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지에서 하얼빈까지…독립 꿈꾸던 선조의 열정 헤아리며

강우일 주교(베드로·전 제주교구장)가 지난 6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주관하는 중국 평화 순례를 다녀왔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이들의 평화를 향한 열정을 배운 강 주교의 순례기 전문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1) ] 바로가기 >>>> [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 만주 벌판을 거닐다(2) ] 바로가기 옌지에서 하얼빈까지…독립을 꿈꾸며 말 달리던 선조들의 열정 헤아리며 백두산 여행을 마친 우리는 다시 옌지(延吉, 연길)로 가서 기차를 타고 마지막 목적지인 헤이룽장성(黑龙江省, 흑룡강성) 하얼빈(哈尔滨, 합이빈)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는데도 또 입국 단체 비자 발급 순서대로 줄을 서서 여권 사진을 보여주고서야 승차가 허락되었다. 중국 여행 내내 우리는 정부 당국의 감시하에 있음을 절감하였다. 옌지에서 하얼빈까지 고속철도로 가는데도 4시간이나 소요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4시간의 기차 여행 내내 우리는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만주벌판을 바라보았다. 옛날 만주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말 달리던 우리 선조들의 기상과 뜨거운 열정을 마음속에서 헤아리다 보니 4시간이 전혀 길게 느끼지 않았다. 하얼빈은 헤이룽장성 성도(省都)로 인구가 900만 명이 넘는 대도시다. 하얼빈은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장하며 상당한 투자를 하여 도시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러시아가 청나라 땅을 가로질러 철도를 세울 수 있던 것은 청의 국력이 매우 약화하여 서구열강의 간섭과 침탈을 막을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후 하얼빈을 빼앗겼다. 하얼빈은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자 중국으로 귀속되었다. 그래서 하얼빈 곳곳에는 러시아풍의 건축물이 눈에 띈다. 하얼빈의 중심가에는 지금도 러시아 시대에 돌로 포장된 도로와 건물들이 즐비하고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었던 소피아 성당이 보존되어 있다.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된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이었으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문을 닫았고 지금은 관광명소로 개방되고 있었다. 외양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옛날 성당 내부의 이콘과 제대 등 성물은 모두 훼손되어 사라졌고, 제대가 있던 자리에서 젊은 음악가 몇이 버스킹 형태의 공연을 하고 있었다. 엄숙하고 장엄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자취는 사라지고 무신론자와 여행객이 심심풀이로 들러보는 관광지로 퇴색한 모습에서 서글픔과 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북만주 하얼빈에서 만난 신앙의 가족 그런데 하얼빈에 천주교 성당이 또 한 군데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여행 일정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단 들려보기로 했다. 천주교 성당인데도 건축양식은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은 비잔틴 양식이었다. 그러나 성당 정문 위에 분명히 ‘천주당’이라고 굵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성당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문은 닫혀 있었고 관리실이나 사무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아쉽지만 그냥 겉모습만 본 것으로 만족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성당 마당 한쪽에서 망중한을 즐기던 한 할아버지가 우리 일행에게 다가오더니 우리에게 열심히 말을 걸었다. 우리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 눈치였다. 한국에서 왔다 하니, 할아버지는 앞으로 20분 정도 후면 문이 열린다고 했다. 가이드는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것인지 다음 일정으로 옮겨갈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모처럼 하얼빈에서 천주교회를 발견했으니 다음 일정을 위한 시간을 조금 줄이더라도 현지 성당을 방문하고 가자고 했다. 성당 마당에서 카드놀이를 하는 노인들 주변을 20분 정도 오락가락하며 기다렸더니, 굳게 닫혔던 성당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에서 열렸다. 관리인 같은 제복을 입은 여성 둘이 우리가 성당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꽤나 높은 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니 중앙에 제대와 감실이 있고, 예수님과 성모님 성상들이 자리 잡아 가톨릭교회의 성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었던 소피아 성당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현재도 성당으로 활용되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제대 앞에 자리 잡고 앉아 하얼빈의 교회공동체가 신앙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지향으로 함께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친 다음 일어서자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인사하러 다가왔다. 한국에서 주교와 신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다. 휴대폰 통역기를 동원하여 언제 세례를 받았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자기 집안이 4대째 신자 가정이라고 했다. 조상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그녀는 한국의 주교와 신자들이 여럿 방문해 준 것이 너무 반갑고 감격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통역이 없어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나, 북만주 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중국 신자와의 만남은 우리 모두에게 국적과 민족을 초월한 같은 신앙의 가족을 만났다는 기쁨과 감동을 맛보게 하였다. 우리가 하얼빈을 찾은 이유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장소와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평소 매년 3·1절이 되면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천주교 신자나 성직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고 송구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중에 일본 제국에 정면으로 저항하다 순국한 가장 대표적인 인사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면 큰 위로와 자긍심을 되찾곤 하였다. 이번 여행을 앞두고 나는 다시 한번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돌이켜 보며, 불의한 침략을 감행하여 국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과 싸우기 위해 만주 벌판을 내달리고 자신의 생명을 불사른 그분의 결연한 의거와 희생에 경이로운 숭경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사실 마음 한구석에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과 경외의 정을 간직하면서도 다른 한구석에는 사람을 살해한 죄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정리되지 않는 한가락 혼란스러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는 안 의사가 재판 과정에서 변호사를 통해 밝힌 이토 저격의 15가지 이유를 돌아보며, 그분의 행동이 한 개인에 대한 원한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의병장으로 감행한 정당방위의 전투행위였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얼빈 역사(驛舍) 한쪽에 마련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安重根义士纪念馆)에는 입구에 안 의사 등신대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전시실에는 그분 생애와 활동, 그리고 뤼순(旅顺, 여순) 감옥 수감 중 남기신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안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장소의 표시였다. 현재도 사용 중인 하얼빈 기차역 플랫폼 바닥에 안 의사가 섰던 자리에는 세모가 그려져 있고, 이토가 서 있던 자리에는 네모가 그려져 있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건립한 중국 정부가, 불의한 외세의 침탈에 저항하고 자신의 생명을 바친 안 의사에 대해 그들 나름의 존경심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2월 14일 뤼순의 일제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는 당시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어 사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뮈텔 주교는 일본 제국과 조선 천주교회의 관계 악화를 염려하여 사제 파견을 거절했다. 그러나 안 의사의 동생들을 통해 뤼순 감옥 방문을 직접 요청받은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뤼순을 방문하고 안 의사를 만났다. 빌렘 신부는 3월 7일 뤼순에 도착하여 3월 8일부터 11일까지 4차례의 면회를 하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베풀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뮈텔 주교에게서 성무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나중에는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나, 훗날에도 자신이 취한 행동은 정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빌렘 신부는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 장상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공유했다. 교황청 포교성성에도 문의한 결과 포교성성장관은 뮈텔대주교가 빌렘 신부의 뤼순행 허락을 거절한 것이나 성무집행 정지를 내린 처사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1913년 7월에 회신하였다. 교황청의 이런 회신에도 불구하고 뮈텔 주교와 조선의 파리외방선교회 성직자들은 빌렘 신부가 취한 행동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빌렘 신부는 1914년 2월 뮈텔 주교에게 1년간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그에게 서울교구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빌렘 신부는 1914년 4월 22일 유럽을 향해 출발, 5월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인 로렌에 도착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휴가를 보낼 마음이었으나 두 달 후에 발발한 1차대전으로 인하여 결국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안 의사의 거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가 취한 행동과 선택의 정당성을 성찰하고 우리 자신의 판단 기준과 입장을 정립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못가에 봄풀 돋아나듯’ 죽어서도 염원했던 안 의사의 염원과 희망을 바라보며 우리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돌아본 후 마지막으로 안 의사가 동지들과 모여 거사를 결정했던 자오린(兆麟, 조린) 공원을 방문하였다. 자오린 공원은 도심이지만 시민들이 자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여러 식물과 잔디밭이 여유롭게 펼쳐져 있었다. 공원 한쪽 구석에는 허리만큼 오는 둥그런 바위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그 가운데에 한자로 ‘청초당’(青草塘)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이는 ‘못가에 파란 풀이 돋아난다’는 뜻으로, 못가에 봄풀이 돋아나듯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세상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안 의사의 염원과 희망을 담은 글씨다. 그 좌측 하단에는 안 의사의 단지(斷指) 손도장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도 기울어져 가는 석양빛을 맞으며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안 의사는 조국의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자신의 유해를 잠정적으로 이 공원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나는 조선천주교회 안에 이런 의인이 우뚝 서 계심을 세계 교회에 자랑하고 싶은 커다란 자부심과 영예를 발견하게 되었다. <끝>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

