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년 1인 가구

요즘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가고 있는 가구의 형태가 있다. 새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어느덧 우리 사회 환경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1인 가구이다. 기업들도 이 가구들을 의식한 듯 생산설비와 포장라인을 재정비하여 상품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주거, 음식, 문화 공간들도 다양한 형태로 1인 가구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게 합류하고 있다. 1인 가구로 살아가는데 적절한 또는 충분한 사회적 요건을 갖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만족을 느끼며 생을 즐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중장년 1인 가구가 우리 주변에서 흔치 않게 서성이고 있다. 그리고 중장년 1인 가구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1차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2023~2027)에는 고독사 위험군이 19~29세 9.7%, 30대 16.6%, 40대 25.8%, 50대 33.9%, 60대 30.2%, 70대 이상 16.2%로 나타났다. 살펴보면 모든 연령에서 고독사 위험군이 있지만 그중에 40~60대에서 가장 높다. 바로 중장년 1인 가구이다. 이들은 사회구조에 따른 개인의 고립 및 단절 심화, 전통적 가족 돌봄 기능의 지속적 약화, 또는 점점 약화되고 있는 사회관계망 속에서 우울할 때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고 몸이 아플 때 연락할 사람이 없고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빌려줄 사람이 주변에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어려운 이들은 결국 고독사를 맞는다. 국내 고독사는 2019년 2656명에서 2022년 4842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사회적 고립, 고독사 예방을 위해 1인 가구 어려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그러나 지자체 조례를 찾아보면, 간혹 1인 가구의 사회적 고립 및 고독사 예방과 지원에 관련 조례가 제정돼 있기는 하지만 이를 위한 사업이나 서비스는 아직 부족하거나 부재한 상황이다. 이들을 위해 우선 제공되어야 할 서비스로는 생활방식을 개선할 수 있는 지원, 고독사 위험군 대상자 발굴 및 안부 확인 시스템 구축, 외출을 유도할 수 있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현물지원 그리고 사회적 고립 예방을 위한 사회 관계망과 일상회복을 위한 지역사회 대응체계 구축이다. 현재 돌봄서비스를 확산시키고 있는 보건복지부 사업안에 중장년 1인 가구의 돌봄을 위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고립가구 및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복지사업 개발 및 서비스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들을 향한 사회적 관심이 요청되고 있는 지금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점검해야 하는 움직임이 더 크게 실천돼야 하겠다. 혹시 우리 본당, 우리 구역에도 보이지 않는 신자 또는 방문을 거부하거나 꺼리는 신자가 있는지 살펴보자.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노후 다세대 주택가가 있거나 문 앞에 도시가스 체납 안내문이 붙어있는 가구들이 있다면 관심 있게 살펴보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한 이들을 발굴하는 첫걸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의 특성상 한 번의 방문으로, 한 번의 전화로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안부로 첫 외출을 시도해 보자. 그래서 우리의 형제자매, 우리의 이웃이 외롭게 혼자 지내다가 홀로 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하자. 중장년 1인 가구 형제자매들이 시원하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발길을 내밀 수 있도록 우리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가족과의 관계 단절, 주변을 회피하는 이들이 집 밖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아진 만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의 복지관과 지자체와 연대하는 협력이 필요하다. 더 늦어지기 전에 최소한의 안부 전화로 식사, 수면, 운동, 외출,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지역사회 서비스체계를 통해 사회적 고립예방 및 이웃 돌봄을 시작해 보자.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9-08

올림픽과 여성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사람들에게 올림픽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기간이 된다. 올림픽 기간 공영방송에서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지 않고 뉴스도 올림픽이 중심이 된다. 올림픽은 공정하게 경쟁하며 우정을 나누는,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지구적 축제다. 그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메달을 못 딴 선수가 비판받고 은·동메달을 딴 선수들이 분해서 슬퍼할 때 올림픽의 정신과 의미를 회의하게 된다. 최선을 다했지만 메달을 못 딴 선수들, 이번 올림픽에서 은퇴하는 선수들, 승자에게 축하를 보냈던 선수들에게 위로와 지지를 보내며 이 글을 시작한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문화, 패션, 예술, 자유의 도시 파리의 특성을 살린 한편 성소수자와 디오니소스의 재현에서 가톨릭 교리와 외설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럼에도 성평등, 다양성, 자유를 지향하며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 유서 깊은 프랑스 문화를 표현했다는 평가도 있다. 