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무엇이지?

한 수도자는 몸의 이상으로 몇 년째 요양 중이고, 한 사제는 치통을 심하게 앓고 있다. 한 자매는 석화된 쓸개 제거 후 회복기에 있고, 한 형제는 척추가 휘어서 치료 중이다. 이들을 동반하는 의사들은 의과대학 정원과 관련해 정부와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는데,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한스 가다머는 1900년에 독일에서 나서 2002년에 죽은 철학자다. 그는 100세 때 하이델베르크 의대에서 ‘고통’을 주제로 발표했다. 가다머는 4살 때 여읜 어머니 요한나의 예술적 열정과 종교적 연대를 물려받았는데, 화학자이자 약학자였던 그의 부친 요한네스 가다머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61세에 폐암으로 죽기 직전, 22세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하이데거를 스승으로 택해 교수자격 과정에 있던 아들을 염려했다. 그는 자기가 입원한 병원으로 하이데거를 오게 해서 물었다. “그 애가 이런 공부를 해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이데거는 답했다. “당신의 아들은 매우 탁월하며··· 그는 벌써 교수자격 과정에 들어가기 위한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철학이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 않은 그의 부친은 하이데거가 떠나기 직전에 다시 물었다. “당신은 진실로 철학이 삶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충분하다고 믿습니까?” 하지만 가다머는 그의 부친이 택한 자연과학 세계와는 다른 철학계에서 예술적 감수성을 통합해 열어 간 해석학의 대가로서 수많은 사람에게 삶의 지혜와 충만을 매개했다. 1960년에 낸 「진리와 방법」은 존재 기반 해석학의 지평을 연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가다머가 100세에 이르러 신체적 ‘고통’과 관련해 의학자들 앞에서 말했다. “고통은 내게 나타나서 나를 덮치는 그러한 감정으로 우선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항상 이겨내야 하는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그 어떤 것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마침내 우리에게 부과된 그 어떤 것을 해결하기 위한 아마도 아주 대단한 기회다. 인생의 가장 고유한 차원은 자신이 극복하지 못한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예감될 수 있다.” 이어서 그는 현대 의학이 주기 어려운, 고통 과정이 주는 명약에 관해 말한다. “여기서 또한 나는 기술시대의 가장 위험한 것을 본다. 즉, 기술은 우리의 힘을 과소평가해서 우리가 더 이상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반해 잘 해내서 이겨냈다는 기쁨, 그리고 결국 다시 건강한 느낌을 갖게 됐다는 기쁨이 있다. 잘 이겨내서 깨어 있고, 그 깨어 있음에 몰두했다는 기쁨은 자연이 우리의 손에 쥐여 준 가장 훌륭한 약품이다.”(「가다머 고통에 대해 말하다」, 공병혜 역, 현문사, 2019, 33쪽) 이 기술시대에 의학계는 우리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없애는 데 주력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그 엄청난 능력을 완전히 발휘해 다시 건강한 느낌을 갖게 되는 기쁨, 곧 ‘자연이 우리의 손에 쥐여 준 가장 훌륭한 약품’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술 지배 패러다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서 우리를 고립시키고 온 세상이 하나의 ‘접촉 지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6항)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가다머에게 고통은 자기가 자기를 살 수 있는 기회다. 고통은 삶을 건강하게 하는, ‘할 수 있다’는 생동감과 자신의 고유한 성취 능력을 다시 경험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엄청난 힘들을 의식화하여 고통을 넘어 성취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동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가다머 고통에 대해 말하다」 40쪽)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7-14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들

얼마 전 지역 내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는, 부적응 청소년을 만났다. 현재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에 관한 공식적인 자료는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은둔형 외톨이가 10만 명에 이른다는 KBS의 보도가 있었으며, 실제 학업중단 청소년의 15% 정도가 은둔형 외톨이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은둔 유경험자 중에서 약 40%가 ‘청소년기’에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는 수치를 통해(광주광역시, 2020) 잠재적인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은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우리 주변에도 일상생활에서 의욕을 잃거나 때로는 사회생활을 단념한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청소년 중에서도 실제 위기 상황처럼 보이지 않았음에도 개인 상담 등을 통해 다양한 어려움(학교 폭력, 따돌림, 보호체계의 이상 및 부재 등)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은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기피 현상을 보이며, 심할 경우 연락이 두절되거나 회피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분명한 이유 없이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타인과 대화도 꺼리며, 인간관계는 점점 줄어들고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은 학업중단이나, 고립을 선택하는 등의 단계까지 이른다. 