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희망 준 유딧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을 꾸려 가는 사람만이 삶의 행복을 체험한다. 디즈레일리(1804~1881)는 영국의 수상으로 유다인의 집안에 태어났다. 영국의 영토를 넓히고, 정당제에 의한 의회 정치를 실현했던 인물이라 존경받는다. 디즈레일리는 영리하고 재주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사실 디즈레일리 개인보다 그의 환경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는 유다인에 대한 나쁜 편견이 존재했는데, 그는 유다인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자만 영국 사회는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디즈레일리는 소설가가 되었고 차별이 비교적 적은 예술 분야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그는 실패를 거듭하며 진정한 영국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드디어 정치가로 변신했다. 디즈레일리가 주는 교훈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닥쳤을 때 굴복하지 말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실패에도 계속 반성과 사색을 통해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귀한 메시지를 남겼다. 누구나 삶에서 고통을 겪지만 이를 반성의 계기와 자기발전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유딧기는 실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유딧기는 토빗기의 경우처럼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딧기에는 유딧이라는 과부가 전쟁 중에 홀로 적진에 가서 적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시리아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는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이스라엘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해 완강하게 저항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당시 우찌야 왕은 닷새 동안만 기도하고 그 후에도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항복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이때 유딧이 등장해 위기에 빠진 유다인들을 구해냈다. 유딧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과부였으며 남편과 사별한 뒤 경건하게 살아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와 지혜와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우찌야의 주장을 반대했는데 이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며 하느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만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딧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 후 홀로 적진으로 향했다. 빼어난 미모로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유딧은 술에 취해 잠든 홀로페르네스의 죽인 후 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장을 잃은 홀로페르네스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유딧은 과거와 달리 고통을 우상숭배나 죄악의 결과라기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자 하시는 배려와 자애라고 해석했다. 유딧이란 인물은 많은 박해를 당하고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말씀묵상]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 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는 ‘로고스 찬가’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특별히 1장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곧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밤미사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과 그 내용을 이야기 형식으로 알려주었다면(루카 2,1-14), 낮미사에서는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정체, 곧 다윗 고을에서 태어난 구원자(루카 2,11-12 참조)에 대해 찬가의 형식에 맞추어 신학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강론지침」 115항 참조) 요한복음 1장 14절을 원문에 따라 직역한다면, 그 표현은 조금 달라집니다.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에 장막을 치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먼저 ‘살’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 ‘사륵스’는 ‘살’ 혹은 ‘육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말씀의 육화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하였고, 이를 통해 신성을 지니신 분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표현은 “장막을 치셨다”입니다. 그리스어 동사 ‘스케노오’는 ‘머물다’ 혹은 ‘거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어 명사 ‘스케네’와의 어원적 관련성을 고려하여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막은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이자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의 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장막 안에 현존하신다고 믿었습니다.(탈출 25,8-9; 40,34; 1열왕 8,10-11.27 참조). 말씀이 살을 취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육신은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이 머무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살을 취하신 말씀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동사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개념적 혹은 사변적 대상이 아닙니다. 로고스 찬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실제적이며 역사적 사건으로 알려주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그분의 신원과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 곧 ‘말씀’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세상 창조에 참여하면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요한 1,1-4 참조)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 특별히 1장 14절에서 우리는 말씀의 육화를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난’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며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한 분이시지만(요한 1,1-2), 당신이 소유하였던 부유함을 포기하시고 가난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천상의 권한과 영광을 포기하시고 힘없고 나약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요한 1,14 참조)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이가 되시어 초라한 구유에 머무르고자 하십니다.