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희망 준 유딧

고통을 극복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을 꾸려 가는 사람만이 삶의 행복을 체험한다. 디즈레일리(1804~1881)는 영국의 수상으로 유다인의 집안에 태어났다. 영국의 영토를 넓히고, 정당제에 의한 의회 정치를 실현했던 인물이라 존경받는다. 디즈레일리는 영리하고 재주도 많았는데 이상하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다. 사실 디즈레일리 개인보다 그의 환경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유럽인들 사이에는 유다인에 대한 나쁜 편견이 존재했는데, 그는 유다인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자만 영국 사회는 그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디즈레일리는 소설가가 되었고 차별이 비교적 적은 예술 분야에서는 인정을 받았다. 그는 실패를 거듭하며 진정한 영국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드디어 정치가로 변신했다. 디즈레일리가 주는 교훈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닥쳤을 때 굴복하지 말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만약 실패에도 계속 반성과 사색을 통해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귀한 메시지를 남겼다. 누구나 삶에서 고통을 겪지만 이를 반성의 계기와 자기발전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유딧기는 실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다. 유딧기는 토빗기의 경우처럼 교훈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딧기에는 유딧이라는 과부가 전쟁 중에 홀로 적진에 가서 적장인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아시리아 임금인 네부카드네자르는 홀로페르네스 장군을 이스라엘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기 위해 완강하게 저항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당시 우찌야 왕은 닷새 동안만 기도하고 그 후에도 하느님의 도움이 없으면 항복하자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이때 유딧이 등장해 위기에 빠진 유다인들을 구해냈다. 유딧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과부였으며 남편과 사별한 뒤 경건하게 살아가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와 지혜와 용기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우찌야의 주장을 반대했는데 이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행위이며 하느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만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유딧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를 바친 후 홀로 적진으로 향했다. 빼어난 미모로 홀로페르네스의 환심을 산 유딧은 술에 취해 잠든 홀로페르네스의 죽인 후 돌아온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장을 잃은 홀로페르네스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유딧은 과거와 달리 고통을 우상숭배나 죄악의 결과라기보다는 더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자 하시는 배려와 자애라고 해석했다. 유딧이란 인물은 많은 박해를 당하고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에게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커다란 희망의 아이콘이 되었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25

[말씀묵상]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 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요한복음을 시작하는 ‘로고스 찬가’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특별히 1장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곧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밤미사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과 그 내용을 이야기 형식으로 알려주었다면(루카 2,1-14), 낮미사에서는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정체, 곧 다윗 고을에서 태어난 구원자(루카 2,11-12 참조)에 대해 찬가의 형식에 맞추어 신학적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강론지침」 115항 참조) 요한복음 1장 14절을 원문에 따라 직역한다면, 그 표현은 조금 달라집니다. “말씀이 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에 장막을 치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먼저 ‘살’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명사 ‘사륵스’는 ‘살’ 혹은 ‘육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말씀의 육화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하였고, 이를 통해 신성을 지니신 분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두 번째로 살펴볼 표현은 “장막을 치셨다”입니다. 그리스어 동사 ‘스케노오’는 ‘머물다’ 혹은 ‘거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그리스어 명사 ‘스케네’와의 어원적 관련성을 고려하여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막은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성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이자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의 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장막 안에 현존하신다고 믿었습니다.(탈출 25,8-9; 40,34; 1열왕 8,10-11.27 참조). 말씀이 살을 취하심으로써 예수님의 육신은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이 머무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살을 취하신 말씀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동사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개념적 혹은 사변적 대상이 아닙니다. 로고스 찬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실제적이며 역사적 사건으로 알려주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로고스’라는 개념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그분의 신원과 본질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로고스’, 곧 ‘말씀’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으로 세상 창조에 참여하면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요한 1,1-4 참조) 요한복음의 로고스 찬가, 특별히 1장 14절에서 우리는 말씀의 육화를 통해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난’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이며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한 분이시지만(요한 1,1-2), 당신이 소유하였던 부유함을 포기하시고 가난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께서 천상의 권한과 영광을 포기하시고 힘없고 나약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요한 1,14 참조)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이가 되시어 초라한 구유에 머무르고자 하십니다.(루카 2,7 참조) 바오로 사도는 이 놀라운 강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았고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풍요로움’은 예수님으로부터 기인하며, 이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강생의 신비를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경축하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을 통해 드러난 구원의 신비에 참여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낮미사 본기도) 10여 년 전 유학 중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는데, 순례 일정 중에 베들레헴을 찾아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념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였던 헬레나 성녀의 관심과 주도 아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라고 전해지는 동굴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 탄생 기념 성당의 구조 중에서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 있었는데,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굉장히 좁고 작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머리를 최대한 숙이고 몸을 낮추지 않고서는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구유에 누워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작은 이’, 곧 ‘가난한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가난’을 실천함으로써 구원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복음적 가난은 재물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고, 나눔을 통해 실현할 수 있습니다. 가난의 상대 개념은 ‘부’(富)가 아니라, 재물이나 물건에 집착하여 놓지 못하는 ‘탐’(貪)입니다. ‘부’(富)를 나눈다면, 풍요와 충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 갈등과 분열은 부유함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인색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소유한 것을 나눔으로써 가난을 직접 살아갈 때, 그 곳에서 살을 취하신, 곧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_ 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12-25