개막식에서는 여성 성악가들의 노래를 배경으로 프랑스 역사를 빛낸 10명의 여성이 금빛 동상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페미니스트이자 자기 인식을 하고 세상을 변화시킨 여성들로 시민권 운동가, 작가, 식물학자, 철학자, 최초의 올림픽 여성선수 등으로 활약했다. 그중에는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도 있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녀는 여성이 생물학을 운명으로 알고 어머니, 아내 역할에 구속되고 노동, 사회 참여 등 공적 활동을 못 하는 구조에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 ‘젠더’는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단어, 침묵해야 할 쟁점이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면 사회적 관계와 노동시장에서 낙인을 초래한다.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는 아직 산적해 있다. 프랑스는 한국만큼 성평등한 사회지만 페미니즘이나 젠더를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역사 속 페미니스트들을 존중하며 올림픽에서 성평등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최초의 올림픽인 1896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성들은 경기에 참가하지 못했다. 올림픽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 1863~1937)은 스포츠를 여성성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겼다. 운동은 남성의 영역이었고, 강하고 공격적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남성성으로 해석됐다. 여성들은 올림픽 시상식에서 월계관을 씌우는 도우미 역할을 했다. 시상식에서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들은 의상 때문에 종종 성적 대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남성 도우미가 등장한 건 2012년 런던 올림픽부터였고, 올해 파리 올림픽 시상식에서 여성도 바지 유니폼을 입게 됐다. 파리 올림픽 중계에서 전 세계 방송국은 지침을 정해 성평등한 보도에 노력했다. 여성 선수들의 몸을 대상화하지 않도록 촬영하고 외모보다 능력에 초점을 두고자 했다. 하지만 성차별적 관행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여성 비치발리볼 유니폼은 성적 대상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영국의 해설위원은 메달을 딴 여성 선수에게 “설거지와 요리를 잘하는 대장”, “여성은 화장하고 놀러다니는 걸 좋아한다”고 말해 비판받았다. 한국 방송도 예외는 아니다. 여성 양궁 선수에게 훈련으로 인한 턱의 상처에 피부과 시술을 할 것인지 묻거나, 여성 사격 선수에게 어머니의 위치를 강조한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남성 선수에게는 아버지의 위치를 강조하거나, 변형된 신체 부위에 대해 시술 여부를 묻지 않았다. 여성이 신체적으로 약해 운동을 못 한다거나 보호받아야 한다는 성역할 고정관념은 변화하고 있다. 세계 여성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기록을 갱신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그럼에도 대중의 시선, 중계방송을 비롯한 미디어의 성인지 감수성은 아직 부족하고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9-01

이주노동자와 고용허가제

일차리튬전지업체 아리셀에서 중대재해 화재 참사가 일어난 지도 어느새 두 달이 다 되어 간다. 하지만 추모행동이 열렸던 7월 초를 끝으로 뉴스와 방송에선 참사 관련 소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사실 아리셀 참사는 우리 사회, 특히 경제, 노동 분야가 품고 있는 부조리의 종합세트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복잡한 층위를 갖는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이후에도 법의 사각지대를 악용하는 사측의 문제, 이주노동자가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고용되는 노측의 문제,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고용허가제까지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꼬리를 물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공식적으로 이주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외국인산업연수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이 제도가 이주노동자를 산업 ‘연수생’ 취급하며 싼값에 부려먹는 모양새로 변질되면서 1995년부터 고용허가제 도입 논의가 시작됐다. 2003년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외국인산업연수제도는 시행 13년 만인 2006년 종료됐다. 고용허가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래 외국인근로법은 여러 차례 개정됐는데, 현재 기준으로 E-9(비전문취업) 비자를 받고 입국한 이주노동자는 한 번에 기본 3년+연장 1년 10개월로 최대 4년 10개월까지 노동이 가능하며, 재신청하면 다시 4년 10개월 동안 노동할 수 있다. 최대 10년 동안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된다고 하니 언뜻 보면 굉장히 괜찮은 제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고용허가제에는 아주 큰 흠 하나가 있다. 