2024-08-18

북·중 국경선 따라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하다

강우일 주교(베드로·전 제주교구장)가 지난 6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주관하는 중국 평화 순례를 다녀왔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이들의 평화를 향한 열정을 배운 강 주교의 순례기 전문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 흔적 따르며 평화 향한 열정 새길 여정 지난 6월 마지막 주간에 나는 오랜만에 5박6일 일정으로 중국을 여행하고 왔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Pax Christi Korea)라는 가톨릭 평화운동 평신도 단체가 주관하는 평화 순례의 여정에 함께 하였다. 가깝긴 하지만 중국으로 단체여행을 떠나는 것이 내게는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좀 부담으로 느껴졌다.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평화운동을 하는 평신도 회원들을 격려하고 지원하기 위해 팍스 크리스티의 공동대표 직함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단체여행에 동행하는 일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만주에 사셨던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걸으며 그들의 망국의 한과 평화를 향한 열정을 새기고 이어받기 위한 여행이라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일정에 백두산 등정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사실 백두산은 통일된 다음 우리 땅을 밟으며 오르고 싶었기에 특별히 가야겠다는 매력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 일반 관광여행사가 아니라 공정여행을 기획하고 도보여행에 관련된 책을 여러 권 발간해 온 국제민주연대의 최정규 작가가 안내자로 나선다니 잘못하면 아주 고달픈 여행이 될 것 같아,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 입원이라도 했으면 불참할 핑계가 생기겠는데 출발일이 다가왔으나 건강상으로도 별문제가 안 생겨 꼼짝 없이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인천에서 옌지(延吉, 연길) 공항까지는 직선거리로 가면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 비행기는 북한 영공을 피해 중국 내륙 쪽으로 돌아서 가는 바람에 두 시간이나 걸렸다. 옌지가 만주의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도시라 그런지 국제선 여행객은 우리 말고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옌지 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섰더니 제복의 중국 공무원이 사뭇 위압적인 톤으로 우리를 향해 단체는 이쪽이라며 옆쪽으로 비켜서라고 했다. 최정규 작가는 우리에게 단체 비자를 신청한 사람들은 비자가 나온 명단의 순서대로 줄을 서서 창구에 진입해야 한다며 별도의 창구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 땅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권 검사 과정에서는 전원 특별한 문제 없이 모두 무사히 입국 수속을 마쳤다. 공항 청사를 빠져나가 밖에서 청사 건물을 보니 제일 위에 한자와 한글로 연길이라는 아주 큰 표지가 걸려있고 그 아래로 작은 글씨의 영어, 일어, 러시아어, 만주어 표기가 붙어 있었다.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는 모든 간판에 한자와 한글을 병행 표기하도록 정해져 있다고 했다. 중국 땅에서 한글 표지판을 보니 안심이 되고 푸근하게 느껴졌다. 버스를 타고 숙소 호텔로 향하는데 옌지시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광활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독 주택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아파트 단지가 계속 이어지는데 해가 지면서 아파트 건물 벽면 둘레와 지붕까지 화려한 원색 조명으로 치장하여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시내 한복판에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강 이름이 ‘부르하통하’라고 한다. 한강보다 약간 폭이 좁은 정도다. 강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아 푸른 버드나무라는 여진족 말이 강 이름으로 남았다고 한다. 저녁 요기를 한 다음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옌벤대학 쪽으로 산책 삼아 발길을 옮기니 명동 뺨치게 젊은 세대의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여성들이 화려한 한복을 입고 대학 교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두 사람이 아니라 상당수의 젊은 중국 여성들이 캠퍼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근처 상가에는 한복을 대여해 주는 가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코로나로 한국 여행이 완전히 중단된 후 한국에 가지 않고도 옌지에서 한국적 분위기를 충분히 맛볼 수 있기에 수많은 관광객이 중국 각지에서 옌벤지역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한류 덕분인지 각종 식당가와 상가가 마치 서울의 어느 동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풍 먹거리와 술집이 넘쳐났다. 예전에는 옌벤대학 캠퍼스 안으로 산책을 할 수 있었다는데 한국 정부가 사드를 배치한 다음부터는 보안 강화를 이유로 캠퍼스 안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고 했다. 우리도 한때 사드 배치 문제로 많은 이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시위도 끊이지 않았으나 중국에서는 사드 배치로 인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호감이 급격히 퇴색하고 한국 기업이나 한국 관광객들을 향해 아주 엄하고 까다로운 규제를 펴게 되었다고 한다. 사드 이전에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특히 2015년 9월 3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2차대전 전승절과 열병식에 참여하였을 때 중국 정부는 한국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이 전승절에는 주로 구 소연방에 속하던 국가들이 참석하는데 친 서방 친미 정부인 한국의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중국 정부에는 아주 뜻밖의 우호적인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6년부터 미군이 한국 내 사드 배치를 거론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수용할 뜻을 밝히자, 중국 정부는 격하게 반대하고 중국 진출 한국 기업과 단체들에 대한 모든 호의적 정책을 폐기하며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하였다. 하지만 중국 젊은이들의 정서는 이러한 정치적 정세에는 크게 좌우되지 않았는지 한류에 대한 인기는 쉽사리 식어버린 것 같지는 않았다. 첫날 저녁 우리가 묵은 호텔은 꽤 높은 빌딩인데 호텔 방도 널찍하여 땅덩어리가 큰 대륙인의 여유를 느끼게 해주었다. “남북 겨레에 관용과 평화의 기운 불어넣어 주시기를” 철조망 가로막은 북·중 국경선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하다 둘째 날 아침 일찍 우리는 두만강 기슭에 있는 투먼(图们, 도문)이라는 국경도시로 갔다. 투먼은 한반도의 제일 동북쪽 꼭대기, 토끼 머리끝에 자리하는 도시다. 두만강이란 명칭은 토문강이라고 부르는 만주족의 발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투먼에서 본 두만강은 강폭이 50미터 정도도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상류로 올라가면 강폭이 훨씬 좁고 수량도 적어 걸어서 건널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겨울이 되면 강이 완전히 얼어붙기에 건너기가 쉽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두만강 강줄기에는 국경을 감시하는 감시선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중국 쪽 두만강 기슭에는 상당한 높이의 철조망이 세워져 있어 탈북자의 월경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투먼과 맞닿아 있는 북한 땅은 ‘남양’이라는 도시인데 그곳으로 통하는 철교와 다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중국과 북한을 잇는 국경 관문이 세 군데 있는데 코로나 이후 국경이 닫힌 후 도문과 남양의 국경선은 아직 열리지 않고 있는 모양이다. 중국 관광객들이 북한 땅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북한 땅을 향해 사진을 찍자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완장 찬 요원들이 쫓아와서 촬영금지를 외쳐대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을 향해서만 의도적으로 더 엄하게 규제하는 듯했다. 중국 땅에서 북한을 바라보아야 하는 내 마음이 참으로 착잡했다. 나는 잠시 철조망이 가로막은 국경선을 따라 걸으며 성모님께 기도했다. 중국과는 외교관계도 맺고 자유롭게 교류도 하는데, 같은 동포이면서 갈라선 지 80년이 다 되어도 여전히 반목하고 비난하고 적대하는 남북의 겨레에게 성모님께서 관용과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우리는 투먼에서 두만강 기슭을 따라 서남쪽으로 여행을 이어갔다. 중국 쪽에는 텃밭에 옥수수나 각종 채소류를 재배하는 소농이 계속 이어지고 산에는 큰 나무와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데, 북한 쪽은 아주 소수의 농가가 드문드문 산재해 있었고 왕래하는 주민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야산에도 큰 나무로 조성된 숲은 보이지 않고 대체로 무슨 농사를 짓는지 확인은 안 되지만 키 작은 식물을 일구는 들판만 끝없이 이어졌다. 간혹 산 위에 몇 그루 솟아있는 키 큰 나무들이 마치 대머리 꼭대기에 몇 가닥 돋아난 머리칼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남쪽으로 이동할수록 두만강 넘어 보이는 북한 땅은 경사가 급해지며 꽤 험한 산맥을 이루고 있어 두만강과 함께 자연스러운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산줄기를 타고 넘어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룽징(龙井, 용정)에서 마주한 윤동주의 시 ‘십자가’ 다음 목적지는 룽징이었다. 룽징은 1899년 함경도 종성에 살던 전주김씨 가문과 남씨 가문 등 총 다섯 가문 142명이 두만강을 건너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한다.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도 조선인들의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로 우리말이 잘 통한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자 버스는 우리를 룽징 냉면 잘 한다는 집으로 데려갔다. 이곳 사람들은 타지에 가면 제일 생각나고 먹고 싶은 음식이 룽징식 냉면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먹어본 냉면치고는 맛이 좀 강했다. 우리가 아는 남한식 냉면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심심한 평양식 냉면도 아니었다. 우선 면의 양이 한국 냉면의 곱빼기는 되겠다 싶을 정도로 많았다. 육수를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약간 진한 색이 돌고 면도 검은 색인데 고춧가루도 뿌려져 있었으나 그리 맵지는 않았다. 한국 냉면에는 오이나 무 또는 배가 들어가나, 룽징 냉면에는 오이와 함께 배추와 다른 채소류가 풍성히 들어 있는데 나중에는 육수 밑에 가라앉아 있던 꿩고기 덩어리가 젓가락에 잡혀 올라왔다. 나도 여름이 되면 냉면을 즐겨 먹는데 그런대로 맛있게 먹었다. 시내에서 우리는 윤동주 시인이 어릴 적에 다녔다는 대성중학교(현재 룽징중학교)를 찾아갔다. 학교 정문 돌기둥에는 ‘룡정중학교’라는 교명이 새겨져 있었다. 현지 안내인이 정문 옆 수위에게 우리가 학교 내부를 방문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그때까지 열려있던 철문이 스르르 닫혔다. 최정규 작가에 의하면 사드 이전에는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가서 윤동주 시인 관련 자료를 관람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인 출입이 금지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묵묵히 발길을 돌려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는 밍둥춘(明东村, 명동촌)을 찾았다. 이곳에는 민족교육과 항일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밍둥학교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 학교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3일 룽징에서 열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한다. 동네 초입에 있는 교회 건물은 지금 전시관처럼 꾸며져 있고 간도 지역의 민족독립운동과 반일민족문화교육의 선구자인 김약연 선생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나 우리에게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관람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곳 교회는 1800년대에 캐나다 출신 장로교 선교사들이 설립하고 운영하였는데 조선인 청년들을 적극 지원하고 양성하였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 문익환 목사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다. 밍둥춘 일각에는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보존되고 기념관으로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지자체에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명소로 꾸며놓은 것 같았다. 생가 마당에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여러 편 돌판에 새겨져 있고, 건물 한 곳에는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저작 활동과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의 수감 시절 자료를 전시해 놓았다. 마당에 새겨진 여러 시 중에 ‘십자가’라는 제목이 내 시선을 끌었다. <2회에 계속>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

