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입에 고기를 넣어주는 자식

어제는 아들의 두 번째 월급날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기를 얻어먹었다. 그 얼마 번다고 고기까지 사내라 하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람이 돈을 벌면 고마운 사람에게 고기를 사야 한다. 왜? 인간의 사랑이란, 아가페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입에다 뭘 넣어주는 거다.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부어줄 나이는 19세까지다. 그 이후엔 조건부로 바뀌어야 한다. 부모라고 해서 퍼주기만 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엄청난 사랑(돈)을 주셨던 분이다. 그 결과, 어른값도 못 하는 팔푼이가 되었다. 그러다 언니들의 피 토하는 투서로 친정에서 돈이 끊기고 바닥에서 몇 년을 벅벅 기어다니다 조금씩 정신을 차려 독립적인 인간이 되었다.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오리고기 가공공장에 다닌 적이 있다. 냉동고처럼 추운 작업실에서 오리의 껍질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는 일이었다. 너무 힘이 들어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금요일마다 손에 들려주는 훈제오리와 백숙용 닭이 날 달래주었다. 애들에게 이걸 맛있게 먹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어젯밤, 고기를 구워 내 앞에 놔주는 아들을 보며 참 좋았다. “저는 돈을 많이 벌 거예요”라고 말하는 아들에게 맥주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며 말해 주었다. “돈을 많이 벌면 물론 좋지. 하지만 그게 맘처럼 쉽진 않아. 중요한 건, 네 힘으로 열심히 살아내겠다는 다짐. 그거면 된 거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은 고기 1인분을 더 주문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낳아 키웠다. 목수인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가정을 지키고 보살피는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집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게 된 아들을 격려와 응원의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의 역할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한자로 자식(子息)을 이렇게 쓰는데 ‘息’ 자는 ‘스스로 숨을 쉬고 생존한다’는 뜻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식이라는 한자를 ‘自食’이라 말하고 싶다. ‘스스로 일 해 돈을 벌고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요즘 세상이 젊은 친구들에게 스스로 밥을 벌어먹기에 힘든 건 맞다. 최저시급이 만 원도 안 되고 직장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초봉이 200만 원도 안 되는 곳이 태반이다. 야간수당을 챙겨주는 곳도 거의 없다. 부당함에 대해 말하면 잘리기 십상이다. 일할 사람은 많고 일할 곳은 없다. 월급을 받아도 월세를 내고 나면 통장에 남는 돈도 얼마 없다. 큰돈을 벌기 위해 뛰어든 곳은 빚만 떠안기 일수다. 저 혼자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들에게 고기를 얻어먹는다. 자신을 먹여주고 키워준 부모 입에 고기를 넣어주며 뿌듯해할 그 마음을 아이가 느껴보길 바란다. 그 뿌듯함으로 힘든 세상을 견디고 다음 월급을 받을 때까지 다시 힘을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산다. 일하는 게 힘들고 고달파도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기 위해 버틴다. 그 힘으로 직장이 유지되고 나라가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과 고기를 입에 넣어주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自食’ 스스로 일해 밥을 먹고 살겠다는 마음. 그것을 믿고 지지하고 부모가 있다면 아이들은 결코 연약하지 않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2-25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나는 89학번이다. 무개념 무의식.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대학 문턱을 넘었다. 그때 그 시절, 세상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왜 시끄러운지 나에게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게스 멜빵 바지를 입고 톰보이 가방을 메고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테를 쓰고는 만화책에 나오는 얼빵하고 순진한 아이처럼 나풀나풀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찮게 가투(가두 투쟁)현장에 휩쓸려 아주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최루탄이 터지고 길가에 깨진 보도블록이 나뒹굴고 있었으며 숨도 못 쉴 만큼 지옥 같은 그곳에서 백골단이 학생들을 질질 끌고 가고 발로 차고 머리채를 잡아 두들겨 패고 있는 걸 봤다. 그 순간 나는, 이유가 있든 없든 무조건 도망쳐야 했다. 나는 미친 듯이 도망가다 좁은 골목길에 숨었고 골목 입구에는 주인 잃은 신발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흐느껴 울면서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도록 꼭꼭 숨어야 했다. 그런데 그날, 여학생 한 명이 죽었다. 이름은 김귀정, 성균관대 학생이었다. 백골단의 토끼몰이식 과잉 진압 작전에 떠밀려 압사당했다고 했다. 그때 내가 본 수많은 주인 잃은 신발 중에 그녀의 신발도 나뒹굴고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나는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 두들겨 맞지도, 어디로 끌려가 보지도 않았다. 안전한 금밖에 서서 구경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의식이 있는 척 흉내라도 내보려 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가식일 뿐이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분노를 삼켜본 적도 없다. 며칠 전에 벌어진 ‘계엄 해프닝’으로 우리 가족 모두 밤잠을 설쳤다. 서울로 직장에 다니는 아들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해야 하지만 밤새 잠을 설쳐서인지 몇 번이나 깨웠는데도 일어나지 못했다. 알람 소리가 5분 간격으로 시끄럽게 울려대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어떻게 해야 눈을 번쩍 뜨게 할까, 고민하다 아이 귀에 대고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내일이 월급날이야. 힘내자!“ 그제야 아들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씻으러 들어갔다. 아무리 일하는 게 힘들고 고달프다 해도 월급날 내 통장에 들어오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다시 한 달을 버티며 살아낸다. 아침마다 고단한 몸을 일으켜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뭐 대단한 걸 바랄까. 자식들이, 가족이, 별 탈 없이 안전한 나라에서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보장해 주지 못하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인가.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애쓰며 사는 국민들이 무슨 죄가 있나. 거리 곳곳에 폐업하는 가게들이 늘어나고 일을 해도 내 손에 돈이 안 들어와 고통 속에 살고 있는 국민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거리엔 주인 잃은 신발이 나뒹굴지도, 지랄탄이 터지지도, 백골단이 토끼몰이하며 학생들을 두들겨 패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살기 좋은 세상이 온 것 같지도 않다. 살아있다면 쉰 후반의 나이가 되어 나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언니.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스물네 살 꽃띠다. 그 시절, 전투경찰들이 쏜 지랄탄에 눈물 콧물 흘려가며 부당한 세상에 맞섰던 젊은이들은 어느새 중년의 나이가 훌쩍 넘어버렸다.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살아남았지만, 아직도 그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2-15

