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셀 수 없는 군중(묵시 7,9-17)

십사만 사천의 군중에 이어 셀 수 없는 군중이 등장한다. 십사만 사천을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고, 셀 수 없는 군중을 이방인계 그리스도인들이라 해석한다.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지는 구원은 셀 수 없는 군중에 대한 서술을 시작으로 모든 백성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주석학자들은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이들이 셀 수 없는 군중이라고 요한묵시록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7,9) 구원은 이제 모든 이를 향한다.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무렵,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도 셀 수 없는 군중과 닮은 서사가 나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세 15,5; 22,17) 구원은 애시당초 모든 이를 향해 있었다. 다만 모든 이를 위한 보편적 구원이 특별한 민족, 특별한 인간들에 의해 규정되면서 사달이 났다. 바빌론 유배(기원전 597~538년) 이후, 이른바 ‘유다이즘’을 형성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에 배타적인 사상을 더욱 공고히 가져갔고 저들만이 하느님의 구원에 합당한 민족이라 여겼다. 요한묵시록의 셀 수 없는 군중은 이런 배타적 민족주의를 여지없이 허물어뜨린다. 수를 세어 구원에 합당한 이들을 찾아 나서는 일은 지금도 폐쇄적인 사이비 종교나 배타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교회들 안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이 머무는 곳은 어좌와 어린양 앞이다. 요한묵시록 4~5장에서도 살펴봤듯, 어좌라는 곳은 천상에 유폐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온 곳이다. 어린양은 세상 모든 민족들을 모아 ‘사제의 나라’로 만들었다.(묵시 5,10)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은 마치 사제처럼 어좌 앞에 서서 구원의 완성을 노래한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묵시 7,10) 요한묵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세상 모든 민족이 모여오는 새 예루살렘에서 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과 어린양은 경배와 흠숭의 대상이 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구원의 영광과 기쁨을 가리키는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있다. 승리하는 이들이 드는 야자나무 가지 또한 들고 있다. 초대교회는 야자나무 가지를 순교의 승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했다. 세상의 폭력 앞에 신앙은 무력하지만 끝끝내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승리한 것이라 초대교회는 이해했다. 야자나무는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초막절 예식에 사용된 것이기도 하다.(레위 23,40 이하)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을 향하는 구원의 길에 야자나무로 엮은 초막은 수없이 세워지고 옮겨지고 또다시 세워졌다. 수난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증거의 삶 살아가는 것이 구원 환난과 구원 분리하지 말아야 야자나무는 구원의 길의 고단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한 희망과 설렘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한묵시록 7장 15절은 초막절의 분위기를 더욱 뚜렷하게 묘사한다. 셀 수 없는 군중은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어좌에 계신 분은 셀 수 없는 군중을 위한 천막이 되어주신다는 것. 그러므로 요한묵시록 7장의 셀 수 없는 군중이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 구원을 노래하는 것은 이집트 탈출로 선명히 새겨진 구원이 모든 민족, 모든 시대를 향해 온전히 실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구원은 보편적이며 현재형이다. 셀 수 없는 군중이 외치는 구원은 시편 118편 25절의 ‘호산나’(הוֹשִׁ֘יעָ֥ה נָּ֑א)를 닮았다. ‘구원을 주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는 정확히 하느님과 어린양을 향한다. 구원의 주체이신 하느님을 향한 이 외침은 초막절에 야자나무 가지를 흔드는 순간 울려 퍼진 것이기도 하다. 호산나와 더불어 요한묵시록 5장 12절에 나타났던 찬미가가 셀 수 없는 군중을 통해 다시 등장한다.(묵시 7,12) 어좌, 스물넷 원로, 네 생물 모두가 셀 수 없는 군중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미한다. 온 우주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구원을 노래한다. 모든 이를 향한 보편적 구원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13절부터는 셀 수 없는 군중의 신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원로가 묻는다.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요한은 답하지 못했고 원로가 부득불 답을 한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마지막 날, 종말의 시간에 고통과 박해, 수난이 닥친다는 생각은 묵시문학의 전통적인 생각이다. 구원을 노래하는 군중이 환난을 반드시 겪어내어야 한다는 전통적 믿음은 다니엘서 12장 1절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의 요한묵시록은 환난과 구원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말 번역은 셀 수 없는 군중을 환난을 ‘겪어 낸’ 이들로 이해하는데, 그리스말 본문은 환난을 ‘겪고 있는’(그러니까,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의 현재 분사형인 ‘에르코메노이’(ἐρχόμενοι)가 사용되었다) 이들로 소개한다. 환난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이라서 끝난 게 아니다. 환난을 여전히 겪고 있는 이들이 구원을 노래한다. 그러나 환난을 부정적인 고통 자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나타나는 구절에서 환난은 어린양의 피에 겉옷을 빨아 희게 만드는 일로 소개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환난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환난은 그러므로 지속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은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구원이 또렷이 드러난다. 모든 이를 향한 구원을 노래하는 일은 이제 우리 삶의 자리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우리 삶이 예수의 삶과 닮았는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 길이 되는가, 그리하여 하느님을 증거하는 삶이 힘겨워도 행복한 삶이라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가, 하는 반성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첫 번째 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이가 구원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이가 십자가를 지는 데 덤벼들지는 않는다. 모든 이가 누릴 구원은 예수님의 증거의 삶이 지금 여기서 여전히 진행되어야 이루어진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내려놓게 해달라 기도하는 우리에게 과연 구원은 가능한 것인가. 우린 무엇을 증거하고 무엇에 승리하고 있는가.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악습과 싸워라!(하)

