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땅에서 바라 본 새하늘!(묵시 4장)

요한묵시록 4장부터 묵시문학적 색채가 짙게 드리워진다. 하늘의 문이 열린다. 수많은 묵시문학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하늘의 문’은 천상의 신비에 목말라하는 인간들의 갈망이 섞여 있는 은유다. 그 문이 열려서 해갈(解渴)의 은혜가 충만히 쏟아지길, 묵시주의를 살아갔던 인간들은 바라고 또 바랐다. 다만 요한묵시록은 하늘의 문이 열리는 순간 ‘그 목소리’를 언급한다. 요한묵시록 1장 10절에서 이미 ‘그 목소리’는 들려졌고, ‘그 목소리’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도록 했다. 독자들에게 일곱 교회로 눈과 귀를 이끌었던 ‘그 목소리’는 이제 천상을 향해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 목소리’를 중심으로 천상과 지상은 하나가 된다. 천상에서 보여지는 것은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묵시 4,1)이다. 단언컨대, ‘이다음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아니다. 요한묵시록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시간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원을 이루셨고,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 구원의 정점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시간은 흐르되 시간의 성질은 항상 같은 것이다. 어제의 후회나 미래의 설렘 따위는 요한묵시록에 어울리지 않는 시간에 대한 감정이다. 그러므로 ‘이다음의 일’은 ‘구원을 살아가는 지금’에 대한 또 다른 해석과 상상의 새로움을 가리킨다. ‘이다음에’라고 번역한 ‘메타 타우타’(μετὰ ταῦτα)의 의미를 곱씹어봐도 그렇다. 굳이 시간적 미래로만 해석할 수 없는 표현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익히 알고 믿고 습관적으로 인식한 것들을 ‘다르게’ 알고 믿고 새롭게 고쳐 사고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천상에 올라가 요한이 보는 ‘이다음의 일들’은 이미 드러났으나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 현실을 함부로 단정 짓고 심판한 우리의 인식이 전부가 아닌 부분이라는 것, 그리하여 나의 이해와 판단은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선이라는 것, 다른 이와 다른 세상, 다른 생각으로 진지하게 나아가는 출발선이라는 것이다. ‘성령께 사로잡혔다’(묵시 4,2)는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황홀경이나 신비 체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표현이 아니다. 학자들은 현실에 대한 영성적 해석, 혹은 깊이 있는 새로운 인식의 또 다른 표현이 ‘성령께 사로잡힌다’로 이해한다. 묵시문학의 전형적 표현이기도 해서 ‘성령께 사로잡히는 것’은 어렵고 힘든 것들, 그리하여 바라고 또 바라는 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달리 보자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고민은 ‘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어좌에 앉으신 분’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구약의 전통적 표현이다.(이사 66,1; 시편 11,4) 구약의 하느님은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되기도 했는데(탈출 28,17; 에제 1,26; 28,13), 요한묵시록 역시 벽옥, 홍옥, 취옥으로 어좌를 꾸미고 있다. 무지개도 마찬가지다.(에제 1,28) 여러 상징들로 어좌를 화려하게 꾸밀수록 하느님의 현존은 더욱 뚜렷하다. 어좌 둘레에 스물네 원로가 앉아 있다. 프랑스 주석학자 앙드레 프이에(A. Feuilet)는 원로들을 통해 천상과 지상의 화합, 혹은 일치를 언급한다. 원로들이 사람임에도 천상의 공간에 배치되어 있어서다. 스물넷이라는 숫자를 두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합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지상의 하느님 백성 모두가 천상의 어좌 곁에 있다는 식으로 이해될 만하다. 원로들은 어좌에 앉아 있고, 금관을 쓰고 있으며 흰옷을 입고 있다. 지상의 권력을 가리키는 어좌와 금관, 천상의 영광을 드러내는 흰옷의 조화 역시 천상과 지상의 화합과 일치를 대변한다. 원로들은 11절에 가서 하느님께 그들의 금관을 던지며 외친다. 경배의 외침은 다분히 로마 황제를 위한 경배 문구와 닮았다. “~하기에 합당하신 분”(Ἄξιος εἶ)이 그렇고 특별히 “저희의 하느님”(ὁ θεὸς ἡμῶν. Dominus et Deus noster)이라는 표현은 요한묵시록이 쓰여졌다고 추정하는 시기의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스스로를 칭하는 문구와 닮았다. 하느님을 믿는 이 땅의 모든 백성은 오로지 하느님을 향한 경배에 열심이다. 하느님이야말로 참된 황제, 진정한 임금이라는 신앙 고백의 열망이 원로들의 정체성에 스며들어 있다. 이 땅 위의 원로들은 그렇게 천상의 하느님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흠숭하고 있다. 원로들은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묵시 4,11)로 이해한다. 프랑스 리옹의 성경신학자 프랑수아 마르탱(F. Martin)은 원로라는 말마디, 그러니까 ‘프레스뷔테로스’(πρεσβύτερος)라는 말마디의 뜻이 ‘인간의 조상, 혹은 근원’이란 뜻이 있어, 원로들이 하느님을 만물의 근원으로 칭송하는 것에는 원로와 창조주 간의 의미론적 연관성이 있다고 관찰했다. 인간의 근원인 원로가 만물의 근원인 창조주 하느님을 찾는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원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이미지를 해석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네 생물도 마찬가지다. 에제키엘서 1장 5절과 6장 2절에서 빌려 온 네 생물 형상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으나 본디 그 의미는 어좌, 곧 하느님의 자리를 꾸미는 형상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네 생물은 리옹의 이레네오 교부에 의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네 복음서와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했다. 에제키엘서에서 말하는 네 생물의 공간은 지상, 그것도 이스라엘이 아닌 이민족 바빌론 땅이다. 하느님은 그분의 백성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함께 계신다는 의미가 네 생물의 형상에 담겨있다. 요한묵시록의 네 생물은 하느님을 ‘살아계신 분’(묵시 4,9)으로 흠숭한다. ‘생물’이라는 그리스말은 ‘조온’(ζῷον)인데, ‘살아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살아 있는 네 생물이 하느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이해한다. 이 땅 위에서 바라본 하느님은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늘 이 땅 위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 분이시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이다음의 일들’이 시작되는 요한묵시록 4장은 새롭고 신비한 일들을 소개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사는 이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어디며, 그분을 어떻게 찾고 있는지 스물넷 원로와 네 생물을 통해 묻고 있다. 하느님은 천상의 자리에 유폐되어 있지 않고, 이 땅 위에 우리의 믿음과 묵상과 열정 안에 새롭게, 늘 현존하신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가장 용맹스럽고 멀리 복음을 전한 토마스

