 구원의 중심이자 원천이시다.’ ◆ 춘천교구 죽림동주교좌성당(cafe.daum.net/uf99) - 강원도 춘천시 약사고개길 23 - 문의 : 033-254-2631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4면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1) 한국 천주교회 100년, 그 빛과 그림자

1927년, 일제의 억압적 식민통치 아래에서 우리 민족은 숨쉬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일제는 온갖 수단으로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 했고, 경제적인 수탈이 극심해졌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탄압은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확산의 계기가 됐습니다. 특히 그해 11월 시작돼 전국적인 학생 시위로 확대된 광주학생운동은 이후 1930년대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혹독한 억압의 시기, 그해 4월 1일 한 줌의 젊은 평신도들이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를 창간했습니다. 오는 2027년은 가톨릭신문 창간 100주년입니다. 이를 2년 앞두고 가톨릭신문, 그리고 한국교회 10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총 100회 남짓 이어질 성찰에 독자여러분의 깊은 관심 바랍니다. 교회와 민족과 함께한 100년 한국 가톨릭 언론의 효시가 된 작지만 소중한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 2027년 창간 100주년을 2년 남짓 남겼습니다. 평신도들의 자발적 신앙의 수용으로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 1784년의 일입니다. 가톨릭신문이 그중 100년을 함께했으니 한국교회 역사의 거의 반을 함께 살아온 셈입니다. 게다가 지난 100년은 유례없는 격동의 시기였기에 가톨릭신문의 역사는 교회와 민족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복음 선포의 증언과 민족적 사명 이는 교회의 복음선포에 대한 증언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자비 속에서 참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민족을 이끌어야 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민족적 사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전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신앙 수용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졌습니다. 선조들은 유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탐구한 서학으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온갖 박해를 겪어내면서 평등한 세상에서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교회는 박해의 끝에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지만 숨을 고르기도 전에 일제의 억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 다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해방의 함성이 잦아들기도 전에 민족은 외세에 의해 허리가 잘려 서로 총부리를 겨눠야 했고, 분단된 조국에서 교회는 독재에 맞서 민주화 투쟁에 나섰습니다. 빛과 그림자 험난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온 역사 안에서, 빛과 희망은 물론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어두운 그림자도 발견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생존과 존엄보다는 교회의 존립을 우선시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교회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일제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합니다. 분단된 조국에서, 멸공 이데올로기를 신봉함으로써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저해했다고도 합니다. 독재에 대한 저항을 통해 한국교회는 양심의 보루가 됐습니다. 독재와의 투쟁에 몸 사리지 않음으로써,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빛났습니다. 조선시대 왕조의 억압과 수탈 속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이 교회로 모여들었듯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복음적 실천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교회를 찾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적 평가를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의 기준으로만 내릴 수 없습니다. 