애초에 이 제도가 이주노동자를 정당한 노동자로 대우해 기존 산업연수제도의 문제를 최소화하되, 이주노동자의 한국 정주는 막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가족 동반 비자를 주지 않고, 1차로 허가받은 4년 10개월 동안 이주노동자가 본국을 방문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2차 허가를 받기 위해 본국으로 출국해 비자를 기다리는 기간이 다음 4년 10개월까지 포함 10년의 노동 기간 중에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것이다. 더불어 이직 가능 횟수도 그나마 고용주의 ‘허가’가 있는 경우에 3회로 제한돼 있고, 고용주로부터 여권을 압수당하거나 임금체불, 성범죄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그렇다 보니 정서적 외로움과 정신적 우울증 등 고통을 겪는 이주노동자들도 많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고용허가 기간 중에 가족들을 한국으로 불러 함께 지내다 고용허가 기간이 만료함과 동시에 미등록 이주민으로 한국에 남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가족들은 주로 관광 비자로 입국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다. 고용허가제가 구조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점과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원하는 노동시장의 수요가 미등록체류라는 선택의 여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제도 개선은 뒤로 한 채 고용허가제 대상업종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동계에서는 정부가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일자리 환경을 개선하지는 않고 빈 일자리를 채우기에만 급급하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한겨레 7월 19일자 보도에 따르면 허용 업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사업주 간담회만 진행했을 뿐 이주노동자 당사자에 대한 실태조사는 전혀 없었다. 노동자는 논의 과정에서 배제돼 규모가 작은 사업장일수록 노동자 안전이 위험한데, 이에 대한 대책 없이 고용허가제 사업장 기준이 완화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산재에 더 노출될 수 있어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주노동자는 ‘노동력’으로 단순 치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와 똑같은 동료 인간이며 이웃이다. 그들이 우리의 이웃으로 사회 안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8-25

고통을 통한 고통에 대한 이해

고통은 자기를 살 기회라고 본 가다머의 관점을 소개했는데, 방주의 창에서 본 오늘 우리 사회는 일정하게 고통을 적대시하는 면이 있다. 그러면 한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고통은 무엇인가? 4월 4일 오후 3시경이었다. 전날 오후와 이날 오전에 전주가톨릭사회복지회 ‘무지개가족’에서 강연을 마치고 광주대교구 생태환경위원회에서 여는 생태영성학교 프로그램을 위해 전주터미널에 도착했다. 비가 내려서 조심해서 걸었지만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져서 왼쪽 무릎에 심한 충격이 왔다. 한순간 숨이 흐트러지면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태어난 후 6개월쯤 지났을 때 소아마비가 와서 왼쪽 손으로 스틱을 짚고 다녔는데, 균형이 흐트러지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통증이 심해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다가와서 도와주려 했다. “119를 불러 줄까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시라고 하고는 먼저 무릎 상태를 확인했다. 뼈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병원이 아니라 광주로 가려 했으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행히 60대 후반쯤 돼 보이는 한 남자분의 도움으로 광주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는 좌석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 자기가 메고 온 나의 가방까지 친절하게 챙겨 주고는 내려가셨다. 광주터미널에 도착한 후 가까스로 버스에서 내렸으나 걷지 못하고 서 있는 나를 보고 버스를 운전한 기사가 다가와서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으셨다. 감사로 가득 차서 그의 손을 잡고 택시승강장까지 갔다. 그는 내가 택시를 잘 탈 수 있게 도와주고 자기가 짊어졌던 가방을 넘겨주고는 터미널로 가셨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연락했더니, 평생교육원에 도착했을 때, 조규주(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선생님이 휠체어를 갖고 나와서 기다려 주셨다. 전주터미널에서 따뜻하게 염려해 준 사람들의 사랑 앞에서, 특히 손을 잡아 준 분의 도움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면서, 고통 속에서도 무척 감사했다. 왼쪽 무릎에 통증이 느껴지는 중에도 사는 것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사는 것이 선물이라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으면서 감사로 가득 찼다. 가다머는 고통을 이겨냈을 때의 기쁨이 자연이 선물하는 최고 명약이라 했다. 나에게 고통은 무엇보다도 감사를 체험하게 하고, 사는 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계시해 주었다. 그것은 내가 의식하든 않든 인정하든 않든 내가 다른 존재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과 그들이 바닥이 돼 주지 않는 한 내가 존립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사는 것이 선물인 것을 계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이웃의 사랑과 자연 만물을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선물받고 또 그 사랑을 사랑으로 체험하는 은총의 ‘통로’다. 