인류 최고의 의사로 칭송받는 슈바이처(1875~1965)는 “생명을 북돋워 주는 것은 선이고, 생명을 부수고 가로막는 것은 악”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의사, 신학자, 음악가, 사상가로 당대의 최고 천재였다. 다재다능한 그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질병으로 혹독한 고통당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의사가 되어 이들을 위한 진료에 평생을 바쳤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1952년 노벨상을 받았다. 슈바이처는 노벨상을 탔을 때에도 그 상금을 모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사용했다. 마흔이 다 된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반대가 심했다. 편안하고 여유 있게 일생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난데없이 아프리카로 가는 슈바이처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온갖 독벌레와 세균이 들끓었던 미개한 곳이었다. 의사도, 병원도, 약국조차 없었다. 그곳 사람들은 질병 속에 완전히 버려져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사람을 고치는 것은 의사의 본분이고, 자신이 의사가 된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탈렌트를 이용하여 모든 생명을 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슈바이처는 재산을 다 털어 그곳에 병원을 지었다. 그는 질병과 더위와 싸우며 차츰 자리를 잡아갔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과 만났을 때 빠졌던 토마스는 다른 사도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부활을 믿지 못했다. 성경을 보면 토마스는 깨달음이 부족해 예수님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엉뚱한 반응을 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부활도 직접 보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떼를 부린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너는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자 감격한 토마스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지금까지도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토마스는 특별한 고집이 있어 가장 열성적이고 강직한 제자 중 하나였다. 이 구절은 의심 많은 믿음이라는 설교의 예화로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은 의심을 ‘불경하다’며 피하지 않고, “보아라” 하시며 제자의 의혹을 적극적으로 풀어주고 확신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문장만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다. 토마스는 성경에서 예수님에게 직접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유일한 사도인데,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사도들의 리더 자리를 받았음을 생각해 보면 토마스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은 토마스를 많이 아꼈다. 예수님 말씀이 이해 안 갈 때 다른 제자들이 대충 가만히 있어도 토마스는 꼭 질문을 다시 했다. 맹신하는 것보다 토마스처럼 의심하고 질문하는 게 오히려 좋은 믿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가톨릭 전승에 따르면, 토마스는 인도에까지 복음 선포길에 나섰다 순교했는데, 토마스의 성격이나 도전성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8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명예나 영광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물’이나 ‘부’는 주로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최종 목적이라는 행복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을 보면,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자연적 재물에 대한 유혹이 실패하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한다.(루카 4,1-13)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리에게도 강력한 유혹의 후보들이 떠오른다. 명예나 명성 안에서 찾는 인간의 행복 고액의 연봉을 받는 직장인, 엄청난 계약금으로 스카우트된 운동선수나 연예인, 더 나아가 세계 최고의 부자들은 이에 상응하는 ‘명예’가 주어진다. 또한 우리나라에 골프붐을 불러왔던 박세리 선수가 그 성과를 기억하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박수로 환호하면서도 부러워했다. 그러한 현상은 소위 신지애, 박인비 등 ‘세리키즈’가 대거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또한 한강 작가가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됐을 때는 작가 본인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자랑스러워했고, 외국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들을 바라보면, 그 근저에 놓인 ‘명예’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막강한 후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성 토마스는 ‘명예’야말로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 욕구할 만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명예는 각 분야의 가장 탁월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자기 명예가 훼손을 당할 위험에 빠지면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의 손실을 감수해서라도 이를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I-II,2,2) 그럼에도 그는 행복이 명예에 있음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명예는 명예를 받는 자 안에 있지 않고, 명예를 받는 자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는 외부의 다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 명예는 가장 탁월한 자들에게, 벌써 존재하고 있는 탁월성(excellentia)의 표시와 증명으로서 밖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지, 명예 자체가 그들을 탁월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명예는 행복에 따라올 수는 있지만, 행복이 명예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토마스는 명예와 비슷하지만, 직접적으로 덕행과 연관성이 없는 명성(fama)이나 영광(gloria)에는 더 낮은 가치만을 부여하고 있다. 