(루카 2,7 참조) 바오로 사도는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았고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풍요로움’은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하며, 이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경축하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구원의 신비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낮미사 본기도) 10여 년 전 유학 중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순례 일정 중에 베들레헴을 찾아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념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였던 헬레나 성녀의 관심과 주도 아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라고 전해지는 동굴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의 구조 중에서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 있었는데,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굉장히 좁고 작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머리를 최대한 숙이고 몸을 낮추지 않고서는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작은 이’, 곧 ‘가난한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복음적 가난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고, 나눔을 통해 실현할 수 있습니다. 가난의 상대 개념은 ‘부’(富)가 아니라, 재물이나 물건에 집착하여 놓지 못하는 ‘탐’(貪)입니다. ‘부’(富)를 나눈다면, 풍요와 충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 갈등과 분열은 부유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인색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소유한 것을 나눔으로써 가난을 직접 살아갈 때, 그 곳에서 살을 취하신, 곧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12-25

[말씀묵상] 대림 제4주일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사이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배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어머니의 만남이 두 개의 탄생 이야기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불임이자 가임기를 훨씬 넘긴 여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입니다. 이렇게 두 어머니 모두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신적인 개입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점이 닮았습니다. 루카복음은 두 개의 탄생 이야기를 다루며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요셉도 즈카르야도, 그저 조연일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아이의 이름을 짓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제 즈카르야의 불신앙을 그려내는 한편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찬 인물로 나타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믿음의 여인으로 그려냅니다. 사실 성경은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 대해서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거의 유일한 단서는 ‘마리아’라는 이름뿐입니다. 성경은 그녀의 신원이나 외적 정보에 관하여서는 침묵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들려주며 그녀가 지닌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전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순명’을 강조합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요셉의 ‘순명’을 강조한 것과 달리 루카는 마리아의 ‘순명’하는 모습을 더욱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브리엘 천사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상대도 요셉이 아닌 마리아입니다. 중심이란 단어와는 멀리 떨어진 주변의 존재들이 탄생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됩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성 예언자이자 모세의 누이인 미르얌과 이름이 같습니다. 이 사실이 그녀의 신원과 소명에 대해 어렴풋이 보여줍니다. 마리아 역시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시대의 예언자로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분임을 절묘하게 엮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향합니다. 자신과 똑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바로 행동하는 그녀의 반응이 ‘서둘러’라는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생명, 그리고 믿음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쁜 소식은 땅에서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선포는 목동들의 반응을 일으켰고, 마리아를 행동케 하였습니다.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으로 간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습니다. 엘리사벳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녀의 잉태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성령의 충만함에 가득 찬 엘리사벳이 찬송합니다. 선구자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복되다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서 노래하는 첫 번째 인물은 바로 엘리사벳입니다. 동시에 그녀는 마리아가 ‘모든 세대에 걸쳐 복되다고 일컬어질 분’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의 인사말은 두 번의 ‘복되다’는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복되시고, 두 번째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복되다고 칭송합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라는 엘리사벳의 인사말이 마음에 깊이 박힙니다. 이 말은 30년 후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강으로 자신을 찾아오자 세례자 요한은 묻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의 찬양이 공명이 되어 아들에게까지 닿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두 가지 신비로운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기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엘리사벳의 이중 축복 선언은 마리아와 그녀가 품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건넨 첫 번째 인사말인 ‘모든 여인들 가운데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는 성모송의 뒷부분에 자리 잡아 교회와 우리 모두의 인사말이 되어 오늘날에도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는 두 믿음의 거장,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에는 환희와 벅참이 가득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우리의 모든 만남에 구세주를 모셔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성모님은 오늘도 삶의 중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모시고 다가오십니다. 이제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가 우리의 노래여야 하겠습니다. 복되어라, 믿으신 분! 복되어라, 구세주를 품고 오시는 분!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징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12-2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죽음을 눈앞에 둔 시메온의 기도

