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이 품으시는 하느님 사랑, 서로를 통해 배우고 느끼죠”

다름을 불편해하는 공동체는 끼리끼리 어울리게 마련이다. 그 폐쇄성은 어쩌면 ‘열린 교회 닫힘’이라는 농담처럼 교회의 현실이기도 하다. 주교회의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에서 2023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2000여 명 응답자 중 33.1%가 교회에서 가장 변해야 하는 문화 중 하나로 ‘신자들 간 끼리끼리 문화’를 꼽았다. 서울대교구 수유동본당(주임 장광재 요아킴 신부)에는 그 닫힌 분위기를 유쾌하게 깨뜨리는 청년 공동체가 있다. 다양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답게 장애, 국적, 신앙, 나이 등 상관없이 누구나 환영하는 청년 공동체 ‘종들의 종’(단장 신명덕 에스텔·지도 신웅 바오로 신부)이다. 다름을 포용할 줄 아는 것만큼 청년다운 열린 감수성은 없지 않을까. 그 감수성을 간직한 단원들은 아무런 불편함 없이 돈독한 친교를 나누고 있었다. 국적·장애·나이 등 장벽 넘어 다양한 청년들 어우러지는 공동체 성경 공부·묵상 나눔으로 믿음 다져 “고유성 포용받는 기쁨 커” ■ 종들의 종 “열린 감수성을 지닌 청년들에게, 성당마저 갈등을 피해 끼리끼리 모이는 공간이 되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결국 하나라는 기쁨을 안겨주는 공동체가, 성당에서일수록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갈수록 다양한 사회 구성원이 어우러져 사는 다문화 시대다. 그만큼 갈등의 소지가 되는 것들도 많아지고 있다. 부주임 신웅 신부는 바로 이러한 사목적 문제의식에서 2023년 11월 종들의 종을 창단했다. 그해 9월 본당에 부임한 지 2달 만이었다. 학력, 소득, 세대, 장애·비장애, 인종, 종교 등 사회적 갈등들을 경험하는 서로 다른 청년들이 조건 없이 함께하며, 두루 품으시는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할 수 있게 이끌어주려는 진심이었다. 20대부터 40대까지 26명 단원 중에는 장애를 지닌 청년들, 한국어 소통이 어렵고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도 있다. 신앙이 없어도 종들의 종부터 들어와 교리교육을 받게 된 청년도 8명이나 된다. 단원들은 매 주일 청년미사(오후 6시) 전 다 같이 모여 성경을 함께 읽고 기도를 봉헌한다. 첫째 주는 미사 1시간 전 모여 묵주 기도를 바친다. 둘째 주와 넷째 주는 2시간 전 모여 신 신부와 함께 성경 공부를 하고 이어 나눔의 시간을 갖는다. 셋째 주에는 단원들이 각자 작은 정성을 모아, 청년미사에 참례하는 모든 신자를 위해 말씀 사탕과 함께 선물을 준비한다. 올해 3월(성 요셉 성월)에는 성가정상 키링을, 6월(예수 성심 성월)에는 예수 성심 그림 편지지를, 10월(묵주 기도 성월)에는 참례자 모두를 위해 봉헌 초 140개를 만들어 봉헌했다. 단원들이 돈독한 친교를 맺는 핵심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근본인 성경을 다 같이 읽고 그 배경을 함께 공부하며, 묵상한 내용을 서로 나누는 데 있다. 말씀을 따라 살고자 노력할수록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핵심인 ‘조건 없는 사랑’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두 차례 떠나는 피정은 서로 사랑과 용기를 심어 주는 장이 된다. 그 안에서 싹트는 마음은 “우리는 하느님의 종이면서 서로를 섬기는 종이기도 해”라는 사랑이다. 그렇기에 종들의 종은 단체에서 직함을 가진 청년들 위주로 움직이지 않는 평등함이 매력이다. 신앙 지식이 적은 예비 신자도,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도 상관없이 모든 단원이 같은 발언권으로 의논하고 공동체를 함께 움직인다. 신명덕 단장은 “누구에게나 부족함이 있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서로 채워줄 수 있다는 사실을 청년들은 이미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 구별 없이 품는 하느님 “나를 있는 그대로 품으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단원들 덕에 와닿아요.” 황은규(그라시아) 씨에게 청각 장애 3급이라는 ‘개성’은 종들의 종 활동에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다. 종들의 종 총무로 소임하는 그는 “편견 없이 나를 믿어주는 단원들 덕분에 단체 활동에도 신앙생활에도 더욱 열심해진다”고 고백했다. 황 씨가 요즘 고백하는 통찰은 “어쩌면 내가 가진 ‘특별함’은 내가 하느님 안에서 나와 다른 청년들과 친교를 맺는 문이 될 수 있겠다”는 묵상이다. 이렇듯 다름이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는 종들의 종만의 조건 없는 사랑 때문에 단원들은 매 주일 청년미사 전 모임을 손꼽아 기다린다. 단원들은 “구별 없이 품으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한목소리를 모은다. 누구나 특정 기준에서는 소수자가 되기 마련임을 알기에 단원들은 묵상 나눔 시간이면 서로 자신감을 갖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다름 때문에 소극적이었던 장애인 단원들도 종들의 종에 들어오자 모두 활발해지고 취직에도 성공했다. 신 단장은 “회식 때 ‘첫 월급을 탄 기념으로 제가 한턱냅니다’ 하던 한 친구의 꽃다발 같은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웃었다. 개신교 신자였다가 가톨릭교회로 입교를 준비 중인 조성재 씨는 “함께 성경 나눔, 묵주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주어지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는 삶에서 많지 않으니 종들의 종이 존재가 더욱 값진 것 아니겠느냐”면서 조 씨는 묵주를 들어보였다. ■ 너와 나의 고유성을 위하여 다름을 존중하기는커녕 배려조차 피곤하게 여기는 사회에서 종들의 종은 어떤 답을 던져줄 수 있을까. 이탈리아인 단원 에스텔 주앙(Esther Joao) 씨는 “‘너’와 ‘나’의 고유성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주앙 씨는 피부색이 검고 한국어 소통이 어렵지만 “벽을 넘어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그리스도 말씀대로 포용하고 또 포용받는 기쁨이 무진장하다”며 웃었다. 브라질에서 온 마리아 빅토리아(Maria Victoria) 씨가 종들의 종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다름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는 편안한 분위기다. 빅토리아 씨는 “브라질에서는 한국과 달리 다 함께 성체조배를 자주 하는데, 한국 청년들도 다 같이 해봐도 좋을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이렇듯 다름은 단원들의 친교에 장벽이 아니라 다리로 역할하고 있다. 예비신자 진연욱 씨는 통신교리를 이미 마쳤음에도 자청해서 종들의 종에서 교리교육을 다시 받고 있다. 진 씨는 “다른 성당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지만, 본당에서 단원들이 축하해 주는 가운데서 입교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진 씨는 ‘아우구스티노’를 세례명으로 할 것을 고민 중이다. “존재론적으로 깊은 고찰을 했던 성인의 면모가 너와 참 닮은 것 같아”라며 단원들이 추천해 줬기 때문이다. 그는 “모로 가든 내가 하느님을 만난 건 여러분 덕분인 건 변하지 않을 것”이라며 씽긋 웃었다. 신 신부는 “이렇듯 ‘다름 안에서의 함께’라는 가치에 목마른 청년들 갈망에 귀 기울이고 그 여정을 동반한다면, 지금도 길 잃고 헤매는 수많은 청년이 가톨릭교회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믿는다”고 전했다.

