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1) 손골성지 : 파리외방전교회와 프랑스 교회

이승훈
입력일 2024-04-01 수정일 2024-04-02 발행일 2024-04-07 제 338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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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바다 건넌 선교사들 도움으로 이 땅에 신앙의 꽃이 피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시작됐지만, 박해를 딛고 신앙을 지키며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은인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프랑스교회의 헌신적인 도움은 한국 땅에 신앙이 깊게 뿌리내릴 수 있도록 큰 힘이 돼줬다. 프랑스교회는 어떻게 한국교회의 역사와 함께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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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트르 신부 동상과 손골성지 성당 전경. 사진 이승훈 기자

■ 파리 외방 전교회의 헌신

손골성지 주차장 뒤편을 보면 벽돌을 쌓아 탑을 만들어 그 위에 십자가를 올린 듯한 모습의 순교비가 있다. 바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를 기억하는 순교비다. 이 순교비는 프랑스교회와 한국교회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함께했음을 기억하게 해준다.

순교비 위에 세워진 돌십자가는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보내온 것으로, 도리 신부의 부모가 사용하던 맷돌로 만든 두 개의 십자가 중 하나다. 프랑스 딸몽본당은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하나는 도리 신부의 생가에, 다른 하나는 도리 신부가 사목하던 손골에 보냈다. 이 돌십자가를 계기로 손골성지 개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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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신부 순교비. 사진 이승훈 기자

손골은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를 비롯해, 여러 선교사들이 우리말과 풍습을 배우고, 사목을 하던 곳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모두 프랑스에 본부를 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이다. 초대 조선대목구장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를 시작으로 많은 사제들이 목숨을 걸고 조선 땅을 향했다.

병인박해 직전 조선에는 12명의 사제가 활동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이른 새벽에 기상해서 묵상과 미사 봉헌을 하고 저녁 늦은 시각까지 활동했다. 오메트르 신부는 편지를 통해 “주교님은 초보 선교사들에게 7시간의 수면을 명령하시지만, 정작 당신은 절대 4시간 이상 주무실 수가 없다”고 전하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1년에 2차례가량 교우촌들을 순방했는데, 이 기간에는 신자들의 교육, 고해성사, 예비신자들의 시험을 비롯해, 사목 관할지에 필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했다. 특히 선교사들이 이동 중에는 늘 상복을 입고 커다란 모자를 덮어썼다. 상복을 입은 이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 조선의 풍습 덕분에 서양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은 조선교회의 자립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매진했는데, 파리 외방 전교회는 원칙적으로 양성된 사제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온전히 현지 교회만을 위한 사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7세기 무렵까지 해외선교를 맡은 수도회들은 대체로 현지에 해당 수도회 분원을 세우는 형태로 이뤄졌다. 이는 수도원의 영성을 전하고, 본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지원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현지 교계제도 정착이나 복음의 토착화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 파리 외방 전교회는 전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지인들을 통해 현지에 복음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을 뒀다. 그래서 파리 외방 전교회 회칙은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선교사들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면 흔쾌히 모든 시설을 방인사제들에게 넘기고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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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성지 기념관에 전시된 파리 외방 전교회 활동 내용. 사진 이승훈 기자

■ 전교회의 후원

조선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은 비단 선교사들만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선교사 뒤에는 수많은 프랑스 신자들의 영적·물적 후원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활동에 가장 크게 협력한 단체는 ‘전교회’다. 전교회는 복자 폴린 마리 자리코가 프랑스 리옹에서 시작한 평신도 단체다. 전교회 회원들은 함께 모여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금을 모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전했다. 이런 후원금은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는 선교자금으로 활용됐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전교회 이사회가 내게 5600프랑을 기부했다”면서 “이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걸작이며, (프랑스 선교사들이 파견된) 선교지들의 성공을 열렬히 바라는 강력한 동기”라면서 전교회 연보 편집장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런 든든한 후원에 힘입어 선교에 필요한 비용과 물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조선까지 가서 생활하기 위한 경비는 물론이고, 성사를 위한 제의나 포도주, 기름, 신자들을 위한 성물, 선교사들의 생활용품에서 커피 같은 기호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원이 이뤄졌다. 이런 지원이 조선교회 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말할 것도 없다. 전교회의 지원 내역을 살피면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 해인 1865년에는 2만6789프랑을 조선교회를 위해 지원한 것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전교회 회원이 프랑스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조선교회의 신자들도 전교회 회원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서한을 통해 “1년 동안 181명의 신자를 전교회에 가입시켰다”고 밝히기도 하고, 복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도 전교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다는 일화도 전하고 있다.

프랑스 신자들과 조선의 신자들은 이 땅에 복음을 뿌리내리기 위해 한마음이었다. 피상적으로 마음을 모은 것 아니라 ‘전교회’라는 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선교를 지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전교회는 1922년 교황청 소속 기구로 승격됐는데, 바로 오늘날의 ‘교황청 전교기구’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