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에스테르

6·25전쟁이 시작됐을 때 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에게 밀렸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1950년 7월 5일에는 미군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을 상대로 첫 전투를 벌였는데, 세계 최강인 미군이 처참하게 패배했다. 북한군에게는 소련제 전차가 있었는데 국군에게는 전차를 파괴할 만한 화력이 없었다. 그래서 국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북한군 전차에 직접 올라가 해치를 열고 준비한 수류탄, 화염병을 안으로 던져 제압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차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국군들은 결사대를 자원으로 뽑았다. 6·25전쟁 하면 남성들만 주로 언급되는데, 사실은 1950년 8월에 해병대 4기 모병에 1300여 명 중 여성에 126명이나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1950년 9월 6일 서울수복 후 여군 500명 모집에 수천 명이 몰렸다고 하니 당시 여성들의 애국심도 대단했다. 최근 한 모임에서 요즘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데 우리나라도 걱정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한 전문직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면 바로 입대해야죠”라고 담담하게 말해서 모두 깜짝 놀랐다. 성경에서 용감한 여성을 꼽을 때 에스테르가 빠지지 않는다. 베냐민 지파 모르도카이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잡아 온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모르도카이는 왕궁에서 일을 했는데 용모가 빼어난 에스테르를 양녀로 삼았다. 나중에 에스테르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왕비가 되어 목숨을 걸고 유다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애국 여성이 되었다. 모르도카이는 우연히 왕을 가까이에서 지키는 두 내시의 반역 모의를 듣게 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을 고발하였고 두 내시는 처형된다. 모르도카이는 이 일로 왕의 신임을 더 얻게 된다. 한편 이 두 내시와 이해관계가 있었는지 재상 하만은 이 일로 모르도카이와 그의 민족 유다인들을 말살하려고 작정한다. 에스테르가 왕후가 된 후 모르도카이도 궁궐 대문에서 일을 보게 되었다. 모든 신하들은 재상 하만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했지만 모르도카이는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하만은 왕에게 유독 유다인들만이 다른 민족과 화합하지 않아서 앞으로 위협이 되기에 처단해야 한다고 고발하고 왕에게 허락까지 받았다. 이 사실을 모두 알게 된 모르도카이는 옷을 찢고 자루 옷을 입은 다음 재를 뒤집어쓰고 대성통곡을 하며 에스테르에게 소식을 전했다. 에스테르는 유다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사흘 동안 자신을 위해 단식기도를 올려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도 왕궁에서 단식기도를 하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 뒤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을 만나 유다인들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음모를 폭로했다. 에스테르의 지혜로 하만이 되치기를 당해 오히려 죽게 되었다. 에스테르가 모르도카이에게 보낸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다인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고 있다. “법을 거스르는 것이긴 하지만, 임금님께 나아가렵니다. 그러다 죽게 되면 기꺼이 죽겠습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말씀묵상] 연중 제29주일·전교 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마태오복음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마주하며, 이란의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놓습니다. “관객에게 답을 알려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아스가르 파르하디,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감독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그 감독은 좋은 이야기는 열린 결말로 맺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말이 복음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부제 시절, 서울 어귀에 있는 정교회 성당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였지요.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길이가 같은 네 팔을 십자 모양으로 뻗고 앉아 푸른 돔을 쓰고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을 오롯이 담아내려는 듯, 네 기둥은 네 아치를 만들고 있었고, 성당의 천장과 벽면은 온통 이콘과 성화로 가득 차, 주님의 행적과 제자들의 이야기를 품어내고 있었지요. 그 수많은 성화와 이콘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정문 어귀의 내벽을 보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벽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주님의 양옆에는 사도들과 여러 민족들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다양한 복색을 한 여러 인종이 있고, 그들 가운데는 치마저고리를 하고 쪽진 여성도 있습니다. 성당을 떠나려던 저는 그 벽 앞에서 조용히 말씀을 읊조렸지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사람들이 그 문을 다 건너갈 때까지 기다리며, 그 광경을 눈에 담아 마음에 간직해 두었습니다. 동방 형제들의 성당, 그 한쪽 벽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는 이유는, 그 쓸모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나가는 길에, 정문 내벽에 눈길을 주겠지요. 오늘날 로마 교회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Ite missa est!) 하고 외치며 ‘파견’하듯, 동방 형제들은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이들을 벽면에 초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콘 신학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동방 형제들은 이콘을, ‘그림의 형태로 써 내려간 말씀’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방 형제들의 그 성당은 하나의 복음서이고, 정문 내벽은 그 복음서의 마지막 장이었던 셈입니다. 