돈돈 하면 돈(豚) 된다?

누군가 내게, 일을 해 돈을 버는 것과 글을 쓰는 것 두 가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돈을 버는 것’이라고 대답할 거다. 먹고 사는 일이 내겐 그만큼 중요하다. 나이 쉰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젠 아이들이 다 커서 예전처럼 악착을 떨고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글이 돈이 되기 위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 워낙 책이 안 팔리는 시대라 거기에 기대 살 수는 없다. 가끔 원고청탁이 들어오긴 하지만 원고료가 언제 지급되는지 물어보지 못한 채 글을 써 보내기도 했다. 우리나라 정서상 돈 얘기를 꺼내는 건 왠지 속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서울 봉천동에서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서울에서 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봉천동 산꼭대기에 있는 빌라를 월세로 얻었다. 아토피가 있는 큰아들 때문에 반지하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남편 월급의 반이 월세로 들어가다 보니 늘 돈이 모자라 허덕였다.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 내가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의 월급 말고는 따로 돈이 들어올 데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 가뭄에 단비 같은 돈이 생겼다. 그게 바로 남편의 ‘강연비’였다. 지방에 가서 강연을 하면 교통비까지 해서 20만 원. 서울에서 하면 10만 원 남짓. 그 돈이 들어오면, 우리 가족은 돼지갈비도 사 먹고 애들 데리고 바람도 쐬러 갈 수 있어 그게 참 좋았다. 통장에 돈이 똑 떨어졌던 어느 날, 남편에게 강의 제안이 들어왔다.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성당에서였는데 보통 성당에서 강연을 하면 주임 신부님이 알아서 강연료를 챙겨주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쩔 땐 강사비를 못 받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어쨌거나 그날 아침, 애들도 나도 신이 나 남편을 따라나섰다. “아빠 일 끝나면 우리 맛있는 꼬기 먹자~~.” 미사가 끝날 때까지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과 기다리고 있는데 강연을 마치고 걸어 나오는 남편의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 “강사비는 받았어?” “별말이 없네. 좀 기다려 보자.” “뭐야, 그런 게 어딨어?” 성당 마당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주임 신부로 보이는 분이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애들 머리를 한 번씩 쓱쓱 쓰다듬어 주더니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했다. 저 말은 강연비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주말에 사람을 불러내 일을 시켰으면 당연히 줘야 할 돈이었다. 우리는 약속이 있어 그냥 가보겠다 말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나왔다. 그날, 아이들에게 돼지갈비를 사주지 못해 얼마나 미안하고 초라한 기분이었는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일을 하면 정당한 노력의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지만 혼자 속앓이를 하면서도 당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곱창집에서 일을 할 때, 외국인 노동자들이 몇 달째 월급을 못 받고 있다며 울분을 토하는 모습도 보았다. 가끔 TV 프로에서 우스꽝스럽게 써먹는, “우리 사장님 나빠요”라는 말이 실상은 참 가슴 아픈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원고료는 언제 입금되나요?’ ‘그 일을 하게 되면 얼마를 줍니까?’ 그건 돈에 대한 것이기 이전에 부당함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이다. 봉사나 재능기부 같은 일도 스스로 원하고 합의 된 이후에 하는 것이 맞다. 일을 시키는 상대가 그걸 판단하고 정해서는 안 된다.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은 종교만큼이나 성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2-08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주말이라 조용히 공원 산책이나 할까 싶어 나선 길, 저만치 앞에서 아저씨 한 분이 벤치에 앉아있는 젊은 남녀에게 뭔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얼른 지나가려 했지만 티 나게 빨리 걸은 게 오히려 눈에 띄었던지 아저씨가 방향을 획 틀더니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예수 믿으세요. 