[말씀묵상] 대림 제4주일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사이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배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어머니의 만남이 두 개의 탄생 이야기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불임이자 가임기를 훨씬 넘긴 여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입니다. 이렇게 두 어머니 모두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신적인 개입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점이 닮았습니다. 루카복음은 두 개의 탄생 이야기를 다루며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요셉도 즈카르야도, 그저 조연일 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아이의 이름을 짓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제 즈카르야의 불신앙을 그려내는 한편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찬 인물로 나타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를 믿음의 여인으로 그려냅니다. 사실 성경은 나자렛 처녀 마리아에 대해서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거의 유일한 단서는 ‘마리아’라는 이름뿐입니다. 성경은 그녀의 신원이나 외적 정보에 관하여서는 침묵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간직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들려주며 그녀가 지닌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전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순명’을 강조합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요셉의 ‘순명’을 강조한 것과 달리 루카는 마리아의 ‘순명’하는 모습을 더욱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브리엘 천사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상대도 요셉이 아닌 마리아입니다. 중심이란 단어와는 멀리 떨어진 주변의 존재들이 탄생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됩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구약의 여성 예언자이자 모세의 누이인 미르얌과 이름이 같습니다. 이 사실이 그녀의 신원과 소명에 대해 어렴풋이 보여줍니다. 마리아 역시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시대의 예언자로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분임을 절묘하게 엮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향합니다. 자신과 똑같이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바로 행동하는 그녀의 반응이 ‘서둘러’라는 구절에서 드러납니다. 생명, 그리고 믿음은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쁜 소식은 땅에서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선포는 목동들의 반응을 일으켰고, 마리아를 행동케 하였습니다. 서둘러 유다 산악지방으로 간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인사를 받습니다. 엘리사벳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그녀의 잉태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성령의 충만함에 가득 찬 엘리사벳이 찬송합니다. 선구자의 어머니가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복되다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루카복음에서 노래하는 첫 번째 인물은 바로 엘리사벳입니다. 동시에 그녀는 마리아가 ‘모든 세대에 걸쳐 복되다고 일컬어질 분’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의 인사말은 두 번의 ‘복되다’는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기에 복되시고, 두 번째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복되다고 칭송합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라는 엘리사벳의 인사말이 마음에 깊이 박힙니다. 이 말은 30년 후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위해 요르단강으로 자신을 찾아오자 세례자 요한은 묻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엘리사벳의 찬양이 공명이 되어 아들에게까지 닿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두 가지 신비로운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나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아기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엘리사벳의 이중 축복 선언은 마리아와 그녀가 품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건넨 첫 번째 인사말인 ‘모든 여인들 가운데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는 성모송의 뒷부분에 자리 잡아 교회와 우리 모두의 인사말이 되어 오늘날에도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는 두 믿음의 거장,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에는 환희와 벅참이 가득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우리의 모든 만남에 구세주를 모셔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성모님은 오늘도 삶의 중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모시고 다가오십니다. 이제 엘리사벳의 문안 인사가 우리의 노래여야 하겠습니다. 복되어라, 믿으신 분! 복되어라, 구세주를 품고 오시는 분! 글 _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징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12-25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교만 때문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우찌야왕

