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일(묵시 1,3)

우세민
입력일 2025-01-20 08:58:02 수정일 2025-01-21 13:21:51 발행일 2025-01-26 제 3427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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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파르 드 크레이어 <요한묵시록을 쓰는 성 요한>. 박병규 신부 제공

요한묵시록 1장 3절은 요한묵시록을 읽고 나누는 이들을 소개한다. 우리는 다만 궁금해한다. 요한이 본 것은 무엇이며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증언하였을까하고 궁금해한다. 그러나 1장 3절에 이르면 우리의 궁금증은 당혹감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요한이 보고 증언한 것이 하나의 ‘기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요한의 환시가 ‘예언의 말씀’으로 읽혀야 할 글이 되었고 낭독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말씀으로 선포된다.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있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있다. 전례적 공동체를 상상해 본다. 아니나 다를까. 요한묵시록은 2장부터 3장까지 일곱 개의 교회에 보내는 일곱 개의 편지를 찬찬히 소개한다. 적힌 글 주위에 저자와 독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예언의 말씀’을 한 걸음 더 들어가 생각해 본다. 하나의 기록이 필요한 이유는 그 기록이 소개하는 사람, 혹은 내용의 부재(不在)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예수께서는 더 이상 여기에 ‘보이는 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이 본 모든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글이 필요하다는 식이다. 요한묵시록은 예수님과 요한의 부재를 ‘예언의 말씀’이라는 글로 탈바꿈하여 독자를 찾는다. 읽어야 할 ‘예언의 말씀’을 두고 요한이 본 것, 말씀의 실체를 다시 찾아 나서 하느님이든, 그분의 계시든 무엇이 되었든 찾아내려는 시도는 여럿 있었다. 

예컨대, 요한묵시록이 말하는 천년의 통치(묵시 20,3)를 역사의 한 시기로 굳이 특정하려는 시도 같은 것들이 있었다. 부재의 빈틈을 과거의 역사적 사실 관계를 재구성해서 성급히 메꾸고자 하는 이런 작업들을 ‘주석’(註釋)이라고 생각하는 데 우리는 익숙하다. 이른바, 글의 ‘지시적 차원’을 우리 교회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줄곧 강조해 왔다. 이를테면, 이 글은 저것을 가리킨다는 식의 역사 비평적 읽기 말이다. 

요한묵시록의 글을 읽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가리키는 바를 명확히 알게 된다는 것인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이교(離敎)나 사이비 종교에서 실제 사건으로서의 요한묵시록을 다루는 방법과 유사하다. 그리하여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것은 몇몇 주석가들의 역사에 대한 전문적 역량과 학업 성취도에 달려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과거에 혹은 미래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일이 생겨날 것이라는 추측의 근거로 주석이라는 걸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은 ‘예언의 말씀’이 가리키는 어떤 무엇(그것이 역사적 사건이든 미래의 환시든)을 향하기보다 독자의 형편을 더 헤아리는 듯하다. 독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사실 말이다. 읽고 듣는 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요한묵시록은 말씀이 글이 되어 읽히는 것의 ‘효과’로 독자의 시선을 이끌고 있다는 것. 이를테면,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마치 예언자처럼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행복하기를 글의 처음과 끝에서 당부한다는 것.(묵시 22,7)

본디 예언이라는 것이 그렇다. 지난 시절 고귀한 말씀이나 사건을 박제화해서 시대와 공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게 예언이 아니다. 예언은 현재에 대한 고민과 성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제안과 격려를 제공하는 것이 예언이다. 요컨대, 지금의 현실에 대한 의미 부여가 예언의 본질이다. 사실 요한묵시록 저자 역시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다.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는”(묵시 1,9) 이가 요한묵시록의 저자다. 독자와 함께 나누는 시간과 공간으로 저자는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그에게도 하느님과 그분의 계시는 부재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의 신앙인을 만나고 그들에게 자신이 보고 듣고 만났던 모든 것을 나누고자 한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여기서 ‘그들’은 저자의 동시대 인물로 제한될 수 없다. 요한묵시록이 ‘글’로 남아 있기에, 글을 읽는 가능태의 모든 독자들이 ‘그들’이라는 범주에 초대받았다. 하여, 요한묵시록을 읽는 일은 ‘주석’의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 읽고 나누고, 다시 읽는 신앙 공동체의 ‘해석’(解釋)의 일이어야 한다. 

요한묵시록 1장 3절에 ‘지킨다’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동사는 ‘테레오’(τηρέω)인데, ‘무언가 지속적으로 지켜내기 위해 늘 챙겨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언의 말씀인 요한묵시록은 현재의 일이다. 말씀을 지켜내고, 묵상하고, 고민하고, 성찰하고, 그리하여 지금을 어떻게 살아갈까를 찾아 나서는 일이 요한묵시록을 읽는 일이다.

그러므로, 요한묵시록이 요한이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현재의 의미를 붙들고 글과 독자가 격돌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기록된 것을 읽는 일은 글이라는 대상이 글을 읽는 주체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고 읽기의 주체가 글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저만의 논리를 세우는 일이라, 읽는 것은 고유하고 새롭다. 어좌에 앉으신 분이 나타나고 어린 양이 봉인을 뜯고, 하늘의 용이 추락하고 대탕녀가 무너지는 모든 일은 읽는 주체, 독자가 살아내는 삶 안에 또 다른 상징으로 환치되어 독자의 ‘행복’을 위한 길잡이가 된다. 

마침 요한묵시록의 끝에서 예수님은 1인칭 화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곧 간다. 나의 상도 가져가서 각 사람에게 자기 행실대로 갚아 주겠다.”(묵시 22,12) ‘행실’이라고 번역된 그리스말 ‘에르곤’(ἔργον)은 육체적 노동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요한묵시록을 읽는 것은 지금 내가 사는 것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겠다. 1장 3절의 ‘예언의 말씀’은 이렇게 독자 안에 육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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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