“그리스도인, 평화 가로막는 장벽 무너뜨리는 데 주저해선 안 돼”

대통령은 ‘힘에 의한 평화’를 천명했고 북한 역시 남북 관계를 민족 관계가 아닌 국가 간 관계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남북한의 대립은 가속화됐다.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과 동해선 비무장지대 일대 구간이 폭파됐고, 오물을 매단 풍선과 비방하는 전단지가 서로 간에 오갔다. 끊어진 길 위에는 미움과 폭력만이 남았다. 남북한 어디에서도 평화를 말하지 않았고 언제였는지 모를 평화를 기억하는 이도 없었다. ‘용서’와 ‘화해’의 가치를 좇는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사라진 지금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화에 대해 침묵해야 할까.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는 11월 15일 주교좌명동대성당 꼬스트홀에서 2024 한반도평화나눔포럼을 열고 교회의 평화 인식을 진단하고, 평화에 대한 희망을 되찾는 자리를 마련했다. ■ 한국교회, 평화 여정에 어떻게 동행했나? ‘한반도 갈등 해소를 위한 교회의 인식’ 세션에서는 한반도 평화 증진이라는 교회적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어떻게 관찰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지’를 교회 언론이라는 통로를 통해 살펴봤다. 연구자들은 가톨릭신문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북한을 보도한 전체 기사에 대해 총 50개의 토픽을 추출해 잠재적 디리클레 할당(LDA·문서 텍스트에 단어들이 어떻게 사용(분포)돼 있는지를 관찰해 문서 내 숨어있는 주제 찾아내는 기법) 분석을 수행했다. 북한 관련 보도에서 유의미한 차이는 2010년 이후로 두드러졌다.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냉각되면서 교회 언론에서도 북한 문제에 대한 실천 차원의 교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관찰 차원의 교회적 관심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됐다. 북한 문제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가장 크게 강조되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양심’인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교회가 북한 문제를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있어서 신앙인의 사명과 의무를 강조하는 데만 집중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양심)에 호소하는 정서적인 접근을 좀 더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또한 “평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제한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개선하고 정의, 발전, 사랑, 연대의 가치를 함께 생각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평가했다. 가톨릭 사제가 바라보는 통일과 교회에 대해서도 살펴봤다. 교회와 신자들을 잇는 가교로서 성직자의 역할이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사제 460명을 대상으로 평화와 통일, 북한에 대한 인식,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태도를 조사했다. 통일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사제의 81.5%는 “통일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는 일반 국민(43%)보다 두 배가량 높은 수치다. “북한에 대해 협력대상으로 인식한다”는 답변도 89.3%로 일반 국민(56.3%), 천주교 신자(58.9%)보다 높았다. “신자들에게 한반도 문제에 대해 얼마나 자주 언급하느냐”는 질문에는 “가끔 언급한다”가 56.5%,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다”가 29.6%로 과반수를 차지했다. 언급하는 상황은 ‘미사 중 강론’이 81.5%로 가장 많았다.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다”고 답한 사제들을 대상으로 이유를 물은 결과 “교우들이 싫어하기 때문에(공동체 분란 우려)”가 45.7%로 가장 높았다. 연구자들은 “사제들의 경우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으나 실제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한 응답에서는 사제와 일반 국민, 천주교 신자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았다”며 “이는 당위적 차원에서 통일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사제들 사이에서도 구체적인 통일의 모습에 대해서는 일반 국민들 이상의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한반도 평화 위한 교회 역할 모색 북한 문제 판단과 평가 위해서는 신앙인 사명·의무 강조보다 양심에 호소하는 정서적 접근 필요 남북 간 대면 대화 중요성도 강조 ■ 평화를 향했던 여정 독일의 평신도 평화 신학자 유스튼 호븐 박사는 ‘독일 통일의 전제조건으로서의 화해와 가톨릭교회의 역할’에 대해 발표했다. 그 중심에는 평화를 위한 기도가 있었다. 독일이 분단됐던 1980년대 당시 동독 내 복음주의 교회는 기도와 평화 행동을 시작했다. 1982년부터 월요일마다 정기적으로 기도가 계속됐고 복음주의 교회 목사들은 반체제 단체에 속한 사람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1989년 여름에 이르러 시위 군중의 숫자는 크게 늘어나, 수십만이 됐다. 이 평화 기도는 나라 전역으로 퍼졌고 독일 통일의 단초가 됐다. 유스튼 호븐 박사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신자 개개인은 기도 활동을 시작해 이전의 반대 세력들에게 다가갔고 정치인은 화해의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정치적 영역으로 가져가 민족들 간의 미움을 극복하고 공동의 미래를 건설하고자 했다”며 “가톨릭 주교들과 교황도 나서서 역사적인 적개심을 마주하고 평화의 미래를 위한 가교를 놓는 일을 도왔다”고 설명했다. 현재 한반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분노는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 유스튼 호븐 박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에 끊임없이 이를 상기시키고 새로운 화해 행동를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1968년 설립된 ‘산 에지디오’ 공동체는 소외지역에 관심을 두고 전 세계 70여 개 나라에서 활동하는 가톨릭국제구호단체다. 산 에지디오의 프란치오니 박사는 ‘위기 시나리오 속 산 에지디오 공동체의 경험’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산 에지디오의 평화를 위한 노력을 ‘분쟁의 조정’, ‘사회 내 평화의 문화 촉진’, ‘아시시의 정신과 종교 간의 대화’로 정리했다. 그는 “한 국가 내부의 무력 분쟁 해결을 인접국들로 구성된 지역적 기구에 맡겨버리는 것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다”며 “이들 인접국들 모두는 각각 이해관계가 있고 분쟁 국가에 의해 중립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약한 도덕적, 영적 인간의 힘을 통해 직접 만나 대화를 시작하는 것, 바로 우정-대화-유연성이 산 에지디오의 평화 창설 노력의 핵심 단어”라고 덧붙였다. 2011년부터 북한 당국과 인도적 협력 및 대화 노력을 시작한 산 에지디오 공동체의 경험을 설명하며 프란치오니 박사가 평화를 향한 여정에서 강조하는 것은 ‘대화’다. 프란치오니 박사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분열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나라 전체를 고립시키고 있는 벽들을 무너뜨리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신앙의 힘으로 문을 열고 다리를 놓고 희망이 자라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2024-11-24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김종필 작가

