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완전한 인간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 수용 지난 회에서 살펴보았던 헬레니즘 문화로부터 유래한 이원론을 따르는 인간관은 우리의 경험과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에 여러 차례 비판의 대상이 됐다. 결국 13세기에 이르러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극복되기에 이른다. 그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전적인 단일성을 지닌다는 성경의 관점을 12세기부터 새롭게 유행한 그리스 철학적 개념을 통해 정리했다. 이 작업은 성 토마스가 서방 세계에서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재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의 인간관을 계승해 변형시킴으로써 착수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과 육체라는 두 개의 불완전한 실체가 결합돼 비로소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완전 실체를 형성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영혼 그 자체만으로는 아직 인간이 아니고 육체와 함께 할 때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의 활동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지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을 통해 사유하고 배우며, 사물을 관찰하는 지각 행위는 영혼이나 육체의 한 측면에 제한되지 않고 육체를 통해서 영혼이, 영혼을 통해서 육체가 활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나름대로 고유한 도구를 가지고 자신의 창작 활동을 수행할 수 있듯이, 영혼도 각자 고유의 육체를 통해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에게 고유한 정신, 즉 사유 능력을 영혼과 구별했다. 바로 이 지성과 육체의 형상인 영혼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못함으로써 이후에 많은 혼란이 나타났다. 성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와 정신을 개방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불분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교정함으로써,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성경의 관점과 상응하는 인간관을 피력했다. 성 토마스의 통합적인 인간관 성 토마스는 “인간은 영혼만이 아니고 영혼과 육체로 결합된 어떤 것임이 명백하다.”(STh I,75,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다. 이어서 ‘영혼이 육체의 유일한 형상’(forma)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다.(STh I,76,1&3) 여기서 인간은 두 개의 실재로서 구성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요, 영혼은 육체를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실체적 형상인 이성적 영혼이 있는데, 그것은 다만 이성 작용들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생명을 유지하고 감각 기능을 수행하는 원리이기도 하다.(STh I,76,4) 성 토마스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 복수라고 가정하게 된다면 인간의 통일성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토마스에게는 영혼과 육체의 통일이란 부자연스러운 어떤 것일 수 없다. 영혼과 육체가 통일되어 있음은 영혼이 그 본성에 따라 활동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인간의 영혼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으나 생득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관념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필요하다.(STh I,84,6) 그는 영혼이 엄격하게 육체와 연관되어 있어서, 육체 없는 영혼이란 몸에서 떨어진 손과 같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 토마스에게서 육체는 영혼과 대조적으로, 즉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다. 육체는 영혼의 현세에서 존재하기 위한 조건으로, 육체가 없다면 영혼은 도대체 존재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체는 더 이상 영혼의 감옥(플라톤)이나 영혼이 전생에 지은 죄의 결과(오리게네스)가 아니라 선의 원천이며 영혼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은 육체를 통하는 과정을 거쳐서 진리를 발견하고 선을 사랑할 수 있으므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영혼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로운 것이다. 성 토마스의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은 가톨릭교회의 공적 교리로 인정받았다. 그 이후 교회는 인간을 물질적 육체와 정신적 영혼이라는 두 개의 구성 원리로 이루어진 합일체로서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통합적인 인간관이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받았음에도 플라톤적 이원론은 서구의 문화적 유산에서 지속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인간을 육체와 영혼의 결합체로 이해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통합적인 육체-영혼관이 지닌 의미 일상적인 체험으로부터 우리는 육체와 영혼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정신적으로 넘어설 수 있고 육체를 마치 대상처럼 관찰할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화될지라도, 그의 정신은 건강하고 젊을 수 있다. 여기서 인간 존재는 단 하나의 유일 원리로 소급시킬 수 없는 복합적 존재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는 두 요소를 하나로 환원하는 유물론자나 유심론자들의 일원론적 해결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을 세계와 관계하도록 해주는 육체와 그 육체의 제약성을 극복하도록 상승시켜주는 영혼은 긴밀한 상관관계 속에서 하나의 인간 존재를 구성하고 있다. ‘소우주’라고도 지칭되는 인간은 모든 영역 안에서 자신을 하나요, 동일한 인간으로 체험한다. 이러한 조화롭고 통합적인 인간관은 성경의 히브리적 사고에 잘 나타났으며, 성 토마스를 통해서 이론적인 체계를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불리는 인간이 서로 분리된 육체나 영혼이 아니라 단 하나의 통합된 인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로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바탕으로 타인이나 자연 사물을 구체적으로 접촉하고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간 존재를 현실화할 수 있고,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육체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이성적 영혼에 의해 통합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때, 참다운 인간 실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성 토마스는 인간의 내적, 개인적 영역뿐만 아니라 외적, 공적, 사회적 영역도 다루었다. 이렇게 그는 근대 데카르트 이후 널리 퍼져 있는 인간에 대한 이원론이 야기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사고틀을 제공해 줬다. 더욱이 이러한 해결책은 르네상스와 근대를 넘어 서양 사상 안에서 명시화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성찰에 기초를 제공해 준 ‘인격’ 개념의 이론적 토대가 됐다. 다음 회에서는 ‘인격’ 개념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2025-02-09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고찰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은 신에 대한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을 것 같지만, 그 안에는 인간에 대한 놀라운 성찰들로 가득하다.