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연중 제15주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제자들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걷다가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아,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마르 1,16-20 참조)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했고,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기적을 눈으로 봤고 그분의 가르침을 귀로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반자이자 목격자이며, 동시에 특권을 가진 청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라고 약속하셨지만, 그들은 아직 ‘사람 낚는 어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저자가 전해주는 ‘예수 이야기’에서 그들은 아직 ‘조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심으로써, 그들은 ‘사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보내다’ 혹은 ‘파견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동사 ‘아포스톨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르 6,7 참조) 예수님의 ‘파견’을 통해 제자들은 ‘따르는 이’ 혹은 ‘배우는 이’에서 ‘파견 받은 이’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은 제자들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부여한 ‘권한’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권한’ 혹은 ‘권위’라고 번역할 수 있는 ‘엑수시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고 그와 함께 머무른 이들이 ‘권한’을 받음으로써 ‘사도’라고 불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마르 3,14-15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처럼(마르 1,15) 그들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의 병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권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다른 이(예를 들면, 군중 혹은 여인들)와 구별할 수 있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사도, 곧 파견받은 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사도들이 복음 선포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마르 6,8-9 참조), 먼저 사도들은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아야 합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벌의 옷은 선교활동을 위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버림으로써 부여된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도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옆에서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사도 3,6) 두 번째로 파견받은 사도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사람들의 환대나 거절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마르 6,10-11 참조) 여행자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미덕이었습니다(창세 18,1-8; 19,1-3; 욥 31,32 참조). 그러나 사도들이 환대를 받을 때에도, 그들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혹시 거절을 당한다면 거절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할 때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다녀왔을 때 옷이나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리곤 했는데(2열왕 5,17; 이사 52,2 참조), 이 행동은 정결의 표지이면서 동시에 절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1독서에서 ‘파견 받은 이’의 또 다른 모델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모스입니다.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예언자였습니다(아모 7,15 참조). 그는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아모 7,14)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들어 올려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회적 불균형 현상으로 이어졌고, 부당한 방법으로 재화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법적 부조리 또한 만행했습니다. 외적으로는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찬 이스라엘로 아모스 예언자는 파견됐고, 그곳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주님의 날, 거룩한 미사성제에 참여한 우리는 사제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말씀과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해 주셨고,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셨습니다. 미사가 끝나면서 파견을 받는 우리는 더 이상 말씀을 듣고 몸과 피를 모시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미사경본 총지침」 90항은 파견의 신학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부제 또는 사제는 신자들 각자가 돌아가 선행을 하여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그들을 파견한다.” 미사의 은총을 가득 받고 파견된 우리는 주님의 사도로서 미사 안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심을 힘차게 고백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지혜로운 왕 솔로몬의 타락

지혜로운 사람은 가난해도 즐겁고 어리석은 사람은 부유해도 걱정에 잠을 못 이룬다. 신라시대의 대학자 최치원(857-?)은 생활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했다. 만족하면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기 일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원님과 백정이 있었다. 원님은 그야말로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고 착하고 예쁜 부인을 만나 자식도 여럿 두었다. 백정은 천한 신분 때문에 매일 무시당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여 일찍 늙어 보여 결혼도 못 하는 신세였다. 어느 날 원님이 산책 중에 백정을 만났다. 백정은 예의를 갖추어 절을 하였다. “그런데 원님, 안색이 불편하신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안 좋으신 곳이라도?” 원님은 하늘을 한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걱정이 너무 많네. 혹시 고을에 강도나 도둑이 들지 않을까? 혹시 누가 나에게 불만이 있는 자가 나를 모함하여 임금님이 갑자기 벼슬에서 파직시키지 않을까? 그 밖에도 걱정거리가 많다네. 내가 이런데 자네는 오죽하겠나?” 그 말에 백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쇤네는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가족이 없으니 걱정할 게 없고, 가진 재산도 없으니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고기를 사람들에게 팔면 돈을 받으니 기쁘고, 매일매일 그냥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그 백정의 말에 원님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충격이 왔다. 비로소 백정의 밝은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의 삶에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보통 인간의 고통은 욕심에서 비롯되고 이 욕심이 사람들을 죄와 잘못된 길로 이끈다. 솔로몬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태평성대를 이룬 왕이었다. 솔로몬 하면 항상 지혜라는 단어가 따라붙을 정도로 영민한 왕이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정을 확립했다면 그의 아들 솔로몬은 안정된 정치적 수완으로 왕국에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정략적인 혼인과 무역을 바탕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고,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부전자전이라 했나? 솔로몬도 아버지를 닮아 호색가의 DNA(?)를 갖추었다. 그는 수많은 외국 이방인 여인들, 모압 여인, 아몬 여인, 에돔 여인, 시돈 여인, 헷 여인 등 온갖 외국 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분명 정치적 장점도 있었지만, 왕궁 깊숙한 곳에서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공공연하게 이뤄지게 됐다. 이스라엘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종교국가이며 항상 이스라엘의 문제는 역사는 잡신들과의 투쟁과정으로 점철돼 있었다. 솔로몬은 우상숭배가 궁정 안에서 이루어지게 했고, 지나친 세금 부과와 강제노역으로 백성의 원성을 샀다. 큰 둑은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가장 약한 부분부터 방심한 사이 어느새 전체가 무너진다. 하느님의 축복을 약속받는 것으로 시작된 솔로몬의 통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풍요와 큰 성공은 솔로몬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는 결국 타락하게 됐다. 인생에서 겸손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의 마음을 지니자.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1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회에도 법원이 있다?