흙의 매력에 빠져 조각의 길로 어릴 적에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사실 그 전까지는 조소라는 걸 잘 몰랐어요. 학원에서도 조소를 가르치는 곳도 없었고요. 접할 기회가 없었던 거죠. 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술교육과에 입학했어요. 대학에서는 여러 미술 장르에 대해서 배우는데, 그때 처음으로 조소를 접했어요. 흙으로 빚어 조형물을 만드는 이 작업이 너무 재밌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했던 평면 작업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매력을 느꼈어요. 처음에는 사범대학에 다녔으니 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학교 선배들도 대부분 임용고사를 치르고 학교 선생님이 됐어요. 그런데 조소를 접하고 나서는 ‘이걸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학 4학년 때까지도 임용고사를 볼 준비를 했는데, 그때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일반대학원에서 조각을 전문적으로 더 배웠어요. 대학원 교육은 대체로 도제식으로 가르치는데, 은사님께서는 점토로 인물을 만드는 소조를 하셨어요. 저고 그렇게 소조의 맛을 들이게 된 거죠.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대형 공공조각 프로젝트를 몇 개 맡았어요. 사실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팔아 생활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조형물 프로젝트를 종종 맡을 수 있었어요. 학교에서 강사를 하면서 뭔가 목돈이 필요할 때 쯤엔 공공 프로젝트를 맡았어요. 하느님의 섭리인가 싶을 정도로요. 그러면서도 꾸준히 제 작품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었어요. 경제적으로 큰 도움은 안 되었지만 전시회에서 제 소품 작품을 사주시는 분들을 보면 굉장히 힘이 났어요. ‘아 내 작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시는구나’ 하고요. 이걸 계속 해도 되겠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어요. 성미술 전문작가의 길로 제가 태어난 곳은 전북의 한 교우촌이었어요. 아주 어릴 적 대전으로 이사를 와서 많은 기억이 없지만, 마을 가운데에 공소가 있었어요. 신앙을 가지신 부모님 덕에 하느님을 알게 됐죠. 그래서 너무 감사해요. 성당은 제 놀이터였어요. 친구들과 놀러도 가고 공부하러도 가고요. 그러면서 성당에 있는 성미술 작품에 노출이 돼 있었나 봐요. 항상 성미술 작품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가 조각을 하다 보니 저도 만들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조각을 하면서 인체를 다뤘으니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제로 만들어 보니 그냥 단순히 만들면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공부도 많이 하고 묵상도 많이 해야했어요. 성미술 작품은 굉장히 어렵다는 걸 나중에 깨달았어요. 처음 만든 성미술 작품은 제가 다니던 대전교구 문창동성당 성모상이었어요. 성당에 조그마한 파티마 성모동굴을 조성했는데, 본당 신부님께서 저보고 만들어보라고 하셨어요. 다른 파티마 성모상을 흉내 내서 만들었는데, 만들면서 성모상마다 다 양식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어요. 문창동성당 성모상 제작 이후, 대전교구 성령쇄신봉사회 새얼센터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봉헌하면서 교회미술 전문작가로 전향하게 됐어요. 십자가의 길을 처음 만들어서 잘 모르기 때문에 굉장히 연구를 많이 했어요. 각 처에 관한 묵상도 많이 하고요. 그러면서 십자가의 길은 14처 모두가 역작처럼 하나의 작품이지만, 각 처가 각각 하나의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한 점 한 점에 나를 쏟아부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요. 복음에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주제로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작품을 만들면 내가 평생을 해도 이걸 다 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렇게 성미술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어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 되는 작품 만들고 파 성미술 작업을 전문적으로 하면서 다행스럽게도 계속 일이 들어오고 있어요. 최근에는 진상성지에서 작업을 했어요. 야외 십자가의 길과 성당 십자가의 길과 십자고상을 설치했어요. 주중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에 대전 집 근처에 있는 금산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해요.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요. 항상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주로 십자가의 길을 작업하는데 똑같은 작품을 설치하면 안 되잖아요. 새로운 것에 대한 작가로서의 갈증도 있고요. 제가 우선으로 두는 것은 신자들이 기도하는 데 분심이 들게 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에요. 제 작품이 도구가 돼 조금이라도 신앙을 두텁게 하는 데에 일조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기쁘고 보람을 느껴요. 작업을 하며 ‘예수님은 어떤 기분이셨을까’를 공감해야 하기에 이러한 스스로도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 밑거름이 되고 있어요. 작품을 하면서 성경도 일고, 조금이라도 깊게 되새겨보기 위해 묵상하고요. 요즘엔 성지 등을 다녀보면 훌륭하게 좋은 작품들로 잘 꾸며놓은 게 느껴져요. 어떨 때 제가 작품을 보고 감동하고 더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작가들이 고민한 흔적들이 보이는 거죠. 그래도 더 많은 젊은 작가들이 교회미술, 성미술 작업에 참여하면 좋겠어요. 많은 분들이 참여하면 지금보다도 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요? ◆ 김종필(라파엘) 작가는 1970년 전북에서 태어났다. 한남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한남대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했다. 서울대교구 앵베르센터 옥상정원 십자가의 길과 솔뫼성지 야외 십자가의 길, 갈매못순교성지 십자가의 길을 비롯해 다양한 작품을 교회에 봉헌했다. 현재 한남대 사범대학 교수로 활동하며 성미술활동을 하고 있다. 2016년 제20회 가톨릭미술상 조각부문 본상을 받았다.

2024-11-24

[저를 보내주십시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이어돈 신부(하)

인터뷰 장소였던 초록 들판과 파란 하늘이 펼쳐진 제주도 성 이시돌 목장보다 싱그럽고 활기찬 미소가 인상적인 이어돈 신부(리어던 마이클 조셉·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 이사장). 그 안에서도 진지함을 잃지 않았던 이 신부의 다방면에 대한 생각과 철학을 들어봤다. 우선 하느님을 믿고 나서기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은 하느님 명령으로 고향을 떠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긴 것이다. 이어돈 신부는 이와 달리 현대 생활이 계획의 연속임을 우려했다. “고(故) 임피제 신부님도 제주도에서 처음부터 성 이시돌 목장, 복지병원, 피정의 집, 어린이집, 사제관 등 이 모든 걸 하리라고는 생각 못하셨을 거예요. 물론 계획은 있으면 좋은데, 앉아서 3년 후 계획을 얘기하는 일은 없었어요. 사랑은 말하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거예요. 어떻게 실천할까 생각하다 보면 하나씩 하나씩 방법이 생겨나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큰일을 성취하게 되는 거죠.” 이 신부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거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일들에서 앞으로의 희망도 본다고. 자신도 처음 한국에 온 이유가 그저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가지려다가, 였기 때문이었을까.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는 성경 구절처럼, 처음부터 너무 원대한 무언가를 찾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으로 시작하는 것, 그러다 보면 우리를 부르신 하느님의 도우심대로 역사하실 것이라고 이 신부는 믿는다. “누구나 성소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저의 성소, 하느님의 부르심은 선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선교를 통해 ‘다름’을 배우다 “방 2개짜리 집에 신부 두 명이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아이가 와서 몇 명이 함께 사냐고 물었어요. 두 명이라고 하니 둘밖에 안 되냐고 놀라더라고요. 자기는 이만한 집에 10명이 함께 살고 있다고요.” 1986년 1월 사제 서품을 받고 8월 한국으로 파견된 이 신부는 서울에서 1년 반 정도 빈민 사목을 했다. 한 도시 안에서 누구는 따뜻한 방에서 자고 누구는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 후 30년이 훌쩍 넘게 한국에 머물고 있는 이 신부는 “한국에 오래 살아서인지 이제 아일랜드 가면 좀 어색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아일랜드에서만 살 때보다 한국에 와서 생각이 많이 넓어지고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됐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에서는 예부터 ‘나와 다른 사람이 가장 좋은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신부는 자신의 견해나 주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반대는 외면하는 성향을 경계한다. 좋아하는 사람들 끼리끼리만 모이면 어떠한 틀 안에서만 사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돼버린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는 지금도 새로운 걸 배우고 있습니다. 정말 행복하고 재미있어요.” 다른 나라를 가게 되면 ‘왜 이렇게 하느냐’는 질문이 많아진다. 그 후 고향에 돌아가면 그동안 당연했던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고 의문을 품게 된다. 이 신부는 “다양성 안에서 하느님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며 “여러 문화를 통해서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만나서 함께 대화하고 때론 다투기도 해야 서로 배우고 발전할 수 있다”고 전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면 양쪽에서 좋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선교사는 부족할수록 많이 배울 수 있으니 서로의 문화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이 신부는 유쾌하게 귀띔했다. 차별 없는 세상에서 웃기 “제가 믿는 하느님은 신자 비신자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신자들만을 위해서 창조하지 않으셨어요.” 다른 종교라고 차별하지 말고 상대방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게 이 신부의 생각이다. 다른 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선교 사제가 다른 나라에 갔을 때 그 문화에서는 아무리 이상해 보이더라도 신자들은 ‘그래도 우리 신부님’이라며 인정을 한다. 이것은 차별을 조금씩 없애는 데 효과적이라고. AI가 우리 하는 일을 거의 모두 다 할 수 있게 되더라도 우리는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을 받는 요즘, 다른 사람을 자기 도구로 이용하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조언했다. “세상엔 심각한 일이 많죠. 웃지 못하면 미쳐버릴 수도 있어요.” 인터뷰 내내 재치 있는 말로 웃음을 자아낸 이 신부는 “예수님이 옆에 계셨더라면 농담을 많이 걸었을 것”이라며 “위트로 어떤 어려움도 넘어갈 수 있다”고 유머에 대한 철학을 전했다. 어떠한 긴장 속에 있는 관계에서도 농담을 하면 이내 굳었던 얼굴이 얼음 녹듯 풀리며 미소로 바뀐다. 물론 자칫하다가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기에 농담을 할 땐 조심해야 한다. 또 남들은 웃지만 나 혼자 상처를 받았을 때, 열을 내면 혼자 분위기 망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위트에서는 중심을 잘 잡는 게 중요하다. 이 신부는 예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보다 웃음과 농담이라는 부드러운 방법이 더 좋은 선교 방식이라고 여긴다. 이 신부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한마디를 들을 차례가 왔다. 장난기로 무장한 이 신부의 앞날은 역시나 하느님과 함께다. “하느님은 앞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는 길을 도와주실 거예요. 하느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말이에요. 뭐, 믿으면 더 도움이 될 수 있겠네요. 여러분 모두 힘내세요.”

