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상식 팩트 체크] 희년에는 로마 성문만 통과해도 직천당이다?

12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聖門)을 열면서 2025년 희년이 시작됐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희년이란 25년마다 돌아오는 거룩한 해인데요. 이 시기에는 특별히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로 모여듭니다. 무려 약 3000만 명의 순례자들이 로마를 방문할 것이라 예상되고 있는데요. 바로 성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도대체 성문이 뭐길래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일까요? 여기서 성문이란 희년에만 열리는 ‘거룩한 문’(聖門)을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문만 통과하면 직천당”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면 3000만 명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 모두 모여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희년에 로마의 성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무조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물론 희년의 가장 중요한 표징인 성문은 ‘천국의 문’을 상징합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사람들이 부채를 탕감 받고 자유를 얻었듯이,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은총을 얻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희년은 구약성경에서 유래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50년마다 한 번씩 축제를 거행했는데, 이때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이 축제에서 유래한 희년을 선포하면서 교회 안에서 희년을 지내게 됐고 5번째 희년부터 성문을 여는 예식이 시작됐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요한 10,9)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성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이 말씀처럼 구원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죄를 버리고 은총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물론 상징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희년의 대사(大赦)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 받지만, 이미 지은 죄에 대한 벌은 갚아나가야 합니다. 이 벌을 면해주는 것이 대사입니다. 대사는 나를 위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돌아가신 다른 분을 위해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문을 통과해야만 희년 대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각 교구가 정한 희년 행사 참여나 순례지 방문, 자비의 활동 등으로도 대사를 얻을 수 있고, 또 희년 중 수도원, 병원, 요양원, 교도소 등에서 장소 이동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며 주님의 기도와 신앙고백, 희년의 목적에 맞는 기도, 희생 봉헌 등을 통해서 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들어가야 할 문은 우리와 아버지 하느님을 이어주시는 ‘문’이신 예수님입니다. 성문은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지요. 희년에 성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성문은 희년에만 열리지만 예수님의 문은 회개하는 이들을 위해 언제나 열려있으니까요.