그렇게 성당을 떠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간직했을까요. 그 부제님들은 이제 사제품을 받으셨겠지요. 그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계시며,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실까요. 저는 복음서의 마지막을 마주할 때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의 벽면을 떠올려 왔습니다. 저는 이제야 복음서의 마지막 이야기가 다소 엉성하게 끝나는 이유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라는 선물은 신앙의 해답을 주는 책일까요. 분명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만, 그러나 이 책은 우리에게 선명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애초에 신앙은 선명한 해답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는 고백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니까요. 오히려, 복음서는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숙제를 주는 책입니다. 여전히 흔들리는 이들에게 사명을 주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했던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요. 그들은 이 이야기의 끝에서 시작한 걸음을 어떻게 걸었고, 또 어떻게 멈추었을까요. 베드로는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를 거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박혔습니다. 안드레아는 러시아까지 선교를 가서 X형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큰 야고보는 유다와 사마리아를 선교하다 예루살렘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필립보는 소아시아에서 선교하다 십자가에 달려 돌에 맞아 숨집니다. 바르톨로메오는 아르메니아를 선교하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졌습니다. 토마스는 인도로, 마태오는 에티오피아로 갔다가 순교했습니다. 작은 야고보는 이집트에서 방망이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타대오는 페르시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습니다. 시몬은 이집트를 거쳐 페르시아로 건너갔다가 톱에 잘려 순교했습니다. 요한은 순교하지 못했습니다만, 살아남은 유일한 사도로서 홀로 오랫동안 교회를 보살피며, 주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머나먼 곳으로 선교를 떠났다가 순교로 마무리되는 이 이야기들은 전승으로 전해질 뿐, 복음서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복음서는 사도들의 부끄러운 자기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사실은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끌어안고 나아가시는 동안,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도망갔다고 고백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골라서 복음서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주님을 마주 뵙고도 “더러는 의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끄러운 자기 고백을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어제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고백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복음서의 마침점 너머에서, 그들은 그런 삶을 살다가 자신의 신앙을 완성시켜 왔습니다. 복음서가 마침점을 찍어도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일상에서 신앙의 이야기는 완성되겠지요. 신앙은 성당 안에서 시작되어, 일상에서 완성될 겁니다. 복음서를 덮으며 의심이 남아있어도 괜찮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남은 숙제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때 끝없이 함께 해주실 주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복음서의 마침점 너머에 우리의 일상도 이어질 겁니다. 우리도 열한 제자처럼 우리의 신앙을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0-20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구일’기도인데 ‘9일’이 아니다?

중세 초 바치던 성탄 전 9일 기도에서 유래 특별한 은총 필요할 때 바쳐 어떤 지향을 두고 묵주 기도를 할 때 많은 분들이 ‘구일기도’를 하곤 하십니다. 그런데 구일기도를 바치는 분들을 보면 기도를 시작한 지 9일이 지나도, 19일이 지나도, 29일이 지나도 끝나지 않습니다. 한 달이 넘도록 계속 ‘구일기도 바치는 중’이시지요. 구일기도면 9일 동안 하는 기도인데 왜 끝나지 않는 걸까요? 실은 구일이 아흐레를 뜻하는 말이 아닌 걸까요? 구일기도의 구일은 아홉 날, 그러니까 말 그대로 아흐레를 뜻하는 말이 맞습니다. 서양에서는 라틴어로 9를 뜻하는 노벰(novem)을 따서 노베나(novena)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숫자 9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상징하는 수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 신약의 열 달란트, 열 처녀의 비유 등에서 알 수 있듯이 10은 완전함을 상징했는데요. 그래서 신자들은 10을 향해가는 9에는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을 향한다는 의미로 여겼습니다. 무엇보다 성령 강림에 얽힌 9일이 구일기도의 가장 직접적인 유래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분을 기다리라”고 하셨고 열흘째에 성령께서 오셨는데요. 제자들이 기도하며 기다린 기간이 9일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이 9일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큰 축일 전이나 특별한 은총이 필요할 때 9일에 걸쳐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특히 중세 초기부터 프랑스와 스페인 등에서 성탄 전에 9일 기도를 바친 것이 널리 퍼지면서 대중적인 신심 행위가 됐습니다. 구일기도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9일에 걸쳐 정해진 기도를 바치거나, 미사와 영성체를 하는 것인데요. 매일 바쳐서 9일을 기도하거나, 일주일 중 하루를 정해 9주간 기도하는 방식도 있고, 9일 간의 기도를 연속으로 여러 번 바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반적인 구일기도는 9일 동안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치는 형식의 기도인데요. 