“주여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 만민 앞에 마련하신 주의 구원을 이미 내 눈으로 보았나이다. 이교 백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시오,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되시는 구원을 보았나이다”(루카 2,29-31, 성무일도의 본문)라는 시메온의 기도로 성무일도가 하루를 맺습니다. 이 기도는 모사의 달인인 루카 복음사가가 ‘이방인들의 빛’이라는 희망의 인물을 다루는 제2이사야서의 신학을 이용해서 직접 지었으리라 추정됩니다.(이사 40,5; 42,6; 46,13; 49,6.9; 52,10 참조) 루카는 구약을 대표하는 노인인 시메온과 안나가 구약을 상징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하면서 구약과 신약을 매끄럽게 연결합니다. 두 노인을 통해 복음의 길이 시작되기도 전에 ‘세상 끝’까지 이르는 구원의 예표인 아기 예수님이 드러납니다. 루카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행전은 바오로 사도가 당시 세상의 끝 또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사도 28,31)는 말로 끝납니다. 루카는 이로써 시메온이 노래한 만민의 구원이라는 자신의 전망이 실현되었음을 기록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아우르는 루카의 전망에서 이방인들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빛을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서 복음을 집필한 루카이지만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배척하지 않고 통합합니다. 평생 메시아를 고대했던 노인은 죽기 전에 부르는 마지막 노래에서 ‘이제는!’이라고 외칩니다. 이 외침은 오랫동안 신앙 속에 희망을 간직했던 이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저출산 노령화 사회 안에서 젊은이들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노인분들은 무시당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경험과 지혜와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일찍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뒷바라지하시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시고 10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시는 나이 칠십 자매님이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라며 당신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그 노랫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날이 언젠가 오리라 기대합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끝기도를 바치듯이, 지난 반년 동안 연재를 마치면서 성경의 도움으로 기도에 대해서 함께 나눌 수 있었음에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세상이 제 자리를 찾기를, 권력을 지닌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모든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이룩하기를 기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2,34-35)라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성모님께 고통을 초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통스럽게 갈라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앙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풍파에 휩쓸릴 것인지, 세상의 풍파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앞으로 나갈 것인지는 신앙의 선택입니다. 예상되는 온갖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루카의 전망에 기대어 여러분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합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희년에는 로마 성문만 통과해도 직천당이다?

12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聖門)을 열면서 2025년 희년이 시작됐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희년이란 25년마다 돌아오는 거룩한 해인데요. 이 시기에는 특별히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로 모여듭니다. 무려 약 30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는데요. 바로 성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성문이 뭐길래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일까요? 여기서 성문이란 희년에만 열리는 ‘거룩한 문’(聖門)을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문만 통과하면 직천당”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면 3000만 명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 모두 모여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희년에 로마의 성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물론 희년의 가장 중요한 표징인 성문은 ‘천국의 문’을 상징합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부채를 탕감 받고 자유를 얻었듯이,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은총을 얻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구약성경에서 유래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50년마다 한 번씩 축제를 거행했는데, 이때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이 축제에서 유래한 희년을 선포하면서 교회 안에서 희년을 지내게 됐고 5번째 희년부터 성문을 여는 예식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요한 10,9)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성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이 말씀처럼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를 버리고 은총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물론 상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희년의 대사(大赦)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 받지만, 이미 지은 죄에 대한 벌은 갚아나가야 합니다. 이 벌을 면해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대사는 나를 위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돌아가신 다른 분을 위해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문을 통과해야만 희년 대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각 교구가 정한 희년 행사 참여나 순례지 방문, 자비의 활동 등으로도 대사를 얻을 수 있고, 또 희년 중 수도원, 병원, 요양원, 교도소 등에서 장소 이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며 주님의 기도와 신앙고백, 희년의 목적에 맞는 기도, 희생 봉헌 등을 통해서 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들어가야 할 문은 우리와 아버지 하느님을 이어주시는 ‘문’이신 예수님입니다. 성문은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지요. 희년에 성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성문은 희년에만 열리지만 예수님의 문은 회개하는 이들을 위해 언제나 열려있으니까요.

