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지구가 나아질까?

기후소송 선고가 열렸던 8월 29일 오후 2시. 방청인들로 꽉찬 헌법재판소 심판정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수십 건의 사건 선고가 이어지고 시계는 어느새 3시를 가리켰다. 아기기후소송 청구인인 9살 한나 양과 12살 제아 양은 어려운 법률 용어가 이어지는 가운데도 지친 기색 없이 재판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이윽고 한숨을 삼킨 재판관은 “주문,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법 제8조 제1항은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고 선고했다. 내내 불안한 표정이었던 제아 양은 이내 엄마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재판정 곳곳에서 환호와 함께 훌쩍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간의 마음고생과 간절함이 전해져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어른들이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손을 놓았을 때, 아이들과 청소년은 함께 힘을 모으면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행동했다. 무모할 것 같던 시작에 몇몇 어른들이 힘을 보탰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었다. 물론 이번 판결을 시작으로 보다 강화된 기후 대책을 수립하고 실질적인 실천이 수반돼야 하지만 국민의 주요 기본권이 ‘환경권’임을 인정했다는 것은 유의미하다. 기후위기 대응에 있어서 정치나 경제 같은 어른들의 논리가 아닌,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아이들의 순수한 바람이 현실이 된 순간. 생태환경 기사를 쓰면서 내내 흐릿하고 모호했던 목표가 환기됐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한다고 과연 지구가 나아질 수 있을까?” 이제 이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하느님은 피조물 보호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편에 서 계시다”라고.

2024-09-08

텀블러 쓴다고 기후가 변하나요?

텀블러 쓰는 게 소용이 있나요? 생태를 위한 실천으로 적어도 텀블러와 손수건 정도는 지니고 다니려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취재원과 차를 마실 때도 텀블러를 꺼내곤 하는데,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텀블러 사용을 응원해 주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의외로 텀블러 사용에 회의적인 이들도 제법 있다. 정확히는 생태를 위한 실천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이다. 문명을 포기하고 살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 많은 실천을 다 하고 사느냐, 어차피 개인의 실천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는 식이다. 텀블러 사용만으론 변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이러한 노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작은 실천이 생태적 회개를 부르고,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우리가 사랑의 작은 길을 가고, 평화와 우정의 씨앗을 뿌리는 친절한 말, 미소, 모든 작은 몸짓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말했다. 플라스틱·일회용품 줄이기, 물·전기 절약하기, 대중교통 타기, 먹을 만큼만 준비하기 등 창조질서 보전을 위한 이 모든 실천은 사랑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이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작은 몸짓들은 그저 환경운동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의 기도다. 재앙적인 기후위기가 온다는 지구 온도 1.5℃ 상승 시점이 이제 5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돌린다면, 서로 사랑한다면, 희망은 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2024-09-01

너무 조용한 것이 아닌가

‘너무 조용히 지나가는 것 같다.’ 8월 16일 서울대교구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콘솔레이션홀에서 전 서울대교구장 염수정(안드레아) 추기경 주례로 봉헌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10주년 특별미사를 취재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시복식 10주년이라는 큰 의미에 비해 미사 외에는 다른 행사 없이 조용히 지나간 듯하다. 거기다 미사 장소인 콘솔레이션홀에는 빈자리가 눈에 많이 띄어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주례한 124위 시복식을 취재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시복식은 오전 10시에 시작했지만 멀리 제주교구까지 전국 16개 교구에서 모인 신자들은 대부분 이른 아침에 정해진 자리에 앉아 시복식 시작을 기다렸다. 기자도 지하철 첫 차를 타고 아직 날이 훤해지기 전에 광화문광장에 긴장된 마음으로 도착해 취재를 시작했다. 시복식이 열린 날이 한여름이기도 했지만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운 한국교회 신자들의 열기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염 추기경은 124위 시복 10주년 특별미사 강론에서 ‘10년 전 오늘’을 뚜렷이 떠올리면서 “그날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서 “시복 10주년을 경축만 할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오늘을 사는 우리 신자들이 따르려는 노력이 중요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사에 참례한 신자 수나 행사 외형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염 추기경의 말대로 한국교회 신자들은 124위 복자 시복 10주년을 보내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삶 속에서 따르려 노력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2024-08-25