오래전 한 방송국에서 <태조 왕건>이란 사극이 방영되었을 때 정작 고려를 건국한 왕건보다 이상한 주문을 외우던 한쪽 눈이 먼 궁예가 주목을 더 받았다. 나도 열심히 시청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 한쪽 눈을 다쳤고 늘 말썽을 피우다가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신라 말기에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어 혼란해지자 궁예는 891년 절에서 나와 한창 득세하던 세력에 들어가 활동을 했다. 「삼국사기」에서 “부하들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라고 한 점을 보면 그는 귀족들의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다. 세력을 넓혀가던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정했다. 궁예에게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협조가 절실했다. 궁예는 군사적이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중시하였다. 궁예는 카리스마와 동시에 애민 정신이 매우 강한 지도자였지만, 정치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인 인내심, 친화력, 융통성을 갖지 못했다. 집권 후반기에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불렀으며, 관심법(觀心法)으로 인간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고 주장하고, 법봉(法棒)으로 신하들을 때려죽이는 등 광기를 일으켰다. 궁예의 무리한 왕권 강화책은 너무나 큰 부작용을 가져왔다. 공평무사한 인물이었지만, 왕이 된 후 민생파탄과 공포 분위기로 결국 백성들도 등을 돌렸다. 궁예는 쿠데타 현장에서 황급히 도망쳤고 분노한 백성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우찌야는 16살의 나이에 유다 왕국의 왕이 되어 52년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선대 왕의 정신에 따라 나라의 국방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우찌야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중요한 성읍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우찌야의 권력은 매우 막강해졌다. 우찌야는 백성들을 사랑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 그가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성공을 이루면 교만해지기 쉽다. 우찌야도 강하고 능력있는 지도자였지만 교만해져서 결국 몰락했다. 그는 모든 일에 성공을 거두고 주위 사람들의 찬양을 받자 교만한 마음이 들었다. 우찌야는 주변의 찬송에 취해 하느님의 율법마저도 자신이 마음대로 고쳐 실천하려고 했다. 이때 대사제들이 말렸지만 교만해진 우찌아는 하느님의 법을 거스렀다. 우찌야가 사제들에게 화를 내려 하자 한센병에 걸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왕위를 이양한 우찌야는 별궁에서 홀로 한센병을 앓으며 쓸쓸히 지내다 죽었다. 인간은 자신이 약하거나 실패하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겸손하게 구하지만, 높이 올라가거나 성공하면 마음속엔 하느님이 사라지고 교만해지기 쉽다. 교만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마음이다. 교만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물거품이 되게 한다. 훌륭한 지도자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이다. 글 _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15

