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는 지구 시대에 적정 에어컨 온도는?

9월 1일부터 시작된 창조 시기를 맞아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호소하신다. “지구의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입시다. 전 세계적으로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지구가 ‘열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지구도 지금 ‘아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구의 이와 같은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까?” 교황은, 끓는 지구(global boiling)를 염려하는 가운데, 우리가 지구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물으신다. 우리의 응답이 미진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가 지구가 끓어올라 더워진 데는 민감하면서도 지구가 앓고 있는 것에는 둔감한 이유가 기술지배 패러다임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교황은 예리하게 포착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고, 전 세계가 서로 만나는 ‘접촉 지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모든 창조물들과 하나로 결합시켜 주셨습니다. 하지만 기술지배 패러다임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고, 전 세계가 서로 만나는 ‘접촉 지대'(contact zone)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만들어서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6항) 2024년 여름 무더위가 참으로 길고 심했다. 나는 지은 지 30년이 넘은 아파트 1층에서 살고 있는데, 조금 그늘이 진 침실은 32℃, 햇빛이 드는 거실은 33℃까지 올라갔다. 통풍을 시키며 자연 바람하고 함께 살면서, 바람이 불어 33℃에서 32℃, 32℃에서 31℃로 기온이 내려가는 것을 느낄 때면 바람이 참으로 고맙다. 집 밖으로 나오면 뜨겁기는 해도,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이것을 알아차린다. 참으로 바람 없는 여름 없고, 바람 없는 도시 없다. 그런데 에어컨으로 온도를 33℃에서 24℃, 혹은 23℃로 내려놓고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연 바람을 만날 가능성이 줄어든다. 밖으로 나가서도 바람을 느끼기보다 뜨거운 열기에 얼른 에어컨이 있는 실내로 들어가고 싶어하기 쉽다. 기술지배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에어컨과 같은 제품들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 일상에 깊게 들어와 있다. 기술지배는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자연에서 떼어놓는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자연 만물과 이웃을 만날 때 우리에게 ‘접촉 지대’가 되어 주는 자연을 잊게 만들어서 ‘접촉 지대’를 삭제하는, 그리하여 결국 그 사용자들이 자기와 자기 후손들을 스스로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 8월 30일 새벽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가 다시 기차로 전남 나주로 가서 택시를 타고 남평에 있는 광주가톨릭대학교로 이동해 신학생들 수업을 동반했다. 그리고는 광주송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송으로 가서 카리타스대학원 영성과 실천 강의를 위해 가톨릭꽃동네대학교로 갔다.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몸이 굳어오기 시작해 밤새 앓아야 했다. 오른편 어깨 쪽으로 마비가 와서 숨을 깊게 쉬기가 어려워졌고, 성호를 긋기 위해 손을 이마까지 올리기가 힘들었다. 아픈 과정을 통해서 “고통이 크면 클수록 움직일 가능성은 줄어들고, 평형에 대한 그리움은 커진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평형을 회복해 가는 동안,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병과 함께 살 줄 아는 통합 생태적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알아갔다. 선인들이 말한 것처럼, 앓는 것은 알아가는 과정이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이웃들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가를 알아가는 은총의 비에 젖는 때다. 그런 속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물음이 있었다. 이 끓고 있는 지구 시대에 전주교구청은 에어컨 온도를 26~28℃로 설정하고 있었는데, 그 온도를 몇 ℃로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 적정 온도를 어떻게 합의해 갈 수 있을까? 우리 교회와 사회는? 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