불신지옥! 아시죠?” 아저씨는 계속 따라오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엔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었지만 웬만해선 떨어져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조용히 산책하며 이런저런 생각 정리나 좀 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짜증이 확 솟구쳤다. “예수님 믿어야 천국 가요. 이거 읽어보면 다 나옵니다.” 화를 꾹꾹 참으며 처음엔 점잖게 말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그만 따라오세요.” 하지만 아저씨는 껌딱지처럼 내 곁에 달라붙어 계속 말을 시켰다. 할 수 없이 나는 아저씨 쪽으로 돌아서서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아저씨. 예수님 믿으면 진짜 천국 가요?” “그럼요. 천국 갑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저희에게...” “그러니까 언제든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갑자기 내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잠시 주춤하는 아저씨. 그 틈을 노려 쐐기를 박았다. “그럼 전 죽기 하루 전부터 믿을게요. 언제든 상관없다 그러셨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따라오지 마세요. 아셨죠?” “아니 그래도,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고...” 손에 전단지를 잔뜩 들고 서있는 아저씨를 바라봤다. 후줄근한 차림에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마른 얼굴. 언제든 천국이 보장된 삶을 사는 사람치고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아저씨 손에 들린 ‘불신지옥’ 종이를 받아주고 잠시 얘기라도 들어주면 될 일이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도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 신자지만 여태 살면서 누구에게 성당을 다녀야 구원받는다는 말을 해본 적 없다. 하물며 내 자식에게도 말이다. 첫째는 불교 쪽이 끌린다기에 그럼 절에 다니라 했고, 군대에 들어가 늘 배가 고팠던 둘째는 초코파이를 얻어먹기 위해 성당에 열심히 다녔다고 했다. 본인의 선택으로 믿기 시작한 종교가 아니라면 별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를 남에게 강요하고 불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는 건 일종의 협박이다. 그러므로 내가 좀 전에 한 행동은 ‘정당방위’라 볼 수 있다. 영화 ‘신과 함께’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승에서 진심어린 용서를 받은 자는 저승에서 누군가가 다시 심판할 자격이 없다.” 죄를 지었으면 죽기 전에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받아야 하는 거지, 실컷 죄짓고 살다가 예수님만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저 교회 목사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전단지에 나와 있는 번호로 전화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이 추운 날, 사람들 내보내 고생시키지 말고 당신이나 부끄럽지 않게 사세요. 믿지 않아 지옥을 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남들에게 무엇을 잘못하고 사는지 모르기 때문 아니겠어요? 올바른 종교는, 전단지 나눠주며 겁이나 주는 게 아니라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오늘 하루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 몸소 보여주는 겁니다. 신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지 구원 팔이나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라고 입을 놀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야산에 파묻힐 수 있으니, 일단은 안 하는 걸로. 아저씨는 불신지옥에 떨어질 나를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노상 전도의 발걸음을 돌렸다. ‘천국에 가기 위해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어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은 따르지 않으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공허한 헛소리가 종교라는 이름을 달고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평화로운 주말 아침을 망쳐놓지도 말고!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2-01

왜왜왜 우리가 왜!