인간은 하나의 바닥 위에서 다른 존재들과 이어져 있다. 다른 존재들이 바닥이 돼 주지 않는 한 누구도 자기로 살거나 존재할 수 없다. 흙, 물, 빛, 바람 같은 물리적 실재든 사람이든 너 없이 나 없다. 고통 속에서 고통을 통해 계시받고 확인받은 단순하고 아름다운 신학적, 영성적 진리다. 이때 넘어져서 겪는 고통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나로 존재하게 하는 지수광풍(地水光風)과 이웃들에 대한 감사를 체험하게 하고 그 감사를 발현시킬 기회이기도 하다. 삶은 고해(苦海)이기 전에 은해(恩海)다. 전주터미널에서 넘어진 이 일을 계기로 한 생각이 올라왔다. ‘내가 태어나서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사는 것이 선물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였구나.’ 하느님 안에서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선물이다. 그분 안에서 그분의 존재들과 더불어 그분의 자녀로 존재하고 숨 쉬고 산다는 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일이다. 나에게 자기의 존재와 사랑을 내어주는 뭇 존재들과 생명들과 사람들에 대한 감사로 내가 그분 앞에서 숨 쉬는 이 여정이 내가 만나는 존재들에게, 할 수 있는 한 기쁘고 온유한, 하느님의 한 작은 선물일 수 있기를 바란다.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8-18

태국에서 만난 라오인

강렬한 뙤약볕 아래서 체감 온도 39℃를 웃도는 더위에도 온몸을 감싸고 잔디를 심고, 판매를 위한 잔디를 캐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루를 뜨거운 오븐 속에서 사는 것 같은 무리함을 감내하는 이들은 라오스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 이웃 나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라오인들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본국에 있을 때보다는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필자도 모자, 팔토시, 긴바지로 햇빛을 차단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다음, 쭈그리고 앉아서 그들과 잔디를 심는 작업을 해봤다. 단 1분도 지나지 않아서 거친 땀이 온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땀을 닦아내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물속에 잠겨 있는 듯한 느낌으로 견디기 어려워 바로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더위와 싸우며 일하는 이들의 작업환경은 그야말로 가장 형편없는 상황이다. 깊숙한 마을에 넓게 펼쳐진 일명 ‘잔디밭’이라 불리는 이곳은 개인 차량이 없으면 오가는 길이 거의 불가능한 장소이다. 그래서 사업자는 잔디밭 옆 수로 위에 양철지붕과 양철 패널로 빙빙 돌린 공간을 만들어 숙소로 제공해 줬다. 사실상 햇빛으로 달궈진 양철 한증막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이들은 살 수 있는 집이 있으니 감사하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상황은 이곳에서 아이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교육, 위생, 음식, 자연 생리 현상 처리 등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그런 열악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아이들은 낯선 사람을 만나도 인사하고 웃으며 손 흔들어 주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태국의 1딸랑와는 4㎡이고 이는 1.21평 정도 된다. 1딸랑와에 잔디를 심으면 20바트(한화 약 755원)을 받는다.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잔디를 심은 딸랑와 수만큼 임금을 받는다. 그래서 새벽 햇빛이 달궈지기 훨씬 전부터 부부가 하루 종일 잔디를 심거나, 캐는 작업을 한다. 그래도 겨우 400바트(한화 약 1만5100원)을 받는다. 이렇게 벌어들인 턱없이 부족한 수입으로 5인 가족이 살아간다. 아이들은 어디에서 교육받는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아직 가난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살고 있는 이 아이들의 교육은 누가 보장해 줄 것인가? 다행히 어려운 환경이지만 부모는 작은 희망을 자녀들에게 주고자 이른 아침에 앉으면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오토바이로(유일한 교통수단) 인근 학교에 아이들을 데려다준다. 아이들은 언어를 배우고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동시에 배우며 꿈을 계획하고 있다. 방과 후 아이들은 햇빛에 익어진 빨간 볼과 땀 범벅된 얼굴로 먼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 길을 걷고 또 걷게 하는 이유는 교육을 받으면 아이들의 꿈을 이뤄 줄 수 있겠다는 희망의 끈을 단단히 동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었다, “꿈을 이루면 원래 살던 나라로 돌아가겠는가?” 대답 대신 머리를 저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사회주의국가 라오스는 국가 지도자가 국가의 발전을 위해 혁신과 개혁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기업을 유치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는 젊은 일꾼들을 이웃 나라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경제활동을 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기에는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타국에서 떠도는 그들이 경제적 활력을 잃은 나의 나라로 돌아갈 꿈을 꾸지 않는 것이다.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는 미래를 향한 젊은이들의 꿈마저 송두리째 삼켜버리는 것은 아닌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책무를 성실히 이행하길 바라는 소박한 기대를 채우고 싶다.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어보자.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8-11