2024-08-11

백두산 천지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다

강우일 주교(베드로·전 제주교구장)가 지난 6월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가 주관하는 중국 평화 순례를 다녀왔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찾아 이들의 평화를 향한 열정을 배운 강 주교의 순례기 전문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 [ 강우일 주교 특별기고 만주 벌판을 거닐다(1) ] 바로가기 윤동주 시인의 생가 마당에 새겨진 여러 시 중에 ‘십자가’라는 제목이 내 시선을 끌었다. < 十字架 >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교회당) 꼭대기 十字架(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鍾(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幸福(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십자가)가 許諾(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一九四一、 五、 三一、) 이 시에서 나는 25세의 청년 시인 윤동주가 당시 조선 민족이 겪었던 암울하고 절망적인 현실과 그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는 길인가를 처절히 고민하고 자문하며 자신의 신앙을 민족애 안에 육화시킨 살아있는 신앙인이었음을 절감하였다. 1943년 7월 시인은 사상범으로 체포되고 일본 체류 기간 중 썼던 상당한 분량의 시작품과 일기를 압수당했다. 1944년 2월 시인은 법원에 기소되고, 3월31일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2년 형을 선고받은 다음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갑자기 ‘동주 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는 전보가 고향으로 배달되었다. 후쿠오카에 달려간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은 같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송몽규를 면회하였다. 몰라보게 바싹 마른 송몽규는 자신도 윤동주도 다른 조선 청년들도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다고 했다. 윤동주 사망 후 23일이 지난 3월 10일에 송몽규도 옥사하였다. 오만한 제국의 부당한 억압과 집요한 폭력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추구한 두 청년의 유해는 한줌의 재가 되어 고향 땅 용정 동산 마루에 묻혔다. 겨레 향한 애틋한 열정으로 스물여덟 청춘 불사른 젊은이의 무덤 앞에서 시인의 묘소는 명동촌에서도 택시로 10분 정도는 달려야 하는 외곽지대 공동묘지에 있었다. 가는 길이 좁고 험하여 버스 진입이 안 되는 비포장도로라 우리는 택시 세 대로 나누어 타고 가야 했다. 윤동주 시인의 이름과 묘지 장소를 정확히 아는 기사는 셋 중 한 사람뿐이어서 세 대의 택시가 함께 움직였다. 당시 인근 지역에 살던 조선인 개신교 신자들이 묻힌 교회 공동묘지였다. 나지막한 봉분이 솟아올라 있는 시인의 무덤에는 나지막한 나무 울타리가 둘러쳐 있고 시인의 함자가 적힌 비석이 서 있었다. 겨레와 조국을 향한 애틋한 열정으로 스물여덟의 청춘을 불사른 젊은이의 무덤답게 수많은 다른 무덤들 틈에 티 내지 않고 숨어있었다. 사촌 송몽규의 무덤도 바로 옆쪽에 있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두 분의 젊은 선각자 앞에 깊이 허리를 굽히고 존경과 흠모의 예를 표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안식을 기도하였다. 나는 윤동주 시인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사촌 송몽규 선생은 이번 여행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동갑으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고 동고동락한 동기간 같았다. 동주는 내성적이었고 몽규는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시인으로 등단한 것도 몽규가 먼저였다. 일본 유학도 1942년 둘이 함께 가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에 응시했으나 몽규는 합격하고 동주는 낙방하여 도쿄의 릿교 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바로 같은 해 가을 학기에 동주는 몽규가 있는 교토로 가서 개신교회에서 운영하는 도시샤 대학으로 편입한다. 그러나 이듬해 7월 10일에 몽규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으로 먼저 체포되고 동주도 나흘 후에 체포되고 같이 고난의 길을 갔다. 룽징 순례를 마치고 우리는 백두산을 가기 위해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 이도백하)라는 마을로 이동하였다. 백두산 등반객 때문에 새롭게 조성된 리조트 마을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시골 동네에 백두산을 찾는 등반객들이 늘어나면서 급격히 형성된 상업지구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을 찾는 이들은 한국인이 대부분이었고 이 지역의 개발과 관리는 옌벤조선족자치주의 소관 업무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경제가 성장하고 관광지 수요가 증가하면서 관광지로서의 백두산의 가치와 전망이 급속도로 부각되었고 지린성 지자체가 백두산 관광 개발 사업을 옌벤조선족자치주에서 지린성 소관으로 이관시켰다고 한다. 그런 이후 지린성 지자체가 백두산 지역에 관광 인프라 조성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를 집중하였고 현대식 숙소와 교통편을 확보하고 중국 전국에 대대적인 홍보 작전을 펼친 결과 지금은 중국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관광리조트로 발돋움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묵은 호텔도 규모로 봐서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내부 시설은 국제 수준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었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가 한 번은 가보기를 꿈꾸는 민족의 명산이다. 우리가 왜 모두 이렇게 백두산을 꿈에 그릴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불러온 애국가 첫마디에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구절이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두만강으로 흘러 금방 동해로 유입된다. 서해까지는 한참 흘러야 하지만 백두산에서 동해는 훨씬 가깝다. 나는 이번에 백두산에 올라 푸른 천지를 보고서야 애국가의 첫 마디가 더 깊이 가슴에 와닿았다. 전날 이도백하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 현지 안내인은 우리에게 중국 일기예보에 의하면 다음 날 비 올 확률이 70%라고 했다. 또 백두산이 워낙 높은 산이라 수시로 기상 변화가 심하고 어떤 변수가 있을지 당일이 되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5분 차이로 어떤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천지를 살짝이라도 보는 사람이 있지만, 직전에 온 그룹은 못 보고 하산하기도 한다고 했다. 날씨만큼은 인간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 좋은 날씨를 주시도록 하늘에 열심히 기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평균적으로 백두산을 찾는 이들 가운데 청명한 백두산 천지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고 했다. 날씨가 안 좋으면 가이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미리 참가자들에게 재확인시켜 주고 백두산이 자태를 드러내지 않아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는 예방주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누가 기도를 열심히 했는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백두산 여행은 지린성 지방정부의 큰 수입원인 듯, 일반 관광버스나 자가용은 백두산 초입에서 모두 하차하게 하고 지자체가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셔틀버스도 도중에서 두 번이나 갈아타게 되어 있었다. 경사가 급한 마지막 구간에는 셔틀버스에서 소형 밴으로 다시 갈아타야 했다. 갈아타는 환승장에는 매번 수백 명이 줄을 서서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외국 공항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거나 보안 검색을 받을 때도 비슷한 기다림을 경험하곤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남녀노소 상관없이 여러 차례 수백 미터씩 줄을 세우는 일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존중심이나 예의를 도외시한 전체주의 사회의 권위주의적 횡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노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민이 자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권력자의 오만한 위세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전체주의 사회에서 이미 오래 살아온 중국인 관광객들은 이런 기다림에 익숙한 듯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편치 않았던 나의 심기는 백두산 정상을 밟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씻어졌다. 