청소년기가 성인기에 요구되는 다양한 관계훈련을 하는 시기인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세상, 그리고 나를 마주하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이들이다. 그래서 은둔형 외톨이들에 대한 지원이 간절하다. 보건복지부가 고립·은둔 청년 88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실태 조사 내용 중 유의미한 것은 고립·은둔 청년 및 청소년 대다수는 ‘탈고립’ 의사를 뚜렷하게 드러냈으며, 적극적인 탈고립 시도를 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탈고립 시도 이후 다시 고립되는 비율은 45.6%다. 그 이유는 ‘돈과 시간이 부족해서’, ‘힘들고 지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가 가장 많았으며, 탈고립을 시도하지 않은 응답자 중에서는 ‘정보가 없어서’의 이유가 가장 많았다. 청소년기는 아동기 부모와의 의존관계에서 벗어나 보다 동등하고 상호적인 친구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을 배우는 시기다. 특히 다양한 측면에서, 급격하게 많은 변화를 겪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당면하는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청소년기의 또래 관계와 사회적 관계, 경험은 앞으로 건전한 성인으로 성장하여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은둔형 외톨이의 징후를 보이는 청소년을 초기에 발굴 및 개입했을 때 은둔의 장기화를 막고 성공적인 사회 복귀가 가능하지 않을까? 다행인 것은, 최근 정부는 위기 청소년 지원사업의 대상에 은둔형 청소년을 지원하는 내용으로 청소년복지 지원법 시행령을 개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결심을 하고 나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클 것이다. 이와 같은 불안감을 긍정적인 경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안전한 지지체계와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 프로그램은 가장 필요하다. 은둔형 외톨이의 발생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적 원인에 의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은둔 생활을 하는 이들, 은둔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이들을 조기에 발견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과 사회의 의무일 것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 혹시라도 가까이에 있는 은둔 청소년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 되겠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7-07

노년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노년의 모습은 질병과 장애, 노인돌봄과 연관돼 암울하게 느껴지므로 상상을 꺼리게 된다. 세대 갈등과 노인혐오 범죄가 증가한 고령사회 배경의 일본 영화 ‘플랜 75’(2024)에서 정부는 7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안락사 신청을 받는다. 노인들에게 죽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마지막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위로금과 상담까지 제공한다. 가난한 노인들은 건강이 악화되고 노동의 기회가 적고 사는 것이 힘들다며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삶의 질을 언급하며 안락사를 권유했던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비용을 절약하고자 시체 유기 등을 자행한다. 상상에 기초하지만 고령사회에서 있을 법한 공포스러운 상황을 재현했다. 현실 고령사회에서도 죽음과 노인돌봄은 삶과 분리되고 비가시화돼 있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되고 노인들은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지만 가족, 특히 자녀들은 노인돌봄의 일차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건강하게 장수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노인도 많지만, 만성질환에 시달리거나 치매나 와병 상태로 노년을 보내기도 한다. 자율성과 독립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액티브 에이징(Active Ageing)은 더욱 부각되지만, 나이 듦의 흔적을 지우는 노년의 삶은 젊음의 모방이나 연장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미디어에서는 다양한 노년의 삶을 재현한다. ‘꽃보다 할배’ 시리즈는 경험과 연륜을 가진 멋진 노인 남성 배우들이 등장해 젊은이들에게 조언함으로써 노년 역할 모델을 제시했다. 드라마에서 젊은 주인공의 조부모로 나오던 배우들이 영향력과 카리스마 있는 조연·주연을 맡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남성들은 젊은 세대에게 선배로서 좀 더 다양한 노년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반면, 여성들은 할머니, 모성의 전형으로 따뜻하고 푸근한 정서적 측면이 강조되거나 고운 할머니로 한정된 역할 모델을 보여 준다. 이러한 역할 모델은 남성보다 다원적이지 않기에, 여성들이 자신의 노년 역할 모델을 선배 여성들에게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고령사회에서 노인 여성의 역할 모델은 다양하게 제시된다. 