2024-12-2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주교복이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다가오면 어린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산타 할아버지’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산타 할아버지, 바로 산타클로스는 성탄 전야에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인물입니다. 산타클로스라고 하면 붉은 모자와 붉은 옷, 그리고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를 한 음료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특히 이 음료의 로고 색깔을 떠올릴 수 있도록 산타클로스의 옷을 빨간색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물론 산타클로스는 나라에 따라 묘사되는 이미지가 다릅니다. 러시아 등의 나라에서는 파란 계통의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산타클로스가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19세기 무렵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산타클로스의 그림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원래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를 알려면 ‘원조’ 산타클로스를 찾아야겠습니다. 산타클로스의 원조는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니콜라오 성인입니다. 니콜라오 성인은 4세기경 지금의 튀르키예 남해안에 해당하는 ‘미라’(Myra)라는 도시의 주교였습니다. 성인은 생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자선을 많이 베풀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성인의 전설 중에는 3명의 어린이를 살려낸 일화도 있지요. 이런 이유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의 나라에서는 성인의 축일인 12월 6일 즈음에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풍습이 생겼습니다. 이 풍습은 17세기경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이 풍습을 소개하면서 미국에도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네덜란드어로 성 니콜라오를 신터 클레스(Sinter Claes)라고 부르는데요. 이 말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산타클로스(Santa Claus)가 됐습니다. 앞서 니콜라오 성인이 주교였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산타클로스의 빨간 옷은 주교복을 상징합니다. 음료회사가 산타클로스에게 빨간 옷을 입히기 전에도 이미 산타클로스는 빨간 옷을 입었던 것이지요.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네덜란드의 신터 클레스도 빨간 옷을 입고, 심지어 주교관 형태의 빨간 모자를 쓰고, 지팡이도 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니콜라오 성인이 ‘주교’였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이콘이나 성화에서도 니콜라오 성인은 붉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날 이 빨간 옷의 산타클로스는 성탄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됐고, 성탄에 떠오르는 색깔이라고 하면 역시 빨간색을 빠뜨릴 수 없게 됐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홍색 옷은 추기경이 입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추기경을 ‘홍의주교’(紅衣主敎)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붉은 색은 교회에 봉사하기 위한 피(血), 바로 순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거리를 수놓은 빨간색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떠올리나요?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다시금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2024-12-15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예수님이 없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거리를 수놓는 특별한 장식이 있습니다. 형형색색으로 아름답게 꾸민 크리스마스트리입니다.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트리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담긴 장식입니다. 그래서 신앙 유무를 떠나서 크리스마스트리의 우듬지에는 별 모양 장식이 달리곤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마구간 위에 떠 있었다는 별(마태 2,2)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에는 별은 있지만, 별 아래 태어나 계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종종 나무 아래에 구유 등의 성물을 두기도 합니다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아기 예수님의 성상 등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원래는 계셔야할 예수님이 왜 보이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크리스마스트리가 너무 상업적으로 이용돼서 예수님을 모시는 걸 잊어버린 걸까요? 답변을 먼저 드리자면,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아기 예수님 성상을 두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 푸른 잎을 지닌 나무가 그 자체로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언제부터 두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16세기경 독일 남서부 지역에 성탄을 앞두고 나무를 장식한 기록 등에서 크리스마스트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낙원극(樂園劇)을 공연하는 전통이 있었는데요. 낙원, 즉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하는 이 낙원극 중에는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창세 2,9)를 나타내는 상록수에 과자를 달거나 촛불로 꾸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에덴동산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는데요. 바오로 사도는 연결고리에 관해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의 ‘생명의 나무’는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 나무’(1베드 2,24)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열매를 장식합니다. 첫 번째로 빨간 구슬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죽음이 찾아왔음을 기억하게 해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하얀 구슬은 ‘생명의 빵’(요한 6,22-59)이신 예수님의 몸, 성체를 상징하는 장식입니다. 이런 크리스마스트리의 풍속은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전 유럽으로 퍼졌고, 미국으로도 전파됐습니다. 1891년에 처음으로 워싱턴 백악관에도 크리스마스트리가 전시됐고, 이제는 종교를 넘어 세계의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대표적인 성탄 장식이 됐습니다. 올해 성당과 거리 곳곳에 서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볼 때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의 나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십자 나무’가 돼주신 아기 예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요.

2024-12-08

[교회 상식 팩트 체크] 교무금은 십일조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대림시기가 왔습니다. 대림시기하면 아무래도 성탄을 위한 여러 준비가 떠오르는데요. 우리가 준비해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교무금 책정입니다. 교무금은 ‘교회 유지를 위해 신자들이 의무적으로 교회에 내는 봉헌금’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신 분들은 교회 유지를 위해 의무적으로 납부하는 예물이라 하면 떠오르는 규정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10분의 1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규정인데요.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줬고(창세 14,20 참조), 야곱도 하느님께 10분의 1을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창세 28,22 참조). 이 전통은 구약성경에 십일조 규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며 언급(루카 11,42 참조) 하시지요. 십일조는 사제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되곤 했습니다. 교회법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가 하느님 경배, 사도직과 애덕의 사업 및 교역자들의 합당한 생활비에 필요한 것을 구비하도록 교회의 필요를 지원할 의무가 있다”(222조 1항)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무금만이 이 활동에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외국에는 교무금 제도가 없습니다. 유럽 국가에서는 ‘종교세’의 형태로, 미국 등의 나라는 기부금이나 주일헌금으로 교회 운영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는 “신자들은 주교회의나 교구의 규정에 따라 교무금, 주일헌금, 기타 헌금과 모금 등으로 교회 운영 활동비를 부담해야 한다”(165조)고 밝히고 있는데요. 교무금만이 아니라 여러 헌금 등도 교회 운영을 위해 활용될 수 있습니다. 또 교회는 교회 운영비 외에도 2차 헌금이나 모금 등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성금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무금과 십일조가 동일하다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교무금은 우리 신앙선조들의 공소전(公所錢)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부족하던 시절, 공소에 모여 기도하던 신자들이 공소와 공소공동체 운영을 위해서 모았던 기금입니다. 이 전통이 1931년 ‘전조선지역 시노드’를 통해 교무금 제도로 정착됐습니다. 교무금이라는 제도에는 자발적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제 없이도 신앙공동체를 꾸려나갔던 우리 신앙선조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던 마음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무금 액수를 규정하지도 않고, 미납한 신자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사정이나 수입 감소로 교무금을 내지 못하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만 자신의 수입에 10분의 1에서 30분의 1 정도를 책정하자고 제안합니다. 적어도 한 달 중 하루의 수익은 하느님께 봉헌하자는 취지입니다. 다만 교무금은 수입을 기준으로 책정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쓰고 나서 남은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입 즉 하느님께 받은 것 중 일부를 봉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4-12-01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제2경전은 외경(外經)이다?