2024-12-2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교만 때문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우찌야왕

오래전 한 방송국에서 <태조 왕건>이란 사극이 방영되었을 때 정작 고려를 건국한 왕건보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던 한쪽 눈이 먼 궁예가 주목을 더 받았다. 나도 열심히 시청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한쪽 눈을 다쳤고 늘 말썽을 피우다가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어 혼란해지자 궁예는 891년 절에서 나와 한창 득세하던 세력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삼국사기」에서 “부하들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한 점을 보면 그는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다. 세력을 넓혀가던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궁예에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협조가 절실했다. 궁예는 군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중시하였다. 궁예는 카리스마와 동시에 애민 정신이 매우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불렀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인간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으로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 궁예의 무리한 왕권 강화책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공평무사한 인물이었지만, 왕이 된 후 민생파탄과 공포 분위기로 결국 백성들도 등을 돌렸다. 궁예는 쿠데타 현장에서 황급히 도망쳤고 분노한 백성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우찌야는 16살의 나이에 유다 왕국의 왕이 되어 52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선대 왕의 정신에 따라 나라의 국방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우찌야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중요한 성읍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찌야의 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우찌야는 백성들을 사랑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 그가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성공을 이루면 교만해지기 쉽다. 우찌야도 강하고 능력있는 지도자였지만 교만해져서 결국 몰락했다. 그는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두고 주위 사람들의 찬양을 받자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우찌야는 주변의 찬송에 취해 하느님의 율법마저도 자신이 마음대로 고쳐 실천하려고 했다. 이때 대사제들이 말렸지만 교만해진 우찌아는 하느님의 법을 거스렀다. 우찌야가 사제들에게 화를 내려 하자 한센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왕위를 이양한 우찌야는 별궁에서 홀로 한센병을 앓으며 쓸쓸히 지내다 죽었다. 인간은 자신이 약하거나 실패하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구하지만, 높이 올라가거나 성공하면 마음속엔 하느님이 사라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교만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마음이다. 교만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물거품이 되게 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1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주교복이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면 어린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산타 할아버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산타 할아버지, 바로 산타클로스는 성탄 전야에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인물입니다. 산타클로스라고 하면 붉은 모자와 붉은 옷, 그리고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한 음료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특히 이 음료의 로고 색깔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산타클로스의 옷을 빨간색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 산타클로스는 나라에 따라 묘사되는 이미지가 다릅니다. 러시아 등의 나라에서는 파란 계통의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산타클로스가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19세기 무렵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원래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를 알려면 ‘원조’ 산타클로스를 찾아야겠습니다. 산타클로스의 원조는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니콜라오 성인입니다. 니콜라오 성인은 4세기경 지금의 튀르키예 남해안에 해당하는 ‘미라’(Myra)라는 도시의 주교였습니다. 성인은 생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자선을 많이 베풀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성인의 전설 중에는 3명의 어린이를 살려낸 일화도 있지요. 이런 이유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의 나라에서는 성인의 축일인 12월 6일 즈음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이 풍습은 17세기경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이 풍습을 소개하면서 미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네덜란드어로 성 니콜라오를 신터 클레스(Sinter Claes)라고 부르는데요. 이 말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산타클로스(Santa Claus)가 됐습니다. 앞서 니콜라오 성인이 주교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주교복을 상징합니다. 음료회사가 산타클로스에게 빨간 옷을 입히기 전에도 이미 산타클로스는 빨간 옷을 입었던 것이지요.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네덜란드의 신터 클레스도 빨간 옷을 입고, 심지어 주교관 형태의 빨간 모자를 쓰고, 지팡이도 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니콜라오 성인이 ‘주교’였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콘이나 성화에서도 니콜라오 성인은 붉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이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는 성탄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고, 성탄에 떠오르는 색깔이라고 하면 역시 빨간색을 빠뜨릴 수 없게 됐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홍색 옷은 추기경이 입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추기경을 ‘홍의주교’(紅衣主敎)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붉은 색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한 피(血), 바로 순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거리를 수놓은 빨간색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떠올리나요?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2024-12-15