백두산은 정말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하고 싶은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해 주었다. 백두산을 오르는 중산간 지역은 자작나무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나 정상 가까이 이르자 나무는 전부 사라지고 아주 낮게 깔린 풀밭에 에델바이스 같은 작은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백두산 천지를 한 눈에 담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를 봉헌하다 정상에 당도하자 고도 때문인지 화산토라서 그런지 나무는 물론 풀 한 포기 없고 검붉은 토양이 넓게 펼쳐진 광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수많은 인파가 긴 줄을 서서 조금이라도 더 그 장관을 가슴에 새기려는 듯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산 아래에 비해 급격히 떨어진 기온 때문에 배낭에 넣고 간 패딩을 얼른 꺼내입고 우리도 긴 인파의 대열에 떠밀려 천천히 올라갔다. 비탈길을 백여 미터 더 오르니 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뚫린 하늘의 푸르름이 그대로 투사되고 있는 천지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를 비추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숭배하고 단군신화의 탄생지로 삼았던 연유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천지는 둘레가 14.4킬로미터나 되는 호수로 내 예상보다 훨씬 더 장대하고 압도적인 자태를 조용히 내보이고 있었다. 우리 겨레 영혼의 고향인 백두산을 중국 땅에서 오르는 것이 께름칙하긴 했으나 그곳에서 마음을 모아 주님께 겨레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를 바쳤다. 정상에서 우리 중 누군가가 한반도 형상의 지도가 그려진 옆에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펼치고 사진을 찍으려 하자, 어느 틈엔가 이를 보고 완장을 찬 요원이 득달같이 달려오더니 플래카드를 압수해 갔다. 그나마 연행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 3회에 계속 >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공동대표, 전 제주교구장)

2024-08-11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히로시마 상념(하)

얼굴과 상체에 켈로이드가 생긴 여성들은 자신의 흉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랜 세월 집에서 숨어지냈다. 어떤 청년은 머리와 손에 켈로이드가 있어서 결혼도 못 하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어떤 여성은 젖먹이 때 피폭을 당했고 18년 뒤에 임신했는데 출산 직후 골수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결혼했으나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헤어지는 피폭자 부부도 적지 않았다. 어떤 아가씨는 우연히 병원에서 골수성 백혈병이라 적힌 자신의 진료부를 보고 목을 매어 자살했다. 피폭자들이 받은 끔찍한 고통 후손들에게까지 계속 이어져 인류 역사·문화와 모든 유산에 비극적 종말 초래할 거대한 마물(魔物) 히로시마시 외곽의 자선 시설에 있던 어떤 노인은 피폭자 수첩을 남겨두고 세토 내해의 페리 여객선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에게는 어떤 객관적 원폭증 징후도 발견할 수 없었으나 노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피폭 때 생긴 독, 심각한 원폭증 노이로제에 빠져있었다. 87세의 또 다른 노인은 아들이 피폭하여 죽고, 손자를 힘들게 키우며 도쿄에 있는 대학까지 보냈으나 손자는 원폭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히로시마로 돌아왔다. 손자는 항상 피로를 느껴 누운 채로 지냈고 시력이 약해지더니 신장도 망가지고 백혈구 수도 줄어들고 있었다. 얼마 뒤 손자는 안저출혈로 실명하고 한 달 뒤에는 피를 토하고 고통으로 발버둥 치며 울부짖다가 갑자기 조용해져서는 “외로워, 외로워!”라고 말하더니, “아아, 아아, 아아” 세 번 흐느껴 울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노인은 정신 줄을 놓고 멍하니 앉아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손자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스모 최우수 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오키나와의 한 건장한 청년은 나가사키 군수공장에서 피폭한 뒤 고향으로 되돌아갔다가 1956년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었다. 스스로 방사능 장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서 섬에 있는 의사와 상담했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의사는 당연히 원폭증에 대해 무지했고 그는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오키나와 스모의 요코즈나를 지낸 그는 결국 앉은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몸이 엄청나게 부어올랐다. 1962년 그는 끝내 피를 반 양동이나 토하고 허무하게 죽었다. 그런데도 오키나와에는 그가 원폭증으로 횡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의사가 여전히 없었다. 오키나와 원수폭금지협의회가 만든 리스트에 오른 피폭자 135명 대부분은 많든 적든 신체 이상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의사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불안감을 피로나 노이로제라고 진단할 뿐이었다. 히로시마 지역신문의 ‘히로시마의 증언’에는 원폭으로 자녀 다섯을 모두 잃고, 자신도 목에서 가슴까지 그리고 양팔에 심한 켈로이드가 있는 한국인 노부인에 관한 기사가 났다. 다 찌그러진 함석집에 ‘일본성결교단 히로시마 한국인기독회’라는 문패를 내걸고 살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그 노부인을 ‘미치광이 조선인 할망구’라 부르고, 본인 스스로도 절망하여 예전에는 “원폭을 투하한 미국을 저주하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증오했다”고 한다. “그때 하느님의 은총을 입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자살하든지 미치든지 했겠죠.” 그녀는 신앙을 갖고 작고 가난한 교회를 세워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 대다수가 나의 아버지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일하러 갔거나 징용으로 동원된 사람들이다. 피폭자 중 생존한 이들은 일본 패전 후 고향으로 귀국하고 오늘날까지 몸과 마음이 골병든 채 원폭증을 앓으며 서서히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는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이들이 피폭자들의 불행과 울부짖음을 전해왔으나 한국의 피폭자들은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아무런 관심도 돌봄도 제공하지 않는 가운데 외로운 고통과 죽음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피폭의 고통과 비극은 2세대, 3세대 후손들에게 계승되고 본인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원폭증이 지금도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핵무기는 결코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되는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었다. 이토록 수많은 생명을 단숨에 학살하고, 숨이 붙어있는 부상자는 몇십 년을 두고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속하여 고문하고 괴롭히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악의 화신은 일찍이 없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모든 힘 모아 연대하고 행동해야 이러한 최악의 독극물을 생산하고 사용하는 과정과 결정에 관여한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왔는지, 어떤 책임을 져야 할지,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자신들이 탄생시킨 역사상 최악의 작품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와 모든 유산에 비극적 종말을 초래할 거대한 마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마물은 어떤 핑계를 대어도 정당화될 수 없는 악의 자식이고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 한때 냉전의 주체들이 핵무기 감축에 동의하고 함께 핵탄두 해체를 진행하기도 했으나 오늘도 여전히 1만7000여 개나 되는 마물이 지구 구석구석에 숨어 추악한 자태를 감추고 있다. 이 좁은 한반도 북반부에도 이미 상당수의 핵무기가 똬리를 틀고 있고, 남쪽에도 핵무기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불러들이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광포한 괴물인지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악마의 자식들을 세상에서 쫓아내기 위해 우리의 모든 능력과 지혜와 힘을 다 모아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를 집필해 주신 강우일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2024-06-02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히로시마 상념(상)