나쁜 시어머니나 자상한 친정 엄마 등으로 재현돼 왔지만 노년에도 활동하며 다양한 모습의 할머니, 공적 역할로 재현되는 노인 여성 배우들이 있다. 노인 여성 유튜버 크리에이터들이 인기를 얻고 젊은 여성들과 소통하면서 역할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배우 윤여정은 미국 오스카상 여우조연상이라는 수상의 명예와 함께 노년의 역할 모델로 손꼽힌다. 그는 한동안 주목받지 못한 배우였지만 성실하게 연기를 해왔다. 영어를 잘하고 젊은 감각을 지니고 소통의 기술을 발휘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배우 나문희와 김영옥은 오랜 연기 경력을 기초로 TV와 영화, 연극 등 활발한 연기 활동을 하고 연예·오락 프로그램에도 도전하고 있다. 그들은 할머니 역할을 주로 해 왔지만 획일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위로와 치유, 도전의 아이콘이 된다. 여성의 인물사를 기록하거나 노인 여성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노인 여성의 역할 모델을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2024)는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일하는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 정영선의 삶을 담아낸다. 그는 자신을 자연과의 중개자라 생각하며 삭막한 도시 환경에 치유와 사색의 공간을 구성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생태적 환경을 조성하고자 헌신해 왔다.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2023)에는 젊은 해녀에게 자신의 물질 노하우를 가르치는 노년 해녀 현순직이 등장한다. 노년은 느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도 질병과 장애를 수용하고 노인돌봄, 의료결정, 죽음 등을 준비하는 단계다. 가톨릭신자로서 노년 역할 모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다양한 역할 모델을 통해 노년을 설계한다면 노년은 가지 않은 미지의 길이면서도 즐거운 도전이 될 것이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6-30

존재는 불법일 수 없다

올해 초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2023 인권의식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본인의 인권이 존중된다는 응답이 2019년 이후 증가세에서 처음으로 전년 대비 1.9%p 감소한 86.5%를 기록했다. 사회 전반의 인권이 존중받는다는 응답은 2021년 이래로 계속 감소세를 보이며 71.0%로 나타났고,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인권이 존중되고 있다는 응답 또한 작년 대비 감소한 50.3%에 그쳤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 집단을 세분해 인권이 존중되고 있는지 조사한 결과는 여성 인권이 81.2%로 가장 높았고, 이주민 인권이 36.7%로 가장 낮았다. 특히나 혐오 표현의 대상으로 이주민이 14.9%, 난민이 7.3%를 자치하고 있는데, 난민은 다행스럽게도 작년 대비 3.6%p 감소했지만, 이주민은 작년과 거의 동일한 수치로 나타났다. 여성(31.2%), 장애인(27.6%), 노인(22.2%)에 비하면 이주민과 난민이 혐오 표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주민 인권 존중이 가장 낮게 나타난 조사 결과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관심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혐오 표현은 이주민과 난민이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부당한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이주민과 난민의 피부색, 국적, 외모 등을 가지고 그들을 깎아내리는 식의 표현이 주를 이룬다. 또한 그들에 대한 차별, 심지어는 폭력까지 조장하며 혐오 표현을 쏟아내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 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에서는 2018년부터 ‘혐오의 말을 잠재워라!’(Silence Hate) 프로젝트를 펼치며 교육과 토론을 통해 혐오 표현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해 오던 용어가 차별과 배제를 담기 시작하면서 혐오 표현으로 변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용어가 ‘다문화’다. 다문화 가정은 ‘서로 다른 국적‧인종이나 문화를 지닌 사람들로 이뤄진 가정’을 지칭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국제결혼으로 한정해 결혼이주민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가정을 일컫는 말로 흔히 사용돼 왔다. 하지만 다문화 가정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에도 우리 사회의 이주민 수용 역량이 강화되지 못하다 보니 이 표현이 그들을 차별하고 심지어는 혐오하는 표현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당사자들의 호소이기도 하다. 차별과 배제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용어는 ‘불법체류자’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불법체류는 ‘정식 절차를 밟지 않거나, 기한을 어기면서 다른 나라에 머무르는 일’이다. 합법적 체류 자격을 얻지 못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합법의 반의어인 불법을 사용하는 것이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법체류와 불법체류자는 완전히 다른 맥락을 지닌다. 전자는 체류 자격의 합법, 불법 여부를 가리는 말이지만 후자는 한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불법으로 전락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이런 맥락을 지적하며 지난 2018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용례를 따라 ‘불법체류자’(illegal immigrant)라는 용어를 ‘미등록 이주민’(undocumented immigrant)으로 변경할 것을 권고한 바 있으며, 현재 이주민, 난민 관련 활동가들 역시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과 비슷하게 당신 모습으로 만들어 내셨다고 믿어 고백하며(창세 1,26 참조), 모든 인간 존재가 존엄하다고 선포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눈에 ‘존재는 불법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문 기사와 뉴스 영상에서 불법체류자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이 말을 비롯한 차별과 배제의 혐오 표현을 지양하고 인간 존재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6-23

