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지혜와 신앙의 지혜, 분별없이 동일시한 공동체
라오디케이아는 기원전 3세기 안티오쿠스 2세에 의해 건립된 도시다. 에페소와 동쪽 지역을 잇는 도로 가운데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이었다. 로마의 문인 키케로에 의하면 라오디케이아는 재정과 금융의 주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섬유 산업, 특별히 양모 산업이 발달했고 귓병에 좋다는 고약과 눈병에 좋다는 약재도 라오디케이아에선 유명했다. 우리가 읽는 편지도 안약을 언급하고 있다. 라오디케이아는 경제적으로 강했고 그로 인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묵시 3,17)라고 할 만큼. 그러한 라오디케이아는 60년경 지진으로 몰락하고 만다.
교회공동체에 전해진 우리의 편지도 부유함, 혹은 풍족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자만과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이 편지가 쓰인 동기 중 하나다. 편지를 보낸 ‘사람의 아들’은 ‘아멘’(ἀμήν)으로 소개된다. 신약성경에서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을 두고 ‘아멘’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처음이다. 이탈리아의 요한묵시록 전문가인 우고 바니(U. Vanni)는 ‘아멘’이라는 호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와 하나 되어 육화하신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편지가 교회공동체 내의 자만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상관없는 이를 향한 일갈이 아니라 자신과 하나 된 이를 생각하는 애틋한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창조의 근원’으로 소개된다. 유다 사회는 창조 때의 하느님을 지혜와 연결하여 사유하곤 했다. 예컨대 잠언 8장 22절부터 23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특별히 사도 바오로에 의해, 창조의 근원으로 예수님을 상정한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
‘아멘’으로서, ‘창조의 근원’으로서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 되어 모든 시공간, 그리고 만물을 또한 하나로 엮어내는 분이시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은 ‘모든 것의 정점이자 모든 것, 그 자체’로 소개되신다.
모든 것은 부분적인 것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 됨은 갈라짐을 배제한다. 다른 어떤 것에 휩쓸리거나 다른 무엇이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을 흔드는 경우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라오디케이아는 “미지근”(묵시 3,16)했다. 예수님을 향한 열정과 신심은 ‘적당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그노시스, 그러니까 영지주의적 사고에 젖은 신앙 공동체를 향한 비판이라 해석한다. ‘미지근’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에 세상의 가치가 혼재되어있는 상태를 말한다.
교회는 옳고 세상은 그른 것이어서 그른 것이 옳은 것을 침탈하고 방해한다는 이원론적 혼돈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올바름과 신앙의 올바름, 세상의 지고한 지혜와 신앙의 지혜를 분별없이 무턱대고 동일시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이를테면 세상과의 호흡이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세상과의 불협화음보다는 친교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이름으로 세상과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자세로 인식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 중에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었다. ‘세상에 맞서지 말고, 우상숭배든 황제숭배든,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적당히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들 줄도 알아야 현명한 신자’라는 것. 이것은 함께 호흡하는 게 아니라 타협하는 것이었다. 어정쩡한 신앙의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비껴가서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것을 더 알고, 세상과 타협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훌륭하고 모범적으로 산다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이나, 그러한 것이 신앙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것에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 외경 중 하나인 토마스복음에 따르면,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일은 물질적인 것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체가 되는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토마스복음 21,37 참조) 우리가 얼마 전 읽은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에서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 “나는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사실 부유하다.”(묵시 2,9)
초대교회는 세상의 물질적, 혹은 정신적 성장과 부유함에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세상보다 더 깊고 넓은 지혜를 소유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 속 가장 낮은 곳에서, 때론 숨죽이고 때론 저항하며 버텨내는 삶을 살아서 그렇다. 세상이 모두 옳고 그름을 논박하며 가장 멋진 삶, 가장 훌륭한 삶을 외칠 때,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살아내느라 세상의 손가락질과 모욕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다.
죄지은 자, 병든 자, 세상의 상식에 벗어난 자를 ‘형제’요, ‘자매’라고 칭하며 어떻게든 용서와 화해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세상의 모욕은 신앙의 부유함이었고 풍족함이었다. 세상의 지혜와 부유함이라는 겉옷 위에 신앙을 액세서리로 꾸며내는 일보다는 우리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하느님 앞에 진정 부유한 일이다.
사도 바오로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다”(콜로 2,3)고. 우리에게 진정 보물은 무엇인가. 우리의 편지 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주고 함께 먹고 마시는 일(묵시 3,20 참조), 예수님의 어좌에 함께 앉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묵시 3,21 참조)이 그것이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자주 묻는다. 담배 끊고, 술 끊고, 심지어 피정의 이름으로 효소 단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잦다. 제 한 몸 가꾸는 일이야 현대인의 필수 덕목에 가깝지만, 우리의 신앙이 제 마음의 평온이나 제 몸의 가벼움에 집중하는 일인가 자주 묻게 된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배고팠고 예수님도 그랬다. 수많은 신앙의 증거자는 생명에 배고파 생명을 내던졌고 세상에 실패하며 신앙 안에 승리했다. 세상을 평온히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한다면 우린 왜 성당에 다녀야만 하는가, 나는 자주 묻게 된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