9일 동안만 기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청원을 드리는 구일기도를 3차례(27일), 감사를 드리는 구일기도를 3차례(27일) 바쳐서 모두 54일 동안 구일기도를 바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빛의 신비가 제정되기 전에는 환희·고통·영광의 신비를 돌아가면서 9일 동안 바쳐 각 신비를 3번씩 바쳤습니다. 이렇게 구일기도를 3번하면 신비들을 각각 9번씩 바치는 셈이었지요. 우리는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특별히 주님께 청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구일기도를 바치곤 하는데요. 어떤 분은 9일 중 하루를 빼먹으면 청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식의 말씀을 하곤 하십니다. 그러나 구일기도는 조건을 갖추면 반드시 이뤄지는 마법도 아니거니와 ‘소원 자판기’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공동번역 루카 11,13)

2024-10-2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참회 기도,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 (시편 51편, 130편)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위령기도를 바치는 위령성월이 다가옵니다. “깊은 구렁 속에서 주께 부르짖사오니, 주여, 내 소리를 들어 주소서. 내 비는 소리를 귀여겨들으소서.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께 있사와 더 더욱 당신을 섬기라하시나이다.”(시 130,1-40: 최민순 역)라는 구성진 위령기도 소리를 들으면 돌아가신 가족과 친지를 떠나보냈던 때가 떠오릅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는 막막한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함께 바치는 위령기도는 경황없이 슬픔에 잠겨 있는 이들에게 큰 위안과 힘을 줍니다.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 51편과 130편은 죄를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의 기도입니다. 죄인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과연 들어 주실까요? 시편은 악인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를 행복한 이로(시편 1편 참조), 죄인을 하느님이 미워하는 이 내지 기도하는 이의 원수로(시편 63,10-12; 139,19-22) 칭합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이들은 깨끗하고 흠 없는 이들입니다.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으로 진실을 말하는 이라네.”(시편 15,1-2).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시편 24,3-4) “당신께서 제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중에도 캐어 보시며 저를 달구어 보셔도 부정을 찾지 못하시리이다.”(시편 17,3) 그러므로 반복하여 죄짓는 이들의 기도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집회 34,31) 위령기도에서 사용되는 시편은 죄 지은 이가 바치는 참회 기도 반성과 회개, 신뢰로 용서 구하며 하느님과 관계 회복 위해 애써 하지만 참회 시편은 죄를 지음이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길 중의 하나임을 가르칩니다. 시편 저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의 모습을 하느님의 결백하심에 대비시킵니다.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시편 51,5-6) 이어서 시편 저자는 변화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새로이 만들어 주시길,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시편 51,12-14) 끝으로 시편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널리 전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겸손되이 자기 잘못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종합하자면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올바르고 정직하거나, 적어도 그렇기를 원해야 한다고, 또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반성과 회개, 그분에 대한 신뢰로 하느님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힘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상태인 죽음과 영혼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 죄는 같은 것은 아니지만 유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극명한 대비 속에 죄스러움을 느낍니다. 이 죄스러움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에 근거합니다. 이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용서를 구하는 시편 기도가 이 무상함을 극복하는 힘을 줍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희망 속에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20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죽게 해달라는 이들의 기도를 찬양으로 바꾸시는 하느님(토빗 3,16;3,11-15;13,1-14,1)

20번 정도 기도를 언급하는 토빗기에 따르면 기도는 하느님 찬미와 찬양(4,19;12,6.7.17.20), 건강과 안전의 청원(5,17), 보살핌과 축복의 청원(7,11;9,6), 후손의 기원(10,11), 부모 공경의 청원(10,13), 자비와 평화의 기원(7,11), 하느님 찬양의 권고(12,6), 조신함과 성공의 청원(4,19), 자비와 구원의 청원(8,4) 등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토빗기는 죽고 싶다는 이의 기도도 들려줍니다. 토빗은 고지식하다고 싶을 정도로 외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미 고향에 살 때도 집안 사람들과 달리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물을 드렸고, 이방인들 사이에 포로로 살면서도 까다로운 음식 규정을 지키고 동족에게 큰 자선을 베풀고, 그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1,6-20) 축젯날 주검에 닿아 부정하게 된 상황에서(민수 9,10;19,11) 하필 성결법을 지키고자 방이 아니라 담 옆에서 잠을 자다가 눈이 멀었습니다. 그의 고집스러운 신앙생활은 이웃은 물론이고 부인조차 불편하게 한 듯싶습니다.