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문학과 형식 다른 2·3장 모든 교회에 “회개하라”는 예수님 메시지 담은 편지
요한묵시록이 묵시문학적 작품이라는 것에 이론은 없다. 그러나 2장과 3장의 일곱 개 편지는 묵시문학과 그 형식에 있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편지는 모호하지 않고 뚜렷하다. 온갖 상징들로 신비스럽게 꾸며가는 묵시문학과 달리 편지는 말하는 이와 말을 듣는 이가 대체로 명확하며 편지 속에 담아내는 메시지 또한 시의적(時宜的)이고 현실적이다. 그런 이유로, 요한묵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개 편지들을 읽는다는 건, 어쩌면 요한묵시록의 모호한 상징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구체적인 지렛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곤 한다.
편지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말하고픈 게’ 있어서다. 그래서 편지는 말하고픈 이와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을 품고 있다. 요한묵시록에서 말하는 이는 ‘사람의 아들’(묵시 1,13)이다.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의 대표적 인물이 ‘사람의 아들’(다니 7,13-14)인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 사용해 왔다. ‘사람의 아들’은 천상의 신비를 지상의 현실 속에 밝히고 드러낸 종말의 대표적 인물이다. 예수께서 육화하셔서 하늘을 땅의 역사 안에 온전히, 그리고 굳건히 드러내셨기에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의 삶 자체와 비견될 만했다.
요한묵시록 역시 일곱 개의 편지를 소개하기 전, 일곱 별과 일곱 등장대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의 아들’을 먼저 소개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이 편지를 쓰도록 요한을 재촉했다. 요컨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 ‘말하고픈 게’ 있어서 일곱 편지는 쓰여졌다.
‘사람의 아들’이 누군지 종말론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노력은 많다. 마지막 시대,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을 알리는 묵시문학적 인물로 정리되는 그러한 노력들은 사실, 모호하다. 구름에 싸인 듯 현실 세상과의 괴리감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형상 위에 여전히 맴돌기 때문이다. 요한묵시록이 소개하는 사람의 아들은 다르다.
이유인즉,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의 시작은 사람의 아들을 교회의 구체적 현실과 접목하여 묘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묵시 2,1)라고 소개된 ‘사람의 아들’은 교회 공동체의 주권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음을 가리킨다.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묵시 2,8)는 스미르나 교회의 몰락과 재생의 역사를 사람의 아들에 투사하여 교회의 운명이 사람의 아들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고 암시한다.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묵시 2,18)는 신심 있는 티아티라 교회의 신자들을 더욱 격려하기 위해 다니엘서에서 말하는 신적 보호의 전통적 표상들을 사람의 아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사람의 아들’은 믿은 이들의 현실적 삶 안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육화’를 확연히 드러내는 형상이다. 더 이상 모호하고 감추어진 하느님의 개입은 없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역사 속, 사람들 안에 하느님은 구체적인 캐릭터로 다양하게 스며든다.
그럼, ‘말을 들어야 할 사람’, 편지를 전해 받는 사람은 누굴까. 요한묵시록의 일곱 편지를 받는 이는 ‘천사’다. 대개의 주석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천사론’을 유다 전통과 다른 맥락에서 짚어내는데, 바로 이 구절 때문에 그렇다. “이러지 마라. 나도 너와 같은 종이다. 예수님의 증언을 간직하고 있는 너의 형제들과 같은 종일 따름이다.”(묵시 19,10)
요한묵시록의 천사는 천상의 구별된 존재가 아니라 지상의 형제적 관계 안에 배치된다. 천사를 인간의 처지에서 이해하는 요한묵시록의 천사론은 혁명에 가깝다. 천상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거룩하고 신비스런 메시지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요한묵시록의 천사는 절망스런 존재일 뿐이다. 더 이상 신비스럽거나 초월적인 메시지는 없다. 현실의 공동체가 겪는 일들을 정확히 직시하게 만드는 게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이고, 그 편지를 수령하는 이는 천사를 위시한 신앙 공동체다. 이미 천상의 천사는 지상의 인간들과 ‘형제’가 되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 덕택에 그리되었다.
일곱 개의 편지는 소아시아에 위치한 일곱 개의 신앙 공동체를 향해 쓰여졌다. 그렇다고 각각의 교회를 각각의 사건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는 없는 듯 하다. 일곱 개 편지에서 공히 반복되는 구절이 발견된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묵시 2,7.11.17.29; 3,6.13.22) ‘여러 교회’로 번역한 것은 적확하지 않다.
그리스말 본문은 ‘그 교회들에게’(ταῖς ἐκκλησίαις)라고 되어 있고, 그런 이유로 ‘여러 교회’는 ‘일곱 교회’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 ‘일곱’을 완전 수, 혹은 가장 풍성한 수로 이해하는 묵시문학적 전제 하에, ‘그 교회들’은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신앙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는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우리의 주님이자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신앙 공동체에 공히 전해진 편지가 된다.
더불어 일곱 개의 편지는 그 형식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대략 이렇다. 사람의 아들이 각각의 교회 공동체 현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교회는 믿음에 관하여 얼마간의 부조리와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교회는 회개해야 하고, 회개한다는 조건 하에 여러 선물들이 주어질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일곱 개의 편지는 적혀졌다.
크게 보면,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또렷하게 드러나는 형식이다. 그래서일까. 일곱 개 편지의 시작마다 ‘~를 ~이가 말한다’고 반복하는데, 과거 예언자들의 상투적인 어투이기도 하다.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회개를 두고 요한묵시록의 편지들과 예언자들의 글들은 많이 닮았다.
일곱 개의 편지들을 읽어가다 보면 묵시문학을 모호함과 신비감으로 읽으려는 이들의 무모함을 상당부분 상쇄시킬 수 있겠다, 싶다. 회개하라는 구체적인 메시지를 마주하며, 묵시문학적 상징 뒤에 숨은 채 현실을 회피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차분히 우리 삶을 직시하려는 움직임이 회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 화려한 상징들로 판타지와 같은 미래를 꿈꾸기보다 지금의 우리 삶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일이 믿음의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을 회개하여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지, 요한묵시록의 일곱 개 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