모든 사건과 인물은 시대의 한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빛과 그림자가 모두 새로운 100년을 열어가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역사를 목격하고 증언했던 가톨릭신문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유례없는 격동 휘몰아친 근현대 교회·민족과 생사고락 함께하며 창간 100주년 맞는 가톨릭신문 눈부시게 성장한 교회와 함께 새로운 100년 역사 밑거름 될 것 한국교회와 가톨릭신문의 역사를 성찰하기에 앞서 한국교회의 역사, 특히 가톨릭신문이 취재하고 보도했던 지난 100년의 한국 교회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분단된 조국 가톨릭신문이 ‘천주교회보’라는 이름으로 창간됐을 때 문맹률은 80%였습니다. 여기에 교회는 작고 보잘것없었음을 생각할 때, 가톨릭신문을 창간한다는 것은 만용에 가까웠습니다. 교회는 1895년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 매년 7%의 교세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이후 해방 전까지 2.73%에 머물렀습니다. 일제의 억압 때문이었지만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교회에 대한 실망감도 작용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교회는 선교와 사회사목 활동에 적극 임했고, 청년운동과 가톨릭액션이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북한교회는 혹독한 탄압을 받았고, 곧바로 발발한 전쟁으로 전체 교회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후 한국교회에서 멸공 이데올로기는 지배적인 이념이 됐습니다. 외국 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성당 건립과 사회사업, 교육사업이 활기를 띠고 이는 신자 증가율에 크게 기여, 50년대 신자 증가율은 무려 연 16.5%에 달했습니다. 교회 쇄신과 사회정의 실현 1962년 10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려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적 쇄신을 일깨우고 세상을 향해 창을 열라는 공의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쇄신과 세상에 대한 봉사, 사회적 책임을 일깨웠습니다. 이는 인권 수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회는 예언자적 소명에 충실, 우리 사회 최후의 양심으로 자리 잡아 민주화를 주도했습니다. 한국교회의 급속한 성장은 예언자적 소명 실천과 함께 대규모 종교집회에 의해서도 이뤄졌습니다. 두 차례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한과 순교자 103위 시성식 등을 통해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지명도가 높아졌습니다. 이는 폭발적인 교세 신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질적 성숙의 요구와 제삼천년기 90년대 들어 교회는 양적 성장에 걸맞은 질적 성숙이 요구됐습니다. 성장이 둔화하고 높은 냉담률과 저조한 성사 참여율이 고착됐습니다. 성장 요인들의 효과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고, 교회의 체제유지적이고 중산층화된 모습은 복음적 공동체의 매력을 퇴색시켰습니다. 이후 뚜렷한 사목적 돌파구를 발견하지 못한 채 제삼천년기를 맞게 됩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제삼천년기 새 복음화의 기치를 올리며 쇄신과 변혁을 꾀하던 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이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보편교회 전체의 깊은 고민을 가져왔습니다. 2019년 중국에서 시작돼 수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감염병은 우리 사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그 뿌리부터 성찰하게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빈발하는 전쟁과 기후위기 등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도전들에 대해 교회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종 후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즉위했습니다. 전 세계에 충격을 준 교황 사임 후,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새로운 면모를 제시했습니다. 그러한 고민들에 대한 가장 총체적인 논의의 장으로서, 교회는 시노달리타스를 주제로 세계주교시노드를 개최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세계교회와 함께, 시노드의 결과를 바탕으로 자기 쇄신과 세상을 향한 봉사에 기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3면

청년을 현재의 주인공으로 환대하는 교회로

