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침묵하라!

이주연
입력일 2025-01-15 09:45:20 수정일 2025-01-22 09:05:09 발행일 2025-01-26 제 3427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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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중요시한 사막 교부들…현란한 말솜씨보다 존재 자체 강조
경청 위한 침묵은 순종과도 연결…말 할 때와 안 할 때 구별하며 내적 고요·평화 속에 머무르길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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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으로 물러난 그리스도인들은 침묵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4세기 수도생활의 중심지였던 이집트 켈리아 사막 의 유적지 모습. 켈리아 사막은 에바그리우스가 머물며 수도 생활에 전념했던 곳이다. 허성석 신부 제공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 배우는 두 번째 삶의 지혜는 ‘침묵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침묵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 자기표현에 익숙하고 자기주장에 거침없는 현대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침묵의 중요성

사막으로 물러난 그리스도인들은 침묵에 사로잡힌 이들이었다. 사막 교부의 금언에는 그들이 침묵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있다. 일례로,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테오필루스가 스케티스 사막을 방문했다. 형제들이 팜보 압바에게 대주교가 감화될 수 있도록 그에게 한 말씀 해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내 침묵으로 감화되지 않는다면, 그는 내 말로도 감화되지 않을 것입니다.”(테오필루스 2) 

팜보 압바의 이 대답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시사해 준다. 즉 ‘침묵 자체가 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사람을 진정으로 감화시키는 것은 현란한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다. 성숙한 인격과 고귀한 품성, 진실성, 내적 깊이를 드러내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일 것이다.

침묵을 지키는 법을 배울 때까지 3년 동안 입에 돌을 물고 살았다는 아가톤 압바의 이야기도 전해진다.(아가톤 15) 우리에게는 너무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막 교부들이 침묵을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왜 침묵을 그토록 중시하고 강조했을까?

침묵과 경청

침묵은 그 자체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지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침묵은 듣기 위한 것이다. 자기 안팎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분주히 떠들면서 우리는 결코 타인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들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침묵 중에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은 들음, 곧 경청과 연결된다.

침묵은 잘 듣기 위한 전제 조건과도 같다. 경청은 순종의 시작이고, 순종은 우리를 하느님께 되돌아가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무기다. 최초 인류는 불순종으로 낙원에서 쫓겨나 하느님에게서 분리되고 멀어졌다. 우리가 멀어진 하느님께 되돌아가 그분과 다시 일치되기 위해 우리가 잡아야 하는 무기는 순종이다. 따라서 침묵은 곧 경청을 위한 것이며, 더 나아가 순종과도 연결된다. 사막 교부들은 이런 이유로 순종을 강조했고, 순종의 시작인 경청, 경청의 전제인 침묵을 그토록 중요시했던 것이다.

사막 전통에 충실한 베네딕토 성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침묵의 중대성 때문에 아무리 좋고 거룩하고 교훈적인 주제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제자들에게도 말하는 것을 드물게 허락할 것이다.”(규칙 6,3) 또 “점잖지 못한 농담이나 쓸데없는 말, 웃음을 자아내는 말은 어느 곳에서나 절대로 금하고 단죄하며, 이런 담화를 위해 제자가 입을 여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이다.”(규칙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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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카시아누스는 애덕이 요구할 때 말하지 않는 경우를 ‘심술궂은 침묵’이라 표현하며 이런 침묵은 가장 포악한 말보다 더 고약하다고 말했다. 출처 네이버

심술궂은 침묵

베네딕토 성인의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우리는 고대 수도승들이 전혀 웃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는 인상마저 받게 된다. 하지만 고대 수도승들은 대화를 금지하지 않았고 유머도 지니고 있었다. 요한 카시아누스는 애덕이 요구할 때 말하지 않는 경우를 ‘심술궂은 침묵’이라 표현하며 이런 침묵은 가장 포악한 말보다 더 고약하다고 말하고 있다.(담화집 16,18) 실제로 말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공격수단이 될 수 있다. 

그는 또 ‘분노의 무거운 침묵’을 언급하며 “그 목적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겸손과 인내를 증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원한을 더 오래 간직하려는 것”(규정집 12,27,6)이라 말하고 있다. 포이멘 압바는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사람은 항상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까지 이야기를 하지만 참으로 침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유익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포이멘 27)

침묵은 공격과 방어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말해야 할 때 상대를 무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침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공격적이고 교만하거나 비겁한 침묵은 모두 심술궂은 침묵으로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침묵이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코헬렛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코헬 3,7) 사막 교부들은 코헬렛의 이 말씀에 따라 침묵이란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아는 것으로 이해했다. 말해야 할 때 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때 해서 늘 문제가 된다.

참된 침묵

침묵은 단지 외적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적 침묵으로 시작되지만 내적 침묵, 곧 마음의 침묵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가 아무리 외적 침묵을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엄청 수다스러울 수 있다. 또 이웃에 대한 비판이나 불평불만, 뒷담화로 우리 마음이 평화롭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참된 침묵이란 마음의 침묵, 곧 하느님 사랑으로 내적 고요와 평화 속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우리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침묵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침묵의 의미나 중요성을 모른 채 말이나 SNS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현하는 것이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겉으로나 속으로 늘 시끄럽고 불안하다. 침묵 중에 내면으로 들어가 고요와 평화중에 자신과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심화시키는 노력이 아쉬운 때다. 사막 교부들의 ‘침묵하라!’는 권고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씀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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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