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사랑

[하느님 계획 안에 있는 인간 사랑-몸 신학 교리] 비참하면서도 위대한 인간

이승훈
입력일 2025-03-05 09:06:00 수정일 2025-03-05 09:06:00 발행일 2025-03-09 제 3432호 19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원순수 회복, 정체성 회복 의미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보듯 하느님 통해서만 가능한 신비

고독-일치-순수는 인간 본성의 근본 원리로 서로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고독은 자신을 초월하여 너(altro-Altro)에게 건너갈 수 있는 장치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너를 만나 이루는 하나됨의 기쁨은 순수가 있어야만 영원히 가능하다. 이 본성의 가장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다. 우리를 찾아 하늘에서 오셨고(물리적·역사적인 몸), 교회 안에서 영원히 내어 주신 그분 안에서 찾은 몸의 의미다.(성체적인 몸) 그래서 몸의 길은 사랑의 길이고, 인간도 사랑도 신비로 가득하다.

인간에겐 땅(자연적인)의 가치를 열심히 찾아도 채워지지 않는 무엇이 있고, 반대로 초월적 가치를 부지런히 찾아도 닿지 않는 무엇이 있다. 자연적인 가치와 자아 초월적인 가치가 함께 있는 긴장감, 그 긴장감으로 끊임없이 성장 변화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요 매력이다. 사랑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적 사랑이 신적 사랑으로 변화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낳음 받았고, 행복하라고 몸을 주셨다. 때가 되면 하느님은 이 몸과 눈물만을 거두어 영광으로 완성시키실 것이다.

‘원순수’에 대한 가르침이 교리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원순수 상태를 회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복을 의미하는데, 루카 복음 15장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너무나 멀리 간 지방의 의미, 돼지들의 먹잇감이라도 먹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그 먹이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탕진됐음을 알았고, 자신의 정체성 회복은 아버지의 집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원체험을 기억하고 되돌아갈 용기를 얻는다. 원순수의 회복은 인간이 가야 할 진리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처음 상태를 회복했고,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회복하는 은총을 반복 체험한다. 이것이 하느님이 하늘을 탈출해 사람이 되신 신비의 궁극적 목적이다.(로마 8,23 참조)

20세기 들어 새로운 인간학이 세상에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정합적 인간학(Antropologia adeguada)이라는 새로운 단어로 인간을 정의했고, 교리서를 통해 선포했던 것이다.

새로운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페르소나(persona)라 정의한다. 우리말에선 인격, 사람, 인간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그 어느 단어도 본래의 뜻을 다 표현했다고 할 수 없다. ‘어떤 것을 통해서 연주하다’(per-suonare)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 연주하고, 남편은 아내를 통해 아내는 남편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단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페르소나의 개념이 삼위일체 및 그리스도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성됐고,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넓혀졌다. 인간 본성의 내적 특징이 강조된 ‘Persona’를 첫 글자 ‘P’가 대문자일 때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칭하는 ‘위격’으로, 소문자일 때는 대체로 인격으로서 인간을 의미하는 뜻으로 번역했다. 하느님과의 내적이고 역동적인 구조 안에서 하느님 모상으로서 인간을 생각한 개념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가운데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지만 해소될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그것은 ‘낳음’ 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 그 정점에 이르면 하느님을 만난다. 시작과 최종 목적에서 이해되지 않는 인간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고독-일치-순수가 인간 편에서 느끼는 내적 지각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초월성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인간을 보이는 모습 그것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그것이 나이고 너이고 우리이다.

Second alt text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