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몸에 관한 앎, 세가지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 2장 하느님의 인간 창조를 살폈으니, 오늘은 1장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인간에 관한 앎을 더해보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ᅠ사람을ᅠ만들자.’”(창세 1,26) 하느님은 당신 계시에서 혼자가 아닌 관계를 드러내는 '우리'라는 표현을 두 번 사용해 사람이 당신들의 ‘모상’(imago)이며 또한 ‘유사함’(similitudo)이라고 명료하게 말했다. ‘모상’은 그 사람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인간 존엄성의 존재론적 뿌리가 당신에게 있음을, ‘유사함’은 인간이 완전하신 하느님과 다르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그래서 완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마태 5,48; 루카 6,36) 인간에 역동적 공간이 있음을 말한다.(로마 3,26: 8,30 참조) 완전함을 향해 인간이 나아가야 할 이 역동적 실현은 하느님 ‘모상’인 몸에 관한 이해와 속성 그리고 몸의 언어에 담겨있다. 이를 질문으로 표현하면, ‘나는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몸은 어떤 속성을 지녔는가? 몸은 어떤 언어를 표현하는가?’이다. 첫째, 몸은 선물이다. 나는 선택과 자유 없이 남자/여자로 태어났고, 또 그 성(남성성/여성성) 그대로 거두어진다. 한 번은 세상 안으로, 또 한 번은 세상 밖으로의 불림이다. 그 부름을 살아가는 역사적 인간은 존재 자체가 선물이며 형이상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고,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갖는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내 눈이나 세상의 눈보다, 나를 존재케 하신 분의 눈에 더 아름답고 더 가치가 있으며,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생의 목적이 있음을 안다. 둘째, 몸은 혼인적 속성을 지녔다. 혼인적 속성을 살 것이지 아닌지는 자신의 선택과 자유 안에 있다. 인간 몸이 육체성만 있지 않듯이 혼인적 속성 또한 결혼을 해서 나누는 성적인 육체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몸이 지닌 내적인 질서, 곧 자신을 내어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혼인한 이들은 부부 결합 방식으로 전부를 주고 전부를 받는 관계이지만, 동정이나 봉헌자들은 지향에 의해 생식성의 사용을 배제한 차원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실현한다. 이는 하느님이 성자를 통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주셨듯이 인간 또한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되찾는’ 탁월한 삶의 형태이다. 만약 몸을 ‘선물’의 논리로 이해하고 행한다면, 내어줌은 자기 탈출, 자기 초월로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갈망의 놀라운 실현이다. 셋째, 몸은 사랑의 언어를 드러낸다. 눈짓, 손짓, 미소, 말 등으로 드러나는 이 언어는 자신의 감정을 타자에게 전달하는 인격의 표현 수단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신 “우리”(창세 1,26), 즉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하게 자신의 전부를 주고 받아들인다. 다른 분을 위해, 다른 분과 함께, 다른 분 안에 현존하는 사랑의 관계이다. 결국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와 함께, 누구를 향해’ 살아갈 때, 처음부터 자신의 몸에 쓰여진 그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이때 인간에 대한 정의는 혼자가 아닌 관계에서 찾게 되고, 타자는 ‘나’를 보완하는 사람이 아닌 또 다른 나로 나의 책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망을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정점에 있다. 그분의 몸(성체)은 자신을 선물로, 자신의 신부와 하나 되기를 바라는 혼인적 속성으로, 사랑의 언어로 나에게 오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임이 곧 내어줌이 되고, 이 관계가 세상 안에서 변화되면서 몸이 성사요 거룩함의 주체임을 드러내는 여정이 된다. 몸의 길이 곧 사랑의 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3-16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몸 신학 교리]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고독-일치-순수는 인간 본성의 근본 원리로 서로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고독은 자신을 초월하여 너(altro-Altro)에게 건너갈 수 있는 장치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너를 만나 이루는 하나됨의 기쁨은 순수가 있어야만 영원히 가능하다. 이 본성의 가장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우리를 찾아 하늘에서 오셨고(물리적·역사적인 몸), 교회 안에서 영원히 내어 주신 그분 안에서 찾은 몸의 의미다.(성체적인 몸) 그래서 몸의 길은 사랑의 길이고, 인간도 사랑도 신비로 가득하다. 인간에겐 땅(자연적인)의 가치를 열심히 찾아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고, 반대로 초월적 가치를 부지런히 찾아도 닿지 않는 무엇이 있다. 자연적인 가치와 자아 초월적인 가치가 함께 있는 긴장감, 그 긴장감으로 끊임없이 성장 변화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요 매력이다. 사랑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적 사랑이 신적 사랑으로 변화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낳음 받았고, 행복하라고 몸을 주셨다. 때가 되면 하느님은 이 몸과 눈물만을 거두어 영광으로 완성시키실 것이다. ‘원순수’에 대한 가르침이 교리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원순수 상태를 회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는데, 루카 복음 15장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너무나 멀리 간 지방의 의미, 돼지들의 먹잇감이라도 먹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 먹이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탕진됐음을 알았고, 자신의 정체성 회복은 아버지의 집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원체험을 기억하고 되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원순수의 회복은 인간이 가야 할 진리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처음 상태를 회복했고,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회복하는 은총을 반복 체험한다. 