(2,14) 아내를 의심하고 그와 다툰 뒤 토빗은 자기 연민에 쌓여 죽기를 청합니다. “이제 당신께서 … 명령을 내리시어 제 목숨을 앗아 가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흙이 되게 하소서. 저에게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당치 않은 모욕의 말을 들어야 하고 슬픔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 살아서 많은 곤궁을 겪고 모욕의 말을 듣는 것보다 죽는 것이 저에게는 더 낫습니다.”(3,6) 한순간에 눈이 멀어버린 토빗과 남편을 일곱이나 잃게 된 사라 절망 속에서도 목숨 거둬주시길 기도 진실한 기도 하느님께 다다르자 두 사람 고쳐 주도록 라파엘 파견돼 모든 문제 해결되면서 하느님 찬양 일곱 남자와 결혼했지만, 신랑과 잠자리에 들기도 전에 모든 남편을 잃은 사라는 이웃의 흉흉한 입담과 자기 신세 한탄으로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을 부잣집 딸입니다. 그녀로부터 매 맞은 여종들이 차라리 죽어 버리라고 모욕하자 사라는 목을 매 죽으려고 하다가, 그 때문에 남아계실 아버지가 받을 수모를 생각하여 하느님께 죽음을 청합니다. “분부를 내리시어 제가 이 땅에서 벗어나 다시는 모욕하는 말을 듣지 않게 하소서. … 아버지에게는 저를 아내로 맞아들일 가까운 친족도 일가붙이도 없습니다. 저는 이미 남편을 일곱이나 잃었습니다. 제가 더 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 제 목숨을 거두는 것이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저를 모욕하는 저 말이라도 들어 보소서.”(3,13-15) 둘 다 외로움의 낭떠러지에서 죽고 싶은 생각으로부터 올려진 절망적인 기도이지만 이는 하느님 앞에 다다르고 마치 극의 한 장면처럼 라파엘이 파견됩니다.(3,16-17)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 토빗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 책의 절정을 기도로 장식합니다. “그분께서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 내 후손 가운데 예루살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의 임금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나 얼마나 행복하리오? … 복을 받은 이들은 거룩한 그 이름을 영원토록 찬미하리라.”(13,4.16.18) 그의 시선은 포로 생활과 나그네살이라는 현실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향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영원에 이릅니다. 재산이 많은 토비야 이야기는 나그네살이를 하면서도 재산을 많이 모으는 유다인들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 하지만 토빗, 토비야, 사라, 라구엘, 라파엘 등 앞 세대와 뒷세대, 남녀 모두가 기도하는 모습이 특히 눈에 띕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12,8;14,8-9)는 말씀은 기도하는 이로 하여금 선행을 잊지 않게, 재산을 지닌 이로 하여금 자선을 잊지 않게 도와줍니다. 기도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 “너희의 기도를 영광스러운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12,12)는 라파엘 천사의 말씀 자체가 힘이 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13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에돔의 멸망을 전한 예언자 오바디야

1943년 이전에는 구약성경이 가톨릭 신학생들도 읽지 못하는 금서(禁書)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에 가톨릭교회는 구약성경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신자들을 구약성경에 접근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례 개혁 이전에는 주일 미사 때 구약성경의 독서가 없었으나 지금은 제1독서에서 구약성경을 꼭 읽게 되어 있다. 이단 교회는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생겨난다. 특히 구약 부분은 인간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어 있어 아예 전문가들 이외에는 접근을 금지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 오직 하느님,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의 사상이나 성향을 극단적으로 거슬러 행동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구약성경를 읽는 것 자체를 소홀히 하게 되었고 구약성경을 읽는 대신 준주성범을 오랜 세월 동안 읽었다. 사실 구약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했을 때 잘못 이해할 위험성도 많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은 19세기 이후에 들어와서 점차로 가톨릭 내에서도 활발히 성서학 연구를 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1943년 비오 12세 교황의 회칙 「성령의 영감」(Divino Afflante Spiritu)을 통해 정식으로 성경 문헌을 개방하고 성경 연구의 문을 공식적으로 열어주었다. 유다가 멸망할 때 하느님을 배신하고 갖은 나쁜 짓을 한 에돔의 심판을 선언한 예언자가 오바디야이다. 오바디야 예언자의 정보는 아주 부족하여 작성 시기는 물론 많은 논란이 여전히 있다. 하지만 오바디야 예언자는 에돔에 관해 분명하게 기록했다. 책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초기 시대에는 오바디야가 선지자 엘리야와 동시대에 활동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앗시리아가 침공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 유배시켰다. 바빌론 유배의 전후로 해서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굳이 나누자면 바빌론 유배 전후로 구분한다. 바빌론 유배 이전에 예언자들은 정착 생활을 하면서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배반하지 말고 오직 자신들을 구원한 유일한 하느님만을 섬기고, 계약으로 맺은 율법을 지켜 신실하게 살라고 권고했다. 엄밀히 따지면 하느님을 믿고 있는 채 우상도 함께 주인으로 모신 죄였다. 종교혼합주의라 할까.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곳의 잡신을 섬기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달콤한 열매의 유혹을 이스라엘은 벗어나지 못했다. 예언자 오바디야는 지속해서 에돔의 멸망을 외쳤지만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별로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고 멸망한다. 유다인들은 비참하게 바빌론으로 끌려가 50여 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그러나 오바디야는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언했다. 이제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들이나 이스라엘의 남겨진 이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후세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말씀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0-13