2024-11-24

국토 곳곳에 잠복한 불발탄…예방 교육은 공포를 희망으로 바꾼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선전포고도 없이 폭발물 200만 톤을 라오스에 퍼부었다. 58만 번의 폭격에서 쏟아진 불발탄으로 라오스 모든 민족이 고통받았다. 불발탄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고, 힘없는 라오스 사람들은 상처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더 많은 피해자가 죽거나 다치지 않게는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사단법인 평화3000(상임대표 곽동철 요한 신부) 활동가들이 현지에서 보고 들은 불발탄 피해 이야기를 전하고, 피해국 라오스에서도 손꼽히는 가난한 산간 오지 후아판주에서 꾸준히 불발탄 사고 예방 교육을 펼쳐온 과정을 소개한다. ■ 아물지 못한 상처 “아물지 못한 상처는 가난한 이들이 일어서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 중 하나예요.” 후아판주 ‘위앙싸이 소수민족학교’에서 지원 사업 관련 일정을 마친 평화3000 활동가들이 다음 일정을 위해 지역을 떠나던 10월 30일. 이른 아침 울룩불룩한 산악지역을 빠져나가는 길에서 이관택 코디네이터가 말을 꺼냈다. “라오스 국토에 퍼져 있는 불발탄이 경제·사회 발전을 막는 원인 중 하나”라는 말이었다. 라오스는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면서 전역에 불발탄이 깔렸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선은 라오스·캄보디아까지 확대됐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2억7000만 개 폭발물을 라오스 전역에 퍼부었다. 그중 30%가량인 약 8000만 개는 지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바로 터지지 않는 미폭발물(Unexploded Ordnance, UXO)로 남겨졌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터질지 모르는 그 흉기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죽거나 다친 피해자가 지금까지 5만 명을 넘는다.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올해 6월까지 라오스 불발탄 규제청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서 44건의 불발탄 사고가 있었다. 후아판주만 해도 9월에 잔디를 깎다가 불발탄이 터져 죽은 사람이 있었다. 불발탄은 인명을 해치는 걸 넘어 국가 개발을 저해한다. 도로 등 사회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데도 해당 지역의 불발탄부터 찾아내고 제거해야 해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농지 사용조차 위험한 상황에 농촌 개발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 완전 제거까지 200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파악되는 만큼 제거 비용도 막대해,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에서도 개발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유엔의 17가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에 라오스는 특별히 18번째 목표로 ‘불발탄으로부터의 안전한 삶’(Lives Safe from UXO)을 정한 이유기도 하다. 고즈넉한 경치로 이름난 라오스의 도원경(桃源境)에는 이렇듯 특유의 평화로움과는 정반대인 아픔이 감춰져 있었다. 여정에 동행한 박희선(안젤라) 활동가는 “곳곳에 죽음이 도사린다는 공포에 내몰렸던 라오스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불어넣어 줘야 하는지 가슴으로 다가왔다”고 고백했다. ■ 죽거나 다치지 않게 평화3000 활동가들은 비엔티안에 도착하자마자 라오스 국립재활원 내 ‘COPE’ 센터로 향했다. 불발탄 폭발 피해자들을 위한 비영리단체 COPE가 운영하는 센터로, 그 피해와 위험성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기념관과 같은 곳이라 바쁜 일정 틈을 내 발길을 향했다. 수많은 라오스인을 악몽에 몰아넣었던 그날의 하늘을 되새기듯, 센터 천장에는 골프공만 한 크기의 집속탄 등 폭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폭발 피해로 다친 잃은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의족과 의수들도 전시돼 있었다. 현지에서 불발탄 사고 예방 교육 활동을 펼치던 중 평화3000과 협력하게 된 이관택·정유은 두 코디네이터가 해설을 맡았다. “피해자들 재활과 회복만큼 중요한 건 지속적인 예방 교육이에요.” 정유은 코디네이터는 계속 일어나는 폭발 사고를 언급하며 “꾸준한 예방 교육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막아내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라오스에서 불발탄은 주로 산악 지역에 묻혀 있다. 그곳 사람들은 매체 접근에 제약이 있어 위험에 많이 노출된다. 특히 어린이는 계속 새로 자라나는 만큼 한 지역에 한 번 교육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본 적 없는 불발탄의 위험성에 대해 어른보다도 인식이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010년 이전에는 한 해 평균 300건에 달하던 폭발 사고는 2011년부터 100건 이하로 줄어들었다. 2010년 ‘불발탄 영향 감소’를 새천년개발계획으로 채택한 라오스 정부의 의지에 국제사회가 불발탄 제거, 예방 교육 등 더 크게 동참하면서부터였다. 평화3000도 이에 발맞춰 라오스 불발탄제거청과 협력해 2023년 9월 현지에서 아이들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예방 교육을 시작했다. 활동가들은 불발탄 전문 강사들과 함께 산간 지역 초등학교와 마을회관에 찾아가 시각 자료, 포스터, 영상물 상영 등으로 예방 교육을 진행해 오고 있다. 9월 후아판주 오지 중 하나인 썬군에서는 4개 마을 초등학교 학생들과 주민 총 800여 명에게 8회에 걸쳐 교육을 진행했다. 주도인 쌈느아에서 10시간 거리에 위치해 예방 교육에서 소외됐던 곳인 만큼 평화3000의 우선적 지원 대상이 됐다. 올해는 8월 히암군 5개 마을에서 초등학생과 마을 주민 500여 명이 예방 교육을 받았다. 후아판주 불발탄제거청, 체육교육청, 교육부 관계자들도 강사 및 실무인원으로 함께해 활동가들의 열의에 한마음으로 동참했다. 활동가들과 강사들은 폭넓은 교육 기자재를 동원한다. 불발탄으로 오염된 라오스 지도를 보여주며, 폭탄의 종류와 유형도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불발탄으로부터 안전한 생활과 사고 피해자를 돕기 위한 안내, 연령층에 따라 눈높이를 맞춘 예방 사항도 마련됐다. 사고를 당한 4명의 어린이를 다룬 다큐멘터리 등 영상 자료도 빼놓지 않았다. 예방 포스터와 배너는 교육 이후 마을회관과 학교 게시판에 전시된다. 향후에도 위험 인식을 위한 교육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 희망을 안겨준다는 것 “폭탄 조사 및 제거, 긴급 구조 등 분야는 전문가를 필요로 해요. 하지만 예방 교육은 누구나 관심을 지니고 배우기만 하면 참여할 수 있죠. 활동가들이 귀국하던 30일 밤, 두 코디네이터가 불발탄을 녹여 만든 숟가락을 활동가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건네며 말했다. 이 코디네이터는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예방 교육 강사와 활동가)의 존재만으로도 라오스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들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서 상황을 구체적으로 돌아보고,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낼 동기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또 예방 교육은 라오스인들이 불발탄 문제를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해줄 수 있다. 아직도 불발탄 오염지역은 산골에 사는 일부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정 코디네이터도 “예방 교육은 여전히 폭발 사고로 고통받는 이들을 세상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보탰다. 그는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시민들과 라오스 사람들을 연결해 불발탄은 전쟁으로 피해받은 모든 사람들의 사안, 평화의 문제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싶다”고 전했다.