이것이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사람이 되신 신비의 궁극적 목적이다.(로마 8,23 참조) 20세기 들어 새로운 인간학이 세상에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정합적 인간학(Antropologia adeguada)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인간을 정의했고, 교리서를 통해 선포했던 것이다. 새로운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페르소나(persona)라 정의한다. 우리말에선 인격, 사람, 인간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그 어느 단어도 본래의 뜻을 다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어떤 것을 통해서 연주하다’(per-suonare)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 연주하고, 남편은 아내를 통해 아내는 남편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단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페르소나의 개념이 삼위일체 및 그리스도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성됐고,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넓혀졌다. 인간 본성의 내적 특징이 강조된 ‘Persona’를 첫 글자 ‘P’가 대문자일 때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칭하는 ‘위격’으로, 소문자일 때는 대체로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뜻으로 번역했다. 하느님과의 내적이고 역동적인 구조 안에서 하느님 모상으로서 인간을 생각한 개념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만 해소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것은 ‘낳음’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 그 정점에 이르면 하느님을 만난다.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되지 않는 인간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고독-일치-순수가 인간 편에서 느끼는 내적 지각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초월성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인간을 보이는 모습 그것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이고 너이고 우리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3-09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원순수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는 원순수의 의미에 좀 더 깊이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원순수는 원고독·원일치와 함께 사람이 누구인지 계시되는, 인간 창조에 담긴 하느님의 계획을 열어보는 결정적인 열쇠이기 때문이다. “원초적 알몸의 의미는 성경에 나오는 인간학의 첫 밑그림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학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이해하게 해 주는 열쇠입니다.”(교리서 11과 2항) 알몸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은 갓난아이와 같아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를 의미하지도, 결혼하고 첫날을 지낸 신랑신부가 배우자의 몸을 보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몸의 언어가 갖고 있는 더 깊은 차원을 표현한 것으로 성의 다름, 즉 남성성과 여성성의 상호 내재적 관계를 드러낸 표현이다. 여기에 가톨릭 사상의 놀라운 변화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성사 이전의 성사입니다.’ 오직 영원한 사랑(Amore)의 가시적 표지입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Trittico romano, II, 3) 이는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줄 수 있는 초월성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다른 이를 향해 있는 존재라는 것,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하느님을 닮은 그것,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고자 하는 선(좋음)이 타자를 향해 본성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처음 사람들은 서로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줌(dono di sé)을 알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앎을 실천한 의식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안 것을 숨기거나 남기지 않고 주었기에 알몸이었고 부끄럽지 않았다. 그러므로 몸의 언어인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다’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윤리적인 부분을 다룬 것이다. 어떤 강압이나 다른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은 온전한 자유로움 안에서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낳음 받았음을, 내 몸은 이미 하느님의 성사임을 기억할 때, 상호 인격적 내어줌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사랑과 자유를 선물로 주셨고, 죄성이 발견된 후(창세기 3장의 상태)에도 거두어 가지 않으셨다. 사랑은 반드시 자유가, 자유는 진리 안에서 가능하다(요한 8장 참조).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다스림과 절제가 가능하고 덕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교리서에서는 알몸의 의미를 ‘자연주의적’이라기보다 ‘인격주의적’이라고 정의한다. 벗어서 알몸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입지 않은 ‘존재’, 선물의 ‘존재’이므로 하느님 앞에서 원순수의 존재와 양심이 살아나야 하는 것, 우리가 되돌아가야 하는 회복해야 하는 이유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을 몸으로 설명하는 것은 사랑이 가진 두 관점, 즉 본능과 자유, 신앙과 이성, 에로스와 아가페를 분리하지 않고 한 인간을 통합적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다. 종교학자 크리스티나 트라이나는 “육신은 성사적 의미를 갖는다” 했다.