연령과 사랑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커플이 늘어나고 연상연하 커플도 늘어나는 추세다. 또한 이들의 나이 차는 열 살을 넘어 스무 살 이상인 경우도 있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하고 있고 나이로 인한 현실의 장벽은 낮아진다. 두 사람이 사랑을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다면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대상이 아동, 청소년, 성인과의 사랑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남성 중심 성문화에서 나이 어린 여성들은 가치 있고 예쁘다고 해석되거나, 좀 더 어린 여성들과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남성들은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유엔에서는 여성차별철폐조약에 따라 가입국의 경우 아동결혼을 금지하고 있지만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전히 조혼이 관습으로 남아 있다. 부모들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여아들을 중년 또는 노년의 남성과 결혼시킨다. 여아들의 인권유린적 현실과 더불어 부모들의 태도는 공분을 자아낸다. 하지만 딸을 학교에 보내지도 못하고 여성에게 정숙함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성규범과 함께 가난 속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실을 개인의 무지라고만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아들은 신체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원하지 않은 결혼을 하고 임신, 출산을 하면서 건강이 악화하거나 사망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의 결혼생활은 존중받지 못하고 경제적, 연령의 우위에 있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불평등한 관계에서 상처받기 쉽다. 영화 ‘프리실라’(소피아 코폴라 감독, 2024)는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와 아내이자 유일한 사랑이라는 프리실라와의 관계를 다뤘다. 이 영화는 극 영화이지만 그녀의 자전적 에세이를 참조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프리실라는 중학생 때에 팬으로서 엘비스를 만났다. 그녀의 첫사랑은 결혼으로 맺어졌지만 이들의 관계는 낭만적이지 못하다. 친구들이 학업에 몰두하고 꿈을 갖고 친구들과 학창시절을 보낼 때, 그녀는 우상이었던 엘비스의 구애를 받았고 그를 사랑한다고 믿고 결혼한다. 하지만 결혼 이후 그녀는 남편의 외도와 폭력, 거짓말로 상처받고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곁을 떠난다. 이러한 선택이 쉽지 않은 것은 그녀의 사랑이 그루밍 성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자신에게 의존하게 하면서 길들이고 무력화시키고 지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폭력은 존경과 신뢰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즉, 연령, 경제적, 지적으로 취약한 아동, 청소년과 심리적 유대를 형성한 후 성적 가해를 하기 때문에 피해자가 이를 폭력으로 인지하기는커녕 벗어나기도 어렵다. 그루밍 성폭력은 교사와 학생, 성직자와 신자,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디지털 공간에서 성인 남성과 아동, 여성 청소년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성폭력은 오프라인으로 연동되며 심각한 피해를 낳고 있다. 여성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은 성인 남성과의 관계를 사랑으로 해석하면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어린 여성들을 선호하고 이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는 여성 청소년의 성적 피해와 고통을 간과해 왔다. N번방 사건 이후 여성 청소년의 위치를 고려해 만 13세 이상 16세 미만 청소년과 성인의 성관계를 처벌하는 규정이 마련됐다.(‘청소년성보호법’ 8조 2항 참조) 그러나 남성 중심 성문화에서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여성 청소년이 성폭력에 취약한 구조를 인식하고 이들의 고통과 피해를 예방,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들의 인권이 우선시돼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법적 처벌을 넘어서서 여성 청소년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고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거래하는 남성 중심 성문화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요구된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7-28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교회가 요한 세례자 성인의 탄생을 축하하던 지난 6월 24일, 경기도 화성시 한 공장에서는 참담한 죽음이 발생했다. 일차 리튬 전지 업체인 아리셀에서 이주노동자 18명을 포함 23명이 사망하는 중대재해 화재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직원이 아닌 인력 파견 업체 소속이었기에 제대로 된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위험한 유해물질을 다루는 공장이고 이번 참사 며칠 전에도 화재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안전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인 17명, 한국인 5명, 라오스인 1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화재 사고 열흘 뒤인 지난 7월 2일 오후 7시,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행동이 열렸다. 