열정과 지혜

지난 7월 28일 서울 명동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열린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 발대식에서는 청년들뿐만 아니라 중장년 신자들이 봉사에 나선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참석 청년들에게 기념품을 나눠주고 자리를 안내하는 그들의 모습은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가 모두 함께 이뤄내는 여정이고 행사임을 느끼게 했다. 이날은 마침 제4차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이었다. 내빈으로 참석한 교황청 평신도가정생명부 글레이손 데 파울라 소자 차관은 축사에서 “조부모와 노인은 새로운 세대를 위한 소중한 유산”이라고 했다.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이 되면 한 신부님의 글에서 본 이콘 장면이 떠오른다. 이탈리아 북부 보제공동체의 한 수도자가 그린 것인데, 제목이 ‘원로를 업고 가는 젊은 수도승’이다. 이콘은 제목처럼 나이 든 선배 수도승을 젊은 수도승이 업고 가는 장면을 담았다. 젊은이는 힘을, 나이 든 선배는 지혜를 상징한다고 했다. 열정은 있지만 제대로 된 방향을 모를 수 있는 젊은이에게 원로 선배는 삶과 신앙의 경험에서 온 지혜로 가야 할 길을 조언해 줄 수 있다. 한국은 내년이면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한국교회는 이미 사회보다 앞서 전체 교구가 초고령화 지수를 넘어섰다. 고령화 진행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 듦에 대한 시선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이 들면 쓸데 없다’는 '에이지즘‘(Ageism·연령차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인구 5명당 1명이 노령 인구가 되는 현실에서, 젊은 세대와 노년이 어우러지는 실질적인 해법이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 열정과 지혜, 각자의 장점을 나누며 하느님께 함께 나아가는 이콘 속 젊은이와 원로처럼 말이다.

2024-08-18

묵주 꼭 쥐고 기다리는 ‘숨은 그리스도인’

의정부교구 요양 사목 현장 중 한 곳을 다녀왔다. 7월 17일 방문한 지역 요양원에선 거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어르신뿐 아니라 거동할 수 없고 의사소통마저도 어려운 어르신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어르신은 사제의 축복을 받는 와중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분들이 가족마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신자라는 것도 알려지지 못한 채 ‘숨은 그리스도인’으로 요양원에 있어야 한다. 언젠가 세례를 받아 명백한 인호가 새겨져 있을 텐데도 교회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임종을 기다리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신체 어느 부분이 아픈지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데 ‘나는 신자라서 사제를 만나고 싶다’는 표현을 할 리 만무하다. 하지만 취재 중 만난 한 어르신이 신자라는 건 묵주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 묵주를 손에 꼭 쥔 어르신은 사제가 축복할 때는 가만히 눈을 감기도 했다. 뇌경색이 온 어르신이다. 요양원에서 신부님이 오신다니 쥐여준 것일 수도 있지만,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니 분명 사제가 왔다는 것을 알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요양 사목이 없었다면 아마 사제의 축복 없이 그저 묵주만 꼭 쥐고 앉아 있었을 수도 있다. 어르신들이 비록 본당에서 활동할 수는 없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맺어진 한 가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 사제가 왔을 때만큼은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빛은 어르신들이 얼마나 그 순간을 기다렸는지를 말해준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요양기관에 이런 어르신들이 계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본당 혹은 교구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신자 개인적 차원에서도 말이다.