명성은 주로 사람들의 평판에 달려 있다.(I-II,2,3) 그러나 사람들의 평판은 종종 크게 잘못될 수 있다. 사람들은 유명 가수나 배우들에게 열광했다가 그들의 실수나 잘못을 알게 되면 실망해서 그들을 과도하게 비난하곤 한다. 명성에 손상을 입은 연예인은 기존에 하던 광고 계약 등까지 해지되면 엄청난 재정적 손실도 겪는다. 이에 따른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도 한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진정한 행복이 명성에 있을 수 있음을 배제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명성은 지나치게 우연적인 것이고, 둘째로 인간의 행복은 인간들의 칭송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명예훼손과 명예에 대한 집착(야욕)의 문제점 그럼에도 토마스는 명예나 명성을 영적인 선(善)으로 인정하며, 물질적 선들보다 더 소중히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명예나 명성을 보존하도록 각자가 지닌 권리를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미치게 될 피해를 고려해서 이웃의 명예나 명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토마스에 따르면, 명예훼손은 이웃에게서 어떤 것을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절도와 유사하지만, 현세의 사물 중에서는 가장 귀한 것 중에 하나인 명예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더욱 중한 죄다. 그러므로 중상이나 비방으로 이웃의 명예나 명성을 해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죄이다.(II-II,73,3)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무분별한 가짜 뉴스의 양산이나 ‘딥페이크’와 같은 기술을 이용한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이 자행되는 현대 사회에서 토마스의 경고는 더욱 시사성이 크다고 하겠다. 토마스는 명예나 명성(또는 영광)을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나 자신의 행위들에 더 강한 추진력을 갖기 위해서 추구하는 경우, 그 자체로는 완전히 합법적이라고 평가한다. “자신의 행위들로 인하여 칭송을 받음을 아는 사람은 더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간다.”(「악론」, IX,1) 더욱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교화를 위해서 명예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이웃을 위한 참사랑에 속한다. 그렇지만 토마스는 명예를 무질서하게 욕구하는 것은 야욕(ambitio)으로 규정하고 죄가 된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이를 욕구하는 자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거나, 혹은 자신이 받는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배타적으로 자기 스스로 얻은 것으로만 자부하기 때문이다.(II-II,131,1) 성경 안에서도 분명한 예가 나온다. 헤로데가 티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멋지게 연설하자 군중은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자,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쳐서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고 말았다.(사도 12,20-23) 토마스에 따르면, 명예나 영광을 바라는 것이 이성에 합치되는 질서를 벗어나게 되었을 때에는 많은 악을 저지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얻고자 할 때 중대한 죄를 저지르기 쉽다. <미생>과 같은 드라마에서도 나타나듯이, 많은 직장인은 무능한 상사가 자신의 노력을 가로채서 자신의 명예를 얻으려는 경우 매우 분노하기 마련이다. 과거 황우석 사태처럼 이미 자신이 이룬 성과 이상의 명성을 얻고 나서도 그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여 성과를 부풀림으로써 얻었던 명성과 부마저도 모두 잃어버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런 경우 행복하기는커녕 자신이 쌓아 놓았던 공든 탑마저 모두 무너져 더욱 큰 불행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부’도 ‘명예’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후보에서 탈락한 가운데, 떠오르는 또 하나의 강력한 후보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나타나듯이 선거 때만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려고 하며, 한 번 얻고 나면 이를 놓지 않기 위해 ‘계엄’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불사하는 ‘권력’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진정으로 행복을 가져다주게 될까? 다음 회에서 심층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7면

[말씀묵상] 사순 제5주일

오늘 복음에서 유다교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분을 잡을 정교한 함정을 파고 있습니다. 바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하나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고 그 주위에 손에 돌을 들고 둘러선 채 간음한 이를 돌로 쳐 죽이라는 율법(신명 22,21)을 실행해야 할지를 묻는 것입니다. 방금 현장에서 잡혔기에 여인의 죄는 재판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지체 없이 답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그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기 위해 놓은 덫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요한 8,6) 당시 유다에서 사형권은 오직 로마 황제의 대리자인 유다 총독에게 있었을 뿐 아니라, 로마법에 따르더라도 간음의 형벌은 사형이 아니었기에 율법을 따르라 하면 로마 황제의 권위에 저항하는 일이 되고, 그 여인을 놓아주라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로마 황제나 유다 백성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진퇴양난의 처지에 놓인 것처럼 보입니다. 