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하고 평온한 마음 얻어야 하느님과의 진정한 대화 가능
네 번째 악습, 슬픔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슬픔은 갈망하는 것을 얻지 못한 데서 생기며 이따금 분노를 동반한다.”(프락티코스 10) 슬픔은 욕구의 결핍,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서 온다. 사막으로 물러난 수도승은 가정과 부모, 이전 삶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러한 것들의 결핍으로 인한 슬픔에 빠질 수 있었다. 세상에 있는 이들의 경우는 부모나 사랑하는 이와 사별했을 때나, 뜻하는 바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슬픔에 빠진다. 이것은 자연적인 슬픔으로 우리를 좌절과 절망으로 이끌 수 있다. 슬픔의 치료제는 세상의 쾌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말한다. “모든 세속적 쾌락을 멀리하는 사람은 슬픔의 악령이 접근할 수 없는 망루다.…우리가 지상의 어떤 대상들에 애정을 쏟는다면 이 적을 몰아내기란 불가능하다.”(프락티코스 10) 이와는 매우 다른 영적인 슬픔(penthos)도 있다. 이것 역시 채워지지 않은 갈망에서 온다. 즉 하느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지 않으려는 갈망, 악에서 해방되려는 갈망, 완전함에 대한 갈망, 하늘나라에 대한 갈망, 하느님을 뵙고 싶은 갈망이 자신의 인간적 한계와 나약함으로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이것은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슬픔이다. 사막 교부들은 이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했다.
다섯 번째 악습, 분노
요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닐까 한다. 많은 사람이 성급하고 참지 못하여 쉽게 화를 내고 분노에 사로잡힌다. 사막 교부들은 분노를 우리 영혼에 하느님의 영을 몰아내고 악령을 거주하게 하는 끔찍한 욕정으로 보았다. 우리 영혼에 분노가 들어오면 시야를 왜곡시키고 생각을 흐리게 하며, 마음을 혼란케 하고 사탄의 공격에 무력해진다고 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분노는 가장 격한 욕정이다.…무엇보다 기도 중에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빼앗는다.”(프락티코스 11)라고 말한다.
그는 어떤 악도 분노만큼 정신을 악령으로 변형시키지 못하며,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예수기도’와 같이 ‘짧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부르면서 분노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교부들은 분노가 우리 정신을 흩뜨려 순수한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에 기도에 가장 큰 장애물이자 관상가의 가장 큰 적으로 보았다. 분노의 치료제는 온유다. 온유로 나아가는 길은 먼저 자신에게 화내는 사람에게 화내어 대꾸하지 않는 것이며, 그에 대해 격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유의하지 않는 것이다. 에바그리우스는 수행이란 분노에서 온유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여섯 번째 악습, 아케디아
아케디아(akedia)는 영적 태만, 나태, 무기력을 뜻한다. 이는 독수도승에 고유한 악습으로 우리의 소홀함으로 하느님과의 계약(kedos)이 깨진(a) 상태다. 특히 클리마쿠스는 이 악습의 증세를 매우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다. “아케디아는 영혼의 마비입니다. 이로 인해 정신은 약해지고, 금욕 수행을 소홀히 하며 성소도 혐오스러워집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를 찬양하며, 하느님 자비와 인간에 대한 사랑을 비방하고, 시편 낭송을 게을리하며, 기도할 때 무기력하게 합니다.”(천국의 사다리 13,90) 아케디아는 정오 무렵 수도승을 더욱 강하게 공격한다고 해서 ‘정오의 악령’(시편 91,6)이라고도 불린다.
이 악습에 사로잡힌 수도승은 한가함과 게으름에 빠지게 되고, 온갖 분심에 싸여 독방(경기장: 영적 투쟁의 장)에서 달아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게 된다.(프락티코스 12) 이 악습에 대한 치료제로 에바그리우스는 손노동과 죽음에 대한 기억을, 클리마쿠스는 항구함(인내)과 공동생활을, 그리고 카시아누스는 노동에 대한 열성을 제시하고 있다.
일곱 번째 악습, 헛된 영광
헛된 영광은 남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갈망이다. 이는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지속적인 유혹으로 다가오는 교묘한 악습이다. 이 악습은 피하기가 힘들다. 그것을 물리치려고 행하는 것 자체가 헛된 영광의 새로운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프락티코스 30)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말한다. “태양이 만물 위에 빛나듯 헛된 영광은 모든 선행 위로 펼쳐집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단식하면서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단식을 중단하면, 내 현명함에 대해 헛된 영광에 빠집니다. 나는 옷을 화려하게 입고서는 헛된 영광에 빠지고, 또 초라한 옷을 걸치고서는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 말할 때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고, 침묵하고 있는 동안에도 헛된 영광에 사로잡힙니다.”(천국의 사다리 22,122)
헛된 영광은 자기를 과시하며, 선행조차도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행하기에 우상 숭배자와 같다. 클리마쿠스는 그 치료법을 다음 세 단계로 제시한다. 즉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혀를 제어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헛된 영광의 생각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을 단호히 잘라 버리는 것’으로 발전하여 ‘사람들 앞에서 치욕을 당하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습관’으로 끝난다. 카시아누스는 공동생활에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유별난 것을 피하라고 권고한다.(규정집 11,19,1)
여덟 번째 악습, 교만
클리마쿠스는 “애벌레가 자라 날개가 생기면 높이 날 듯이, 헛된 영광은 완전히 성장하면 교만을 낳습니다. 교만은 모든 악의 뿌리이자 절정”(천국의 사다리 22,126)이라고 말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교만의 악령은 영혼을 가장 심한 타락으로 이끈다. 실제로 이 악령은 영혼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선행의 원인이라고 믿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면모를 몰라주는 형제들을 어리석은 자로 여겨 그들에게 거만을 떨게 한다.”(프락티코스 14) 헛된 영광과 달리 교만은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여 남들을 무시하고 하느님의 도우심을 거부하는 태도로 신성모독의 뿌리다.
클리마쿠스는 말한다. “교만한 수도승에게 다른 악령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악령이요 자신의 적이기 때문입니다.”(천국의 사다리 22,129) 그래서 사막 교부들은 교만을 모든 악습의 우두머리라고 했다. 교만의 치료제는 자기가 이제껏 받은 하느님의 자비와 도움을 기억하고 성인들의 모범을 기억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빚지고 있음을 늘 잊지 않는 것이다. 교만은 타락한 천사 루치펠과 첫 인간이 범한 죄로서 겸손을 통해 무너진다.
여덟 가지 악습과의 싸움을 통해 악습을 극복한 후 얻게 되는 승리의 월계관은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과 어떤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는 평점심(apatheia)이다. 이런 순수하고 평온한 마음 안에서 비로소 하느님과의 순수한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