추모행동 소식을 듣고 교구 이주민, 난민 활동가들과 함께 그 행사에 함께하기로 했다. 행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현수막 속 글귀였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는 안전하게 일하고 싶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는 그말이 마음에 박혔다. 그들 모두 좀 더 나은 여건에서 가족들과 함께 할 날만을 위해 낯선 이곳에 온 것인데, 누군가의 무성의와 부주의와 안일함 때문에 이제는 영영 가족과 함께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 경위나 책임 소재를 밝히는 일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참사 전에 일어났던 화재 때 제대로 된 안전 대책만 마련했다면, 아니, 노동자들에게 비상 탈출구 위치 및 탈출 방법 교육만 제대로 했더라면 스무 명이 넘는 귀한 생명이 사라지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뒤늦은 후회로 마음을 채울 뿐이었다. 이런 유의 비극이 처음은 아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 김군 사망사고(2016년), 태안화력발전소 김용균씨 사망사고(2018년), 평택항 이선호씨 사망사고(2021년) 등 몇 년마다 비극이 반복돼 일어나고 있다. 특히 김용균씨 사고를 계기로, 과도한 하청 및 재하청으로 제대로 된 교육이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성하는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죽음의 외주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결국 ‘김용균 법’으로도 불리는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법을 적용한 첫 판결 결과가 집행유예로 나오면서 실효성 논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현 정권에서는 이 법이 기업의 사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개정할 뜻을 비추기도 하는 등,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번 참사는 이제 죽음이 외주화를 넘어 ‘이주화’되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중국 국적 희생자 17명 중 대다수는 흔히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동포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재외동포 신분이기에 엄밀히 말해 이주민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대한민국이 아닌 국가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적자들이 기피하는 업종에 외주 인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상황이 타 국적의 이주민들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외려 언어 장벽이 없기 때문에 소위 ‘가성비 좋은 이주노동자’로 취급되고 있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전체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는 총 812명이며, 그중 이주노동자는 85명으로 10.4%에 달했다. 올해 1분기 기준 이주노동자의 산재 사망자 비율은 11.2%(213명 중 24명)로 벌써 지난해 비율을 넘어섰다. 지난해 이주노동자 수가 총 92만3000명으로 전체 취업자 수(2841만6000명)의 3.2%를 넘겨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통계청의 발표를 고려할 때, 이런 유의 참사가 반복될 경우 희생되는 이주민의 수는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죽으러 오지 않았다!”는 그들의 외침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

2024-07-21

고통이 무엇이지?

한 수도자는 몸의 이상으로 몇 년째 요양 중이고, 한 사제는 치통을 심하게 앓고 있다. 한 자매는 석화된 쓸개 제거 후 회복기에 있고, 한 형제는 척추가 휘어서 치료 중이다. 이들을 동반하는 의사들은 의과대학 정원과 관련해 정부와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는데,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한스 가다머는 1900년에 독일에서 나서 2002년에 죽은 철학자다. 그는 100세 때 하이델베르크 의대에서 ‘고통’을 주제로 발표했다. 가다머는 4살 때 여읜 어머니 요한나의 예술적 열정과 종교적 연대를 물려받았는데, 화학자이자 약학자였던 그의 부친 요한네스 가다머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61세에 폐암으로 죽기 직전, 22세 어린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고 하이데거를 스승으로 택해 교수자격 과정에 있던 아들을 염려했다. 그는 자기가 입원한 병원으로 하이데거를 오게 해서 물었다. “그 애가 이런 공부를 해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이데거는 답했다. “당신의 아들은 매우 탁월하며··· 그는 벌써 교수자격 과정에 들어가기 위한 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철학이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지 않은 그의 부친은 하이데거가 떠나기 직전에 다시 물었다. “당신은 진실로 철학이 삶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충분하다고 믿습니까?” 