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전설 중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 섬뜩한 이야기가 있다.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악행을 일삼던 한 여자가 악행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였다. 재력이 풍부한 좋은 집으로 시집갔고, 아들을 셋이나 연거푸 낳는다. 그 아들들은 또 얼마나 잘나고 착하며 공부도 잘하는지… 구색을 갖추어 아들들은 효심까지 뛰어났다.
그렇게 엄친아로 자란 아들 셋은 어느 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나 나란히 모두 급제를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여자는 잔치를 준비하고 아들을 기다린다. 돌아온 아들들은 마당에 꿇어앉아 어머니에게 먼저 감사의 절을 올린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싶은데 바로 그 순간, 절을 하며 고개를 숙였던 아들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놀란 어머니가 고개를 들라 하지만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다가가니 그들은 하나씩 옆으로 쓰러졌다. 모두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었다. 이토록 기이한 일의 사연을 알기 위해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다 불렀지만, 아무도 그 기이한 죽음들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스님이 그 집을 지나가다가 이 죽음의 비밀을 이야기해 준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악행에 대해 하늘이 분노했고 그 벌을 내릴 때를 기다려, 그녀의 행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걸 빼앗아 버렸다는 것이었다. 두고두고 인간의 행과 불행에 대해 묵상하게 하는 이 이야기를 이번 성주간에 문뜩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십자가 아래에 서 계셨던 마리아를 자주 묵상한다. 십자가의 길 뒤에서 따라가셨던 마리아도 묵상한다. 마리아는 아마도 대충 오십 언저리, 요즘의 기준이 아니라 그때의 기준으로 하면 70이 다된 노파였을 것이다. 성경에는 예수께서 다른 여인들을 위로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예수 곁에 매달렸던 다른 강도들의 말도 기록되어 있지만 마리아의 말은 없다. 짐작건대 마리아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마리아가 슬픔으로 실신했거나, 마리아가 비명을 질렀거나, 마리아가 매 맞고 고문당하고 벌거벗긴 채 매달려 있는 아들에게 단 한마디라도 했다면 복음서의 기자는 분명 그걸 기록했을 테지만 마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사연이 많기로 치면, 하느님께 할 말이 많기로 치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마리아만 한 사람이 없을 거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단 한마디도.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던 예수가 제자 요한 더러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 곁에 서 계신 마리아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 인류 구원의 프로젝트에서 마리아는 마치도 엑스트라처럼 서서 예수의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아직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최고의 고통은 부모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어미가 되고 나서 이 생각은 더 굳어졌다. 심지어 죄 많고 악한 나도 ‘아이들을 대신해 네 목숨을 바치겠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성모님은, 원죄도 없으신 성모님은 그 최고의 형벌을 침묵과 순종으로 받았다. 죄 많은 우리도 잘 받지 않는 그 고통을. 그러므로 인간 중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어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뿐 아니라 죽어가는 아들 곁에서 우주 무게의 침묵을 견뎌낸 인간 마리아의 희생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을 예측하고 침묵으로 지켜봐야 했던 성부. 그는 예수의 아버지시기도 하셨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