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 질문의 핵심을 놓치는 순간 내 마음도 삶도 자신의 욕망에 갇힐 수 있다.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앞에서 어떤 전망을 갖기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고, 그 답은 한처음 즉 이미 나를 창조하실 때 그분의 계획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당시 사회 지도자들)에게 무지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3-02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역사적인 몸, 초월적인 몸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줄 몇 단어를, 사람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 앞에 있는 다른 사람을 보고 경탄하기에 이르는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창세 2,21-23). 첫 번째는 깊은 잠이다. ‘잠’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여러 번 언급되지만, 창세기 2장 야훼계 신학에서 사용된 ‘잠 (tardemah)’은 그 의미가 다른 단어이다. 일반적인 잠이 아니라 여자의 창조 활동에 하느님 행위의 독자성을 강조한 유비(analogia)적 표현이다. 즉 잠은 창조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이고, 특별한 신적 행위가 일어나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교리서 3, 8과 참조) 두 번째는 ‘갈빗대’다. 70인역 번역본에서 ‘갈빗대’로 번역된 이 단어는 고대 수메르 설형문자에서 ‘생명’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다. 하느님께서는 갈빗대가 있던 자리를 살로 덮으시지 않고 메우셨다는 의미에 좀 더 깊이 다가가야 한다. 세 번째는 ‘살과 뼈’다. 히브리인에게 몸은 인격성의 외적 표현이고, 뼈는 인간 존재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내 뼈에서 나온 뼈’는 ‘존재로부터 존재’를 가리키는 관계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고, ‘내 살에서 나온 살’은 신체적 특징은 다르지만 서로의 인격은 같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첫 사람의 뼈로 여자를 지었고, 그 자리를 살로 메웠다는 성경언어는 같은 혈통, 동일한 계보에 속함을 가리키면서 남자와 여자의 본성이 ‘동질함’을 말한다. 네 번째는 창세기 2장 18절의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다. 이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여러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살펴보면, 이 단어가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알맞은’은 ‘닮은’과 연결되지만 하느님을 닮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이므로 성경적 의미에서 땅에 있는 너를 받아들임, 한 인격 ‘곁에’ 있는 한 인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그 ‘도움(aiuto)’을 가리킨다(교리서 9과 참조). 본뜻을 숨기고 상징과 은유로 표현한 갈빗대, 즉 남자의 여자, 두 사람의 동질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알맞은 협력자’의 의미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자칫 파트너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분명 나와 다름에도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하는 이 외침은, 다른 존재로 인한 기쁨, 내 앞에 있는 또 다른 ‘나’로 인한 기쁨으로 하나됨의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둘 다 알몸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라고 한다. 앞에 수식어를 보면 그냥 한 남성성과 한 여성성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그 아내’의 관계, 즉 혼인의 관계이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그 사람의 몸을 보면서 자기 몸의 의미를 알게 됐고, 주저함 없이 주면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너는 내가 소유할 누구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누구이고, 나를 선물로 내어주고 또한 선물로 받아들임을 알몸으로, 그래서 온전히 하나가 됐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기 배우자가 ‘또 다른 나(altro is)’이다. 소문자 ‘a’를 대문자 ‘A’로 쓰면 하느님을 뜻한다. ‘너’ 깊숙이 들어가면 ‘너’를 만드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결국 하나됨은 서로를 바라보고 그 사람에게 집중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그 사람 안에 있는 근원적인 사랑을 바라볼 때 자신을 초월하는 일치에 이른다. 인간에 대한 존재적 질문, 즉 ‘나는 몸이다’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인간은 관계성의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몸이 너를 받아들이는 ‘집’(관계성의 존재)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2-23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원일치, 인격들 간의 친교

하느님 손에 의해 빚어진 한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자신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를 보고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본능적 고백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했으면 내적 깊은 곳에서부터 이런 감탄이 터져 나왔을까? 이 감탄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너’가 정말 아름답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뼈에서 나왔고 내 살에서 나왔으니 ‘나’도 멋지다는 것이다. 나와 너를 동시에 긍정한 이것을 ‘원일치’라 한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러한 일치를 갈망하며, 일치할 수 있는 조건도 제시된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는, 다르게 표현하면 나를 긍정하고 너를 긍정할 때 일치할 수 있는 능력이 샘솟는다. 어느 날 선물처럼 너는 내 삶에 들어왔고, 나 또한 너의 삶에 들어가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하게 알았던 것처럼, 나도 너를 만나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더 완전하게 알게 됐으니, 그대가 바로 나의 얼굴이다. 