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을 제시하는 「신학대전」 제2부를 우리가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성 토마스가 지닌 ‘인간관’은 현대인들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인간관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형태의 행복을 찾으려 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격적인 행복 논의에 앞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먼저 고찰해 봐도 좋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성적 동물’, 또는 ‘생각하는 갈대’와 같은 표현들 안에는 함축적으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들어 있다. 바로 이 육체와 영혼의 이원성과 통일성에 대한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특히 이 문제는 이원적인 사고가 야기한 여러 종류의 부작용 때문에 오늘날 더욱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근대 이후 급격하게 발달한 과학 기술은 마침내 이를 창안한 인간마저도 ‘하나의 검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육체만을 분리시켜서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려던 서구 의료제도는 많은 발전을 이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코로나19 사태를 비롯해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더욱이 최근에 등장한 AI를 활용한 로봇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단 철학이나 종교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과학에서도 그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보는 이원론은 근대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도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다. 신화 등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영혼과 육체의 구별을 이론적으로 체계화시킨 것은 바로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이다. 그는 영혼이 사멸하는 육체에 속하지 않고 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봤다. 그에 따르면 영원을 인식하는 영혼은 지상의 현실 세계보다 먼저 존재하고 있었으며,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런데 그 영혼이 지상의 육체 세계로 하강하여 “마치 감옥이나 무덤 안에처럼, 육체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은 영혼이 진리와 접촉하는 것을 방해하고 제약하는 것으로 육체를 생각했다. 그래서 영혼과 육체의 결합은 본질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결국에는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혼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며, 육체를 거스르고 통제함으로써 그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플라톤적 이원론은 플로티노스에서 아우구스티노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서구 사상에 영향을 미쳤고, 근대에 들어서며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의 철학에서 새로운 관점을 획득한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에 도달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이 자아(自我)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탐구한 끝에 자아를 ‘사유하는 사물’이라고 규정했다. 그에게서 사유하지 못하고 시공간 안에 위치하고 있는 사물에 불과한 육체는 단지 기계와 마찬가지로 취급됐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발견한 ‘순전히 의식 안에 살고 있는 자아’는 육체적인 것으로부터 그리고 세계로부터 단절되어 버렸다. 데카르트는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다. 후대의 사상가들도 이 질문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차라리 한쪽을 편파적으로 더욱 강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영혼과 정신의 작용만을 강조하는 유심론(唯心論)은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육체적인 요소를 너무나 격하시켜 육체노동의 천시, 더 나아가 자본에 의한 노동 착취 등을 유발하게 된다. 또한 유심론이 극단적인 관념론으로 발전할 경우, 인간 존재의 개별성을 가차 없이 말살하는 독일의 나치즘과 같은 극단적인 전체주의로 변질될 위험성도 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영혼과 정신작용을 모두 육체로 환원시키는 유물론(唯物論)은 인간 고유의 영적 고귀성을 해치기 쉽다. 육체만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천민자본주의의 논리와 상업주의에 편승하여, 육체와 성의 상품화 등 왜곡된 형태의 육체 중심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육체와 영혼 각각의 고귀함을 인정하며, 이들 사이의 조화를 모색할 수 있을까? 성경의 통합적 인간관 많은 신학자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놀랍게도 성경 안에 담겨있는 통합적인 인간관 안에서 찾으려 한다. 성경의 통합적인 사유 방식에서는 인간을 육체, 영혼, 정신이 함께 합쳐진 전체로서 고찰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히브리 사상에 뿌리를 둔 통합적인 사고의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점차 그리스적 사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이 육체를 경멸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퍼져 있던 영지주의(gnosticism)는 물질로 표현되는 육체와 세계 창조를 경시했으며, 영혼의 승천만을 강조함으로써 육체의 부활을 사실상 부정했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은 교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았지만,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이원론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성적 영혼만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던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인간 영혼이 상부의 광명 세계에 속해 있었으나 자유 의지를 통한 범죄로 말미암아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교 최고의 스승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354~430)는 강하게 이원론을 주장하는 마니교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을 기능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만 파악했다. 이처럼 그의 육체-영혼관은 인간의 육체성을 경시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서구에서 고행과 금욕의 수행을 강조하는 수도 생활이 퍼져 가면서,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은 더욱 강조됐다. 육체는 저급한 것이고 인간 정신의 감옥이며, 육체의 쾌감은 천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원론적인 인간관에 의해 육체의 경시와 학대가 강화되고 있을 때, 성경에 나타나는 통합적인 인간관을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학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성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다음 회에서는 본격적으로 성 토마스가 제시한 통합적인 인간관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2025-01-19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왜 그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가?

