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오늘날 생명윤리-인간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충돌

이승훈
입력일 2025-07-02 11:52:32 수정일 2025-07-02 11:52:32 발행일 2025-07-06 제 3449호 2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오늘날 생명윤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관리하는 생명에 관한 윤리쯤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그 윤리란, 속된 말로 무늬만 윤리일 뿐,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성장에 저해되지 않는 최소한의 규범을 만드는 방패로 환원된 지 오래다. 다시 말해서 생명윤리의 목적이 인간의 존엄을 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논의 안으로 들어가 보면 무엇보다도 인간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한 관점의 충돌이다. 

그 논의들은 배아 연구, 낙태, 유전자 편집, 의사 조력자살, 안락사, 장기이식, 인공지능 등의 현실 문제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 생명의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 이 물음은 우리 사회가 인간을 그리고 인간 생명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를 되묻게 한다.

생명윤리는 생명과학이 발전하면서 그 기술이 인간 생명의 시작과 끝에 개입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과거에는 신앙과 도덕 전통이 생명의 경계와 의미를 규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선택과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더 중시하면서, 생명은 점점 선택 가능하고 조작할 수 있는 대상, 때로는 부담스러운 현실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생명윤리는 결국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된다.

가톨릭 생명윤리는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인간 생명의 고유한 존엄을 지키는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를 지닌 전인적 존재로서, 그 생명은 수정된 순간부터 그 자체로 목적이며, 존엄한 존재이다.(사목헌장 24항 참조) 이 사실은 보편적 진리와 연결되어 있어, 인간 생명을 어떻게 보호하고 존중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게 한다. 즉 인간 존재 안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이 새겨져 있다. 마치 우리 마음 안에 나침반이 있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아는 것처럼,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그 보편적인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점점 우리 사회는 보편적 진리보다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진리보다는 이익 추구를 우선시한다. 이러한 사고에는 공리주의나 원칙주의(Principlism)로 대표되는 현대 세속 생명윤리가 자리한다. 이들은 인간 생명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 가치로 바라본다. 

공리주의는 결과 중심의 사고로, 때로는 한 생명의 희생을 다수의 이익을 위해 정당화한다. 원칙주의는 자율성과 정의 같은 원칙에 따라 판단하지만, 그 원칙들이 인간 생명의 본질보다는 이성적 능력의 발휘나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에, 인간 생명 그 자체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그 결과, ‘가치 있는 생명’과 ‘덜 가치 있는 생명’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며, 생명 자체가 평가받는 대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흐름은 점차 “생명을 거스르는 행위들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입법화하고, 심지어 그 행위들까지 모두 합법화”로 나타나고 있다.(「생명의 복음」 4항 참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게 생명윤리는 과학기술적 문제 해결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시 묻는 일이다. 그는 “선과 악, 죽음과 생명, ‘죽음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의 엄청나고 극적인 충돌에 직면하고 있음을 충분히 깨달아야만 합니다.”(28항)라고 강조하며, 생명윤리는 그러한 충돌 앞에서 깊은 윤리적 성찰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생명윤리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생명은 배아든 태아든 노인이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모든 인간 생명은 동일한 존엄을 지닌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세상에 증언해야 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생명의 신비를 지키고 존중하는 문화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

Second alt text

글 _ 최진일 마리아 교수(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연구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