이는 너의 삶이 내 삶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나의 삶 또한 너의 삶이 됐다는 뜻이다. 이러한 일치에는 중요한 특성이 있다. 같아서 이루는 일치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치(하나)이다. 일치라고 쓰고 행복이라 읽는 두 사람의 역사가 출발했는데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보이는 것만 다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각, 성격, 시각 등등, 도대체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엔 다름이 신기했는데 시간에 시간이 더할수록 불편했다. 다름을 써놓고 틀렸다고 읽으며 밀어냈다. 너를 밀어내고 보니 나도 나의 정체성에서 멀어졌다. 이제 다시 틀림이라 읽지 않고 다름으로 읽으니 처음 상태로 돌아가 그가 다시 보이게 됐다. 새로운 시선이 생겼다. 너의 시선도 나의 시선도 아닌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의 시선을 갖게 됐다. 그것이 아담의 고백이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너’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너도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성(남성성-여성성)과 다른 너의 성을, 몸에 쓰여진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된다. 내가 너에게 갈 수 있는 길은 나를 탈출해 너에게 갈 때에 가능하다. 이는 인간이 지닌 초월성으로 가능하다.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하여 인간이 됐듯이, 인간도 자신을 탈출해 너를 만나 하나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남성성과 여성성을 생물학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부정적 사고와 힘(경제력 권력 등)의 논리로만 받아들인다면, 성을 역할 분담이나 서로에게 필요한 파트너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남성성, 여성성의 의미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보이는 육체적 차원을 넘어 보이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신 그 신비가 있다. 교리서 제8과 1항은 이렇게 표현한다. “‘원고독’의 의미는 ‘원일치’(unità originaria) 의미의 일부를 이룹니다.” 결국 인간은 고독을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찾고, 자신에서 탈출하여 너에게 가는 친교적 일치를 이루게 된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이 고백에는 서로의 성(性)은 다르지만 본성은 동질함을 의미한다. 너는 내가 소유할 누구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누구이며,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씀이 지닌 진리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2-16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원고독, 자신의 인격을 자각하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그 존재 본성상 고독(혼자 있음), 일치(함께, 하나 되고자 하는), 순수(깨끗함)라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그 사람 몸에 쓰여 있고 또 깊이 체험한다. 그래서 단어 앞에 ‘원’자를 더해 원고독, 원일치, 원순수라 한다. 두 권으로 출판된 우리나라 번역본 제I권 5과 ‘원고독’의 의미부터 살펴 보자. 창세기는 2장이 1장보다 먼저 쓰였다. 야훼계 문헌인 2장에선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를 볼 수 있고, 인간의 본성적 특징도 잘 드러나 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창세 2,7.18) 흙과 생명의 숨으로 창조된 이 ‘사람’은 남성성-여성성, 성(性)이 주어진 상태가 아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던 하느님이 그를 잠들게 했고, 잠에서 깨어난 사람은 자신과 다른 그 사람을 여자로, 자신을 ‘남자’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첫 번째 특징인 고독의 이중성을 읽어낼 수 있다. 우선 사람의 본성 그 자체에 있는 고독으로 인간만의 독창성, 즉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이고, 그 다음은 남자-여자, 즉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이다. 인간은 고독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혼자이면서도 혼자 살 수 없는 관계성의 존재라는 것이다. 즉 닫힌 존재가 아니라 너로 나아가는 개방성의 존재요,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 자신을 열어야 하는 본성이 몸에 쓰여져 있음을 말한다. 이는 누군가를 향해 자신을 열 때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고독의 이중성이란 한편으론 자기 안에 무한에 대한 갈망을, 영원에 대한 동경을,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사랑에 대한 갈망을, 절대자를 향하도록 하는 빛과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론 세상 안에서 너를 만나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밥을 먹고 자신들이 지닌 추억으로 역사를 빚게 한다는 것이다. 고독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 되고 싶은 그리움이요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목마름이다. 자신을 만들어 떠나보낸 그 하느님을 만나 당신처럼 거룩할 수 있도록 인간 자신이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한지를 알게 하고, 방향을 잡아 항로를 잃어버리지 않게 해주는 장치와 같다. 결국 고독은 인간이 지닌 특별한 존엄성을, 자신을 만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간의 품격을 드러낸다. 사람과의 관계, 특히 남자와 여자에게서 오는 고독은 이 땅에서 더 충만한 삶을 살게 한다. 단순히 누군가 옆에 있기를, 이야기 나누기를, 이해받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온다. 어떤 필요나 부족함이 아니라 너에게 가고 싶은 나도 선물로서 너에게 다가가고 싶은, 그래서 나를 건강하게 살도록 한다. 이러한 고독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줄기차게 따라온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왔던 그 고독 덕분에 그분의 얼굴을 뵙게 될 것이고, 사람과의 관계 특히 부부간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은 오래 살아 서로가 서로를 다 안다고 할 때에도 긴장을 낳는다. 