가톨릭교회 신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교회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우리는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하지만, 정작 그의 저작을 읽기란 쉽지 않기에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학술적인 영역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성인이다. 성 토마스가 보여주는 행복의 길은 어떤 것일까. 성 토마스 탄생 800주년을 맞아 가톨릭대 박승찬(엘리야) 교수의 글을 통해 성 토마스가 전하는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정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과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참화를 겪었던 우리나라는 산업화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유례없이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뤘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보릿고개’라는 말은 사라졌고, 이제는 비만을 걱정하며 다이어트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해야 할 정도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됐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첫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문화적으로도 K-드라마, K-영화 등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성장과 발전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았다. 이런 안정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는 ‘소확행’, 즉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만족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 소박한 꿈은 2020년부터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로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K-방역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던 우리나라에서도 평범한 일상은 사치스러운 꿈처럼 여겨지는 시간이 2년 넘게 지속됐다. 간신히 팬데믹 상황을 벗어나서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자 기상 이변이 이어지고 있다. 기상 관측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폭염, 상상조차 못 할 폭설로 변한 첫눈 등이 우리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코로나19와 기상 이변에 이어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비상계엄’ 선포로 인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계엄군을 막아선 일반 시민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발 빠른 대처로 간신히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할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더 이상 각 개인이 ‘소확행’만을 꿈꿀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그렇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나빠지던 경제 사정은 정치적 불안정 때문에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위기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이가 추구하지만 도달하기는 쉽지 않은 ‘행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그리고 여전히 개인의 힐링과 워라밸을 추구하는 주관적 행복의 심리학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추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사회적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라고 지탄받던 MZ 세대가 비상계엄의 위중한 시기에 소중히 간직했던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와 추위에 떨면서 “계엄 반대”를 외쳤다. 이들은 더 이상 소극적인 삶의 태도만으로는 자기 개인의 행복조차도 방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하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추구되던 개인의 주관적 ‘행복’은 생각할수록 더 많은 의문을 만들어낸다.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발전은 인간들을 괴롭히던 질병과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줬다. 많은 현대인은 과학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낙관적인 꿈을 꾸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 안에서 전통적으로 종교가 강조하던 내세의 행복은 신기루에 불과하게 됐고, 현세적인 행복에 매몰되어 버린 수많은 대중이 양산됐다. 그렇지만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더욱 행복해졌을까?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의 승리를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별나게 낮은 행복지수와 높은 자살률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은 이런 추정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또한 인간 이성과 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뢰는 이미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사상에 의해 강하게 비판받았다. 근대 사상과 산업화가 야기한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이성과 이에 근거한 과학기술을 부정적으로 볼 수만도 없다. 이제 AI와 이를 탑재한 로봇으로 상징되는 과학 발전은 상상조차 힘든 놀라운 기회를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들이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정당하게 평가하면서도, 그 한계를 정확히 인지함으로써 이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다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기술의 발전을 활용하면서도 인간이 그 안에서 소외되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답해 줄 멘토가 바로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완성해 가톨릭교회의 스승으로 선포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4/5~1274)이다. “실상 그(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찰 속에서 이성의 요구들과 신앙의 힘이, 일찍이 인간 사고에 의해서 이룩된 가장 고상한 종합을 발견합니다.”(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78항). 성 토마스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는 확신에 차서 신학과 세속 학문의 고유한 영역과 역할을 인정했다. 이렇게 그는 ‘영원불변한 진리를 추구하는 항구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학문에 대한 존중과 개방성’을 가지고 인간 이성이 지닌 가능성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했다. 이러한 성 토마스의 가르침이 집대성된 작품이 바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 「신학대전」의 분량은 엄청나서 보통의 책 크기로 출판한다면 어림잡아 1만 쪽에 달하고, 현재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학대전」 번역 작업이 완료된다면 총 72권에 달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이 대작을 공식 가르침의 튼튼한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대전」을 통독한 사람은 전문가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 국내의 성 토마스 연구도 대부분 철학적 내용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신학대전」 제1부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체적인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엄청난 충고들이 담겨 있는 「신학대전」 제2부는 아직도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최종목적인 행복, 올바른 행위를 판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기준들, 이를 실천하는 것을 수월하게 해 주는 덕과 이를 방해하는 악덕들, 악을 피하고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구체적인 충고 등 무수한 보화가 가득 담겨 있다. 더욱이 2025년은 바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탄생한 지 8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해 이번 특별 연재에서는 「신학대전」에서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하고 있는 제2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물질적인 풍요 안에서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지 못해 방황하는 많은 이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여행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글 _ 박승찬 엘리야 교수(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국중세철학회장, 한국가톨릭철학회장 및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알수록 재미있는 그리스도교 이야기」(세종도서 우수교양도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 「신 앞에 선 인간」,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있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요강」, 「대이교도대전II」, 「존재자와 본질」, 「신학대전: 31 & 32(STh II-II, qq.1-13)」 및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을 라틴어 원문으로부터 번역했다.

2025-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