2024-11-17

[순례, 걷고 기도하고] 수원교구 미리내성지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우리말이다. 박해를 피해 모여 살던 신앙 선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과 밤하늘의 달빛, 별빛이 시냇물과 어우러진 모습이 은하수 같다고 해 붙여진 예쁜 지명이다. 성지 입구에서 성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는 기념성당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20여 분. 색동옷 갈아입은 만추(晩秋)의 숲길 따라 묵주기도의 신비를 담은 커다란 조각들이 길동무처럼 안내한다. 묵주 꺼내 손에 쥐고 한 걸음 내딛는다. †.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성인이 고향도 아닌 왜 이곳에 묻힌 것일까.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1846년으로 돌아가야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미리내에 살던 17살 청년 이민식(빈첸시오)은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 유해만이라도 수습하겠다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다. 그리고 성인의 순교 40일 만인 10월 26일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유해를 모시는 데 성공했다. 그는 유해를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만 150여 리를 밤에만 걸어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미리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널따란 잔디광장의 끝에 김대건 신부 동상 그리고 그 너머 언덕에 1928년 봉헌된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이 있다. 성당 앞뜰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미리내본당 초대 주임),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조선교구 3대 교구장), 최문식 신부(미리내본당 3대 주임) 등 네 성직자 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옛 무덤이다. 성인의 유해는 1901년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60년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 성신교정에 안치됐다. 현재 미리내성지는 성인의 아래턱뼈 등 유해 일부를 모시고 있다. 무덤 앞에서 두 손 모으고 성인의 넋이 깊이 스며 배인 진토(塵土) 위에 경당이 들어서고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 오늘에 감사를 드린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상과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성모칠락) 벽화가 이채로운 성모당을 지나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성당으로 향한다. 성인의 종아리뼈를 모신 제대 위로 성령과 성모님 그리고 김대건 신부와 성인들의 모습을 담은 유리화가 하늘을 향해 뻗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 성전 뒤 십자가의 길을 지나 맨 처음 묵주기도를 시작했던 자리로 돌아왔다. 한국 순교 성인 복자상과 김대건 신부가 사목하던 조선 시대의 성문 형상으로 지어진 성체조배실이 있다. 성체조배가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가장 좋은 길. 성문의 이름이 ‘천국문’(天國門)인 이유다. 성체조배실 너머로는 또 다른 성당이 아름드리나무 아래 들어서 있다. 1907년 봉헌된 미리내 성 요셉 성당이다. 성당은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 강도영 신부의 얼이 서린 곳이다. 1896년 사제품을 받고 첫 소임지로 미리내에 온 강도영 신부는 33년간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며 성 요셉 성당 뿐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을 띤 해성학교를 설립했고 농촌개혁에도 선구적 역할을 했다. †. 성지를 나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순례길 함께한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린다. 부르심에 응답했고 그 때문에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목자 성 김대건 신부. 목자의 마지막 길을 편히 모시고자 목숨을 걸고 유해를 짊어진 이민식의 열렬한 신심. 그리고 선배 목자의 순교를 모범 삼아 사목에 충실하며 헌신한 강도영 신부. 때와 곳 가리거나 탓하지 않고 순명의 마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한 신앙 선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미리내가 순례자들의 기도와 묵상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들처럼,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 내어놓은 채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 여기 있습니다”(창세 22,1 참조)라 답할 수 있는 용기 주시길…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한다. ◆ 순례 길잡이 - 수원교구 미리내성지(www.mirinai.or.kr) - 미사 : 주일(오전 11시, 오후 2시), 화~토(오전 11시 30분) - 유해 친구식: 매월 첫 금요일 미사 중 - 순례 문의 : 031-674-1256