[말씀묵상]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세례자 요한이 세례 운동을 벌이던 당시에, 요르단강에는 세례를 주던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대개는 물로 씻는 세례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씻도록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원할 때 필요한 만큼 반복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일종의 정결례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요한의 세례는 달랐습니다. 요한은 ‘죄’를 씻는 것보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요구했지요. 요한은 세례를 청하는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찾아온 사람에게 일생에 단 한 번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요구한, 새로운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요한은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요한은 세리들에게 말했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3,13) 요한은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4) 오늘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가르침은,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다 십일조나 제물을 충실히 바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요한의 가르침은 그 시대 유다교 지도자들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요. 그래서 어제의 사람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요한의 가르침이 전통과 영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을 이끌던 두 기둥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신들을 돌보아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은, 그런 하느님을 기억하게 하고, 그런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은 사람들을 나눔의 삶에로 이끌며,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과 예물봉헌을 두고 요한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있다면 나누어라.’ ‘자신에게 주어진 몫보다 더 탐하지 마라.’ 요한은 모두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했습니다만, 요한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전통이 간직해온 정신을 당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각색했습니다. 역설적입니다. 가장 전통적일 때, 가장 혁신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의 가르침에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모두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하되, 각자의 삶에 맞는 구체적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되는 무엇을 두고, 적극적으로 나누라고 말합니다. 그는 옷 한 벌을 두고, 작은 빵조각을 두고 고군분투해온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꼭 쥐고 있던 것들을 놓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라고 시선을 돌립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만’을 요구하라 일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지금의 세무서 공무원같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세금징수업자였는데요. 로마제국에게 세금징수권을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징세권을 얻기 위해 세금보다 많은 돈을 제국에 바쳤기 때문에, 그들은 제국이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갈취하곤 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봉급’만으로 만족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고대의 기록(요세푸스 「유대전쟁사」)을 찾아보면, 당시의 군인들이 자주 범했던 잘못들이 언급됩니다. 도둑질, 강도질, 약탈 등, 그들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입히고 이익을 취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는 직업을 바꾸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청렴’을 요구했지요. 요한은 광야에 살면서도, 사람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분투와,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사람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각자의 상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짓밟고, 빼앗고, 죽이는 이야기로 가득하고, 우리 역시 그 굴레 안에 태어나 어느샌가 휩쓸려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며, 2000년 전 요한의 외침을 되새기는 이유는 거기에 있겠지요. 요한의 가르침은 가장 전통적이기 때문에 가장 혁신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삶의 자리에 어울리는 상식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제시한 새로운 삶의 이면에는, 그가 그리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3,17) 그의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만, 그가 그려내는 하느님은 여전히 엄한 심판자였습니다. 요한의 말과 태도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이유가 하느님의 엄한 심판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지옥이 두려워 천국으로 도망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림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워하고 또 기다리는 예수님도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엄한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아버지로 그려내셨습니다. 신앙은 두려움에 떨면서 지키거나 바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기쁘게 베풀고 나누는 삶으로 실천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살며,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가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2-15

[성경 속 기도 이야기] 성모님의 찬양 마니피캇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와 성모의 노래(루카 1,46~55)와 시므온의 노래(루카 2,29~32)는 성무일도의 아침기도·저녁기도와 끝기도에서 불리는 복음서의 찬가로, 구약의 오랜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매일 바치는 까떼나(사슬 기도)의 주요 부분인 성모의 노래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마주치는 곳에 자리합니다. 천사와 만난 마리아는 두려운 마음으로 믿을만한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마리아의 인사말만 들은 엘리사벳이지만, 태 안에서 아기가 뛰노는 것을 느끼며 성령으로 가득 차 외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가 수태 사실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그것이 알려지는 놀라운 순간에 마리아에게서 하느님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1사무 2,1~10)가 큰 영향을 끼치고, 시편 및 구약의 여러 대목을 인용하는 이 노래는 마리아의 찬양 시편입니다. 그 전반부는 메시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개인의 감사를, 후반부는 높이고 낮추는 세 개의 반대되는 움직임 속에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노래합니다. <1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1사무 2,1; 시편 34,3~4)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시편 35,9; 이사 61,10; 하바 3,1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창세 29,32; 1사무 1,11)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창세 30,13; 시편 72,17; 루카 1,45 참조)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신명 10,21)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시편 72,19; 111,9)  <2절>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시편 89,2; 100,5; 103,11.13.17)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시편 89,11; 118,15-16)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시편 147,6; 집회 10,14).