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께 교회 위한 지혜 구하며, 성 아우구스티노 영성 품에 안고 사명 다짐
레오 14세 교황의 교황청 밖 첫 방문지는 로마 외곽 ‘착한 의견의 성모 성지’였다. 같은 이름의 성화를 모신 성지에서 교황은 자신의 사명을 되새기는 장소로 찾았다고 밝힐 정도로 성모님께 대한 극진한 공경과 사랑을 드러냈다. 십자가도 화제다. 목에 건 가슴 십자가에는 성 아우구스티노 등 성인과 복자의 유해가 봉인돼 있다. 십자가에 모신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따를 것임도 여러 차례 천명했다. 교황은 선출 직후 로마와 온 세계에 보내는 첫 강복에서 자신을 ‘성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이라고 전했다. 선출 직후 행보로 엿본 새 교황의 ‘찐사랑’들을 살펴본다.
새로운 사명을 안고 찾아 나선 곳
교황 레오 14세는 바티칸에서 약 50km 떨어진 이탈리아 제나차노에 위치한 ‘착한 의견의 성모 성지’를 방문해 “교회가 나에게 맡긴 새로운 사명을 안고 이곳을 꼭 찾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곳에는 알바니아 슈코더(Skodër)에서 전승된 성지와 동명의 성모 성화가 있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알바니아 침공 당시 슈코더의 신자 두 명이 성화 앞에서 무사히 탈출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던 중 갑자기 성화가 공중에 떠올랐고, 이들을 이탈리아로 이끌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성화는 제나차노에 도착한 뒤 사라졌고 이와 관련한 기적이 이어졌다.
제나차노에는 ‘착한 의견의 성모’를 모신 성당이 있었으나 오랜 시간 방치돼 폐허가 됐다. 1467년 이곳의 한 과부는 성당의 황폐한 모습에 보수하려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돕지 않았고, 그녀 혼자서는 완공할 수 없었다.
같은 해 성 마르코 축일을 맞아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던 중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고, 갑작스레 하늘에서 구름이 내려와 성당의 미완성돼 있던 벽 중 하나를 덮었다. 구름이 사라지자 아무 것도 없던 벽면 위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그려진 성화가 나타났다.
이날의 기적으로 순례자들이 각지에서 몰려 들었다. 성화의 인도로 이곳을 찾은 알바니아인들은 한 목소리로 슈코더의 그 성화라고 증언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바오로 2세는 주교들을 파견해 조사 후 기적으로 공인했다.
1903년 레오 13세 교황은 이곳 성지를 소바실리카(minor basilica)로 승격시켰다.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이곳에 가해진 폭격에도 손상되지 않았다. 선택 앞에서 지혜를 구하는 상징인 착한 의견의 성모 성화는 5월 18일 열린 레오 14세 교황의 즉위 미사 제대 곁에 놓였다.
선출 직후 목에 건 십자가
5월 8일 선출 직후 레오 14세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발코니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목에 건 가슴 십자가도 화제다. 십자가에는 성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성인과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탈리아 팔레르모에 있는 작은 공방에서 제작된 이 십자가는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시복시성 청원 담당 조세프 스키베라스(Josef Sciberras) 신부가 레오 14세 교황이 추기경에 서임됐던 2023년 9월 선물한 것이다. 십자가 본체가 두 겹으로 제작돼 결합된 나사를 풀면 내부에 보관된 성인의 유해가 보이는 구조다.
십자가에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성 모니카, 성 토마스 빌라노바, 복자 안셀모 폴랑코, 가경자 주세페 바르톨로메오 메노키오의 유해가 함께 담겼다. 시베라스 신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성인들은 각각 충실함과 개혁, 봉사, 순교의 덕목을 상징하며, 이 덕목들이 레오 14세 교황의 사명을 이끌 것”이라고 전했다.
성 모니카는 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은 강인한 신앙인의 표상이다. 성 토마스 빌라노바는 15~16세기 발렌시아 대주교로, 수도 개혁과 가난한 이들에 헌신한 목자로 평가받는다. 복자 안셀모 폴랑코는 스페인 내전 중 순교한 주교로 “내 양 떼 중 단 한 명이라도 남았다면 나는 남겠다”며 목자의 모범을 보였다. 가경자 메노키오는 나폴레옹에 저항한 유일한 주교로 로마 시민과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스키베라스 신부는 “콘클라베 전날, 우리가 선물한 십자가를 착용하면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모니카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교황에게 보냈다”며 “발코니에 선 교황이 그 십자가를 착용한 모습을 보고 깊이 감동 받았다”고 전했다.
아우구스티노의 영성을 ‘사명’으로
교황은 선출 직후 첫 강복에서 “‘여러분과 함께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며 여러분을 위한 주교입니다’라고 말했던 성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이자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의 일원"이라고 소개한 만큼 성 아우구스티노를 향한 존경과 애정을 여러 차례 표현하고 있다.
1244년 설립된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영성과 가르침을 뿌리로 삼고 있다. ‘서양의 스승’으로 불리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자 신학자, 영성가다. 354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태어난 성인은 젊은 시절 철학과 수사학에 깊이 빠졌고 진리를 찾으려 마니교를 따르기도 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중 성인은 당시 주교였던 암브로시오 성인의 설교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전까지 세속적 성공에 얽매였던 성인은 “집어서 읽어라”라는 신비로운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에 따라 펼친 구절은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 13,13)였다. 성인은 말씀에 깊이 깨달음을 얻고 세례를 받았다.
성인은 세속적 삶을 정리하고 아프리카 수도원에 들어가지만 뜻하지 않게 사제가 됐고, 5년 만에 히포의 주교로 임명된다. 주교가 된 후에도 꾸준히 글을 쓰며 「고백록」을 포함한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공동체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힘썼다.
주교가 된 후에도 주교관 내에 성직자 수도원을 세워 공동생활을 이어갔을 정도로 성인은 서방교회의 4대 교부 중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이자, 뛰어난 영성가로 칭송 받는다.
변경미 기자 bgm@catimes.kr
이호재 기자 ho@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