하지만 가다머는 그의 부친이 택한 자연과학 세계와는 다른 철학계에서 예술적 감수성을 통합해 열어 간 해석학의 대가로서 수많은 사람에게 삶의 지혜와 충만을 매개했다. 1960년에 낸 「진리와 방법」은 존재 기반 해석학의 지평을 연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가다머가 100세에 이르러 신체적 ‘고통’과 관련해 의학자들 앞에서 말했다. “고통은 내게 나타나서 나를 덮치는 그러한 감정으로 우선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항상 이겨내야 하는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그 어떤 것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마침내 우리에게 부과된 그 어떤 것을 해결하기 위한 아마도 아주 대단한 기회다. 인생의 가장 고유한 차원은 자신이 극복하지 못한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예감될 수 있다.” 이어서 그는 현대 의학이 주기 어려운, 고통 과정이 주는 명약에 관해 말한다. “여기서 또한 나는 기술시대의 가장 위험한 것을 본다. 즉, 기술은 우리의 힘을 과소평가해서 우리가 더 이상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반해 잘 해내서 이겨냈다는 기쁨, 그리고 결국 다시 건강한 느낌을 갖게 됐다는 기쁨이 있다. 잘 이겨내서 깨어 있고, 그 깨어 있음에 몰두했다는 기쁨은 자연이 우리의 손에 쥐여 준 가장 훌륭한 약품이다.”(「가다머 고통에 대해 말하다」, 공병혜 역, 현문사, 2019, 33쪽) 이 기술시대에 의학계는 우리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고통을 경감시키거나 없애는 데 주력하는 면이 있다. 이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그 엄청난 능력을 완전히 발휘해 다시 건강한 느낌을 갖게 되는 기쁨, 곧 ‘자연이 우리의 손에 쥐여 준 가장 훌륭한 약품’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술 지배 패러다임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서 우리를 고립시키고 온 세상이 하나의 ‘접촉 지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한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6항)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가다머에게 고통은 자기가 자기를 살 수 있는 기회다. 고통은 삶을 건강하게 하는, ‘할 수 있다’는 생동감과 자신의 고유한 성취 능력을 다시 경험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엄청난 힘들을 의식화하여 고통을 넘어 성취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동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가다머 고통에 대해 말하다」 40쪽)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2024-07-14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들

얼마 전 지역 내 은둔형 외톨이라 불리는, 부적응 청소년을 만났다. 현재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에 관한 공식적인 자료는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은둔형 외톨이가 10만 명에 이른다는 KBS의 보도가 있었으며, 실제 학업중단 청소년의 15% 정도가 은둔형 외톨이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은둔 유경험자 중에서 약 40%가 ‘청소년기’에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는 수치를 통해(광주광역시, 2020) 잠재적인 은둔형 외톨이 청소년은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우리 주변에도 일상생활에서 의욕을 잃거나 때로는 사회생활을 단념한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청소년 중에서도 실제 위기 상황처럼 보이지 않았음에도 개인 상담 등을 통해 다양한 어려움(학교 폭력, 따돌림, 보호체계의 이상 및 부재 등)을 겪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은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기피 현상을 보이며, 심할 경우 연락이 두절되거나 회피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들은 분명한 이유 없이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타인과 대화도 꺼리며, 인간관계는 점점 줄어들고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은 학업중단이나, 고립을 선택하는 등의 단계까지 이른다. 청소년기가 성인기에 요구되는 다양한 관계훈련을 하는 시기인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세상, 그리고 나를 마주하기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이들이다. 그래서 은둔형 외톨이들에 대한 지원이 간절하다. 보건복지부가 고립·은둔 청년 88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실태 조사 내용 중 유의미한 것은 고립·은둔 청년 및 청소년 대다수는 ‘탈고립’ 의사를 뚜렷하게 드러냈으며, 적극적인 탈고립 시도를 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탈고립 시도 이후 다시 고립되는 비율은 45.6%다. 그 이유는 ‘돈과 시간이 부족해서’, ‘힘들고 지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가 가장 많았으며, 탈고립을 시도하지 않은 응답자 중에서는 ‘정보가 없어서’의 이유가 가장 많았다. 청소년기는 아동기 부모와의 의존관계에서 벗어나 보다 동등하고 상호적인 친구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을 배우는 시기다. 특히 다양한 측면에서, 급격하게 많은 변화를 겪으며 성장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당면하는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청소년기의 또래 관계와 사회적 관계, 경험은 앞으로 건전한 성인으로 성장하여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은둔형 외톨이의 징후를 보이는 청소년을 초기에 발굴 및 개입했을 때 은둔의 장기화를 막고 성공적인 사회 복귀가 가능하지 않을까? 