2024-11-17

[성미술 작가 다이어리] 장동현 작가

공간을 지배하는 조소에 매력 느껴 저는 스스로 그림이나 예술적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그림을 보면서 자라긴 했어요. 세 남매 중 막내인데요, 형은 화가이고 누나는 금속공예가예요. 삼촌도 디자인을 전공하셨고요. 그런데 한번은 형이 미술학원에서 그려온 그림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제가 조그만 종이에다가 형이 쓰던 연필로 따라 그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집에 놀러 오신 삼촌이 그림을 보더니 형보고 ‘그림 많이 늘었네?’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그게 제가 그린 건데요?’ 했더니, 삼촌이 ‘동현이도 그림을 잘 그리네?’ 이러셨어요. 그래서 속으로 ‘나도 그림을 잘 그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어요. 졸업할 때쯤 컴퓨터 디자인이 생기면서 제가 설 자리가 없었어요. 저희는 학교에서 컴퓨터 디자인을 배우진 않았거든요.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가 조소과 학생이었어요. 여자친구가 작업을 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어요. 그림은 2차원인데 조소는 3차원이잖아요. 전시회를 보러 다니면 조각 작품 하나가 전체 공간을 지배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림이 무한으로 확장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조소과로 편입했어요. 막상 조소 작업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과 입체를 다루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니 까요. 그런데 한 선생님께서 ‘그림과 조각은 다른 게 아니다. 평면이 여러 개 겹치면 그게 입체가 되는 것이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입체도 잘할 수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다 하나로 통한다는 말씀, 저 이 말씀을 귀담아 따르고 있어요. 저는 아내와 결혼을 하면서 세례를 받았어요. 종교가 없었는데, 장인께서 결혼을 하려면 ‘신자가 돼야 한다’고 하셔서요. 아내와 저도 젊은 작가로서 미술작품 작업을 했는데요, 먹고 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내는 ‘들숨날숨’이라는 잡지사의 기자로 일을 시작했죠. 당시 잡지사에 조광호(시몬) 신부님이 계셨는데, 저희 부부가 조각을 전공했다는 걸 아시고 저희를 신부님 작업실 조수로 부르셨어요. 한마디로 얘기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죠. 교회미술 작업의 시작 당시는 전국에서 성당을 많이 짓던 시기였어요. 교회미술 작업 의뢰도 많이 들어왔어요. 한번은 어느 성당에 설치할 작품을 싣고 가는데 다른 성당으로 간 적도 있어요. 그만큼 여러 곳의 성당에서 작업했어요. 그러다가 아예 작업실 직원으로 들어갔죠. 그러면서 교회미술을 접하게 됐어요. 사실 처음에 교회미술 작업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뭐 십자고상은 십자가에다가 사람 갖다가 걸어놓으면 되는 거지, 저게 무슨 예술이냐’ 이런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교회미술 작업을 하면 할수록 ‘이게 그냥 십자가가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상하게 하면 할수록 좀 매력을 느껴요. 요즘엔 교회미술 작업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교회미술에 대한 인식이 바뀐 계기가 있었어요. 2003년에 가톨릭미술가회에서 유럽 현대 성당 순례를 했는데, 제가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1950년대 이후에 지어진 성당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성당에 있었어요. 스위스의 한 성당에는 미로며 마티스, 샤갈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작가들의 작품이 있었어요. 문손잡이, 난간 하나가 대가들의 작품이었어요. 같이 갔던 최종태(요셉) 선생님께서 가톨릭 미술, 특히 토착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는데, 사실 당시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몰랐지만 ‘교회미술도 해볼 만하겠다. 내 인생을 바칠만한 분야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조 신부님 작업실에서 10여 년을 지내다 아내와 나름 독립을 했어요. 2000년대 후반이었는데, 아내와 함께 인천교구의 영종성당 성물을 맡게 됐어요. 사실 조금 겁이 났지만, 당시 본당 주임 신부님이 영성이나 종교적인 면은 채워주겠다고 하셔서 설계부터 작업을 같이 했어요. 영종성당을 기회로 자신감을 얻게 됐어요. 이후로 50여 곳의 성당 성물 작업에 참여하고 있어요. 성당의 성미술을 총괄하는 디렉터가 되고파 지금은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많이 하고 있어요. 조 신부님께 어깨너머로 배웠는데 처음에는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름 큰 매력을 발견했어요. ‘우연의 효과’라고 할까요? 나름 어떻게 빛이 나올 것이라고 구상을 해 스테인드글라스 설치하지만, 빛은 제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우연적인 효과가 있어요. 하느님께서 만드신 빛이 스테인글라스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비치는 거죠. 시간과 계절에 따라 들어오는 빛이 다르기에 스테인드글라스로 보이는 빛도 항상 달라요. 우리나라 성당에도 그 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교회미술 작품이 하나씩 있으면 좋겠어요. 본당 신자들도 자부심을 느끼고 다른 본당 신자들이나 일반인들도 찾아올 수 있게요. 그리고 스토리가 있는 교회미술 작품이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제가 최근에 베네딕토 성인상을 만들었는데요. 성인상에서 주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목장을 뺐어요. 신자들뿐만 아니라 이웃 주민들에게 열린 공간을 추구하는 수도회의 생각을 반영한 거죠. 이렇게 이야기가 있는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그동안 성당 성미술 작업을 하면서 성당의 전체적인 공간과 교회미술 작품의 조화를 조율하는 디럭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본당 신부님이 이런 것을 다 조율하기에는 건축이라든지 성미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요. 성당을 신축하든 개조하든 전체적으로 성당을 바라보고 참여 작가들과 의견을 조율해 조화롭게 성물을 배치하는 나름 아트 디렉터가 필요한 거죠. 몇 개 성당에서 이 역할을 맡아 작품을 조율하고 실제 저도 작품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전체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어요. 앞으로 이런 역할을 계속하고 싶어요. ◆ 장동현(비오) 작가는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4년 서울예대 시각디자인과, 1999년 수원대 조소과, 2003년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2004년 첫 개인전을 비롯해 5차례 개인전을 열고, 2022는 광주가톨릭박물관 초대전을 비롯해 70여 차례의 기획 및 단체전에 참여했다. 가톨릭대를 비롯해 독일 에센 성미카엘 성당, 인천교구 영종성당 등 50여 곳에 성미술 작품을 봉헌했다.

2024-11-17

[저를 보내주십시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이어돈 신부(상)

이어돈 신부(리어던 마이클 조셉·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는 2011년 제주도에 있는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이하 이시돌협회) 이사장이 됐다. 1954년 제주도에 내려와 성 이시돌 목장 설립 등 사목을 시작한 고(故) 임피제 신부(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사업 일선에서 은퇴하자 그의 곁을 지키다가 임 신부의 뒤를 이은 것이다. 놀랍게도 첫 제주 방문은 신부가 아닌 수의사이자 선교사로서 했던 이 신부의 유쾌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2회에 걸쳐 들어본다.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나는 구원받은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죄인이에요. ‘예수님께 사랑받은 죄인’입니다.” 이어돈 신부는 자신을 한껏 낮춰 소개했다. “아까 말과 함께 사진 찍었는데 나도 54년생 말띠”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은 이 신부는 “사제인 건 중요하지 않고 세례받은 게 중요하다. 세례 때 이름인 ‘미카엘’ 대천사를 존경한다”고 전했다. 이 신부에게서 이사장직도, 사제직도 아닌 본연의 모습을 중시하는 소탈한 면모가 엿보였다. “한국엔 세속적인 이유로 왔다”는 이어돈 신부는, 시작은 미미하지만 앞날은 성대해질 것이라는 성경 구절처럼(욥 8,7 참고) 사실 영국에서의 술자리를 계획하다가 한국에 오게 됐다. 수의학과 학생 시절, 런던의 같은 수의학과 학생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에서 진행되는 외교관 면담 소식을 듣게 되고, 아일랜드에서 영국까지의 교통비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예상에 지원을 준비했다. 이때 추천서를 부탁한 수의학과 학장이 바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학생 출신이었다. 학장은 이 신부에게 한국에 파견돼있던 임피제 신부 이야기를 꺼냈고, 이 신부는 1978년 얼떨결에 한국, 그것도 당시만 해도 외딴섬이었던 제주도에 도착한다. “한국말을 잘 몰랐던 덕분에 제주에 와서야 예수님을 멋쟁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어릴 적 유아 세례를 받고 계속 성당에 다녔지만 제주도에 2년 반 머물렀을 때, 그제야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 같았다. 사실 한국말로 이뤄지는 임 신부의 강론 시간이 알아들을 수가 없어 그렇게 지루했다. 그래서 이 신부는 영어로 된 매일미사책의 복음 부분을 계속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가나안의 혼인 잔치에 술이 왜 떨어졌을까? 술꾼으로 소문났던 예수님과 제자들, 친구들 때문 아니었을까? 성모님이 예수님께 부탁을 한 것도 그런 아들이 창피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함께 어울리고 싶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어느 시대이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이 신부는 사제 성소를 고민하게 됐다. 제주, 내가 있을 곳에 사제로 다시 오다 이 신부는 2년 예정으로 왔던 제주도에 정이 들어 2년 반을 머물렀다. “그땐 제주도를 떠나면 다신 못 돌아올 줄 알고 계속 미뤘다”는 이 신부는 이렇게 다시 돌아올 줄 알았으면 땅을 아주 싸게 사놨을 거라는 특유의 농담도 잊지 않았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를 통해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을 때 지도 신부가 이 신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이 신부는 제주도 가고 싶어서 사제에 지망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우리는 현재 17개국에 사제를 파견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갈 수 없을 수 있다”였다. 이 말을 들은 이 신부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이뤘다. 하지만 이내 ‘예수님을 위한 길에 조건을 달지 말자’는 결심이 섰다. 한국을 꼭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한국에 오게 됐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이었던 것 같다고. “제주도에 있으면서 지금까지 어려움도 많이 있었지만 어려움 안에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있을 자리라고 여겨졌죠.” 제주살이 처음엔 음식도 안 맞고 언어도 통하지 않아 외롭고 힘들었다. 그러다 차츰 한국말을 배우면서 한국 문화를 더 이해하게 되고 지금까지 만나는 친구들도 생겼다. 2004년 그토록 그리던 제주도에 사제로 파견된 이어돈 신부. 이시돌협회와 가까이 있는 금악본당 주임신부를 맡으며 임 신부와도 가까이 지내게 됐다. 거동이 불편해진 임 신부의 여러 자리에 동행하며 수행하기도 했다. “임 신부님이 저에게 성 이시돌 피정의 집을 도와달라고 하시더니 담당은 본인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알겠다고 하고 그럼 대신 미사 할 때나 고해성사 줄 때마다 돈을 받겠다고 했죠.” 임 신부와의 일을 회상한 이 신부는 역시 장난스러운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임 신부는 자리에서 물러난 후 뒤를 이은 이 신부에게 일절 조언이나 개입을 하지 않았다. 정말 존경스럽고 감사한 부분이라고. 이시돌협회가 생긴 초창기에는 임 신부의 사업이 한국의 발전을 이끌었는데 이 신부가 맡고 있는 지금은 한국 산업이 이미 앞질렀다고 느낀다. 그런 이시돌협회에는 또 다른 사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앞서가지 않더라도 갈 데 없는 힘든 사람에게 좋은 일자리를 주고, 그들에게 적법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곳으로 남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024-11-17