네 번째 악습, 슬픔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슬픔은 갈망하는 것을 얻지 못한 데서 생기며 이따금 분노를 동반한다.”(프락티코스 10) 슬픔은 욕구의 결핍,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서 온다. 사막으로 물러난 수도승은 가정과 부모, 이전 삶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러한 것들의 결핍으로 인한 슬픔에 빠질 수 있었다. 세상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부모나 사랑하는 이와 사별했을 때나, 뜻하는 바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슬픔에 빠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슬픔으로 우리를 좌절과 절망으로 이끌 수 있다. 슬픔의 치료제는 세상의 쾌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모든 세속적 쾌락을 멀리하는 사람은 슬픔의 악령이 접근할 수 없는 망루다.…우리가 지상의 어떤 대상들에 애정을 쏟는다면 이 적을 몰아내기란 불가능하다.”(프락티코스 10) 이와는 매우 다른 영적인 슬픔(penthos)도 있다. 이것 역시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서 온다. 즉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으려는 갈망, 악에서 해방되려는 갈망, 완전함에 대한 갈망,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 하느님을 뵙고 싶은 갈망이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나약함으로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이것은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슬픔이다. 사막 교부들은 이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했다. 다섯 번째 악습, 분노 요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이 성급하고 참지 못하여 쉽게 화를 내고 분노에 사로잡힌다. 사막 교부들은 분노를 우리 영혼에 하느님의 영을 몰아내고 악령을 거주하게 하는 끔찍한 욕정으로 보았다. 우리 영혼에 분노가 들어오면 시야를 왜곡시키고 생각을 흐리게 하며, 마음을 혼란케 하고 사탄의 공격에 무력해진다고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분노는 가장 격한 욕정이다.…무엇보다 기도 중에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빼앗는다.”(프락티코스 11)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악도 분노만큼 정신을 악령으로 변형시키지 못하며,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기도’와 같이 ‘짧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분노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교부들은 분노가 우리 정신을 흩뜨려 순수한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에 기도에 가장 큰 장애물이자 관상가의 가장 큰 적으로 보았다. 분노의 치료제는 온유다. 온유로 나아가는 길은 먼저 자신에게 화내는 사람에게 화내어 대꾸하지 않는 것이며, 그에 대해 격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유의하지 않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수행이란 분노에서 온유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여섯 번째 악습, 아케디아 아케디아(akedia)는 영적 태만, 나태, 무기력을 뜻한다. 이는 독수도승에 고유한 악습으로 우리의 소홀함으로 하느님과의 계약(kedos)이 깨진(a) 상태다. 특히 클리마쿠스는 이 악습의 증세를 매우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아케디아는 영혼의 마비입니다. 이로 인해 정신은 약해지고, 금욕 수행을 소홀히 하며 성소도 혐오스러워집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를 찬양하며, 하느님 자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비방하고, 시편 낭송을 게을리하며, 기도할 때 무기력하게 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3,90) 아케디아는 정오 무렵 수도승을 더욱 강하게 공격한다고 해서 ‘정오의 악령’(시편 91,6)이라고도 불린다. 이 악습에 사로잡힌 수도승은 한가함과 게으름에 빠지게 되고, 온갖 분심에 싸여 독방(경기장: 영적 투쟁의 장)에서 달아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게 된다.(프락티코스 12) 이 악습에 대한 치료제로 에바그리우스는 손노동과 죽음에 대한 기억을, 클리마쿠스는 항구함(인내)과 공동생활을, 그리고 카시아누스는 노동에 대한 열성을 제시하고 있다. 일곱 번째 악습, 헛된 영광 헛된 영광은 남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갈망이다. 이는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지속적인 유혹으로 다가오는 교묘한 악습이다. 이 악습은 피하기가 힘들다. 그것을 물리치려고 행하는 것 자체가 헛된 영광의 새로운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프락티코스 30)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한다. “태양이 만물 위에 빛나듯 헛된 영광은 모든 선행 위로 펼쳐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단식하면서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단식을 중단하면, 내 현명함에 대해 헛된 영광에 빠집니다. 나는 옷을 화려하게 입고서는 헛된 영광에 빠지고, 또 초라한 옷을 걸치고서는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 말할 때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고,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천국의 사다리 22,122) 헛된 영광은 자기를 과시하며, 선행조차도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행하기에 우상 숭배자와 같다. 클리마쿠스는 그 치료법을 다음 세 단계로 제시한다. 즉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혀를 제어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헛된 영광의 생각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을 단호히 잘라 버리는 것’으로 발전하여 ‘사람들 앞에서 치욕을 당하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습관’으로 끝난다. 카시아누스는 공동생활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유별난 것을 피하라고 권고한다.(규정집 11,19,1) 여덟 번째 악습, 교만 클리마쿠스는 “애벌레가 자라 날개가 생기면 높이 날 듯이, 헛된 영광은 완전히 성장하면 교만을 낳습니다. 교만은 모든 악의 뿌리이자 절정”(천국의 사다리 22,126)이라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교만의 악령은 영혼을 가장 심한 타락으로 이끈다. 실제로 이 악령은 영혼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선행의 원인이라고 믿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면모를 몰라주는 형제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겨 그들에게 거만을 떨게 한다.”