[독자마당]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부터

다섯 번째 수필집 표지를 예술화하고 싶었다. 제자(題字)는 판본체 가로쓰기로 직접 쓰고 표지화는 좋아하는 문인화가에게 부탁해 기도를 상징하는 파란 장미꽃 그림을 받고 낙관은 서각가에게 부탁해 받아 낙인했다. 그런데 인쇄된 표지를 보니 가로 낙관이 세로로 바뀌어있었다. 즉시 출판사에 시정해 달라는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아 문자를 남겼다. 한참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수정했다는 문자가 왔다. 얼마나 기쁘던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마도 품격 높은 수필집을 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하느님께서 도와주셨다는 감사함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나로 바뀌어 가고 있다. 약속 시간에 맞추려고 바쁘게 걷는데 내 발걸음에 맞춰 건널목 신호의 파란불이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신호 대기 선에 이르렀을 때 빨간불이 켜지면 “서둘지 말라.” 하시는구나 생각하며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1994년 천주교에 입교한 지 30년, 주일 미사만은 빠지지 않고 참례했다. 1997년 본당신부님께서 “나이 50이 넘은 공학도가 종교에 입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시며 ‘꾸르실료’ 교육을 추천하셨다. 당시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녀왔다. 또한 신부님께서는 “정년퇴임해 시간적 여유가 있으실 테니 사목회장을 맡으라”고 강권하셨다. 나의 신심이 바닥인 줄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사회생활에서 익힌 나의 성정(性情)대로 역할을 했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가랑비에 옷 젖듯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었는가? 나도 모르게 천주교 신자의 언행으로 빠져들었다. 아침기도로 하루가 시작되고 삼종기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바치는 기도가 자연스러워졌다. 여행할 때는 묵주기도로 출발하고 일상에서 부딪치는 모든 일에 감사기도를 하게 되었으니 ‘천주쟁이’가 된 것은 틀림없다. 입교를 시점으로 세상은 급속히 발전해 삶의 질을 높게 변화시켜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변화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 묘하게도 내 신앙생활의 변화와 일치한다. 입교 전인 60~80년대 고향에 가려면 꼬불꼬불한 국도를 운행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해야 했는데 하루에 몇 대밖에 운행하지 않았다. 정류장마다 멈춰 승객을 태우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입석 승객을 태운 만원 버스 안에서 짐짝 취급을 받아야 했다. 2009년 대전에서 당진까지 왕복 4차선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승용차를 운전해서 고향집 마당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지방의 학자로 40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서울을 오르내렸다. 곧바로 출발하는 통일호를 타더라도 승차시간만 3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랬던 여정이 탑승 후 1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하는 꿈같은 세상으로 발전했다. 그 지루하고 고통스러웠던 길이 이제는 승차감이 좋은 열차에서 경치를 감상하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치기도 하는 길로 바뀌었다. 정년퇴임 후 마음대로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늙은이는 서울을 오르내릴 때마다 시간을 쪼개 써야 했던 때와 격세지감의 감회를 느끼며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함이 솟구친다. 이제 남은 삶은 피가 섞인 가족, 속 터놓고 지내는 친구들, 하느님의 사랑으로 서로 감싸는 교우들 그리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맺어진 지인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전하며 받은 은혜의 일부라도 보답하며 살고 싶다. 글 _ 이은웅 토마스 아퀴나스(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본당)

2024-09-15

변방으로 나서는 교황에게 응원과 기도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의 4개 나라를 사목방문했다. 9월 2일부터 13일까지 이어진 이번 사목방문은 이동거리만 3만 킬로미터가 넘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으로선 가장 오랫동안 가장 먼 거리를 여행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하지만 교황은 이번 사목방문에서도 대화를 통해 형제애와 일치를 추구하며 변방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려는 그의 의지를 내비쳤다. 교황은 인도네시아에서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스티크랄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창조질서를 보전하기로 약속한 것은 무슬림이 다수인 인도네시아에서 대화로 종교간 평화 공존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교황은 파푸아뉴기니에서 기후위기로 위협받는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이번에 방문한 4개 나라 중 유일하게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동티모르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참례한 가운데 미사를 봉헌하고, 인도네시아의 통치 아래에서 고통받았던 동티모르 국민들을 위로했다. 여러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서는 청년들에게 형제애와 평화의 사도가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2013년 교황으로 선출된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변방, 즉 교회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소외되어 온 지역에 하느님의 위로를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소수인 아시아 지역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스리랑카와 필리핀,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태국과 일본, 몽골 등을 차례로 방문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교황의 바람대로 아시아 지역이 미래 교회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로 동참하자.

2024-09-15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

몸으로 나누는 사람들의 실천은 어째서 물질적인 나눔 이상의 짙은 감동을 자아내는 걸까. 조혈모세포를 기증하고 꾸준히 헌혈까지 해온 두 군종교구 사제를 인터뷰하면서, 사람이 자기 몸을 이웃에게 나눈다는 건 어떤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됐다. 육군 화랑본당 주임 박현진(마르코) 신부는 일면식 없는 혈액암 환자를 위해 8월 22일 기꺼이 조혈모세포를 기증했다. 해군 동해본당 주임 이현선(데니스) 신부는 9월 2일 50번째 헌혈을 했다. 두 사제 모두 인터뷰에서 “대가 없는 나눔이 안겨 주는 기쁨을 맛본다면 나눔이 오히려 자신에게 축복임에 눈뜰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크게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기부처럼 안전한 나눔도 괜찮지 않으냐”는 우문에 두 사제는 현답을 돌려줬다. “나눔은 절박한 사람이 찾는 그 절박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언젠가 그마저 줄 수 없게 될 때 후회하지 않도록 나눌 수 있을 때 나눠야 한다”고. 그때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라는 한 성가가 떠올랐다. 돈이 아닌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이라도 좀 줄게”라는 식의 도움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절절히 깨달았기 때문이었을까. 돈 외에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것은 많았다. 인간이 인간에게서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위로, 조건 없는 포용, 용서…. “헌혈과 조혈모세포 기증은 작은 희생일 뿐”이었다는 두 사제 말대로 우리도 돈이 아닌 사소한 실천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물질이 인류를 구원할 핵심 수단이었다면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부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안다. 그저 사랑이란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내어주는 성체성사 같은 것임을 되새길 따름이다.