이 두 선택 가운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평소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언행을 생각할 때 아마 그분께서는 여인의 죽음을 바라시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로마적이던 사두가이들과 달리 로마에 저항하는 성향을 보였던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율법을 따라 로마의 미움을 사는 것보다 죄인을 풀어주어 백성의 신망을 잃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내심 그렇게 바라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간음 현장에서 여인을 잡았으면 간음 상대인 남자도 있었을 터인데(레위 20,10에 따르면, 그 또한 처벌의 대상입니다), 그는 그냥 두고 굳이 연약한 여인만을 끌고 온 것도 예수님의 연민을 자극해 자신들이 원하는 선택을 유도하려는 속셈에서였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질문을 들은 예수님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예수님의 심란한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로 해석하고, 다른 이들은 로마의 재판관이 형을 선고하기 전에 먼저 기록하는 것에 비교합니다.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죄를 물어 투석형으로 죽이려는 사람들의 죄를 땅에 쓰셨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두 번째 해석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사실 성경은 죄인의 이름은 땅에 새겨지고(예레 17,13), 의인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된다고 합니다.(루카 10,20) 그리고 예수님은 군중에게 간음한 여인을 죽이라 혹은 살리라 말하는 대신 죄 없는 자 그를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돌을 놓고 물러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희는 과연 죄가 없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 또한 죄인들임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죄를 지었을 때 심판하는 대신에 참아주고, 회개하기를 기다려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있는 자신들에게는 간음한 여인을 단죄할 권리가 없음을 깨닫고 돌을 내려놓고 물러갔을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지만, 예수님은 자비를 위해 정의를 포기하시거나 반대로 하지 않으십니다. 즉, 죄를 모른척하시거나 정당화하지도 않으시고, 죄인에게서 회개의 기회마저 빼앗지도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예수님은 자비로서 정의를 구현하십니다. 우리 모두도 죄인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 덕분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회초리 앞에서 마지못해하는 자백이 아니라, 주님의 따스한 시선에 이끌리는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이 사순 시기에 특별히 다른 이들에게 조금은 더 자비로워질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가 자비를 입었으니,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글 _ 함원식 이사야 신부(안동교구 갈전 마티아본당 주임)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8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마음의 구원 - 참된 자유

지금까지 우리는 교리서 1부 ‘한처음’(1~23과)에 대한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1부는 존재, 즉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고, 오늘부터 펼치게 될 2부는 ‘마음의 구원’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이 내적 인간, 즉 마음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바라보게 한다. 마음의 구원편은 무려 1년 1개월(1980년 4월 16일~1981년 5월 6일) 동안 교황의 수요 교리로 계속됐고(특별한 전례 시기는 제외), 그 분량도 40과(24~63과)에 이르는 대단원이다. 2부의 중심 말씀은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이다. 교황은 이 말씀에서 ‘몸 신학’의 핵심적 의미를 찾았고, 마음이 그 모든 것의 출발이요 중심이라 보았다. 한 인간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행위들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움직인 것이기에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를 판단하기 전에 내적으로 어떤 상태였는지 먼저 살피라는 뜻이다. 즉 왜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는지, 무엇에 묶여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 참된 자유, 곧 한처음 상태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회복하여 한처음 상태에 놓이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고, 그는 하느님을 뵙는 참된 행복에 머문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말론적 의미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일어나는 부활의 삶이다. 1부에서 다루었던 바리사이들과의 이혼에 관한 논쟁(마태 19장, 마르 10장)처럼, 마태오 5장 27절과 28절의 말씀도 창세기 첫 장까지 거슬러 올라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도 다른 말씀과 마찬가지로 규범적 성격을 뚜렷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24과 2항)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갖는 정황도 그 의미가 얼마나 폭 넓은지 알 수 있을 때, 제6계명인 ‘간음하지 마라’는 복음적 의미에서의 ‘이해’와 ‘완성’이라는 두 가지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인간 행위의 윤리 기준을 외적으로만 보고 판단하던 것을 이제 내적으로, 즉 마음에서 다루는 에토스의 중요한 전환점을 새롭게 제시했다. 또 규범적 성격을 띤 이 복음 구절에 대해 인간적 해석은 하지 말 것을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2부에서 다루는 중심 성경 말씀의 본질에 이르려면, 간음의 범위를 다시 보아야 한다. 구약시대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혼인 관계로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떠나 세상 것을 쫓을 때 간음이라 표현했다. 신약시대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이는 율법이 아니라 영에 따라 가능한 것으로, 그 영의 자리가 바로 마음으로 제시되었다. 세례자 요한은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9-30)면서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 말했다. 외적인 율법의 영향은 작아지고 복음은 내면에서부터 커져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문제의 본질, 즉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원하고 있다. 이는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인간학적인 이유에서도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긴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19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진리를 찾는 진실한 사람, 바르톨로메오