‘교회 상식 팩트 체크’에서 종종 ‘교회법’을 인용했다는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법은 교회에 관한 여러 제도나 성사, 전례 등에 관한 규범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와 형벌, 재판에 관한 다양한 법규도 실려 있는데요. 그렇다면 재판을 하는 곳, 법원도 있을까요? 네, 교회에도 법원이 있습니다. 교회 법원도 사회의 법원과 비슷한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전국 교구들에는 법원이 있는데요. 15개 교구에는 1심 법원이, 관구를 관장하는 대교구, 바로 서울·대구·광주대교구에는 2심 법원이 있습니다. 대법원 역할을 하는 법원도 있습니다. 교황청에 있는 사법기구(Institutions of Justice)입니다. 이전에는 ‘법원’이라고 불리다 2022년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가 반포되면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사법기구 안에는 대사(大赦) 등을 다루는 내사원, 교회의 사법을 올바로 관리될 수 있도록 감독하는 대심원, 그리고 다른 법원들에서 이미 심판한 사건을 제3심이나 그 이상의 심급으로 재판할 수 있는 상급심 법원인 공소원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이 활동하듯이, 교회 법원도 비슷한 구성으로 재판이 열립니다. 먼저 청구인을 변호하는 변호인, 판결을 하는 재판관이 있습니다. 사회의 법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성사에 관한 재판을 하기 때문에 성사보호관이 검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 법원은 사회의 법원과 구조가 비슷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요. 각 교구가 운영하는 법원은 누군가를 단죄하거나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가 각 교구에 법원을 설치한 이유는 혼인장애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이 교회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성사생활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성사를 통해 맺어진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은 것으로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이혼’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 안에서는 결혼생활 중에 갖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고, 또 사회적으로 이혼·재혼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성사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를 교회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혼인이 무효임을 밝히는 소송이 필요합니다. 이를 교구 법원들이 돕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혼인법에 관한 재판 외에도 여러 재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재판들은 법원에서 하기 보다는 별도의 위원회 등을 구성해 진행하곤 합니다. 이를테면 시복시성을 위한 재판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교구 법원이 오롯이 신자들의 성사생활 회복을 돕는 역할을 하도록 합니다. 수원교구 사법대리이자 재판관인 박석천(안드레아) 신부님은 “교구에 법원이 있는 목적 자체가 혼인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을 돕기 위해서”라며 “사회 법원처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고민 상담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오시면 좋겠다”고 전하셨습니다.