수원역 북스 리브로에 주문해 놓은 책을 찾아 나오는데 멀리 버스 정류장에서 싸움판이 벌어진 게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단속반이 나와 노숙인들을 거칠게 쫓아내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빈 박스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누워있는 노숙인들이 모여있었고 어떨 땐, 어린아이가 엄마와 함께 앉아있기도 했다.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역한 냄새 때문인지 버스를 기다리며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 중 누군가 민원을 넣어서인지 가끔 단속반에서 나와 실랑이가 붙곤 했다. 한참을 고성이 오가다 그들 중 한 남자가 갑자기 웃통을 훌떡 벗어 던지더니 경찰에게 맞섰다. “왜 왜 왜 우리가 왜!!!”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으니 단속반도 더 이상 강압적인 행동을 하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웃통을 벗고 달려드는 아저씨와 경찰들 사이에 껴서 싸움을 말리던 노숙인 한 분이 갑자기 ‘왜왜왜 아저씨’의 뺨을 냅다 갈겼다. “정신 차려 새꺄!!!” 뺨을 맞은 아저씨의 눈이 벌게졌다. 계속 이렇게 맞서다가는 경찰서로 연행될지도 모르니 먼저 선수를 친 게 아닐까 싶었다. 우르르 몰려있던 노숙인 중 한 명이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던 박스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다른 누군가는 막걸리 통을 주웠고 내 곁에 서있던 할아버지는 분하다는 듯 버스 정류장 쇠기둥을 맨손으로 퉁퉁 쳐댔다. 거기서 쫓겨난 사람들은 수원역 지하도로 자리를 옮기거나 골목에 숨어서 단속반이 가기만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서 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왜 왜 왜 우리가 왜!”라고 부르짖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계속 마음을 긁었다. 아마도 이런 말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왜 우리가 여기서 쫓겨나야 하는지 말해 보란 말입니다!” 단속반도 거기에 서 있던 많은 사람도 그 질문에 어떤 답을 해줄 수 있을까. 민원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냄새나고 불쾌하니 당신들이 여기서 물러나는 게 맞다고 말한다면 그게 답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건 질문이 아닌 항변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같은 노숙인도 이런 식으로 함부로 쫓아내고 몰아내선 안 되는 거라는. ‘함께 사는 사회, 더불어 행복한 사회’ 이런 아름다운 문구들이 거리 곳곳에 붙어있지만 우리는 과연 그런 것들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불편함을 감내하더라도 다른 누군가를 배려하고 함께하려는 마음에서 오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며칠 전, 맨발로 찾아온 노숙인에게 신발을 사서 신겨 보낸 가게 주인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열심히 일해 신발값을 꼭 갚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는 이야기. 누군가의 이런 작은 선행 속에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신 주님을 본다. 거창한 무엇이 아니더라도 이런 작은 배려와 따듯한 마음이 누군가를 살리고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1-24

우리 어머니 신나셨네!

