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메디치가의 부흥

이형준
입력일 2025-04-29 11:16:03 수정일 2025-04-29 11:16:03 발행일 2025-05-04 제 3440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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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르네상스 문화의 진정한 후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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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들의 경배>. 아기 예수에게 선물을 바치는 인물이 코시모 데 메디치이고, 그밖에 메디치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출처 위키미디어

1429년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는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로부터 유럽 전역에 진출해 있는 메디치가의 은행을 물려받았습니다. 아버지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코시모는 유산을 지키기 위해서 피렌체의 정치에 개입하게 됩니다. 특히 피렌체의 대지주인 리날도 델리 알비치가 코시모를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1433년 코시모는 결국 피렌체 근교의 메디치 영지로 피신하였는데, 새 피렌체 정부로부터 시뇨리아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가문을 위해서 시뇨리아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즉시 체포되어 90미터 높이의 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알비치는 코시모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시뇨리아를 압박했으나 결국 추방으로 타협하였고, 코시모는 베네치아에서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이제 알비치는 주요 가문들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 그리고 소시민들은 여전히 메디치가의 편이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시기에 피렌체 대성당의 돔 공사 중이었고, 알베르티는 피렌체에 들어와서 활동을 막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르네상스의 열풍이 일기 시작했을 때였기에,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코시모는 비록 몸은 베네치아에 있지만 피렌체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비치는 인문주의를 그리스도교의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여 탄압했고, 시뇨리아를 무력화하여 민주주의를 무너트리려고 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이 반발하고 도시가 분열되는 등 내전의 긴장감이 커지자 알비치 집단은 피렌체에서 도망쳤습니다. 결국 시뇨리아는 1년도 못 되어 코시모를 귀환시켰고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를 환영하였습니다. 이후 피렌체는 일상을 되찾았지만, 실제 통치권은 코시모에게 넘어갔습니다. 코시모는 시민들이 원하는 평화를 보장해 준다면 그들도 그의 정치를 용인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코시모는 더욱 낮은 자세로 일하며 자신도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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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포 다 폰토르모가 코시모 사후 50년에 그린 초상. 통풍을 겪고 있는 코시모의 모습이 드러난다. 출처 위키미디어

이 시기 교회는 마르티노 5세 교황의 선출로 40년간의 서방교회 대이교를 마감하고 쇄신을 위한 공의회를 준비하였습니다. 1431년 교황은 바젤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후임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공의회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오스만튀르크의 공격을 받고 서방교회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목적으로 황제의 요청에 응하여 페라라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에 황제와 총대주교를 비롯한 700명 규모의 동방교회 대표단이 페라라에 도착하였고, 공의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일치를 이루지 못한 교리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페라라에서 서방교회만이 아닌 대규모의 동방교회 대표단이 함께 머무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웠으며, 더구나 재정이 열악했던 교황청은 더욱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네치아 망명 기간 중 베네치아 출신의 에우제니오 4세 교황에게 도움을 받았던 코시모는, 피렌체가 공의회의 참석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고 공의회에 들어가는 비용도 충당할 능력이 있는 도시라며, 피렌체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의향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교황이 코시모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피렌체 시민들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대표단을 맞이하고자 1439년 초에 코시모를 시뇨리아의 의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공의회의 개최가 가져다줄 엄청난 이득을 알았던 시민들은 공의회 참석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려고 준비하였는데, 피렌체에 들어오는 동방교회 대표단의 행렬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기이한 복장의 사제들, 다른 색의 피부를 가진 몽골인, 무어인, 아프리카 흑인, 그리고 원숭이, 화려한 깃털의 새, 사슬을 두른 치타 등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서방교회의 대표단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짐을 풀었고, 동방교회의 대규모 대표단은 메디치가를 비롯한 유력 가문들의 저택들에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공의회는 피렌체의 여러 성당에서 진행되었는데, 많은 교리적 논쟁이 있었음에도 1439년 7월 6일 피렌체 대성당 브루넬레스키의 돔 아래에서 양 교회의 대표가 교회 일치 교령에 서명함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발출(필리오퀘), 성체로 축성할 제병, 연옥과 지옥,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동방교회 대표단은 서방교회의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동방교회 내부에서 일치 교령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서방교회의 군사적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튀르크의 군대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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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시모의 친구 미켈로초가 건축한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 출처 위키미디어

하지만 피렌체는 공의회 덕분에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고 메디치가의 위상은 더 높아졌습니다. 당시 인문주의는 플라톤 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것 역시 코시모가 피치노에게 플라톤의 저서를 번역하고 보급하도록 지원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부패한 실베스테르회를 추방하고 산 마르코 수도원을 도미니코회에 맡겼을 때, 코시모는 수도원 건축의 모든 비용을 대고 그 설계를 친구 미켈로초(1396-1472)에게 맡겼습니다. 코시모는 ‘팔라초 메디치’를 지을 때도 먼저 브루넬레스키에게 설계를 의뢰했으나, 결국 브루넬레스키의 웅장한 설계를 반려하고 미켈로초에게 맡겼습니다. 세간의 이목을 끌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이었습니다.

코시모는 메디치가와 피렌체,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지만, 고질적인 통풍에 시달리며 병상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갔고, 결국 1464년 그가 사랑하는 가족과 신플라톤주의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잠들었습니다. 시뇨리아는 국가 원수에 해당하는 장례를 계획했지만, 코시모의 평소 바람대로 한 시민으로 산 로렌초 성당에 묻혔습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시뇨리아와 시민들이 코시모에게 바치는 영예를 거절할 수 없어서 그의 무덤에 ‘국부’(Pater patriae)라는 비문을 새기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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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