2024-09-15

본당 사제들, 시노드 교회 이끌어야

시노달리타스가 구현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등 하느님 백성 모든 계층의 온전한 참여가 이뤄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세계주교시노드 여정을 통해서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성령 안에서의 대화’라는 것도 깨달았다. 따라서 시노드 교회는 하느님 백성 전체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해 서로 경청하고 소통함으로써만 건설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이들이 이 여정에 참여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는 특별히 본당 사제들의 역할이 실제로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황청에서 지난 4월에 열린 본당 사제 국제 모임에서, 수백 명의 본당 사제들이 시노달리타스와 관련해 서로 경청하고 대화하는 체험의 기회를 마련한 것도 그 이유다. 한국에서도 9월 2~4일까지 사흘 동안 ‘시노드를 위한 한국교회 본당 사제 모임’이 열렸다. 전국에서 43명의 본당 사제가 참석한 이 모임을 통해 사제들은 다시 한번 경청과 대화의 소중함을 체험함으로써 각자의 사목 현장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해 나갈 의지와 각오를 다졌다. 교회는 보편적이지만 사목은 구체적인 현장의 삶에서 이뤄진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현장은 가장 기초적으로는 가정이다. 또한 신앙과 삶이 구체적으로 교류하고 공동체적으로 실현되는 곳은 바로 본당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당을 이끌고 본당의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는 사제들이 얼마나 시노달리타스를 이해하고 익히며 구현하고자 하는지가 시노드 여정에서 가장 관건이 된다. 이번 사제 모임이 이를 위한 획기적인 전기가 되어 자칫 논의만으로 그칠 수 있는 시노드 여정이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데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2024-09-15

차곡차곡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김영사, 2022)를 출간하고 큰 공허감이 몰려왔다. 태풍이 쓸고 간 폐허에 혼자 선 듯 허망했다. 마음을 달래려고 황사영 백서의 원본 필사를 시작했다.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 크기의 명주천에 깨알 같이 쓴 글자가 무려 1만3384자였다. 원본하고 똑같은 크기에 동일한 행배열로 베껴 썼다. 불경 사경(寫經)에 쓰는 극세필을 구해 한 달 넘게 걸려 어렵게 완성했다. 인상을 찡그려 가며 베껴 쓰는 사이에 배론 토굴 속에서 조선 교회를 구해야 한다는 간절한 일념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황사영의 마음이 내 안에 새겨졌다. 앞서 책을 쓸 때 머리로 읽고 정보로 찾아 읽던 그 글이 아니었다. 순교자의 비명 소리와 회한에 찬 탄식, 피눈물의 간구가 응축된 장대한 서사가 메아리쳤다. 그 뒤 1811년 신미년 백서를 비롯해 북경으로 보내진 각종 편지의 원본 사진을 원래 크기대로 전사하는 작업을 차례로 진행해서 모두 마쳤다. 지난 7월 말 전남 강진에 갔다가 숙소에 딸린 작은 전시장에서 촛불을 그린 소폭의 그림을 보았다. 양초의 몸체 부분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 손전화로 찍어 확대해 보고는 놀라 기함을 했다. 가로와 세로 3센티미터 가량의 정사각형 안에 반야심경 전문 270자를 붓으로 써놓았다. 1제곱센티미터 안에 30여자씩 쓴 크기였다. 상경 후 작가를 수소문해 찾아가 만났다. 김재현 선생은 전남 지역에서 퇴임한 미술 교사였다. 낙도의 섬 학교에서 밤중에 숙직을 서고 있으면 적막하고 무서워서 반야심경을 쓰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곤 했다. 그의 기록은 100원짜리 동전 크기의 1.9센티미터 사각형 안에 반야심경을 모두 써넣는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를 만나 사용하는 붓을 보고, 실제 작품을 더 보고 나자 나도 다시 작은 글씨를 써볼 생각이 났다. 그의 글씨는 내 황사영 백서 글씨 크기의 절반 보다 훨씬 작았다. 그날부터 작은 글씨에 다시 도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신기하게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포기했던 크기의 글씨가 문득 써지는 것이 아닌가? 며칠 전 출판사 편집자와 얘기하다가 그 글씨 사진을 보여 주자 눈이 동그래지더니 독일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연필로 쓴 작은 글씨」(문학동네, 2023)란 책을 귀띔해 준다. 책을 구해 보니 이건 또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다시 그 글씨에 빠져 연필 아닌 붓으로 같은 크기의 글씨를 한동안 썼다. 뒤이어 폴란드 화가 로만 오팔카가 깨알 같은 글씨로 그린 그림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8월 한 달 동안 폭풍우 같이 미세 글씨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다. 작은 조각 종이에 극세필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글씨를 쓰면서 아침을 시작한다. 고물고물 이어진 글자들은 일종의 물결 같다. 또박또박 써나가는 동안 순수한 기쁨이 내 안에 차오른다. 나이를 먹어 가니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들이 좋다. 한꺼번에 말고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이루어가는 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나는 좀 더 천천히 가야겠다. 더 목적 없이 서성거리고, 더 느리게 걷고, 더 많이 눈 감고, 더 가만히 음미해야겠다. 한 글자 한 글자씩 써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넓은 지면을 무늬처럼 꽉 채우는 깨알 글씨처럼.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09-15