나의 세례명은 비비안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영세를 받았고 주일마다 꼬박꼬박 미사에 나갔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도 나는 성당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물로 기도를 드렸으며, 대학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기 전날도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하느님!”이라며 성당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친정과 시댁 모두 골수(?) 가톨릭신자라 결혼식도 성당에서 했고 두 아이 모두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새벽 미사 드리러 가는 소리를 듣고 자란 나의 신심은 한 마디로 굳건했다. 그랬던 내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성당에 발길이 뜸해지다 어느날부터인가는 미사 참례를 전혀 하지 않게 됐다. 주일미사에 나가지 않는 건 대역죄를 짓는 거라 생각하는 시어머님은 이런 나를 보며 가슴앓이를 하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어려서부터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자란 이유는, 하라면 더 하지 않는 내 성격을 부모님도 아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어머님이 자꾸 가라고 하니 더 가기 싫어졌다고나 할까. 거기다 변명을 조금 덧붙여 보자면 주말에도 일을 하고 있어 미사에 참례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나는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주말에도 일을 하고 있어서 미사에 참례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전에는 잡지사에서 편집 에디터와 기사 쓰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출퇴근 시간이 5시간 가까이 소요 되다 보니 도저히 못 하겠다 싶어 그만뒀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직도 내가 잡지사에 다니고 있는 거로 알고 계신다. 며느리가 편의점에서 밤을 꼴딱 새우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가슴 아파하실까 봐 그냥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11월부터 가톨릭신문에 칼럼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때가 된 것인가!’ 계속 핑계를 대며 성당과 멀어지고 있는 나를 하느님이 더 이상 두고만 보실 수 없다, 생각하셔서 이렇게 불러주신 게 아닐까, 하는. 미사에 참례하라며 어머님이 수시로 보내오는 문자 중에 제일 나중 것을 읽어 보았다. ‘어멈아, 이번 주부터는 주일미사 나가야 해. 일주일에 1시간을 참석 안 하면 어떡해. 내가 지쳐서 어멈 때문에 소화가 안 돼. 오늘부터 꼭 실천해.’ 어머님이 나 때문에 소화도 안 되신다는데 어찌하겠나. 편의점에서 퇴근하고 오면 잠이 쏟아지겠지만 주일미사에는 어떻게든 참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랜만에 동네 성당을 찾아 성모님께 기도를 드리고 예쁘게 꾸며져 있는 화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어머님께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냈다. ‘어머니, 저 이제 미사 열심히 나갈게요. 걱정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에게서 바로 답변이 날아왔다. ‘잘했다. 고마워. 빠지지 말고 잘 다녀. 너무 기쁘다 어멈. 사랑해.’ 우리 어머니, 완전 신나셨다. 평생을 신앙생활 안에서 살아오신 분이라 며느리가 미사에 참례 안 하는 것 때문에 속을 많이 끓이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 때가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누가 등 떠밀어서 억지로 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다고 제가 잘했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

2024-11-17

마르티니 마르티노의 무덤 앞에서 든 생각

마테오 리치가 쓴 「교우론」 의 첫 줄은 ‘벗은 제2의 나’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짤막한 한 줄이 동아시아 지식인을 강타했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 이른바 연암 그룹의 이 책에 대한 열광은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이들뿐 아니라 조선 지식인의 문집 속에 이 책의 독서 흔적이 뜻밖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그 자취를 따라가다가 다시 마르티니 마르티노(1614-1661), 중국명 위광국(衛匡國)의 「구우편」(逑友篇)을 만났다. 1599년에 간행된 마테오 리치의 책보다 60여 년 뒤에 나온 서양 우정론의 확장 버전이었다. 책을 읽는데 제2장 ‘참된 벗과 가짜 벗의 구별’에 수록된 삽화가 <부자간의 친구 시험> 또는 <진정한 우정>이란 제목으로 익히 알려진 우리 옛 설화의 근원임을 깨닫고 한 번 더 놀랐다. 아들이 친구가 많은 것을 자랑했다. 늙은 아버지가 아들의 우정을 시험하려고, 실수로 사람을 죽였으니 도와달라고 청하게 했다. 자신의 모든 친구가 도움을 거절한 뒤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가자 두말 않고 도와주겠다고 나섰다는 얘기였다. 우리나라 설화에서는 시체로 꾸며 거적에 말아 지게에 얹고 갔던 돼지를 안주 삼아 기쁘게 술자리를 갖고 파하는 엔딩이 덧붙어 있다. 「교우론」과 달리 「구우편」의 독서 흔적을 찾지 못해 답답했던 마음이 쑥 내려갔다. 마침 2023년 3월, 마지막 연구 학기를 맞아 하버드 대학교 옌칭연구소의 초청으로 6개월간 보스턴에 머물 기회를 가졌다. 그곳 도서관에서 나는 이 두 책에 관한 자료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엄청난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르티니의 중국에 관한 여러 라틴어 저작과 그에 관한 이탈리아어 전집 및 논문집까지 모두 찾아보았다. 서양에 남은 네 종류의 다른 초상화도 찾아냈다. 귀국 후 나는 동아시아에서 우정론 열풍을 불러온 「교우론」과 「구우편」을 정리 번역해서 「중국선비, 우정을 논하다」(김영사)를 펴냈다. 지난 2024년 6월 말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항저우로 건너가서 항저우 대학 근처에 있는 마르티니의 무덤을 찾아갔다. 큰 키에 영성이 넘치는 풍모를 지녔던 마르티니는 세상을 뜬 뒤 수십 년 동안 시신이 조금도 썩지 않아 그곳 신자들에게 신처럼 숭배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무덤은 문화대혁명 당시 파괴된 것을 명맥만 남겨 보존한 것이다. 입구에 ‘위광국 전교사 기념관’이란 글씨가 고딕식 원주 위 대리석 문루에 새겨져 있었다. 안쪽 패루에는 앞면에 ‘천주성교수사지묘’(天主聖敎修士之墓)라 쓰고, 뒷면에는 ‘아신육신지부활’(我信肉身之復活)이라고 새겨 놓았다. 공산국가에서 육신의 부활을 믿는다는 글이 새겨진 서양 선교사의 무덤을 문물보호단위로 관리 보존하고 있었다. 우중에 그것도 새 단장을 위한 공사 중이라 온통 어지러운 상태의 그의 무덤 앞에 선 감회가 남달랐다. 이들이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중국 선교의 노력이 그들의 저작과 함께 조선에까지 닿아, 생각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섭리의 손길로 이어진 경로에 대해 한동안 두서없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1-10