한국과 일본 주교단은 1996년 이후 공통의 역사 인식과 협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거의 해마다 각 교구를 방문하며 상대국 문화와 교회 사목 현황에 대한 이해를 심화해 왔다. 한국 주교단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옛날부터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도 있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를 여러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기념관도 몇 차례 관람했다. 두 도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원자탄에 모든 생명체와 건축물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비극의 현장이다. 1945년 8월 6일 10만여 명의 히로시마 시민들이, 8월 9일에는 7만여 명의 나가사키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피폭 생존자들의 증언도 듣고 원폭 투하의 결과가 얼마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참극을 불러온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히로시마 시민들은 참극을 직접 온몸으로 겪은 당사자나 그 후손들로서, 핵폭탄의 공포와 고통을 절감한 사람들이었다. 1945년 日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경험한 세계 유일의 도시 모든 생명과 건축물 잿더미 되고 각각 10만과 7만 시민 목숨 잃어 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폭을 경험한 세대로 인류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전할 소명이 있음을 확신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평화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평화의 소중함을 절감하고 세계에 평화를 호소하는 심정은 수긍하면서도 ‘왜 자신들이 입은 피해만 생각하고 아시아 대륙의 수많은 시민에게 일본이 입힌 가해 책임에 대한 성찰과 사죄는 못 하는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전쟁 중 히로시마에는 아시아 대륙을 향한 전쟁의 전초기지와 군부대가 있었고, 나가사키에는 무기와 군함을 건조하는 항만 시설들이 있었다. 미군에게는 당연히 이 두 도시가 다른 어느 지역보다 폭격의 최우선 대상이었다. 나는 히로시마 시민들 안에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먼저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시작한 근원적 책임 의식과 회심이 느껴지지 않아 마음에 안타까움과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최근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씨가 쓴 「히로시마 노트」라는 저서를 읽으며 히로시마 시민들의 원폭 피폭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됐다. 어찌 보면 그 전의 나의 히로시마 인식은 주로 원폭이 폭발한 당일과 며칠간에 국한되어 있었다. 요즘 우크라이나에서, 또는 가자 지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있는가를 각종 보도에서 보고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히로시마 노트」를 읽고 난 다음 나는 그동안 핵폭발이 가져온 참상의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접하고 있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오에씨의 「히로시마 노트」는 1965년 4월에 쓰였다. 원폭이 폭발한 지 20년이 지난 다음이다. 오에씨 본인은 히로시마에서 거리가 먼 에히메현에서 태어난 타지역 사람으로, 히로시마 시민들의 피폭에 대해서는 평소 그다지 실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히로시마 시민들을 만나고 히로시마를 몇 차례 방문하면서 피폭 히로시마 시민들, 바로 죽지 않고 생존한 피폭자들이 20년이란 긴 세월을 두고 겪어간 고통과 죽음, 절망과 침묵을 들여다보며 엄청난 충격과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강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이 책을 남긴 것 같다. 오에씨는 1994년 노벨문학상을 탄 문인이고 많은 소설을 남겼지만, 그가 쓴 이 「히로시마 노트」는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히로시마를 여러 차례 찾고 피폭자들을 만난 후 기록한 현장 보고서에 가깝다. 세상은 큰 사고나 재앙 발생하면 규모와 사상자 수에 관심 많지만 평생 그날의 공포 안고 살아가는 사고 당사자와 후손 삶 생각해야 보통 큰 사고나 재앙이 터지면 언론은 사고 규모와 사상자 수를 먼저 알린다. 희생자 수가 많을수록 세상은 큰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 기억에는 수치들만 남는다. 그러나 피해를 겪은 당사자들에게는 피해에서 오는 신체적 고통과 트라우마로 시간이 멈추고 인생이 격변하고 세상이 뒤집히는 현재가 지속된다. 제주 4·3사건 관련 유가족, 세월호 유가족, 10·29 이태원 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시간이 멈추듯이 히로시마 피폭자들에게도 원폭 폭발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런 현재가 이어지고 있다. 보통 우리가 히로시마 핵폭발을 거론할 때, 폭발 직후 사망자가 10만여 명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부상자도 10만이 넘었다는 사실은 잘 의식하지 못한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 시내에는 298명의 의사가 있었으나 건강한 상태로 구조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의사는 28명, 치과 의사 20명, 약사 28명, 간호사 130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의료진 자신들도 환자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불안과 무력감에 휩싸여 피폭 구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히로시마 의사회 원로 마쓰자카 요시마사(松坂義正)씨는 수기에서 이렇게 썼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부상당한 시민을 구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을 채찍질해 가며 아들 등에 업혀서 다시 히가시 경찰서 앞으로 되돌아갔다. … 구조라고는 해도 보관하고 있던 자재가 모두 불타고 경찰서에는 기름과 머큐로크롬밖에 없어 모여드는 부상자들에게 화상에는 기름, 상처에는 머큐로크롬을 발라 줄 수밖에 없었다.” 히로시마의 의료인들은 한 번도 배운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원폭증에 속수무책이었다. 많은 부상자가 피폭으로 화상을 입고 피부가 켈로이드 상태로 녹아내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환자들은 전신 피로, 식욕부진, 탈모, 심한 가려움증, 검붉은 피부발진, 궤양 증세를 경험하다 결국은 서서히 죽어갔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5-26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카인의 후예(하)