(프락티코스 14) 헛된 영광과 달리 교만은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여 남들을 무시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거부하는 태도로 신성모독의 뿌리다. 클리마쿠스는 말한다. “교만한 수도승에게 다른 악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악령이요 자신의 적이기 때문입니다.”(천국의 사다리 22,129) 그래서 사막 교부들은 교만을 모든 악습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교만의 치료제는 자기가 이제껏 받은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을 기억하고 성인들의 모범을 기억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빚지고 있음을 늘 잊지 않는 것이다. 교만은 타락한 천사 루치펠과 첫 인간이 범한 죄로서 겸손을 통해 무너진다. 여덟 가지 악습과의 싸움을 통해 악습을 극복한 후 얻게 되는 승리의 월계관은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과 어떤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는 평점심(apatheia)이다. 이런 순수하고 평온한 마음 안에서 비로소 하느님과의 순수한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7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천사들과 같아져서…”의 의미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30; 마르 12,25; 루카 20,36)는 말씀은 인간의 본성이 천사의 본성으로 변화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부활 후 인간의 본성이 천사처럼 된다면, 그것은 부활이 아니다. 반육화되거나 비인간화된다면 그것도 부활은 아니다. 이 말씀 전후에서 드러나는 부활의 진리는 인간의 종말론적 완성과 행복이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만의 상태가 아님을 명확히 하며, 모든 이해와 표현을 초월한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인간 본질을 회복함을 뜻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고, 고통과 시련을 거치면서 하느님과 같은 신성(영)이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이러한 영의 힘은 인간의 본성을 영화(靈化)로 이끈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것은 영에 대한 몸의 새로운 순종을 의미한다. 영화는 주체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기울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부활은 세속적인 시간 안에서 죽음에 종속되었던 인간의 육체성이 참된 생명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66과 5항) 교리서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순간 일어나는 영화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영화’가 인간 이해의 새로운 출발점이기에, 그 결정적인 의미들을 깊이 들여다봐야 막연한 부활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다양한 형태로 드러내는 선택과 결정을 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육에서 오는 것과 영에서 오는 것의 대립을 어둠에서 빛이 들어올 때까지 수없이 체험하지만, 영의 영향권에 있는 곧 ‘종말의 인간’은 그 대립에서 자유로워진다. “‘영화’란 단순히 영이 몸을 다스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는 영화를 영이 몸에 완전히 스며들어, 영의 힘이 몸의 에너지로 스며드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67과 1항) 스며들어 생명의 힘이 확장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한다. 영이 받은 사명이다. ‘천사들과 같아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상 삶에서 일어나는 대립과는 다른, 몸에 대한 영의 결정적 승리를 말한다. 완전한 참여로 이루어지는 영화다. 교황은 부활한 이들이 갖는 ‘몸의 영광’을 ‘신화된 영화’의 종말론적 결실이라 말한다. 교황은 이 상태가 ‘한처음’과는 다른 차원이라 한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 한처음의 상태를 회복하는 정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인류의 완성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의 상태를 넘어 신화(神化)의 상태에 이른다. 그 모습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만날 수 있다. 제자들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르기 전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부르자 바로 ‘주님’이라 고백했다. 이어지는 부분과 변화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 자체로 신이지만 인간은 영에 의해 영화됨으로서 신화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 1136항) 영은 성령을 말하고, 종말론적 인간은 성령의 힘이 몸에 스며들어 삼위일체의 신성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영이 그 반대되는 세력들과 대립을 거치면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과 영적 앎이 진·선·미로 성장된다. 결국 신화는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특징을 가진 친교로 이루어진다. 교리서 66과 6항은 이렇게 정리한다. “사실 부활의 진리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종말론적 완성과 행복은 몸으로부터 분리된(플라톤에 따르면 ‘해방된’) 영혼만의 상태로 이해할 수 없고, 결정적이고 완전한 통합을 특징으로 하는 몸과 영혼의 일치를 통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통합된’ 인간 상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글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9면

[말씀묵상] 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오늘 복음(요한 14,23)에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규정한 신명기 6장 5절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산 아래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받은 율법 가운데 으뜸입니다(마태 22,36-38 참조). 그만큼 하느님 사랑은 우리에게 익숙한 율법이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서 지키고 있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운 규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레위기 19장 17절에는 이와 반대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미운 감정을 다스리려 노력하듯 사랑도 함양해갈 수 있다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과연 어떻게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애씁니다. 