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몸 신학 교리]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의 의미

이승훈
입력일 2025-06-18 08:47:52 수정일 2025-06-18 08:47:52 발행일 2025-06-22 제 3447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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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적 바라봄’ 상태에서 지배하려는 논리로 변화됨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창세 3,16) 서로 간 인격적 바라봄에서 서로 지배하려는 상태로 변화됨을 표현한 말씀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에 근본적 결핍이 발생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힘의 논리로 변화됐음을 성의 다름으로 말한다. 한처음 좋음에서 분출됐던 인간의 긍정적 욕망이 무엇 때문에 부정적 욕망으로 변했는지, 남자와 여자로 하지 않고, ‘남편’이라 말하였는지,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부분이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부끄러움의 더 깊은 차원을 드러내고 있는 이 말씀은 역사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겪는 심리적 현상과 비슷하여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그 의미를 축소시킬 수 있다. 구약과 신약성경 전반에 흐르는 남편의 의미는 단순히 남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처럼 남편은 다른 표징을 의미한다.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한처음 충만의 상태와는 다른 상황으로 결핍 상태에서 느끼는 욕구를 말한다. 한몸이 될 수 있는 관계는 표징적으로는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관계, 실제적으론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즉 혼인으로 맺어지는 관계이다.(에페 5,31-32 참조)

그런데 그의 욕망들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한몸이 되어야 할 남편의 자리에 욕망이 들어와 그와 한몸처럼 된 것이다. 이제 욕망이 주인이 되어 나를 조종하는 상태가 됐다. 내가 갈망하는 그 욕망들 즉 재물, 권력, 명예, 여러 소유욕 등이 주인으로 들어와 견고한 벽돌을 쌓게 됨을 말한다.

그다음으로 볼 것은 갈망으로 드러난 목마름(결핍)이다. 이는 여자의 결함이나 무능력, 차별을 의미하지 않고, 남편과 이루게 될 결합의 광범위한 정황에서 여자가 느끼게 될 충만한 일치의 결핍을 가리킨다. 땅의 속성에 묶이게 된 인간의 욕망은 내어줌에서 얻어지는 충만이 아니라 너를 지배하고 소유함에서 부유해지려 한다. “자신을 내어주는 두 주체의 충만한 영적 일치가 이루어지는 인격들의 친교 대신에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욕망, 갈망의 수단이나 대상으로 삼는 소유 관계가 발생합니다.”(31과 3항)

욕망과 결합된 부끄러움은 남자로 하여금 ‘지배’ 충동에 빠지게 한다. 여자는 상대가 나를 지배한다고 느끼면 일치가 불가능해지나 일치를 향한 갈망은 더욱 커진다.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 서로를 지배 혹은 통제, 소유하고자 하는 관계에 처하게 된다. 행복은 소유에서 오지 않고 영원과 묶어주는 희망에서 얻는다는 진리를 덮고자 한 것이다.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남자가 ‘남편’이라 불리는 첫 문장으로 친교-공동체의 근본적 상실을 의미한다. 성의 다름에서 인격의 우수한 점을 직감했고, 서로에게 순응하는 감수성으로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열리고 또 노출되도록 창조됐음을, 또 그들이 체험한 사랑은 서로에게 매몰되지 않고 더 높은 차원을 향한다는 의미에 눈 감은 것이다.(48과 4항)

즉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름은 이미 창조 때부터 주어진 것으로 인간이 계획하지 않은 어떤 질서가 존재함을, 상호 보완성 안에서 그 빛이 드러남을 외면한 것이다. 그 결과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도 타자의 몸에 대해서도 혼란을 가져왔다. 선물의 논리가 지배의 논리로, ‘한몸’의 관계가 아니라 소유 논리가 되어 높고 높은 벽이 그들 안에 들어왔다.

만약 성적 다름을 인격의 완성이라는 지평 안에서 파악하지 못한다면, 쾌락의 감각적 선(善)과 인격 상호 간의 좋은 삶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아마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다. 성에 대한 진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 현존에 관한 질문을 안겨 준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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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의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