[말씀묵상] 연중 제28주일

교회에 젊은이들이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세례받고 줄곧 주일학교를 다니고, 청년부 활동을 하면서 성장하면서 인생에서 제일 친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사춘기에 많은 고민을 그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이 찾지 않는 교회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오늘 복음은 한 젊은이가 주인공입니다. 이 젊은이는 남달라 보입니다. 세상의 성공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이 젊은이는 어릴 적부터 중요한 계명을 다 지키며 살아온 훌륭한 젊은이입니다. 저라면 이 젊은이와 함께 식사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하고 쉬운 일부터 하면서 공동체를 잘 따라오게 권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 과격해 보입니다. 이런 젊은이에게 모든 것을 팔고 따르라니요! 너무 급격한 변화를 원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이 성경을 묵상하면서 많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젊은이는 무엇을 진심으로 원했을까?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왜 돌아갔고 무엇이 그에게 어려웠을까? 예수님이 말한 ‘가진 것을 팔고 따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부자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많은 것을 가진 부자의 삶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합니다. 넉넉함이 주는 여유와 그 여유가 가져오는 관대함,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으려고 하는 능력은 부자가 갖고 있는 ‘빛’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진 것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느끼는 우월감, 그것을 잃었을 때 받아들이기 힘든 절망, 소유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충동, 그리고 부의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은 부자의 ‘어둠’입니다. 복음 속 부자 청년은 부자가 가진 ‘빛’을 보여 줍니다. 어릴 적부터 계명을 지켜온 신실함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으려는 관대함, 진리를 찾으려는 열망 등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부자의 ‘어둠’이 드러납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을 동일시 하기에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슬픔이 크게 일어납니다. 이런 부자 청년의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크게 놀랍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왜일까? 부자가 그렇게 잘못인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맞게 나를 비우고 동료들을 사랑할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살아온 길이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진리입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내 삶을 전적으로 의탁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삶은 하느님을 신뢰하고 내 삶을 맡기려는 절박함이 부족합니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통해 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가진 것들이 많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뭔가를 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인정도 받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을 쉽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내가 가진 것은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노력합니다. 이처럼,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어려움으로 다가오기에 우리를 난감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말씀에서 실마리가 보입니다. 이 말씀은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 말의 진의는 내가 삶의 관점을 ‘나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바꿀 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가능한 것이 된다는 뜻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살아온 경험을 통해서 보게 되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많은 것을 갖고 살아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에 가장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동안 중요하게 여기면서 꼭 있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 내게 있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 뜻을 따라 사는데 도움이 되도록 일시적으로 허락된 것으로 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내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기에 그것들을 팔고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그것 말고 내게 더 필요하고 좋은 것을 주실 것도 믿게 됩니다.