2005년 「성경」이 발행되기 전까지는 「공동번역 성서」를 썼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성경」과 목차가 조금 다른데요. 몇몇 성경들을 ‘제2경전’이라는 목록에 따로 모아둔 점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신자분들은 이 제2경전을 ‘외경'(外經)이라 부릅니다. 외경이라 하면, 한자로는 ‘성경(經)의 바깥(外)’이라는 의미인데요. 그렇다면 제2경전은 성경이 아닌 걸까요? 아니면 성경이더라도 조금 덜 중요한 성경인 걸까요? 제2경전은 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그리고 에스테르기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에 해당하는 성경입니다. 이 성경들은 구약성경에 해당하는데요. 초대 교회 시기에는 두 종류의 구약성경이 있었습니다. 먼저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히브리어로 된 성경과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칠십인역’이라 부르는 그리스어 번역본 성경이었습니다. 그리스어 성경을 ‘칠십인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경 번역에 얽힌 전설 때문입니다. 기원전 3세기 경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스라엘에서 70명(혹은 72명)의 번역가를 선출해 구약성경을 번역했는데, 이들이 각각 번역한 성경들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이 번역됐다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이 칠십인역에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는 성경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편지나 복음서를 그리스어로 작성했습니다. 이때 구약성경도 인용했는데 대부분이 칠십인역이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어 생활권에 살았기 때문에 칠십인역이 구약성경의 기준이 됐고 제2경전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그리스도교 교양」 등의 책에서 성경 목록에 제2경전도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제2경전은 히브리어 성경이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논란이 있었습니다. 원래 없던 성경을 후에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지요. 특히 개신교가 갈라질 당시 개신교는 이 의혹을 내세우며 제2경전을 외경으로 보고 성경에서 제외했습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1546년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수용해야 할 성경과 성전에 관한 교령」으로 교회가 오래 전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여 온 제2경전을 포함한 신·구약성경을 정경(正經)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947년에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사해 인근 쿰란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쓰인 히브리어 구약성경 사본들이 발견된 것인데요. 이때 발견된 성경 중에는 그동안 토빗기나 집회서 같은 제2경전들도 있었습니다. 제2경전도 히브리어에서 번역된 성경이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이었습니다. 제2경전은 외경이 아니라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정경입니다. 그렇기에 미사 전례 중에도 제2경전 역시 봉독됩니다. 교리면에서도 제2경전에는 천사, 연옥 등 교회의 여러 교리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제‘2’경전이라 불린다고 중요도도 두 번째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2024-11-24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미사의 공식 신경은 사도 신경이 아니다?