[말씀묵상]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세례자 요한이 세례 운동을 벌이던 당시에, 요르단강에는 세례를 주던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대개는 물로 씻는 세례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씻도록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원할 때 필요한 만큼 반복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일종의 정결례였던 셈이지요. 하지만 요한의 세례는 달랐습니다. 요한은 ‘죄’를 씻는 것보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요구했지요. 요한은 세례를 청하는 사람에게 결단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찾아온 사람에게 일생에 단 한 번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요구한, 새로운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요한은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요한은 세리들에게 말했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3,13) 요한은 군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3,14) 오늘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가르침은,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다 십일조나 제물을 충실히 바치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요한의 가르침은 그 시대 유다교 지도자들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지요. 그래서 어제의 사람들이 요한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큰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요한의 가르침이 전통과 영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은 이스라엘 신앙을 이끌던 두 기둥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신들을 돌보아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은, 그런 하느님을 기억하게 하고, 그런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과 성전의 제물봉헌은 사람들을 나눔의 삶에로 이끌며,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율법과 예물봉헌을 두고 요한의 가르침을 되새깁니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있다면 나누어라.’ ‘자신에게 주어진 몫보다 더 탐하지 마라.’ 요한은 모두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했습니다만, 요한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전통이 간직해온 정신을 당대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각색했습니다. 역설적입니다. 가장 전통적일 때, 가장 혁신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한의 가르침에 큰 기대를 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획일적으로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모두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하되, 각자의 삶에 맞는 구체적 방식을 제시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생존’과 직결되는 무엇을 두고, 적극적으로 나누라고 말합니다. 그는 옷 한 벌을 두고, 작은 빵조각을 두고 고군분투해온 사람들이, 살아남으려고 꼭 쥐고 있던 것들을 놓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보라고 시선을 돌립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해진 것만’을 요구하라 일렀습니다. 당시의 세리는 지금의 세무서 공무원같은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세금징수업자였는데요. 로마제국에게 세금징수권을 돈을 주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징세권을 얻기 위해 세금보다 많은 돈을 제국에 바쳤기 때문에, 그들은 제국이 정한 세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갈취하곤 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봉급’만으로 만족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고대의 기록(요세푸스 「유대전쟁사」)을 찾아보면, 당시의 군인들이 자주 범했던 잘못들이 언급됩니다. 도둑질, 강도질, 약탈 등, 그들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입히고 이익을 취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는 직업을 바꾸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청렴’을 요구했지요. 요한은 광야에 살면서도, 사람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분투와,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사람들의 아픔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각자의 상식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이끌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짓밟고, 빼앗고, 죽이는 이야기로 가득하고, 우리 역시 그 굴레 안에 태어나 어느샌가 휩쓸려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며, 2000년 전 요한의 외침을 되새기는 이유는 거기에 있겠지요. 요한의 가르침은 가장 전통적이기 때문에 가장 혁신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삶의 자리에 어울리는 상식적인 가르침을 줄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제시한 새로운 삶의 이면에는, 그가 그리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도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3,17) 그의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만, 그가 그려내는 하느님은 여전히 엄한 심판자였습니다. 요한의 말과 태도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이유가 하느님의 엄한 심판이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지옥이 두려워 천국으로 도망가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움’과 ‘기다림’의 대림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워하고 또 기다리는 예수님도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엄한 심판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아버지로 그려내셨습니다. 신앙은 두려움에 떨면서 지키거나 바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기쁘게 베풀고 나누는 삶으로 실천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자비를 살며,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아가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글 _ 전형천 미카엘 신부(대건중학교 교목실장)

2024-12-15

[말씀묵상] 대림 제2주일

어느덧 대림 시기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달력으로 보면 한 해의 끝자락이지만, 교회 전례력에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계절의 흐름에서는 가장 추운 겨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전례력에서는 새로워지는 시기입니다. 겉보기에 두 흐름은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게 합니다. 대림절은 영어로 ‘Advent’, 즉 ‘오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한자로는 대림(待臨), 즉 ‘임하시는 것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기다리다’라는 단어가 깊이 와닿습니다. 기다림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복음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기다림은 참 묘한 감정입니다. 때로는 설레지만, 때로는 오지 않을까 두렵기도 한 복합적인 감정을 동반합니다. 어릴 적에는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냥 즐겁고 설렜습니다. 성탄절의 즐거움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탄절이 단순히 예수님의 생일 잔치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곧 구원을 기다리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경험이 쌓이고, 어려움과 세상의 암담함을 느끼면서 기다림에는 두려움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 우리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을까?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구원은 여전히 멀게 느껴질까?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니, 이런 세상에서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런 질문과 의문들 속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림 시기 동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까요? 성경에는 예수님이 탄생한 뒤 성전에서 봉헌될 때, 그분을 기다리던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메온과 한나입니다.(루카 2,25-39 참조) 이들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예수님을 기다렸기에 성전에서 부모와 함께 온 아기 예수를 기쁘게 맞이합니다.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시메온에 대해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라 말하고, 한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고 묘사합니다. 이로 보아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깊이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살아온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신뢰와 의탁의 마음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품어야 할 마음이 아닐까요? 반면,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하느님 없이도 잘 산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별로 기다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롭게도, 구원의 역사에서 기다림은 늘 하느님의 몫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느님은 늘 인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수많은 예언자를 통해 당신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라셨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답하는 척하면서도 실은 하느님께 가지 않고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줄 신을 찾을 뿐이었습니다. 오지 않는 인간을 기다리던 하느님은 기다림에 지쳐 결국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이렇게 오시는 하느님을 가장 적극적으로 기다린 이는 앞서 말한 시메온도, 한나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인간을 위해 오시는 하느님을 막연히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기도하고,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주님의 길을 마련하였습니다. 요한은 사제 즈카리야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처럼 성전에서 하느님을 기다리지 않고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왜 그는 황량한 광야에서 주님을 기다렸을까요? 왜 기존의 관습과 달리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촉구했을까요? 요한은 그 누구보다도 더 세상에 대한 절망과 인간에 대한 회의를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과 회의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둠과 황량함으로 가득한 광야에서 세상에서 떠드는 소리가 아닌 자신의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 소리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세상에 하느님의 소리를 내라고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처럼 구원의 역사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환상보다는 짙은 어둠을 직시한 사람들에 의해 준비됩니다. 놀랍게도 요한의 외침에 많은 이가 응답했습니다. 그들도 어딘가에서 희망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을 향한 간절함과 기다림이 깨어났습니다. 요한은 ‘말씀’을 준비한 ‘소리’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말씀’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세상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광야에서 ‘소리’가 되어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숨죽이고 있던 ‘기다림’을 깨웁니다. 요한은 우리를 광야의 소리로 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막연히 넋 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향한 열망과 그분에 대한 기다림을 일깨우는 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은 자신의 삶으로 보여줍니다. 오늘은 인권 주일이자 사회교리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일깨우는 ‘소리’가 되어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해야겠습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

