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행복의 소리를 듣다

민경화
입력일 2025-05-21 09:45:36 수정일 2025-05-21 09:45:36 발행일 2025-05-25 제 344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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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아이와 같이 달린다. 얼굴과 팔뚝에 바람이 닿는다. 참 좋다. ‘행복’이라는 관념에 몸이 있다면 그건 ‘바람’이 아닐까? 언제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내 곁에 있고, 떠난 뒤에야 항상 또렷해지는 바람.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바람이 팔에 닿는 속도, 바람이 닿는 그 온도가 바로 행복의 느낌이라고. 늦은 오후 아이를 앞세우고 천천히 달려가며 아이를 바라본다. 작은 몸에도 넘어지지 않고 참 잘도 달린다. 경사진 언덕을 오를 때면 살짝 일어서서 페달에 번갈아 체중을 실어 밟으며 달려간다. 자전거에 서툰 나는 그런 아이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사실 나는 마흔에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그래서 여전히 자전거는 좋으면서도 불안하고 두렵다. 행복처럼.

최초부터 나에게 자전거는 핸들을 잡고 페달을 구르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잡고 등에 기대어 타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자전거였고 자전거는 아버지였다. 학교에 갈 때면 나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탔다. 아버지의 등 뒤에 앉아 허리를 잡고 등에 기대면 아버지는 힘차게 페달을 굴렀다. 그렇게 둘이 함께 바람 속을 달려갈 때 나는 행복했다. 교차로를 지나며 아버지가 속도를 높일 때면 체구가 작은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 더욱 바짝 달라 붙었다. 아버지의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내 왼쪽 귀에 들려왔다. ‘쿵쾅쿵쾅’ 내 심장도 그렇게 아버지의 심장 소리에 박자를 맞췄다. 숨이 턱까지 차 올랐을 언덕을 몇 번 넘어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내려주고 직장으로 달려가셨다. 나는 언제나 교문 앞에 서서 미소를 머금고 아버지를 오래 바라 보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 아침이었다. 그냥 자전거에 앉아 비를 맞기엔 날씨가 조금 추웠다. 아버지는 가까운 버스 정거장에 멈춰 서서 학교로 가는 버스에 나를 태웠다.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는 잠시, 내 손에 버스비가 없었다. 안내양 언니에게 무어라 해야 할까 작은 심장이 쿵쾅쿵쾅 소리를 냈다. 학교 앞 정거장에 가까워지자, 너무 두려워 현기증이 났다. 드디어 버스는 정거장에 멈췄고 버스 문이 열리자 아버지가 보였다. 흠뻑 젖은 아버지는 벌써 정거장에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를 보니 와락 눈물을 터졌다.

아버지는 안내양 언니에게 버스비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 내게 달려오셨다. 그 아끼는 자전거가 쓰러지는데도 상관치 않고 내 앞에 앉아 나를 꼭 안아 주셨다. 비에 맞지 않게 하려고 버스에 태우는 것만 생각했노라고, 너를 태워 보내고야 버스비를 주지 않았단 생각에 지름길로 달려 버스보다 먼저 왔노라고 아버지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등 뒤가 아닌 가슴에 안겨 한참 울었다. 안도와 행복의 그 순간. 그때 아버지의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들렸다.

아이와 함께 호수까지 달려간다. 나보다 힘이 좋은 아이는 엄마와 속도를 맞추느라 천천히 달려준다. 내가 호수를 한바퀴 도는 동안 아이는 두바퀴를 돈다. 그러다가 제 속도에 맞게 쌩쌩 달려 금세 호수를 한바퀴 더 돌고 내 앞으로 온다. 행복과 충만함이 가득 찬 얼굴. 나는 아이를 부른다. 벤치에 앉은 내 앞으로 아이가 다가오면 나는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어 본다. 쿵쾅쿵쾅 심장이 크게 뛴다. 아이가 내게 묻는다. 어떻게 들리느냐고. 그러면 나는 내 가슴에 아이의 귀를 대어준다. 지금 네 심장소리는 꼭 이렇다고. 아이가 내 가슴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아이를 안고 나는 오래전 떠난 아버지의 심장 소리를 바람 속에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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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