우리는 주일미사마다 신앙의 핵심을 표현한 신앙고백문, 신경(信經)을 바치며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경이라 하면 먼저 ‘사도 신경’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사도 신경을 외우고, 또 많은 본당에서 미사 중 사도 신경을 바치곤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참 친숙한 신경입니다. 그런데 미사의 공식 신경은 따로 있다는 사실 아시나요? 바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교회의 공식 신경입니다. 사도 신경과 비교해 보셨다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더 ‘길다’는 점을 발견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긴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곰곰이 살펴보신다면 다른 내용들은 대체로 비슷한 반면, ‘예수님’과 ‘성령님’에 관한 내용이 특별히 더 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와 그 다음 열린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가 열릴 당시에는 예수님과 성령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공의회에서는 예수님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점을, 콘스탄티노폴리스공의회에서는 성령님이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는 주님이라는 점을 천명하면서 우리의 신앙,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분명히 고백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믿음은 가톨릭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의 믿음이기에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다른 그리스도교들에서도 고백하는 신경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이렇듯 “초기의 두 세계 공의회에서 나온 신경”인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큰 권위를 가진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5항) 우리 신앙선조들이 사용하던 「천주성교공과」의 미사경의 경우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만 수록돼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미사 경본에도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대신에, 특히 사순 시기와 부활 시기에는, 이른바 사도 신경 곧 로마교회의 세례 신경을 바칠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신경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한 신경인데요, 사도들의 숫자처럼 12가지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라고 사도 신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95항) 사도 신경 역시 오랜 역사 속에서 교회에 내려온 중요한 신경입니다. 그러니 미사 중 사도 신경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미사의 공식 신앙고백문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단지 길다는 이유로 사도 신경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새 미사전례서 총지침(2002)에 따른 간추린 미사전례지침’)

2024-11-1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다?

“연도가 났다.”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많은 분들이 “이 말을 왜 모르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아마 비신자들에게는 마치 암호처럼 알쏭달쏭한 말이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연도(煉禱)라고 불러왔습니다. 연도는 연옥의 영혼을 위해 바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온 말인데요. 지금은 ‘위령기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연도가 났다”는 말은 주로 ‘상이 났으니, 위령기도를 바치러 가야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어느 신자의 집에 상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연도가 났다”고 서로에게 알립니다. 신자들은 이렇게 여러 신자들과 함께 빈소를 찾아 빈소에 ‘연도 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요. ‘연도 소리’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의 위령기도, 연도는 보통 선창자와 후창자가 주고받으며 우리 고유의 구성진 노랫가락에 맞춰 바칩니다. 우리 소리에 담긴 기도문에 어쩐지 더 정감이 가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토착화의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연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통입니다. 물론 서양에서도 위령기도를 노래로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도는 단순히 노래로만 바치는 위령기도가 아니라 보편교회의 기도가 우리 문화와 정서, 전통에 잘 융화된 우리 고유의 기도입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렇게 위령기도에 우리 가락을 붙여 연도를 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미 박해시대부터 연도가 자리 잡았다고 추정됩니다. 박해시대 우리 선조들은 신자 집에 장례가 나면 밤을 새워 기도해 줬다고 하는데요. 이때 연도를 바쳤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처럼 오랜 기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연도는 각 지역의 특색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가락으로 노래해 왔는데요. 1991년 연도의 가락이 오선악보에 수록됐고, 2003년 한국교회 차원에서 「상장예식」을 마련하면서 전국 모든 신자들이 같은 가락으로 연도를 바칠 수 있게 됐습니다. 왜 신앙선조들은 연도를 노래로 바쳤을까요? 신앙선조들이 상장례 때 사용한 「텬쥬셩교례규(천주성교예규)」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텬쥬셩교례규」에는 “왜 소리 높여 노래하며 연도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노래하는 소리로써 내 생각을 들어 주께 향하게 해 내 마음을 수렴하게 하고 더욱 구원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밝히고, 또 “우리가 죽음의 슬픔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슬픔은 희망 없는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르기 때문”이라 전합니다. 혹시 ‘연도를 노래로 바치면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힘들다’고 불편해하신 적 없으신가요? 하지만 가족이 세상을 떠나 슬픔에 잠겨있을 때, 빈소에서 이어지는 연도 소리는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인에게 연도는 신앙 공동체가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부활을 향한 믿음과 희망을 노래하는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이번 위령 성월이 가기 전에 누군가를 위해 한 번쯤 연도를 바치시면 돌아가신 분께도, 또 우리 자신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2024-11-10

[교회 상식 팩트 체크] 연미사는 위령미사가 아니다?