안식일이 되면, 무거운 짐을 들지 말라는 규정(예레 17,22)을 지키려고 비가 와도 우산도 쓰지 않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기원전 6세기에 시나이산 계약을 어긴 죗값으로 망국의 비극을 겪었기에, 그런 재앙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율법을 더 엄격하게 지키려 노력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노력을 보면 하느님 사랑이 실천해야 하는 행동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영적 의미를 높게 보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는 이런 유다인들의 행동이 몸에 밴 습관처럼 비치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을 율법으로 제정한 고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무래도 당시 사람들이 받아들인 의미가 원 뜻에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에는 고대 근동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이 도움을 줍니다. ▶ 파라오에 대한 사랑: 옛 이집트에 자리했던 ‘아마르나’라는 성읍의 유적부터 보겠습니다. 아마르나는 한때 이집트를 뒤흔든 종교 혁명의 중심지로서, 고대 이집트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신을 섬긴 파라오의 수도였습니다. 옛 이집트의 종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다양한 동물 형상을 한 신들을 섬겼지만, 기원전 14세기 파라오 아케나톤은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며 수도를 아마르나로 옮겼습니다. 이런 행보가 기존 종교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기에 아마르나 시대는 짧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마르나는 이후 성경 학계에서 중요한 장소가 됩니다. 왜냐하면 옛 가나안과 이집트를 오간 서신이 이곳에서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은 ‘아마르나 편지’라 일컬어지는데, 옛 가나안과 이집트의 상황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이에 따르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는 소규모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예루살렘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서간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파라오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나안의 봉신 국가들은 파라오를 ‘사랑’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우리 기준으로는 파라오를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네들에게 사랑은 정치적 의미로서 ‘충성’을 뜻하였습니다. ▶ 아시리아 주군에 대한 사랑: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의 임금 에사르 하똔과 관련된 기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에사르 하똔이 봉신 국가들에 황태자인 아슈르바니팔을 ‘사랑’하라고 명하는데요, 이 역시 파라오에 대한 사랑과 맥을 같이합니다. 말하자면 고대 근동인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선, 계약의 맥락에서도 쓰인 일종의 관용어였던 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 성경에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하거나 요구하는 구절이 신명기 6장 5절 외에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에 대해 위의 해석을 바탕으로 하면, 이는 ‘누구든 예수님께 충성하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요한 21장 15절에서 19절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래아 바닷가에 모습을 드러내셨을 때 베드로에게 수위권(首位權)을 재확인하신 상황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어보신 의도가 좀 더 구체적으로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에 대한 베드로의 마음이 애틋한지를 물으신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신 매우 실제적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글 _ 김명숙 소피아(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18면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진정한 행복은 ‘영혼의 선’ 안에서 발견될까?

우리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행복에 대한 전통적인 후보들에 대해 하나씩 검토해 왔다. 토마스가 받아들이는 인간의 세 가지 선에 대한 구분, 즉 외부적인 선, 육체와 관련된 선, 영혼의 선에 비추어보았을 때, 진정한 행복은 재물 등의 외적인 선이나 건강 등의 육체의 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아있다. 영혼의 선, 달리 말하면 인간성 자체의 완성이야말로 인간의 최종 목적이자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널리 알려진 ‘건강한 육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mens sana in corpore sano)이라는 라틴어 속담도 육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은 건강한 정신이라는 영혼의 선에 있음을 보여 준다. 현대 사회의 욕구 이론을 대표하는 매슬로(A. Maslow)도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애정·소속 욕구’, ‘존중 욕구’를 넘어서는 ‘자아 실현 욕구’를 강조한 바 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이 영혼의 선에 있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전통적인 철학자는, 바로 토마스가 행복에 대해 논의하면서 자신의 멘토로 삼아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개념 한계와 극복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종 행복을 찾기 위해 ‘좋은’ 또는 ‘잘’(eu)이란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들을 분석한다. 우리는 수행해야 할 기능을 제대로 지닌 대상에 대해서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혹은 해야 할 행위를 ‘잘’하는 사람에 대해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판단의 기준은 바로 그 평가 대상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됐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특정 분야에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좋은’ 인간이 되게 해 주는 기능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전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기능을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기능, 즉 이성과 사유에서 찾는다. 좋은 의사가 환자를 잘 치료해 주는 사람이듯이, 훌륭한 인간도 인간의 고유한 이성적 역량을 충만하게 실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로 대표되는 지혜로운 사람이야말로, 신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며 누구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이다. 