2024-12-0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부 사랑에 비유한 호세아 예언자

우리나라의 가장 젊은 세대그룹인 Z세대(1997~2005년생)를 대상으로 실시한 어느 여론 조사 결과, “결혼은 안 해도 되고 자녀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응답이 50% 이상 나왔다. 우리 미래의 가장 큰 문제는 낮은 출산률이다. 결혼은 사회제도이고 민주사회에서 자유로운 선택사항이지만 문제는 결혼을 주저하게 만드는 사회적 요소도 많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더 큰 책임을 갖고 출산과 양육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결혼한다는 것은 자기 권리를 절반으로 하고 의무는 두 배로 걸머지는 일이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1788-1860)가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한 말이다. 그의 지인들은 쇼펜하우어를 성격은 고지식하지만 의협심도 강하고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라 기억한다. 그가 어느 파티에서 ‘남자와 여자는 누가 본래 영리한가’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당연히 여자가 영리하다. 여성은 남성과 결혼하는데 남성은 여성과 결혼하니까”라고 알 듯 모를듯한 답을 했다. 여성은 영리하니까 남성과 결혼하고 남성은 어리석기 때문에 여성과 결혼한다는 뜻이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 철학에 빠지고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그의 불우한 환경 탓도 많았다. 은행가였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어머니와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괴테같은 유명인들이 그녀의 살롱의 단골손님일 정도로 사교성이 많고 정열적인 여성이었는데 남성 관계가 복잡했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와 의절하고 프랑크푸르트의 하숙방에서 친구도 없이 사색과 집필에만 몰두했다. 안타깝게 그의 염세주의 철학도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다. 호세아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의 이름이다. 호세아는 하느님의 명령으로 혼인한 예언자이다. 호세아 예언자는 북이스라엘에서만 활동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전성기 때인 예로보암 2세 시대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아 북이스라엘이 멸망(기원전 721년경)까지 20여 년가량 활동했다. 호세아에게는 그가 하느님의 사랑을 부부간의 사랑에 비유해 ‘사랑의 예언자’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대혼란 속에서 백성들은 이방인의 신 바알에게 매달렸다. 호세아는 잘못을 저지른 아내를 하느님을 버리고 이방인의 신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에 비유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살아나려면 하느님을 다시 찾고 올바르게 섬기도록 회개해야 한다고 선포한다. 또한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연인 같은 분이라고 강조했다. 부부간 사랑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잘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부인을 사랑으로 맞아주는 너그러운 분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피와 눈물 나는 예언을 귓등으로 들은 왕과 백성들은 결국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진정한 부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신뢰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분위기는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08

