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 9일은 한글날이 최초로 공휴일에서 제외된 날이었다. 출근했던 고정원 씨는 저녁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와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다. 자신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던 것. 한참 후 범인이 밝혀지는데 그는 유영철이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불교 신자들이었는데, 그는 문득 죽기 전 아내가 “우리 함께 성당에 갑시다” 했던 제안을 떠올렸고 성당에 나가 세례를 받고 루치아노가 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아도 허무하고 다친 마음은 위로받지 못했다. 그는 유영철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을 본 후, 이제 그 자신이 죽기로 결심한다.
그는 날마다 한강 다리에 서서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것은 선택할 여지도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밤, 강물을 내려다보고 하염없이 절망의 눈물을 흘리던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러지 말고 용서해 보지 그래, 죽을 용기가 있다면 까짓거 못 할 것도 없잖아. ”
그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용서라는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고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갑자기 죽고 싶지 않아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는 그것을 천사의 목소리라고 회상했다.
그는 몇 날을 고심한 끝에 유영철을 용서하기로 하고 법무부에 탄원서를 내고 유영철에게도 편지를 보내 그를 양자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유영철의 아이들도 돌봐주겠다고 덧붙인다. 유영철도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고, 그는 한번 면회하러 가겠다고 했다.
내가 고정원 루치아노 형제를 알게 된 것이 이즈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결심이 사람들에게 감동만 주었다고 믿는 분은 없으리라. 그는 ‘아버지는 미쳤다’고 말하는 딸들과 오래 불화했고 후일 살인 피해자 가족들의 맹비난에 직면한다. - 가톨릭은 사형제도 폐지 운동을 하고 있었고,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쓰려고 구치소 봉사단에 참가하고 있던 때였다.
가톨릭 교정사목위원회는 이 외에도 피해자 구제 모임 ‘해밀’을 운영하고 있었다. 교정사목위원회는 유영철과 고정원 형제의 만남을 주선하는 한편, 내가 만나고 있는 일반 사형수들과 해밀의 피해자와의 만남도 주선했는데, 유영철은 끝내 그 만남을 거부했다. 도저히, 자기가 죽인 살인자 피해자의 가족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이코패스로 유명한 그도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걸까? ‘글쎄’ 싶었는데, 나중에 일반 피해자 가족을 만난 우리 사형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사형수들 또한 자신이 직접 가해한 사람이 아닌데도 일반 피해자 가족과 만남이 있기 며칠 전부터 자신의 범행들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만남이 있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식은땀을 흘렸다고 했다.
영화 <밀양>의 그 위대한 문제 제기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나는 인간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를 만나 그렇게 뻔뻔하게 ‘나는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소설을 쓰려했다고 해도 취재 중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고 중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살인마 사이코패스 유영철의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닮은 사람들을 만들자" 하는 창세기를 떠올렸으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현인 양심“이라는 구절을 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구절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주의 기도’, 예수님 친히 가르쳐 주신 그 위대한 기도문에서 인간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어쩌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단 하나, 그게 아마도 ‘용서’이니 용서는 죽음마저도 이겨낼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