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아비뇽 유배, 서방교회 대분열을 초래하다
조반니 치마부에(1240-1302)와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10)는 중세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을 13세기 후반 중세적이면서도 새로운 회화와 건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세대가 지나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와 조토 디 본도네(1267-1337)는 14세기를 열면서 문학과 회화 분야에서 새로움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이후 15세기에 들어서서 건축, 조각, 회화 분야에서 브루넬레스키(1377-1446), 도나텔로(1386-1466), 마사초(1401-1428) 삼인방은 르네상스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가 밝아오는 시기에 교회의 상황은 조금 복잡다단했습니다.
11세기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 이후 인노첸시오 3세 교황(Innocentius III, 1198-1216 재위)은 교황의 권한을 확립했습니다. 그는 정치와 종교 면에서 황제와의 긴장과 대립이 고조되었던 시기에,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내적인 일관성으로 통일된 질서 원리를 구축하였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교 백성은 초자연적이고 초국가적인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은 교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서구 세계 전체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이렇듯 강한 교황권을 수립했지만, 교황은 세상의 부와 사치로부터 거리를 두었으며, 프란치스코회를 인준하고 제4차 라테란공의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인노첸시오 3세 교황 이후 교황권은 다시 약해졌는데, 한 세기가 지나 보니파시오 8세 교황(Bonifacius VIII, 1294-1303 재위)에 의해서 교황권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왕권을 강화하려는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IV, 1285-1314 재위)와 충돌하였습니다. 이때 교황은 세속 권력이 영적 권력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Unam Sanctam」(하나이고 거룩한 교회, 1302)을 반포하고 필리프 4세를 파문하였습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아냐니에 머무는 교황을 체포하도록 명령하였고, 저항할 힘이 없었던 교황은 여러 고초를 겪고 얼마 후에 사망하였습니다.
이후 추기경단은 프랑스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프랑스인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특히 클레멘스 5세 교황(Clemens V, 1305-1314 재위)은 리옹에서 필리프 4세가 참석한 가운데 착좌식을 거행하고 로마로 돌아가기를 포기한 채 1308년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의 거처를 정하였습니다. 교황이 로마에 머물지 않게 되자 로마 시민들은 이를 두고 ‘바빌론 유배’라고 비난했는데 여기서 ‘아비뇽 유배’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후 클레멘스 5세 교황은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체하고 죽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소송을 진행하는 등,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후임자 요한 22세 교황(Ioannes XXII, 1316-1334 재위)이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는 독일 황제 루드비히 4세(Ludwig IV, 1314-1347 재위)를 직무에서 정지시킨 것은, 교황권이 프랑스의 국익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외에도 아비뇽의 교황들은 교황청 유지를 위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그것으로 인해 교황청에 대한 세상의 평판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런데 1324년 루드비히 4세는 교황 반대자들을 궁정에 모아 놓고 요한 22세 교황을 공의회에 항소하였습니다. 그들은 교계제도를 비판하고, 교황 수위권의 신적 기원을 부인하였으며, 교회의 최고 권한은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공의회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황을 공의회에 종속시키고 공의회의 결정에 교황이 복종해야 한다는 이 ‘공의회 우위설’은 교회사에서 지속적인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는 교황의 보편교회에 대한 권한을 실추시켜서 독일 교회가 교황권에 등을 돌리는 빌미가 되었고, 결국 일어나서는 안 되는 서방교회 ‘대이교’(大離敎)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신자들 대부분은 교황이 로마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특히 스웨덴의 비르지타 성인과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인의 간절한 호소는 아비뇽 교황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다음은 가타리나 성인이 교황의 로마 복귀를 호소하는 내용의 서한 일부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진정한 후계자이신 그레고리오 11세 교황 성하께,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지금 겪고 있는 폭풍우 같은 시련과 교황 성하의 권위에 도전하는 몹쓸 무리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교황 성하를 돕기 위해 가까이 계십니다. 지체하지 마시고 교황 성하께서 시작하신 일을 마무리하십시오. 로마로 오십시오. 더 이상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성하께서는 예수님의 대리자이시므로, 당신의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로마로 돌아오십시오. 아무런 무기도 없는 어린양처럼 오셔서 사랑이라는 무기로, 적들을 물리치십시오.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십시오. 군사들의 호위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순한 양처럼 십자가를 들고 오십시오.”(장 콤비, 「세계 교회사 여행 I」, 577-579 참조)
결국 1377년 그레고리오 11세 교황(Gregorius XI, 1370-1378 재위)은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의 개혁을 시작할 틈도 없이 선종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에서 70년 만에 콘클라베가 열리게 되었고, 로마인 추기경단은 이를 놓칠세라 선거인단에게 압력을 가하여 1378년 봄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선출하였습니다. 프랑스 추기경단은 일단 로마에서 물러난 후 그해 가을 이번 교황 선거가 강압에 의한 무효라고 주장하며 새 교황으로 클레멘스 7세 교황을 뽑고 1379년 아비뇽에서 착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두 교황(교황과 대립교황)을 갖게 되면서 40년 동안의 대이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와 충돌한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300년에 처음으로 성년을 선포한 교황이지만 단테와는 악연으로 신곡의 지옥편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가 죽고 1305년부터 1377년까지 70년 이상 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시기를 보내고 이후 40년 동안은 로마와 아비뇽에 각각의 교황을 두는 극단의 분열 시기를 보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이 혼란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교회의 삶과 사명에 미친 영향을 몇 마디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그 혼돈 안에서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열심히 쓰고, 그리고, 지으면서 교회가 초대 교회의 삶을 본받아 새로이 태어나기(Rinascita)를 바랐을 것입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