철학과 예술이 발달했던 아테네에서 거지꼴을 한 노인이 거리에서 큰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노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당신들은 무엇을 하며 사는가?”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표현했다. 부자나 관리, 유명 인사가 되겠다고 자신의 꿈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노인은 “돼지가 되어 즐기기보다는 사람이 되어 슬퍼하겠네.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하여 먹는 것이니까”라고 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노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였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에게 찾아왔다.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부패한 정치가와 학자들을 비판하며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아테네 정부는 청년들을 미혹하고 국가에 해를 끼친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를 체포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죄 없이 죽는 것이 억울해 그를 탈출시키려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사형을 받아들였다. 교회의 오랜 전승은 바르톨로메오와 나타나엘을 같은 인물이라 여긴다. 사도의 명단에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는 항상 같이 짝을 이룬다. 실제로 필립보는 나타나엘의 친구였고 나타나엘을 예수님에게 소개했다. 필립보는 예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바로 친구 나타나엘을 찾아가서 참 예언자를 찾았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란 말을 들은 나타나엘은 멈칫한다. 나자렛은 성경에 언급된 중요한 곳이 아닌 시골 마을이었다. 그러자 필립보는 그래도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갔다.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보자 “이 사람이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타나엘은 첫 만남에서 예수님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 제자가 된다. 그리고 ‘톨로메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바르톨로메오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서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진 경건한 사람인 바르톨로메오는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던 인물이다. 예수님이 언급한 참다운 이스라엘 사람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편견을 버리고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사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하기가 어렵다. 많이 알수록 새로운 진리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고함이 자리잡고 있기 마련이다. 전승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전교하다가 순교했다. 그는 칼로 가죽이 벗겨지고 참수를 당했다. 그래서 칼은 바르톨로메오 사도 성화의 상징이다. 바르톨로메오 사도는 평생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위해 죽었던 진실한 사람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8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몸의 삼중성

인간은 태어나서 죽기까지가 자연적이지만,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을 열고 타자에게 닿고자 하는 자아 초월적인 면을 지닌 양면성의 존재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적인 가치에서 끊임없이 초월적 가치를 선택하고 그 완성을 바라는 이들이다. 이 양면성은 자신의 전 생애를 자녀적 몸, 혼인적 몸, 부모적 몸으로 변화시킨다. 이를 몸의 삼중성이라 하는데, 단순히 육체적이고 외적인 신분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적이고 영적인 변화에서도 같은 질서이다. 삼중성의 특징을 어릴 때 갖고 놀던 팽이에 비유한다면, 팽이의 아래 뾰족한 부분은 자녀적 몸, 좌측 상단은 혼인적 몸, 우측 상단은 부모적 몸이다. 팽이가 잘 돌고 있을 때는 땅에 닿아 있는 심지 부분이 양쪽 두 축과 균형을 이룰 때다. 삼중성은 한 신분이 정리된 후 다음 신분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신분의 상태는 모두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데, 부모에 의해 자녀가 되고, 너를 만나 남편/아내가 되며, 자녀를 만나 부모가 된다. 자녀적 몸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에 의해 얻어지는 결과로 한 존재의 근본이요 알파이다. 자녀적 몸은 부모와 분리될 수 없고, 성장 또한 부모와 함께하는 가운데 부모됨, 가족됨의 온전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내재해 있는 성령의 힘에 의해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로 부르는 은총, 곧 자녀의 신분을 얻는다. 혼인적 몸이란 아낌없이 그에게 주고 또 전부를 받는 가장 완전하고 유일한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나의 관계를 혼인적으로 표현했다. 혼인적 몸에서 부모적 몸으로 넘어가지만, 잊지 않아야 할 중요한 점은 부모이기 전에 서로 한 사람의 배우자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유산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이다. 부부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사랑은 자녀의 성장에 측량할 수 없는 큰 자양분이요 힘이며, 생명을 지을 토대이기 때문이다. 부모적 몸은 아브라함과 사라에서 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장 참조) 사라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본문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을 받고, “아침 일찍 일어나”(3절) 준비해 길을 떠난다. 그는 ‘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지’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를 보며 계획했던 자신들의 계획을 포기해야 하는 좌절도 맛보았을 것이다. 산을 오르며, 이사악이 번제물로 바칠 양이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7절), 아브라함은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세 22,8)는 응답으로 하느님께 신뢰를 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 모습은 자녀가 아버지를 넘어 하느님 아버지께 인도돼야 함을 뜻한다. 