내가 기후

6월 5일 환경의 날을 지냈는데, 우리는 지구 안에서 지구와 함께 지구를 통해서 산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후 안에서 기후와 함께 기후를 통해 산다. 생태적 진리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흙과 물과 빛과 바람, 지수광풍(地水光風)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우리는 물론 모든 생명체가 생존할 수 없다. 이 지수광풍이 서로 작용해 발생하는 기후는 지구 현상으로서, 우리의 존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기후를 떠나서는, 곧 기후 밖에서는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후가 변하고 기후위기가 발생하고 이상기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변하고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상청이 2024년 4월에 발표한 「2023년 이상기후 보고서」에 의하면, 2023년 장마철에 남부 지방에 내린 강수량이 712.3mm였다. 이 지역에서 내린 연간 강수량을 측정한 이래 가장 많은 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내리기 전에 남부 지방은 2022년부터 227.3일간, 광주·전남 지역은 281.3일간 극심한 가뭄이 발생했다. 남부 지역의 가뭄은 우리나라에서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오래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우리나라 전국 평균기온이 3월에 9.4℃였고, 9월에는 22.6℃였다. 이 기록은 1973년 이후 모두 가장 높은 것이었다. 9월에도 한여름 무더위가 계속돼서 열대야 현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열질환자 2818명이 발생했는데, 2022년 1564명에 비해 환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2월 평균기온은 평년 기준 1.6℃ 높았고, 3~4월 평균기온은 2.4℃ 높았다. 11월에 하루 평균기온이 가장 높았던 날과 가장 낮았던 날의 기온 차는 19.8℃(5일 18.6℃, 30일 -1.2℃), 12월에는 20.6℃(9일 12.4℃, 22일 -8.2℃)로 나타나면서, 1973년 이후 기온 차가 가장 큰 것으로 기록됐다. 기상청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발생하지 않는 극단적인 기온 상태, 곧 ‘이상기후’ 상황이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같은 이상기후 현상은 필연적으로 개화 시기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제로 우리나라 최초로 식물 계절 관측을 시작한 홍릉 시험림 내 66종의 평균 개화 시기가 50년 전(1968~1975년)에 비해 14일, 2017년 대비 8일 빨라졌고, 모감주나무, 가침박달, 회양목 등의 개화 시기는 20일 이상 빨라졌다. 2023년 김장철에 배추 가격이, 올해에는 사과, 배, 귤, 파 등 과일값과 채소값이 급격하게 올랐는데, 이상기후가 그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아마존과 미국과 유럽 등 지구 전역에서 기후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2040년에는 전지구의 60% 이상 지역에서 이같은 열대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기후를 우리 밖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생각한다. 기후변화와 기후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면서 그 방법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기후와 자기를 구분해서 접근하고는 한다. 하지만 창세기 2장 4-7절이 증거하듯, 우리가 신토불이(身土不二)고 그러므로 ‘내가 지구’인 것이 생태 창조 신학적 진리라면, 내가 기후다. 실제로 기후가 다르면 사람의 피부색부터 시작해서 생활 방식도 성격도 사고방식도 다르게 나타나지 않는가. 이웃 나라 도시 중국 베이징은 2023년 여름 51°C에 달하는 초고온 사태를 겪었다. 우리나라에서 51°C까지 올라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지진(地震)은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는 사태라면, 이상기후는 하늘의 균형이 깨져서 하늘과 하늘 아래 모든 생명체들을 덮치는 ‘천진'(天震)과도 같은 파국적 현상이다. 이것은 자기의 존재가 깨져서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데, 우리는 이 이상기후, 이 기후위기가 자기에게 그리고 우리 뒤에 오는 세대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사는가?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6-16

인사합시다