중장년 1인 가구

요즘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가고 있는 가구의 형태가 있다. 새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어느덧 우리 사회 환경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는 1인 가구이다. 기업들도 이 가구들을 의식한 듯 생산설비와 포장라인을 재정비하여 상품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거기에 더해 주거, 음식, 문화 공간들도 다양한 형태로 1인 가구들이 이용하기 편리하게 합류하고 있다. 1인 가구로 살아가는데 적절한 또는 충분한 사회적 요건을 갖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만족을 느끼며 생을 즐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중장년 1인 가구가 우리 주변에서 흔치 않게 서성이고 있다. 그리고 중장년 1인 가구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1차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2023~2027)에는 고독사 위험군이 19~29세 9.7%, 30대 16.6%, 40대 25.8%, 50대 33.9%, 60대 30.2%, 70대 이상 16.2%로 나타났다. 살펴보면 모든 연령에서 고독사 위험군이 있지만 그중에 40~60대에서 가장 높다. 바로 중장년 1인 가구이다. 이들은 사회구조에 따른 개인의 고립 및 단절 심화, 전통적 가족 돌봄 기능의 지속적 약화, 또는 점점 약화되고 있는 사회관계망 속에서 우울할 때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고 몸이 아플 때 연락할 사람이 없고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빌려줄 사람이 주변에 없다고 호소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어려운 이들은 결국 고독사를 맞는다. 국내 고독사는 2019년 2656명에서 2022년 4842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사회적 고립, 고독사 예방을 위해 1인 가구 어려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과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 그러나 지자체 조례를 찾아보면, 간혹 1인 가구의 사회적 고립 및 고독사 예방과 지원에 관련 조례가 제정돼 있기는 하지만 이를 위한 사업이나 서비스는 아직 부족하거나 부재한 상황이다. 이들을 위해 우선 제공되어야 할 서비스로는 생활방식을 개선할 수 있는 지원, 고독사 위험군 대상자 발굴 및 안부 확인 시스템 구축, 외출을 유도할 수 있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현물지원 그리고 사회적 고립 예방을 위한 사회 관계망과 일상회복을 위한 지역사회 대응체계 구축이다. 현재 돌봄서비스를 확산시키고 있는 보건복지부 사업안에 중장년 1인 가구의 돌봄을 위한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고립가구 및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복지사업 개발 및 서비스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들을 향한 사회적 관심이 요청되고 있는 지금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점검해야 하는 움직임이 더 크게 실천돼야 하겠다. 혹시 우리 본당, 우리 구역에도 보이지 않는 신자 또는 방문을 거부하거나 꺼리는 신자가 있는지 살펴보자.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노후 다세대 주택가가 있거나 문 앞에 도시가스 체납 안내문이 붙어있는 가구들이 있다면 관심 있게 살펴보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선택한 이들을 발굴하는 첫걸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들의 특성상 한 번의 방문으로, 한 번의 전화로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안부로 첫 외출을 시도해 보자. 그래서 우리의 형제자매, 우리의 이웃이 외롭게 혼자 지내다가 홀로 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하자. 중장년 1인 가구 형제자매들이 시원하게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발길을 내밀 수 있도록 우리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가족과의 관계 단절, 주변을 회피하는 이들이 집 밖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아진 만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지역의 복지관과 지자체와 연대하는 협력이 필요하다. 더 늦어지기 전에 최소한의 안부 전화로 식사, 수면, 운동, 외출, 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지역사회 서비스체계를 통해 사회적 고립예방 및 이웃 돌봄을 시작해 보자. 글 _ 강성숙 레지나 수녀(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 회)

