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 읊은 시편 하느님의 죽음으로 절망 느끼지만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참된 대화’ 기도 속에서 하느님 발견할 수 있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앞두고 시편 22편을 읊으셨습니다.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침묵 때문에 절망감을 느끼지만 기도하면서 그분께 의지하기에 허무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죽음의 목전에 선 이가 하느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유다인 회당 안 동편의 기도하는 곳에 “네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라!”는 경구가 쓰여 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입니다. 기도는 자기 영혼에게 하는 독백이 아닙니다. 질문, 두려움과 의심에서 나오는 하소연과 고발, 침묵과 경청, 자기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타인을 향함, 청원과 신뢰, 더듬으면서 답을 찾아감, 기도가 들어졌음에 대한 확신, 감사와 찬양과 충실함의 맹세 등으로 이루어진 시편 22는 기도가 상대방과 나누는 극적이면서도 참된 대화임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멀리 계신 듯합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22,2) 시편 저자는 곤경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물처럼 엎질러지고 제 뼈는 다 어그러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22,15)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22,22) 여기서 기도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놓인 벽에 금이 가고 그것이 허물어지면서 기도하는 이는 갑자기 하느님 앞에 마주 섭니다.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가 실현되고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하느님 앞에 서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 찬양 위에 좌정하신 분!’(22,4)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어디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바로 기도 속에서 당신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기도의 어려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살아계신, 말을 건네시는 하느님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아무도 답하지 않는 죽음의 벽 앞에서 서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네 하느님은 어디 계시느냐?”(마태 27,39-44; 시편 42,4)라는 믿지 않는 이들의 빈정댐, “주님 어찌하여 멀리 서 계십니까? 어찌하여 환난의 때에 숨어 계십니까?”(시편 10,1)라는 신앙인의 절규는 침묵하시는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더욱이 하느님의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질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 기도가 즉각적으로 들어지지 않을 때 “하느님의 연자 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곱게 갈고, 하느님이 관대함으로 맷돌을 천천히 돌리신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준엄하게 만회하신다.”(플루타르코스/섹스투스 엠피리쿠스/프리드리히 폰 로가우)는 말이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때가 되면 그분이 개입하실 것이라 희망합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비극을 희극으로 당장 바꾸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지혜와 희망의 창문을 열어 줍니다.
“그분께서는 가련한 이의 가엾음을 업신여기지도 싫어하지도 않으시고 그에게서 당신 얼굴을 감추지도 않으시며 그가 당신께 도움 청할 때 들어 주신다”(22,25)라는 구절은 항구히 기도하는 이의 체험을 전해줍니다. 기도하는 이는 자신을 버러지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영원으로부터 긍정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죽음의 먼지를 응시하면서도 모태로부터 자신을 빚어낸 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