2024-07-14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짝을 찾으며 바치는 기도

“아내를 얻은 이는 행복을 얻었고 주님에게서 호의를 입었다.”(잠언 18,22)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은 뒤 이사악의 부인감을 자기 고향에서 얻어 오도록 자신의 가장 나이 많은 종을 파견합니다. 아브라함은 과거에 함께해 주시고 자기에게 미래를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천사를(창세 24,7 참조) 그에 앞서 보내시리라 믿습니다. 자신의 짝을 찾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짝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자신의 사명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종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 오늘 일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제 제가 샘물 곁에 서 있으면, 성읍 주민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것입니다. 제가 ‘그대의 물동이를 기울여서, 내가 물을 마시게 해 주오.’ 하고 청할 때,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먹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 소녀가, 당신께서 당신의 종 이사악을 위하여 정하신 여자이게 해 주십시오. 그것으로 당신께서 제 주인에게 자애를 베푸신 줄 알겠습니다.”(창세 24,12-14) 여기서 자기에게도, 또 달리 말하지 않아도 낙타에게도 물을 주는 소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러한 소녀는 친절하고, 다른 이를 돌보고, 나그네를 맞아들이며,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까지 배려하는 부지런한, 훌륭한 여인의 덕을 갖춘 이를 의미합니다. 목마른 낙타 한 마리가 70리터의 물을 마시니 그가 데려온 열 마리 낙타에게 주저함 없이 물을 샘에서 길어 먹이는 소녀는 배려심과 수행 능력을 겸비한 아름답고 뛰어난 여인으로서 이사악의 아내,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종의 행위와 하느님의 도우심이 복합되면서 하느님이 누구를 이사악의 아내로 정하셨는지가 드러납니다. 종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창세 24,15 참조) 레베카가 등장하고 자신이 기도한 대로 그녀가 행동하자 종은 무릎을 꿇어 주님께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에게 당신 자애와 신의를 거절하지 않으셨으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창세 24,27) 그는 주님께서 그를 바른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이어 그는 주인의 아우 집안인 레베카의 집에 들어가고 그 가족들에게 자기가 바친 기도와 그 기도가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음을 증언합니다. 이로써 그의 말을 듣는 가족들은 이 일에 분명히 하느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고, 하느님께서 몸소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사악과 레베카의 결혼을 승낙합니다.(창세 24,50 참조) 이에 다시 한번 종은 땅에 엎드려 하느님을 경배합니다(창세 24,52 참조). 평생의 반려자를 찾는 것은, 또 그와 함께 인생의 길을 걷기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서 매우 어렵습니다. 결혼 문제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 부딪힐 때, 더 이상 자신의 힘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는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많은 종은 그런 자세의 모범입니다. 그는 사건 전체에서 하느님께서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며 다섯 번이나(24,12-14;26-27;42-44;48;52) 기도합니다. 누구에게나 미래를 향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에서 보이듯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셨고 앞으로도 우리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누구나 혼자 길을 걷지 않고 그분과 함께 갑니다. 그분의 도움을 믿고 그분과 함께 내리는 결정에 큰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07-14

[말씀묵상] 연중 제14주일

고향에서 배척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거부’와 ‘배척’이라는 주제와도 매끈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나자렛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이 일은 여타 지방에서도 늘 하시던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그 가르침을 들은 청중의 반응은 성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다는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보인 실감적, 입체적 반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어떻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나올까?’(마르 6,2 참조) 하는 말들에 그들이 느낀 심리적 파장이 속속들이 녹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보면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이 지니신 ‘치유의 능력’입니다. 곧 가르침과 이적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익명화된 이들의 말들은 그러나 아직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극의 물꼬를 바꾸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6,3)고 하는 대목입니다. ‘못마땅하게 여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로 ‘걸려 넘어지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동사가 줄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어졌음을 생각할 때, 이들의 다소 거친 배척이 더없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시종일관 예수를 ‘저 사람’이라 부르는 것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무시, 경멸,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의 근거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익숙한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출신 배경을 가진 ‘아웃사이더’일 뿐입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커다란 반감이 너무도 선명하여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6,3)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말이 낙인처럼 찍힙니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이고 선입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점’을 말합니다. 고향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묘한 심리적 장벽입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의 노골적인 거부와 배척은 불편한 압박의 틀이 되어 예수님께 먹먹한 경험을 안깁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4)는 말씀을 하시며 당신의 처지를 예언자의 삶에 빗대어 길고도 쓸쓸한 여운을 남기십니다. 배척과 미움의 대명사인 예언자들의 삶에서 당신의 삶을 읽어내고 계십니다. 마을 사람들의 불신과 배척은 예수님의 이후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6,5)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6,6)라는 마지막 구절이 강력한 여진을 남깁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향에서의 ‘거부’와 ‘배척’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믿음과 연관 지으며 그들의 불신앙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듣고 고향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에 예수님께서 놀라십니다. 바람과 파도, 더러운 영과 질병도 예수님의 권능에 복종했는데,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적수’인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마주하고 계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불신이 마치 예수님의 손발을 묶어 버린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권능이 압도당한 것이라기 보다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믿음의 부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느님 나라의 확장에 있어 믿음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나자렛 고향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를 편견의 감옥에 가둔 사람들의 고착화된 사고방식이 타자에게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편견의 감옥을 부수기는커녕, 오히려 더 높은 담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이 유독 눈에 밟히는 오늘, 생각의 탄력성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07-07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이사(移徙)하면서 바치는 기도