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 복음을 묵상하면서,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제 이야기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찾고 살고 싶었으나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장하면서 제가 갖고자 하는 것들이 인생에서 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가장 의미 있다고 믿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조금씩 더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슬퍼하며 돌아갔던 부자 청년도 아마 저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내게 일시적으로 허락한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찾기 위해서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깨닫고 예수님께 다시 돌아왔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더 갖고자’ 하는 삶을 떠나 ‘머리 둘 곳조차 없다’하셨던 예수님의 길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0-1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묵주 기도 끝에는 꼭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많은 분들이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한 단의 마지막, 바로 영광송 뒤에 이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구원송’이라고도 부르는 ‘구원을 비는 기도’입니다. 보통 묵주 기도를 배울 때 이 기도를 같이 배우곤 하는데요. 그래서 평소에 묵주 기도를 많이 바치는 분들 중에는 묵주 기도를 바칠 때가 아닌데도 영광송 후에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 저희 죄를…”이라고 외우다가 ‘아차!’하는 경험을 하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구원을 비는 기도처럼 영광송 다음에 오는 이 기도를 ‘짧은 마침 기도’라고 부르는데요. 짧은 마침 기도는 구원을 비는 기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바쳐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는 묵주 기도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짧은 마침 기도를 곁들이는 것을 권장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짧은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하다”면서 “그러한 기도의 가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신비의 묵상이 고유한 열매를 맺도록 그 신비를 기도로 마무리한다면, 신비의 관상이 더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다양한 짧은 마침 기도 중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일까요? 구원을 비는 기도는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나타나셨는데요. 성모님은 전쟁의 종식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 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묵주 기도의 모후’라고 칭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발현 중 세 번째 발현이었던 7월 13일에 구원을 비는 기도를 알려주시며 묵주 기도의 한 단을 마칠 때마다 바치도록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비는 기도는 ‘파티마의 기도’(Fatima Prayers)라고도 불립니다. 파티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확산되면서 구원을 비는 기도도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가 널리 퍼져 신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교회의 차원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신심과 함께 기도문이 번역돼 전해지다 보니 구원을 비는 기도에 의역도 있고, 또 기도문의 문구가 달라 혼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주교회의는 2011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현재의 기도문으로 통일했고, 2017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구원을 비는 기도를 「가톨릭 기도서」에 싣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의역은 아직 남아 있는데요. 구원을 비는 기도의 라틴어 기도문을 원문과 비교해 보면 ‘모든 영혼들’을 ‘연옥 영혼’으로, ‘특별히 당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영혼’을 ‘가장 버림받은 영혼’으로 의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바칠 때는 통일된 기도문으로 바쳐야 하겠지만, 본래 기도문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바친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10-13

[성경 속 기도 이야기] 다니엘의 참회 기도(다니 9,2-23)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전형적인 참회 기도를 전해줍니다.(참조: 느헤 1,4-11;9,4-37; 에스 4,17⑬-㉚) 다니엘은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채 채워야 하는 햇수를 곰곰이 생각합니다.(예레 25,11-12) 기도에 앞서 그는 단식하고 자루 옷을 두르고 재를 쓰고 준비한 후, 진지하게 기도와 간청으로 탄원합니다.(9,3) 그의 기도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배신을 길게 고백하고 (9,5-11.13-14) 하느님의 용서를 반복해서 청합니다.(9,9.16) 그런 다음 ‘이제’(9,15.17)라는 말을 통해 하느님께 청하는 바를 밝힙니다. “주님, 당신의 그 모든 의로운 업적을 보시어,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분노와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 주님, 당신 자신을 생각하시어 황폐한 당신의 성소에 당신 얼굴을 빛을 비추십시오. … 눈을 뜨시어 저희의 폐허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도성을 보십시오.”(9,16.17.18) 다니엘은 자신이 청하는 바를 단순히 민족의 해방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이름을 높인다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때, 그것이 우리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얼굴을 마주 봄으로써, 서로의 입장을 헤아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의 관계가 회복됩니다. 하느님의 입장을 반영한 기도를 하느님은 바로 들어 주십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하며 아뢰고 있는데, 지난번 환시에서 본 가브리엘이라는 이가 저녁 예물을 바칠 때 빨리 날아서 나에게 다가왔다.”(9,21) 가브리엘은 다니엘의 청원이 시작될 때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내렸다는 사실과 그 말씀의 내용을 전달하면서 다니엘을 ‘총애를 받는 사람’(9,23)이라고 칭합니다. 하느님은 기도하는 이들을 총애하십니다. 