2024-09-08

[내 눈의 들보] 주체가 되어야 하는 젊은이

청년회가 없어진 본당이 여럿이고 더이상 미사에서 젊은이를 찾기 힘들다. 그러나 젊은이는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젊은이는 여전히 하느님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며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길 열망한다. 꼭 본당이 아니더라도 일하는 곳 근처에서 혹은 여행하면서 성당에 들어가 고요히 기도하는 젊은이를 여럿 보았다. 또 유럽 패키지 여행을 하면서도 영성체는 꼭 해야겠다며 투어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성당에 다녀오는 젊은이도 본 적이 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이하 서울 WYD)를 준비하고 치러야한다. 수많은 젊은이를 교회의 한 가운데로 초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시노달리타스라는 여정을 함께 걷고 있다. 올해 시노드가 막을 내리겠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끊임없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정의한 시노드 정신을 꺼내 교회 곳곳에 적용시키고 있다. 2027 서울 WYD도 맥락을 함께 한다. 시노드 정신으로 젊은이를 초대하고 젊은 리더를 양성하며 더 나아가 우리나라 젊은이 사목의 패러다임을 바꿔보자는 당찬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수직적 사고방식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제를 중심으로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은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신자들 사이에도 계층이 나뉘어 젊은이는 언제나 덜 양성된 구성원으로서 교회의 하위층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래서 젊은이가 교회를 떠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교회의 외곽에 있는 사회적 약자로 배려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가, 특히 젊은이 사목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이 통념을 가차 없이 깨버리고 없애야 한다. 먼저 시노드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인 ‘동등성’이 우리 교회에 자리 잡아야 한다. 동등성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똑같은 품위를 지녔고 동등한 위치에 서있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이다. 또 성령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은사를 내려주셨기에, 서로 존중하고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직무 사제직을 받았다고 해서, 축성 생활을 지향한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을 살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동등성을 내세워 서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느님 백성 그 자체로서 바라보고 존중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파나마 WYD에서 “젊은이는 하느님의 미래가 아닌 현재”라고 말했다. 또 2023년 리스본 WYD에서 “교회에는 여러분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함께 걷는 여정에서 2027 서울 WYD를 준비하는 지금, 교회 공동체는 젊은이를 초대하여 참여시키는 게 아니라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공동체의 바닥을 다지고 뼈대를 만들며 살을 덧붙이는 모든 영역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함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양성자와 피양성자의 구분 없이 동반 양성되어 젊은이는 사제를 통해, 사제는 젊은이를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시노드 정신에서 방법론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신앙의 숨결을 젊은이들과 함께 느끼며 걸어가는 여정이 되기를 희망한다. 젊은이는 교회 안에 머물며 변화를 기다리고 있다. 글 _ 이주현 그레고리오(의정부교구 지축동요한본당·영상제작자)

2024-09-08

기후정책 위헌 판결, 기후정책 강화 서둘러야

헌법재판소는 8월 29일 아시아 최초 기후소송에 대한 최종판결에서 우리나라의 탄소중립법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탄소중립법 8조 1항을 바탕으로 한 온실가스 배출 감축 계획은 2030년부터 목표 연도인 2050년 사이의 감축 계획이 수립돼 있지 않아 위헌이라는 것이다. 이번 판결의 의미는 막대하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인 이번 기후소송은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대만과 일본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향후 우리나라의 기후정책 강화를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독일에서도 2030년까지의 온실가스 감축 계획만 설정돼 있었다. 하지만 2021년 4월 기후소송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후 55%였던 2030년 목표치를 65%로 올렸고, 2040년 목표 88%가 새로 설정됐다. 이어 2050년 탄소중립 목표 역시 2045년으로 앞당겨졌다. 이번 기후소송 결과는 2030년까지 40%를 감축한다는 현재 계획에 대해서는 위헌 판단을 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재판관 9명 중 위헌 결정에 필요한 6명에 못미쳤지만, 5명은 2030년까지 40% 감축이라는 현재 계획도 위헌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결국 이번 소송은 우리나라의 탄소중립을 위한 기후정책이 기후위기의 위험에 대해 국가가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다. 정부는 이번 소송 결과에 따라 대폭 강화된 기후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야 한다. 예상보다도 더 빠르게 진행되는 기후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 정부는 형식적이고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획기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에 나서야 한다.

2024-09-08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