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완성을 향한 초대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2-09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에 대한 전망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찢어지고 더러워진 5만 원권 지폐 한 장이 손에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 묻은 오물을 닦고 찢어진 부분을 테이프로 붙여 은행으로 간다. 은행원은 훼손된 지폐를 받고 깨끗한 5만 원권으로 돌려준다. 어떻게 한마디의 잔소리도 찌푸림도 타박도 없이 깨끗한 돈으로 바꿔 줄 수 있을까? 그거다. 손상된 5만 원권이지만 그 가치는 5만 원이었어! 이 예를 사람으로 옮겨보자. 손상된 5만 원은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이지만 그 가치, 즉 인간의 초월적인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긴 세월 동안 창세기 1장과 2장의 인간보다 창세기 3장의 인간, 즉 죄, 원죄에 대해 더 강조했다. 이는 행동 결과에 집중하여 돈이 더러워지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과 같다. 예수가 바리사이들에게 ‘한처음’으로 돌아가 너 스스로 그 답을 찾으라고 한 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한처음 상태로 돌아가 그 사람의 존재를 먼저 알기를 바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려는 죄성으로 창세기 3장의 사건이 있었지만,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 자신을 새롭게 드러내면서 사람의 얼굴도 되찾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타락한 본성에서 구원된 본성으로 회복된 것이다. 나를 한처음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곳에서 나를 찾아야 하고 나에 대한 정의를 가져야 한다. 그것을 이렇게 노래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ᅠ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완성돼야 할 부분이 우리 마음에 씨로 뿌려졌다. 어떤 씨일까? 바로 '당신의 모습'(창세 1,27 참조)이다. 시선을 바꿔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몸의 눈으로 믿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대전환이다. 매일 숨 쉬고 있는 이 생명의 숨은 애초부터 나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숨’이고(창세 2,7), 매일의 삶은 ‘일하라’(창세 1,28; 2,5 참조)는 그분의 전망 안에 있는 것이다. 내게서 당신의 숨을 거두어 가는 그날, 하느님의 자비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희망의 완성이 영광 속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교리서 2과 5항에서는 “그리고 창조의 형이상학적 상황에 필연적으로 직결된 생성, 곧 우유적 전망과도 맞닿아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우유적 전망’이라는 단어를 통해 인간에겐 변하지 않는 본성적인 모습이 씨앗으로 뿌려져 있고, 씨앗은 씨앗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썩고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잠재적 수동성 또한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 모상인 ‘나’가 나의 자유의지와 선택을 통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고 하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색과 머묾이 길어질 때, 우리는 앎을 더 깊이 하게 된다. 사색과 머묾의 시간은 곧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배움의 시간이 된다. 교리서 내용이 어렵다고 책장을 덮고 포기한다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나’라는 보물, 진귀하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나’는 묻어두고 주위만 맴돌다 간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맛있는 밥이 되기 위해선 뜸이 필요하듯 교리서의 어려운 내용에서도 그런 뜸을 들인다면, 안에서부터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2025-01-26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께서 직접, 두 번이나 언급한 ‘한처음’(마태 19,3; 마르 10,2)은 모든 인간의 근원이기도 하다. 한처음에 중심을 두고 바리사이들이 한 질문을 다시 들어보자.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 질문의 핵심은 무엇일까? 왜, 그와 내가 행복을 꿈꾸고 시작했던 혼인 생활을 끝내려 할까? 왜, 시작한 축성/봉헌생활을 그만두려 할까? 맞지 않아서? 두 사람은 원래 다르다. 겉만 다른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 속속들이 다르다. 그러니 다름은 이혼 사유가 안 된다. 큰 어려움이 있어서? 그것도 아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다독이고 힘을 내자고 한다. 그럼 원인이 무엇일까?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사랑이 넘쳤는데 지금은 고갈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사랑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의 핵심은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이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한처음’, 즉 너의 근원으로 돌아가 스스로 그 답을 찾으라 하신 것이다. 한처음을 확대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4장 1절까지를 말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타락하기 전 본성의 상태를, 3장에서 4장 1절까지는 타락한 본성의 상태를 말한다. 역사의 인간은 이 둘이 통합된 본성이지만, 우리는 구원된 상태로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이다. 두 상황의 경계선상에서 처음 상태를 기억하고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몸 신학의 전망이요 신학적 인간학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마음이 완고하여(마태 19,8; 마르 10,5)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혼을 합법화했지만, 예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의미, 혼인과 사랑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찾도록 촉구한 것이다.