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박효주
입력일 2024-12-18 14:49:27 수정일 2024-12-24 11:52:42 발행일 2025-01-01 제 342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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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2025 희년이 밝았다. 희년으로 다가온 새해는 두려움으로 빗장을 걸어두었지만 새로운 시간을 향해 빼꼼히 고개를 쳐든 설렘으로 우리 안에 스며들었다. 서민의 일상을 조여오는 인플레이션과 불안한 정치, 그리고 전쟁의 공포 속에 있는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 그분께서 주신 새로운 시간을 맞으며 희망의 씨앗을 마음 중심에 심는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과 크고 작은 내전들은 우리 안에 있는 탐욕과 비정(heartless)을 성찰하게 했다. 미국과 G7 국가를 중심으로 한 친서방 진영과 중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반서방 진영 간의 이념과 체제의 경쟁이 부추기는 전쟁의 시작점뿐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계에서 드러난 부패는 그야말로 악이다. 그 자리에서 들끓는 탐욕의 작은 점들과 만나게 된다.

군사적 승리를 거둬 평화를 쟁취하려는 패권주의에 매몰된 나라들, 악의 자승자박이라 할 수 있는 비상계엄선포로 국민을 혼란에 빠뜨린 곳에서 평화는 벼랑 끝으로 밀렸다. 그러나 보라. 젊은이들이 일어섰다. 탄핵을 외쳐온 국민들의 응원봉 불은 꺼질 줄 모르고 어둠에 묻혀 있던 우리를 연결해 주었다. 

시국미사와 선언이 이어지면서 두려움은 다시 희망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 풀은 언제나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법이다. 아이러니는 「소년이 온다」의 저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그 축제와 우리가 맞닥뜨린 암흑의 시점이 겹쳐진다는 점이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음모가 꾸며지고, 그 틈바구니에서 무모하게 죽어가야 했을 힘없는 민중들은 내란수괴에게 무엇인지 묻고 싶다. 끈질기게 질문해야만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국제 관계 혹은 정치의 비틀림을 있게 한 근본 문제를 바로 보고 이를 풀어가기 전까지는 더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폭력적인 죽음으로 내몰릴 것이다. 거짓은 허용될 수 없다.

이 어둠 중에 다가온 희년이 주는 희망은 우리를 하느님의 평화와 질서로 초대한다. 희망은 어디에서도 희망할 수 없어 낙담하는 우리를 위로하며 용기 내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도록 격려한다. 어둠을 뚫고 설렘이 고개를 내민다. 어느 곳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지점에서 희망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유산인가.

신앙은 여정이다. 여정은 희망을 품고 목적지를 향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목적지는 바로 우리의 출발점인 하느님의 사랑이다. 사실 이 말이 이 비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눈앞의 일을 처리하느라 급급한 우리에게 얼마나 멀고도 추상적인 이야기처럼 다가오는가. 그러나 이보다 더 자명한 진실은 없다.

하루에 한 번쯤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나는 무엇에 의해 재촉받아 서둘러 발걸음을 떼고 있는지를 묻고 답하면서 꼭꼭 짚어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욕망의 온상인 패권주의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이 혼돈의 시대에 늘 뿌리를 건드려 경종을 울려 주시는 교종 프란치스코는 네 번째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를 반포했다. 이 회칙은 신앙인의 내적 동인인 예수 성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취약함으로 내몰린 이웃을 향하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을 살기 위해 고뇌하는 침묵의 극점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심하게 균열이 간 음지를 향해 단호히 촛불을 들 수 있다. 긴 침묵을 거쳐야만 탐욕과 시기로 폭력이 난무한 곳에서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 준엄한 자리에서 비로소 희년이 주는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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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1990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입회한 이은주 수녀는 1998년 종신서원을 하고 쌘뽈여자중고등학교와 계성고등학교에서 20년간 국어·사서 교사로 소임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마음의 길」(가톨릭출판사)을 집필했고, 현재 수녀회 서울 관구에서 도서관과 편찬직, ‘영성생활’ 편집 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