인간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 잘 이루어지는 것에서 행복이 온다는 주장을 듣게 되면, 현대 사회에서 난무하는 자기계발서들의 저자나 독자는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는 대부분 개인의 노력과 태도 등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고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자기 계발서는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가짐만 바꾸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식의 비현실적 약속을 남발한다. 실제로는 불평등과 차별 등 사회 구조의 문제 때문에 삶을 바꿀 수 없는 경우에도, 모든 실패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는 비판도 등장한다. 이러한 성과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위해 자기 영혼을 다른 방식으로 돌보려는 시도도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종종 매스컴에서도 소개된 ‘멍 때리기 대회’나 템플스테이 등과 연계된 ‘명상에 대한 열풍’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시도는 외적인 선, 육체의 선만을 추구하는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바람직한 운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찾을 능력을 과연 인간 자신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은 검토가 필요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질문에 대한 답에서 더 이상 아리스토텔레스를 뒤따라가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최종 행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이 삶에서 가능한 관조(contemplatio)에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사변은 모든 인간 인식 밑에 깔려 있는 조건, 곧 감각들의 영역에 묶여 있는 채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I,83,‘머리말’) 인간의 지성은 궁극적 원인을 본래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I-II,3,6) 더 나아가 토마스에게 ‘자기실현’은 결코 인간의 최종 목적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잠재력과 개방성 덕분에 인간 영혼은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실현되고 완성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세의 행복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그렇지만 토마스는 ‘영혼의 선’이 진정한 행복과 관련이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개념이 매우 모호한 개념임을 지적하면서, 최종 목적으로서 ‘욕구되어야 하는 대상’과 ‘그 대상 자체를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작용’의 측면을 구별한다. 그 안에 인간의 최종 행복이 있는 대상은 영혼 자체도 아니고 영혼의 어떤 한 능력도 아니라 영혼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의 획득이나 사용에 관해 말한다면, 이는 ‘영혼의 선’과 직접 관련된다.(I-II,2,8) 최종 행복에 대한 강력한 후보들에 대한 검토를 마치면서 토마스는 창조된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참된 행복은 잃어버릴 수 없어야 하고 확실하게 지속되어야 하는데, 이 삶에서는 어떤 것도 확실하게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매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행복을 방해하는 질병이나 불행에 맞닥뜨릴 수 있으며, 이 삶에서 근본적인 위협이나 도덕적인 결함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 자신의 능력을 재창출하기 위해서 무위와 휴식의 단계가 필요하며, 심지어 어떤 개인이 이룩한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다시 파괴되어 버린다.(ScG III,48) 따라서 토마스는 현세에서의 행복을 ‘불완전한 행복’이라고 규정한다. 철학적 명상, 영혼의 선한 활동을 통해 일시적 만족을 얻을 수는 있지만, 창조되지 않은 신적 진리와의 완전한 합일 없이는 이런 만족은 지속될 수 없다. 선을, 창조된 선과 창조되지 않은 선으로 이등분한 것은 이제까지의 행복에 대한 논의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간다. 토마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제시했던 현세의 이성적 삶은 불완전한 행복일 뿐, “욕구를 전적으로 쉬게 해야 하는 완전한 선”인 최종 행복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발견된다.”(I-II,3,3) 그렇다면 오직 “인간의 행복은 본질적으로 최종 목적인 창조되지 않은 선, 즉 하느님에게서만 발견된다”는 주장은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며, 우리는 언제 어떻게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다음 회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1면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십사만 사천(묵시 7,1-8)

요한묵시록 6장까지 여섯 개의 봉인이 연거푸 열리다가 7장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다. 일곱 번째 봉인은 8장부터 다시 이어진다. 7장은 6장의 마지막, 그러니까 어린양의 진노를 견뎌 낼 수 있는 이를 찾아 나서는 질문에 이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 사람들은 어린양을 진노의 주체로 읽어내었고 이 세상은 그러므로 산과 바위 뒤에 숨어야만 하는 절망의 자리가 된 듯하여 허망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요한묵시록 7장은 세상 사람들의 절망적 읽기에 또 다른 대답은 내놓는다. 7장은 천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후기 유다이즘은 천사들이 종말론적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이해한다.(에녹 60,11; 희년서 2,2) 요한묵시록 역시 천사가 불의 권한을 지녔거나(묵시 14,18) 물을 주관하는 것으로 소개한다.(묵시 16,5) 7장의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있다. 즈카르야서 6장 5절에서 영향을 받은 이 장면은 징벌의 시간 바로 전, 하나의 ‘멈춤’, 혹은 ‘쉼’을 상정한다. 하느님의 종 이마에 받은 인장, 주님 구원 뜻하는 명징한 은유 구원,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무한·보편으로 주어지는 선물 왜 멈추는가. 후기 유다이즘의 사상, 예컨대 노아의 홍수를 재해석하는 에녹서의 생각에서 얼마간의 답을 얻을 수 있다. 징벌을 준비하는 천사들이 있었다. 홍수를 쏟아부을 수 있는 천사들이었고,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에 주님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수 있도록 천사들을 잠시 멈추게 한다.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찰지라도 주님은 구원에 대한 얼마간의 시간과 방도를 마련하신다는 이야기다.(에녹 6) 다시 요한묵시록으로 돌아오자면 7장에 등장한 천사들은 분명 징벌을 준비하고 있는 천사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바람을 붙들고 멈춤과 쉼을 이끌어내는 천사들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얼마간 간직하게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추는 곳에서 기어이 희망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야기는 구원을 향해 급하게 전환된다. 2절에 다른 한 천사가 ‘해 돋는 쪽’에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올라온다. ‘해 돋는 쪽’은 구원을 상징한다. 