팬데믹 이후 청년들의 탈종교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를 향한 지금, 청년을 ‘현재’의 주인공으로 환대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동행한 예수님처럼 청년과 동반하는 교회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선교사 없이 신앙을 받아들인 유례없는 신앙의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 그 창설의 중심에는 청년들이 있었다. 첫 세례자인 이승훈(베드로)이 세례를 받았을 때, 첫 사제 김대건(안드레아)이 사제품을 받았을 때, 그들은 20대 청년이었다. 그리고 1927년 가톨릭신문을 창간한 이들 역시 청년이었고, 천주교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서있던 것도 청년이었다. 그러나 청년들의 열정으로 타오르던 교회는 이제 옛말이 된 듯하다. 청년층의 감소세는 이미 진행 중이었지만, 팬데믹을 기점으로 더욱 큰 폭으로 청년 신자가 감소하고 있다. 본당 청년미사에 참례하는 청년의 감소는 이를 더욱 피부로 느끼게 해준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청년 세대가 더 이상 영성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를 떠난 많은 청년들이 자신을 ‘종교적이지는 않지만, 영적인’(Spiritual But Not Religious, 이하 SBNR) 존재로 여기며, 제도화된 종교를 떠나 개인화된 신앙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영적 갈망을 지닌 청년들이 정작 영적 보화를 지닌 교회에서 영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떠나는 이유를 청년을 ‘미래의 희망’으로만 여기는 교회의 태도에서 찾았다. 청년들을 현재 교회를 일구는 주역으로 환대하지 않고, 미래의 주역, 다시 말해 아직은 주역이 아닌 존재들로 대하는 모습에 청년들이 교회에 대한 매력을 잃고 떠나갔다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 밖으로 떠난 청년을 찾는데 소홀했고, 영적인 것을 갈구하는 청년들에게 성소(聖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사목이 부족했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런 실태 속에 WYD를 준비하는 한국교회의 여정이 청년들을 다시 ‘희망의 현재 진행형’으로 회복시킬 기회로 주목받는다. 서울 WYD 기획사무국을 비롯해 WYD 수원교구대회 조직위원회 등 준비부서들은 청년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사목자들이 그 과정에 동반하는 시노달리타스적 청년사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방적으로 청년들에게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존의 사목방식에서 벗어나, 제15차 세계주교시노드 교부들이 제안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청년사목 모델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으며 흠 없이 완벽한 청년 사목을 주장하다 보면, 우리는 복음을 진부하고 무의미하며 매력 없는 명제로 만들어 버려, 엘리트에게만 적합한 것이 되고 만다”면서 “엘리트주의를 버리고 기꺼이 ‘대중적’이 되고자 할 때, 청년 사목은 점진적이고 존중하는 여정, 인내로우며 희망차고 지칠 줄 모르며 공감하는 여정이 된다”고 강조했다.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면

[COVER STORY - 청년, 희망의 현재 진행형] ②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성당에서 하느님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여전히 영적 갈망을 지닌 청년들. 그들은 왜 영적 보화를 간직한 교회에서 떠나고 있는 것일까? 돈보스코청소년영성사목연구소 이진옥(페트라) 박사는 서강대학교에서 ‘신학적 인간학’ 강의를 하며 다양한 청년을 만난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많은 청년들이 종교 유무나 신앙의 열심 정도와 관계없이 종교, 교회,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많은 청년들이 수업이나 개인적인 자리에서 이 박사와 종교, 신앙, 하느님에 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청년들의 많은 수가 “성당에서는 ‘하느님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본당 청년들 사이에서 “하느님”을 운운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거나 ‘유난스럽다’는 시선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본당에 청년회는 있지만, 하느님에 관해 나눌 수 있는 곳이기보다 친목모임이나 본당 행사를 위한 노력봉사단에 치우치기 일쑤였다. 심지어 어떤 청년은 이 박사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본당 신부님이랑 하고 싶은데 해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청년들은 영적 동반자인 본당 신부와 영적인 주제로 대화를 하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들의 이런 반응은 그만큼 교회가 청년들의 영적 갈망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청년들이 성소(聖召)를 발견하도록 동반하지 못했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성소는 넓은 의미에서 주님과 나누는 우정으로 부르심, 성덕으로 부르심 등을 아우르는 하느님의 부르심이다. 청년들의 영적 갈망이 시작되는 원천이기도 하다. 젊은이를 주제로 진행된 제15차 세계주교시노드의 최종문서는 “모든 젊은이에게 성소 사목이 제공돼야 한다”고 ‘성소적 사목’을 강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를 통해 젊은이들이 다양한 형태의 부르심을 깨닫도록 제안한 바 있다. 