올 연말까지 기도에 대해 여러분과 생각을 나눌 신정훈 미카엘입니다. 언젠가 어느 신자분이 “어떤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까?”하며 여러 번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끝까지 저는 그분에게 시원한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분은 어려운 문제를 안고 계셨고, 올바른 기도를 드리면 그 문제가 즉시 풀어지리라 여기셨던 듯싶습니다. 명의의 한 수에 깊은 병이 씻은 듯이 나는 것처럼 기도를 문제의 해결 도구로 삼고자 하는 생각은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사람은 그분을 찾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은총입니다. 기도하는 사람 안에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쁜 일, 또 슬프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자기 안에 활동하시도록 합니다. 기도에서 각 사람이 처한 상황과 그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기도의 구체적인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에 우리는 성경을 따라가면서 기도를 배우고자 합니다. 칼 라너 신부님은 어떤 이에게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것이 곧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하느님과 가까워질 것입니다. 제 글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의견 주시면(shinmichael@hanmail.net) 짧고 부족하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나이 마흔의 야곱은 형 에사우를 피해 부모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창세 28,20-22) 야곱의 기도는 여러 조건을 달고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과의 관계가 깊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야곱은 하느님을 ‘당신’으로 표현하면서 그분과 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야곱은 되돌아오는 길에 형이 장정 사백 명과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하느님을 찾습니다. “저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저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너의 고향으로, 너의 친족에게 돌아가거라. 내가 너에게 잘해 주겠다.’ 하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당신 종에게 베푸신 그 모든 자애와 신의가 저에게는 과분합니다. 사실 저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이 요르단강을 건넜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제 형의 손에서, 에사우의 손에서 부디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가 들이닥쳐서 어미 자식 할 것 없이 저희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너에게 잘해 주고, 네 후손을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바다의 모래처럼 만들어 주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이 두 번째 기도는 하느님의 약속 말씀으로 시작하고 맺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야곱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위안과 도움을 찾는 야곱은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하느님과 친해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기도가 야곱에게 힘을 줍니다. 학교나 일자리 등 많은 이유에서 우리는 삶의 터전을 옮깁니다. 낯선 환경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그분에게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우리를 그분께 가까이 이끕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01년 서울대교구 사제로 서품됐으며, 뮌헨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전공했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강의했으며 교황청 그리스도인일치촉진부 자문 위원이다. 2020년부터 독일 뮌헨 상트 막시밀리안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다. 역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신학 주석」 시리즈, 「그리스도교 신앙」(공역) 등이 있다. 기획 ‘성경 속 기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전 교수인 서울대교구 신정훈(미카엘) 신부가 성경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기도를 바로 알고 행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입니다.

2024-07-0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성당에 들어가면 어디에 절을 할까?

우리는 성당에 들어가고, 또 나올 때마다 고개를 숙여 절을 합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성당 앞의 제단을 향해서 예수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인사를 하기는 하는데, 정확히 어디에 인사를 하는 것일까요? 의외로 신자분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립니다. 일단 예수님께 인사드린다 생각하니 예수님이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인사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감실에 인사를 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은 제대에 인사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올라온 답변들이 서로 달라 헷갈리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성당에 들어갈 때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미사 중 독서자들도 제단에 오르기 전에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상징하는 제대는 성체성사가 재현되는 주님의 식탁이자 성당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제대를 중요하게 여겼는데요. 교회는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교회가 그 둘레에 모이는 제대는 한 신비가 지니는 두 가지 측면, 곧 주님께서 희생되신 제단과 주님의 식탁을 나타낸다”며 “그리스도교의 제대가 상징하는 것이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383항) 제대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제사가 이뤄진 제단임과 동시에 예수님과 모든 신자들이 함께 하늘나라의 잔치를 만끽하는 식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분명하게 지속적으로 나타”냅니다.(「로마 미사경본 총지침」 297항) 4대 교부 중 한 분으로 유명한 암브로시오 성인도 “제대는 성체를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성체는 제대 위에 계신다”, “사실 그리스도의 제단이란 그리스도의 몸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말씀들로 제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제대는 주로 돌로 만드는 데요. 그 이유도 “살아 있는 돌”(1베드 2, 4)이자 “모퉁잇돌”(에페 2, 20)이신 예수님을 더 잘 드러내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는 감실을 “성당 안에서 눈에 잘 뜨이는 뛰어난 곳에 아름답게 꾸며져 기도하기에 적합하게 설치”하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교회법 제938조2) 감실을 “최대의 존경심으로써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설치하라고도 말합니다. 다만 감실의 외양과 위치는 “제대에서 이루어진 성체성사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는 주님께 드리는 경배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말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83항) 감실은 신자들이 제대 위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와 파스카 신비를 기억하고, 성체 앞에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대에서 거행되는 성찬례가 없다면 감실도 없는 것이지요.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11항) 제대를 향해 고개 숙여 절할 때마다 성찬례를 통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시고, 또 우리와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2024-07-07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간 다윗왕