2024-08-11

그래도 ‘하느님의 뜻’을 찾다

하얀 아쿠아슈즈에 진흙물이 들었다. 수해 현장을 취재하러 물이 가득한 비닐하우스 안을 들어갔을 때 흙범벅이 된 것이다. 2~3일간 전북 익산시 망성면에 내린 비는 419mm. 이번 장마에 내린 폭우로 물에 잠긴 비닐하우스 안 흙바닥은 펄처럼 돼 카메라를 들고 잠깐 몇 걸음 내딛는 데도 힘이 들었다. 그런데 복구작업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바닥의 수박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아직 덜 빠진 물과 진흙에 잠겨 뒹굴고 있었고, 토사가 범벅된 방울토마토 옆으로는 웅덩이가 고여있었다. 100년 이상 신앙을 이어가고 있는 집들이 많다는 나바위성당 인근 마을. 수확을 불과 이틀 앞두고 내린 비로 1년 농사를 망쳤다는 한 농부는 지난해에 이은 물난리에 앞으로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게 더 큰 문제라고 걱정했다. 일제 강점기 간척 사업으로 논밭으로 바뀐 땅 지표면이 금강보다 낮아 문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노후화된 배수 장비를 교체할 예정이고 배수장도 새로 짓고 있다지만 그래도 내년 농사가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멍한 상태”라는 이 농부는 특별재난지역 선포와 후속 보상 수속 등 몇 개월은 손 놓고 타들어 가는 마음으로 지켜만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번에 내린 비에 나바위성지도 피해를 입었다. 십자가의 길로 쏟아져 내린 화산의 토사와 부러진 나무들이 심각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좋은 뜻이 있겠다’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가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해 앞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농부의 말을 한 번 더 묵상하게 되는 날이었다.

2024-07-28

보이지 않아도 그 별은 있네

7월 10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의 맞춤형 돌봄 지원방안’ 제도개선 공개토론회. 많은 발달장애인 가족·보호자를 자살 위기까지 내몰 만큼 막중한 ‘독박 돌봄’ 앞에 교회·사회가 머리를 맞댄 토론회에서 한 참가자의 발표가 깊은 울림을 줬다. “장애 때문에 제약이 있을지는 몰라도,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들도 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13살에 지적장애 2급 판정을 받은 기타리스트 김지희씨는 2013년 평창동계 스페셜 올림픽 세계대회 폐막식에서 기타 독주를 펼쳤다. 또 대전특수교육원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강사로서 2018년부터 매해 여러 학교에서 스토리텔링 콘서트를 열며 장애인 학생들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고 있다. 소수 수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발달장애 예술인 전문 에이전시 ‘디스에이블드’, 한국발달장애인문화예술협회 ‘아트위캔’ 발달장애 작가들도 여러 브랜드·기관과 협업해 예술혼을 펼치고 있다. 이렇듯 그들의 특별함을 배려한 교육과 보살핌이 이뤄지자 발달장애인들은 가능성을 펼쳐낸다. 지켜보는 모두를 가슴 뛰게 하는 감동…. 사실 장애라는 꺼풀만 벗기면 누구나 ‘특별하다’는 걸 알아서가 아닐까. 좁게는 피부색, 외모가 남다르거나 감수성이 유별나거나 등, 사회가 개성을 헤아려만 주면 누구나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하느님은 누구나를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2018년 평창 동계패럴림픽 개회식에서 울려 퍼진 ‘내 마음 속 반짝이는’이라는 노래에서, “보이지 않아도 그 별은 있네”라는 가사에서 눈물이 났었다. 발달장애인을 비롯해 ‘특별하게’ 태어난 우리 모두가 타고난 텃밭에서 별보다도 반짝이는 꽃을 피우게 배려하는 사회가 되길 바랄 따름이다.

2024-07-21

희망을 찾는 방법

대전교구 관저동본당은 주일미사 참례자가 300여 명인 작은 본당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그나마 있던 신자들도 돌아오지 않게 된 성당은 활력을 잃었다. 주임 박찬인(마태오) 신부의 사목적 목표는 신자 ‘숫자’의 회복이 아니었다. 복음이 주는 기쁨을 체험하는 곳을 만들고자 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가장 먼저 사제관 문을 열었고, 신자들이 본당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했다. 게시판에 수입과 지출 현황을 공개했고 성당 내 시설 교체도 신자들의 투표로 결정했다. 미사 때는 복음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이미지를 첨부한 파워포인트로 강론을 진행했다. 본당의 모든 활동은 신자들을 향해 있었다. 취재를 위해 관저동성당을 찾은 날에도 미사가 끝난 뒤 몇몇 신자들이 사제관에 모여 있었다. 함께 점심을 먹고 주임 신부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평범한 일상 같지만, 그 시간 속에는 기쁨과 희망이 존재했다. 즐길 거리가 많아진 현대사회에서 종교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신앙이 회복되지 않은 현실 앞에서, 교회가 새롭고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고민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교회는 변해야 할까? 관저동본당은 변화를 꾀한 것 같아 보이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변화의 중심에 복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롭고 특별한 무언가가 아닌, 복음이 전하는 대로 실천했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하느님 나라를, 누군가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복음이 기쁨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가치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 지도 이미 알고 있다.