나 하나 실천한다고 바뀔까요? “네, 힘 모아 행동하면 바뀝니다!”

기후위기를 자초한 이들은 인간이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 역시 인간이다. ‘나 하나 바뀐다고 지구가 달라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뒤로 하고 교회는 ‘우리가 힘을 모으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창조질서 보전을 위해 성당을 나와 지역과 연대하고 있는 교회의 노력을 살펴본다. ■ 탄소중립, 함께하니 가능하다 전례 없었던 바이러스의 공포에 휩싸인 인류는 인간에 의해 망가진 생태계가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 심각성을 체감하며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발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보호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할 것을 당부했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가 구체적인 실천을 선포한 것은 2021년 9월이다. 수원교구가 가장 처음 탄소중립을 천명하며 2030년까지 교구 및 본당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고 204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이듬해 9월 대전교구도 탄소중립 여정에 합류, ‘교구 내 모든 본당과 기관이 2030년까지 에너지 자립을, 204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할 것’을 다짐했다. 교회의 탄소중립 여정은 구호로만 끝나지 않았다. 대전교구에서는 선언 2년 만에 탄소중립을 실현한 본당이 나왔다. 대전교구 생태환경위원회(위원장 김대건 베드로 신부)는 지난 5월 전기와 가스, 석유류, 물 사용량의 순 배출량이 ‘0’이 되는 넷 제로(Net-Zero)와 탄소중립 기준을 달성한 갈마동본당(주임 김동규 미카엘 신부)과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한 관저동본당(주임 박찬인 마태오 신부), 도마동본당(주임 송우진 가시미로 신부), 천안성정동본당(주임 임상교 대건안드레아 신부)에게 각각 SOL과 LUNA 인증을 수여했다. SOL 인증은 전기, 가스, 석유류, 물 사용량의 순 배출량이 ‘0’이 되는 넷 제로(Net-Zero)를 달성하고 탄소중립 인증지표 기준을 달성한 본당, LUNA 인증은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한 본당에게 수여된다. 냉난방기 사용을 줄이고, 행사에서 일회용품을 쓰지 못하는 불편함으로의 전환이 익숙하지 않았던 신자들은 하느님의 창조질서 보전에 동참한다는 기쁨을 공동체 안에서 나누며 기꺼이 변화를 선택하고 있었다. 개인의 작은 변화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본당의 탄소중립을 이뤄내는 동력이 됐다. 신자들 적극적인 참여·실천으로 국내 첫 탄소중립 인증 본당 탄생 공동선 추구하는 '에너지협동조합' 태양광 발전에 대한 인식 높여 ■ 밑에서부터 이뤄진 생태적 회개, 공동선 일구다 대전교구 본당들이 탄소중립을 달성하는 데는 불휘햇빛발전협동조합의 동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9년 설립된 불휘햇빛발전협동조합이 교회 내 태양광 발전을 이끌고 있다면, 후발주자인 수원교구의 공동의집에너지협동조합(이사장 양기석 스테파노 신부)은 전기를 생산하는 사업자로서 지자체와 연계해 태양광에너지를 생산하고 판매한다. 태양광 발전 협동조합은 수익 사업이라기보다는 태양광 발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확산하기 위한 것이다. 경기도와 협력해 태양광발전소 설치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의집에너지협동조합은 서수원IC와 월암IC에 199.98㎾ 규모의 태양광 발전을 설치했다. 여기서 생산된 에너지는 경기도 내 중소기업 등 기업 RE100 실현을 위해 판매, 사용하는데 제공하며 전력판매 매출의 3% 정도를 경기도 탄소중립 실현 및 에너지복지 지원 등 나눔 활동에 사용한다. 이 사업에는 경기도의 26개 에너지 협동조합이 참여하고 있다. 에너지협동조합은 시민들이 에너지 소비자로서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해 스스로 생산자가 되기 위해 활동하는 곳이다. 특히 하느님의 창조질서 보전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동의집에너지협동조합에 모인 신앙인들은 작은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가깝게 다가가고 있었다. 이사장 양기석 신부는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는 몇몇 큰 기업이나 정부의 힘만이 아닌 공동선을 추구하는 여럿이 함께할 때 해결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공동의집에너지협동조합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며 “에너지 전환을 위해 사제들과 본당, 수도공동체와 단체들이 힘을 합쳐 만든 협동조합에 많은 분들이 함께해 주실 것을 청한다”고 말했다. ■ 태양광 발전소 이모저모 태양광 발전소는 두 가지로 나뉜다. 가정 등에서 직접 전기를 생산해 자체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자가용’과 생산한 전기를 판매해 수익을 내는 ‘상업용’이다. 자가용의 경우 도심 속 일반 가정에서도 발코니 난간이나 주택 옥상 등에 저렴한 비용으로 손쉽게 설치할 수 있다. 발전 시설은 발코니 같은 난간에 설치할 수 있는 거치식, 옥상이나 마당에 설치할 수 있는 이동식, 건물 벽면에 부착할 수 있는 고정식 등이 있다. 발코니형 태양광 발전기는 325W 설치 시 매달 전기 요금을 6700원가량 절감할 수 있다. 이보다 큰 주택형의 경우에는 6만5000원가량 절감할 수 있다. 정부와 각 지자체는 매년 배정된 예산 범위 안에서 설치비를 지원한다. 설비 규모는 50W~1㎾ 소형 발전소로 단독 및 공동주택, 상가건물 등에서 모두 신청 가능하다. 경기도는 도비 40%, 시군 40~50%의 보조금 지원과 일부 자부담을 통해 내 집을 발전소로 만드는 ‘1가구 1발전소’ 사업을 하고 있다. 집 발코니에 870W 미니태양광을 설치할 경우 설치비 180만 원 중 36만 원만 자부담하면 된다. 시간당 435W를 생산하는 미니태양광 패널 2개를 발코니에 설치하면 한 달에 70kWh 정도의 전기가 생산되며, 4인 가구 월평균 사용량 기준 매달 1만9240원의 전기요금이 절약된다. 한국에너지공단에서도 신·재생에너지원을 주택에 설치할 경우 설치비 일부를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2024-11-17

