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달려온 61년에 ‘구원’ 같은 수상 소식…영광스럽다” 단 하루도 창작 거르지 않았지만 이번 시집은 첫 작품이라 생각 진을 다 빼며 쓴 유언 같은 작품…"디지털 시대에 시 읽기는 축복"
“한국가톨릭문학상을 받게 됐을 때, 제 마음이 정화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세례를 다시 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죠. 가톨릭신자로서 영광스럽습니다.”
김윤희(이레네) 시인은 올해 1월 펴낸 일곱 번째 시집 「핵에는 책으로」로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운문 부문 수상자가 된 소감을 세례와 구원에 비유했다. 그만큼 이번 수상을 더없이 크게 받아들이고 있다.
1964년 「현대문학」에 청마 유치환 시인(1908~1967)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후 61년 동안 끊임없이 시를 쓰는 인생을 살고 있는 김윤희 시인에게 가톨릭문학상 수상은 하나의 이정표로 여겨진다.
“유치환 시인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의지와 관념의 시인이고 뜨거움과 냉철함을 분출한 시인이십니다. 유치환 시인으로부터 1962년에 제1회 추천, 1963년에 제2회 추천, 1964년에 추천 완료되면서 3분의 1 시인에서 3분의 2 시인을 거쳐 온전한 시인이 됐습니다. 스승에게서 벗어나 나만의 독립적인 시 세계를 갖고 싶었습니다. 제 시를 읽는 분들은 과묵하고 완벽을 추구하던 유치환 시인의 시 정신이 제 시에서도 느껴진다고 합니다.”
「핵에는 책으로」는 김 시인이 여섯 번째로 펴낸 「오아시스의 거간꾼」 이후 꼭 10년 만에 나왔다. 첫 시집 「겨울 방직」도 등단 후 6년 만인 1970년에 펴내는 등 김 시인은 등단 후 61년간 단 일곱 권의 시집만을 발간했다. 발표한 시집 수로 보면 작품 활동이 왕성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엄선에 엄선을 거친 시를 고르고 또 고르는 치열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단 한 권의 시집도 탄생할 수 없었다는 의미다.
“지금도 정신이 가장 맑을 때인 새벽 시간에 매일 시를 씁니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으면 곧 사망이나 마찬가지이고 시를 쓰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시다’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를 추구합니다. 아류나 ‘유사품’이 아닌 나만의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등단한 지 60년이 넘게 흘렀지만 지금도 등단을 꿈꾸는 문학청년의 심정으로 쓰고 있습니다.”
김 시인은 「핵에는 책으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완벽성을 추구하는 김 시인다운 품성을 엿볼 수 있다.
“이전에 나온 여섯 권의 시집은 「핵에는 책으로」를 내기 위한 서론일 뿐입니다. 시의 완결성과 염결성(廉潔性)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여섯 번째 시집까지는 무(無)로 돌리고 싶습니다. 「핵에는 책으로」를 내면서 시인으로서 자부심을 찾았고 ‘나 이제 시인 됐나?’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었습니다. 진을 다 빼 가면서 쓴 작품이어서 미리 쓴 유언 같기도 합니다.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 역시 제가 「핵에는 책으로」에 느끼는 자부심을 밝게 비춰 준 것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김 시인은 「핵에는 책으로」 발간 후에도 단 하루도 시 창작을 쉰 적이 없다.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하루 하루 시를 쓸 수 있는 건강을 하느님께 간구하며 새로운 창작으로 나아가는 궁리와 도모의 시간을 매일 갖는다.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중견 시인들은 관례적으로 이미 발표한 시들 중 선별해 시선집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시선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새로운 시를 쓰겠다는 의욕으로 살고 있습니다. 독자들 중에는 저의 시 중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시들을 이야기하는 분들도 많지만 저 자신은 아직 대표작을 쓰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대표작을 꼭 남기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제 인생에 남은 시간을 아끼고 있습니다.”
