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수원교구 루카회 필리핀 의료봉사 현장(상)
[필리핀 말라본 박주헌 기자] 왜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본능이 있는 걸까. 자신을 건사하기도 벅찬 사막 같은 세상, 자신이 가진 물(사랑)을 선뜻 나누어 이웃의 목을 축이려는 애달픈 마음은 어디서부터 주어진 걸까.
수원교구 오산지구 의료인 모임 루카회(회장 최현철 미카엘·지도 김준교 토마스 신부)는 추석 연휴인 9월 14일부터 17일까지 필리핀 요셉의원(원장 김다솔 야고보 신부)과 함께 마닐라 수도권 빈민 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펼치고 왔다. 이들은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만나 회포를 풀며 쉬기보다 연휴를 희생하며 외국의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몫을 택했다.
의료 혜택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한 3박4일의 노고 속에 봉사자들 내면에는 어떤 사랑의 본능이 일깨워졌을까. 척박한 땅에 깊이 뿌리 내리는 풀꽃, 추위 속에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열악함 속에 더욱 강렬해진 이들의 사랑 실천의 이야기를 전한다.
■ 몸보다도 뜨거워지는 가슴
15일 새벽 1시, 전날 밤 인천에서 출발한 봉사단의 비행기가 마닐라에 착륙했다. 체감 온도 36도, 습도 87%의 무더위가 회원들을 맞이했다. 요셉의원이 있는 말라본시로 가려면 가랑비를 뚫고 밤길 37㎞를 미니버스로 달려야 했다.
요셉의원에 도착하자 시계는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여독을 달랠 틈은 없었다. 아침 일찍 현장으로 향하고자 여윈잠이라도 청했다. 밤새 쏟아지는 빗방울은 열대의 한낮 맹더위 속에 환자들을 돌보느라 쏟게 될 봉사단의 굵은 땀방울을 암시하고 있었다.
첫 의료봉사 현장은 말라본시 서쪽 나보타스시의 한 성당. 일대 빈민가의 거점과도 같은 곳이기에 260명이 넘는 환자가 모여들었다. 마른버짐이 핀 어린이, 다리를 저는 노인, 원인 모를 붉은 반점으로 피부가 뒤덮인 청년, 성긴 치열 사이 또다시 생긴 충치들을 감추지 못하는 중년…. 진료가 시작하기도 전에 접수대는 인산인해였다.
“2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침도 못 먹었어요. 충치가 너무 아파서 되도록 빨리 뽑고 싶었거든요.”
햇볕은 무자비하게 작열했다. 진료 공간에 들어찬 열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들과 소형 에어컨으로도 막지 못했다. 꽁꽁 얼려 뒀던 생수도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다 녹았다. 진료는 오후 3시가 넘도록 이어졌다.
폭염 속에서 봉사단은 각자 소임에 열중했다. 내과·가정의학과 봉사자들은 쇄도하는 인파의 소란 속에서도 타갈로그어, 영어, 손짓발짓으로 증상을 설명하는 주민들과 통역 봉사자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약국 봉사자들은 쌓여가는 처방전을 주시하며 혈압약, 피부 연고, 안약, 소염진통제 등 온갖 약을 실수 없이 챙겨 담느라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치과 봉사자들은 점심시간이 되도록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다. 치아 위생이 유독 좋지 않은 환자들이 많아 치과는 가장 진료가 오래 걸렸다. 같은 시기 요셉의원에 봉사를 온 다른 의사·치위생사 봉사단 7명이 함께해도 오후 3시가 넘도록 환자들 발길이 이어졌다. 봉사자들은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치료에 전념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죠? 가슴이 정작 몸보다도 뜨거울 수 있다니 말이에요.”
낯선 외국의 빈민 지역에, 루카회원들이 해마다 가능하면 연휴를 기해 찾아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원들은 “마음의 가난을 이미 살고 있는 빈민들에게서, 줄수록 차오르는 나눔의 역설적 행복을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내과 의사인 최현철 회장은 “대수롭지 않은 치료와 약에도 더없이 고마워하는 가난한 이웃들에게서 의료인의 진정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선풍기도 없는 야외에서 치과 예진을 맡은 천세환(안드레아) 총무는 “혈연의 가족보다 더 큰 가족을 만나 내면을 충전하고 가는 시간이기에, 치료받는 쪽은 오히려 우리”라며 웃었다.
■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이곳에서 마주한 가난은 평범함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더 가슴 아팠던 것 같아요.”
루카회는 16일 말라본시 동쪽 칼로오칸시의 한 성당에서도 의료봉사를 펼쳤다.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 260여 명이 진료받았다. 감기, 고혈압, 피부병 등 중환이라고까지는 말할 수는 없는 병을 앓는 환자가 대다수였다. 주민들은 그마저도 병원비, 약값을 낼 여력이 없어 이날의 무료 진료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번 루카회 봉사 지역은 마닐라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빈곤 지역인 나보타스시와 칼로오칸시였다. 메트로 마닐라 북부 지역인 이곳들에는 마닐라에 집을 구하지 못하는 도시 빈민들이 모여든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그들은 도시로의 출근을 위해 근교인 이곳에라도 무단으로 판잣집을 지어 살아간다.
새출발에 대한 절박함밖에 가진 것 없는 그들은 침수 피해가 잦아 사람이 살지 않는 강가에 주로 터를 잡는다. 집이란 그들에게 재산이 아니라 고된 노동을 하러 잠시 몸을 누일 공간이다. 정상적 주택이 아니기에 전기 설비와 상하수도도 갖춰지지 않았다.
하수 설비가 없어 오물이 그대로 고여 이와 빈대가 들끓고 피부병 등 각종 병에 노출된다는 게 문제다. 하수를 그대로 집 밖 길목에 흘려보내는 경우도 많아 전염병, 모기, 해충 피해도 심하다. 그 때문에 요셉의원을 찾는 사람 중에는 결핵환자도 많다. 이날만 해도 결핵 의심 환자가 6명 이상 왔다.
마닐라 도시 빈민들은 작은 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큰 병으로 키우게 된다. 배우지 못해 일용직을 전전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들의 평균 일당은 많아 봐야 400페소(한화 9500원가량)다. 캔 햄 한 통이 그 절반인 200페소 정도라 팍팍한 생계에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치료를 기대하는 사람은 애초에 없다. 동네 치과 발치 비용도 500페소 정도로 레진 치료조차 이들에게는 며칠 수입을 모두 투자해야 하는 큰 사치다. 그 때문에 살릴 수 있는 이빨도 차라리 발치를 청하는 환자가 많다.
아무리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한 삶. 이 모든 부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치료받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주민들의 뒷모습을 보며 봉사단은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머릿속을 헤매는 가난의 이유에 대한 답보다 소중한 걸 찾았다. 지구촌 이웃의 무거운 고통을 덜어줄 실천만을 더욱 열정적으로 해나가는 꿈이었다.
“이번 추석이 각별한 의미가 되길 바라며 가족 다 같이 루카회 봉사에 동참했다”는 가정의학과 의사 김삼철(사비노) 씨는 “진짜 가난이 무엇인지 자녀들이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며, 스스로 나누어지는 그리스도인다운 가치를 인생에서 간직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 씨의 자녀 김민수(요한 세례자·23) 씨·김이주(안나·19) 씨 남매는 “내가 가난한 이웃을 도운 게 아니라, 가난한 이웃이 우리에게 그들을 섬길 기회를 줬다”며 “사랑을 선물 받은 이 추억을 다가올 삶의 원동력으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