‘연미사’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옛 말이라서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은 들어보지 못하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당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전에는 성당에 성가를 표시하는 안내판에 ‘연’, ‘생’ 등으로 미사 지향을 표시하곤 했습니다. 여기서 연(煉)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생(生)은 ‘산 이를 위한 미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연미사와 위령미사는 다르다”고 말씀하시곤 합니다. 위령미사도 역시 죽은 이를 위해 드리는 미사일 텐데 무엇이 다르다는 것일까요? 먼저 ‘연미사’와 ‘위령미사’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미사라는 말은 박해 시대부터 사용하던 말입니다. 박해 시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편찬해 1880년 출판된 「한불자전」에는 연미사를 “연옥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위한 미사”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연옥은 죽은 신자들이 천국에 이르는 거룩함을 얻기 위해 정화 과정을 거치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신자들의 통공을 믿는 우리는 연옥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대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미사인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위령미사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미사”라면서 “위령미사와 연미사는 본래 동일한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연미사는 위령미사의 옛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연미사와 위령미사는 다르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아마 죽은 이를 위한 미사 전례와 죽은 이를 지향으로 하는 미사의 차이점을 두고 하신 말씀일 듯합니다. 앞서 예전에는 안내판에 ‘연’이라고 표시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는 미사 지향을 의미합니다. 교회법은 “사제는 산 이들이거나 죽은 이들이거나 누구를 위하여서든지 미사를 바쳐 줄 자유가 있다”(제901조)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신부님께 돌아가신 분을 미사 지향으로 부탁한다면 그 신부님은 그 돌아가신 분을 위해 미사를 바칩니다. 그러나 미사 지향이 연미사, 즉 죽은 이를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전례가 ‘죽은 이를 위한 미사’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본당에서는 연미사여도 그날의 전례에 따라 미사를 봉헌하곤 합니다. 「미사 경본」에는 ‘죽은 이를 위한 미사’로 죽은 이를 위한 고유한 기도문과 독서가 따로 마련돼 있습니다. 미사 지향은 신부님 개인이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바치는 것이라면, ‘죽은 이를 위한 미사’는 전례를 통해 미사를 드리는 공동체 전체가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바친다 것이 다릅니다.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어떤 지체를 위해 영신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다른 지체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미사 경본 총지침」 379항) 돌아가신 분들도, 살아있는 우리도 모두 예수님을 통해 연결된 지체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연미사, 위령미사를 포함해 모든 미사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지체인 우리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잔치입니다.

2024-11-03

[교회 상식 팩트 체크] 핼러윈은 원래 교회 축일이다?