[평신도 주일 특집] 보편교회에서 활약하는 한국의 평신도

11월 10일 제57회 평신도 주일이다. ‘평신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널리 가 닿도록 노력하여야 할 빛나는 짐을 지고 있으며’(「교의헌장」33항) 이에 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살아있는 도구이며 증인이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하는 날이다. 한국교회 평신도로는 처음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 부회장에 선출돼 아시아교회 여성들의 연대와 세계 무대로의 진출 길을 넓히고 있는 박은영(이사벨라) 씨, 그리고 자신의 탈렌트를 십분 발휘하며 가톨릭교회의 새 역사를 쓴 세계주교시노드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 정태영(베드로) 씨를 통해 평신도의 소명과 역할을 재조명한다. ■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 박은영 부회장 교회 안 여성 역할과 위상 증진 강조 사제에 대한 존중과 수동적 태도는 달라…능동적 참여 필요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요? 한국의 여성 평신도들은 어머니로서의 강인함과 더불어 신앙에 대한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아 만난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World Union of Catholic Women’s Organizations·WUCWO) 박은영(이사벨라) 부회장은 한국 여성 평신도만의 장점으로 ‘강인함’과 ‘열정’을 꼽았다. 여성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한 시노달리타스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여성 평신도들이 잠재된 열정을 이끌어 내 보다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박 부회장은 오랜 미국 생활 이후 2000년 귀국해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사제와 평신도의 관계가 비교적 수평적인 미국교회의 모습이 익숙한 박 부회장에게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은 낯설게 다가왔다. “레지오와 성모회 활동을 하면서 본당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음식 준비 등 보조적인 일에 국한된 것에 안타까움이 컸어요. 전통적으로 해왔던 여성 신자들의 역할만 유지하며 새로운 제안이나 시도를 하지 않는 분위기였죠. 사제를 귀하게 여기는 것과 수동적인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들 스스로 교회 안에서 역할을 제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시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이후 서울대교구 가톨릭여성연합회와 인연이 닿은 박 부회장은 연합회 회장을 거쳐 세계가톨릭여성연합회 이사를 지낸 뒤 2023년 부회장에 선출됐다. 한국교회 평신도로서 처음이자 비영어권 국가 출신의 부회장 임명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계교회 안에서 영어권이 아닌 나라들은 아무래도 연대의 끈이 느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로 임명되면서 가장 주력했던 활동은 아시아 교회의 연대와 그들이 세계 무대로 나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박 부회장은 교회의 주축인 여성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은 ‘참여’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독려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시노달리타스의 정신과도 연결된다. 지난 7월 발표된 세계주교시노드 제2회기 의안집은 크게 개혁과 쇄신의 키워드에 주목했다.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참여’와 ‘동반’이다. 특별히 교회 안 여성의 역할과 위상의 증진을 강조하며 “각국 주교회의는 우리 시대의 사목적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여성들에게 주어진 은사와 성령의 은총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는 직무적, 사목적 지침들을 더 깊이 탐구할 것을 요청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역할과 위상이 높아진 뒤에는 책임이 따른다. 박 부회장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확장되는 만큼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찾는 것이 선행돼야 합니다. 역할이 커진 만큼 신앙적으로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고, 이를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알려주는 봉사정신과 사랑 실천도 여성 평신도들이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시노드 커뮤니케이션팀 봉사자 정태영 씨 한 달간 시노드 영상 제작 봉사자로 참여 경청하고 공감하는 대화 모습에 큰 감동…평신도 사명 되돌아봐 지난 10월 한 달간 보편교회의 심장 교황청에서 열린 세계주교시노드 제16차 정기총회 제2회기. 인스타그램(synod.va)을 비롯한 시노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는 회의 모습과 대의원들의 인터뷰 등 다양한 영상이 한국인 청년의 손을 거쳐 매일매일 업로드됐다. 마치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한 모습을 직접 촬영하고 다듬어 세계교회에 전한 주인공은 세계주교시노드 커뮤니케이션팀에서 비디오그래퍼로 봉사한 정태영(베드로·서울대교구 중앙동본당) 씨다. 영상 제작 전문 프로덕션에서 PD로 일하는 정 씨는 서울대교구 청년성서모임 연수 영상이나 살레시오 수녀회의 150주년 뮤지컬 제작에 참여하는 등 자신의 탈렌트를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 힘써 왔다. 현재도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WYD) 콘텐츠팀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신부님이 시노드 봉사자 공고 소식을 알려주셨어요. 제 능력을 보편교회를 위해 쓸 수 있는 뜻깊은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휴직을 해야 참가할 수 있어 고민도 했지만 다행히 회사에서도 흔쾌히 허락해 로마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제2회기 개막부터 폐막까지의 모든 과정을 대의원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담아 전 세계에 전하는 일. 세계 각국에서 온 봉사자 17명과 함께 한 10월 한 달은 하루하루 새로움이자 경이로움이었다. 줄곧 접하면서도 추상적으로만 와닿았던 ‘시노드’를 눈으로, 머리로 그리고 가슴으로 체험한 시간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시노드의 대화 방식이었습니다. 세계 각 대륙에서 온 수백 명이 원탁에 둘러앉아 진솔한 이야기에 서로 귀 기울이며 공감하는 모습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줬습니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대화가 최종문서라는 열매로 드러난 순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대화가 이런 것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정 씨는 시노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배운 것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믿음의 힘’이라고 전했다. ‘시노드는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한다는 그는 “교회 내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대화를 멈추지 않고 하나가 되어 가는 노력 그리고 그 길에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계심을 잊지 않고 시노드 정신을 실현해 나갔으면 한다”고 전했다. 보편교회 역사의 획을 긋는 시노드에 참여하며 청년 평신도로서의 역할도 되돌아볼 수 있었다. “평신도는 교회를 세상 속에 전파하는 최전선에 있습니다. 성직자가 교회를 지탱한다면, 평신도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직장과 가정, 학교 등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만큼 이 사명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교황청에서의 봉사를 계기로 정 씨는 앞으로도 교회를 위한 영상 제작에 더욱 헌신하고 싶다고 했다. 서울 WYD 콘텐츠팀에서 활동하며 교회의 아름다운 순간을 널리 알리는 데 더욱 노력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전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남긴 정 씨의 글에서 다음 걸음을 내딛는 젊은 평신도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바티칸에서 보낸 한 달, 그간의 모든 걸음이 기적으로 느껴집니다. 시노드는 끝났고 삶은 계속됩니다. 그렇기에 시노드는 끝나지 않았음을 되새겨봅니다. 함께하는 여정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 사랑에 감동하며, 다음 걸음을 내딛습니다.”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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