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나 모레쯤’이라고 말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늘 지금 당장 뭔가를 처리해 가며 자벌레처럼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우리들에게, 비록 일순고식(一瞬姑息)의 쉼표일지라도 ‘내일이나 모레’라는 평지 길이 있다. 터널을 지나면 어떤 풍경이 나올지 모르는 첫 여행길처럼 내일이나 모레면 대개 하늘은 개이고 바람도 따뜻했더랬다. 내일이나 모레가 될 때까지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걸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내일이나 모레가 선물이 될 때까지 자기자신을 뒤적이며 희망의 씨앗을 확인하게 되니 참 좋았다. 지금 내 삶의 자리를 차분하게 해주는 말, “내일이나 모레쯤 우리 다시….”
기쁨주일이다. 다들 잠시 쉬어가자고 그런다. 매일 놀기만 하는 백수도 노는 것 멈추고 하루쯤 쉬어보자며 우스개를 한다.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는 느려서 문제가 되는 경우보다 빨라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의지보다 신의 섭리가 끝내 이긴다는 말은 애국가의 후렴처럼 입에 잘 붙여 두어야 한다. 시간의 선물을 놓치지 않으려면 육식동물 같던 번득임을 내려놓고, 한가한 초원의 양들처럼 내일이나 모레쯤으로 시간을 건너짚는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그 상상만으로도 옆 사람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과의 오랜 인연 때문에 나는 자주 수도원 전례에 참례한다. 신자들의 좌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수도승들은 긴 복도에 늘어서서 전례 준비의 스타치오(Statio)를 한다. 스타치오에 대한 유래와 번역이 여럿 있지만, 내게 각인된 말은 ‘수렴’이다. 여기저기로 분산된 것들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는 의미를 담은 수렴!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말의 근원을 찾아가면, ‘들으라 아들아’라는 규칙서의 첫 문장도 만나게 된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일상을 또 다른 모멘트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 xy축의 평면을 z축으로 확장하여 입체가 되게 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앞과 뒤뿐만 아니라 위아래로 층을 쌓는 자기관조를 통해, ‘지금 여기’의 거룩함에 이르게 되고, 그 숨죽인 고요의 문을 열고 새로운 풍경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리라 상상해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도 일상의 스타치오를 한다. 오늘이 며칠이며 어제는 어땠고, 어제 계획한 오늘의 일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시간의 끈 잇기를 한다. 나의 좌표가 확인되기까지 5분 정도를 보낸다. 그런 습관 덕분에 누군가가 내게 무슨 제안을 해 올 때면, ‘고맙습니다. 집에 가서 우리 아부지한테 물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을 놓쳐 기회를 날려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내게 허락된 것은 어차피 나의 것이 된다는 믿음인 것이다. 일상의 소중함, 순발력보다는 항구함이 참인생인 것을 알기까지는 누구에게나 최소 60년 정도의 세월은 필요하지 않을까?
‘내일이나 모레’는 너무 먼 시간이 되어버린 오늘을 산다. 번득이는 인간의 지혜와 숨가쁜 문명의 변화가 인류에게 과연 무엇을 안겼는가. 더군다나, 전리품을 챙기듯, 정의를 가장한 약탈을 일삼는 국내외 정세를 보면, ‘아, 여기가 바로 소돔 땅이구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제발 먼 세월도 말고, 내일이나 모레쯤까지만이라도.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