에덴동산이 동쪽이었고(창세 2,8), 주님의 구원을 알리는 키루스 임금이 동쪽에서 왔고(이사 41,2) 하느님의 영광이 해 뜨는 동쪽에서부터 나타났다고 구약은 말한다.(에제 43,2) 하느님의 인장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인장은 징벌의 시간에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혀야 한다. 징벌이 잠시 멈춘 시간,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을 보살피시고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발견한다. 하느님의 종들은 하느님께 온전히 속해 있어 종말을 맞닥뜨린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로 소개되는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유다계 그리스도인이라 해석하곤 한다. 열두 부족에서 시작한 십사만 사천이라 유다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들의 신원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킬 때, 하느님의 종이라는 호칭은 요한묵시록에 자주 등장한다.(1,1; 2,20; 6,11; 19,2.5; 22,3) 말하자면 ‘땅의 자리’에서 속량되어 하느님에게로 온전히 의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하느님의 종’이라는 것이다.(묵시 14,3) 하느님의 종들이 이마에 받은 인장은 또 무엇일까. 에제키엘서 9장 4절은 예루살렘에 징벌을 내리기 전에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하도록 주님께서 배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제키엘서 9장 4절에서 ’표’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타우’(תָּו)를 두고 십자가의 예형으로 인식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었다는 그리스도교적 해석이 있었다. 이러한 해석은 요한묵시록 7장에서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종들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라고 읽어내는 해석과 맞닿아 있다. ‘인장’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그 말마디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세례와 연결하기도 한다. ‘인장’이라는 그리스말은 ‘스프라기스’(σφραγίς)로 세례와 같은 의미로 초대교회는 이해했기 때문이다.(2코린 1,21 이하) 어떤 해석이든 인장을 받았다는 것은 징벌의 순간에도 하느님의 보호는 분명히 살아 있다는 명징한 은유가 된다. 하느님의 종들의 숫자는 십사만 사천이다.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씩 나와서 총합이 십사만 사천이다. ‘12’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고, ‘1000’은 풍성함, 충만함, 완벽함을 가리킨다. 하여 ‘1만2000’은 하느님 백성이 가득하고 완전하다는 뜻을 품는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해야 십사만 사천이 된다. 같은 수를 다시 곱하는 것은 묵시문학적으로 ‘마땅하고, 당연하여, 절대적으로 그러하다’는 의미다. 결국 십사만 사천은 하느님 백성이 진정으로 가득하고 완전하고 풍성하다는 수적 가치를 지닌다. 요한묵시록 7장 9절은 그리하여 십사만 사천의 무리를 ‘셀 수 없는 무리’라 규정하고야 만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실은 무한대의 사람이다. 요한묵시록이 숫자에 민감하여 여러 숫자들을 소개하고 제시하는데 대략적으로 보면 하느님과 어린양 쪽의 서술에서는 무한적이고 보편적인 숫자를, 악과 그의 부속 형상들, 예컨대 용과 두 짐승과 대탕녀 쪽의 서술에서는 한계지워지고 제한적인 숫자를 배치시킨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구원은 보편적이고 무한하나 악의 자리와 그 힘은 제한적이어서 무력하고 무능한 것이다. 요한묵시록 7장은 잠시 쉬어가는 대목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기 전, 우리는 ‘구원’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구원은 십사만 사천, 그러니까 무한하고 보편적인 자리다. 구원은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혹은 부합하고자 애쓰는 이의 특별한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그러니까 무한하신 하느님을 닮았다. 우리가 넓어질수록 구원은 뚜렷해진다. 우리가 좁고 좁아서 다른 이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수록 구원은 그만큼 좁아지고 어려운 것이 된다. 구원은… 그러니까 주어진 선물이지 갖고 싶은 선물이 아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3면

[말씀묵상] 부활 제5주일

오늘 복음은 “유다가 나간 뒤에”라는, 때를 알리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앞의 장면은 성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뒤,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는 긴장감이 도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적셔 유다에게 주시어 제자들이 나중에 깨달을 수 있도록 배신자를 미리 지목하셨고, 심지어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라고 말씀하시어 적어도 유다에게는 당신이 알고 계심을 명확히 알리십니다. 유다는 이미 마음에 사탄을 품었기에 그 말씀에도 회개하지 않고 배반의 길로 나갑니다. 그의 마음속의 어둠을 요한 복음사가는 “때는 밤이었다”라고 표현합니다.(요한 13,21-30 참조) 이 밤은 배신의 밤이자 예수님께는 수난과 죽음이 시작되는 고통의 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 13,31)라고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라고 덧붙이십니다. 즉, 사람의 아들은 두 번 영광스럽게 되십니다. ‘이제 곧’, 즉 머지않은 미래에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은 당신의 부활을 가리키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유다가 나간, 또는 유다를 보내신 ‘이제’라는 시점에 이미 이루어진, 또는 이미 시작된 영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선택하신 당신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고통의 신비와 영광의 신비를 나누어 생각한다면 이를 알아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들어 올려짐’으로 여러 번 표현되는데(요한 3,14. 8,28. 12,32), 이는 죽음의 형벌이기도 하지만 영광스러운 표징이기도 합니다. 구리 뱀을 본 사람이 모두 살아났듯이 그분을 믿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죽음을 택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이 아드님이시며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보여주는 징표가 됩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목숨을 내어주는 참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기에, 또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 영광에 초대하십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기 위한 새 계명을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사람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사랑하셨듯이 목숨을 바치는 참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이면서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희생을 통해서 당신이 아버지 안에 머물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머무시는 일치를 완성하셨듯이, 제자들이 당신과 같이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한 14,3-11 참조). 