「성심보(聖心報)」와 「고려치명사략(高麗致命事略)」

「성심보」는 1887년부터 1949년 중국 공산화 직전까지 상해 서가회 천주당에서 매달 펴냈던 유서 깊은 신앙 잡지다. 발행인을 맡았던 심칙관(沈則寬, 1838-1913) 신부는 이 잡지에 조선 교회사를 순교자들의 자취 소개 중심으로 연재하였다. 1895년 6월, 제 97호에 실린 「고려치명」이란 첫 글에서 심 신부가 강완숙, 윤점혜, 문영인 세 여성 순교자를 소개한 것은 뜻밖이다. 내용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참고하였다. 이 글을 두고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심 신부가 조선 교회사의 큰 흐름을 살피는 내용으로 연재를 확장하면서 불어로 된 달레의 두꺼운 책 속에 숨어 있던 조선 교회의 여러 상황들이 현장 중계하듯이 이어졌다. 그들은 어떻게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 모진 박해의 시련 앞에서 어떻게 한 치의 의심 없이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나? 중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글에 소개된 조선 교우들의 순교 장면과 신앙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분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총 24회로 이어지는 대장정이 시작되어, 1898년에야 마무리 되었다. 이 글 묶음은 1900년에 「고려치명사략」이란 제목 아래 한문 222쪽의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이것은 중국인 신부가 기사본말체의 역사 서술 방식을 채택해 재정리한 최초의 한문본 한국천주교회사였다. 원본인 달레의 책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간명하고도 신선한 편집이었다. 지금부터 124년 전의 일이다. 잡지 연재 당시의 인명 표기는 엉망진창이었다. 강완숙은 성이 강(康)씨로 바뀌고, 윤점혜는 웅(熊)씨로 둔갑했다. 문영인은 맹(孟)씨로 써놓았다. 이승훈이 손봉의(孫鳳儀)가 되고, 이벽은 필의(畢義)로 표기하였다. 당초 달레는 이름을 알파벳 표기로만 적었는데, 중국과 조선의 한자음이 완전히 다른데다 심 신부가 조선어 한자 발음을 몰라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알파벳 표기에 가까운 중국음의 한자를 찾다 보니 벌어진 소동이었다. 막상 잡지 원고를 묶어 펴낸 「고려치명사략」에는 대부분의 이름이 바로 잡혔다. 최근 소진형 씨의 연구에 따르면 심칙관 원고의 인명 오류를 바로 잡아준 것은 뮈텔(1852-1933) 주교였다. 뮈텔 주교가 1898년 건강상 이유로 상해에 건너갔을 때 당시 『고려치명사략』의 출간을 준비 중이던 상해 서가회에서 뮈텔 주교께 인명과 장소 표기의 수정 검토를 요청했던 것이다. 뮈텔 주교는 이에 자신이 새로 입수한 「황사영백서」 등의 자료에 근거하여 인명 표기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었고 다른 자료까지 제공하였다. 그 결과 출판된 「고려치명사략」에는 달레의 책에 없는 정보까지 일부 첨가될 수 있었다. 더욱이 이 책이 1900년 당시 의화단의 난으로 중국 각지의 천주교회가 초토화되고, 신자들이 무자비하게 살육되는 와중에 조선 교우들의 순교 정신을 본받아 이 시련을 이겨 내자는 취지에서 간행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뜻깊다. 무려 124년 전에 간행된 최초의 한문본 한국천주교회사 「고려치명사략」은 소진형 씨의 연구 외에 이제껏 제대로 연구된 적이 없고, 자료 가치가 없다고 보아 번역도 되지 않았다. 놀랍고 부끄럽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1-03