오래 묵상해야 할 부분이다. 부모됨은 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원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그 여정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부모는 자녀의 근원으로서 또 다른 알파이지만 자녀의 오메가가 아님을,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와 자녀는 존재가 함께 확장됨을. “인간은 인간을 무한히 넘어선다.” 파스칼의 말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깨어 있어라!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루카 21,34-36 참조)고 자주 권고하신다. 사도들도 스승의 가르침을 반복하고 있다. 사막 교부들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깨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수도승이 어디서나 지속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라이투의 어떤 형제는 다른 장소로 이동할 경우 매 걸음마다 멈추어 서서, “자, 형제여,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자문할 정도로 늘 깨어 있었다고 한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77쪽) 깨어 있음의 의미 깨어 있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깨어 있음의 일차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 있음의 참된 의미는 아닐 것이다. 깨어 있음은 맑은 정신 상태와도 같다. 바오로 사도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라고 권고한다. 포이멘 압바도 “우리에게는 깨어 있는 정신 외에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포이멘 135)라며 정신의 깨어 있음을 강조한다. 깨어 있음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내적 자세다. 초기 수도승들은 마음을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함으로써, 항구히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이 내적 깨어 있음(nepsis)은 매사를 의식하면서 하는 것, 무엇을 할 때 그 순간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늘 깨어 있는 자세다. 악한 생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하는 악령을 경계하는 신중하고 주의 깊은 자세다. 그래서 유혹이 다가오자마자 거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방어 자세를 정신과 마음에 대한 ‘경계’ 혹은 ‘주의’라고 부른다. 깨어 있음과 기다림 깨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늘 준비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즉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복음의 열 처녀(마태 25,1-13) 이야기를 기억한다. 모두 깨어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음에 빠졌고, 신랑이 왔을 때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다섯 처녀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수도승은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 사람, 즉 늘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장차 오실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사람이다. 깨어 있음과 기도 깨어 있음은 기도와 연결된다. 예수님은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고 권고하셨다. 바오로 사도도 말씀하셨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콜로 4,2)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제 눈이 새벽에 앞서 깨어 있음은 당신 말씀을 묵상하기 위함입니다.”(시편 119,148 불가타역) 또 “한밤중에도 당신을 찬송하러 일어납니다.”(시편 119,62) 이처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은 기도를 위한 것이다. 4세기 메소포타미아에는 항상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를 극단적으로 실천하려 했던 금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잠을 자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의 ‘아체미티’라고 불렸다. 사막 교부들도 주님과 사도의 권고에 따라 늘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특히 한밤중에 일어나 기도했다. 이것이 수도승 전통을 통해 이어져 온 밤중기도(viglilia)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밤에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기도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무엇보다 잠과의 사투가 벌어진다. 일어나더라도 쏟아지는 졸음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승들은 세상이 잠든 때 깨어 기도해 왔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깨어 있음과 마음의 경계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잠뿐만 아니라 불순하고 불안정한 마음이다. 그래서 깨어 있음은 마음을 늘 순수하게 지키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테오도라 암마는 “우리가 깨어 있으면, 이 모든 유혹은 사라집니다”(테오도라 3)라고 말한다. 누군가 아가톤 압바에게 “육체의 금욕과 내적으로 깨어 있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나무와 같아요. 육체의 금욕은 잎이고, 내적 깨어 있음은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고 기록된 것처럼 우리의 모든 관심은 열매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영을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아가톤 8) 안토니우스 압바는 내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독방에 머물라고 권고한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오래 있으면 죽는 것처럼, 수도승이 암자 밖에서 지체하거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머무르면 하느님 안에서의 깊은 평화를 빼앗깁니다. 그러므로 바다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르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암자로 되돌아가려고 서두릅니다. 외부에 지체하면서 내부 지키기를 잊어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안토니우스 10)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현존 앞에 온전히 깨어있는 영혼의 상태이며,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깨어 사는 삶 사막 교부들은 이 혼탁하고 어지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깨어 있어라!”