그리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 당신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당신 안에 머무르는 것이 모두 같은 것이고, 그렇게 하면 그들이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4,20-21. 15,1-17 참조). 이것이 제자들의 영광이요 그들의 구원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리라는 믿음을 갖고 기다렸지만 계속되는 박해와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교회가 겪는 고난이 곧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오늘날 어떤 이는 교회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 구원이 이천 년이 지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 정도면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이천 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이가 주님의 사랑을 살고 전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 구원은 늘 이 세상에 넘쳐흘렀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고, 그분이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묵시 21, 3-5 참조) 글 _ 변승식 요한 보스코 신부(의정부교구 안식년)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2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마르 12,25)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를 불러올 말씀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는 말씀이 이어진다. 부활에 관한 예수님 말씀들은 인간에 대해 깊고 일관된 내적 진리를 지니고 있다. 내적 진리가 역사 안에서 우리의 이성과 체험에 의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지만 우리의 지성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리의 빛을 받는다면 초본성적인 힘에 의해 그것을 관조할 수 있다. 물론 육체를 지닌 인간 상태로서 그 한계를 넘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이 세상에서 체험되는 몸의 경험은 하늘나라에서 체험할 몸의 경험을 알기 위한 토대와 기초를 제공받는다. 즉 한처음이 현재와 관련 있듯이 미래 또한 현재와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됐고(창세 1,27 참조), 서로 다름 안에서 “한 몸이 되리라”(창세 2,24)는 섭리가 있었다. 저 세상에서 새롭게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완성에 속한다. 이 세상에서 상호 자기 증여를 표현하는 부부 행위는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열림을 가져온다. 이 행위는 신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이다. 그래서 번식 능력이 주어졌고, 출산의 축복을 통해 충만을 이룬다. 그러나 저 세상은 이미 축복과 충만의 상태임으로 출산을 통한 충만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 그 스스로에 관한 진리가 무엇인지 다루고 있다는 사실, 즉 남자와 여자의 진리를 출산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 역사가 구원의 신비로 가득하고, 그 신비가 완성되는 부활의 관점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몸이 지닌 혼인성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의 진리에서 ‘혼인적’ 혹은 ‘혼인성’의 의미는 혼인과 출산 그 자체에만 결정적 의미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몸의 혼인성은 직접적인 혼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내어주는 인격성의 관계로 여러 종교에서나 사회 안에서 여러 형태의 영적 낳음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세상에서는 몸의 혼인성이 완성됐기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교리서 69과 4항 본문 마무리 부분에서는 혼인성의 아름다움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곧 부활한 미래의 삶에서 몸이 지닌 ‘혼인적’ 의미는 남자와 여자로서의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격이라는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들 간의 친교에서 실현된 그 이미지에 완전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으로 존재하는 것의 그 ‘혼인적’ 의미는 완벽하게 인격적이고 공동체적인 의미로 실현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6)의 뜻을 알 수 있다. 교황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지는 문턱에서 몸의 영화가 이루어짐에 더 머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간 이해의 새로운 출발점이기에 변화하는 그 결정적인 의미들을 깊이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인격인 인간 존재와 남자와 여자의 몸으로 존재하는 의미를 분명히 하는 통합된 인간 진리의 새로운 문턱을 넘기 위해서다. 에페소 서간 5장 30절과 31절에서 “한 몸이 된다”가 다시 소환됐고, 그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선명히 계시됐다. 땅에서 유한한 존재였던 인간은 몸에 쓰인 혼인성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영원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 없어지거나 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활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3면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성령을 돈으로 사려고 했던 마술사 시몬