초서(抄書)의 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제자들은 모두 제 이름으로 된 총서(叢書)를 가지고 있었다. 총서가 있느냐 없느냐, 많으냐 적으냐로 아끼는 제자였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처음 책 제목만 보았을 때는 이게 모두 그들의 저술인 줄 알았다. 실제로는 꼭 읽어야 할 내용을 초서(抄書)한, 즉 베껴 쓴 책이었다. 총서 대신 일록(日錄)이나 수초(手抄)로 제목을 붙인 경우도 있었다. 황상의 「치원총서」, 황경의 「양포총서」, 윤종심의 「순암총서」, 초의의 「초의수초」 등이 그러한 예이다. 다산이 깊은 정을 두었던 제자 황상은 그렇게 베껴 쓴 총서가 자기 키를 넘겼다. 현재 강진 다산박물관에 남아있는 것만 14책이다. 베낀 책의 목록을 보면 그 사람의 관심사가 드러난다. 시인의 삶을 살았던 황상은 각 시대별 주요 시집들을 총서 속에 온전하게 갖추어 놓았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어째서 베껴 쓰기 같은 비효율적인 공부를 시켰을까? 책을 여러 번 밑줄 긋고 메모해 가며 읽는 것이 낫지 무슨 맛에 책을 통째로 베끼게 했을까? 구하기 힘든 책은 전체를 베꼈고, 간혹 핵심만 간추려 썼다. 중간중간 자신의 생각을 남기기도 했다. 그 생각을 살피는 것이 또 중요한 나의 공부 거리다. 공부의 방법으로 이 초서 작업은 뜻밖에 위력적이다. 연암 박지원의 친필 필사본 중 「영대정집」(映帶亭集)이 단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첫머리에 적힌 친필 서문은 나중에 간행된 문집 어디에도 없는 글이다. 처음에는 글의 맥락이 눈에 잘 잡히지 않았다. 공책을 펴서 또박또박 옮겨적고, 전철에서 자리에 앉아 우리말로 옮겼다. 막히는 부분은 다음날 보고, 다시 또 보았다. 전에 미심하던 뜻이 다음번에 보니 명확하게 눈에 들어 왔다. 책을 눈으로 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어지럽게 메모한 번역을 다시 깨끗하게 옮겨 쓰자 이제 단락별 맥락이 소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덧붙인 메모가 다시 어지러워져서 깨끗한 종이에 한 번 더 필사했다. 앞의 것을 보지 않은 채 내 생각을 메모하자 의미가 한 단계 더 정열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도 나의 필사는 두 차례 더 이어졌다. 베껴 쓰기는 절대로 시간 낭비가 아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박아서 뇌리에 심는 과정이다. 일종의 되새김질에 가깝다. 기계적으로 영혼 없이 베껴 쓰는 일은 없다. 교회사 연구자인 박용식 선생은 책을 눈으로 읽지 않고 손가락으로 읽는다. 중요한 책은 무조건 통째 입력부터 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3책은 200자 원고지로 근 7000매 분량인데 다 입력했다. 한국 교회사의 주요 저작들이 그의 컴퓨터 안에 없는 것이 없다. 「사학징의」, 「칠극」, 「벽위편」까지 다 있다. 글을 쓰다가 예전에 본 자료가 생각나지 않아 물으면 얼마 안 있어 원문과 함께 대답이 돌아온다.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나는 빈 종이를 꺼내 초서를 시작한다. 문득 예전 읽었던 글을 찾아 베껴 쓰기도 하고, 논문을 준비 중인 글을 다시 베껴 쓰기도 한다. 또박또박, 따박따박 베끼는 동안 글과 대화하고, 글쓴이의 생각 속에서 헤엄친다. 그러고 나서 그 아래에 내 생각을 다시 메모해 둔다. 서류봉투의 뒷면이나 포장지의 뒷면에 적은 메모가 묘목이 되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큰 나무로 자라난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0-27