고대사회에서 농경문화를 이룬 종족은 부와 풍요를 구가했던 데 비해 유목민들은 평생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축들 꽁무니만 따라다니다가 소박한 유랑 생활로 만족하는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니 카인은 아벨보다 훨씬 더 유복하고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더 값진 자기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벨이 바친 보잘것없는 어린 양을 굽어보시자 카인은 몹시 화를 냈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하신 하느님께 있다. 아벨은 아무 잘못도 없다. 아벨은 카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힌 적도 없고, 열악한 환경에서 가축이나 따라다니면서 박복하고 가난한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아우를 카인은 애틋이 여겨 감싸고 돌보기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빼앗기까지 하였으니 카인 안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내가 먼저 폭력 행사하지 않아도 누군가 폭력적 선택하게 되면 세상에 포악한 불씨 점점 번져가 그래서 하느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6-7) 몹시 화를 내고 얼굴을 떨어뜨린 카인의 자세 안에는 하느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에 공감도 동의도 할 수 없는 부정적 태도의 표출이다. 세상에서는 더 부유하고 더 힘이 있는 자가 더 높은 자리와 앞자리에 앉고, 약하고 가난한 자는 아랫자리에 앉고 적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관행이다. 카인은 하느님이 그런 세상의 상식에 따르지 않으시고 약자를 높고 좋은 자리에 앉히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화를 냈다.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것은 하느님을 마주 보기도 싫어서 얼굴을 돌렸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거부요 저항의 자세다. 하느님은 카인의 이런 태도를 보시고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그를 노리게 될 것이라 하신다. 카인 안에 하느님과는 공존하거나 어우러질 수 없는 죄악의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양새다. 이 용암이 폭발하여 친아우인 아벨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살인에까지 이르는 포악은 카인 안에서 나왔다. 그리고 카인이 취한 하느님에 대한 거부의 자세는 이미 아담과 하와 안에 사탄이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가 아닌가 싶다. 우리 모두 안에 스스로 제어가 안 되는 포악의 뜨거운 에너지가 끓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먼저 불의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저지른 불의와 폭력의 화염은 우리 안에 옮겨붙으면서 새로운 포악의 에너지를 증산한다. 전쟁에 나간 병사가 처음에는 적이라 해도 눈앞의 살아있는 인간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적이 쏜 총알로 내 옆의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분노의 에너지가 활활 타올라 응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 번만 방아쇠를 당기면 그다음부터는 거리낌 없이 적에게 보복의 총알을 무제한 난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공통된 체험이다. 상대 포악의 에너지가 자신에게 전염되고 확대되어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팔레스티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의 사슬이다. 인류는 과연 이 포악의 에너지와 폭력의 사슬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온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우리 자신 안에 그럴만한 역량이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주신 것 같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헤로데 왕은 무자비한 비인간적 폭력으로 두 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몰살시키는 참극을 저질렀다. 폭력의 악순환 끊어버리려면 박해에도 힘으로 맞서지 않고 지혜 보여주신 예수님 따라야 그때 하느님이 보여주신 대처법은 도망치는 일이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이집트로 몸을 숨겼다. 헤로데 왕의 폭력에 대한 대응은 하느님 몫이었다. 죄악의 우두머리와 싸우는 일은 하느님이 감당하셨다. 하느님은 시간으로 헤로데 왕을 심판하시고, 아기와 부모가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안배하셨다. 루카 복음 22장 36절에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음모가 절정에 달하자,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고 하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정당방위를 인정하시는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무리에게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 오른쪽 귀를 잘라버리자, 예수님은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다. 마태오복음 26장에는 같은 장면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박해자들의 음모와 폭력에 힘으로 맞서는 길을 포기하셨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악의 우두머리와의 싸움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드리셨다. 이것이 우리 안에 포악과 폭력의 불씨를 심어놓은 악의 괴수에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고 지혜다. 카인의 후예인 우리가 그 포악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길이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 전 제주교구장

2024-05-05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카인의 후예(상)

우리는 내년이면 일본제국주의에서 해방된 지 80주년을 맞게 된다. 우리 겨레는 일본제국에 강제로 병합된 기간 36년 동안 일본에 저항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싸웠다. 그런데 일본제국이 패전하고 우리는 잠시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으나 곧바로 세계열강의 동서 냉전 구도에 편입되면서 국토가 분단되고 체제가 대립하고 겨레의 혼도 반쪽으로 쪼개졌다. 일제 식민 통치 기간의 두 배가 넘었는데도,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린 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갈수록 멀어지고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 동포를 적대하며 비무장지대 양쪽에 한반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도 남을 엄청난 무기를 배치하고 해마다 수시로 전쟁 훈련을 반복하고 있다. 같은 핏줄이고 같은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이어받은 한 민족인데 왜 이렇게 오래 서로를 배척하고 단절과 대결의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뿐 아니라 소위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고 내세우는 남한 내에서도 보수와 진보의 대립은 갈수록 격화되고 소통이 단절되고 있다.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온라인 공간에서 주고받는 극단적인 언어의 구사는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선거철이 되면 한 집안에서도 사회 문제에 대한 이념적 입장과 가치관 충돌이 두려워 가족 안에서도 솔직한 대화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정치·사회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여러 영역에서도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끼리 미워하고 공격하고 비난하고 응징하는 폭력적 상황을 연출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내가 잘 아는 한 직장인은 직장 상사의 집요한 괴롭힘과 악의적인 모함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다가 견디지 못하고 퇴사하고 말았다. 학원에서 학생들 사이에 다양한 이유로 벌이는 따돌림과 폭행은 오래전부터 일상화되어 있다.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 또래 친구에게 어떻게 그토록 몸서리쳐지는 잔인하고 난폭한 가학행위를 집단으로 자행할 수 있는지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상대방에게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평생 치유되기 어려운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고도 별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한다. 이런 포악함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가를 즐기고 서로 친목을 다지기 위한 각종 스포츠에서도 프로 영역으로 진입하면 선수들 사이에서는 따돌림과 폭력이 심심치 않게 드러난다. 나는 테니스나 배구 시합 중계방송을 즐겨 보며 좋아하는 선수들의 재능 넘치는 활약에 감탄과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어떤 시합에서는 즐거움보다 마음속에 서늘함과 씁쓸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선수들은 경기 중 자신의 강력하고 절묘한 스트로크를 상대가 받아내지 못하였을 때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거나 탄성을 지른다. 이는 선수 자신의 솜씨를 자랑하고 스스로 용기를 북돋는 몸짓이니 멋있고 장하게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 선수들은 그런 순간에 외마디의 괴성을 지르며 상대 선수를 향해 거의 전투적이거나 위협적인 시선으로 쏘아보고 포효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선수의 얼굴에는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단순한 성취감이나 기쁨보다는 먹잇감을 낚아채고 정복한 짐승의 포효나 강력한 적의가 여과 없이 묻어나는 난폭한 표정이 스친다. 나는 그런 표정을 볼 때마다 씁쓸함을 느끼며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흉포함에 놀라곤 한다. 그 사람 내부에 일상에서는 표출되지 않는 포악한 에너지가 숨겨져 있지 않고서는 그런 표정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옛날부터 창세기를 읽으며 제일 알아듣기 쉽지 않았던 것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였다. 카인과 아벨 형제 사이에 무슨 큰 사건이 터졌거나 다툼이 있었거나 하지 않았는데 카인은 어느 날 갑자기 아우 아벨을 들판으로 끌고 가 죽여버렸다. 카인은 농사를 지으며 농부로 살다가 땅에서 난 소출을 하느님께 바쳤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로 살다가 양의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굽어보셨으나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이에 카인이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사실 아벨이 바친 어린양 몇 마리보다 카인이 바친 농산물이 훨씬 값나가는 제물이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4-28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종교와 폭력(하)