1980년대 중반 이스라엘의 마술사 유리 겔라는 우리나라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는 방송에서 염력이나 텔레파시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TV 앞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앉아 숟가락을 들고 함께 구부리려 그의 말에 집중하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유리 겔라는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뿐 만 아니라, 고장 난 시계 고치거나 손가락으로 사람을 들어올리는 등의 시연도 선보였다. 외국에서 마술사라는 말에는 ‘아티스트’란 의미가 있다. 마술사란 기묘한 현상처럼 보이는 속임수나 환상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연출해 관객을 즐겁게 하는 일종의 공연 예술가란 의미다. 대부분의 마술은 마술사의 행동에 주의를 끌게 해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켜 눈속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마술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는데 마술사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마술사들이 악마를 위한 의식을 행하는 자로 여겨져 탄압을 받기도 했다. 신약성경에도 사마리아 지역의 마술사 시몬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마술사가 미래를 예언하고 병을 낫게 하거나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사마리아 지역은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아 다른 이방 지역처럼 주술적 믿음이나 마술 등 이교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잡신들의 기운이 강해 유다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렸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무언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미래의 운세를 알기 위해 점쟁이를 찾는 경우가 많다. 구약성경에도 예언자들은 이방인의 마술 행위를 끊임없이 고발한다. 마술 행위는 결국 유다인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 내려온 필립보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기적을 행하자 많은 이가 세례를 받게 됐다. 마술사 시몬도 필립보를 찾아가 그의 말과 기적 행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필립보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필립보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됐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필립보처럼 기적을 행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여러모로 부족함이 있었다. 얼마 후 사마리아 지방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받도록 기도했다. 사도들이 오순절 날의 체험처럼 , 불길처럼 성령을 내려보내자 치유와 예언 등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시몬은 갑자기 돈을 챙겨 사도 베드로에게 가서 사도들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느님의 성령을 돈을 주고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에게 베드로는 따끔하게 충고한다. 신앙을 갖는 동기는 여러 가지이다. 한 선배 사제는 공소에 오시는 신부님이 김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마음이 동해 신학교에 왔다고 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회개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뉘우친다면 진정한 신앙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발행일 2025-05-18 제3442호 22면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하느님은 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밝히고 소통한다. 모세에게도 그랬다. 모세는 호렙산의 타오르는 떨기나무에서 하느님 존재를 인식하고, 더욱 가까이 보기 위해 다가갔다.(적극적인 자세) 이때 하느님은 모세를 불렀고, 모세는 응답했다. 이처럼 인간은 하느님의 어떤 대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큰 타자에 의해 부름 받고 응답하는 주체이다. 그리고 자신을 거울에 비춰 보듯 그분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갈망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자에게 건너간다. 모세는 하느님께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는 사명과 파견을 듣는다. ‘내가 어떻게?’라는 질문에 하느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12)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그리고 야곱의 하느님”이라 계시한다. 이들은 인류 역사 안에서는 분명 죽었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 산 자, 즉 죽음의 문을 통해 살아있는 하느님께 들어감으로써 산 자가 됐음을 뜻한다. 이 대화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느님께 닿았고, 그들을 위해 모세가 해야 할 사명과 파견이 하느님의 뜻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하느님을 불러오고,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 역사 밖에 있지 않았고, 모세는 역사적 상황 안에서 초월적인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세 측면의 관계가 역동적으로 살아있으며 직간접으로 소통하는 형상이다. 예수님에 의해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다시 불러오고 확인된다. 그리고 덧붙이길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마르 12,27) 죽음은 그 사람의 존재 안에 부활한 생명이 있음을, 그 생명이 하느님 안에서 변화하는 구조임을 강조한 것이다. 죄로 인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힌 것 같지만, 하느님은 인간을 죽음에 두지 않고 인간들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고 생명의 실재를 새롭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워진 계약은 인간이 죽음으로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초청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 생명이 영원한 생명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사두가이들에게 한 부활 이야기는 예수님 죽음 이전 상황이었고,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증거 되었으며,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부활에 대한 통합적 전망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물질적인 몸으로ᅠ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 우리 모두 죽지ᅠ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44) 부활은 인간에게 역사의 차원을 벗어난 저 세상의 이야기고, 하느님 편에서 주도하는 일이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점으론 수용이 다 되진 않는다. 하느님의 정의 안에서는 생물학적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음을, 죽은 이가 무(無)로 추락하지 않고 본래적 실재인 생명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지혜 2,3: 16,13 참조) 누구도 이름을 붙여 소유할 수 없는 그분인데, 누구도 언급할 자격이 없는 그분인데, 스스로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라 다가오셨다. 해방될 수 없는 죽음이지만 온전히 신뢰하고 그 신비에 들어갈 때 선물이 된다. 매년 부활초에 ‘알파요 오메가’를 쓰고 듣고 찬양하는 이유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발행일 2025-05-11 제3441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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