다행인 것은, 최근 정부는 위기 청소년 지원사업의 대상에 은둔형 청소년을 지원하는 내용으로 청소년복지 지원법 시행령을 개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결심을 하고 나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클 것이다. 이와 같은 불안감을 긍정적인 경험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안전한 지지체계와 즐겁고 의미 있는 경험 프로그램은 가장 필요하다. 은둔형 외톨이의 발생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기 어려운 사회적, 환경적 원인에 의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은둔 생활을 하는 이들, 은둔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한 이들을 조기에 발견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과 사회의 의무일 것이다. 우리 주위를 살펴 혹시라도 가까이에 있는 은둔 청소년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 되겠다.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7-07

노년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노년의 모습은 질병과 장애, 노인돌봄과 연관돼 암울하게 느껴지므로 상상을 꺼리게 된다. 세대 갈등과 노인혐오 범죄가 증가한 고령사회 배경의 일본 영화 ‘플랜 75’(2024)에서 정부는 7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안락사 신청을 받는다. 노인들에게 죽음을 정리할 시간을 주고 마지막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위로금과 상담까지 제공한다. 가난한 노인들은 건강이 악화되고 노동의 기회가 적고 사는 것이 힘들다며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삶의 질을 언급하며 안락사를 권유했던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비용을 절약하고자 시체 유기 등을 자행한다. 상상에 기초하지만 고령사회에서 있을 법한 공포스러운 상황을 재현했다. 현실 고령사회에서도 죽음과 노인돌봄은 삶과 분리되고 비가시화돼 있다. 한국 사회에서 노인요양보험제도가 실시되고 노인들은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지만 가족, 특히 자녀들은 노인돌봄의 일차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건강하게 장수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노인도 많지만, 만성질환에 시달리거나 치매나 와병 상태로 노년을 보내기도 한다. 자율성과 독립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액티브 에이징(Active Ageing)은 더욱 부각되지만, 나이 듦의 흔적을 지우는 노년의 삶은 젊음의 모방이나 연장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미디어에서는 다양한 노년의 삶을 재현한다. ‘꽃보다 할배’ 시리즈는 경험과 연륜을 가진 멋진 노인 남성 배우들이 등장해 젊은이들에게 조언함으로써 노년 역할 모델을 제시했다. 드라마에서 젊은 주인공의 조부모로 나오던 배우들이 영향력과 카리스마 있는 조연·주연을 맡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남성들은 젊은 세대에게 선배로서 좀 더 다양한 노년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반면, 여성들은 할머니, 모성의 전형으로 따뜻하고 푸근한 정서적 측면이 강조되거나 고운 할머니로 한정된 역할 모델을 보여 준다. 이러한 역할 모델은 남성보다 다원적이지 않기에, 여성들이 자신의 노년 역할 모델을 선배 여성들에게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고령사회에서 노인 여성의 역할 모델은 다양하게 제시된다. 나쁜 시어머니나 자상한 친정 엄마 등으로 재현돼 왔지만 노년에도 활동하며 다양한 모습의 할머니, 공적 역할로 재현되는 노인 여성 배우들이 있다. 노인 여성 유튜버 크리에이터들이 인기를 얻고 젊은 여성들과 소통하면서 역할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배우 윤여정은 미국 오스카상 여우조연상이라는 수상의 명예와 함께 노년의 역할 모델로 손꼽힌다. 그는 한동안 주목받지 못한 배우였지만 성실하게 연기를 해왔다. 영어를 잘하고 젊은 감각을 지니고 소통의 기술을 발휘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배우 나문희와 김영옥은 오랜 연기 경력을 기초로 TV와 영화, 연극 등 활발한 연기 활동을 하고 연예·오락 프로그램에도 도전하고 있다. 그들은 할머니 역할을 주로 해 왔지만 획일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위로와 치유, 도전의 아이콘이 된다. 여성의 인물사를 기록하거나 노인 여성의 삶을 살펴보는 것도 노인 여성의 역할 모델을 창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2024)는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일하는 한국 최초의 여성 조경가 정영선의 삶을 담아낸다. 그는 자신을 자연과의 중개자라 생각하며 삭막한 도시 환경에 치유와 사색의 공간을 구성하고 후손에게 물려줄 생태적 환경을 조성하고자 헌신해 왔다.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2023)에는 젊은 해녀에게 자신의 물질 노하우를 가르치는 노년 해녀 현순직이 등장한다. 노년은 느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도 질병과 장애를 수용하고 노인돌봄, 의료결정, 죽음 등을 준비하는 단계다. 가톨릭신자로서 노년 역할 모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다양한 역할 모델을 통해 노년을 설계한다면 노년은 가지 않은 미지의 길이면서도 즐거운 도전이 될 것이다. 글 _ 이동옥 헬레나(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교수)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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