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시편 107,9)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시편 98,3)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이사 41,8-10)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2사무 22,51; 미카 7,20) 마리아는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가난한 여인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마리아와 같이 겸손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며 그분께 자신의 빈손을 내밀며, 실제로 하느님이 당신의 이들을 구하시기 위해 ‘능하신 팔’을 뻗치신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당신의 계약에 충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은 불가능한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달리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나의 구원자’로 칭하는데, 이는 아들인 예수의 이름과 같고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와(루카 1,69.71.77; 2,11.30; 사도 5,31; 13,23 등) 동일합니다. 이름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닙니다.(하바 3,18; 마태 1,21; 루카 1,31 참조)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은 없는 이를 구원하는 분으로 드러나십니다. 하느님은 도움을 주시고 구하시는 분입니다. 이 노래는 끊임없이 백성을 향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충실하신 분이고 나를 알고 계시며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항구함에 걸맞은 응답은 결코 끊이지 않는 우리의 감사와 찬양일 것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

2024-12-15

[말씀묵상] 대림 제2주일

어느덧 대림 시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달력으로 보면 한 해의 끝자락이지만, 교회 전례력에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계절의 흐름에서는 가장 추운 겨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전례력에서는 새로워지는 시기입니다. 겉보기에 두 흐름은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게 합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 즉 ‘오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자로는 대림(待臨), 즉 ‘임하시는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다리다’라는 단어가 깊이 와닿습니다. 기다림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기다림은 참 묘한 감정입니다. 때로는 설레지만, 때로는 오지 않을까 두렵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을 동반합니다. 어릴 적에는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냥 즐겁고 설렜습니다. 성탄절의 즐거움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이 단순히 예수님의 생일 잔치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곧 구원을 기다리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경험이 쌓이고, 어려움과 세상의 암담함을 느끼면서 기다림에는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을까?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구원은 여전히 멀게 느껴질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이런 세상에서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런 질문과 의문들 속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한 뒤 성전에서 봉헌될 때, 그분을 기다리던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메온과 한나입니다.(루카 2,25-39 참조) 이들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렸기에 성전에서 부모와 함께 온 아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합니다.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시메온에 대해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라 말하고, 한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고 묘사합니다. 이로 보아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깊이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살아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신뢰와 의탁의 마음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품어야 할 마음이 아닐까요? 반면,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하느님 없이도 잘 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별로 기다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롭게도, 구원의 역사에서 기다림은 늘 하느님의 몫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늘 인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수많은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셨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는 척하면서도 실은 하느님께 가지 않고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줄 신을 찾을 뿐이었습니다. 오지 않는 인간을 기다리던 하느님은 기다림에 지쳐 결국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오시는 하느님을 가장 적극적으로 기다린 이는 앞서 말한 시메온도, 한나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인간을 위해 오시는 하느님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기도하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요한은 사제 즈카리야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처럼 성전에서 하느님을 기다리지 않고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왜 그는 황량한 광야에서 주님을 기다렸을까요? 왜 기존의 관습과 달리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촉구했을까요?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더 세상에 대한 절망과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과 회의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둠과 황량함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세상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닌 자신의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소리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세상에 하느님의 소리를 내라고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역사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환상보다는 짙은 어둠을 직시한 사람들에 의해 준비됩니다. 놀랍게도 요한의 외침에 많은 이가 응답했습니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과 기다림이 깨어났습니다. 요한은 ‘말씀’을 준비한 ‘소리’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말씀’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세상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광야에서 ‘소리’가 되어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숨죽이고 있던 ‘기다림’을 깨웁니다. 요한은 우리를 광야의 소리로 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막연히 넋 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향한 열망과 그분에 대한 기다림을 일깨우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오늘은 인권 주일이자 사회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일깨우는 ‘소리’가 되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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