중국 명나라 시대에 큰 도둑 떼가 국경에 몰려들었다. 왕양명(1472-1528)은 황제의 명령으로 국경 마을로 떠났는데 도둑들은 산속 깊이 숨어 있고 좀처럼 쉽게 정벌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읍에 있는 왕양명의 제자들이 학문을 게을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왕양명은 즉시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무리 험한 산속에 버티고 있는 도둑이라도 무찌르기를 계속하면 결국 정벌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도둑은 완전히 무찌르기가 정말 어렵다.” 스승의 편지는 제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에 정진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유혹의 연속이다. 왕양명은 안 될 일인 줄 알면서 하는 것, 열심히 해야 할 때 피우는 게으름, 이런 것들이 모두 마음속의 도둑이라 했다. 그는 이 도둑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남의 것을 탐하거나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그저 혼자만 잘 먹고 잘살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왕양명은 항상 곧은 마음으로 자신 속의 도둑을 물리쳐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윗왕은 어느 날 밤에 궁전을 거닐다가 멀리서 목욕을 하고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그 여성은 밧 세바란 여성인데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다, 그의 남편은 충신 우리야였다. 그런데 다윗은 부하를 시켜 여성을 데려와 정을 통했다. 다윗은 부하 우리야를 죽이기 위해 꾀를 냈다. 다윗은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에 보내 결국 그를 죽었다. 그후 다윗은 우리야의 부인을 아내로 삼았다. 다윗은 탐욕에 눈이 멀어 부하를 일부러 죽게 하고 그 아내마저 차지하는 죄를 지은 것이었다. 하느님은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다. “어떤 성에 부자와 가난한 이가 살았습니다.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잣집에 손님이 왔는데, 부자는 자기 양이 아까워서 가난한 집의 새끼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저런 세상에 그런 파렴치한 놈이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소리를 지르며 흥분한 다윗을 보고 나단은 결정구를 날린다. “그 파렴치한 놈이 바로 임금님입니다. 임금님은 충신 우리야를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차지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임금님은 그 일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나 하느님은 마치 대낮처럼 그 일을 온 천하에 비출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하느님께 큰 죄를 지었소.” 다윗왕은 나단에게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했다. 이스라엘 역사상에서 위대한 성군으로 존경받는 다윗왕도 예상외로 죄를 많이 지었다. 그러나 다윗이 위대한 것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인정하고 회개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뉘우칠 줄 알았던 다윗,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순수한 그의 믿음을 높이 존경하는 것이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07-0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황님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는다?

‘무류성’(無謬性)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무류(無謬)는 ‘오류가 없다’는 뜻입니다. 라틴어 인팔리빌리타스(infalliblitas)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라틴어는 단순히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라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절대 오류에 빠질 수 없다’는 강한 의미를 담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무류성’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교황님입니다. 교회는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25항)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교황님을 참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교황님도 실수도 하고, 잘못 말하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황님이라고는 하지만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이니까요. 만약 교황님이 절대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면 미사를 시작하면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라며 고백의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고해성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없다면 죄를 짓지도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미사 중 고백의 기도도 바치시고, “15일이나 20일마다 고해성사를 한다”고 밝히신 적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황님이 무류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교회법은 “교황은 그의 형제들을 신앙 안에 굳세게 하는 것이 소임이므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이나 도덕에 관해 고수해야 할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 그의 임무에 의해 교도권의 무류성을 지닌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749조) 교황님이 모든 분야에서 오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목자이자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언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라”(요한 21,15~17)고 명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님께도 그 책임과 권한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무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의 무류성을 교의로 천명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부들은 “실로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성령이 약속된 이유는 그분의 계시로 새로운 교리를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도들을 통해 전승된 계시 또는 신앙의 유산을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하게 보호하고 신실하게 해설하려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영원하신 목자」 제4장) 교황님이 새롭게 계시를 받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이미 주어진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데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고,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류성은 이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 곧 교회와 함께 머무시면서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보호하고 계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교의입니다.