2024-07-14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6월 25일 수원교구 한반도 평화 기원 미사 중에는 ‘고향의 봄’이 울려 퍼졌다. 미사참례자 중 많은 이에게 통일이 오지 않으면 발 디딜 수 없는 고향이기에, ‘통일’이란 말 한마디 없이도 통일을 향한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민족화해위원회에서는 이들을 북향민(北鄕民)이라 불렀다. 이북 땅에 고향이 있는 이들. 실향민이란 말도 있어서인지 애틋하기도 하고, 더 가깝게 느껴진다. 북향민은 공식적으로는 ‘북한이탈주민’이라 불린다. 아무래도 ‘이탈’이라는 말이 있어서인지,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이탈’이란 말이 주로 정상적인 범주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탓이다. 한때 ‘새터민’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현재는 쓰이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땅이 언제까지고 ‘새터’로 남아서는 안 될 노릇이다. 북향민 말고도 우리가 긍정적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이들은 더 있다. 이를테면 ‘농인’(聾人)이다. 언젠가 취재 중 박민서(베네딕토) 신부가 농인과 청인(聽人)을 설명해 준 적이 있다. 흔히 농인과 청각장애인을 동일한 뜻으로 생각하지만, 청인이란 말과 함께 사용하면 ‘청각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농인)과 ‘청각을 사용하는 사람’(청인)이 된다. 호칭만 바꿔도 ‘장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서, 동등한 이웃이라는 긍정적인 관계로 변모한다. 이웃을 부르는 이름에 긍정을 담을까 부정을 담을까. 질문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답은 명확하다. 긍정의 언어는 우리 생각보다 큰 힘을 지닌다. 예수님도 우리를 ‘친구’라 부르지 않았던가.(요한 15,15 참조) 혹시 이웃을 부르는 말에 무심코 부정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겠다.

2024-07-07

우리는 하루 세 번 통일을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 3번 통일을 생각한다.’ 이 문구가 붙어 있는 곳은 서울 구로구에 자리한 사립고등학교다. 기자가 신앙생활하는 본당에서 가깝다. 그 학교에 인접해 있는 생태공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는 항상 학교 정문 옆 공간에 차를 주차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 3번 통일을 생각한다’는 문구가 학교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곤 했다. 그때마다 ‘이 학교 학생들은 제대로 배우는구나’ 싶었다. 2년 전에는 본당 전 신자 체육대회를 같은 학교 운동장에서 하게 돼서 학교 건물들을 유심히 둘러보면서 설립자는 어떤 분일까 소개자료를 읽어 보기도 했다. 지난 6월 2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2024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심포지엄이 열렸다.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와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학술 발표 자리였다. 심포지엄 주제는 매년 바뀌지만 남북의 공존과 상생, 궁극적으로 통일을 지향한다. 올해는 ‘가톨릭교회와 평화 교육’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을 취재하면서 기자의 눈에 먼저 들어온 모습은, 발표자나 발표 내용보다는 객석에 빈자리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3분의 1도 채워지지 않았고, 그마저도 평신도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민족화해 업무에 종사하는 수도자들이 상당수였다. 이 모습이 말하는 것은 통일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관심이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민족화해나 통일 분야 취재를 할 때마다 매번 같은 감정을 느낀다. 북한을 우리 동족이요 통일의 협력자로 바라보지 않고 적대와 증오, 대결의 대상으로 여기는 일부 정치권과 사회 풍조가 교회 안에도 퍼져 있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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