얼마 전 해외 방문 중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아이스크림 상점에 들렀다. 잠시 후 모든 직원들이 일을 멈추고 “어서오십시오, 저희는 손님을 위해 맛있는 아이스크림 제공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세 번을 외치더니 다시 일을 시작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기분이 좋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도 좋아 보였다. 보아하니 2시간마다 전 직원들이 가게를 찾는 손님들을 위한 인사 서비스였다. 지나치듯이 내뱉는 성의 없는 인사가 아닌 진심을 다하는 직원들의 인사 외침 소리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왜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아이스크림을 사려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인사는 모든 순간을 기분 좋게 만드는 특효약인 것이다. 요즈음은, 학교에서도, 지자체에서도, 복지관련 분야에서도 인사 캠페인이 한창이다. 경기도 화성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들과 학생자치회 학생들이 미리 교문에 나와 등교하는 학생들과 하이파이브, 손하트 인사, 주먹 인사 등으로 즐겁게 아이들을 맞이하는 ‘웃으면서 인사해요’ 아침 맞이 캠페인을 하면서 학생들이 즐겁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 동작동 복지시설에서는 지역주민 간 관계를 향상하고 어르신이 살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자 “내가 먼저 인사해요, 안녕하세요!” 캠페인을 진행했다. 경남 남해군에서도 만나는 이들과 소통하고 상호 존중하는 공동체를 위한 준비로 인사 나누기 캠페인을 했다. 이런 캠페인으로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 단 1명이라도 먼저 인사를 건네준다면 지역 사회를 바꾸는 초석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23」에 따르면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은 3년째 제자리걸음이며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주일미사를 참례하던 신자 25%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가톨릭신문 2024년 5월 5일자 참조) 이에 따르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자 비율이 늘지도 않았지만 줄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통계가 암시해 주듯이 예비 신자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면서 이 귀한 분들을 모셔 오기 위해 본당은 애를 쓰고 있다. 얼마 전 서울 도림동본당에서 예비 신자를 모시기 위해 본당 사제와 전 신자들이 가두선교를 위한 준비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사례를 접하면서 새 신자를 모셔 오는데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지금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란 것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교회도 신자들의 노력으로 모셔온 예비 신자들을 맞이하는 준비로 따뜻한 인사 나누기 운동을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부터 먼저 내가 잘 모르는 신자들과 인사 나누기를 실천하고 예비 신자들이 성당에 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는지 생각해 보아야겠다. 친절하고 반갑게 맞이하는가? 따뜻한 인사로 그들을 알아봐 주는가? 어색해하고, 쭈뼛거리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는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사는 서로를 알아봐 주는 첫걸음이다. 따뜻함이 머금은 얼굴로 “안녕하세요! 찬미 예수님” 이 한마디가 사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본당 내 신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여 성당에 가는 발걸음을 신명나게 하고 본당 신자들의 형제자매 이웃의 체감도를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사 전과 후에 내가 아직 모르는 신자들에게 반갑게 인사 나누는 운동을 통해 성당을 웃음이 피어나는 신앙 공동체로 바꾸고 약자들이 편함을 느낄 수 있는, 누구나 환영하고, 모두가 환영받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은 시대의 부름이기 때문이다. 어색한 형제, 자매에게 인사를 나눕시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인사를 잘하면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6-09

친밀한 관계와 폭력

연애에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존중과 배려에 대한 해석은 자의적일 수 있다. ‘사랑싸움’이라는 이름하에 제3자의 개입을 꺼리는 데이트폭력, 이별폭력은 사회적 쟁점이 됐고 그 범죄의 잔인함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리는 충격에 비해 제도적 차원에서 예방과 대책은 충분하지 않다. 몇몇 사람은 피해자들에게 사람 보는 안목이 없거나, 폭력을 당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한 우유부단함을 비난한다. 자신이 비슷한 상황에 있다면 그런 일을 당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장담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폭력 피해를 개인의 탓으로 해석하고 성별 권력이나 구조적,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2023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에 따르면 2021년 여성가족부 산하 상담소에 접수된 데이트폭력 상담은 1만7137건, 스토킹 상담은 5454건에 이른다. 데이트폭력에서 남성 가해자는 2021년 1만975명, 스토킹으로 검거된 남성 가해자는 462명이다. 데이트폭력과 스토킹 피해자 대다수가 여성임을 보여준다. 젠더 폭력은 성별 권력의 불균형한 구조 속 여성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남성의 소유나 정복의 대상으로 해석하는 문화와 연관된다. 