2024-06-30

[말씀묵상]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언젠가 열두 해 동안 하혈해 온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봤습니다. 많은 작품이 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이 그림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구도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그 누구의 얼굴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는 사람들의 발이 보이는 가운데, 예수님 옷자락 끄트머리에 닿은 여성의 손가락을 그려냅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은 예수님께 나아온 여성의 눈길에서 그려낸 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그림을 마음에 간직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음속에서 그 그림을 꺼내어서, 여러분과 함께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림을 닮은 시선으로 복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려주시고, 열두 해나 하혈하는 여인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은 묻습니다. 이게 정말 사실이냐고요. 저는 그런 질문이 부족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성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겠지요. 꽤 많은 학자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예수님을 탐구하였습니다. 이를 ‘역사적 예수 연구’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쓰인 수많은 기록을 발굴했고, 사료를 바탕으로 예수님 시대를 재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시대인 기원후 1세기, 갈릴래아에 수많은 기적 행위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게자 베르메스 「유대인 예수의 종교」·요아힘 그닐카 「나자렛 예수」 참조)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적 신앙의 르네상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지요.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행한 수많은 치유 기적 이야기는 그때의 갈릴래아에서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 역시, 그런 기적 행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치유 기적은 진짜였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치유 기적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의 문장을 더듬어 읽습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다급히 누군가를 찾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반문합니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십니까?” 다급한 예수님의 모습과는 달리, 제자들의 모습은 차갑습니다. 제자들의 차가움 가운데 고립된 예수님의 다급함을 알아본 것은, 바로 그 여성이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안고, 여성은 다시 한번 예수님께로 나아갑니다. 왜 이 여성은 예수님께 절박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빠져있을까요. 율법은 월경 중의 여성을 부정하다고 하였습니다.(레위 15,9-27 참조) 월경 중의 여성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열두 해나 하혈했다면 그 의미는 좀 달라집니다. 율법에 따르면 이 여성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와도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해나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았을까요. 많은 의사를 만나는 동안 모든 재산을 썼을 것이고요. ‘숱한 고생’이라는 표현에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담겨 있나요. 바로 그런 여성이 군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부정한 여성은 사람들을 치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여성은 군중 속의 사람들을, 마침내 예수님도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성을 찾아서 그 마음의 짐을 벗겨주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죄인이나 부정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랑받는 딸이라고 말이지요.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와 건강을 빌어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이 정리될 무렵,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아이가 죽었으니 수고스럽게 오실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회당장과 함께 집으로 향하십니다. 집에 도착하니 사람들은 큰 소리로 울며 곡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르 5,39)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어’ 버립니다. 울음 속에 감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이 드러나니, 그제야 회당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집으로 향하는 회당장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요. 아이가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음.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아버지의 마음. 집에는 사람들이 울고 있고, 이제 저 문 너머에 차갑게 식어가는 아이를 마주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 사람들의 비웃음을 마주한 절박한 아버지의 마음. 그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어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의 무심한 말과 표정도 화살처럼 날아드니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물리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를 살리러 오시면서, 회당장의 슬픔을 돌보고 계셨던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만 고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긴 여성을 찾아서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셨습니다. 점점 희망을 잃어가는 회당장의 모든 걸음에 함께해 주셨고, 계속해서 용기를 주셨습니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열두 해나 하혈했던 여인을 낫게 하시고, 어린아이의 숨결을 돌려주신 사건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치유 기적’의 사실 여부에만 주목해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에는 가득합니다. 복음이 정말 전해주려던 것은, 그 따뜻한 눈길과 섬세한 손길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찾던 그 마음으로 우리도 찾고 계시고, 회당장과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하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겠지요. 옛날의 기적을 묵상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종이 위에 말라붙어 있는 글자들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으니까요.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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