[말씀묵상] 대림 제1주일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의 전례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마태 2,1 참조), 그리고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이미 베들레헴의 어느 한 작은 마구간 문 앞에 가있습니다. 대림초에 밝혀진 불빛을 보면서, 설레는 기다림 속에 “아기 예수님, 어서 오세요”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주일에 선포되는 복음 말씀에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분위기와는 다른, 곧 기쁨과 설렘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그 내용이 예수님의 종말론적 담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에(루카 22,47-53 참조)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며(루카 20장 이후 참조) 예루살렘과 성전의 운명, 이 세대가 처한 위기에 대한 말씀을 전하며 세상에 닥칠 일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루카 21,5-36 참조). 오늘 복음 말씀의 초반부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라는 예고가 중심을 이룹니다(루카 21,25-28 참조).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루카 21,25), 곧 하늘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표징들이, 그리고 바다에는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일 것인데,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징이 세상에 나타날 때,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루카 복음 21장 27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사람의 아들’의 등장에 대한 예고는 제자들(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후반부의 주제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루카 21,34-36 참조). 이 권고로 (루카 21,5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종말론적 가르침은 마무리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언제, 어떻게 도래할지 모르는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과 걱정으로 짓눌려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루카복음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 하나인 ‘기도’가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 상황에서 처할 수 있는 긴장을 완화시켜 일상적 삶에서 마지막 날을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합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주님의 오심은 이미 구약성경, 특별히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약속에서 예고되었습니다(「강론지침」 81항 참조).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구원 신탁 중 일부분인데, 여기에서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주신 하느님의 약속을 듣게 됩니다. 이 약속은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계약(2사무 7,11-16; 23,5; 시편 89,4-5 참조)에 기초하며,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예고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면, 다윗 왕조의 재건은 “정의의 싹”(예레 33,15)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서 “정의의 싹”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날 임금을 상징합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나무에서 새순이 올라 자라날 것입니다. 다윗 가문에서 후손이 나와 그가 세상에 정의와 공정을 세울 것이라는 예고는 세상에 울려 퍼지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예고는 남유다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치드키야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치드키야는 “주님은 나의 정의”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이름에 맞게 세상에서 공정과 정의를 세우지 못했고 유다의 패망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함락되자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갔는데(2열왕 25,1-7 참조), 이후 예리코 벌판에서 붙잡히고 맙니다(예레 39,5 참조). 오늘 독서와 복음은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우리 각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주님의 오심과 심판을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강론지침」 80항 참조). 이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라.”(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중) 이 신앙 고백의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2독서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더욱 자라고 충만하게 되길 바라며 기도했습니다. 그 사랑은 각자 사랑을 지니고 있을 때 가능하고, 하느님께서는 각자 지니고 있는 사랑을 풍요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성숙되고 풍요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흠 없이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랑이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 자라나고 충만하게 될 수 있도록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이때에 구체적 결심을 세워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격려하였듯이 오늘 우리를 격려해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1테살 4,1) 글_정진만 안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2024-12-01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지도자들의 불의 고발한 용감한 예언자 미카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존경한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민중의 지도자였다. 사춘기 때는 술과 여자에 빠지고 종교적 반항심도 생겼지만 심성이 착하여 두려움과 죄책감에 곧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간디의 인생에서 힌두교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물질적 욕망을 끊고 고통이나 기쁨, 승리나 패배에 동요되지 말라는 가르침이 인생의 방향타가 되었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간디는 인도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어느 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의뢰한 소송을 맡았는데 이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남아공에서 겪은 철저한 인종차별의 심한 부당한 차별로 그는 옥살이를 반복하며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다. 간디가 만약에 남아공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인도의 변호사로 인도의 높은 계급이 받아오던 대우를 받으며 편안하게 생을 마칠 수도 있었다. 역사의 물줄기는 참으로 신비하다. 미카 예언자는 기원전 8세기경 혼란의 시기에 남유다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미카는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을 정복할 것이라 예언했고, 남유다왕국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어렵고 힘든 국제정세에 놓이게 된다고 주장했다. 엄청난 힘과 잔인함으로 무장한 아시리아는 여러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며 이스라엘도 위기에 휩싸인다. 특히 이 무렵 이스라엘은 야훼 신앙마저 위기에 처하면서 더욱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다.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통치자들은 오히려 백성을 더 억압하고 끝을 모르게 부정부패에 빠져든다. 미카는 아시리아의 침공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피난하였는데 전쟁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위정자들이 저지르는 농민들에 대한 착취 현장을 목격하고 그들의 죄를 고발했다. 미카는 이스라엘에서 공공연한 부정과 불법을 고발하며 지도자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하느님의 분노를 전하고 있다. 권력을 자신의 사익으로 남용하는 고관들에 대해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일갈한다. 자신의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손 놓고 있는 사이 그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에게 돌아가 더 피폐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카가 예언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전대미문의 메시지였다. 그러면서도 미카는 하느님은 마지막 때 결국 남은 자들이 번영과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가져다줄 구원은 이스라엘 국가가 아니라 고통을 겪어낸 남은 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이다. 지금은 승승장구해도 시간이 지나면 불법과 부패는 결국 드러나 심판을 받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글_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영성심리상담교육원장)