고 권고하고 있는 듯하다. 깨어 산다는 것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순수하게 유지하며 매사에 의식을 갖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부들이 말한 ‘내적 깨어 있음’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악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온갖 헛된 인간적 욕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적 깊이 없이 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내적 자세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자기중심을 잃지 않고 늘 내적으로 깨어 있으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미혹 속에서 헤맬 것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7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라오디케이아에 보내진 편지(묵시3,14-22)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다. 에페소와 동쪽 지역을 잇는 도로 가운데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이었다. 로마의 문인 키케로에 의하면 라오디케이아는 재정과 금융의 주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섬유 산업, 특별히 양모 산업이 발달했고 귓병에 좋다는 고약과 눈병에 좋다는 약재도 라오디케이아에선 유명했다. 우리가 읽는 편지도 안약을 언급하고 있다. 라오디케이아는 경제적으로 강했고 그로 인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묵시 3,17)라고 할 만큼. 그러한 라오디케이아는 60년경 지진으로 몰락하고 만다. 교회공동체에 전해진 우리의 편지도 부유함, 혹은 풍족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자만과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이 편지가 쓰인 동기 중 하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아들’은 ‘아멘’(ἀμήν)으로 소개된다.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을 두고 ‘아멘’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탈리아의 요한묵시록 전문가인 우고 바니(U. Vanni)는 ‘아멘’이라는 호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와 하나 되어 육화하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편지가 교회공동체 내의 자만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상관없는 이를 향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 된 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창조의 근원’으로 소개된다. 유다 사회는 창조 때의 하느님을 지혜와 연결하여 사유하곤 했다. 예컨대 잠언 8장 22절부터 23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창조의 근원으로 예수님을 상정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 ‘아멘’으로서, ‘창조의 근원’으로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어 모든 시공간, 그리고 만물을 또한 하나로 엮어내는 분이시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은 ‘모든 것의 정점이자 모든 것, 그 자체’로 소개되신다.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 됨은 갈라짐을 배제한다. 다른 어떤 것에 휩쓸리거나 다른 무엇이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을 흔드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라오디케이아는 “미지근”(묵시 3,16)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은 ‘적당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노시스, 그러니까 영지주의적 사고에 젖은 신앙 공동체를 향한 비판이라 해석한다. ‘미지근’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세상의 가치가 혼재되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는 옳고 세상은 그른 것이어서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침탈하고 방해한다는 이원론적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올바름과 신앙의 올바름, 세상의 지고한 지혜와 신앙의 지혜를 분별없이 무턱대고 동일시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세상과의 호흡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세상과의 불협화음보다는 친교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이름으로 세상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로 인식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세상에 맞서지 말고, 우상숭배든 황제숭배든,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적당히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들 줄도 알아야 현명한 신자’라는 것. 이것은 함께 호흡하는 게 아니라 타협하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신앙의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가서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것을 더 알고, 세상과 타협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훌륭하고 모범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나, 그러한 것이 신앙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것에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 외경 중 하나인 토마스복음에 따르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은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체가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토마스복음 21,37 참조) 우리가 얼마 전 읽은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묵시 2,9) 초대교회는 세상의 물질적, 혹은 정신적 성장과 부유함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세상보다 더 깊고 넓은 지혜를 소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 가장 낮은 곳에서, 때론 숨죽이고 때론 저항하며 버텨내는 삶을 살아서 그렇다. 