데이트폭력의 가해자들은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랑해서 그랬다’고 말한다. 이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를 준다. 이러한 행동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거나 희생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별폭력 피해자들은 이별 이후가 아니라 데이트 과정에서 크고 작은 피해를 경험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족들까지 고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 이별하지 못하거나 안전한 이별의 방법을 고민한다. 이별폭력은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집 앞에서 기다리는 등 스토킹과 맞물려 상대방을 괴롭힌다. 스토킹은 헤어진 연인 사이뿐 아니라 사귀지 않은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또 스토킹이 신체적 폭력을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해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은 불안과 공포를 초래하고 삶을 억압·파괴한다. 스토킹은 벌금형이라는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가해자의 재범을 초래했고 피해자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스토킹범죄처벌법’의 제정으로 징역형 처벌이 가능해졌지만, 데이트폭력으로 고통받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므로 교육과 캠페인을 통한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 로빈 스턴(Robin Stern)은 저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2018)에서 가스라이팅 가해자의 심리를 분석한다. 스턴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은 친밀한 관계에서 정서적으로 상대방을 감시·통제·조종하려는 행위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현실감과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면서 자신에게 의존하게 한다. 연애에서 가스라이팅은 파트너의 옷차림이나 일정을 간섭하고 일을 못 하게 하거나 이메일이나 메신저를 몰래 확인하는 행위다. 또한 피해자가 다른 사람들을 못 만나게 하거나 욕하고 비난한다. 피해자들은 가해자를 의심하지 못하고 낮은 자아존중감과 우울증, 무력감을 경험한다. 그들이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나려면 가해자의 행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별 이후에도 자기 삶이 지속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또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가족, 지인, 경찰, 젠더 폭력 상담소에 도움을 청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인격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연애 윤리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고 상담을 통해 피해자 구조와 치유를 도와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부부,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직장 선후배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몰지각한 소수의 문제가 아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상처받기 쉽다는 인식 위에 상대방의 독립과 자유를 존중할 때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6-02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의정부교구 주교좌성당 한편에는 작은 갤러리가 있다. 이름은 ‘갤러리 평화’. 건물 외벽에는 ‘평화’를 뜻하는 단어들이 여러 나라말로 적혀 있다. 가장 크게 보이는 건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שְׁלָם)와 그리스어(εἰρήνη)다. 이 밖에도 라틴어와 영어, 중국어로 평화를 뜻하는 글자들이 십자가 형상을 이루고 있다. 벽면 자체가 십자가 희생을 통해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가득하길 기원하는 작품인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건넨 일성은 바로 평화였다. 끌려가는 당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간 제자들에게 싸늘한 시선과 원망의 말을 건네도 인간적으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건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하신다. 반면 제자들은 좌불안석이다. 복음사가들은 제자들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했다고 전한다. 스승을 버리고 와서 죄송스럽긴 하지만 스승은 이미 돌아가셨고, 목숨 잘 보전하는 게 능사라고 생각해 문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는데, 그런 제자들 앞에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나타나다니. 꾹꾹 눌러 왔던 죄책감이 온 존재를 뒤흔들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터져나갈 것 같은데, 스승은 온화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 것이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묘한 긴장감은 신앙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이는 성과 속, 영과 육의 대립으로 느껴지는 긴장감이다. 우리 안에 신앙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했을 때, 그러니까 신앙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 일어난다. 