다니엘서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정도까지 쓰인 글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니엘은 역사의 한 인물이라기보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와 벨사차르,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와 키루스 등 여러 임금 밑에서 일했던, 또 그 이후 환시를 통해 가려진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보았던 이스라엘 포로 출신의 여러 재상 내지 현인을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그들은 공통으로 유배지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기도 생활을 철저히 했습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동료들과 함께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했고(2,18.20-23), 기도 금령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드렸으며(6,11), 우상이나 괴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경배했습니다.(14,4.25) 또 그의 동료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불가마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했고(3,16-18.26-45.52-90), 다니엘이 구한 수산나도 죽음 앞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13,42-43)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모진 박해 시대에 숨어 살면서도 기도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이 계속되는 어려운 시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충실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도 덕분입니다. 다니엘서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환상과 환시와 꿈, 수수께끼와 비밀, 혼수상태와 와병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불안정한 현실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를 시사합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 다니엘은 그러한 상황이 다른 이들의 탓이 아니라 자기 잘못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고, 그 시간을 정화와 순화와 단련의 계기로 받아들이고(12,9), 어떠한 상황도 하느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생명의 탯줄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침·저녁기도, 성무일도, 매일 미사, 신앙을 전달하는 방송과 매체는 그에 큰 도움을 줍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0-06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묵주 기도 신비는 요일에 맞춰서 해야만 한다?

환희의 신비는 월·토요일, 고통의 신비는 화·금요일, 영광의 신비는 수요일·주일, 빛의 신비는 목요일. 아마 예비신자 교리 때, 혹은 묵주 기도를 배우는 다른 때 들어보셨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묵주 기도는 요일마다 각각 묵상하는 신비가 나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러 “월요일에는 꼭 환희의 신비만, 화요일에는 고통의 신비만 바쳐야하는 건가요?”하고 궁금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드리자면 꼭 요일에 배정된 신비만을 바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굳이 신비마다 요일을 정해둔 걸까요? 정해두긴 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묵주 기도의 요일 배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이 점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2002년에 묵주 기도에 ‘빛의 신비’를 새롭게 제정하실 때 발표하신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교서에서 새롭게 추가한 ‘빛의 신비’를 추가해서 각 신비의 요일 배분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따로 상세하게 설명하시면서 묵주 기도의 요일 배분이 왜 중요한지 가르치셨습니다. 교황님은 “요일 배분은, 전례가 전례 주년의 다양한 시기를 여러 색으로 채색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요일마다 영적인 ‘색깔’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비유하시면서 “전례에서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일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의 한 주간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들을 거쳐 가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고 강조하십니다.(38항) 전례처럼 신자들이 묵주 기도를 통해 같은 신비를 묵상하면서 일주일 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신비를 함께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묵주 기도는 그저 성모송을 10번 외우면 되는 기도가 아닙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은 묵주 기도를 두고 “요약된 복음”이라고 칭송하셨는데요. 교황님은 권고 「마리아 공경」에서 “동정녀의 잉태와 예수의 유년기 시절의 신비들로부터 파스카 신비의 절정 곧 복된 수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구원 사건들이 조화 있게 연결돼 있고, 성령 강림 날 태어난 교회와 이 세상에서의 일생을 마치시고 영혼과 육신이 하늘나라로 올림을 받으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나타난 파스카의 결실이 총망라돼 있다”면서 “로사리오(묵주) 기도는 복음적인 기도”라고 말씀하십니다.(44~45항 참조) 묵주 기도는 성모송을 외우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묵주 기도의 4가지 신비 전체를 다 바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아마 많은 분들이 바쁜 일상에 쫓겨 그러기 어렵지 않으실까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제안에 따라 매일 요일에 맞는 신비를 묵상하며 묵주 기도를 바쳐보면 어떨까요? 그 여정을 통해 우리의 한 주간을 예수님의 삶으로 가득 채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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