세상이 모두 옳고 그름을 논박하며 가장 멋진 삶, 가장 훌륭한 삶을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살아내느라 세상의 손가락질과 모욕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다. 죄지은 자, 병든 자, 세상의 상식에 벗어난 자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며 어떻게든 용서와 화해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세상의 모욕은 신앙의 부유함이었고 풍족함이었다. 세상의 지혜와 부유함이라는 겉옷 위에 신앙을 액세서리로 꾸며내는 일보다는 우리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하느님 앞에 진정 부유한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다”(콜로 2,3)고. 우리에게 진정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편지 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일(묵시 3,20 참조), 예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묵시 3,21 참조)이 그것이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자주 묻는다. 담배 끊고, 술 끊고, 심지어 피정의 이름으로 효소 단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잦다. 제 한 몸 가꾸는 일이야 현대인의 필수 덕목에 가깝지만, 우리의 신앙이 제 마음의 평온이나 제 몸의 가벼움에 집중하는 일인가 자주 묻게 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팠고 예수님도 그랬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는 생명에 배고파 생명을 내던졌고 세상에 실패하며 신앙 안에 승리했다. 세상을 평온히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한다면 우린 왜 성당에 다녀야만 하는가, 나는 자주 묻게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9면

[말씀묵상] 사순 제4주일

오늘 복음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를 부자간에 견주며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로, 구약성경에도 비슷하게 자주 등장하던 것입니다.(탈출 4,22; 이사 1,2; 예레 31,9.20 등) 특히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백성의 불충에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호세아서 11장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호세 11,8) 이는 또한 쥐엄나무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비유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고 탕진한 아들이 돼지치기가 된 뒤 배고픔에 시달리다, 돼지 밥이라도 먹기를 바랐지만 얻지 못했다는 대목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에 돼지 밥으로 나오는 ‘열매 꼬투리’가 바로 쥐엄 열매입니다. 이는 쥐엄 열매의 생김새가 콩꼬투리 같아서 우리말 성경에 그렇게 번역된 듯합니다. 쥐엄 열매는 껍질을 먹는데요, 맛은 초콜릿과 비슷하지만 끝맛이 떫어 즐겨 찾는 열매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좋다고 찾는 이들이 늘었지만 말입니다. 쥐엄나무는 히브리어로 하루브, 영어로는 캐럽(carob)입니다. 일명 ‘메뚜기 나무’로도 통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하루브’가 메뚜기를 뜻하는 ‘하가브’와 비슷해서 그런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 먹었다는 마르코복음 1장 6절의 메뚜기를 쥐엄 열매로 보기도 합니다. 늦여름부터 갈색으로 완숙하는 쥐엄 열매는 많은 양을 거둘 수 있으므로, 빈민의 구황작물이자 동물 사료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에는 쥐엄나무가 가난의 상징이었지요. 그러다 캐럽(carob)이 캐럿(carat)으로 발전하며 부의 상징으로 뒤집히게 됩니다. 고대에는 쥐엄 열매의 씨가 무게를 재는 단위로 쓰였는데, 이것이 이후 보석의 단위로 신분(?)이 급상승하면서 마태오복음 19장 30절의 말씀처럼 꼴찌가 첫째 된 셈입니다. 다만 쥐엄나무는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일흔 해가 지나야 첫 열매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쥐엄나무의 이런 특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탈무드」 타아닛 23ㄱ에 나오는데요, 이는 ‘호니’라고 하는 한 의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야기 안에서 호니는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시편 126,1)라는 구절을 읽습니다. 그러면서 바빌론으로 유배당한 이스라엘(기원전 6세기)의 ‘운명이 바뀌어’ 유배에서 풀려나는 데 일흔 해 걸렸는데(2역대 36,21) 어떻게 그 일이 잠들어 ‘꿈꾸는’ 동안 가능한지 연구하였답니다. 성경을 너무 자구적으로 해석한 사람 같지요?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쥐엄나무를 심는 걸 보고, “그게 열매 맺으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심느냐?”고 호니가 물었답니다. 그 남자가 70년이라고 답하자 호니는 “당신은 70년을 더 살 자신이 있나 보군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답합니다. “나는 내 조상이 심은 쥐엄 열매를 먹었소. 이건 내 후손을 위한 거요.” 그 뒤 호니가 밥을 먹고 깜빡 잠들었는데, 깨어 보니 어떤 남자가 열매를 모으고 있더랍니다. 호니가 그를 보고 “이 나무를 심은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의 손자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호니가 잠든 동안 일흔 해가 흐른 셈이죠. 놀란 호니가 집으로 가니, 아무도 그를 호니라고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호니는 슬퍼하며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 뒤 쓰러져 죽었답니다. 이 이야기가 전달하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고통스러운 유배에서 구원받기까지 과정은 길어 보이지만, 일단 지나고 나면 꿈을 꾼 듯 쏜살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그냥 건너뛰려고 하면 그 안에 담긴 삶과 추억을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죠. 70년 자란 뒤 열매를 맺는다는 쥐엄나무는 우리에게 ‘인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 실린 여호수아기의 말씀도 기다림과 인내의 한 예를 보여줍니다. 이집트 종살이에서 탈출하여 끝날 것 같지 않던 사십 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런 기다림 끝에 이집트의 ‘수치’를 떨치고 새 땅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옛것을 넘어 새것이 되도록”(2코린 5,17) 메시아께서 오시기까지,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기까지(2코린 5,21) 구약 시대 내내 기다려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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