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고 질문했는데 ‘사람’으로 응답한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했던 사과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알록달록하게 생긴 사과 하나가 창세기 1장에서 4장 1절의 나이다. 반으로 잘라 오른쪽에 있는 것이 창세기 1장과 2장 상태의 나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4장 1절의 상태의 나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이해를 창세기 3장 1절에서부터 교육받았고, 또 결의론적으로 이해했다. 즉 원죄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제 그 껍질을 벗고 규범론적으로 만나보자. 왜 그래야 하는가? 삶은 무엇보다 표현이고, 이 표현에 변화를 줄 때가 왔다. 이 가르침은 내 삶의 변화를 희망하고 도전하는 용기를 얻게 한다. 머리론 알지만 행동에는 두려움이 앞서기에 나를 숨기려 갈등하는 나에게 나의 근원과 완성을 바라보고 깨어 있어라 한다. 결국 이 가르침은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요, 그 앎의 자리에 내가 있기 위함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전한다.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은 사람과 그의 아내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라고 물으셨다. ‘무엇을 했느냐?’, ‘왜 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느냐?’ 하지 않고, “어디에 있느냐?” 물으신 것이다.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고,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곧 존재로서 나의 정체성, 그리고 당신과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자유로운 인격적 행위는 자신의 책임하에 있고, 그분은 저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나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지난호(1월 12일자) ‘하느님 계획 안의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는 편집과정 상의 오류로 김혜숙 선교사님이 보내주신 원고가 아닌 다른 글이 게재됐습니다. 이에 이번 호에 다시 게재합니다. 게재 오류로 불편을 겪으신 김혜숙 선교사님과 독자 여러분께 깊은 사과 말씀 올립니다.

2025-01-19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 한 처음에

이 교리서의 본 내용은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마르 10,2)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출발한다.(1과 2항) 이어지는 내용에서 바리사이들은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율법으로 권위와 정당성을 세우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응답한다.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4절과 8절에서 거듭 언급한 ‘한처음(처음)’에 시선을 모으게 한다. ‘한처음’은 창세기 1장과 2장의 인간창조를 말한다. 바리사이들이 근거로 내세운 모세의 율법은 원죄의 열매이지, 원래 하느님 계획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을 거듭 언급한 것은 역사 안에 실존하는 모든 인간이 죄로 기우는 경향을 가졌지만 한처음의 상태, 곧 하느님의 원래 계획은 여전히 인간에게 빛나고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 양심의 작동과 성장이다. 지금 내 앞에 사과가 하나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사과는 내가 보는 각도에 따라, 빛이 비춰지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사과는 자기가 바라본 모습만 말할 뿐, 사과의 전부를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맛도 보아야 하는데 그 맛에 대한 평가도 모두 다르다. 이제 이 사과를 ‘나/인간’이라고 생각해보자. 나는 ‘나’를 어느 부분에서 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나’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 기준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나에 대한 이해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빛을 받는 위치에 따라 사과는 더 선명하고 잘 생겨 보인다. 나/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 빛은 하느님이다. 창조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왜 ‘낳음’ 했는지 그분의 계획을 만나야 한다. 이는 세상에 태어난 내가 해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참 나를 알게 되면 덤으로 너를 알 수 있고, 인격적 친교를 이루는 참된 행복을 살 수 있다.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만질 수 있는 육으로 세상에 그리고 가정에 들어오셨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1장 15절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실제로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도 일어났다. 몸 그 자체가 페르소나(persona)로서 성사요 인격의 전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말한다. 이것은 신학적 사고뿐만 아니라 현시대에 깊이 뿌리내려 있는 이원론적 사상에 엄청난 변화를 주는 기재가 됐고, 이 새로운 사유의 논리가 인간 몸이 영과 육으로 분리되지 않는, ‘몸 신학’이라는 가르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나, 나의 삶에 관심을 둔다. 나를 홀로 버려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을 때 나를 위한 계획도 함께 작정해 뒀다. 이 계획을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모습으로 자유롭게 실현하는 것이(나침반과 지도), 이름을 가진 자, 불림 받았고, 선택한 자의 삶이다. 세상이 개인주의와 개인성을 당연한 권리처럼 포장해 주지만, 다른 한편에선 개인의 인격이 침해되고 가정이 지닌 고유한 빛은 퇴색되고 성장기의 젊은이들이 방황하는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는 한 인간이 ‘낳음’ 받고 인격의 틀이 짜이는 중요한 곳이며 복음의 장소인 가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으로, 현재 ‘몸·혼인·가정 신학 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그대, 나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사상과 영성」,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등이 있다.