먼저 머리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속엔 복음의 가치와 기준보다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치 있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마음속에는 그 가르침을 따라 살다 시쳇말로 ‘호구 잡히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떠나질 않는다. 그리하여 그 안에 뿌려진 신앙의 씨는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라버리기 일쑤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침묵하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마음으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는 있지만 머릿속 계산이 마음을 압도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저 감정에 지나지 않거나 더 심하게는 “나도 예수님 사랑해”라고 하는 일종의 립서비스에 그칠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은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그리스도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고 있는 경우이다. 무엇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는지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주로 권력과 명예, 물질적 부였다. 하지만 요즘 사회에선 물질적 부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하다. 돈만 있으면 저절로 권력이 생기고 명예도 생긴다고들 이야기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안에는 그 어떤 신앙의 씨앗도 그 어떤 그리스도의 가르침도 자리할 공간이 없다.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필요한 것뿐이다. 당대의 주류 세력에게 배척을 받아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가르침과 뜻이 아닌 것은 단호하게 반박하며 이 땅에 하늘나라를 보여주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셨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선포하신 평화는 더 큰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폭력의 부재로서의 평화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평화를 선포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할 일이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5-26

장일순의 ‘일초’ 영성살이를 그리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찬미받으소서」를, 2023년 「하느님을 찬미하여라」를 발표해 기후위기 시대에 새로운 삶과 문명의 전환을 이룰 것을 요청한다. 이 상황에서 주목할 가톨릭 신앙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장일순(요한 세례자)을 들 수 있다. 그는 1928년 원주에서 나서 1994년 5월에 귀천했다. 올해로 그가 하늘나라 시민이 된 지 30년이 된다. 장일순은 1940년 세례를 받았는데, 이 땅의 종교 전통에 열려 있던 그는 ‘걷는 동학’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동학에 정통했다. 특히 해월 최시형의 사상과 생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불교 전통은 물론 유학과 노장사상에도 밝았다. 그런 가운데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 고(故) 지학순(다니엘) 주교와 사회 복음화를 이뤄 갔던 그는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할 만큼 가톨릭 신앙을 깊이 내면화해서, 한국 가톨릭 그리스도인의 존재 지평을 통합 생태적으로 심화시켜 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소중한 책을 쓰셨고, 이 책의 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조물들”이라고 말한다.(「찬미받으소서」 85항) 하느님은 이 책으로 당신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다.(12항) 장일순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一草之中聖父在矣.”(일초지중 성부재의) “풀 한 포기 안에 성부 계시네.” 장일순은 여기서 하느님을 ‘성부’로 표현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Πάτερ: ‘아버지’로 시작하는) 기도에 충실한 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창조된 모든 존재의 ‘공동 원천’(un’origine comune)에 근거해서 풀과 벌레를 ‘형제’ 혹은 ‘누이’로 불렀다.(11항) 교황은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서 ‘우주적 가족’(universal family)(89항)과 ‘우주적 형제애’(universal fraternity)(228항)를 살아 가자고 요청한다.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모든 존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돼 ‘우주의 일부로서’(89항) 그분의 숨으로 사는 인간과 함께, 하느님의 계시체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성전이요 하느님의 가족이다. 한 하느님에게서 와서(공동 원천, 11항) 하느님을 공동 도착점(a common point of arrival, 83항)으로 갖는 모든 존재는 이 ‘공동성’으로 하여 서로 하나로 이어져 있다. 교황은 이것을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89항)고 표현한다. 