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의 아들이자 조선 최고의 학자 중 하나인 율곡 이이(李珥)는 1582년 황해도 감사로 부임했는데, 그곳에는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으로 양반집 딸에서 기생이 된 ‘유지’(柳枝)라는 소녀가 있었다. 총명하고 시도 잘 쓰는 유지는 율곡과 밤새워 이야기하는 말벗이 되었다. 얼마 후 율곡은 한양으로 떠나 둘은 이별했다. 그 후 어느날 율곡이 황해도 재령에 머물게 되었다. 밤이 깊은데 문을 두드려서 보니 성숙한 여인이 된 유지였다. 그리운 임을 보기 위해 험한 수십 리 산길을 걸어 찾아온 것이었다. 율곡은 유지와의 사연을 시로 남겼는데 “수용할 수 없는 사모의 정을 애틋하게 느끼면서, 천한 기생으로 고달프게 살아가는 유지가 걱정이 되고 만약 내세가 있다면 거기서 만나겠다”고 노래했다.
당시에 율곡이 유지를 소실(小室)로 두는 것에 걸림돌은 없었지만, 문제는 율곡의 건강이었다. 율곡은 자신이 갑자기 죽으면 어린 유지를 돌볼 수 없다는 책임감에 소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과 유지의 사랑을 담은 세 편의 편지 ‘유지사’(柳枝詞)는 이화여대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유지는 율곡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삼년상을 치렀고, 그가 죽은 지 25년이 지나서도 율곡을 그리는 시를 썼다. 유지는 평생 죽을 때까지 율곡을 일편단심 마음에 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께 일편단심한 인물로 느헤미야 예언자가 떠오른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의 술을 책임지는 시종이었다. 황제는 늘 독살의 위험이 있어 술 시종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어느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이 굶주리고 성전은 폐허로 형편없다는 소리를 듣고 통탄하며 슬피 울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왕에게 ‘고향 이스라엘’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고 작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황제는 느헤미야를 신뢰했기에 그의 예루살렘 귀환을 적극 도왔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지 두 세대가 지난 뒤였는데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가난에 시달렸고 정치가들은 여러 파로 갈려 자기들 이익만 챙기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황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며 백성들에게 힘을 내어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도록 이끌었다. 꼭 좋은 일에는 훼방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성전재건은 불가능하며 반대하고 심지어 느혜미야가 왕이 되기 위해 예루살렘 건축을 한다는 가짜 뉴스도 성행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일을 벌이지 않고 지혜롭게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성전 건립이라는 대공사를 밀어붙였다. 느헤미야에게 성전 재건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루살렘 성전 공사는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처럼 어려웠다. 전쟁보다 더 많은 방해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환난 중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돌파하는 강력한 지도자가 역시 필요하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