1811년 「동국교우상교황서」의 감동

지난 2024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 연구차 대만 중앙연구원에 머물렀다. 「신미년백서」로 더 알려진 「동국교우상교황서」(東國敎友上敎皇書)란 필사본의 원본을 확인하고, 주변 자료를 더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중앙연구원 부사년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간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누구도 실물은 보지 못한 듯했다. 이곳 도서관에서도 희귀본으로 분류되어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라는 것을 어려운 절차를 거쳐 굳이 원본을 꺼내서 여러 날 살폈다.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1801년 황사영 체포와 함께 백서가 압수되면서 신유박해 당시의 가장 생생한 증언은 통째 의금부 창고로 들어갔다. 초토화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 교회에 알려 도움을 청하려는 절박한 심경으로 10년 뒤인 1811년에 북경 주교와 로마 교황님께 올린 탄원서가 한문 원문으로 이 책 속에 들어 있다. 당시 글의 작성자는 황사영 백서를 보지 못해, 이 탄원서 속 조선 교회에 대한 기술은 그 이후에 전해 들은 것을 수습한 것이었다. 사제 파견 요청과 함께 신유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사적을 자세히 적고, 당시 조선 교회의 처지를 탄원하였다. 교황님께도 따로 편지를 써서 그 글을 교황청으로 보내줄 것을 북경 주교에게 요청했다. 책 뒤쪽에 북경 주교의 답장과 조선 교회의 재답장이 실려 있다. 이중 교황님께 보낸 자료는 윤민구 신부에 의해 한문 원본이 로마에서 확인되었고, 북경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포르투갈, 이태리어 번역본만 찾아냈다. 한문으로 된 원래 글은 오직 이 책에만 남아있다. 뒤쪽의 두 통 편지도 여기에만 실린 것이다. 대만의 교회사 연구의 대가인 고위녕 교수를 만나 여쭈니, 원래 상해 서가회 도서관에 있던 것이 중국 공산화 당시 예수회 자료가 필리핀 마닐라로 소개될 때 그리로 갔다가, 1960년대 초에 한문 자료만 대만에서 개교한 예수회 소속 보인대학으로 다시 보내져서 대만에 남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린 대만의 황덕관(黃德寬) 신부는 1985년 보인대 신학논집에 발표한 「한국교우와 한국천주교」라는 논문에서 1984년 당시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성인 시성식 미사의 감동적 장면을 묘사하면서 한국 교회사와 이 책의 가치를 설명하였다.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원본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며, 연필로 공책에 메모를 거듭하였다. 여주 지역 순교자들의 이름이 유독 많은 것으로 보아, 그 지역 신자가 작성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유사정(兪斯定)의 이름으로 보낸 네 번째 편지를 보고는 유스티노라는 본명을 썼던 조동섬의 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귀국 전 대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한학연구중심의 주최로 이 자료를 가지고 발표를 했다. 대부분 이 책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던 터라 도서관장과 관련 학자들이 참석해서 큰 관심을 표시했다. 처음 이 자료를 세상에 알렸던 황덕관 신부가 중국을 통해 서학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가 200년 만에 자신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발전을 이룬 것을 보며 우리는 왜 저들처럼 못하나 하며 반성과 분발을 촉구하던 논문 속의 목소리가 오래 생각 속에 맴돌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이제는 우리가 대답할 차례다. 글 _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과 교수)

202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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