2019년 4월 21일 주님 부활 대축일, 스리랑카에서는 여덟 군데에서 253명이 죽고 500여 명이 다치는 엄청난 폭발 테러가 발생했다. 호텔 네 곳과 주택가 및 세 곳의 가톨릭교회가 피해를 보았다. 이는 불교도와 힌두교도 간에 벌어진 종교 갈등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은 영국 식민지 시대에 비교적 특혜를 누렸던 소수파 타밀족과 다수파 싱갈족 사이의 충돌이었다. 많은 이들이 오늘의 자살폭탄 테러가 이슬람 과격파의 발명품이라고 알고 있으나, 사실은 1980년대부터 이미 스리랑카 타밀 타이거 게릴라 그룹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과격 테러리즘은 불교도와 힌두교도의 종교 갈등 때문이 아니라 타밀족과 싱할리족 사이의 문화적 이질감과 사회적 차별로 인해 빚어진 참상이었다. 미얀마의 로힝야 부족이 겪고 있는 참극은 현재진행형이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추방하는 인종청소를 저질러왔다. 이 사태는 일반적으로 불교도가 대다수인 미얀마에서 무슬림인 로힝야 부족에게 가한 차별과 탄압으로 인식되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군부가 합법적인 선거로 수립된 정부와 충돌하며 정부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대규모 폭력 사태다. 로힝야족은 이미 1780년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이주하여 국경지대에 살아왔다. 군대가 자행한 폭력의 표적이 된 것은 이미 미얀마 여러 도시에 살고 버마어를 사용하는 무슬림들이 아니다. 군부의 목표는 전략적으로 장악이 필요한 지역에 사는 이방인들을 제거하는 데 있다. 그들의 종교가 다르기는 하지만 종교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현재 세계를 가장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사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이다. 이 사태의 함의는 대단히 복합적이다. 19세기 말 유럽 내에 반유다주의가 노골화되면서 유다인들 사이에는 유다 민족의 본향이었던 팔레스티나로 이주하려는 운동(시오니즘)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 팔레스티나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고 영국이 중동 지역을 점령하자 유다인들의 팔레스티나 이민이 가속화하고 유다인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시오니즘 대두에 크게 반발하였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유다인의 증가와 아랍인에 대한 차별에 반발하는 아랍인들의 폭동, 테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유다인들의 시오니즘은 점점 국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유다인 국가의 설립을 바라는 이들, 시오니스트들 대다수는 무신론자이거나 종교에 무관심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유다인에게 테러를 자행하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도 종교적 색채와는 무관한 마르크스주의 조직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교 출신도 이슬람 출신도 있었고 종교가 그들 투쟁의 우선적인 동기가 아니었다. 유다인과 팔레스타인 사이 갈등의 핵심은 땅이었다. 종교는 땅(상징적으로는 양측에서 성지로 자리매김하는 예루살렘)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동원된 구실이었다. 그러나 대중언론은 이를 유다인과 무슬림 사이의 분쟁이라고 단순히 포장하여 소개하였다. 사안의 중심은 한 지역의 땅덩어리를 놓고 두 개의 다른 정치공동체가 벌이고 있는 분쟁이다. 20세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류 역사에서 유례없이 가장 많은 희생자를 쏟아낸 주체는 합리적 이성을 앞세우는 이데올로기였다. 구체적으로는 나치즘과 공산주의였다. 둘 다 종교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모든 종교를 탄압하고 배척한 무신론적 이념체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의 뿌리에 종교가 있다는 막연하고 왜곡된 통념을 떨쳐버려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9년 2월 4일 아랍에미리트 방문에서 알아즈하르의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와 공동으로 인류를 향해 이렇게 호소하였다. “우리는 종교가 결코 전쟁, 증오, 적개심, 극단주의를 선동해서는 안 되고, 폭력이나 유혈 사태를 조장해서도 안 된다고 단호히 선언한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들은 종교 가르침에서 벗어나고 종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데에 따른 결과들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강렬한 종교심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종교 진리와 무관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종용해 온 종교 단체들의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정치적 경제적 목표들이나 세속적이고 근시안적인 목표들을 달성하려는 목적에서 자행된다. 따라서 우리는 증오, 폭력, 극단주의, 맹목적 광신주의를 선동하는 데에 종교를 이용하는 행태를 척결하고, 또한 살인, 추방, 테러, 억압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하지 않도록 모든 이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촉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서로 싸우거나 죽이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인간이 그들의 삶과 그들이 놓인 상황 안에서 핍박과 멸시를 받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아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데에 당신 이름이 악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4-07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7) 종교와 폭력(상)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국제무역센터 테러 사건 이후 세계의 모든 나라는 끊임없이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인 테러리즘의 위협에 시달려 왔다. 런던과 파리, 니스 등 평화롭던 도시에 예기치 못한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시리아와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스리랑카 등지에서 대량 학살 사건이 터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테러와 폭력 사건의 원인과 배경에 항상 고질적인 종교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고 평한다. 종교는 원래 폭력의 고리를 끊고 사람을 갈등과 폭력으로부터 해방하고 평화로 이끌기 위해 존재하는데, 종교로 말미암아 폭력이 증가하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너무 큰 모순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안에 종교와 폭력이 이미 오래전부터 동반자로 작동해 온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유럽에서는 중세 이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군주들 사이에 분열과 전쟁이 100년 넘게 이어졌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의 세력 팽창을 위한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우리는 지구 곳곳에서 종교의 차이로 인한 분쟁과 갈등이 배태되는 모습을 본다. 종교와 폭력의 연결 고리는 현실적으로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종교와 폭력이 연결되어 있다는 이 오랜 통념이 진실로 근거 있는 명제인지 우리는 좀 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여정에서 분명히 종교의 이름을 걸고 응징과 복수와 폭력을 불사하는 이들이 여기저기 출현해 왔다. 그러나 종교에 온전히 투신한 많은 이들은 남을 괴롭히는 폭력과는 정반대의 삶을 산다. 오늘도 세계 구석구석에는 종교의 가르침을 진실로 실현하려는 수십만 명의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고, 병자들을 치료하고, 옥에 갇힌 재소자들을 방문하며 위안과 평화를 선물하고 있다. 나는 병원에서 하루에도 혼자 100명 가까운 환자를 진료하며 녹초가 되는 일정을 소화하다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휴일에 이주노동자와 노숙자 진료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봉헌하는 의료인(의사, 약사, 간호사 등)들을 여럿 안다. 그런데 안 보이는 데에서 이런 지고한 선행과 희생을 실천하는 이들은 스스로 크게 떠벌이지도 않고 나팔을 불지도 않는다. 언론은 매일 지속되는 이런 이들의 조용하고 드러나지 않는 활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몇 안 되는 과격분자들이 어쩌다 벌이는 잔인한 폭력과 극단적인 사건은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해설한다. 그리고 그 폭력의 주인공들이 특정 종교에 몸담은 일이 있으면 마치 그 종교 전체가 그에 가담한 것으로 낙인을 찍어 일반화하고 확대 해석한다. 현실 속에서 종교는 순수한 가르침이나 교리로만 존재하지 않고 조직과 제도와 사람을 통하여 세상 안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유지된다. 그래서 종교는 초연하게 정신적인 영역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세상에 영향을 주고 세상에 개입하고 세상과 어울린다. 종교는 항상 세상과 함께 작동해 왔다. 고대의 제국들은 종교를 바탕으로 실존했다. 동서양 제왕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와 정체성이 신들에게서 나왔음을 전제로 국가와 국민을 다스렸다. 이집트의 제왕은 태양신의 아들로 처신했고, 중국의 제왕도 스스로 하늘의 아들로 칭하고 제사장 신분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고대 국가들은 제정일치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실행했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임으로써 황제의 정치적 권위로 교회의 영역까지 개입하고 다스리려 하였다. 세속의 정치 지도자들은 종교를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최대한 활용했다. 사실 종교적 갈등으로 소개되고 해석된 사건의 배경에는 종교 자체의 차이보다는 갈등 당사자들의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동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갈등이 일어나는 배경에는 종교적 가르침의 차이가 아니라 땅을 더 확보하려는 욕구, 땅에 매장된 석유, 금, 다이아몬드 같은 고가의 지하자원이 원인으로 작용한다. 국가 간에 전개되는 전쟁도 모두 물질적인 이해관계로 촉발된다. 제한된 공간에 묻혀있는 지하자원이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소수가 독점하는 불의에 대해 다수가 분노할 때 갈등이 일어나고 분쟁이 터진다.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사이의 충돌로 소개됐다. 그러나 이는 영국이 아일랜드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 야기된 분쟁이지,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 아니다. 북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원래 자신들의 교회를 보유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들이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떨어져 나가 영국에 귀속하려 했던 것은 자신들의 종교가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 아니다. 북아일랜드 종교 분쟁이 발생한 원인은 18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아일랜드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북아일랜드에 이주 온 장로교인들은 가톨릭신자들을 밀어내고, 그들의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기득권을 차지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후 기존의 아일랜드 인들이 차별과 억압을 받았으며, 이들의 갈등은 무장 투쟁으로 발전했다. <다음 호에 계속> 글 _ 강우일 베드로 주교(전 제주교구장)

