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봄의 어머니다. 봄이 태어난 까닭은, 겨울이 봄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땅속 깊이 탯줄을 이어놓고, 눈으로 젖물을 만들어 먹이면서, 봄을 키워냈다. 태교는 강인하고 끈질기게 이어졌다. 만삭이 다 된 어미는 대지를 흔들며 봄을 낳았다. 어머니의 숭고함이 있었기에 봄은 환희요, 감탄이요, 찬란한 꽃의 계절이 되었다. 공간과 시간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숨어있듯, 사라진 생명들이 다시 태어나는 봄은, 부활의 표지요, 천국을 향한 성사요, 예고편이다.
만 25년이란 세월을 시집살이로 보냈다. 시어머님은 희귀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셨고, 치매 시할머님과 홀시아버님이 내게 주어진 십자가였다. 힘겨울 때마다, 머리로, 마음으로, 보따리를 싼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묘하게 다가와 따뜻하게 안아주고, 다독이며,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신분이 계셨다. 그분은 스승 예수였다. 친절하신 그분을 알고 싶어 신학원에 들어갔다. 생활 리듬은 숨 가쁘게 이어졌지만, 그분을 향한 열정은 모든 일정들을 감수케 했다.
1학기 방학이 시작되자, 할머님의 치매는 점점 심해져 밤마다 전설의 고향을 찍으셨다. 한밤중에 큰 대야에 앉아 귀신처럼 머리를 풀고 앉아 계시질 않나, 또 한 번은, 한옥 용마루에 용케 올라 앉으셔서, 늙은 호박을 굴려 기와와 내 심장을 깨곤 했다. 계속 되는 치매 행동으로 내 진을 다 빼 놓으시더니 결국 자리에 누우셨다. 병문안 오시는 친지들 마다 임종을 점치셨다. 보름 뒤, 한 달 뒤…. 다 어긋났다. 2학기를 편히 다니려면, 방학 때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자, 하느님께 약이 바짝 올랐다. 성당에 따지러 갔다. 그날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가족, 마르타 축일이었다. “도대체 사실 만큼 사신 노인네를 왜 안 데려 가십니까, 25년 고생이 아직도 모자라십니까, 제가 가엾지도 않으십니까...” 라자로가 죽다(요한 11,1-44)에 관한 신부님 강론이 시작됐다.
“사랑이 클수록 상처도 큽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로부터 여러 번 기별을 받았어도, 라자로가 죽은 후에야 오셔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유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돌연히 회개의 은총이 소낙비처럼 내렸다. “그래 신학원을 포기하자, 할머님이 몇 년을 더 사신다 해도, 기꺼이 수발하리라.” 그날! 할머님은 내 품에서 96세로 귀천하셨다.
부활은 고난 뒤에만 체험 할 수 있는 신비다. 아마도 천국시민은 사랑을 인내로이 꽃 피운 자들만의 몫일 것이다. 예고편은 짧다. 이 생애가 가기 전, 우선 지상천국부터 누려야겠다.
글 _ 김경자 엘리사벳(수원교구 제1대리구 신남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