장일순은 무위당(无爲堂)이라는 호와 함께 ‘일초’(一草)나 ‘일속자’(一粟子), 우리말로 ‘하나의 풀’이나 ‘조한알’이라는 호를 쓰면서, 이같은 존재의 상호성을 선언한 적이 있다. 그런 그가 1984년 봄에 자신을 ‘치악산 사람’으로 지칭하며 화폭 아래 왼쪽에 난들을 그리고 위쪽 공간에 글을 쓴 한 서화에서 이 ‘서로 이어져 있음’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달이 나이고 해가 나이거늘 분명 그대는 나일세.” 원주교구 태장1동성당에 모셔져 있는 성모님은 왼손으로 지구를 들고 계신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성모님 안에서 모두 하나의 지구 위에서 하나로 이어진 존재로 사는 것인데, 이것은 ‘너는 이어진 나’이고, ‘나는 이어진 너’라는 것을 말한다. 장일순은 이 통합생태적 진리를 30년도 더 전에 저렇게 아름답고 따뜻하게, 그러면서도 강력하게 교회와 사회에 선물했다. 이 기후위기 시대에 그의 ‘일초’ 영성과 ‘그대는 나일세’ 영성이 우리 교회와 사회에서 생태적으로 좀 더 깊게 내면화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글 _ 황종열(레오) 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5-19

발달장애인에게 ‘스스로 결정’하는 삶 주려면

“선생님 제가 직접 하고 싶어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들, 누군가가 준비해 주고 또 누군가가 계획한 것을 따라서 해야 하는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길이 험하고 멀게만 보이는 이들. 바로 발달장애인들이다. 성인이 되면 일상의 매 순간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고 그 결과가 어떠하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 발달장애 청소년들도 성인이 되면 당연히 자유롭게 자기결정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다. 오히려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자신이 자녀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자녀보다 하루만 더…”에는 간절함이 깃들어 있고, 자녀에 대해 애틋함이 묻어있다. 장애인 복지를 위한 시설과 활동 보조 서비스가 있기는 하지만 부모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해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장애를 가진 자식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성인이 된 장애인들은 갈 곳이 별로 없기에 부모들은 자신들이 죽고 난 후에 자녀들이 어떻게 될까에 대한 걱정을 늘 안고 살아간다. 이미 사회적으로 이 이슈는 공론화됐지만 아직 뚜렷한 결과는 없다. 갈 곳은 없는데 가야 할 사람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순간을 위해 여전히 대기 중이다. 성인이 된 이들이 스스로 자기결정을 할 수 있도록 반복적 훈련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공간과 제공되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다. 다행히 비록 적은 인원이기는 하지만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복지관이 있다. 바로 성인 전환기 발달장애청소년 자기결정능력 향상을 위한 ‘혼자 다녀오겠습니다!’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이 프로그램의 목표는 참가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그래서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을 마주하는데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 시작은 스스로 계획하는 것은 물론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누군가 자신을 위해 선택해 주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이제는 그것이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임을 느리지만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젠 혼자서도 버스를 타고, 은행도 다녀오고, 좋아하는 햄버거와 음료를 주문하고 결제도 한다. 지하철을 타고 가보고 싶은 곳을 다녀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를 위한 맛있는 과자도 산다. 친구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양보하는 것도 배웠다. 무엇을 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며 조금씩 재미있는 삶의 맛을 느낀다. “선택할 필요 없이 다 알아서 해 준다는 것이 어찌 보면 매력적이고 편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되면 결국 저희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쉽게 포기해 버리고 무기력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책임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참지 못하면 지금까지 겪었던 그대로 변하지 않은 행동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발달장애인 자기주장대회 구례군장애인복지관 류종호씨 발표 中) 이제 당사자들은 누군가가 선택해 주는 삶이 아닌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 한다. 다양성 안에서 삶의 형태를 선택하여 주체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더 관심을 가지고 준비해야겠다. 따라서 교회도 지역사회도 이들이 자기결정권의 경험치를 늘려 갈 수 있는 공간의 역할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부모님들의 이유 있는 외출을 허락하고 어울려서 아름다운 우리가 되는 다가오는 미래를 꿈꾼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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