2025-01-05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몸 신학 교리] 인간을 묻다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뉴미디어 홍수 시대에 숏폼 플랫폼은 단 몇 초 만에 다음 또 다음을 클릭하게 할 만큼 인간의 심리를 뚫고 들어왔다. 4차 산업혁명의 과학과 기술들은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에 변화를 주었고, 이제 개인의 영역에까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거대한 물결을 막을 순 없지만 진정 ‘사람이 중심이 되는 변화인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우리 신앙인의 삶의 태도가, 교회는 인간 존재의 가치를 성찰하고 인간을 더 깊은 차원으로 본질적인 차원으로 초대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인간은 과학 기술이 그 존재와 가치를 대신할 수 없는 창조주의 모상으로 낳음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과 친교를 하기 때문이다. 사랑, 생명, 혼인, 가족… 이 거대한 담론들을 어떻게 새롭게 만나야 할까? 아니 어떻게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은 다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나는 누구이지?’ ‘너는 누구이지?’를 대면하도록 한다. ‘나’가 ‘나’로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가진 나/인간, 비참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가진 나/인간,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눈물이 쏟아질 만큼 아름다운 나/인간이다. 결국 아름답고 큰 존재로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가 내 안에 있음을, 또 다른 영역으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 또한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이 연재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찾아가는 나침반과 지도가 되려고 한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교회의 가르침으로 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나라와 미국에서는 ‘몸 신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제목은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교리서다. 이 교리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79년 9월 5일 시작해 1984년 11월 28일까지 5년 동안 129회에 걸쳐 선포된 교회 가르침이다. 교황은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을 하나의 교회로 보고, 교황을 만나러 온 그들에게 매주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을 통해 목자로서 그들을 안내했던 것이다. 전체 129과로 이루어진 이 교리는, 몸의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출발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근거로 둔 인간의 근원과 그 정체성의 특징을 말하는 한처음편(1-23과), 창세기 3장 이후 욕구에 의해 변화된 인간의 시각을 어떻게 회복하는지에 대한 마음의 구원편(24-63과), 육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두가이들과의 대화에서 육의 부활편을(64-72과), 구약시대에는 없었지만 예수님에 의해 선포된 하늘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편(73-86과) 그리고 혼인과 혼인성을(87-113과), 문헌 「인간 생명」(114-129과)에 관한 주석으로 이루어졌다.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그 바탕 위에 이 가르침은 펼쳐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 가르침을 환영하고, 자신의 사고와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이 얻은 기쁨과 행복으로 주변에 그 영향을 주고 있다. 함께 나아가는 모습으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몸(육-정신-영혼), 사랑(에로스-아가페), 자신과 공동체(개인과 사회)를 규범론과 단일론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를, 너를,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과 친교를 더 깊이 할 수 있을 것이고, 인간의 존재와 가치에 변화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원론적, 결의론적 사유의 원리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으로, 현재 ‘몸·혼인·가정 신학 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 「사랑, 그 아름다운 역동성-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의 신학」, 「그대, 나의 얼굴」 등이 있고, 역서로는 「사상과 영성」,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몸 신학」 등이 있다.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