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여호 5,9ㄱㄴ.10-12 / 제2독서: 2코린 5,17-21 / 복음: 루카 15,1-3.11ㄴ-32
오늘 복음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부자간에 견주며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로, 구약성경에도 비슷하게 자주 등장하던 것입니다.(탈출 4,22; 이사 1,2; 예레 31,9.20 등) 특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백성의 불충에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호세아서 1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이는 또한 쥐엄나무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비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고 탕진한 아들이 돼지치기가 된 뒤 배고픔에 시달리다, 돼지 밥이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얻지 못했다는 대목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에 돼지 밥으로 나오는 ‘열매 꼬투리’가 바로 쥐엄 열매입니다. 이는 쥐엄 열매의 생김새가 콩꼬투리 같아서 우리말 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듯합니다. 쥐엄 열매는 껍질을 먹는데요, 맛은 초콜릿과 비슷하지만 끝맛이 떫어 즐겨 찾는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좋다고 찾는 이들이 늘었지만 말입니다.
쥐엄나무는 히브리어로 하루브, 영어로는 캐럽(carob)입니다. 일명 ‘메뚜기 나무’로도 통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하루브’가 메뚜기를 뜻하는 ‘하가브’와 비슷해서 그런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먹었다는 마르코복음 1장 6절의 메뚜기를 쥐엄 열매로 보기도 합니다. 늦여름부터 갈색으로 완숙하는 쥐엄 열매는 많은 양을 거둘 수 있으므로, 빈민의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쥐엄나무가 가난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다 캐럽(carob)이 캐럿(carat)으로 발전하며 부의 상징으로 뒤집히게 됩니다. 고대에는 쥐엄 열매의 씨가 무게를 재는 단위로 쓰였는데, 이것이 이후 보석의 단위로 신분(?)이 급상승하면서 마태오복음 19장 30절의 말씀처럼 꼴찌가 첫째 된 셈입니다.
다만 쥐엄나무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일흔 해가 지나야 첫 열매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쥐엄나무의 이런 특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탈무드」 타아닛 23ㄱ에 나오는데요, 이는 ‘호니’라고 하는 한 의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 안에서 호니는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시편 126,1)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이스라엘(기원전 6세기)의 ‘운명이 바뀌어’ 유배에서 풀려나는 데 일흔 해 걸렸는데(2역대 36,21) 어떻게 그 일이 잠들어 ‘꿈꾸는’ 동안 가능한지 연구하였답니다. 성경을 너무 자구적으로 해석한 사람 같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쥐엄나무를 심는 걸 보고, “그게 열매 맺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심느냐?”고 호니가 물었답니다. 그 남자가 70년이라고 답하자 호니는 “당신은 70년을 더 살 자신이 있나 보군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답합니다. “나는 내 조상이 심은 쥐엄 열매를 먹었소. 이건 내 후손을 위한 거요.” 그 뒤 호니가 밥을 먹고 깜빡 잠들었는데, 깨어 보니 어떤 남자가 열매를 모으고 있더랍니다. 호니가 그를 보고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의 손자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호니가 잠든 동안 일흔 해가 흐른 셈이죠. 놀란 호니가 집으로 가니, 아무도 그를 호니라고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호니는 슬퍼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 뒤 쓰러져 죽었답니다.
이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고통스러운 유배에서 구원받기까지 과정은 길어 보이지만, 일단 지나고 나면 꿈을 꾼 듯 쏜살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그냥 건너뛰려고 하면 그 안에 담긴 삶과 추억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죠. 70년 자란 뒤 열매를 맺는다는 쥐엄나무는 우리에게 ‘인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 실린 여호수아기의 말씀도 기다림과 인내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끝날 것 같지 않던 사십 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 끝에 이집트의 ‘수치’를 떨치고 새 땅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옛것을 넘어 새것이 되도록”(2코린 5,17) 메시아께서 오시기까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기까지(2코린 5,21) 구약 시대 내내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