2024-12-01

[말씀묵상]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오늘은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한다는 말은 곧 우리가 그분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시민임을 뜻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오늘, 수난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의 왕이 수난하는 왕, 생명까지 내어주는 왕, 심지어는 죽기까지 사랑하는 왕이라는 사실을 천명합니다. 공관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다스림’의 비유가 요한복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두 번 언급되기는 하지만(3,3.5), 요한복음은 십자가라는 왕위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강조하며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을 드러내는 것에 보다 초점을 맞춥니다. 또한, 공관복음에서 강조하는 하느님 나라는 미래의 일이지만 이미 현재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시간적 표현보다는 공간적 표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진리와 사랑이 머무는 하느님의 나라는 ‘위’로, 어둠과 거짓, 미움이 지배하는 영력은 ‘아래’, 흔히 ‘이 세상’으로 표현됩니다. 이 두 세계는 공존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문장 속 ‘당신의 나라’를 ‘어디에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당신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본질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여러 곳을 오가며 여러 사람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재판받으시는 장면은 의외성으로 가득합니다. 누가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평온한 데 비해 재판하는 사람들이 더 당황하고 당혹스러워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받는 사람의 죄보다 오히려 재판하는 사람들의 악함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라도의 재판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재판받는 사람이 빌라도인지 아니면 예수님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재판하는 빌라도는 피고인 예수님의 죄목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유다인의 고발로 자신 앞에서 있는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라는 질문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그는 재판장이면서도 재판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피고가 어떤 죄목으로 고발되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이 하신 일에 관한 질문 두 가지를 던집니다. 먼저,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알고 싶어 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18,33.37; 19,39)을 반복할 정도로 빌라도의 관심은 온통 그것에 몰두하여 있습니다. 이 질문으로 인해 ‘예수님의 왕권’이라는 주제가 재판 전체의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정치적 의미가 아닌 신학적 의미로 풀어내십니다. 직접적인 답변보다는 질문을 되돌려주는 방식을 택하여 빌라도가 자신이 한 말의 진실성을 바라보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18,34) 이렇듯 죄수가 재판장을 신문하는 묘한 아이러니가 질문과 뒤엉켜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신원에 대한 질문에서 그분이 하신 일로 질문을 바꿉니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이 질문은 독자에게 그분이 주신 생명의 가르침과 생명의 활동을 반추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처벌받아야 할 범죄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였음을 독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만듭니다. 최고 정치 권력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인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본성과 그분의 사명이 생생하게 계시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쓰인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 역시 그분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는 자신이 하였던 첫 번째 질문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18,37) 요한복음 저자는 이 구절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왕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그분의 사명을 강력히 피력합니다. 그와 동시에 빌라도를 단죄하고 있습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18,37)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렇게 우아한 방법으로 권력 때문에 진리에 눈멀고 거짓에 기울었다며 빌라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왕을 섬기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물으시는 것 같아 괜스레 고개가 떨구어집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성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말씀 안에 머물며 다양한 목소리로 우리를 지배하는 거짓 왕들을 몰아내고 참 왕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글_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202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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