2024-03-31

[강우일 주교의 생명과 평화] (6) 강정 이야기④

‘강정 생명평화대행진’이 펼쳐지던 2016년 8월 1일 강우일 주교(왼쪽에서 두 번째) 등 참가자들이 약천사~안덕 구간을 걷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평화 운동가들은 제주 최남단의 작은 포구 강정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대형 해군기지의 이질적 형상이야말로 동북아의 평화를 저해하고 아름다운 제주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올무요 덫임을 세상에 알리고 호소하는 ‘생명평화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생명평화운동의 상징으로 강정에서는 해마다 제주도 해안가를 도보로 일주하며 평화를 호소하고 알리는 ‘생명평화대행진’이 펼쳐졌다. 나도 거르지 않고 이 행진에 함께 합세하여 걸었다. 행진 참가자들은 전국 각처에서, 해외에서까지 모여온 남녀노소 평화의 일꾼들이다. 이들은 긴 도보 행진 기간 내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호소하고 알리는 깃발을 들고 걷는다. 강동균 회장은 해마다 이 긴 여정 내내 가장 큰 깃발을 들고 꼿꼿이 맨 선두에 서서 걸었다. 불어대는 거센 제주 바람에도 큰 깃발을 똑바로 세우고 걷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강동균 회장은 교대도 마다하며 꿋꿋하게 걸었다. 그 밖에도 나는 강정에서 놀라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영화평론가 양윤모는 2011년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에 동참하다가 현장에서 크레인 차량 밑으로 들어가 공사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함께 몸에 쇠사슬을 감아 연결하고 공사 현장에 트럭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결사적인 행동으로 막아섰다. 그 과정에서 다섯 차례 구속되고 1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하고 단식을 이어가며 평화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결연히 표현했다. 그는 2016년 제주를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만드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일반 대중과 함께하는 문화운동을 기획, 강정국제평화영화제를 개최하며 문화예술계에 평화운동의 막을 열었다. 그의 이러한 줄기찬 활동은 다른 문화예술인들에게도 평화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과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강정에서는 지금도 길거리 미사가 매일 11시에 거행되고 있다. 미사 집전은 성프란치스코 평화센터장인 김성환(콜베) 신부를 비롯하여 전국 곳곳에서 방문하는 사제들이 번갈아 가며 맡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필요한 제구와 전례를 준비하고 미사 주송을 보고 묵주기도를 선도하는 역할은 정선녀(잔다르크) 공소회장이 한다. 그녀는 공사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 현장에서 농성자들을 압박하던 경찰들 안에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작은아버지의 아들, 사촌 동생이었다. 집에서 마주친 작은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뭐가 잘나서 데모하니?” 그 후로 전에는 살갑게 대해주던 삼촌 내외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서로 마음이 편치 않은 관계가 되어버렸다. 또 언니 아들 부부가 경찰이 되어 제주도에 내려왔는데 오자마자 강정에 왔다. 조카 부부가 꼬박 1년 강정에서 근무했다. 캠코더를 들고 이모를 포함해 반대 농성자들을 채증하기도 했다. 잔다르크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활동가들이랑 경찰이랑 대치 상황에서 서로 힘으로 밀기도 하다 보니 조카 부부가 욕도 듣고 몸도 힘들었을 거예요.” 그녀는 성녀 잔다르크처럼 강정의 긴 갈등의 역사 속에서 불굴의 굳센 투지와 깊은 영성과 복음적 온유를 잃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평화를 실천해 온 선교사다. 그녀는 지금 강정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마을을 안내하며 강정 평화운동의 역사와 체험을 전수한다. 그녀는 강정에 오기 전에 우도공소에서 10년 선교사로 살면서 공소 신자들을 동반하며 시간 날 때마다 우도 명물 땅콩 농사를 지었다. 그녀는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엄청난 인내와 끈기로 땅을 살리는 일을 먼저 했다. 주변 농민들은 불가능한 짓을 한다며 만류했다. 처음에는 거의 열매도 달리지 않던 우도 토종 땅콩이 해를 거듭하면서 옛날의 고소함과 맛을 되찾아 갔다. 되살아난 옛날 땅콩의 맛을 본 이웃 농부들 입에서 절로 이런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이 맛이야!” 그녀는 지금도 강정에서 틈만 나면 밭에 가서 각종 채소를 가꾸며 돌보고, 감귤이나 딸기로 잼을 만들어 강정 생명평화운동의 재원에 보탠다. 진짜 생명과 평화를 수확하는 일꾼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농사는 비폭력 행동 중 한 방법이었어요. 생산적이면서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마늘을 다듬고, 들깨를 털고, 국화꽃을 따고 땅콩을 까고 바느질했어요. 시위도 농사도 내 삶의 일부예요. 땅콩 짓고 마늘을 심으면서 ‘생명과 평화는 사람이 스스로 키워나가야 하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땅으로부터 배웠어요!” 그 밖에도 나는 강정을 거쳐 간 수많은 평화의 일꾼들을 만났다.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휴가를 강정에 와서 보내고 강정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 열성적인 남녀 수도자들도 여럿 보았다. 멀리 미국에서,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몇 번씩 온 이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농성과 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되고, 추방당하고 재입국을 거절당한 이들도 여럿이다. 이들은 강정을 세상에 알려준 평화의 사도들이었다. 그런데 잠시 다녀가는 사람들 말고, 이곳에 여러 해를 눌러앉아 강정을 지키는 놀라운 지킴이들이 있다. 출신 지역도 다양하고 전력도 참으로 다양하다. 광고업계에서 광고 만들던 사람도 있고, 춤 명상과 춤 테라피를 하던 춤꾼도 있고, 서양화가도 있고, 영화감독도 있다. 벌써 여러 해 강정을 떠나지 않고 매일 길거리 미사, 평화를 염원하는 100배, 평화의 인간띠 잇기에 참여하고 각자의 재능과 전문성을 살려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치며 평화의 몸짓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이들을 보며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보태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다. 오히려 가족이나 친지들로부터는 손가락질과 외면을 받기 십상이다. 고향과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나 조악한 의식주를 마다하지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생명평화를 바라며 강정에 머무는 이들의 영혼과 활동에 나는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아무런 조직이나 규범도 만들지 않고 평화를 향한 각자의 노력과 선의를 존중하며 모든 종류의 상하관계에서 오는 차별을 거부하려고 사회적 직함이나 이름 사용을 마다하고 별명으로 소통하고 어울리는 신기한 무리다. 이런 이름 없는 돌멩이들의 존재와 활동은 참으로 진실하고 아름답다. 이 돌멩이들이야말로 살아있는 평화를 만드는 디딤돌들이다. 이 돌멩이들의 외침과 현존이 오늘 강정을 평화의 기지로 만들고 있다. 내가 강정에서 만난 이들은 참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정화하는 빛이요 소금이다. 이런 의인들이 있는 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시키지는 않으시리라 믿는다.

202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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