김윤희 시인이 80대 후반의 나이가 무색하게 20대의 정열로 시를 쓰는 이유가 있다. 특히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살면서도 마음속에 허무함을 안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시는 무궁무진한 혜택을 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시를 읽는 이들과 읽지 않는 이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시를 읽으면서 자아를 각성하기도 하고, 자기 영역을 확대할 수 있고, 물질의 세계가 던져 주는 허무함을 메울 수가 있습니다. 요즘처럼 활자 매체가 범람하는 시대에는 더욱이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시를 읽는 것은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 수상작 「핵에는 책으로」
제2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운문 부문 수상작 「핵에는 책으로」(136쪽/1만2000원/책만드는집)는 김윤희 시인의 지칠 줄 모르는 창작 욕구가 녹아 있는 역작이다. 우선 제목부터가 눈길을 끈다. 「핵에는 책으로」는 모두 8부로 구성된 시집의 첫 시 제목이기도 하다.
시인이 안질로 고생하면서 난청까지 따라 온 어느 날 TV 뉴스 화면 자막에 적힌 ‘핵에는 핵으로’가 ‘핵에는 책으로’로 둔갑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소소한 일상에서 우연히 일어난 작은 ‘불상사’에서 김 시인만의 감수성이 발휘됐다. 시인은 누가 제대로 ‘핵에는 핵으로’라고 알려 주기 전까지는 달콤한 세상을 잠시 살았던 행복감을 시로 표현했다.
김 시인은 이전에 발간한 여섯 권의 시집과 비교해 「핵에는 책으로」를 가장 충족감을 느끼는 시집이라 자평한다. 60년 넘는 활동에서 일곱 권의 시집만을 낼 만큼 스스로에게 철저하고 완전성을 갖춘 작품만을 추구하는 시인의 작품세계가 충실하게 구현돼 있다. 김 시인 스스로에게는 ‘시집을 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첫 시집과 다름없다. 독자들에 따라 난해하게 느껴지거나 쉽게 다가오는 작품도 있지만 「핵에는 책으로」를 관통하는 시 정신은 독창적인 시선으로 사회 현상과 인간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 형상화한다는 점이다.
<촛불 취침>에서는 광장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를 바라보면서 촛불을 ‘지상의 별’이라 이름 붙이고, ‘어느 간절한 손에 들려 타는 함성’이라 묘사하고 있다. 김 시인이 지니고 있는 넉넉한 시야가 저변에 깔려 있다. <블랙커피 콤플렉스>에서는 40년 전 집으로 찾아온 남편의 여제자를 시의 소재로 삼아, “선생님은 블랙 드시는데요”라며 프림을 타지 못하게 말리던 그 제자가 오늘도 무사한지 궁금해 한다. 인간에 대한 김 시인 특유의 따뜻한 애정이 배어 있다.
“시의 양식(糧食) 아니었으면/ 무엇으로 일생 연명했으리”라는 단 두 행으로 쓴 <미니 솔soul 1>은 시를 통한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시가 곧 양식이고 시를 써서 일생을 연명했다는 담담한 시구는 60여 년 시인으로 살았지만 아직도 문학청년이기를 원하는 김 시인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 운문 부문 심사평
김윤희 시인의 시집 「핵에는 책으로」에는 60여 년의 시력(詩歷)을 쌓아 온 원로시인이 경험하는 소외와 고독, 비애의 감응이 묻어나지만 내면에서 솟아나는 힘찬 결기와 열정이 발랄하고 다이나믹한 탄성으로 그것을 역전시키며 튀어오른다.
이 ‘육성(肉聲)의 시’는 시적 표현의 날렵한 속도감과 압축적인 형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를 이중, 삼중으로 구사하는 중층적 비유를 동반하면서 내밀한 경험의 속살을 농축된 언어로 천연스럽게 표현한다.
- 오형엽 문학평론가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