이 박사는 “내 존재의 의미, 하느님이 계획하신 내 삶의 의미와 같이 각자의 성소를 찾고자 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면서 “청년들이 지닌 종교적 관심과 질문은 굉장히 진지한데, 교회가 청년들의 영적 갈망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청년들이 교회 안에서 개별 성소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친목 혹은 봉사 위주 본당 청년회, 청년들의 영적 갈증 헤아리지 못해 청년들 스스로 영적 요구 표출하는 주체적 교회의 일원으로 존중해야 울타리 안에 머무는 청년사목 “가장 중요한 것은 청년들의 어려움에 공감해 주고, 청년들과 대화하고, 청년들이 그 어려움을 신앙으로써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으로부터 청년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청년사목에 대한 어느 청년담당 신부의 응답이다. 청년사목에 관한 좋은 방침으로 보이지만, 경희대 사회학과 송재룡 교수는 “(여러 청년사목자가) 비슷한 의견을 내놓는다”면서 “이러한 입장은 청년신자들을 붙들어두고 끌어오려는 의지의 부재로 이어진다”고 평가했다. 「청년 신자들의 탈종교현상에 대한 일 고찰」에서 서울 시내에 자리한 5개 종교기관의 청년 사목자들을 심층 인터뷰하고 비교 연구한 그는 “그들이 혁신적 방안의 필요성을 인지하더라도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마련된 실천적 방안들은 가톨릭 신앙의 가르침에 의해 만들어진 전통적 패러다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많은 청년들이 울타리 밖으로 떠났지만, 여전히 울타리 안에서만 사목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경청 과정을 통해 작성된 「한국교회 종합 의견서」에서 한국교회는 “거의 모든 교구에서 그들(젊은이)에게 온전한 동반자가 되지 못했음을 언급했다”며 “교회는 젊은이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함께한다고는 하는데 젊은이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노력들이 부족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여러 수도회와 교구가 시작한 청년 밥집 등 울타리 밖 청년을 찾아 나서는 노력은 있었다. 그러나 사목현장의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본당에서는 울타리 밖의 청년들에게 다가가는 노력이 부족해 보인다. 13년째 냉담 중인 이미란(라우렌시아·33) 씨는 “고등학생 때 교목 신부님과 철학적 주제로 소통한 것에서 종교에 매력을 느껴 세례를 받고 성당을 다녔지만, 지역 성당에 간 이후 ‘다음에도 성당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성당과 멀어졌다”면서 “성당이 종교의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기보다 새 신자가 늘어나는 것과 그저 원래 신자가 성당에 오는 것에 집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청년은 미래의 희망? 송 교수가 지적했듯 ‘전통적 패러다임’도 청년 사목이 벗어나지 못하는 또 다른 울타리다. 2023년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가 실시한 코로나19 설문조사에서 청년들은 한국교회에서 가장 변해야 하는 문화를 첫 번째로 ‘권위주의 문화’, 두 번째로 ‘사제의 독단적 의사결정 구조’를 꼽았다. 청년들을 ‘미래의 희망’이라고 말하면서도, 미성숙한 존재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 여기면서 ‘현재의 희망’으로는 바라보지 않는 태도가 청년들이 교회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는, 혹은 교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정구훈(이사악·37·인천교구 부평1동본당) 씨는 “본당 내 청년 활동 운영 문제나 삶과 신앙충돌 문제로 겪는 고민에 질문을 던질 때 ‘전통적으로 이렇게 가르쳐왔다’, ‘너희는 아직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는 식의 대답을 들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고민하는 청년들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며 “결국 질문한 청년들은 불편한 존재가 되고 대화의 문이 닫혀 신앙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를 통해 “교회의 지체들이 언제나 예수님처럼 다가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며 “젊은이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젊은이들의 진정한 물음들을 허용하지 않고 그들의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때로는 틀에 박힌 정답과 구태의연한 해결책을 제공하려는 경향이 널리 퍼져 있다”고 교회의 현실을 비판한다.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최영균(시몬) 신부는 “청년사목은 사목자와 교회 조직이 일방적으로 만든 프로그램을 청년에게 적용하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청년 사목의 전통적 패러다임을 설명하면서 “‘청년을 위한 교회’적 자원과 프로그램을 공급하기보다 ‘청년들의 교회’ 즉 청년들 스스로 생각하는 다양한 영적 체험과 아이디어를 모으고 나누며 청년들의 영적이고 신앙적인 요구가 표출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청년들을 ‘미래’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의 주인공으로서 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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