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집회 3,2-6.12-14 / 제2독서 콜로 3,12-21 / 복음 루카 2,41-52
2024년의 마지막인 주일인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며,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삶의 터전인 가정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성가정의 모범은 축일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 성모 마리아, 성 요셉이 이루신 가정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구세주인 예수님과 성인들이 그저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성가정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자라고 삶의 경험이 쌓이자, 이분들의 가정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 이는 자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슴 아픈 삶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열두 살 이후 일찍 세상을 떠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이분들의 가정이 성가정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알린 하느님의 초대를 처음에는 두려움과 의구심을 가졌지만, 결국 “예”라는 응답으로 하느님 뜻을 살아가는 인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응답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알아서 모든 것을 하실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나 감정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초대임에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배운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으로의 초대를 신뢰했기에 가능했던 용기 있는 응답이었다고 느껴집니다.
아버지 요셉의 응답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약혼녀의 임신 소식에 너무도 마음이 상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는 인내심을 보였던 요셉에게 하느님은 파혼하지 말고 마리아와 함께 가정을 이루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초대를 하십니다. 요셉 성인이 이러한 쉽지 않은 초대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착한 성품 때문만이 아니라,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이를 향한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부부 관계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합니다. 한 사람이 성장함에 있어 부모가 끼치는 영향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대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성장에도 마리아와 요셉 두 분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면서도 온전한 인간이셨기에, 한 인간으로서 성장의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갖춘 어른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작고 약한 어린아이로 오셔서, 하느님의 총애뿐 아니라 사람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인생에서 겪어야 할 것을 겪으며 성장하셨습니다. 그 여정을 함께 한 이들이 바로 가정 공동체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느님께서 그분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신뢰하며 예수님과 함께하셨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졌던 부모의 깊은 신뢰 속에서 예수님은 어린 시절 날로 지혜와 키가 성장했을 것입니다.
성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이라고 느껴집니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며 따듯하게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자녀 역시 부모의 마음을 모른 채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예수님을 키우신 마리아와 요셉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감은 줍니다.
많은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기대를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선물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의 뜻과 다르게 살아갈 때조차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모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여정을 통해 성화 됩니다.
자녀 역시 부모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자녀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 동안 부모가 자신을 위해 애쓰고 헌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랑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갑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자녀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느님께 감사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부모님께 순종했다는 구절은 단순히 부모의 말씀을 잘 따랐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모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성장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하느님 사랑의 모형이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됩니다.
성가정은 단순히 서로가 함께 사는 가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그 뜻을 이뤄가는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되고 구체화되는 자리이며, 세상 속 교회의 출발점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하는 여정입니다. 이번 ‘가정 성화 주간’ 동안, 우리 가정 안에서 체험한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성가정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