가정에 어린이가 있으시다면, 핼러윈 행사를 챙겨보신 일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은 이날 유령이나 캐릭터 등으로 분장을 하며 사탕을 나누는 활동을 하곤 합니다. 청년들 사이에서도 핼러윈은 널리 퍼졌는데요. 청년분들 중에도 이날 또래들과 파티를 열어본 일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핼러윈하면 호박머리를 한 유령이나 귀신, 괴물 같은 다소 공포스러운 것들이 떠오릅니다. 또 과자나 사탕 같은 간식들도 생각나지요. 그러다보니 아주 세속적인 행사라고만 여겨지기 쉬운데요. 실은 핼러윈은 교회 축일에서 나온 날입니다. 핼러윈이 교회 축일에서 온 날이라는 것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핼러윈(Halloween)은 올 핼러우스 이브(All Hallows’ Eve)를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이브’는 잘 아시다시피 크리스마스이브처럼 전야를 뜻하는 말이고요. 핼러우(Hallow)는 ‘성인’(聖人)을 뜻하는 말입니다. 핼러윈은 바로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를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 전날인 10월 31일에 핼러윈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사실 10월의 마지막 날은 고대 영국과 아일랜드 지역에서 생활하던 켈트족이 한 해를 마무리하던 날이었습니다. 켈트족들은 이때 사윈(Samhain)이라는 큰 축제를 지냈는데, 축제기간에 죽은 이들이 찾아온다고 생각했고, 죽은 이들에게 해를 입지 않도록 가면을 쓰거나 귀신으로 분장하곤 했다고 합니다. 켈트족 국가들이 가톨릭교회를 받아들이자,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 핼러윈을 지내며 켈트족들이 오랜 풍습을 교회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사윈이 죽은 자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려는 축제였다면, 핼러윈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회의 핼러윈은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지 않는 개신교가 널리 퍼지면서 사라졌는데요.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지역 출신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핼러윈 풍습을 가져간 것이 널리 퍼지면서 오늘날과 같은 핼러윈으로 변화했습니다. 핼러윈의 배경이 된 모든 성인 대축일을 시작으로 교회는 특별히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는 시기를 보냅니다. 모든 성인 대축일 다음날인 11월 2일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고, 11월 1~8일 교회 묘지 등을 찾아 전대사의 조건을 채우면, 죽은 이에게 양도할 수 있는 특별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월 전체는 위령 성월이지요. 이처럼 핼러윈은 특별히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시기와 이어지는 날입니다.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축제처럼 변한 핼러윈이지만, 지난해와 올해 핼러윈은 그리 떠들썩하지 않은 듯합니다. 많은 분들이 2022년 10·29참사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기억하고 추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핼러윈은 핼러윈의 본래 의미를 생각하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아보면 어떨까요?

2024-10-27

[교회 상식 팩트 체크] 묵주 기도 끝에는 꼭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예수님,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지옥 불에서 구하시고,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많은 분들이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한 단의 마지막, 바로 영광송 뒤에 이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구원송’이라고도 부르는 ‘구원을 비는 기도’입니다. 보통 묵주 기도를 배울 때 이 기도를 같이 배우곤 하는데요. 그래서 평소에 묵주 기도를 많이 바치는 분들 중에는 묵주 기도를 바칠 때가 아닌데도 영광송 후에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 저희 죄를…”이라고 외우다가 ‘아차!’하는 경험을 하신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 합니다. 구원을 비는 기도처럼 영광송 다음에 오는 이 기도를 ‘짧은 마침 기도’라고 부르는데요. 짧은 마침 기도는 구원을 비는 기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바쳐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는 묵주 기도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짧은 마침 기도를 곁들이는 것을 권장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짧은 마침 기도는 지역 관습에 따라 다양하다”면서 “그러한 기도의 가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면서, 신비의 묵상이 고유한 열매를 맺도록 그 신비를 기도로 마무리한다면, 신비의 관상이 더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다양한 짧은 마침 기도 중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고 있는 것일까요? 구원을 비는 기도는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나타나셨는데요. 성모님은 전쟁의 종식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 기도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묵주 기도의 모후’라고 칭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이 발현 중 세 번째 발현이었던 7월 13일에 구원을 비는 기도를 알려주시며 묵주 기도의 한 단을 마칠 때마다 바치도록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비는 기도는 ‘파티마의 기도’(Fatima Prayers)라고도 불립니다. 파티마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확산되면서 구원을 비는 기도도 퍼져나갔고, 우리나라에서도 구원을 비는 기도가 널리 퍼져 신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주교회의 차원에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신심과 함께 기도문이 번역돼 전해지다 보니 구원을 비는 기도에 의역도 있고, 또 기도문의 문구가 달라 혼란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주교회의는 2011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현재의 기도문으로 통일했고, 2017년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구원을 비는 기도를 「가톨릭 기도서」에 싣기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의역은 아직 남아 있는데요. 구원을 비는 기도의 라틴어 기도문을 원문과 비교해 보면 ‘모든 영혼들’을 ‘연옥 영혼’으로, ‘특별히 당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영혼’을 ‘가장 버림받은 영혼’으로 의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바칠 때는 통일된 기도문으로 바쳐야 하겠지만, 본래 기도문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서 바친다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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